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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그는 거장이다. 70년대에는 민주주의에 대한 열정을 "타는 목마름"으로 시화(詩化)하였고, 80년대와 90년대에는 우리의 전통문화와 현대 서구 사상에 대한 교감을 통해 현대 문명의 대안 제시라는 거대한 역사(役事)에 도전하였다. 그가 그 동안 우리의 현대 문학계와 사상계에 남긴 족적을 뒤돌아본다면 그는 충분히 거장의 반열에 올라설 자격이 있다. 그러나 거장의 숙명이라고 해야 할까? 김지하는 그간 숱하게 문학적ㆍ사상적 비판에 맞서야 했고, 젊은 비평가들의 도마에 심심치않게 오르내렸다. 김지하가 90년대 초반 분신정국을 "죽음의 굿판"으로 지칭한 이후 그에게 선망과 존경의 눈길을 보내던 젊은 민주화 세력들은 등을 돌리기 시작했고, 90년대 후반 생명운동의 기치를 내걸자 쇼비니즘과 지적 자기과시라는 평가가 뒤따랐다. 그러나 1970년대 이래로 지적 논쟁의 한가운데에서 끊임없이 논쟁을 점화시킨 인물이 김지하외에 또 누가 있겠는가? (실제로 "흰 그늘의 길"에는 70년대 민주화 세력 중 김지하 자신과 서울대학교의 조동일 교수만이 남아있다는 자조섞인 술회가 등장한다.) 70년대에는 민주주의라는 현실적인 문제로, 80년대와 90년대에는 생명과 평화라는 화두를 통해 당대와 끊임없이 호흡한 김지하는 어쨌든 우리 시대 최고의 지적 예술가다.
김지하의 회고록 "흰 그늘의 길"은 우리 시대 최고 거장의 삶의 기록이다. 김지하는 이번 회고록을 통해서 지나간 삶에 대한 후회와 집착, 영적 체험과 현실적 기억의 혼재, 현대사의 마디마디에서 내려야 했던 선택들을 문학적 능력을 통해서 새롭게 복원했다. 비극적 현대사와 궤를 같이한 그의 가족내력과 문학적,사상적 수련의 과정은 물론 최근의 현대적 사건들에 대한 통찰에 이르기까지 그의 문재(文才)는 빛을 발하며 그의 삶이 결코 가볍지 않았다고 얘기한다. 특히 오늘날을 살아가는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그의 회고록은 큰 의미로 다가올 것이라 생각한다. 뜨거운 열정과 실천력,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 할 수 있는 냉철한 이성의 힘을 가진 "요기-싸르"라는 인간형을 제시함으로써 김지하의 회고록은 부박함과 찰나적 쾌감으로 흐르고 있는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하나의 죽비로 기능할 것이다. 김지하의 나이가 어느덧 예순 무렵이 되었지만 아직 그는 자신감으로 충만하고 지적 열정으로 가득함을 회고록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베토벤과 마르크스가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고자 평생 살아온 그의 돈키호테 같은 삶이 이제 또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무척이나 궁금하다. [인상깊은구절] "베토벤과 마르크스 둘 다 실패다. 베토벤은 부르주아의 문화영웅이고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의 사상영웅이다. 둘 다 실패다. 이제 우리가 하자!" '우리가 하자!' 나는 이 한마디에 함축된 어마어마한 역사적 의미를 잊을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