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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혼자 살 수 없는 존재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사는 존재, 사람과의 관계속에서 인간이란 존재가 존재한다. 뱀파이어는 피를 빨아먹고 사는 존재다. 먹이의 목을 물고 피를 빨아 먹어야 생존이 가능한 존재, 그런 뱀파이어가 채식주의자가 된다. 무슨 이유로 뱀파이어는 채식주의자가 되었을까. 인간은 폭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사회적인 폭력은 국가, 자본, 학교, 가족 등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자본주의 사회를 살고있는 우리는 다른이를 먹어치워야만 자신이 살 수 있는 식인주체로 살아가고 있다. 그런 인간이 폭력의 시대에서 공존을 모색하며 살아 남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페니미즘의 궁극적인 목표는 아이러니하게도 페미니즘의 죽음이다. 이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닌 변태가 되어 공존의 시대를 이어간다. 역설적이게도 자신이 한 행위가 의도와 다른 결과늘 낳는다는 조안 스콧의 '제공할 것이라고는 역설 뿐' 일지도 모르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의도치 않은 행윅 타자를 고통으로 몰아갈 수도 있다. 나를 타자의 시선에서 살펴볼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수상한 시대, 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 듯한 착각마저 불러 일으키는 시대에 페니미즘 또한 죽었다는 소문이 들린다. 모든 가치가 자본(화폐)으로 환원되는 시대에 페니미즘은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가. 현 시대는 자본(화폐)이 만연한 폭력의 시대로 인간은 타자와의 공존을 부인할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책의 제목처럼 식인주체 '뱀파이어'가 피를 먹지 않고 채식을 하듯, 식인주체인 인간 역시 공존을 모색할 때이다. 폭력의 시대, 공존이라는 유토피아가 쉽지은 않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자본)화폐)과 폭력의 시대에 좌절보다는 타자, 환대, 주름, 문학, 유머, 일상 등의 가치를 통해 우리는 공존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두꺼운 쪽수만큼 다양한 관점에서의 공존 모색 방법이 흥미로웠다. 공존의 가치는 공존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드러난다고 한다. 피를 먹지 못하는 뱀파이어야말로 자기 소멸의 충동을 육식 거부라는 은유를 통한 윤리학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폭력의 시대, 공존의 가치를 찾는 것은 어렵다. 뱀파이어가 채식주의자가 되듯이. 사회전반적인 시각서 접근하는 방식이 신선하면서 깊이있게 파고드는 지식에 책을 읽기 조금 힘들었다. 두 세번은 읽어야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좀 더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듯 싶다. 소수자(페니미즘)의 편에서 폭력의 시대에 살아남는 방법들이 생각보다 다양했다는 사실이 타자와의 공존함이 떠도는 구름을 잡는 것 만큼 터무니 없는 것만은 아닐거라고 위로가 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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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가 채식을 한다? 이건 이율배반적이고 존재부정이다. 낮에는 관 속에서 잠을 자고 밤이 되면 박쥐나 늑대로 변신해 가면서 생명의 상징인 피를 빨아대는 영생불멸의 무서운 흡혈귀가 양순한 소처럼 풀을 뜯어 우물거리는 모습은 개그 프로의 소재로나 쓰일 법한 이야기다. 그런데 이게 단순히 웃긴 얘기로 끝나지 않는 이유는 ‘채식주의자 뱀파이어’라는 모순이 내 앞에 놓인 엄연한 현실에 대한 은유이기 때문이다. 한 국가를 지배하는 것도 모자라서 전세계를 지배권에 두고 확장된 신자유주의는 누가 뭐라고 해도 ‘승자독식’의 이데올로기다. 뱀파이어와 다르지 않다. 2등조차 기억하지 않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뒤쪽부터 세는 것이 빠른 사람들은 주변인도 되지 못하는 위치로 내몰린다.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빈곤과 차별, 배제와 학대로서, 마치 뱀파이어의 희생물처럼 말라 죽을 때까지 피를 빨리고 또 빨린다. 더 무서운 것은 뱀파이어에게 피를 빨리면 역시 뱀파이어가 되는 것처럼 신자유주의적 자본에 피를 빨린 우리도 무의식중에 이런 빈곤과 차별을 따라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점이다. 식인은 원시인의 풍습만이 아니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하에서 우리는 ‘식인주체’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조금이라도 인간다운 삶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자기부정을 통한 공존이라는 존재론적 문제가 제기된다. 페미니즘은 어떨까. 페미니즘 역시 자기부정을 통한 생존의 문제에 당면해 있지 않은가. 한국사회에서 페미니즘은 뿌리깊은 가부장적 문화와 성차별에 대항하여 투쟁하면서 존재 영역을 넓혀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때는 어쩔 수 없이 제도권 밖에서, 들판에서 외치던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지금은? 호주제는 폐지되고 부부별산제도 도입되었다. 공직에 여성할당제가 도입되었고 어떤 분야에서는 남성할당제의 도입이 거론될 정도로 제도적 성평등이 진전되었다. 여성가족부의 존재는 여성문제의 국가적 의제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정부의 예산편성에서부터 사업의 집행과 평가에 이르기까지 ‘성인지적 관점’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 국책연구기관인 여성정책연구원과 여성단체들의 주장이다. 그런데 오히려 [채식주의자 뱀파이어]에서는 ‘페미니즘의 죽음’이 이야기되고 있다. 왜 그럴까? [채식주의자 뱀파이어]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큰 흐름은 ‘페미니즘의 죽음’이다. 물론 다양한 처지와 조건을 가진 사람들과의 공존을 통한 페미니즘의 부활 또는 재발견도 이 책의 중요한 주제이긴 하다. 그렇지만, 부활이나 재발견이란 결국 죽음 또는 상실이 전제되어 있는 개념인만큼, 책의 논의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먼저 저자가 왜 ‘페미니즘은 죽었다’라는 용감한(?) 선언을 하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페미니즘의 죽음은 이중적 함의를 가진다. 어떤 사회운동이든지 지향하는 목적이 달성된 이후 그 운동이 소멸한다면(즉, 죽음을 맞는다면) 그야말로 바람직한 일이다. 소위 ‘발전적 해체’란 이럴 때 써먹는 말이다. 그래서 저자도 서문에서 지적한다. 여성억압이 없는 사회가 되어 페미니즘이 용도 폐기되었다면 그 죽음을 경축해야 마땅하다고. 하지만 실제로 이런 바람직한 일은 거의 없다. 오히려 원래의 목적도 달성하지 못했는데 운동의 성격은 자꾸만 변질되어 버리고, 사람들에게서 잊혀지면서 ‘살았다고 하나 실상은 죽은 자’가 되어 버리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다. 이런 죽음이야 말로 통탄해 마지않을 수 없는 죽음이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지금 이야기되는 페미니즘의 죽음이 경축할 만한 전자가 아니라 통탄해야 할 후자라는 점이다. 지금의 페미니즘이 통탄할 정도로 원통한 죽음을 당했다니... 너무 가혹한 말인가? 우리나라의 여성운동은 그동안 많은 제도적 성과를 달성했다. 물론 아직 가야할 길이 남아 있지만, 짧은 여성운동의 역사와 지난했던 과정을 감안한다면 지금까지의 성과들이 평가절하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따라서 단순히 과거의 성과가 미흡했다는 이유 때문에 페미니즘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페미니즘의 죽음은 성과의 미흡이 아니라 성과의 고착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페미니즘의 중병(重病)은 그 운동이 일정한 기틀을 잡고, 국가적으로 페미니즘 담론이 수용되면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그리고 중병으로 허약해진 페미니즘은 모든 것을(젠더라는 담론조차도) 물신화하고 자본화하는 신자유주의와, 그 속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계급적 대립구도 속에서 치명타를 맞는다. [채식주의자 뱀파이어]를 읽으면서 저자가 은연중에 또는 직접적으로 페미니즘의 죽음의 원인으로 꼽고 있는 것이 ‘국가주의 페미니즘’으로의 변화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가족부의 존재와 여성문제의 국가적 의제화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여성의 지위 신장이라는 그럴 듯한 명분과 절차적이고 양적인 성평등 담론 속에 ‘국가’란 단어가 의미하는 절대적 권력관계와 제도가 의미하는 합리가 어느 틈엔가 페미니즘을 국가주의 속에 편입시킨다. 시민사회의 발전이 서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약한 반면 공동체의식은 강한 우리나라의 경우 국가가 모든 것을 책임지고 해결해 주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다. 이게 바로 국가에 절대적 권한을 부여(혹은 반납)해 버리는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의 핵심인데, 여기서 국가는 한 가족의 가부장으로 대치되는 개념이다. 따라서 여성운동을 비롯한 제반 사회운동이 국가제도화 된다는 것은 이제 여성들이 겪는 문제들, 경계인과 주변인들이 겪는 문제들의 해결책은 모두 가부장인 국가의 손에 넘어간 것이다. 이제 여성운동의 존재 의미는 단 한 가지만 남는다. 가부장인 국가가 이런 일들을 잘할 수 있도록 여러 좋은 대안을 마련하여 국가에 제공(혹은 헌납)하고 그 하회를 기다리는 것이다. 아!!! 물론 그 대가도 있다. 정부보조금이라는 떡고물. 오히려 페미니즘 운동은 국가에 대해 어려움과 고통을 돌보는 자상한 아버지의 상을 만들도록 기여하고 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페미니즘은 그렇게 국가에 편입되었고, 또 국가로부터 배신당했다. 문제는 여성운동이 국가의 배신에도 변변히 저항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지금 당장 생각나는 MB정부의 여성관련 정책들을 나열해 보자. 여성부 축소와 폐지 논의, ‘퍼플잡’이라고 불리는 유연근무제도 도입과 일-가정양립, 여성 관련 부처에 가족과 청소년 업무가 붙은 상황, 저출산 사회에서 적정인구에 대한 고민없이 무조건적으로 양산되고 있는 출산장려운동 등등. 아! 그리고 하나 더 있다. 촛불집회를 비롯한 반정부 불법(!!!) 집회에 참석하지 않아야만 정부보조금을 줄 수 있다는 방침. 여성운동의 영역을 제한하고, 여성의 노동력을 가족에 얽어매려 하며, 저출산의 책임이 여성에게 귀결되는 이 현실과 정책들에 대해 과연 제도화된 여성단체들이 어떤 목소리를 내고 있는가? 국가주의 페미니즘으로의 편입은 종국적으로 계급적, 정치적 이해관계에 복무하는 페미니즘으로의 전락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그런 점에서 [채식주의자 뱀파이어]에 제시된 사례인 가족과 일자리에 대한 백인 중산층 여성운동가들의 관점과 유색인 하층 여성운동가들의 관점의 차이가 시사하는 바는 크다. 중산층 여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가족은 그들의 사회적 진출을 속박하는 족쇄로 작용한다. 따라서 그들은 가족구조의 해체와 여성의 사회진출을 주장하게 된다. 물론 가족이라는 사회적 제도에 대한 문제제기로 이들의 주장은 의미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유색 하층 여성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용감하게(?) 가족의 해체를 주장하는 것은 상류계급에 속한 백인 여성들의 배부른 푸념이자 자신들의 꿈을 산산조각내는 위험천만한 발상일 뿐이다. 상류층이 꺼려하는 사회의 질낮은 일자리에서 해고의 위험을 절박하게 감수하며서도 잠시의 휴식도 없이 노동해야 하는 이들에게 안정적인 소득을 가진 남편 및 사랑하는 아이들과의 가족생활은 해체해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향해야 할 바이다. 동일한 사회적 현상 또는 사회적 제도에 대해 계급적 관점 차이는 이렇게 크다. 성매매에 대한 입장도 이런 복잡한 계급적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 어떤 이들에게 성매매 여성이 그 자리까지 전락하게 된 ‘신성한 노동에 대한 남성 독점주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특히 현대 자본주의가 성립되는 과정에서 국가와 사회가 배제 또는 도구화한 여성들이 집창촌을 형성한 사실에는 눈을 감는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합법적인 성, 그러니까 결혼과 가족의 구조 속에 있는 성일 뿐, 그 외에는 인정되지 않는다. 전형적인 순결주의 또는 가족중심주의적 입장이다. 그리고 그들은 가족중심주의의 가부장인 국가의 개입에 박수를 보내고 강력한 단속을 지지한다. 그 속에 숨은 국가의 폭력, 집창촌 지역의 개발을 통한 개발이익의 조장이라는 자본의 폭력에는 눈을 돌리지 않는다. 자. 그럼 이제 어려운 문제가 남는다. 사실 이 문제는 비단 페미니즘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사회운동의 문제이기도 하다. 질문 자체는 간단하다. 제도화된 페미니즘을 극복하고 초심으로 돌아가 부활 또는 재발견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여성운동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까? 질문은 간단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 이제 우리의 삶은 가정, 교육현장, 노동현장 등을 가리지 않고 사소한 것 하나조차도 신자유주의의 물신화로부터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생존을 위해서 경쟁력을 갖추고 스펙을 높여야 하며, 다른 사람을 밟고 이겨내야만 한다는 생각이 부지불식간에 우리의 머리속을 지배하고 있다. 이렇듯 강력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맞서서 페미니즘을 재탄생시키기 위하여 [채식주의자 뱀파이어]에서 제시한 방법은 ‘성찰’과 ‘공존’이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주체와 타자의 분명한 구분이며 이것은 차별과 배제의 논리를 낳는다. 나와 남 사이의 경계를 확실히 그은 후, 그 경계 너머의 대상은 뱀파이어의 희생물이 된다. 그래서 나 자신이 뱀파이어가 되어 다른 사람의 피를 빨아 생존하거나, 타인을 내 생존의 걸림돌 또는 이용물로 삼아 잡아먹는 식인주체로서 살아가지 않았나 반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나와는 좀 더 떨어진 위치로 시선을 옮겨 자신을 타자해 보고, 경계를 넘어 내게로 들어오는 타자들을 적대시하는 것이 아니라 환대하고, 폭력이 아니라 포용으로 대하고, 그들과 함께 유머를 나누고 문화와 예술을 통해 인생을 풍부하게 하면서 일상의 뿌리를 공유한다. 이게 바로 ‘채식주의자 뱀파이어’의 삶이다. 천성적으로 생명의 피를 빨아야만 생존할 수 있는 뱀파이어에게 채식은 자기 존재의 부정이다. 빈혈에 시달리면서도 허기를 채식으로 달래는 뱀파이어의 모습은 아이러니하지만 완전히 불가능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 [채식주의자 뱀파이어]의 주장이다. 물론 나는 저자의 의견에 동의한다. 나를 돌아보고 타자들과 공존하는 것의 가치를 부정할 수 없다. 여기에 내 생각을 짧게 덧붙여보고자 한다. ‘앞으로 페미니즘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저자의 답을 들었으니 이제 틀리든 맞든 내 답안지를 제출하는 것이 좋은 책을 읽은 독자로서의 의무가 아닌가 한다. 앞에서 페미니즘의 죽음의 근거로 국가주의로의 편입과 제도화된 페미니즘의 모습을 지적하였다. 그렇다면 페미니즘을 되살리는 길은 국가주의로부터의 탈피와 생명력있고 자유로운 원래 모습의 재발견이 될 것이다. 내가 페미니즘에 바라는 첫 번째는 타자에 대한 환대와 공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연대’의 관계맺음과 운동으로의 발전이다. 함께 공존하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변화시키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버스나 지하철에 몸이 불편한 장애우가 탔을 때 일어나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개인적 수준의 공존이라면, 장애우들의 이동권을 위해서 함께 잘못된 것을 바꾸는 일에 참여하는 것은 페미니즘 차원의 연대이다. 물론 누가 타든 말든 엉덩이 붙이고 무관심하게 앉아 있는 사람도 많은 것이 현실이니 공존만으로도 의미가 있겠지만, 페미니즘의 외연을 확장한다는 측면에서 사회의 주변으로 밀려난 이들의 목소리를 함께 대변하고 함께 그들의 삶을 바꾸는 일에 목소리를 높이고 참여해 주기를 바란다. 연대란 것은 여성과 남성을 나누어 양자를 상호대립적으로 보게 하는 관점의 지양을 의미하기도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군필자에 대한 가산점을 둘러싸고 남성들과 여성들의 감정섞인 이전투구는 페미니즘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다. 분단과 이데올로기 대립 상황에서 2년 내지 3년의 청춘을 군대에 바치는 것은 신성한 것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을 모두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의 피해자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단체들이 군가산점을 주느냐 마느냐의 문제에만 매몰되는 것은 무척이나 안타깝다. 평등의 관점에서 가산점 폐지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동시에 우리 사회가 신성시하고 있는 군대의 환상을 깨뜨리는 일에 남성과 여성이 연대해야 한다. 그건 구체적으로 국민개병제의 모순을 지적하고 모병제로의 전환과 군대내 인권과 안전의 확보를 함께 요구하는 것이다. 또 한가지 바라는 모습은 국가주의와 계급적 이해관계를 뛰어 넘는 페미니즘이다. 이와 관련해서 여성운동 단체들이 최근의 저출산 현상과 관련하여 정부가 내놓고 있는 여러 가지 출산지원정책과 여성가족부의 퍼플잡(purple job, 유연근무제도)에 대한 입장을 어떻게 가지고 있는지 무척이나 궁금하다. 일과 가정의 양립이란 것은 여성 입장에서 두 가지 위험성을 가지는 개념이다. 무엇보다 육아를 전적으로 여성의 몫으로 치환시키며, 또한 여성의 일-가정 양립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도입되는 유연근무제가 단순히 보육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체 노동현장에 적용되는 것으로 변질될 우려가 커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여성경제활동 참가율은 OECD 국가들에 비해 매우 낮은 수준이고, 그 나마 경제활동이 비정규직, 임시직의 ‘질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자본 입장에서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가 임신 또는 출산하여 산전후휴가나 육아휴직을 사용하려 할 때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내가 이윤율을 최고로 높이고자 노력하는 기업가라면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에게는 해고 또는 잘해야 무급휴직을 제안하고, 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에게는 최대한 근무시간과 임금을 줄인 후 그 자리를 비정규직으로 대체시키겠다. 그러면 인건비 절감 효과와 생산성 증대 효과를 동시에 얻을 수 있으니까. 지금 정부의 퍼플잡 정책에서는 이와 같은 노동시장의 재편에 대한 어떤 보호장치도 발견하기 힘들다. 국가의 발전을 위해서 정말 여성들이 아이들을 많이 낳아야 하는가? 그리고 가정에서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을 많이 가지기 위해서 근무시간을 줄이고 일자리를 나눈다는 명분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를 양산할 위험성이 있는 정책을 받아들이는 것이 옳을까? 그럼 어떻게 여성의 가정과 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국가주의와 계급적 이해관계를 뛰어넘어야 할 페미니즘에서 반드시 고민해 봐야 할 문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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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란 무엇인가?
'채식주의자 뱀파이어'의 저자는 MB 정부에 들어와서 여성부는 차라리 없어지는 것만도 못한 기구로 전락했다고 말하며 모든 가치의 기준이 돈이 되는 현실에서 페미니즘의 대안적 가치를 모색하고 고민하자고 한다.
1, 2부로 나누어져 구성된 14장의 주제들은 단지 여자만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솔찍히 너무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있어 무엇을 어떻게 정리해야할지 엄두가 안난다.
이 책을 읽으며 제일 많이 생각났던 것은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이었다.
돈이 모든 가치의 기준이 되고, 뚱뚱한 여자는 죄인이 되며, 일하는 여성에게 슈퍼우먼을 요구하는 사회,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하기 힘든 현실은 사교육의 열풍과 함께 수많은 기러기 아빠를 양산해내고 있다.
임인애 감독의 <밥.꽃.양>은 1998년 울산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반대투쟁 과정에서 있었던 식당노조 여성노동자들의 3년간의 걸친 지난한 싸움을 찍은 다큐멘터리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가야할 길은 아직도 멀기만하다.
레메디오스 바로의 그림 중에는 곧 쓰러질 것처럼 뼈와 가죽만 남은 수척한 모습으로 과일에 빨대를 꽂아서 홀쭉한 뺨을 오물거리는 흡혈귀 그림이 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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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식주의자 뱀파이어 >>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는 무게감은 이 책의 내용을 제목 한마디에 은유하여 표현하기에 매우 적합하였다. 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좀더 나은 삶을 위해 시대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시켜준다. 솔직히 이렇게 어려운 말들이 많이 쓰여 있는 글을 내가 이해를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더 많이 들었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러한 글도 읽어야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조금씩 세상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의 잣대를 대며 좀더 세상에 관심을 조금씩 갖게 되었다.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살아가는 한 여성으로서 마땅히 생각해 볼 수 있을만한 주제로 좀더 구체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에 이 책이 딱딱하고 재미없을 것처럼 느껴졌으나, 읽어 가면 읽어갈수록 우리시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소재로 이루어져 좀더 친숙한 느낌마저 들었다. 자본, 국가, 인권, 교육, 가족, 모성, 육체 등의 일반적인 소재를 통해 좀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자세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가 된 것 같다. 재미만을 추구했던 나의 책 읽기가 요즘은 지식과 세상살이에 필요한 글 읽기로 바꾸어지게 된 것도 이런 분야의 책들이 나옴으로 해서 국민들이 마땅히 알아야하는 사실을 알려주고, 어떤 한 주제를 두고도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이 존재하고, 그러한 분야에 대해 어떻게 심층적으로 파고들어갈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좋은 길을 열어주고 있다. 모르는 것보다 아는 것이 약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나 또한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이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좀더 현실적으로 깨닫게 도와주는 책이 될 것 같다. 일상적인 일들을 좀더 구체적으로 시각화하여 여성들도 당당히 남성중심에서 탈피하여 페미니즘을 실현시킬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성들도 많이 배우고 위대해 질 수 있음을 이미 좋은 성과를 거둔 여성들을 통해서 충분히 비추어진 바가 있다. 우리도 이들을 본받아 좀더 여성으로 서의 지위를 상승시키고 정치적인 잣대에 휘둘리지 않는 여성으로서의 힘들 갖게 되는 날을 위해 열심히 비판적인 시각으로 남녀평등이 이제는 당연하게 인식이 되어 여성의 삶이 점점 더 바뀌어 갈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여야겠다. “채식주의자 뱀파이어”는 인간의 존재조건 자체가 타자를 삼켜야함에도 공존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다는 아이러니를 ‘채식주의자 뱀파이어의 정치’에 비유한다. 채식주의자 뱀파이어 정치라는 것은 폭력의 시대 공존의 가치가 결코 만만하지 않지만 완전히 불가능한 것도 아니라는 은유라는 의미에서 즉, 완전히 불가능함은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불가능 하다고 포기 하지 말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 나갈 수 있는 의지, 끈기, 노력이 더 중요하게 인식이 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읽어 볼 수 있어 좀더 세상을 넓은 시각으로 바라볼 수 가 있었고, 다시 한번 정독하며 깊이 생각해보며 읽어보아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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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어쩌면 서로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 있는 단어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제목을 보면서 참 특이한 책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게 되네요. 도대체 어떻게 뱀파이어가 채식주의자가 될 수 있는지 참 아이러니하지 않나요. 어떻게 보면 자신의 목숨조차 내놓아야 하는 것이 피를 먹지 않는 뱀파이어의 운명이 아닐까 싶은데 그렇게까지 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잡아먹지 않으려고 하는 숭고한 뜻을 가진 뱀파이어가 혹시 하나쯤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아님 뭐 없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겠죠. 전체적으로 보면 우리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과연 인간을 선한 존재로 볼 것이냐, 아니면 악한 존재로 볼 것이냐 하는 문제와 함께, 만약에 인간이 악하다면 어떻게 선한 모습으로 바꿀 수 있는냐 하는 문제와 함께, 그렇다면 자율적인 교육을 통해서 하느냐 강제적인 통제를 통해서 하느냐의 문제 등에 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인류의 역사를 보게 되면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또한 생존하기 위한 치열한 전쟁의 역사가 아닐까 싶어요. 즉, 치열한 생존경쟁이 존재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삶이자 모든 동물들에게 주어진 숙명같은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가지지 않으면 빼앗길 수 밖에 없고, 죽이지 않으면 죽을 수 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타인과의 공존을 꿈꾸는 것은 어떻게 보면 정말 유토피아 같은 이상향을 바라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네요. 하지만 폭력이 난무하고, 모든 것이 돈의 가치로 환산된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각종 재난을 함께 극복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려고 애쓰는 천사같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어쩌면 이런 한 사람 한 사람의 노력으로 인해서 세계가 변화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네요. 나비효과처럼 조그마한 나비의 날개짓이 거대한 폭풍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우리들 마음속에 전염되어 갔으면 좋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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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옥희의 뱀파이어 시학과 주디스 버틀러의 취약한 주체의 정치 윤리학은 서로 맞닿아 있다. 주체가 엘리트 지식인으로서의 우월하고 분리된 위치를 버리고 자본주의 현실 속의 식인주체의 하나임을 인정할 때, 자기동일적 젠더 주체를 포기하고 타인에게 의존하는 불확실한 삶임을 반성할 때 주체와 타자의 소통과 대화의 가능성은 조금씩 열린다. 공감의 능력, 소통의 능력은 정치적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 폭력에 대항하는데 필요한 삶의 감수성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폭력은 더 많은 상실을 낳고, 그 결과 불확실한 삶의 요청을 배려하지 못한 정치적 분노만을 생산하게 된다. 윤리적 소명의 가능성은 타인과의 감정적 유대를 빨리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감정에 머물러 내 몸이 너무나 취약함을, 또 나의 존재가 근본적으로 타인에게 의존하고 있음을 인정할 때, 그래서 삶의 불확실성, 존재의 불확실성을 인식할 때 시작된다. 탈-정체성(dis-identificaiton)이야말로 정체성의 일상적인 실천(common practice of identification)인 것이다. 타자의 얼굴이 나를 형성하고 나의 정체성은 타인에게 근본적으로 기대어 있다. 이것이 신자유주의 식인주체로 살아가는 우리 뱀파이어들이 서로를 물어뜯지 않고 공존할 수 있는 (불)가능한 방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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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기에 앞서 제목을 보고 판단을 하면 안된다는 것을 얻었다. 다소 리얼아니면 재미를 표삼아 읽으려고 했는데 사회적인 시사 특히 여성에 집중한 내용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여성으로서 살아온 지난 과거로 시작해서 지금까지의 상황을 신자유주의 페미니즘이 묻어난다.
1부에서는 자본, 국가, 인권, 교욱, 가족, 모성, 육체들이 폭력적인 사회에 어떻게 관련되어 살아가 는지를 설명한다. 2부에서는 타자, 환대, 주름, 문학, 유며, 일상등의 통해 공존해 가는 모습을 보여 줄것이다. 또하나 표지의 그림은 스페인의 망명화가인 레메디오스의 채식주의 흡협귀에서 가져온 것이라 한다. 보기만해도 무서움을 지나 섬칫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우리들이 지금 이런 시대 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오랜 군부정치를 벗어나고 민주주의와 가부장제의 제도에서 여성들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여성운동의 절정기를 MB정부가 들어섬을 들먹인다. 여성정책이 정부차원에서 구체화되고 있는 것 처럼 보이지만 여성부의 축소와 폐지를 무엇으로 답변을 할수 있을지 의문이다. 호주제 폐지, 성매매 방지법, 군가산점, 모성보호, 여성국회의원 할당제, 여교수 할당제, 정부부처 여성 할당제등을 이뤄냈 지만 사실은 무늬만 남은 꼴이 되었다. 예전과는 달리 여성들의 사회참여가 많아졌다고는 하나 OECD 가입 국가중 우리날의 현 위치는 정말 미미하다. 오늘날 중산층의 여성들은 사회의 폭력앞에 무려해 질수밖에 없다. 이밖에도 저출산 시대에 맞게 정책을 쏟아내고 있지만 일시적인 방편일뿐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한다. 상층과 하층을 볼때 하층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정책이기 때문이다. 잠시의 도움 으로 아이를 키울수는 없다. 그들의 모자란 지식에 채찍질을 하고 싶다. 이런 가운데 여성운동의 방향 은 어디로 돌아가고 았는지 궁금하다.
다소 어려운 시사적인 문제다 보니 가슴은 알지만 머리로는 이해불가이다. 분명히 나와 같은 여성을 옹호라기 보다는 합법하기 위한 것임에도 이렇게 내가 무력하다니. 그동안 내문제외에는 전반적인 여성들의 삶에대한 문제를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이 있듯이 오늘날 여성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한방법을 제시한다. 아직도 우리사회는 슈퍼우먼이 되기를 강요하고 대책을 강구하지는 않는다. 많은곳에서 문제점을 드러나고 있는 전반적인 문제들이 서서히 해결되기를 그저 바랄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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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minism은 생물학적인 성으로 인한 차별을 부정하며 남녀평등을 지지하는 믿음에 근거를 두고 불평등하게 부여된 여성의 지위나 역할에 변화를 일으키는 여성운동이다. 이 책의 저자 임옥희씨는 페미니스트로서의 시각으로 자본,국가,인권,교육,가족,모성,육체들이 폭력적인 사회를 만드는데 어떻게 서로 합심하게 되었는가, 또 모든 가치를 화폐가치 하나로 평정한 폭력적인 시대가 어떻게 사회 구석구석까지 관통하게 되었는가를 고찰하여 이런 폭력적인 시대에 어떻게 하면 공존할 수 있는 가치를 회복할수 있는가에 주목하여 타자,환대,주름,문학,유머,일상등의 가치를 통해 공존의 시학을 찾고자 하였다.
오늘날 자본,국가,인권,교육,가족,모성,육체등은 폭력의 시대와 맞물려 있고 그런 동심원의 가장 아래쪽이자 안쪽에 자리하고 있는 주체또한 폭력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다. 폭력적인 여러 장치들 뿐만 아니라 인간주체 또한 타자를 먹어 치워야 자신이 살수 있다는 점에서 식인주체다. 국가폭력 속에서 탄생하여 폭력을 그리워하는 가운데 식인주체로 탄생한 인간이 어떻게 공존의 가능성을 찾아갈 수 있는가? 어떻게 자신을 볼모로 잡고 생명을 위협할수도 있는 존재에게 환대를 베풀수 있는가. 인간의 존재조건 자체가 타자를 삼켜야함에도 공존을 모색하지 않을수 없는 아이러니를 피를 먹지않고 빈혈에 시달리면서 채식을 하는 우스꽝스러운 뱀파이어에 비유를 했다.
흔히 우리는 배려,보살핌,관용을 공존의 가치로 내세우지만 가진 자의 입장 배려와 관용은 언제든지 내민 손을 거둬들일수 있기 때문에 자신을 전부 거는 것은 아니다. 소위 관용을 외치는 자유주의자들과 좌파들은 기득권이라는 성곽에 양다리를 걸치고 앉아서 성 아래로 손을 내민다. 근면 성실 정직하게 일해서 열심히 계급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와 내손을 잡아라 그러면 내가 성 안으로 끌어 올려주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자신들의 지위가 위협받는 다급한 상황이면 그들은 언제든지 계급의 사다리를 걷어찬다. 그것이 자유주의적인 배려와 관용의 한계다. 공존의 가치는 공존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드러난다. 때문에 자신의 전존재를 걸고 결단을 내려야 하는 불가능한 상황과 마주치지 않을수 없다. 공존은 적으로 방문하는 손님을 환대할수 있을때만 가능하다. 예를들어 우리가 북한을 대하는 태도에서 분명해진다고 할수 있다. 공존의 가치는 공존이 불가능한 지점 바로 그곳에 있는 것이다.
출근하면서 아침 라디오에서 부의 평등정도를 평가하는 지니계수가 심하게 차이가 나고있으며, 향후 더욱 격차가 벌어질것이라는 전문가의 분석을 들었다. 계층간 소득분배의 불평등도 심하지만 형성되어 있는 자산소득의 크기가 차이를 더한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사상이 만연하여 능력있는 사람만이 평등해질 권리가 있는 것인것처럼 약육강식의 사회분위기에 일침을 가하는 내용이다. 약자에 대한 배려는 동정적이며 시혜적으로 시작해서는 안된다. 구조적이면서 제도적인 당연성을 가지고 같이 공존하는 대상으로 생각하며 정치를 펴야 할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