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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VS 마르크스주의, 생태혁명을 파헤치다
"자본주의 VS 마르크스주의, 생태혁명을 파헤치다" 내용보기
토지는 새로운 터전 위에서 일어서리라. 이전에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었으나 이제는 우리가 모든 것이 되리라.   -P.319 인터내셔날가의 한 소절-     흔히 환경오염의 원인에 대해 무분별한 화석연료의 사용, 울창한 산림남벌, 도시의 광역화, 화학배합물질의 사용 등을 꼽는 것이 정설이다. 이에 따른 결과는 생태계의 교란으로 이어지고 지구는 점점 더 따뜻해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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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는 새로운 터전 위에서 일어서리라.

이전에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었으나

이제는 우리가 모든 것이 되리라.

 

-P.319 인터내셔날가의 한 소절-

 

 

흔히 환경오염의 원인에 대해 무분별한 화석연료의 사용, 울창한 산림남벌, 도시의 광역화, 화학배합물질의 사용 등을 꼽는 것이 정설이다. 이에 따른 결과는 생태계의 교란으로 이어지고 지구는 점점 더 따뜻해지는 온난화로 이행된다. 마크 라이너스가 지은 <6도의 악몽>은 살벌하고도 무섭게 지구 온난화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날린다. 최악의 환경대재앙에 대한 실현가능성은 마치 할리우드식 블록버스터 영화의 한 장면처럼 비현실적인 공포로 다가선다. 하지만 지구는 그 예전 원시생태와는 엄청나게 달라졌으며 변화의 유속 또한 증폭된 것이 사실이다.

 

이처럼 환경에 대한 인식의 패러다임은 재고되고 바뀌어야 하는 것에 대해 더 이상의 부연설명은 필요치 않는다. 물론 지구 온난화의 허점을 파고들어 일정한 주기로 반복되는 지구의 순환이라는 반대론자의 주장도 있기는 하지만 너무 더워져 버린 지구라는 인식은 이미 깊숙이 각인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껏 지구 온난화와 생태변화에 대해 접근한 방식은 과학적인 사고에 의한 예측적 기후모델에 의한 결과의 산물이다. 유한한 자원에 대한 활용과 분배에 대한 헤게모니는 지속적으로 논의되어왔지만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오류를 극복할 해결책에는 주목하지 않았다.

 

자본주의는 이익에 대한 분배의 과정을 경제적이고 이성적인 합리성을 요구한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이성적 합리성은 냉철한 가슴을 지닌 정온(定溫)적 인간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윤의 창출과정은 지속가능한 범주의 개념을 모두 경제적인 시스템으로 해석하며, 자본주의는 과실의 분배보다 이익의 창출에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는 얼개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분배의 문제를 효율적으로 해결할 시스템을 애초에 포기하였음을 보여주는 반증이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고 분배의 평등의 해결수단으로 정부의 역할과 비중을 더욱 싣게 된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와 반대로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의 고유한 창조력, 즉 노동에 핵심적 가치를 심는다. 노동은 유한계급의 구별을 철폐하고 자본소외에 대한 이상향이 바로 유토피아라는 사상을 내세웠다. 마르크스는 물질에 대한 의존이 불가피하다는 관념인 유물론에 입각하였으며 단계별 상호작용에 의한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에 따른 변증법적 역사관을 지녔다. 마르크스는 이상향에 가까운 이데올로기를 건설하고자 하였으나 레닌에 의하여 노동자계급의 자발적 수행능력을 철저하게 부인하는 등 혁명가에 의한 체계적인 지배를 역설하며 심각하게 변질되는 수모를 겪었다.

 

앞서의 두 가지의 이데올로기는 태동부터 다르며 사물을 대하는 관념의 틀조차 상이하게 다르다. 자본주의가 자연을 지배적이고 정복 내지는 수복 가능한 개념으로 이해했다면 마르크스주의는 자연과의 조화, 나아가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인정하였다. 실제 과학의 발전 또한 자본주의에 편승하였음은 주지한 사실과 같다. 그러므로 이 책의 저자 존 벨라미 포스터의 <생태혁명>은 기존의 범람하는 이론과 학설과는 판이 다른 거시적인 안목의 보고서에 다름 아니다.

 

총3부로 나뉘어 지구의 실상과 환경개혁실패에 대한 사례를 소개하고 마르크스의 이념과 시스템을 통해 모순의 본질을 파헤친다. 끝으로 생태혁명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며 지속가능성, 공동체, 그리고 평등에 대하여 의미심장한 주장을 펼친다. 

 

책은 저자의 통렬한 함의와 주장의 산물인 본질적 가치에 비해 난해하다. 학술적인 내용이 곳곳에 배치되어 일반 독자가 읽어 내기에는 쉽지 않다. 생태의 문제에 더 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념을 알지 못하고는 가독성이 떨어진다. 하지만 조밀조밀하게 얽힌 내용을 보다 넓은 시각으로 커다란 줄기를 잡아채듯 나아간다면 전혀 다른 새로움이 기다린다. 매몰된 가치에 대한 반향에서 탁 튕겨 나와 내려다보는 원경에 감탄하게 될 것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핵심적 가치는 관점의 변화에 있다. 새로운 환경주의의 패러다임과 인간면제주의의 패러다임(캐튼과 던랩의 관점, P.268)에 근거한 이분법적인 오류를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와 자연환경 사이의 상호작용의 질(지속가능성)에 관하여 인간과 자연과의 신진대사균열이론에 의해 접근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로써 자본주의에 대한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사회주의로 이행하여야 하며 이행의 본질은 인간 자체를 혁명하는 혁명적 실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설파한다. 실제 이와 같은 실험적 하회주의는 볼리비아의 대통령 에보 모랄레스에 의해 열렬히 환영받았다. 이는 <빼앗긴 대지의 꿈>의 저자 장 지글러의 책에서도 언급이 되었으며 새로운 공동체의 출현가능성을 엿보는 대목이다.

 

이렇듯 존 벨라미 포스터의 생각의 총체는 혁신적이고 신선하다. 자본주의의 결핍과 모순에 좌초된 생태혁명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접근방식을 새롭게 구성했다는 성공이다. 다채로운 사고와 대립된 이념이 충돌하는 혼돈의 중심이라 할지라도 풀어 헤쳐 보면 의외로 단순한 결과가 도출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좌파적이고 진보적인 접근의 통념을 걷어내고 단순한 도식으로 풀어보면 인간과 자연은 공생의 관계, 즉 지속가능성의 범주의 한 묶음이라는 움직일 수 없는 진실과 조우하게 된다. 결국 이념을 넘어 생태혁명을 위한 성공적인 수단은 탐욕을 경계하고 분배와 평등의 관계로 인간과 인간, 자연과 인간을 대할 때 가능한 일이 아니겠냐는 저자의 주장은 곱씹어 볼 일이다.

 

 



a******e 2010.08.25. 신고 공감 16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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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봄을 앞당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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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일을 두고 이 책을 읽었다. 편집자로서, 에코 매거진을 다수 만들어내고 있는 입장에서 '생태혁명'이 함의하고 있는 사회주의로의 이행, 생태적 사회로의 이행이 무척 궁금했다. 솔직히 그동안 나의 무지를 깨닫는 시간이기도 했다. 작년 봄에 모 아웃도어 브랜드에서 발행하는 에코 매거진의 기획 특집이 '지구온난화, 물의 재앙'이이었다. 3명의 필자로부터 원고를 받아 정리하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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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일을 두고 이 책을 읽었다. 편집자로서, 에코 매거진을 다수 만들어내고 있는 입장에서 '생태혁명'이 함의하고 있는 사회주의로의 이행, 생태적 사회로의 이행이 무척 궁금했다. 솔직히 그동안 나의 무지를 깨닫는 시간이기도 했다. 작년 봄에 모 아웃도어 브랜드에서 발행하는 에코 매거진의 기획 특집이 '지구온난화, 물의 재앙'이이었다. 3명의 필자로부터 원고를 받아 정리하던 중 지구온난화 담론 자체를 부정하며, 마르크스의 사회주의로부터 재점검을 해야 한다는 요지의 글을 받았다. 얼토당토 않은 논지에 버럭 화를 냈었는데... 되돌아보니 얼마나 편협한 사고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사실 읽기 어려운 책임에 분명하다. 각주를 제외하고 380 페이지를 읽어가는 동안, 붙여놓은 포스트잇이 수십 개가 된다. 그만큼 이해하기 쉽지 않은, 대단히 문제적이고 새로운 논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부분들이 많았다. 사실 생태혁명의 도론 부분만 읽더라도 전반적인 요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독자들을 위한 배려인지, 앞부분에서 언급된 내용들을 다시 짚어가며 설명하는 친절에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제1부 전 지구적 위기에서는 '위기'에 대한 공통적인 문제의식은 갖고 있으나, 그것들을 바라보는 위기의 경중, 해결하고자 하는 대안 등이 사뭇 다른 양상으로 흐르고 있다. 향후 20년 이내에 화석연료의 고갈을 진단하고 있는 현재 시점에서, 미국을 위시한 유럽 등 북반구 나라들의 에너지 제국주의가 극에 달하고 있다. 지구온난화의 원인을 두고 여러 논란들이 있지만, 여전히 탄소는 주요 원인으로 인식되고 있다. 자본주의의 주변부에서 시작된 전지구적 위기에 대한 대안 마련은 미국의 교토협약 탈퇴와 여전히 신자유주의 시장 논리로 접근하는 유럽 국가들에 의해 좌초되고 말았다. 지금과 같은 추세라면 지구 생체 시계는 종말을 향해 재각재각 초침을 옮겨 놓을 것이다.

 

최근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개인, 기업, 국가 차원의 노력들이 경주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소극적인 움직임만으론 현재의 전지구적 위기를 감당할 수 없다. 끊임없는 부의 축적을 일삼고 있는 자본주의의 체제 하에서는 더이상 희망을 잉태할 수 없음이 드러났다. 최근 플라톤에서부터 간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상가들에 대해 재평가하는 작업들을 수행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저자는 마르크스의 생태학에 주목하고 있다. 나또한 그의 '공산당선언', '자본론'을 통해 그에게 과연 생태 혁명에 관한 담론이 있었던가?에 대해 의문을 품었었다. 결론적으로 리비히의 토양 황폐화에 대한 이론에 영향을 받은 마르크스는 신진대사의 균열이란 개념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강하게 비판했고. 그에게 생태 혁명의 단초들이 있었음을 강조한다. 제2부 마르크스 생태주의는 일견 마르크스를 옹호하고 변론하기 위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사견이지만, 마르크스가 환경사회학에 있어 그만의 이론을 갖추고 있는 지에 대한 유무보다는, 그래서?라는 실천적 대안에 치중해야 했던 건 아니었나 싶다. 신진대사 균열과 인간 소외 개념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다시 되돌아가자면, 현 자본주의 체제의 혁명적인 변화를 꾀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한나 아렌트의 세계 소외 혹은 마르크스의 인간 소외 개념을 넘어선, 사회주의 초기의 시스템으로 돌아가, 체 게바라가 주창했던 인간 개발에 입각하여, 인간 개개인의 의식 변화가 전제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럼에도 놀랐던 건 인간 탐욕이 빚어낸 제국주의 역사의 반복 부분이다. 산업혁명 즈음 영국은 중남미 일대에서 비료로 사용하기 위한 구아노(새의 배설물)와 초석을 수입하였다. 이는 미국이 중동 지역에 행하고 있는 석유 자원 강탈과 일맥상통하는 면이다. 결국 자연으로부터의 인간 소외는 비극적인 종말을 암시한다. 혁명적인 패러다임의 변화없이 현재의 석유자원을 둘러싼 정치, 사회적 기만 행위는 더이상 우리의 삶을 담보할 수 없다. 파괴와 종말의 어둔 그림자만 드리울 뿐.

 

이 책을 통해 그동안 품고 있던 지구온난화와 그에 따른 정치, 사회적 패러다임의 의문들을 모두 풀 수는 없었다. 또한 마르크스의 생태학을 통한 실천적 대안을 찾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작금의 논의되고 있는(대단히 우려스러운) 기술에 의한 생태 혁명은 요원하며, 획기적인 인식의 변화를 통해 그것들이 가능함을 얘기했다는 점에서 나름의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 직접적으로는 향후 에코 매거진의 기획 방향에 있어 다양한 시각을 갖출 수 있게 된 점이 반갑다. 역시 어렵게 읽어낸 책일수록,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내용들이 많은가보다.

 

레이첼 카슨의 저서 '침묵의 봄'에서 제목을 따왔다. 재앙과 멸망의 봄이 아닌, 지구와 평화롭게 조우할 수 있는 봄을 기다려본다. 그런 점에서 존 벨라미 포스터의 '생태 혁명'은 발간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평가할 만하다.



t******2 2010.05.06. 신고 공감 11 댓글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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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7] 생태혁명, 한 여름밤의 꿈이 될 것인가?
"[10-17] 생태혁명, 한 여름밤의 꿈이 될 것인가?" 내용보기
왜 생태혁명인가? 저자는 UN산하의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패널)의 보고서에 근거하여 엄청난 기후변화와 생태계의 변화로 인해 수많은 인간과 생물종이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생태혁명 – 인류와 지구의 관계를 대대적이고 신속하게 바꾸는 일 – 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은 널리 인식하고 있다.1)고 전제하여 생태혁명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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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생태혁명인가?

저자는 UN산하의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패널)의 보고서에 근거하여 엄청난 기후변화와 생태계의 변화로 인해 수많은 인간과 생물종이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생태혁명 인류와 지구의 관계를 대대적이고 신속하게 바꾸는 일 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은 널리 인식하고 있다.1)고 전제하여 생태혁명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저자에게는 불행하게도 과거와 달리 최근에 벌어진 일련의 사태는 지구온난화 주장에 대한 신뢰를 급격하게 떨어뜨리고 있다.

2001 IPCC 3차 보고서를 통해 지난 2,000년간 겪어 보지 못한 온난화 현상이 최근 수십 년 사이에 벌어지고 있다라고 주장하였지만 한 독립 언론인의 이의제기에서 시작된 논란 끝에 2006년 그 근거가 불투명하다고 결론이 났다.

더구나, 2009 11월 이스트 앵그리아대 기후연구소장인 필 존스 교수가 4차 보고서 연구에 참여한 과학자들과 주고받은 메일이 해킹을 통해 공개되면서 2007 IPCC 4차 보고서의 인간 때문에 지구가 뜨거워지고 있다라는 주장도 의심의 눈초리를 피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메일들에는 인간이 지구 온난화의 주범이라는 주장이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며 정치적 주장에 불과하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4차 보고서에서 삭제되는 것이 좋다는 의견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간이 지구 온난화의 주범이라는 주장을 했던 필 존스 교수가 기존 주장을 번복하는 내용의 인터뷰를 하였고, 2010년에 4차 보고서에서 주장된 히말라야 빙하가 2035년까지 완전히 녹아 없어질 수 있다.”라는 내용이 사실뉴사이언티스트라는 잡지가 아무런 학문적 근거 없이 기술한 “2350“2035으로 잘못 인용한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고, 같은 날 IPCC "충분치 못한 증거가 일부 포함돼 있었다"고 오류를 일부 시인하기까지 했다는 점이다. 2)

 

어떤 생태혁명을 할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환경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것에는 이데올로기에 상관없이 동의하고 있다. 다만 그 방안에 대해서는 좌파와 우파는 서로 다른 대안을 제시하고 있을 뿐.

우선, 우파는 생태산업혁명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전적으로 보다 효율적인 에너지 시스템과 같은 기술적 수단에 의존하여 자본주의의 발전을 지속시키려는 새로운 산업혁명을 의미한다. 이러한 녹색산업혁명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생태적 근대화라고 표현하며, 흔히 부유한 국가들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기 위해 생태혁신을 주도하는 방식으로 추진되고 있다. 그들은 에너지 효율 증대와 같은 기술혁신에 있어서는 어떤 장애라도 극복해야 하지만 기술을 제외한 거의 모든 사회조직은 변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주장하다.

반면 저자를 비롯한 좌파는 생태사회혁명을 제시하고 있다. 이 방식은 필요한 경우에는 대안기술의 적용을 수용하지만 인간과 자연의 관계와 사회의 구성을 그 바탕이 되는 현존하는 생산의 사회적 관계에서부터 바꾸는 데 중점을 둔다. 이 목표는 지속 가능한 인간개발의 과정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생산과 분배, 교환과 소비를 평등하고 공동체적인 방식으로 전환함으로써 사회질서의 주류 논리와 결별해야 한다는 것이며, 그 목적은 현대 세계경제의 특징인 인간/자연의 상호 신진대사 관계의 균열이 지속되는 것을 막고 보다 유기적이고 지속 가능한 생태적 사회적 관계를 복원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친 혁명을 바탕으로 한 문명적 전환을 의미한다. 3)

 

생태사회혁명이 꿈꾸는 사회

저자를 비롯하여 생태사회혁명이 꿈꾸는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자연과 상호의존적이고 역동적인 공동체를 재건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런 공동체의 구성원은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이웃정신, 우정, 상호의존성을 통해 공동체내의 개인으로서 서로 관계를 맺고 동일시된다. 따라서 이런 공동체가 고도로 발전한 단계에 이르면 개별적인 경제적 교환이 해소된 강력한 사회적 연대를 통해서만 생겨날 수 있으며 그런 공동체가 마르크스가 꿈꾸었던 능력에 따라 생산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되는 사회이다. 4) 하지만 이런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인간이라는 종()으로부터 이기심을 제거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좌파들은 이기심을 인간의 본능이라고 보지 않는다. 인간이 이기적으로 된 이유는 경쟁을 통해 생존을 강요하는 자본주의 사회라는 틀에 있는 것이지 인간의 본능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이 꿈꾸는 사회의 구체적 모습은 명확하게 묘사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프랑스 소설가 베르나르의 환경파괴범은 모두 교수형에 묘사된 사회처럼 석유를 비롯한 화학연료를 사용하는 대신 인력(人力)을 사용하는 사회일 수도 있고, 현재의 물질적 풍요를 다 포기하고 되돌아간 과거 원시 공산제 사회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면 중남미 일부 사회주의 국가처럼 강력한 폭력의 지배하에 있는 사회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꿈꾸는 사회를 현실화하기 위해 전 지구적 생태혁명은 보다 큰 범위의 사회적 혁명의 한 부분으로서만 일어날 수 있다. ~ 그런 혁명은 주요 동력을 전 지구적 자본주의 계층질서의 밑바닥에 있는 노동인구와 공동체의 투쟁으로부터 끌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5) 라고 주장하고 있다.

 

생태사회혁명은 가능한가 

저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자본주의 계층질서의 밑바닥에 있는 노동자와 공동체가 투쟁을 통해 수많은 피를 대가로 자본주의 사회를 전복하는 것에 성공하였다 하더라도, 인간의 이기심이라는 거대한 장벽을 극복해야만 생태사회혁명은 가능할 것이다.

또한 지금 현재 누리고 있는 물질적 풍요에 대해 일정부분 포기하는 자기 희생도 생태사회혁명이 성공하려면 필요한 요소이다.

만약 그럴 수 없다면 과거 인간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행해졌던 수많은 공산사회 실험이 실패로 끝났듯이 생태사회혁명 또한 그 실패의 한 페이지를 차지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1) 존 벨라미 포스터, <생태혁명>, (인간사랑, 2010), pp. 19~20

2) 메일경제신문, 2010. 2. 20.

3) 같은 책, pp. 20~21

4) 같은 책, pp. 47~48

5) 같은 책, p. 359

w******f 2010.05.07. 신고 공감 10 댓글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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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와 지속가능한 인간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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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에 지속가능한 인간개발이란 의제가 주변부에서 여러가지 혁명운동을 통해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고 있는 것은 세계소외와 인간의 자기 소외에 대한 저항이 시작되었다는 징표이다. 이런 저항은 오직 한 가지 목표만을 기대하고 있다. 그것은 결합된 생산자들이 자연과의 신진대사적 관계를 이성적으로 통제하는 사회의 건설, 당대의 수요뿐만이 아니라 미래 세대와 생명의 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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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에 지속가능한 인간개발이란 의제가 주변부에서 여러가지 혁명운동을 통해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고 있는 것은 세계소외와 인간의 자기 소외에 대한 저항이 시작되었다는 징표이다. 이런 저항은 오직 한 가지 목표만을 기대하고 있다. 그것은 결합된 생산자들이 자연과의 신진대사적 관계를 이성적으로 통제하는 사회의 건설, 당대의 수요뿐만이 아니라 미래 세대와 생명의 수요 모두를 배려하는 사회의 건설이다. 지금은 사회주의로의 이행과 생태적 사회로의 이행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다." (379쪽)

 

"풍요속의 빈곤" 그리고 "군중속의 고독"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피할 수 없는 개념이다. 대형마트에서 그 커다란 카트에 생필품과 편의품과 식료품들을 가득 담아 계산대에서 줄을 서있는 사람들, 자본주의 통제의 시각에서 그들은 그 카트에 들어있는 상품만큼 그들은 빈곤해야 한다. 다들 그곳에서 그 상품을 구매하니까 나도 그 그 상품을 그곳에서 구매하는 사람들, 이들은 고맙게도 자본주의의 덫에 걸려 준 것이다. 초과생산과 초과이윤을 향한 자본주의의 끝없는 탐욕은 오늘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나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어버린 사람들, 아무리 많은 군중들 속에 있어도 그들은 개별적 존재이다. 자본의 통제를 받아야 안심되는 고독한 존재이다.

 

자본주의체제의 끊임없는 이윤창출에의 압박은 마침내 인간을 일개 생산수단으로 전락시키고, 생산양식의 자본은 새로운 생산수단의 착취를 목적으로 번식한다. 아울러 가장 기본적인 생산수단인 토지 또한 탐욕적 생산의 도구로서 작용함을 강요받는다. 이전까지는 중요한 과정이었고 축복받는 결과였으나, 자본이 지배하는 시대에서 토지는 한낱 수단에 불과한 존재로 여겨지고, 토지를 비롯한 환경의 파괴는 당연한 것으로서 여겨지게 된다. 모든 것이 자본을 위해 존재하는 세상, 하지만 이 자본의 탐욕은 끝이 없다는 것에 재앙이 시작된다.

 

이 책 생태혁명의 저자 존 벨라미 포스터는 우리가 사는 세계의 황폐함의 원인이 바로 자본주의 체제에 있음을 직시하고 있다. 1992년과 2002년에 열린 지구정상회의는 지구 생태의 유지보존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자본주의체제에서 환경을 유지보존하겠다는 발상은 연목구어와 다름 아니다. 50년전 레이첼 카슨의 생태적 비판 "침묵의 봄"은 아직도 현재형이다. 기후변화와 그를 위한 탄소감축은 결국 자본과 기득권을 가진 국가들에만 혜택이 갈 것이다. 석유와 같은 화석연료를 둘러싼 제국주의의 횡포는 더 빈번한 전쟁과 더 치열한 투쟁을 불러일으킬 것이 분명하다.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중 하나는 소외의 개념이다. 저자는 나아가 마르크스가 생태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의 결과, 자본주의는 생태가 신진대사로부터 균열되는 과정을 밝혀냈다. 모든 요소가 연관되고 상호작용하는 것임에도 자본주의는 모든 요소의 순환과정에 자본이라는 요소를 투입함으로써 자연스런 신진대사의 끈을 끊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 점은 비단 마르크스와 같은 갈등주의 사회학뿐만 아니라 뒤르껭의 기능주의 사회학에서도 간과되지는 않을 정도로 보편적 인식이라 할 수 있다. 사회의 일련의 과정으로부터 일탈된 생태는 저주의 형태로 우리에 되돌아 온다. 질소의 저주, 석유의 저주. 그렇게 경험했으면서 그렇게 쉽게 망각해 버리는 이 자본주의 사회의 탐욕은 또 어떤 저주를 불러올 것인가.  

 

이젠 "혁명"이 필요한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저자는 사회주의 체제로의 전환만이 생태를 살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생태를 살리지 않으면, 다시말해 지구와 평화롭게 지낼 생각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이 지구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인구는 매우 많이 줄어들 것이다. 누가 봐도 자명한 이 사실을 그 속성상 굳이 외면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이해하기 힘든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이 자본주의 체제를 언제까지 끌고 갈 수 있을까.

 

마르크스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매우 긍정적이고, 때론 옹호적이어서, 자본주의에 익숙한 개인적으로는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생태적 환경에 관련된 마르크스의 재조명은 꽤 의미있는 평가였다. 생태에 대한 다양하고 구조적 시각을 제공한 점은 돋보였으나, 중복되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책의 상당 부분을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지지에 힘을 쏟은 데 반해, 사회주의적 해결책에 대해서는 유토피아적 전망과 중남미 국가들의 녹색환경운동 사례로 간단히 대체하는데 그치고 있다. 물론 한계가 있었겠지만, 아쉬움이 많다. 당위만 있을뿐 대안이 마련되기 어려움을 절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젠 자연과 환경, 생태에 대한 진정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할 때. 기존의 체제와 과감히 결별할 수 있는 용기, 새로운 테제를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할 것이다. 최소한 이 시대를 반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후손을 위해 지속가능한 인간발전을 위해 반드시 '생태적으로' 혁명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YES마니아 : 골드 d******2 2010.05.11. 신고 공감 8 댓글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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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문명이 지나간 자리엔 사막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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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온난화… 1993년인가? 오존층 파괴에 대한 이야기가 온 신문지상을 장식했었다는 기억이 있다. 그때 회사에서 무엇 때문 이었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오존층 파괴의 원인과 그 영향에 대해서 세미나를 했고, 그 발표를 내가 했던 것 같다. 그 후 지구 온난화에 대한 우려가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어둡게 드리워졌는데, 어느 순간 또 다른 이야기가 들리기 시작했다. 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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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온난화 1993년인가? 오존층 파괴에 대한 이야기가 온 신문지상을 장식했었다는 기억이 있다. 그때 회사에서 무엇 때문 이었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오존층 파괴의 원인과 그 영향에 대해서 세미나를 했고, 그 발표를 내가 했던 것 같다. 그 후 지구 온난화에 대한 우려가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어둡게 드리워졌는데, 어느 순간 또 다른 이야기가 들리기 시작했다. 지구온난화는 단순한 자연현상이라며, 정치적으로 왜곡되었다는 이야기가.. 멀리가서 찾을 필요도 없다. 작년에 [인간사랑]에서 출간한 [정치적으로 왜곡된 과학 엿보기]에서도 저자는 분명히 그렇게 얘기했다는 기억이 있다. 그 책의 저자 톰 베델이 주류 경제학자로써 제국주의를 옹호하기 때문에 그런 주장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환경문제에 관해서는 뚜렷한 두개의 시각이 있다. 대부분이 자본주의 옹호론자인 보수주의자들의 개발이 우선이라는 시각과 환경운동가들의 생태계가 우선이라는 시각이 그것이다. 그렇지만 개발의 목적이 자본의 축적임을 잘아는 보수주의자들의 공세를 진보주의자들이 이겨내기에는 힘에 부치다. 차츰 이념이 퇴보해가는 우리사회에서 가장 투쟁성이 강한곳이 환경운동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대운하니, 4대강사업이니 하면서 녹색성장을 부르짖고있는 이들 보수주의자들에게 속절없이 끌려가는 진보세력을 보면서 환경운동의 어려움과, 자본주의의 막강한 힘의 위력을 새삼스레 보는것 같고, 한편으로는 개발을 추진하려는 그들이 과연 자본주의의 속성을 제대로 알기나 할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이 책의 저자 존 벨라미 포스터는 미국의 진보적인 좌파지 먼슬리 리뷰의 편집자라고한다. 그는 인간과 지구의 관계가 이미 전환점에 도달했다는것, 따라서 인간과 지구관계의 미래에대한 모든 희망은 거짓이거나 아니면 혁명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인류문화에 대한 진화의 전체역사는 간헐적인 평형상태를 유지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혁명이 일어나 새로운 사회조직을 만들어내는 과정으로 그는 보고있기 때문이다.

 

[다윈주의와 지적설계론]을 번역했던 역자는 눈에 익는다. 그러나 그는 또한 이 책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방향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쓰여진 [정치적으로 왜곡된 과학 엿보기]를 번역하기도 했다. 상반된 두개의 주장을 한 사람에게서 듣는 것 같아 조금은 떨떠름 하다.

 

지금의 세계는 엄청난 기후변화와 생태계의 변화로 인해 인간과 수많은 생물종이 위험에 처해 있다. 이러한 오늘날 생태문제의 핵심은 막다른 길에 다다른 자본주의 문명체계 라고 저자는 보고 있다. 자본주의는 끊임없는 자본확대 재생산의 논리를 바탕으로 출발하였고, 그 바탕 위에서만 존속할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은 자연을 정복대상이자 공짜선물로 인식하였기에 생태파괴는 자본주의 문명체계의 필연적인 결과이며, 자연과 인간이 상호의존적이고 역동적인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만이 이런 문제들에 대한 해답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지구는 위기를 맞고 있다. 그러나 지구생태 위기의 원인은 기후온난화뿐만이 아니다. 오염, 남획, 매립지 확대, 살충제와 제초제의 독성, 도시의 과밀화 등, 전쟁을 통해서라도 작금의 세계체제를 유지하고 축적의 논리를 지탱하려는 자본주의 끝없는 호전성이, 이 모든 것의 바탕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전지구적 위기를 그들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 

 

기후변화를 정치적으로 왜곡되었다고 몰아붙인바 있는 주류경제학자들과 독점자본은 2003년 펜타곤이 발표한 기후변화 시나리오에 세계인들이 충격을 받자, 서둘러 진화에 나선다. 그들은 기후변화로 인해 다른 생물종은 다 멸종하더라도, 인간은 기술의 발달로 적응할수 있다며 경제성장을 제약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오히려 경고하고 있다.

 

1962레이첼 카슨이 화학산업과 그들이 생산하는 치명적인 살충제를 고발하기 위하여 쓴책 [침묵의 봄]은 화학약품의 폐해와 환경에 대한 인식제고 등 부분적인 승리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는 살충제를 생산하는 거대기업에 완패하였다.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주류 경제학자들은 봄이 왔는데도 새들은 사라지지 않았다고 비아냥거리고 있다.

 

21세기벽두 군사주의와 제국주의가 공공연하게 등장한 원인의 상당부분은 세계경제를 지배하는 세력들이 점점 공급이 줄어드는 석유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지금 에너지관계 전문가들은 석유정점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이들이 말하는 석유정점은 석유고갈과 같은 의미는 아니며, 석유의 생산이 정점에 이르렀고 이후에는 지질학적, 기술적 요인으로 인해 생산감소가 이어질 것 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매장량이 아닌 생산량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문제는 이미 석유정점이 지났는가, 아니면 가까운 시일내에 오느냐의 문제이지 현실이 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고 한다. 이에 대한 미국의 반응은 신속하다. 선제공격, 개입 또는 보복의 가능성을 흘리면서 군사적역량을 확보하고 강화하고 있다. 페르시아만에 이어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까지도 군사적 위협을 가하고 있으며, 이것은 자본주의 역사와 일치하며 패권적 지위가 흔들리는데 대한 반응으로 새로운 에너지 제국주의는 이미 전쟁확대 노선을 추구하고 있음을 뜻한다고 한다. 화석연료의 사용으로 생긴 기후변화가 수십년내 인류문명과 지구상의 생물을 소멸시킬지도 모를 위기 속에서도 석유정점을 걱정하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아이러니라는 생각이 든다. 화석연료의 과도한 소비는 현대 자본주의 경제구조의 근간이다. 그래서 자본주의 체제가 석유시대의 종말을 두고 보인 즉각적인 반응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최대한 석유를 뽑아내겠다는 에너지 제국주의인 것이다.

 

이러한 전지구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시도된 세계환경개혁은 우리에게 실망만을 가져다 주었고, 또한 자본주의의 실체를 분명히 깨닫게 해주었다. 1992년 리오정상회의에서 발의된 전지구적 환경개혁 계획인 교토의정서와 생물학적 다양성에 관한 협약이 미국의 거부로 실패로 끝났고, 10년후인 2002년 요하네스버그 정상회의는 그 실패가 WTO를 위시한 그 자매기구 IMF, IBRD등 신자유주의 전도단체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실패를 확정한데 불과했다.

 

저자는 오늘날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환경재난을 분명하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생태에 관한 유물주의적 분석도구를 사용해야만 하고, 그러자면 마르크스의 유산을 밝혀내는 것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마르크스 생태학적 분석의 핵심요소는 신진대사 균열이론이라고 한다. 신진대사 균열이론이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이 자신의 존재기반인 자연조건으로부터 물질적으로 소외되는 현상을 파악하기 위해, 인간과 토지 사이의 신진대사적 관계에 균열이란 개념을 적용한 것이다. 신진대사 균열은 화학비료의 경우에서 보듯 일시적으로는 기술이 치유할수 있으나,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회복이 불가하며,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는데 있어 중심과제는 자연과의 새로운 관계수립이라고 인식하였고, 공동체적 사회를 기반으로 한 지속 가능한 생산을 통해 신진대사의 균열을 극복하려 했다.

 

자본주의의 본질은 이윤추구만큼이나 제국주의가 필수이며, 즉 제국주의는 자본주의가 세계화하는 과정의 산물이다. 따라서 경제위기를 통하여 제국주의를 파악하는 것은 핵심 본질을 놓치는 것 이라고 한다. 생태악화는 이윤추구만큼이나 자본주의의 기반이라고 한다. 따라서 생태악화가 자본주의에 얼마나 큰 경제위기를 가져다 주는가를 보아서도 안된다고 한다. 끝없이 팽창하는 제국주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생태파괴가 자본주의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위기에 대한 수많은 경고들, 기후변화에 따른 생물종의 멸종, 석유정점에 따른 세계 에너지위기와 자원전쟁 임박, 축수층의 붕괴에 따른 물부족 등, 여기에 대한 자본주의의 대응은 생산력의 대변혁, 즉 기술변화에 의존하여 사회적 관계의 현행체제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환경주의자들은 이제 기술적 대변혁 하나만으로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부족하며, 현재의 생산양식을 변화시키는 장기적이고 포괄적인 사회적 혁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저자는 인간세상에서 이런 혁명적인 전환은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인류의 문명과 생명체의 연결망이 지속가능 하려면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는 더 이상 유지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자본의 팽창이 제약을 받을때의 해답은 언제나 자연을 보다 철저하게 착취하고 악화시키는 것 이었기 때문이다. 지구는 이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하는 시점에 이르렀다. 이 방향은 공동체적 복지와 보편적 정의를 위한 것 이어야 하며, 그것은 바로 지구를 위한 사회주의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인간자체를 혁명하는 혁명적 실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한다. 이런 과업을 완수할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연소외와 인간소외 모두를 극복하도록 현재의 인간과 자연의 신진대사 관계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회관계를 변화시키는 것, 이것은 결합된 생산자들이 자연과의 신진대사적 관계를 이성적으로 통제하는 사회의 건설, 당대의 수요뿐만이 아니라 미래세대와 생명의 수요 모두를 배려하는 사회의 건설이라고 한다. 지금은 사회주의로의 이행과 생태적 사회로의 이행은 둘이 아니라 바로 하나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기후변화, 생태파괴.. 지구적인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바로 피부에 와 닿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서도, 그들이 환경주의자가 아니고,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아니지만, 홀로 묵묵히 생태를 배려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굿바이 스바루]에서 보았던 사람들이나, [고등어를 금하노라]에서 보았던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우선 당장 무엇인가를 할 수는 없지만 지구를 생각한다는 것, 우리는 소유자가 아니라, 후손에게 물려줄 동안의 점유자임을 생각한다는 것, 그것이 나 자신을 변혁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k*****1 2010.05.06. 신고 공감 8 댓글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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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길에 서있는 생태, 생태사회혁명은 역사의 진보냐 퇴행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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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혁명 이해를 위한 키(Key) 환경 운동가들처럼 실천적인 관점에서 생태의 변화를 보고자 한다면 이 책은 적합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생태와 인간의 상호의존 관계를 거대담론의 차원에서 보고자 한다면 이 책은 매우 넓은 시야의 이론적 렌즈를 제공해 줄 것으로 생각한다.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저자 존 벨라미 포스터John Bellamy Foster의 약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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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혁명 이해를 위한 키(Key)

환경 운동가들처럼 실천적인 관점에서 생태의 변화를 보고자 한다면 이 책은 적합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생태와 인간의 상호의존 관계를 거대담론의 차원에서 보고자 한다면 이 책은 매우 넓은 시야의 이론적 렌즈를 제공해 줄 것으로 생각한다.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저자 존 벨라미 포스터John Bellamy Foster의 약력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관건이다. 존 벨라미 포스터John Bellamy Foster는 환경과 관련된 과목을 가르치는 교수가 아니라 사회학을 가르치는 사회학 교수라는 점이다. 이것은 생태의 문제를 '우리가 쓰레기를 버리지 말고 기업은 환경정화 장치니 폐수 처리 장치를 사용하여 이 지구를 살리자' 라는 식의 접근이 아니라 인간사회의 구조와 연결시킨다. 즉 지구 생태의 문제를 한 개인이나 기업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사회체제인 자본주의 생산방식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이렇게 생태문제와 사회학을 연결시키기 때문에 이 책에서 사용되는 개념이나 용어는 모두가 거대담론을 형성시키는 것들이다. 이 책의 핵심 개념인 생태사회혁명, 생태산업혁명, 제본스의 역설, 마르크스의 신진대사 균열론, 생태제국주의 등과 같은 용어는 그 안에 담긴 구체적인 함의를 파악하는 것도 한권의 책이 필요할 정도의 거대담론을 형성시키는 개념들이다. 그리고 50페이지나 되는 각주에 포함되어 있는 참고자료는 하나같이 생소한 이름이거나 전문적으로 생태문제를 다룬 자료들이라서 이 책을 온전히 이해하기가 녹록치 않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사실들로 인해 일반인을 상대로 한 책이라기 보다는 전문가들을 상대로 한 논문모음집이라는 생각이 든다.1)

 

생태혁명의 개괄적 이해

이 책은 총 3부로 나뉘어져 있다. 1부는 전 지구적 위기, 2부는 마르크스의 생태학, 3부는 생태와 혁명이다.

 

1부 전 지구적 위기

이미 생태학자들이나 환경운동가들이 대부분 동의하는 것은 지구의 환경문제는 이미 심각한 수준에 도달해 있다는 데에 동의하고 있다. 이러한 대부분 공감대를 형성하는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IPCC가 채택하는 “정상영업”이라 부르는 사회경제적 시나리오를 따르고 있다. “정상영업” 이라는 것은- 정상영업이라는 용어가 낯설고 생소하고 무슨 상업적인 단어인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이 용어가 의미하는 내용을 담기에 적절한 용어인지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원서에는 어떤 단어가 쓰였는지 궁금해졌다.-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에 부합하는 생태변화 복원의 방식으로 이러한 방식은 최소한의 변화만을 시도하는 것으로, 자본주의의 이윤추구와 자연을 착취하는 생산방식을 그대로 고수한 채 단지 배출기준치 강화, 수소 연료 차량의 도입, 자연보호제도 개선등과 같은 기술적인 방법만을 사용하므로 분명한 한계를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은 이윤과 축적의 논리로 움직이는 자본주의의 논리를 그대로 깔고 있기 때문에 결코 진정한 의미의 인간과 자연의 화해(생태혁명)를 이룰 수 없다고 말하다. 그리고 진정한 혁명적인 방법을 위해서 마르크스와 19세기 자본주의 정치경제 비판자들이 제시한 3가지 개념을 중요시 한다. 그 중에서 세 번째 신진대사의 균혈이라는 개념으로 생태혁명과 마르크스주의를 연결시켜 나간다. 먼저 신진대사라는 것은 생리학 용어로써 생물이나 인체의 원할한 생리작용을 말하는 것으로, 이 책에서는 인간과 자연의 자연스러운 상호의존 과정을 말하는 용어로 확장되어 사용하고 있다.2) 자본주의식 생태변화는 그 한계가 분명히 존재하는데 그것은 인간과 자연의 신진대사의 균혈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즉 자연을 이윤과 개발의 대상으로 삼는 자본주의의 논리는 필연적으로 인간과 자연사이의 신진대사 균혈을 가져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그 모든 함의속에 생태 파괴의 DNA가 숨어 있어서 자본주의식의 “사회-신진대사적 재생산”, 다시 말해 이윤의 논리와 결별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다.3) 그래서 이것을 극복한 유일한 대안으로 마르크스의 생태학을 제시하는 것이다.

 

2부 마르크스의 생태학

2부는 이 책의 핵심 내용으로 저자가 진정한 생태혁명을 이룰 수 있는 대안으로 주목하고 있는 마르크스 생태학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솔직히 난 마르크스와 생태가 무슨 연관이 있을까 하고 생각했었다. 그가 주창했던 사회주의가-엄밀히 말하면 마르크스주의-생태에 대해서 어떻게 인간사회와 연결시키는지 매우 궁금해 하면서 읽어 나갔다. 읽어나가면서 생각 이상으로 마르크스 사상의 폭의 매우 크고 미치는 파장 또한 거대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생태문제에 관한 그의 사상은 생태혁명이 사회주의로의 이행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을 주지시켜 주고 있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역설적이지만 우리 시대 위기의 핵심인 자본주의와 환경의 적대적 관계는 어떤 면에서는 오늘날의 녹색사상가들보다는 19세기와20세기 초의 사회주의자들이 더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주된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생산양식으로서의 자본주의의 본질과 논리이다. 사회주의자들은 현대의 생태적 비판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모든 단계마다 결정적인 기여를 해왔다. 우리가 오늘날 당면하고 있는 환경재난을 분명하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생태에 관한 유물주의적 분석도구를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고, 그러자면 지금껏 알려지지 않은 마르크스의 유산을 밝혀내는 작업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4)

 

그리고 생태혁명의 이론적 자양분을 크게 마르크스의 신진대사 균열론, 지속가능성, 그리고 공산당 선언에서 얻고 있다.

 

3부 생태와 혁명

3부 생태와 혁명은 결론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저자는 진정한 생태혁명을 위한 방안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생태혁명은 반드시 사회혁명과 함께 근본적이고 철저하고 포괄적인 혁명이 필요하며 그러한 것을 레닌이 러시아를 전복했던 것과 같은 의미에서 사회주의적 혁명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것의 실천조건으로 자본주의 질서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노동자와 그들의 단합으로 투쟁으로 쟁취해야 할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 대목은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에서 자본주의를 전복하고 새로운 사회주의를 위한 실천방안으로 제시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저자는 다소 과격하게 이러한 글로벌한 시나리오는 칼 마르크스나 그의 추종자 윌리엄 모리스, 그리고 그들에게 영향을 주었던 에피쿠로스에게로부터 영감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로이 모이슨(Roy Morrison)의 말을 빌려 결론적으로 이렇게 주장한다.

 

모든 공동체 하나하나...모든 지역 하나하나가 아래로부터 민주적으로 조직되어야 한다. 새로운 체제는 어떤 수요와 욕구보다도 인간의 기본적인 수요-깨끗한 공기, 오염되지 않은 물, 안전한 식품, 적절한 위생, 사회적인 교통, 보편적인 의료지원과 교육, 이런 것들은 토지와의 지속가능한 관계 위에서 가능하다-의 충족을 앞세워야 한다. 아울러 모리슨은 "생태적 변증법은 투쟁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끝없는 산업적 살육을 부정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세상에서 이런 혁명적인 전환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류의 문명과 생명체의 연결망이 지속가능하려면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는 더 이상 유지되어서는 안된다.5)

 

결론

이 책은 이해하기가 어려웠고 읽는내내 머리가 아팠다. 그러나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회복의 관계를 사회구조적인 측면에서 찾았다는 점에서 내게 매우 유익했다. 그것도 자본주의라는 거대구조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가 그 파괴적인 영향력을 드러내고, 생태를 회복시키는 대안으로써 사회주의로 돌아간 간 것은 그야말로 혁명적으로 다가왔다. 반면 그러한 대안이 실천 가능한 것인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좌파 마르크스주의의 색깔이 너무나 분명한 책인 것 같아서 생태혁명에 대한 저자의 주장이 얼마만큼의 실효성이 있을지 깊은 의문도 들었다. 생태혁명을 위해서는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이것은 역사의 퇴행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기회가 되면 좀더 꼼꼼히 읽어보고 더욱 이해의 지평을 넓혀야 겠다.

 

ps. 내용적인 면에서 별 다섯 개를 충분히 줄만하지만 조금만 더 쉽게 풀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별 네 개를 주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

1) 존 벨라미 포스터, <생태혁명>, (인간사랑, 2010) pp. 9를 보라.

2) 같은 책, pp. 68~69

3) 같은 책, pp. 73

4) 같은 책, pp. 197

5) 같은 책, pp. 360~361



YES마니아 : 골드 f****1 2010.05.11. 신고 공감 6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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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구 종말론??   환경권력자(?)들이 주장하는 지구종말론적인 경고와 자본권력자들의 그에 대한 반박들은 어쩌면 그들만의 잔치처럼 느껴질때가 있다.미디어를 통한 그런 일련의 줄다리기가 우리 대중에게 원하는것은 뭘까 하는 의문.  갈수록 우린 모든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야 하는가? 속지않고 선동당하지 않으려면?     진실이 무엇이던간에 우린 '자유로운 정신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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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구 종말론??


  환경권력자(?)들이 주장하는 지구종말론적인 경고와 자본권력자들의 그에 대한 반박들은 어쩌면 그들만의 잔치처럼 느껴질때가 있다.미디어를 통한 그런 일련의 줄다리기가 우리 대중에게 원하는것은 뭘까 하는 의문.  갈수록 우린 모든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야 하는가? 속지않고 선동당하지 않으려면?

 

  진실이 무엇이던간에 우린 '자유로운 정신으로 스스로 선택하고 싶다' 

설사 지구종말이 10년안에 온다고 하더라도 공포심으로 우리를 조정하려 들지 말라고 말하고 싶은 이 엉뚱한 반발감! 제발 양들의 외침으로 우리의 혼을 쏙 빼려 들지 말고 조용히 이성적으로 말하라고. 종교적 공포심으로 인류를 옭아매더니 이젠 생태적 공포심이야??  -_-


 뭐 아는것도 하나 없는 주제에 이런 불손한 생각을 하며 이 책의 전반부를 읽었다.


  말하자면, 지구의 종말론을 운운하지 않더라도

현재 진행되고 있는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인간과 자연 모두를 소외시키는 ‘범죄’를 저지르고 있음이 명백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한다.



2. 우리에게 뿌리깊은 자본주의 사고방식???


  자본주의의 개인에 대한 착취, 제국주의의 제3세계에 대한 착취, 자본의 환경에 대한 착취, 에너지제국주의의 석유전쟁 등.


  이 책에서도 지적하고 있는, 지금 행해지고 있는 일련의 무시무시한 자본주의의 행패는 정말 우리의 분노심을 들끓게 만든다.

  (그 행패가, 그 속임수가, 모든 전쟁의 내막이, 얼마나 많은곳에서 행해지고, 얼마나 오래전부터 행해지고 있는지, 책이 두꺼워질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행패가 가능하게 만드는 동력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이런 행패에 소수의 기득권자가 이용하는 것은 무엇일까?


p 323 - 324

 자본의 축적은 어떤 면에서는 자기 추동의 과정이다. 한 단계에서 축적된 잉여는 다음 단계를 위한 투자 재원이 된다.

  그러므로 고전적 정치경제에 있어서 핵심적인 의문은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자본주의의 특징인 역동적인 축적을 촉발한 원초적인 자본은 어디서 나왔느냐는 것이었다.

  여기서 전, 시초, "원시"축적의 문제가 등장했다. (중략) 첫째, 토지봉쇄와 관습법적 권리의 폐지로 인한 농민들의 토지로부터의 축출. 두번째, 무토지 빈민 노동자 집단의 형성. 셋째, 갈수록 독점적인 소수에게 집중된 생산수단으로서의 거대한 부, 그리고 그 결과 공업중심으로 유입된 잉여로서의 부.

  새롭게 프롤레타리아화한 노동자들은 쉽게 착취대상이 되는 데다가 '걸인계층'의 실업자들 때문에 임금은 갈수록 낮아지고 생산의 이윤은 더욱 높아졌다.


  자본주의 초기의 '원초적인 자본' '원시축적'은 이렇듯 생산수단을 원천적으로 봉쇄당한 농민들이 프롤레타리아 노동자로 전락하면서 생계에 급급해 소수의 기득권자를 만들었다면


 현대의 우리는 왜 스스로 거대기업의 한 부품으로 전락되고 있는가?


  자칭 좌파라고, 운동권이라고 말하면서 촛불집회는 빠짐없이 참석하지만, 10년째 주식투자를 하고 있는 사람을 알고 있다. 노동없는 이윤은 좌파가 아니지 않냐고 스스로 알지도 못하는 질문을 던졌더니, 그건 그저 투자일뿐이라는 대답이 돌아왔었다.(불법이 아니라는)

  그러니, 좌파도 아니고 마르크스가 무엇을 말했는지조차 모르는 내게 뿌리박힌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은 또한 어떠할것인가.

  상위 1%를 향해 달려가는 어리석음에 대해 말하면서도, 여전히 아이언맨의 부와 권력이, 거기서 나오는 왜곡된 쿨함이 마치 나자신의 것인양 통쾌해하며 웃고 있진 않은가?


 지금 당연히 ‘내꺼’라고 알고 있는 것들이 과연 진정 ‘내꺼’인지 한번도 의심해보지 않았다는거.

 내가 1000원 내고 먹는 음식에 대한 나의 권리는 무엇인가에 대한것 (먹을 권리만 있을뿐 버릴 권리는 없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는것.)

 내가 저렴하게 이용하는 옷이나 석유, 음식들이 모두 그런 폭력의 결과물이라는것을 주의깊게 바라보지 않는것.(헬렌 니어링조차 좋은옷을 싸게 샀다고 자랑하지 않았던가! 하물며 나는!)


  자본주의나 제국주의나 다국적기업등에 대해, 그들의 횡포에 대해, 체제의 횡포에 대해 폭로하는 글을 읽을때마다, 분노심 다음에 오는것은, 그런 우려이다.

 그 분노심이 우리에게 너무 쉽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해주고 마는것 아닐까?

 기득권에게(정작 누구 하나로 대변되지 않는 불명확한 실체에), 체제에게, 모든 죄를 덮어씌우고, 그런 사실을 알고 분노하는 나 자신은 정작 면죄되는가?

 그들이 아프리카를 착취해서 뿌리는 값싼 무엇이, 그들이 아마존을 착취해서 뿌리는 값싼 무엇이, 바로 우리들이 소비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루어질까 하는 생각이 드는것이다.

 

 뭐, 죄책감에 시달리고 싶다는게 아니라, 이 책에 인용된 레이첼 카슨의 말처럼

 

p111 사회가 할수 있는 최악의 행위는 그런 위협 앞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폭넓은 사고를 보여주는 다음과 같은 표현을 했다.: “새로운 생활방식으로 변화하고 진화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뿐만 아니라 바람직한 일이다.”

 

p113 그는 우리에게, 특히 자식을 기르고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인공적인 것에 대한 무관심이라는 편견과 우리의 힘의 원천으로부터 소외되는 상황”을 거부하라고 요구했다.

 


 

3. 깊이 생각해봐야 할 문제들


3-1. 리비히의 토양영양소의 약탈체계


p198 리비히는 영국농업이 채택한 “고도경작”방식은 이성적인 농업에 반하는 “약탈체계”라고 표현했다. 식량과 섬유가 수백마일, 때로는 수천 마일의 거리를 이동하여 농촌에서 도시로 운송되었다. 이것은 토양의 필수적인 영양소-질소, 인, 칼륨 등- 가 함께 이동함을 의미했다. 이 필수 영양소는 토양으로 환원되지 않고 인간과 동물이 쏟아내는 폐기물 형태로 도시를 오염시켰다.

 

p199 그는 영국인들이 건강한 뼈와 큰 체격을 유지할 수 있었던것은 나머지 유럽 나라들로부터 인골분을 포함한 토양의 영양소를 약탈해 왔기 때문이다.


  자국의 농산물을 먹어야 한다는 이론은 여러 가지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왔었다.

-우리것이 몸에 좋다는 신토불이 이론,

-장거리 운송으로 인한 화석연료의 소비문제에 대한  로컬푸드 운동,

-'죽음의 밥상’의 저자처럼 제3세계 농민들을 위해서 자국의 농산물만을 고집하면 비윤리적이라는 주장,

-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업과 공정무역 논쟁 등.

 그런 주장들 속에서 나는 어느쪽에 마음을 두어야 할지 갈피를 못잡고 있던것이 사실이다.


나는 저자 덕분에 새롭게 알게된 토양영양소의 약탈, 또는 토양영양소의 이동과 순환고리의 단절로 인한 토양의 황폐화, 도시의 오염화의 악순환에 관한 이야기를 깊이 생각해보고 싶다.

 

공정무역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은 인용은 눈여겨보아야 할것같다.

 

p326  마르크스는 1848년 자유무역을 비판하는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 “신사여러분, 아마도 여러분은 커피와 설탕의 생산이 서인도제도의 자연적인 운명이라고 믿고 있을 것입니다. 상업이 이 섬들을 괴롭히지 않았던 두 세기 전에는 자연은 이곳에 사탕수수도 커피나무도 심지 않았습니다.”

  유럽으로 수출하기 위한 현금작물을 재배하는 단일작물 경작농법의 등장은 자본주의 세계경제 발전의 산물이었으며, 중심부가 자신의 이윤을 위해 주변부를 공개적으로 약탈하는 방식이었다.

 

  자급자족 가능성이나 토양영양소의 유출이나, 그들의 자연스런 발전의 저해의 측면에서 볼때, 과연 공정무역만으로 그들에게 정당하다고 말할수 있을지 모르겠다.

우리가 소비해주는것이 과연 그들을 도와주는것일까? 질문해볼일이다.

 


 

3-2. 도시와 농촌의 대립관계 해소

 

p260  보조적으로 비료를 사용하면... 토지 비옥도의 저하를 회피할 수 있겠지만 갈수록 더 많은 양의 비료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고, 결국 농업에 더 큰 부담을 줄 수밖에 없다. 이것은 자연의 불가피한 선택이 아니라 현행 사회조직의 직접적인 결과이다. 도시와 농촌의 대립관계를 극복해야.... 토양으로부터 제거된 물질들이 온전하게 되돌아올 것이다.


 이 책에 인용된 이 글은 칼 카우츠키의 ‘도시의 농촌 착취“의 일부분이라고 한다. 하지만 일방적인 도시의 농촌착취라기 보다는 마르크스가 지적했듯이 도시와 농촌의 인위적인 분리로 인한 서로의 소외의 문제가 아닌가싶다.


p290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생태문제를 부르주아 사회의 편협한 시각을 극복하거나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임박한 목표로 설정하는 차원에서 보지 않았다. 그들은 도시와 농촌의 대립관계를 해소하는 것이 자연으로부터의 인간소외를 극복하는 핵심과제라고 보았다.


  우린 태어날때부터 도시와 농촌이 분리된 사회에서 살았기 때문에, 내가 도시에서 살면서 느끼는 자연으로부터의 소외감, 농촌사회가 느끼는 문명의 소외감등이 극복하지 못할 필연성 같은 것으로 생각되었었다. 둘중에 하나를 포기해야만 한다고.

  그런데 그 모든 문제가 토지를 농민으로부터 빼앗고, 집약농업을 하고, 농민들은 도시의 노동자가 되고, 도시는 그 모든 것을 소비하기 위해 자연으로부터 소외된채 숨막히도록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것이다.

  도시와 농촌이 분리되어 있지 않은 세상. 그것은 꿈일뿐일까?


 p376

  맥키번은 “쿠바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반지속가능한 농업의 실천 모델을 만들어냈다. 쿠바의 농업은 세계 여타국가의 농업과 달리 석유, 화학물질, 대량의 식량수출입에 의존하는 정도가 매우 낮다.  .... 쿠바에는 수천곳의 오르가노포니코스-도시텃밭-가 있고 아바나 한 도시에만 200곳 이상이 있다”고 했다.


  ‘즐거운 불편’의 저자 후쿠오카 켄세이도 앞으로 도시민들의 취미생활이 정원가꾸기나 골프가 아니라 논농사 짓기가 될것이라고 전망하지 않았던가. 이젠 취미가 아니라 자급자족의 필요성에 의해, 토양영양소 순환의 측면에서, 화석연료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서, 인간과 자연이 서로 소외되지 않기 위해서도 도시와 농촌의 대립관계는 해소되어야 할것 같다.




4. 왜 저자는 마르크스를 변호하는데 그토록  많은 지면을 할애했는가?.


 

  한사람의 이론이 그토록 완벽해야만 하는가?

어떤 사람의 이론이 단 한치라도 어긋남이 있으면 모두 무용지물이 되고 마는가?

나도 안목이 없어서 마네킹에 입혀져있는 옷을 홀딱 벗겨 사야할 지경이지만

저자의 말을 인용해보면p220 이들 사상가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때로 기계적 해석에 함몰되는 경향이 있으므로 우리가 그들의 저작을 읽을 때는 이 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뛰어난 통찰력이 우리를 맹목의 길로 이끌지는 않는다.

우린 누구의 사상에서든지 진리를 찾아낼수 있다. 설사 나와 반대편에 선 사상가라하더라도.


 저자는 마르크스를 옹호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나를 기쁘게 했던 대목들이었다.)


 

p 291   마르크스가 그의 시대에 생태적 모순을 분석함에 있어서 특정한 경제위기 이론의 좁은 틀 안에 갇히지 않았듯이 우리도 오늘날의 생태적 모순을 파악함에 있어서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경제위기 이론은 중요하기는 하지만 단면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심지어 광신주의에 빠질 위험을 갖고 있다. 


p292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의 궁극적인 강점은 경제위기 이론이었던 적이 없고 계급투쟁 이론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보다 더 심오한 역사에 대한 유물주의적 인식이었다.


p301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자연보다는 인간의 욕구에 주목한 것은 사실이며, 그런 점에서 “생태중심적‘이 아니라 ”인간중심적“이란 비난을 받을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입장에서는 잘못된 이원주의이다. 그들의 관점에서는 자연과 사회는 정반대되는 존재가 아니라 ”신진대사적“ 상호작용의 한 부분으로서 서로 관계를 맺고 진화한다. 큰틀에서 보자면 이것은 자연과 인간사회는 복잡한 상호의존과정을 거쳐 함께 진화한다고 보는, 오늘날 우리가 ”공동진화“라고 부르는 관점과 근사하다. 공동진화론이 그리고 있는 자연과 사회의 복잡한 상호작용 가운데에는 ”인간중심적“이라거나 ”생태중심적“이란 개념이 자리 잡을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자연을 지킬때도 우리는 인간에 의해 변형된 그 무엇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와우~!!!)


하지만 그 모든 장점에도 불구하고,

잘 알지도 못하지만,

나는 사회주의에 대해 막연한 거부감이 있다.

그래서 김우창의 다음의 말을 인용하여 그런 나의 마음을 대변하고 싶다.

 

<자유와 인간적인 삶에서 발췌>

 

p44 그런데 지금 시점에서 신자본주의 또는 자본주의에 대체할 수 있는

사회조직의 원칙이 무엇이 될수 있는지는 전혀 짐작할 수 없다.

 그러면서도 이에 대한 많은 비판 뒤에 유령처럼 서려 있는 것이

마르크스주의 또는 공산주의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언어와 진실이 개인적인 이해관계에 희생된다고 한다면,

마르크스주의,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는

사회를 개인 이익의 거래 공간 이상의 것이 되게 하고자 한다.

따라서 이 체제에 있어서 언어의 진술은 더욱 엄격한 공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고 더욱 더 심각한 보호구역이 되어 있을 성싶다.

그러니 만큼 신자유주의 비판에 마르크스주의의 그림자가 서려 있다면,

마르크스 체제에서의 공적 언어 그리고 그것이 조종하는 인간 동기의 문제를 잠깐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간단한 답변은, 아렌트식으로 말하여,

지나치게 일방적인 문제의식에 기초한 마르크스주의의 문제 접근은

여기에 바른 대답을 제공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중략) 자본주의 체제에서 '사실'이 완전히 상실되는 것이 아니면서도

그것이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경쟁 전략의 수단이 된다고 한다면,

공산주의 사회에서 '사실'은 가장 유일한 가치-평등의 확보라는 지상의 가치와

목적에 종속된다. 이것은 다시 권력화하고 체제화함으로써

도덕적 강박에서 정치적 억압으로 바뀐다.

인간의 자유, 자유에 기초한 언어의 진실, 그 공적인 공간의 구성, 이러한 것들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외적으로 부과되는 필연의 체계를 넘어간다.

(중략)

  그런가 하면 어떤 종류의 의견은 참으로 우리 의견인가를 검토할 틈도 없이

세상에 살다보니 저절로 우리 자신의 의견이 되어 있지만,

그것이 편의상의 견해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좌나 우를 막론하고 마찬가지이다.

신자유주의 경제 원리의 지배나 그에 대한 반대 또는 민족주의나 세계화,

그에 대한 찬반의 의견 등은 많은 경우 우리도 모르게 강요된 심성의 표현이기 쉽다. 다만 공산주의 체제하에서 이것이 더욱 체계적으로 강화된 것은 사실이다.

그 체제는 단순한 권력의 독재 체제가 아니라,

하벨이 말한 바대로, 사회와 역사에 대한 ‘바른 이해’에 기초해 있다. 그것은 “모든 질문에 대하여 답을 가지고 있다. [일단 그것을 받아들이면] 모든 것이 분명해지고 - 인생은 새로운 의미를 띠게 되고, 모든 신비, 모든 답이 없던 질문, 불안과 고독은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그 결과는 이성과 양심과 책임을 버리는 일이고, 거짓과 위선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된다. 바른 이해와 오류의 교차는 ‘노동계급의 이름으로 노동계급을 탄압하고, 개인의 예속을 개인의 궁극적 해방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용이하게 한다.”



4. 체제의 문제?


  현재의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인간과 자연을 소외시키고 있는것이 명백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오로지 자본주의라는 '체제'의 탓이다. 라고 말할수도 있는것일까?


  만약, 그렇게 말할수 있다손치더라도

사회주의는 그에 대한 대안으로 유일한 체제인가?

하지만 저자도 말했듯이 <소련이 생산자체를 목표로 삼았고, 새로운 착취계급이 등장했다는 점에서 사회주의의 목표로부터 명백하게 일탈한 체제였다.>


  문제는 언제나 그 '일탈 가능성'이다.

어쩌면 가능성이라는 말보다 당위성이라는 말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저자가 인용했듯이 자본주의는 마지막 나무 한그루까지 베어낸후에야 몰락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련은 이미 그렇게 몰락한것이 아닌가? (이건 질문입니다...-_-)


  그렇다면 저자가 말하는 이상적인 사회주의는 어떤 조건에서 가능한가?

결국은 사회체제의 혁명보다 인간개발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저자가 명백히 유토피아적이라고 비판한 대이행의 새로운 지속가능성의 시나리오(사회구조의 변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주로 가치관과 생활방식의 변화를 통해서 진행되는)만큼이나

저자가 꿈꾸는 이상적인 사회주의(계층질서의 밑바닥에 있는 노동인구와 공동체의 투쟁으로부터, 결합된 생산자들이 인간과 자연의 신진대사적 관계를 이성적으로 통제하는) 또한

p361 인간세상에서 이런 혁명적인 전환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두가지 시나리오 모두 같은 전제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p374 갈수록 우리의 삶은 진정한 수요와는 관련 없는 조작된 수요의 진흙탕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는 것을 우리 스스로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중심적이냐 생태중심적이냐 하는 개념의 논쟁이 아니라

지구가 멸망할까봐 벌벌 떨면서 억지로 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 따로가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인간의 이기심이나 끝없은 욕심이 '조작된 수요의 진흙탕'에서 벗어나

'자신의 진정한 수요'를 깨달을수만 있다면

아무리 유토피아가 요원하다 하더라도.

우린 이제 생각하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나의 일상과, 나의 사고방식과, 나의 추구에 대해서

혹여 인간을 소외시키고 있지 않은지

혹여 자연을 소외시키고 있지 않은지

혹여 나 자신을 소외시키고 있지 않은지

진지하게 생각하고, 다른이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겠다.

 

그리고 내 작은 일상에서부터, 조그만 변화를 기대해보고 싶다.

 

다시 나는 "좁은 들판에서도 자유로울수 있다"고....말하고 싶당.

(너무 낭만적인가? -_-;;;)




ps. 이 책은 출판사이벤트에 참가하여 무료로 받은 책임을 밝힙니다.
c****8 2010.05.17. 신고 공감 4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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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더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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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안의 작은 손가락에 상처가 나면 아프고 쓰리다. 그리고 약을 바르고 아물기를 기다린다. 자연이 상처를 받으면 상처가 난 곳은 아프고 쓰릴텐데... 우리는 자연에게 약을 바르고 아물기를 기다리고 있는가?   요제프 슘페터가 자본주의를 “창조적 파괴”라고 미화한 얘기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자본주의 체제의 파괴적인 창조성을 더 잘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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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안의 작은 손가락에 상처가 나면 아프고 쓰리다. 그리고 약을 바르고 아물기를 기다린다. 자연이 상처를 받으면 상처가 난 곳은 아프고 쓰릴텐데... 우리는 자연에게 약을 바르고 아물기를 기다리고 있는가?

 

요제프 슘페터가 자본주의를 “창조적 파괴”라고 미화한 얘기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자본주의 체제의 파괴적인 창조성을 더 잘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계급을 기반으로 한 축척의 새로운 배출구를 찾으려는 자본의 끝없는 탐욕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이전에 존재하던 자연조건과 사회적 관계는 파괴되어야 한다.

 

그것은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의 이기적 추구는 지구 생태계 보전이라는 거짓 명분으로 내세우게 만든다. 우리는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지구와 인간이 공존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발전지속적이면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자연과 더불어 발전을 추구한다는 것은 하나의 변명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랜슬리는 생태를 자연주의적,목적론적 질서로 파악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질서가 와해된 형태로 파악했다. 그래서 “현대 세계의 인간의 파괴적 행위”를 지적했으며, 인류를 “이전에 존재하던 에코시스템의 평형상태를 꾸준히 교란하여 마침내 에코시스템을 파괴하고 동시에 아주 다른 성격의 새로운 에코시스템을 만들어내는 예외적으로 강력한 생물적 요인”으로 규정했다.

 

자연을 지키고자 했던 행동들은 자연을 지키는 것이 아닌 자신들의 목적을 이룬 하나가 되어버린 것이다. 자연은 스스로 정화시키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런 정화능력은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강물의 밑바닥을 파헤치면 그전에 있던 오염물질이 다시 물에 녹아 버린다는 말이 있다. 정화를 했다고는 하지만 그저 쌓이고 묻히고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자연의 정화능력은 허약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일 것이다. 그런 자연의 정화능력을 믿고 우리는 지금까지 자연에게 무수히 많은 해를 주었고, 그것이 정당한 방법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자연을 위한 방법이 그저 진보주의적인 입장에서만이 아니었으면 더욱 좋았겠다 싶다. 보수주의적인 입장에서도 아닌 진보와 보수가 더불어 우리가 살아가는 자연을 아끼는 마음으로 지구를 다시 보면서, 지금보다 더 또렷하게 자연을 볼 수 있지 않을까하는 아쉬움을 느낀다. 발전지속가능한 경제성장을 위해서 자연을 파괴하고 그 자연에 우리가 필요한 것으로 만들어간다면 그것은 자연과 더불어 가는 것이 아닌 자연을 이용하는 하는 형태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자연은 그냥 그대로 수긍하고 있을까? 아니면 자연도 우리에게 당한만큼 반란을 일으킬까?

 

호킹 박사가 미래에 가 볼 수 있다는 신문의 제목을 읽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 후손의 모습을 보고 싶어진다. 우리의 결정이 그들에게 많은 행복과 안락함 삶을 줄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a****5 2010.05.05. 신고 공감 3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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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를 위한 지구 살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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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시대를 뒤이를 시대는 과연 어떤 시대일까? 현재 자본주의는 정점을 넘어서 종착점에 다다른 것인가? 자꾸 삐그덕삐그덕 우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 책은 이런 물음에 대한 해답에 살짝 귀띔을 해주었다.     이 책에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그리고 <생태 환경>에 대해서 자주 그리고 많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서로 대립적 상관
"우리 모두를 위한 지구 살리기" 내용보기

  자본주의 시대를 뒤이를 시대는 과연 어떤 시대일까? 현재 자본주의는 정점을 넘어서 종착점에 다다른 것인가? 자꾸 삐그덕삐그덕 우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 책은 이런 물음에 대한 해답에 살짝 귀띔을 해주었다.

 

  이 책에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그리고 <생태 환경>에 대해서 자주 그리고 많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서로 대립적 상관관계에 있다기보다는 서로 바투 맞물렸으면서도 서로 맞선 형국이라 조금 정리가 필요할 듯 하다.

 

  <자본주의>는 익히 알고 있듯이 자본을 생산수단으로 하여 생산활동을 하는 사회경제체제이다. 소위 자본가라는 사람이 큰 자본을 들여 공장(생산 시스템)을 만들고 노동자를 고용하여 재화(財貨) 생산하고 판매하여 이윤을 창출하고 다시 그 자본을 투자함으로써 사회경제를 원활하게 돌아가게 하는 체제이다.

 

  이 시스템은 마르크스의 <사회주의>가 등장하기 전부터 시작되었으나 더욱 발전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사회주의>가 등장하면서부터 였다. 그래서 이 둘은 뗄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가 갑작스런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으로 <자본주의>의 일방적 승리처럼 되어 버렸다.

 

  그러나 <자본주의>에는 큰 맹점 두 가지가 있다.

 

  첫째, 겉으로는 모두가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을 내세우지만 속으로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갈라서게 만들어서 억압과 착취를 양산하는 것이다. 즉, 가진 자는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지만 못 가진 자는 한정된 것만을 누릴 수 있게 된단 말이다.

 

  둘째, 사람과 <생태 환경>를 점점 더 멀어지게 만든다. 무슨 소린가 하시겠지만 설명을 듣고 나면 고개를 끄덕이실 게다. 앞서 말한 억압과 착취 현상이 사람과 <생태 환경> 사이에서도 벌어진단 말이다. 다시 말해, 사람에게 풍요로운 재화(財貨)를 만들기 위해 자연을 소유의 대상으로 삼고 파괴를 일삼는단 말이다.

 

  비단 멸종된 동식물과 멸종위기에 처한 모든 것들만 한정할 것이 못 된다.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돈(재화)으로 환산되어야만 가치가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모든 것을 죽이고 파헤쳐서라도 돈으로 바꾸어야만 한다.

 

  그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사람들에게 전가된다. 예를 들어, 지구온난화 위기에 처한 상황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자본주의는 과학기술과 만나 더욱 호황을 누렸고 발달된 과학기술은 <생태 환경>은 물론 지구의 모든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위력을 자랑하고 있다. 온실효과에 따른 해수면 상승, 그리고 그로 인한 생태계 파괴.

 

  해수면 상승이 뭐가 문제인가?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으리라. 간단한 예로 해양 생물의 상당수가 <산호초> 주변에 서식한다고 한다. 그런데 산호초는 <얕은 바다>에서만 살 수 있다. 그런데 해수면이 상승하면. 그렇다. 산호초 군락은 죽을 수밖에 없다. 생태계를 좌우하는 먹이사슬을 잘 알지 않는가. 결국 사람에게까지 그 피해는 고스란히 전달된다.

 

  GMO(유전자변형식품)는 어떤가? 병충해에 강한 유전자를 이식해 튼튼한 작물이나 동물을 인위적으로 만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모든 질병과 해충의 유전자를 이식할 수 없으니 아주 강한 <농약>에도 끄떡 없고 <항생제>와 같은 효과를 내는 유전자를 이식하는 것으로 보는 게 더 적절한 설명일 것이다. 이런 식품을 사람이 장기간 섭취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는지 아직 아무로 예측할 수 없는 일이다. 현재 <자본주의 천국>인 미국이 가장 많이 생산하고 있는데 생산된 GMO의 상당량이 아프리카의 굶주린 주민들에게 헐값도 아닌 비싼 값에 <원조>되는 모양이다. 내 생각엔 이건 <생체 실험>에 버금가는 일이라고 본다. 물론 GMO가 안전하다니 뭐라 그럴 처지는 못 되지만...

 

  이렇게 <자본주의>는 흔들리고 있다. 물론 나름 자구책을 마련해서 <지속가능한 발전> 뭐 어쩌구저쩌구 떠들고는 있지만 여전히 <생태 환경>을 착취하고 파괴하는 데에는 변함 없다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다. 어떤 이가 말하길, "<우리 강산 푸르게 푸르게>를 외치며 자연을 되살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지만 썩을 지 안 썩을 지도 모르는 기저귀를 만들면서 어떻게 자연을 되살리겠다는 거야."라고 말했는데 <자본주의>의 정곡을 찌르는 말처럼 들렸다.

 

  나무나 지하자원을 얻기 위해 벌목을 하고 산을 깎아낸다. 그리고서 인공적으로 어디선가 키운 묘목을 옮겨 심고 기왕 깎아낸 산을 평탄화하여 길을 낸다. 그동안 자연의 위대함과 거대함을 혜택을 누린 <자본주의>는 더이상 견디지 못한 <지구 자연>에게 역습 당하는 꼴은 아닐까. 이외수 작가가 말했던가? 비유하자면 사람은 지구적 차원에서 볼 때 <암 덩어리>와 닮았다고.

 

  그렇다면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은 있는가? 실상 없다. 아직은. 자본주의를 맹렬히 비난했던 <사회주의>가 그렇게 맥없이 자빠지고 나선 다른 대안이 없을 성 싶다. 그러나 요즘엔 <사회주의>와 <생태 환경>이 서로 손을 잡은 꼴이 조금씩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고 있다. 지구와 평화롭게 지내려는 노력이 크지는 않지만 조금씩조금씩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중이다.

 

  비록 자본주의가 사람에게 <풍요>를 가져왔을지언정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 주지는 못했다. 먹거리 해결이 안 돼서 굶주림을 겪던 이들에게 당장의 풍요로움이 행복했을지는 몰라도 먹고 또 먹어서 몸을 살찌울망정 우리네 마음까지 보듬어주지 못하는 세상이 되고 만 것이다. 더구나 생존까지 위협할 지경이 되고 나니 이젠 생각이 조금 바뀌게 된 것 같다.

 

  조금 부족해도 <생태 환경>을 위해 조금 양보하고, 조금 불편해도 <생태 환경>을 위해 기꺼이 불편함을 즐기는 세상을 바라게 된 것이다. 이 책이 말하는 <사회주의>와 <생태 환경>의 만남은 바로 이런 것이란 생각이 든다. 즉, <생태 혁명>. 이젠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었다. 다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해서 말이다. 더 긴 말이 필요할까?



YES마니아 : 로얄 z******8 2010.05.10. 신고 공감 2 댓글 4
리뷰 총점 종이책
사회학과 환경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었다.
"사회학과 환경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었다." 내용보기
『생태 혁명』은 바로 인간을 위한 길을 조언할 뿐이다. 그것을 따라 가는 것은 인간들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다. 어떤 결정을 내려 후세에게 이 지구를 돌려줄 것인지는 전적으로 현 시대의 사명이라는 생각을 갖고 무겁게 하지만 침착하고 현명하게 판단해야 할 것이다. “혁명”이라는 말의 뜻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정확히 알아보았다. 혁명이라는
"사회학과 환경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었다." 내용보기
 

『생태 혁명』은 바로 인간을 위한 길을 조언할 뿐이다. 그것을 따라 가는 것은 인간들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다. 어떤 결정을 내려 후세에게 이 지구를 돌려줄 것인지는 전적으로 현 시대의 사명이라는 생각을 갖고 무겁게 하지만 침착하고 현명하게 판단해야 할 것이다.

“혁명”이라는 말의 뜻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정확히 알아보았다. 혁명이라는 뜻에는 세 가지의 뜻이 있었다. 물론 비슷한 뜻이라 마지막 하나만을 이렇게 제시하는 것이다. - 「국립국어원」사이트에서 참조했다.

혁명

이전의 관습이나 제도, 방식 따위를 단번에 깨뜨리고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급격하게 세우는 일

책 표지에 생태 혁명이라는 큰 제목이 있고 그 제목에 곁들인 말들이 더 충격적이었다. “지구와 평화롭게 지내기” 라는 말보다는 “자본주의 문명이 지나간 자리에는 사막이 남는다” 는 말이 더 충격적이었다.

이 책을 통해서 사회학이라는 분야와 환경이라는 관계와  마르크스에 대한 새로 새로운 시각이 생긴 것은 나에게 조금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좋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얼떨떨한 기분이다. 이제 한 번 겪어본 것이니 몇 번 더 살펴볼 생각이다. 그러면 조금 더 사회와 환경, 자본주의 문명이 어떻게 발전해야 우리의 환경을 헤치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나만의 생각도 세워질 것 같다. 아직은… 그 생각이 흐릿하기만 한 기분이 든다. 그리고 특히 생태 제국주의 대한 내용을 읽을 때는 “2003년  봄, 미국은 영국과 함께 이라크를 침공했다”라는 서두에서부터 자원 때문에 전쟁까지 일으킨 제국주의의 모습에 대해 두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분량이 방대한 양을 자랑하다보니 시간이 많이 걸리기도 했다. 우선 목차부터 살펴보았다.

목차 :

책머리에 

역자서문(역자에 대한 소개는 책의 뒤편에 자세히 수록이 되어 있습니다)

도론 : 생태혁명

실제 내용이 있는 부분은 총 3부로 이루어져 있고, 마지막으로 책의 중간 중간에 삽입된 참고한 문장들에 대한 주석과 찾아보기로 구성이 되어 있었다.

1부 : 전 지구적 위기

2부 : 마르크스의 생태학

3부 : 생태와 혁명

2부의 마르크스의 생태학은 지은이의 소개에도 거론된 책 제목이기도 하다.

지은이 : 존 벨라미 포스터 - 오리건 대학의 사회학 교수이며 『마르크스의 생태학』(2000)

- 책의 날개 참조


책머리에 보면 이 책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다. 오랜 시간 걸린 책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이 책 『생태 혁명』은 지난 10여 년 동안에 쓴 글들을 모아 모은 것이다. 도론을 제외한 모든 장은 이전에 출판된 원고에 기초했지만 이 책에 싣기 위해 문장을 손보고 내용도 상당부분 수정했다.

절대로 급하게 나온 책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글로 인해서 읽어볼 가치가 있음을 알 게 되었고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도론 부분에 보면 이런 글이 있다. “생태혁명은 오늘날 우리의 최고의 이상이자 가장 절박한 필요이다. 볼리비아의 사회주의자 대통령 에보 모랄레스는 2008년 11월 28일에 다음과 같은 말을 발표했다.” 그의 말 중에 마지막 몇 구절만 인용해 보자면 “우리는 끝없는 개발, 무제한적인 산업화, 역사를 부정하는 현대성, 타인과 자연을 희생시켜 얻는 더 많은 축적을 통해 ‘더 잘 사는‘ 방식을 추구하다 실패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라는 생각에서 이 책이 나온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갑자기 자본주의라는 사회적 시스템을 버리고 사회주의로 바뀐다고 좋은 방향으로 바뀌는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현재의 자본주의만으로는 생태계는 점점 더 파괴되어지는 것에는 일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이 책을 읽고 자본주의에서 환경문제에 대해 조금 더 신경을 쓰며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가 아닐까 싶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있는 글을 읽으면서 환경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 본 시간이었다.

모든 사회는 토지의 소유자가 아니다. 그들은 토지의 점유자이자 수혜자에 지나지 않으므로 선량한 가장으로서 토지를 보다 개선된 상태로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책임을 지고 있다.”  - [p. 249, 250] 참조



p********p 2010.05.02. 신고 공감 2 댓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