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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하거나 방어할 잠시의 겨를도 없이 사방에서 휘감기는 것들은 모두 싫어한다. 그렇게 싫을 수가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싫음'보다는 '두려움'에 가까울 것이다. 내 몸을 향해 전방위적으로 몰아치는 것들. 그것이 설령 열락이나 더할 수 없는 행복일지라도 말이다. 이응준의 소설 속에는 그런 두려움이 내재되어 있다. 우리가 한동안 외면했거나 일부러 애써 피하려 했던 그런 것들. 형체도 없이 내 오감의 비상구로 슬며시 들어와서는 일순 전신에 소름이 확 돋게 하는 그런 것들 말이다.
우리가 바람의 방향을 알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것은 이론적인 귀결일 뿐이지 결코 실제적인 체감은 아니다. 머리카락이 날리는 방향을 보거나 나뭇잎이 쏠리는 방향을 보고 바람은 그 반대편에서 불어오겠거니 편하게 유추하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그 바람 속에 있었을 뿐, 단 한 번도 내 몸의 일부만(또는 한쪽편만) 휩쓸고 지나가는 바람은 본 적이 없다. 이응준의 소설은 8월말의 습한 바람처럼 그렇게 읽힌다. 지면에서 튀어나온 낱글자는 어색하게 주변을 맴돌다가 어느 순간 물에 젖은 거즈처럼 모공 속으로 형체도 없이 스민다. 마치 높은 산을 오를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우룩한 는개에 젖듯이.
이 소설집에는 표제작 「내 여자친구의 장례식」을 비롯,일곱 편의 중,단편이 실려 있다. 각각의 소설은 주제와 소재는 저마다 다르지만 그 색깔은 서로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의 본원적인 고독과 죽음. 작가의 시선으로 바라본 두 개의 키워드는 밀란 쿤데라식 철학적 사색과 신경숙의 슬픔이 교묘히 뒤섞이며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마치 우물 내벽에 매달린 두레박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을 지향하면서도 팽팽한 동아줄에 의해 허공에서 위태롭게 대롱거리는 두레박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딱히 바쁜 일도 없으면서 습관적으로 울려대는 경적음처럼 삶은 시간이 멎기 전까지 헛된 몸짓일망정 쉼 없이 바동거려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 덧없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향해 비틀거리며 걷는 인간 군상들은 애처롭기 그지없다. 그들에게 '멈춤'은 '죽음'과 동일어가 된 지 오래이니까.
작가 이응준의 소설이 신경숙의 멜로나 축축함으로 빠지지 않는 까닭은 대화와 대화 사이, 장면과 장면 사이에 교묘히 파고드는 철학적 사색 덕분이 아닐까 한다. 예컨대 위태롭게 매달린 두레박은 우물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지지 않는다. 작가의 냉철함은 딱 그쯤에서 멈춘다.
"나는 가만히 턱을 괴고 창 밖으로 시선을 옮긴다. 비 오는 지구는 그렇지 않은 날과는 너무도 다르다. 그렇게 지겹던 방구석도 장마철만 되면, 꼭 내가 있어야만 할 자리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눈을 감는다. 함박눈은 눈(目)으로 봐야 하지만, 비는 먼저 소리로 다가온다. 아침에 커튼을 걷어봐야만 비로소 폭설이 내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과는 달리, 우리는 빗소리에 잠이 깨어 새벽녘을 알 수 없는 감회로 서성인다. 만일 누군가 내게 어쩔 수 없이 눈 오는 세상과 비 오는 세상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면, 난 잠결에도 계속 지붕이 젖고 강이 불어남을 짐작할 수 있는, 그런 비만 내리는 나라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P.142)
그럴 것이다. 작가는 자신이 멈추어도, 삶의 자각을 바동거리는 몸짓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자신을 둘러싼 외부의 서사와 추이만으로도 삶은 충분히 인지되는 그 무엇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작가에게 각각의 소설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깨달음의 저편에 존재하지 않는, 오히려 자학과 같은 몸부림을 쳐서라도 자신이 '살아있음'을 확인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런 사람들이다. 그래서 슬프다.
최면시술사의 얘기를 다룬「Lemon Tree」에 이어 등장하는「이교도의 풍경」은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동성애자로서 살다가 끝내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지 못한 채 삶을 마감하는 문화비평가 구문모의 삶을 다루고 있다. 어쩌면 뻔한 멜로 드라마가 될 법한 이 소재가 이응준의 작품에서는 새롭게 해석되고 있다고 느꼈다. 작가는 구문모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죽음의 귀결을 '낙타를 사랑한 고래의 무모함'에 비유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어쩔 수 없는 유전자를 담담히 지켜보고 있다.
"서른다섯 해를 자라고 늙어가는 도시에 도착하기 전, 거대하고 위태위태한 밤이 다시금 도래하겠지. 앞으로는 누구를 만나든, 그가 인간이라는 사실 외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으리라. 내가 아까 그녀에게 했던 대답은 틀린 것이었다. 세상의 모든 사랑엔, 틀림없는 당사자들이 있다. 설혹, 그것이 고래와 낙타의 사랑일지라도 그러하다. 하얗게 빠른 속도로 풍경들이 지나간다. 그리고 나는, 사랑마저도 사각형의 쇠자물통을 하고 있는 거기로 되돌아가고 있다." (P.61)
작가는 이 소설집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지금부터 딱 십 년쯤 지나면 고승의 염주알처럼 매끈하고 단아해진 자신의 인생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기대? 혹은 지금과 별반 다를 것도 없이 고요하게 흐르는 허송세월? 밤마다 잘근잘근 씹다 버려진 쓸쓸함이 거리를 가득 메우는 비참한 아침풍경?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이 실체를 보이지 않는 삶의 진실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오늘도 그렇게 살고, 내일도 또 그렇게 집을 나설 테니까. |
| 이응준이라는 작가를 처음 듣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조금 생소한 이름의 작가였다. 이응준. 그 작가의 이름보다도 나는 이 책의 제목이 조금은 특별하게 다가왔다. 그래서 이 책을 고르게 된 것 같았다. 우선 이 책의 소설들은 새로운 느낌으로 내게 다가왔다. 내용들도 신선하거니와 특별히 재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무언가 각각 시사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동료가 죽고 그가 남긴 유언에 따라 물건을 전해주러가는 이야기 그리고 그곳에서 새로이 알게 된 사실. 조금은 특별하고도 안타까운 이야기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나 보다. 요즘 소설은 어딘가 모르게 서로 닮아 있는 것이 보통인데 이 소설은 신선하기 때문에 좋았다. |
| 나에게 '이응준'을 소개 해준 것은 내 친구였다. 녀석은 그가 '우리의 언어'로 '우리의 이야기'를 한다고 말했다. 난 처음에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우리를 이해하고 우리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은 우리 뿐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친구의 간곡한 부탁이 있었기 때문에 난 그의 소설을 샀다. 그리고 읽고 또 읽었다. 그의 소설에 줄을 쳤고 외웠다. 나란 사람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하는 친구들에게 이 책을 사주기도 했다. 그 만큼 그가 쓰는 언어 그가 하는 이야기는 나에게는 감동이었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의 문체 때문이다. 그의 소설은 한마디로 '문체'이다. 다른 것보다도 유난히 도드라져 보인다. 하지만, 내가 그에 열광하는 것이 단지 무체라면, 난 신경숙이나 김승옥에도 열광했을 것이다. 그러나, 김승옥과 신경숙은 좋아하기는 하지만, 열광 정도는 아니었다.즉,이응준에게는 뭔가 다른 것이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 확실히 뭔가가 다르다. 이 사람이 '달 뒤편으로 떠나는 자전거 여행'이라는 책의 후기에서 이렇게 써 놓았다. 내 글을 읽기 위해 필요한 사전 지식이나 교양 따위는 애초부터 없다. 그냥 당신이 스스로를 외롭다고 느끼면 그것으로 족하다. 사는 게 무지무지 행복하다고 여기는 당신이 있다면, 제발 덮어두고 돌아가 그 삶을 더 즐기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사는 게 정녕 슬프고 지루하다 여기는 당신이 어떤 구원 내지는 해답을 바라고 이 소설들을 읽고자 한다면, 난 그에게도 어쨌거나 비슷한 말을 해줄 수밖에 없다. 나는 당신들에게 한 줄 잠언조차 들려줄 수 없을 뿐더러, 그런 꿈의 책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유에서이다. 다만 내가 바라는 것은, 다 읽고 난 내 독자들이 누군가에게 다가가, 지금 외로워 몹시 피곤하지 않느냐고 물어봐줄 수 있었음 하는 것이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우리가 이응준에 열광했던 것은 아마도 나와 내 친구가 진정 서로 외로웠기 때문일 것이라는 추측을 하고 있다. 그 것으로 내가 열광하는 이유가 충족되지 않는다면, 나의 글쓰기가 갖지 못한 '서정성'을 그가 갖고 있다는 사실 때문일 수도 있다. 무언가 부족한 것들은 무언가 남는 것들에게 끌리는 것은 자연의 이치니까. '내 여자친구의 장례식' 그의 이러한 미덕이 가장 잘 드러났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단편집인 것 같다. 내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표현을 쓴 것은 그는 그의 이러한 서정적인 문체가 싫다고 말했으며, 실지로, 그의 새로운 소설에서는 이러한 서정성을 버렸다고 한다. 결과는 참담한 실패라고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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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지 상상으로 데뷔한 작가를 그 데뷔작부터 좋아했다.추억의 속도로 걸어간다, 는 어찌보면 낯간지러울 수도 있는 문장을 잘도 소화시켜내는 작가를 부러워도 했던 것 같다. 세상을 떠도는 낯설고 신비로운 사건 내지는 사람들을 자신의 작품 안으로 끌어들이는 폼도 예사롭지 않았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눈에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시켜 놓아 어렴풋하게 만들고 있어도 언짢치 않았다. 그렇게 작가의 장편소설인 『느릅나무 아래 숨긴 천국』과 작품집인 『달의 뒤편으로 가는 자전거 여행』을 읽어냈다. 그리고 다음에 나온 것이 이 작품집으로 96년부터 99년까지 문예지에 발표했던 소설들이 실려 있다.
이 작품집의 뜻하지 않은 좋은 점은 작품의 발표지면과 햇수가 소설 말미에 실려 있다는 것. 어디에서 어떻게 보았더라, 머리 속을 뒤적일 필요가 없다. 책에는 모두 일곱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기억이 선명하여 다시 읽지 않은 「Lemon Tree」, 「내 가슴으로 혜성이 날아들던 날 밤의 이야기」,「그녀에게 경배하시오」를 제외한 나머지 작품의 시놉은 다음과 같다.
「이교도의 풍경」. 친하다고 여겼던,자살할 것 같지 않던 친구가 자살하고, 그의 죽음 이후에 그로부터 편지와 소포가 배달된다. 그리고 친구의 부탁대로 소포를 주인에게 배달하는 과정에서, 그가 소포의 수신자로 선택한 자와 동성애 관계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미 어둠의 계보를 알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죽어버린 준기, 준기의 죽음 이후 방황하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결심을 하는 수영, 대학원 종교학과에 복귀해 어둠의 계보라는 논문을 쓰고 있는 나 희구, 같은 종교학과 대학원생이자 종교학을 그만두고 한의학과에 진학할 생각이며 모든 기계장치를 고치는 재주를 가진 서미오.이들을 쫓는 작가는 죽음의 검은 그림자 드리운 삶의 비의를 보여주는 듯하다.
「지평선에서 헤어지다」. 나 성현이 독일 체류 시절에 만난 임서현의 결혼 소식. 유학 생활이라는 그 밑도 끝도 없는 외로움의 질척임. 그러다 그 외로움쯤 뭐 대수냐, 하고 그러다가 또 그 외로움에 목이라도 걸고 발아래 의자라도 걷어차버릴 것 같은 변덕스러운 외로움들의 장식.
「내 여자 친구의 장례식」. 다섯 개의 바퀴로 달리는 자동차가 있다해도 믿을만큼 잘 단련된 작가의 궤변 아니 달변. 은희와 이성,그리고 은희의 장례식에 대한 이야기. 사건은 없고 사건을 둘러싼 등장인물들의 시선만으로도 소설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새롭다.
작가를 가리켜 식물적 상상력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는 기억이 든다. 동물적인, 그러니까 물화된 육감에 의존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뿌리로 빨아들인 자양분을 토대로 소설을 쓰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었을까.그래서 어느 경우 너무 수동적이고 안타까운 것일까. 작가의 작품을 읽다보면 어느새 이까짓 허접스럽게 유들거리는 사회쯤 아무것도 아니야, 여기게 되는 것도 그래서일까. 수사학이 너무 깔끔하고 유려해서 비위가 상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조금 버틸 수 있다면 읽을만하다. 개인적으로는 작가의 과거의 작품에 더 우호적이다. [인상깊은구절] 밤하늘을 두고 어둡다고만 생각하는 자들은 어리석어. 단지 우리들에겐 없는 빛나는 눈동자를 지니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존재의 전체를 무작정 까맣게 칠해버린다면, 때로 그러하기에 더욱 화사하고 영롱한 자태를 품은 아픔이라든가 추억이니 하는 것들을 돌아볼 여유란 도무지 없을 것 아니겠어? 그것만큼 애처롭고 불행한 시선이 어디 있을까. |
| 외로운 인간들의 죽음에 대한 단편들 내 친한 친구도 죽고(레몬트리) 나의 선배도 죽고(내 가슴으로...) 또 나의 친구 죽고(어둠의 계보...) 또 나의 여자 친구가 죽는다. 간결한 문체이다. 감성적인 코드를 갖추고(음악 이야기도 나오고 사진 작가 이야기도 바치고, 천문학자 이야기도 있고, 문학가 이야기도 나오고)있다. 그래서 읽기가 좋다. 전반적인 내용이 고독에 대한 이야기라지만,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같이 살고는 있지만 낱낱이 떨어져있는 현대인이라 할까.. 마음에 상처를 입지않기 위해 자기 속을 보이지 않는 것, 모든 작품들이 다 똑같은 주제는 아니겠지만, 전반적으로 어둡고 간결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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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준의 소설은 그의 시적인 문체가 특색이란다. 시인이었던 그의 경력도 경력이려니와 소설의 특성이 그렇단다. 하지만 난 이 의견에 별로 동의할 수 없다. 시적인 문체는 아무래도 마루야마 겐지를 따라갈 자가 누가 있으랴. 시적인 문체라는 문구에서 난 마루야마 겐지와 같은 거장의 문체를 기대했었나보다.
한 100권 중에 한 두권은 열 쪽도 읽지 못해 그만 둬버리는데, 이 책은 그래도 그냥 다 읽은 걸 보니 그렇게 형편없는 것 같지 않다. 20대의 청춘을 감당하지 못하고 버거워하는 주인공의 감성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지만 난 여기서 그보다 많은 무엇을 원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여기에 없었다. 그냥 경제적으로 넉넉한,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일이 그런대로 잘 풀리는 주인공의 객기를 보아줄 수 있다면 어쨌든 이 책을 다 읽을 수는 있지만, 이 소설은 너무 가볍고 경쾌하다. [인상깊은구절] "다만 그 별의 남극과 북극엔 샘물이 각각 하나씩 있는데, 사내아이는 남극에서, 계집아이는 북극으로 가서 그 물을 떠 마셔야만비로소 어른이 될 수가 있었던 겁니다. 그건 굉장히 위험하고, 고독하고, 피곤한 여행이 될 수 밖에 없는데, 그제껏 그 길을 떠난 아이들 중 다시 돌아온 경우는 없었어요.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 불상사가 일어난 것만은 추측할 수 있지 않겠어요? 예컨데 홈으로 들어온 주자가 없다. 그러면, 점수는 언제나 0인 거죠. 간단해요. 근데 이 문제의 소년과 소녀는 정말 어른이 되고 싶었어요. 다른 아이들은 왜 그런 모험을 하느냐고, 그냥 여기서 이렇게 같이 살자고 만류했지만, 소년과 소녀의 사랑은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었어요. 함께 모여 있는 아이들의 사랑은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했나 봐요. 서로를 소유하고, 나만의 공간으로 격리시키는 아집스러움이 사랑의 실체란 걸, 너무나 사랑했기에 그들은 잘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소년과 소녀는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지평선의 한 지점에서 제 각기 길을 떠나요. 소년은 남극으로, 소녀는 북극을 향해. 그 무모한 길을 떠났던 몇 안 되는 다른 아이들처럼, 어디선가 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