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리뷰 (10)

한줄평
평점 분포
  • 리뷰 총점10 50%
  • 리뷰 총점8 50%
  • 리뷰 총점6 0%
  • 리뷰 총점4 0%
  • 리뷰 총점2 0%
연령대별 평균 점수
  • 10대 0.0
  • 20대 0.0
  • 30대 0.0
  • 40대 0.0
  • 50대 8.0
리뷰 총점 종이책
장자를 읽는 또 하나의 독법..
"장자를 읽는 또 하나의 독법.." 내용보기
우리가 동양고전을 읽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한자를 알아서 원문을 읽을 수 있고, 그래서 읽고, 또 읽어 원문의 뜻을 깨우치며 사유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지만 대부분은 그러지를 못하는 까닭에 해설서를 찾게 된다. 해설서에도 원문을 그대로 번역한 해설서가 있는가 하면, 원문의 편제에 구애 받지 않고 자신의 관점에서 풀어 쓴 해설서도 있다. 대부분의 해설서가
"장자를 읽는 또 하나의 독법.." 내용보기

우리가 동양고전을 읽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한자를 알아서 원문을 읽을 수 있고, 그래서 읽고, 또 읽어 원문의 뜻을 깨우치며 사유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지만 대부분은 그러지를 못하는 까닭에 해설서를 찾게 된다. 해설서에도 원문을 그대로 번역한 해설서가 있는가 하면, 원문의 편제에 구애 받지 않고 자신의 관점에서 풀어 쓴 해설서도 있다. 대부분의 해설서가 전자라면 아마 돌베개에서 나오는 교양강의 시리즈는 후자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이 책 [느림과 비움의 미학 - 장석주의 장자읽기]는 그간의 동양고전 읽기와는 다른, 또 하나의 독법을 나에게 알려주는 것 같다. 장자 전편을 통해 흐르는 키워드를 느림과 비움으로 설정하고, 그것이 자신의 삶에 어떻게 투영되어 있는지를 자신이 직접 장자에서 가려 뽑은 장자의 말과 함께 알려주고 있다. 어떻게 보면 고전에 대한 해설서라기 보다는 자신의 삶에 대한 느낌과 자세를 써 내려간 산문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인지 처음에는 고전을 읽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 어리둥절 했지만, 이내 책을 읽는 동안 마음의 고요를 찾을 수가 있었다는 느낌이다. 저자가 젊어서 어떤 고통과 상처들을 안고 있었는지 자세하게 알 수는 없지만, 10년 동안 장자를 읽으면서 상처가 아무는 것을 지켜보았다는 그의 고백은, 이 책을 읽으면서 나에게도 그대로 전이되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그 느낌은, 저자에 대해서는 대단한 독서 광이라는 얘기는 들었지만 그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나에게, 어쩌면 그의 전작읽기에 빠져들게 할 것 같은 불길한(?) 전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였다.

 

우리는 종종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에 부딪힌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는 이미 수많은 책들이 나와 있듯이,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가지고 그 답을 찾기 위해 애써왔다. 과거의 위대했던 철학자들이나, 현재를 사는 사람들 모두 그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그래서 그 답을 찾기 위해 성찰과 사유를 하지 않았나 싶다. 그렇지만 막상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에 직면하게 되면, 막막함을 느끼는 것은 많은 답들이 내 맘속의 답과는 일정부분 유리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 역시 살아오면서, 그리고 많은 책을 읽으면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에 답을 구하고자 했지만, 그나마 가슴속에서 공감을 하고 동의한 것은 그 물음을 어떻게 죽을 것인가로 치환하는 것 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치환한 것이 허기진 그 물음에 대한 답이라고 마음은 명쾌하게 결론을 내리지를 않는다. 그런데 장석주는 이 책에서 그 물음을 또 다른 말, 어떻게 밥을 구할 것인가로 치환한다. 그 대목을 읽는 순간 내가 불안해하는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왜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막막함을 느꼈는지에 대해 비로소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은 먹고 사는 문제로 귀결되는 것을 우리는 알면서도 애써 외면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그렇기에 저자는 자발적인 가난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사람들이 많이 가져서 행복한 게 아니라 가진 것의 진정한 가치를 앎으로서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적게 가져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의 기쁨을 몰라서 불행하다는 말로 바꿀 수가 있다. 그가 장자를 읽으면서 우리의 존재이유를 단순한 존재에서 어떻게 지혜롭게 존재하느냐로 바꾸는 존재의 기술에 관심을 가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처럼 보인다.

 

장자는 기존의 정치질서와 체제에서 벗어나 자연에서 물아일체의 삶을 이상으로 삼았었다. 우리가 장자를 따라서 그렇게 살수는 없지만, 현재의 모든 조건들이 그때와는 판이하게 다르기에 우리들의 삶이 그렇게 원한다고 해서 이루어질 수는 없지만, 느리게 살고, 비우며 산다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먹고 사는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 될 수가 있다. 배는 인생이라는 강을 타고 흘러 내려간다고 한다. 우리가 그 배를 무겁게 채우는 것은 욕망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나 욕망은 끝이 없기에 욕망이 뻗어가는 대로 두면 그것은 이내 탐욕으로 변질된다. 탐욕은 마음을 시끄럽게 하고 불필요한 근심들을 키울 뿐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그러기에 채우는 사람은 채움에 메이게 되고, 비우는 자는 비움으로 인해 자유로워 진다고 장자를 빌어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장자는 우리들의 삶이란 뇌가 만들어 낸 하나의 환몽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평생 그 환몽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죽는 것을 호접몽, 즉 나비 꿈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하고 있기도 하다. 저자는 경쟁과 절망만이 넘실대는 환몽에서 깨어나기 위해서는 느림과 비움만이 답이라는 사실을 장자에게서 발견한다. 느리게 사는 사람만이 비울 수가 있고, 비운 자만이 느림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느림과 비움은 미학이 된다. 모두가 물질과 명예를 쫓기에 바쁜 세상을 한 발 떨어져 바라본다면, 그리고 그냥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내 것을 기꺼이 남과 나눔으로써 비움에 든다면 그것이 바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이 아닐까 싶다.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을 구하지 못하는 것은, 그리고 그것이 먹고 사는 문제로 귀결됨을 마음속 떳떳하게 내세우지 못하는 것은, 내 마음이 욕망으로 가득 차있기 때문 일 게다.

 

저자가 만난 장자를 읽으면서, 지금까지 나는 어떤 장자를 만났었는지 생각해 본다. 왜 나는 장자가 이야기했던 느림과 비움 속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지 못 했을까? 장자는 배워 익힌 것은 모두 잊으라고 했다. 그리고 저자는 이것을 고독한 길에 제 삶을 세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고독하지 않으면 지금과 같은 세상에서 느림과 비움을 미학으로 삼는 삶은 분명 힘들게 눈에 선히 보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장자읽기를 보면서 나 또한 새로운 장자를 만나리라는 기대를 안고 장자를 다시 한번 읽어야겠다. 정말 고독한 자는 타인에 대해 너그럽고 자신에 대해 엄격하다고 한다. 지금까지 만난 장자를 모두 잊고, 고독하게 장자를 다시 만나,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답을 구하고 싶다.



k*****1 2013.11.07. 신고 공감 7 댓글 14
리뷰 총점 종이책
이제는 물을 벗어나 날아올라야 한다.
"이제는 물을 벗어나 날아올라야 한다." 내용보기
잘나가던 출판사의 대표이며 시인이었던 저자 장석주는 2000년 도심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시골로 향한다. 안성의 한 호숫가에 수졸재라 이름한 집을 마련하고 책읽기와 글쓰기, 산책과 명상 등을 하며 단순한 삶을 살고 있다. 저자는 도심에서의 분노와 세상에 대한 질타에 대한 마음을 다스리고자 매일을 하루같이 머리맡에 놓아둔 “장자”를 읽었다고 한다. 저자는 장자를 읽으며
"이제는 물을 벗어나 날아올라야 한다." 내용보기

  잘나가던 출판사의 대표이며 시인이었던 저자 장석주는 2000년 도심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시골로 향한다. 안성의 한 호숫가에 수졸재라 이름한 집을 마련하고 책읽기와 글쓰기, 산책과 명상 등을 하며 단순한 삶을 살고 있다. 저자는 도심에서의 분노와 세상에 대한 질타에 대한 마음을 다스리고자 매일을 하루같이 머리맡에 놓아둔 장자를 읽었다고 한다. 저자는 장자를 읽으며 마음의 상처가 아무는 것을 지켜보았고, 마침내 고요해 졌다고 고백한다.

 

장자가 누구인가?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장자는 몽() 지방 사람으로 이름은 주()이고 칠원(漆園)이라는 고을에서 관리를 지냈는데, ()나라의 혜왕(惠王), ()나라의 선왕(宣王)과 같은 시대 사람이었다. 그는 매우 박학하여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10만여 자나 되는 글을 지었고 어부(漁父), 도척(盜跖), 거협(胠篋)등을 지어 공자의 무리를 비방하고 노자의 학설을 천명하였다는 게 사기 기록의 전부이다.

 

  23백년전에 살았던 현인 장자. 장자는 이 나라 저 나라를 바람처럼 떠도는 방랑자였고, 예기치 않은 은유와 환유로 잠든 뇌를 깨어나게 하는 수사학의 달인이었다. 사마천에 따르면 장자는 본디 10여만자에 이르는 책이었다. 하지만 현재까지 전해져온 장자는 곽상이 편집한 것으로 내편 일곱 편, 외편 열다섯 편, 잡편 열한 편으로 서른 세편으로 이루어진 판본이다. 곽상은 장자보다 6백년 뒤에 살았던 위진 시대의 학자였다. 장자는 노자》 《주역과 함께 삼현으로 꼽히기도 했다. 내편은 이치의 근본을 밝히고, 외편은 구체적 사실을 끌어다 내편에서 말한 것을 입증하고, 잡편은 이치와 구체적 사실을 뒤섞어 알기 쉽게 만들었다. 원래 장자는 52편이었으나 지금 전해져 내려오는 것은 33편뿐이다.

 

  우리가 흔히 장자하면 떠오르는 것이 바로 호접몽과 대붕에 대한 이야기이다. 호접몽은 장자가 어느 날 꿈에 나비가 되어 세상을 돌아다녔는데, 꿈에서 깨어보니 장자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자는 나비가 장자의 꿈을 꾼 것인지, 장자가 나비의 꿈을 꾼 것인지 구분이 안가더라는 우화와 북해의 거대한 물고기 곤이 커다란 붕새로 변화하여 남명으로 날아가는 이야기이다. 대붕은 한번 바람을 일으켜 구만리상공으로 날아가서 여섯 달 동안 쉬지 않고 날아간다. 앞의 호접몽은 장자의 제물론에 나오는 이야기이고, 뒤의 대붕의 이야기는 장자의 첫 구절인 소요유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난 장자의 호접몽을 볼 때마다 영화 매트릭스가 생각난다. 장석주 시인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참이라고 믿는 이 세상과 우리가 꿈이라고 믿는 거짓세상의 구분이 의미가 없음을 장자는 호접몽의 비유를 통해 역설하고 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참이라고 믿는 세상이 실상은 가상의 공간이었고, 모든 것이 프로그램밍 된 허상이었다. 세상이 허상임을 알게 된 주인공 네오는 현재라는 세상이 갖고 있는 모든 규율과 법칙으로부터 벗어나 완벽한 자유를 구사하게 되고 무한한 능력을 갖게 된다. 그리고 허상과 실상의 경계를 허무는 그 순간, 세상을 그의 자유의지로 조절하는 능력을 갖게 된다. 이것이 바로 장자의 소요유다.

앎과 모름, 삶과 죽음, 너와 나, 그 분별이 없을 때 꿈과 현실은 하나다. 무분별 속에 있을 때 우리는 무궁의 시계에 머물 수 있다. 무분별은 일월을 품고 우주를 품는다. (20)

 

  대붕의 이야기는 변신을 뜻한다. 세상의 구속에 얽매여 조그만 메추라기의 눈으로 볼 때는 대붕의 날개짓도 한갓 부질없는 짓이지만 대붕이 보는 세상과 메추라기가 보는 세상은 다르다. 즉 크게 자라야 비로소 크게 변화한다. 변화한다는 것은 한계를 뛰어넘는다는 것이다. 메추라기의 시선으로 세상을 관조하는 이에게는 대붕의 날개 짓이 부질없다. 고작 옆에 있는 나뭇가지로 옮기는데 그런 큰 날개와 바람은 부질없는 짓이다. 본디 모든 존재는 자유롭게 살아야 한다. 자유롭지 못하는 것은 물()에 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물()은 그저 관념이다. 관념이라 불리는 오감과 세상적인 욕망에 사로잡히면 진실된 모습을 볼 수 없다. 곤이 붕으로 변화하는 순간 천지의 모든 이치를 통달하고, 관념의 틀에서 벗어나 마음껏 창공을 날수 있다. 그렇기 위해서는 곤이 붕으로 변해야 한다. 곤에게 있어서의 물()이라는 개념이 바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욕망이다. 즉 필요이상을 추구하는 탐욕이다. 세상적인 물질의 욕망에 사로잡힌 시선과 관념으로는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 곤이 날아오르기 위해서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물에서 벗어나듯이 목숨을 걸어야 한다. 그러한 변화의 열정이후에 붕으로 변해 한 날개 짓에 수천 리를 날수 있는 도약이 가능하다.

 

변화의 본질은 나를 바꾸는 것, 나를 잊거나 잃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변화는 불확실성 속에 뛰어듦이고, 이것은 스트레스를 낳는다. 그러니까 변화를 두려워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33)

 

  장석주 시인은 10년을 하루같이 읽었던 장자를 한 마디로 느림과 비움의 미학이라고 애기한다. 신자유주의를 기반으로 한 자본주의 문물이 선사해준 속도감에 이제는 젖을 대로 젖은 우린 모든 것을 빨리만 처리하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라는 개념은 상대적이다. 우리의 짧은 생의 발걸음으로 볼 때에는 한순간도 바쁠 수 있겠지만 수억 년을 지내온 우주의 시간으로 보면 찰나에 불과하다. 하지만 하루살이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의 시간의 개념은 우리와 다르다. 수천 년을 살아온 고목의 나이와 그저 백년도 못사는 우리네 시간의 개념은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린 우리의 시간을 상대적인 개념으로 보는 게 아니라 절대적인 개념으로 접근한다. 그리곤 서두른다. 무엇이 그리 바쁜지 이유도 없다 그저 남들이 뛰니 나도 뛴다. 남보다 무조건 앞서가야 하고 남보다 무조건 빨라야 한다. 이유는 다음이다. 하지만 그런 속도감으로 목표지점에 도달했지만 생각 없이 지나온 발걸음은 목표지점에 도달한 이후 우리에게 만족은커녕 허망함만을 더한다. 목표는 단순히 한번 지나가야하는 포스트에 불과하다. 그 목표에 도달하고 나서는 또 다른 목표를 향해 뛴다. 거기에 자본주의의 탐욕의 논리에 갇혀 남보다 더 많이 갖고, 더 많이 벌기위해 열심히 산다. 남보다 더 넓은 아파트, 더 좋은 차를 가져야 한다. 그런 물질적인 욕망에 갇히니 눈앞에 다른 것은 보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런 물질적인 욕망을 성취한 순간 그것은 최고봉이 아니라 그보다 더 높은 욕망의 봉우리가 마주 할 뿐이다. 이렇듯 한없는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저 산다. 그게 우리네 일반적인 삶의 모습이다. 속도가 빠르니 주위를 돌아볼 여력도 없다. 일상의 삶에서 느끼는 행복과 사색 또한 끼어들 여력이 없다. 삶의 관조자가 아닌 그저 시간의 노예가 되어 쫒겨갈 뿐이다. 무엇이 나를 쫒아오는지 무엇을 추구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매일 한결같은 발걸음을 옮긴다.

 

  오랫동안 객지 생활을 해오면서 머무르는 곳마다 많은 짐을 가지고 다녔다. 기본적으로 침대를 비롯하여, 수십 벌의 옷, 그리고 커다란 TV를 비롯하여 수백 권의 책. 이런 많은 짐들은 한번 씩 거주지를 옮길 때마다 상당한 번거로움을 야기했다. 비용상의 문제도 문제이거니와 시간적, 정신적으로 여러 가지 불편한 사항들이 많이 초래되었다. 하여 작년에 모든 짐을 본가에 가져다놓고 일상적으로 입을 간단한 옷가지 몇 개만 숙소에 비축해두었다. 그 뒤로는 거주지를 옮기는 것이 아주 간단해졌다. 쓰지도 않는 물건과 입지도 않는 옷들과 수많은 책들로 인해 이사하고 나서 정리하는데 며칠씩 걸리던 짐들이 이제는 한 두 시간만 들여도 정리가 된다. 생활자체도 단순해졌다. 거주지가 바뀌면 트렁크 하나면 된다. 그동안 이삿짐센터에 연락하고 이사를 하고 짐을 정리하고 하면서 소요되던 그 많던 시간과 비용이 현저히 줄었다. 그렇다고 생활하는데 불편함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동안 그저 습관적으로 많은 짐을 싸들고 다녔다. 당장 필요하지도 않는데 말이다.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다. 우린 당장 쓰지도 않는 물건을 소유하고 순간의 만족을 얻기 위해 수없이 많은 물건을 사들인다. 그 물건들을 보유하기 위해 더 넓은 공간은 필수적이다. 그런 물건들을 사들이기 위한 경제적인 능력을 얻기 위해 더 부지런히 일해야 한다. 그러니 더 바쁘다. 시간이 없다. 쫒기듯이 살아간다. 그런 악순환은 계속된다. 비움이던, 느림이던 어느 한가지라도 먼저 선행이 되면 이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그 빈 공간에 여유라는 단어가 자리 잡는다. 그 여유야말로 나를 돌아보고, 세상을 돌아보고, 내가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장석주 시인은 장자를 통해 자본주의의 흐름에 갇혀 그저 물(水)을 벗어나서는 단 한순간도 살 수 없는 물고기처럼 정해진 틀에 갇혀 살고 있는 우리에게 외친다. 그 틀에서 벗어나라고, 그 틀에서 벗어나면 물을 벗어난 물고기처럼 죽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고. 곤에서 붕으로 변신을 하면 죽지 않는다. 붕은 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직 날아오르기 위한 바람만이 필요하다. 하지만 변신은 그저 오지 않는다. 내가 기존의 틀을 떨치고 일어나 변해야 한다. 그 변화를 거쳐야 만이 곤이 대붕이 될 수 있다. 그리고선 천하를 날아오를 수 있다. 어쩌면 장자는 세상을 등지고 나만의 세상을 살라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시각과 자신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라고 얘기하고 있다. 구만리 상공에서 나는 대붕과 싸리나무를 오가며 짧은 날개 짓을 하며 그저 먹고살기에 바쁜 메추라기의 눈으로 사는 삶은 정녕 다르다.

 

  장자의 구절을 예로 들어 각각의 구절에 대한 작가 자신의 해석과 때로는 화두와도 같은 예와 삶에서 경험하는 경우 등을 번갈아 예를 들어가며 풀어가는 작가의 글쓰기가 재미있다. 현실과 환상의 세계를 두서없이 오고가는 그의 논조는 장자의 구절구절을 이해하는데 적격이다. 물론 그렇다고 장자를 10년동안 읽어낸 작가의 사고를 올곧이 받아들이기에는 나의 지식이 텃없이 짧지만, 장자를 접하는 입문서로서는 부족함이 없다. 장석주 시인은 2500년전에 쓰여진 장자가 지금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책이라고 말한다. 춘추전국시대의 혼란함이 지금 이 시대에 역시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시대는 전쟁의 혼란함에, 지금 이 시대는 신자본주의에 의한 물질문명의 혼란함에 갇혀있다고 한다. 저자의 표현을 빌지 않더라도 자본주의의 논리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현대인들을 향해 그 자본주의의 물을 헤치고 붕으로 변하여 모든 것에도 얽매이지 말고 창공으로 날아오르라는 장자의 이야기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이야기는 아닐까 한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장자가 청바지를 입고 번화한 홍대거리에 나서서 그 시절과 똑같은 가르침을 우리에게 전한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을 것이다. 물론 그의 가르침을 듣고 안 듣고는 개인의 취사선택의 문제이지만 말이다. 그저 귀동냥으로 들어왔던 장자가 장석주 시인의 깨달음과 만나 새롭게 다가온다. 이제는 장석주시인의 입을 빌어 보는 장자가 아닌 나의 시선만으로 올곧이 장자를 만나야겠다.

 

 

 



h*****o 2014.03.25. 신고 공감 5 댓글 4
리뷰 총점 종이책
[느림과 비움의 미학_장석주]나도 좀 게을러볼까...
"[느림과 비움의 미학_장석주]나도 좀 게을러볼까..." 내용보기
요 몇 년 사이에 '장자'가 좀 유행이였나보다. 도서는 물론이거니와 영화든 패션이든...'트렌드는 쫓는게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있어 남들이 좋아하다고 우르르 쫓아가는 건 그닥 내켜하지 않아 그런지도 모르고 살았다.   어쨌거나, 이 책이 세일 한다기에...앞에 몇 페이지를 보고 맘에 들어 구입을 했는데...읽지 않았다면 후회할 뻔했다.   일단, 이걸 어떻게 표현
"[느림과 비움의 미학_장석주]나도 좀 게을러볼까..." 내용보기

요 몇 년 사이에 '장자'가 좀 유행이였나보다.

도서는 물론이거니와 영화든 패션이든...'트렌드는 쫓는게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있어

남들이 좋아하다고 우르르 쫓아가는 건 그닥 내켜하지 않아 그런지도 모르고 살았다.  

어쨌거나, 이 책이 세일 한다기에...앞에 몇 페이지를 보고 맘에 들어 구입을 했는데...읽지 않았다면 후회할 뻔했다.

 

일단,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모르겠으나, '장자'의 오리지날 원본은 아니다. 해석판이라고 하기도 뭣하고..그냥 '장자'에 담긴 내용을 작자가 읽기 편하게 한 번 더 풀어 놓았다. 그의 일상 에세이와 더불어 말이다.

 

그래서, 일단 책이 술술 잘 읽혔다.

이런 저런 '장자'의 에피소드들을 서두에 옮긴 다음, 장석주의 느낌을 적은 것은..아마 '장자'를 떠올리면 일단 골치 아프지 않을까? 하고 지레 겁을 먹게되는 나같은 사람에게 딱 안성맞춤이였다.

 

읽으면서 접고 줄 그은 부분은 얼마나 많은지.

 

이 책을 읽고 나니 '장자'를 제대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10년동안 '장자'를 읽으면서 한 없이 마음이 고요해졌다는 장석주와 같이, 내 마음도..더 고요하고 평화로울 수 있을까 하는 기대마저.

 

연초에 국립현대 미술관에 다녀왔다.

거기서 '세한 연립주택'이라는 김정희의 '세한도'를 모티브로한 작품을 봤었는데,

이 책에서도 잠깐 언급되는 부분이 재미났다.

새삼 꾸준한 독서나 문학과 예술에 대한 관심이 슬슬 빛을 보는 것 같은 자부심마저 들었다.

 

책에선 많은 것을 비우라하는데...딴건 모르겠고, 독서하는 마음, 배우고자하는 마음은 지키고 가야하지 않나 싶다. 그리고...이런 저런 욕심들...사심들...시기심...집착. 살면서 조금씩 조금씩 버리는 연습...이미 하고 있었지만...흔들리지 않게 내공을 쌓아야겠다는 생각 역시 들었다.

 

책에는 몇 컷의 사진이 나온다.

1. 장석주가 서재에 앉아 있는 사진

2. 장석주가 나비넥타이를 하고 동네를 거니는 모습

3. 장석주의 상반신 컷.

솔직히 좀 생뚱 맞았고..책 내용과 어울리지 않아...살짝 당황스러웠다. (특히, 이 책이 '장자'를 다루고 있고..책 제목이 '느림과 비움의 미학' 임을 고려했을때...편안한 마음으로 읽다가 '어므나!!'하고 깜짝 놀랐다)  좀 자연스럽게 찍은 사진이 삽입을 할 것이지.

 

그.리.고.

위에 좋게 생각했던 장석주의 에피소드들도...뒤로가면 갈수록...살짝 처지거나 억지스러운 구석이 있다.

조금  더 담담하게 쓰여졌더라면 좋을텐데...그의 나이에서 오는...살짝 올드한 자기연민같은 느낌은 옥의 티라고 할 수 있겠다.

뭐 이정도.

c******m 2014.01.26. 신고 공감 2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느림과 비움의 생각은 사랑의 시작
"느림과 비움의 생각은 사랑의 시작" 내용보기
작가의 이름의 장자의 그림자를 읽는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장자와 장자 문장에 대한 작가의 해석을 통해 그리고 작가의 이름에서 장자를 보았다. 장자의 본명은 장주라고 하는데, 작가 이름은 그 가운데 '석'자만 더 들어간 것이 단순한 우연일까?   참으로 오랫동안 천천히 읽은 책이다. 2달 넘게 읽고 생각했다. 보통 여러 책을 함께 보아서, 늦어지면 2주 이상도 읽지만 이 책
"느림과 비움의 생각은 사랑의 시작" 내용보기

작가의 이름의 장자의 그림자를 읽는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장자와 장자 문장에 대한 작가의 해석을 통해 그리고 작가의 이름에서 장자를 보았다.

장자의 본명은 장주라고 하는데, 작가 이름은 그 가운데 '석'자만 더 들어간 것이

단순한 우연일까?

 

참으로 오랫동안 천천히 읽은 책이다.

2달 넘게 읽고 생각했다.

보통 여러 책을 함께 보아서, 늦어지면 2주 이상도 읽지만 이 책은 유독 오래 걸려서

읽었다. 지루하기 보다는 아껴서 읽을 기억이다.

 

저자인 장석주 님을 자세히 모르고,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접했다.

독서를 아주 많이 하신 분의 글이라는 것이 책 여러 부문에서 느낄 수 있었다.

 

장자의 글이 몇 천년 넘게 사랑받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채우기에 급급하고, 채웠지만

허전함을 느끼고, 그래서 어떻게 세상을 봐야하는 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기 때문일

것이다.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나는 지난 10년 동안 [장자]를 머리맡에 두고 하루도 쉬지 않고 읽었다. 이 암울함이 암종처럼 자라는 시대에 '책'이 무슨 도움이 되느냐? 오늘의 시대야말로 책에게 귀 기울여야 한다고 믿는다. 책은 삶과 존재 방식을 근본으로 되돌아보게 한다. 책은 "이 뜨겁고 평평하고 붐비는 세계" 속에서 삶을 근본에서 짚어보고 최적의 생존에 맞는 자기 혁신과 영감에 대해 말한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왜 책을 봐야 하는지에 대한 좋은 정의 중의 하나이다. 

 

책 내용은

장자의 문구를 통해서 현대 상황에 대한 반성과 느낌이 주요 내용이다.

 

가장 인상적인 문장은 '가난 때문에 죽는 사람은 드물어도 가난에 대한 근심 때문에 죽는

사람이 많다.'(P.240) 이다. 최근 오로지 아끼지 않는 것은 책 사는 것과 아이들 먹거리인데 적자가 늘어나는 살림을 보면서 걱정스러웠다. 그런데 이 문장을 통해 많이 위안

받았다.

 

걱정을 하면서 인생의 기적을 퇴락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한 것만으로

읽을만한 책이었다고 평가한다.

 

 

 

 

q****3 2010.08.01. 신고 공감 2 댓글 9
리뷰 총점 종이책
자발적 가난에 드는것이 비움이라고 말하는 시인 장석주의 장자 읽기
"자발적 가난에 드는것이 비움이라고 말하는 시인 장석주의 장자 읽기" 내용보기
시인 장석주의 장자 읽기 <느림과 비움의 미학>을 꼭 읽고 싶었던것은 끌어당기는 책 제목때문이다. 솔직히 공자의 논어와 노자의 도덕경는 참으로 더디게 읽었던 기억이 나서 조금 망설였는데, 느림과 비움의 미학이라는 책 제목이 유난히 내 마음에 들어왔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첫 망설임과 달리 꽤 편안하게 읽을수 있었다.   장석주는 10년동안 <장자>를 읽으며 마음의 상처
"자발적 가난에 드는것이 비움이라고 말하는 시인 장석주의 장자 읽기" 내용보기

시인 장석주의 장자 읽기 <느림과 비움의 미학>을 꼭 읽고 싶었던것은 끌어당기는 책 제목때문이다. 솔직히 공자의 논어와 노자의 도덕경는 참으로 더디게 읽었던 기억이 나서 조금 망설였는데, 느림과 비움의 미학이라는 책 제목이 유난히 내 마음에 들어왔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첫 망설임과 달리 꽤 편안하게 읽을수 있었다.

 

장석주는 10년동안 <장자>를 읽으며 마음의 상처를 아무는것을 지켜보았고, 마침내 고요해졌다. 고요해졌으므로 물 같은 사람이 되었다. 물은 유약하나 그 유약함의 덕성으로 세상의 강성한 것들을 능히 이긴다고 고백한다.

 

또한 <느림과 비움의 미학>통해 시인 장석주는 독자에게 이책에서 배우고 익힐것은 '존재의 기술'이라고 말한다. 존재함만으로는 부족하고 어떻게 지혜롭게 존재하느냐를 찾아야 하며, 여기의 핵심은 자기 탐색과 자기 생성의 기술이며 자발적 실천 즉, 장자는 '느리게 살아라! 비우고 살아라!는 메세지를 독자에게 전달한다.

 

작가는 장자의 제물론편, 소요유편, 인간세편, 전자방편, 산목편, 응제왕편, 외물편, 열어구편, 대종사편, 지락편, 변무편, 추수편, 경상초편, 달생편, 덕충부편, 양생주편을 읽어가며 비움과 느림이 무엇인지 말하며, 또한 접하기 쉽지 않았던 장자의 16편을 흥미롭고, 독자로 하여금 편안하게 읽기 쉽도록 소개한다.

 

<느림과 비움의 미학>에서 가장 인상깊게 읽은것은 아무래도 비워라, 비워야 채운다의 장자의 산목편 "빈배 이야기"일 것이다.

 

배로 강을 건너는데, 빈 배가 떠내려오다가 그 배에 부딪쳤다. 사공은 성질이 급한 사람이지만 그 배가 빈 것을 알고 화를 내지 않아다. 그런데 떠 내려온 배에 사람이 타고 있으면 당장 소리치며 비켜 가지 못하겠느냐고 했을 것이다. 한 번 소리쳐서 듣지 못하면, 다시 소리치고, 그래도 듣지 못하면 세번째 소리 치는데, 그때는 반드시 욕설이 따르기 마련이다. 처음에는 화를 내지 않다가 지금 와서 화를 내는 것은 처음에는 배가 비어 있었고, 지금은 배가 채워져 있는 까닭이다. 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비우고 인생의 강을 흘러간다면 누가 능히 그를 해롭게 하겠는가?

『장자「산목」

 

작가는 장자의 산목편을 읽는다에서 빈 배 이야기는 인구에 회자되는 이야기중에 하나로 시남자라는 사람이 노나라 임금에게 지혜의 말을 건넨 것이다. 배는 인생이라는 강을 타고 흘러 내려간다. 너무 많이 실으면 배는 무겁고, 무거우면 흐름이 더디고 둔탁해진다. 배는 비우면 가볍게 흘려간다. 무겁게 채우는 것은 탐욕이다. 반면에 비움은 무심이다. 채운다는 것은 채움으로 시끄럽고, 비운 것은 비움으로 고요한다 채우면 채울수록 비움이 견디기 어렵고, 비우면 비울수록 채우는 일의 하찮음을 깨닫게 된다. 채우는 자는 그 채움에 매이게 되고, 비우는 자는 비움으로 인해 자유로워진다. 비우라! 더 많이 비우라! 그게 장자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라고 말한다.

 

<느림과 비움의 미학>을 읽고 가장 기억에 남는 문구는 개인적으로 느림보다 비움의 문구였다. 자발적 가난.이란 문자에 멈춰 다시금 되풀이해서 읽어보고,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이였다. 법정스님의 <무소유>도 생각나게 하는 구절이였다.

 

비움이란 생물학적 필요 이상의 소유를 갖지 않는것이다. 달리 말하면 자발적 가난에 드는것이다. 그냥 버려서 얻는 경지가 아니라 제것을 기꺼이 남과 나눔으로써 비움에 드는것이다. P83 

 

느림과 비움으로써 진정한 자유를 알고자 하는 독자라면 꼭 시인 장석주의 장자읽기를 읽어보길 권한다. 좀더 장자에 대해 친근하게 접근할수 있는 계기가 되는거 같다. 처음 망설였던 딱딱함보다 흥미로운 이야기로 마지막 장을 덮을수 있을것이다.

s*********e 2010.05.16. 신고 공감 2 댓글 1
리뷰 총점 종이책
[서평]느림과 비움의 미학
"[서평]느림과 비움의 미학" 내용보기
느림과 비움의 미학 / 장석주 / 푸르메   장모님이 일주일간 집에 와 계시다가 내려 가셨다. 장모님을 보면서 문득 세월의 빠름을 느낀다. 결혼 승낙을 받으러 처가에 갔을 때의 그 정정하시던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이젠 관절도 좋지 않은데다 보청기를 끼었는데도 듣지 못할 정도로 귀를 잡수셔서 입을 보고서야 말을 조금 알아듣는 정도가 되고 말았다.   살아갈 날이
"[서평]느림과 비움의 미학" 내용보기

 느림과 비움의 미학 / 장석주 / 푸르메


  장모님이 일주일간 집에 와 계시다가 내려 가셨다.

장모님을 보면서 문득 세월의 빠름을 느낀다.

결혼 승낙을 받으러 처가에 갔을 때의 그 정정하시던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이젠 관절도 좋지 않은데다 보청기를 끼었는데도 듣지 못할 정도로 귀를 잡수셔서 입을 보고서야 말을 조금 알아듣는 정도가 되고 말았다.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은 당신께서도 더 잘 알아 이제는 더 이상 세상의 일들을 머리 속에 저장하기를 멈추고 조금씩 비워 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당신 나름대로의 정리일 테고, 한살이를 조금씩 마감해 가는 비움의 자세가 아닐까.


  오랜만에 장석주 선생의 책을 일독할 기회를 가졌다.

읽고 싶은 책은 많고 몸은 따라주지 못하지만 선생의 책은 나올 때마다 빠지지 않고 찾아 읽으려고 애쓰고 있다.


  15년을 읽으면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으로부터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서 15년을 목표로 책 속에 파묻혀서 나를 수련하고 다듬어 보자고 결심한 이유가 바로 선생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흔히 하는 말로 사숙이라고 이름 붙여 보고도 싶지만 언감생심 어찌 그분의 발 끝에라도 따라갈 수 있으랴.

하지만 그 분을 조금이라도 흉내 내 보는 것 또한 내 독서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이런 건 어떨까.

첫눈에 반해 평생 쫓아다니는 짝사랑 정도라고나 할까.


  장자를 읽고 나서 그 감회와 더불어 안성에서의 선생의 일상을 기록해 놓은 담담한 글이 여름철 시원한 샘물 한 바가지 같이 깔끔하고 맛깔 난다.

선생은 늘 느림과 비움, 특히 그 중에서 안단테를 항상 말씀하시고 계시고 있다.

그래서 책을 읽을 때에도 좀 더 천천히 읽으려고 노력을 하고 있지만 선생의 책을 펼치고 나면 그 가속에의 욕심을 도저히 떨쳐 버릴 수가 없어서 자꾸만 속도가 붙으니 이 무슨 역설이란 말인가.


  모처럼 읽은 선생의 책이지만

또 한번 읽으면서 깊이 반성하고 뼈 져린 아픔과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책을 덮었다.

안성으로 내려온지가 10년이고 하루에 여덟 시간 이상씩 읽은 책이 5천권...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음과 용렬함은 뼈 속까지 깊고, 흠모하고 꿈 꾼 경지는 손에 잡을 수 없이 멀어지니 사무침은 붉어진다면서 이룸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한탄하고 계시니

나 같이 독서계 말단에 갓 입문한 초보는 어찌하란 말인가.


  중요한 것은 책의 숫자가 아니라 얼마나 그 책을 정독을 하고 내 것으로 만드느냐가 중요하다고, 안단테 안단테로 독서하라고 하지만 책을 읽어본 독서 강호의 수련자라면 누구나 경험한 바겠지만, 양에 대한 유혹은 마약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혹자들은 아예 독서보다는 보유하고 있는 장서의 숫자의 유혹에 굴복하여 그저 책을 사 모으는 수집가로 전락하고 마는 경우도 더러 보게 된다.

나 역시도 책에 대한 욕심이 누구보다 더 커서 한때는 책을 이렇게 많이 보았네 하고 과시하려고 읽지도 않은 책들을 사서 꽂아두던 때도 있었지만 돌아보면 얼마나 부끄럽고 챙피한 일이었던가.

  

  선생은 책을 읽는 것이 기호의 선택이 아니라 살기 위해서는 꼭 공기로 숨을 쉬고 먹어야 하는 것처럼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사항임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그 책을 곰탕 우려내듯 우려내어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파하면서 내게 주는 금언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한마디를 덧붙여 놓으셨다.

농사를 짓듯 5천권의 책에 골몰하면 마침내 누구라도 자유롭게 쓸 수 있다고.

우레와 같이 내 가슴에 박힌 이 말씀은 평생 뽑히지도 않을 것 같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부끄러워 더 이상 책을 읽지도 못하고 덮을 수 밖에 없었다.


  독서 5천권,

옛말에 남아수독 오거서라고 했는데 아마 이것을 말함이 아니었을까?

참 절묘한 숫자 아닌가.

한 수레가 천권, 그래서 다섯 수레를 읽어야 하니까 5천권.

5천권을 읽은 사람만이 비로소 남자 구실을 할 수가 있고 붓을 들어 글 한자를 쓸 자격이 생긴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 때쯤 되면 나도 그토록 쓰고 싶은 시 한 줄을 쓸 수 있을 것인가?

그 전에는 아서라, 말아라.

설익고 어설픈 잡문들이 행여 세상을 어지럽히는 일이 없도록 꼭꼭 문 닫아 걸고 조심할 일이다.

오직 마음을 삼가고 초심으로 돌아가 15년 정진에 5천권 독서 수양에만 정진할 지어라.


다만, 

세상에 날마다 나오는 수없는 책을 다 읽지 못함을 원망하고 조급해 하는 내 마음을 향해서

세상에는 내가 읽은 책과 읽지 않은 책이 있을 뿐이라고, 좋은 책과 나쁜 책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읽은 책이 좋은 책이라는 선생의 말을 큰 위로로 삼고자 한다.

YES마니아 : 플래티넘 w******5 2011.07.11. 신고 공감 1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또 장자냐? 만만한게 장자야?
"또 장자냐? 만만한게 장자야?" 내용보기
<느림과 비움의 미학>(장석주, 푸르메, 1만5000원)“아, 또야?” 그렇다. 또 장자와 비움 그리고 느리게 살기에 대한 책이다. 그만큼 자연주의 삶이 시대적 요구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우리는 장자 한 권 정도는 서가에 꽂아두고 되새김질을 해야만 한다. 그것이 다소 인간답게 사는 길일 것이다. 독서광으로 유명한 장석주 시인이 동양철학의 고전 <장자>를 이 시대에 맞게 새롭게
"또 장자냐? 만만한게 장자야?" 내용보기

느림과 비움의 미학>(장석주, 푸르메, 15000), 또야?” 그렇다. 또 장자와 비움 그리고 느리게 살기에 대한 책이다. 그만큼 자연주의 삶이 시대적 요구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우리는 장자 한 권 정도는 서가에 꽂아두고 되새김질을 해야만 한다. 그것이 다소 인간답게 사는 길일 것이다.

독서광으로 유명한 장석주 시인이 동양철학의 고전장자를 이 시대에 맞게 새롭게 읽었다. 스무 살에 시인으로 등단하고, 지난 10년 동안장자를 머리맡에 두고 하루도 쉬지 않고 읽었다는 저자는 세계적인 경제공황, 개인의 불행이 더 많이 가지고 싶어하면서 비우지 않는 인간의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파한다. 다시금장자를 읽어야 하는 이유가 지혜롭게 존재하는 기술과 생의 지혜를 얻기 위함이라는 것.

2300년을 뛰어넘어 온 장자는 우리에게 느리게 사는 자만이 비울 수 있고, 비운 자만이 느림을 누린다고 말한다. 한편 노자 역시도덕경을 통해 비움 虛에 대해 그릇과 방은 속이 비어야 쓸모가 있다. ()의 가치가 오히려 무()로써 얻어진다고 말한 바 있다. 자고로 현인들은 통하는 부분이 있다. 호접몽을 꾸는 자는 경기도 금광호수 끝자락에 호숫가에 ‘수졸재’라는 집을 짓고 유유자적하면서 고전읽기와 명상 등 느리게 살기를 몸소 실천하고 있다. 시인, 소설가, 문학비평가, 출판기획자, 방송진행자, 대학교수로도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m*****0 2010.06.15. 신고 공감 1 댓글 1
리뷰 총점 종이책
마음이 고요해집니다.
"마음이 고요해집니다." 내용보기
#발이 신을 잊는 것은 신이 발에 꼭 맞기 때문이고, 허리가 허리띠를 잊는 것은 허리띠가 허리에 꼭 맞기 때문이다.모든 것이 제자리에서 제 역할을 다 한다면 들뜨지 않고 고요해지게 됩니다. 사람이 사는 시간은 모두가 제자리가 있는 듯 합니다. 그 속에 맞춤이 되면 그 어는 것도 드러나지는 않지만 평안한 고요를 이루게 됩니다.
"마음이 고요해집니다." 내용보기
#발이 신을 잊는 것은 신이 발에 꼭 맞기 때문이고, 허리가 허리띠를 잊는 것은 허리띠가 허리에 꼭 맞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서 제 역할을 다 한다면 들뜨지 않고 고요해지게 됩니다. 사람이 사는 시간은 모두가 제자리가 있는 듯 합니다. 그 속에 맞춤이 되면 그 어는 것도 드러나지는 않지만 평안한 고요를 이루게 됩니다.
y*****8 2025.12.20.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속을 비웠으니 이제 배를 채우고 일하러 가자
"속을 비웠으니 이제 배를 채우고 일하러 가자" 내용보기
가끔은 꿈을 꾼다. 좋은 꿈도 있고, 벗어나고픈 악몽도 있다. 요 근래에 꾼 꿈도 악몽에 가까운 꿈이었다. 깨려고 노력했다. 결국은 깨어나서 방에 불을 켜고 책을 읽으면서 새벽과 같이 보낸 적이 있었다. 꿈을 생각하니 “장자의 ‘나비 꿈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장자는 夢蝶主人(몽접주인)이란 별칭을 들을 정도로 이 이야기는 그 당대에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 [p. 11 참
"속을 비웠으니 이제 배를 채우고 일하러 가자" 내용보기
 


가끔은 꿈을 꾼다. 좋은 꿈도 있고, 벗어나고픈 악몽도 있다. 요 근래에 꾼 꿈도 악몽에 가까운 꿈이었다. 깨려고 노력했다. 결국은 깨어나서 방에 불을 켜고 책을 읽으면서 새벽과 같이 보낸 적이 있었다. 꿈을 생각하니 “장자의 ‘나비 꿈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장자는 夢蝶主人(몽접주인)이란 별칭을 들을 정도로 이 이야기는 그 당대에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 [p. 11 참조] 장자하면 나비가 떠오를 정도가 되었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회자될 정도면 요즘 나오는 아이돌 가수들의 노래의 유명세는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 건 아닐까?

대개의 예술가들은 규범과 형식의 구속에 얽매이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삶도 자유롭고 고독에 처하는 사람이 예술가다. 범인의 상식으로 보자면 괴팍한 부류들이다. 아울러 그들은 상상력의 천재들이다. 상상력은 인습과 규범과 틀을 깨는 힘이다. 비록 진흙탕에 뒹굴며 살지언정 임금 밑에서 호의호식하여 규범과 형식에 얽매이는 신하 노릇하기는 못하겠다고 말하는 장자 위에 프랑스 출신의 작고가 에릭 사티의 삶을 겹쳐본다.” - [p. 30 참조] 이들의 삶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호의호식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도 갖고 있는 나는 뭐냐? 아무래도 천재는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재물이 많아서 호의호식하지도 못하는 나는 도대체…. 할 말이 없다. 단지 그들- 장자나 에릭 사티 -의 삶이 부러울 뿐이다. 장자가 지금 다시 태어나더라도 그렇게 살았을까? 세상을 주유하면서 그렇게.  돈 많이 벌 수 있는 지위를 보장해준다는데, 그렇게 대통령이 이야기하는데도 ‘나는 그냥 진흙탕에서 놀 테니 건드리지 마시오.’ 라고 이야기했을까? 내가 장자라면 나는 한다고 했을 것이다. 나는 장자처럼 천재가 아니니까 말이다. 그냥 보통 사람이니까.

『장자』의 「신목」편에 있다던 빈 배 이야기. 처음 들어본 이야기이지만 망치로 얻어맞은 듯 정신이 아득하기만 하다. “너무 많이 실으면 배는 무겁고, 무거우면 흐름이 더디고 둔탁해진다. 배는 비우면 가볍게 흘러간다. 무겁게 채우는 것은 탐욕이다. 반면에 비움은 무심이다. 채운 것은 채움으로 시끄럽고, 비운 것은 비움으로 고요하다.”, “채우는 자는 그 채움에 매이게 되고, 비우는 자는 비움으로 인해 자유로워진다. 비우라!  더 많이 비우라! 그게 장자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 [p. 81. 82 참조] 

이런 말은 장자만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취객들도 우리에게 이런 교훈을 준다. 그들도 비우라고 이야기한다. “소주잔을 비워라!, 맥주잔을 비워라! 그래야 또 채울 수 있을 테니.” 어떤 상황에서도 삶의 깨달음은 시시때때로 온다. 그것을 받아먹을 수 있는 역량을 키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이렇게 장자의 말을 통해서 깨닫든, 취객들의 말을 통해서 깨닫든 우리는 어디에서든 교훈을 받아들일 줄 아는 마음을 갈고 닦아야 하지 않을까.

활 맞아 죽은 원숭이. -[p. 213 참조] - 그러면 그렇지 원숭이 머리가 나쁜 줄은 알았지만 그렇게 죽을 정도로 나쁜 줄은 몰랐어. 하지만 화살을 손에 쥔 채 죽은 원숭이보다 내가 낫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정말로 원숭이보다 나은 점이 없어 보인다. 경솔한 태도를 보이다가 죽은 원숭이는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작은 재주를 뽐내다가 화를 당했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사소한 자랑거리를 떠벌리고 다니는 나도 참 못났다는 생각이 든다. 농담으로 돈 많다고 자랑하다가 돈을 빌려주고는 돈 받으려고 무진장 가슴 졸인 사건이 떠오른다. 아니, 그것만이 아니다. 너무 많다. 하지만, 이제 죽은 원숭이를 보니 더더욱 나의 행동과 입을 단속해야겠다.

* 사실 나는 내세울 재주조차 없다.

포정의 이야기는 전에도 들은 기억이 살며시 난다. 포정의 소 잡는 칼솜씨 이야기는 아마 『식객』이라는 영화에서도 소 잡는 장면이 나온 것 같다. - 만화였던가? 암튼 그런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 것 같다.

소를 소로만 보는 서툰 백정과는 달리 포정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포정 자신과 소는 다를 바 없는 하나였다. 소가 곧 자신이고, 자신이 곧 소였던 것이다.” - [p, 341 참조]

아직도 소가 소로만 보이는 나에게는 아직 깨달음이 포정에 미치지 않음을 시인해야겠다.

나도 문장이 문장으로만 보이지 않고 내가 문장이고 문장이 곧 나로 보이는 그 순간이 왔으면 좋겠다.

장자와 해골의 대화는 참으로 난감했다.  해골이 장자의 꿈에 나타나 한 말 때문이었다.

하지만 곧이어 나온 말로 인해 나도 해골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무위의 지극한 안락에 든 해골이 어찌 다시 속세의 노고와 곤란 속으로 돌아가려고 하겠는가?” - [p. 358, 359 참조]

그렇지만 나는 해골이 아니니까 다른 입장표명을 해야겠다. 나는 진흙탕이라도 이승이 좋다. 살면서 무위의 경지를 깨달을 때까지 살고 싶다.


오늘도 나는 장자의 말씀이 아닌

 에서

『느림과 비움의 미학』을 배운다.

어디에서든 배울 준비가 되어 있는 나는 꽤 현명한 편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해 본다.

아직은 나도 쓸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속을 비웠으니 이제 배를 밥으로 채우고 일하러 가야겠다.



p********p 2010.05.17.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느림과 비움의 미학]
"[느림과 비움의 미학]" 내용보기
나는 장자의 [장자]를 모두 읽어 보지는 못했다. 내편(7권)만 간신히 읽어봤을 뿐이다. 나머지(총 33편이라고 하니 26편)는 읽어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래서 더욱 이책에 호기심이 발동했는지도 모르겠다. 처음 시작은 말그대로 호기심이었다. 책을 고를때 작가의 이름을 그닥 비중을 두는 편이 아니라 장석주란 작가에 대한 생각은 크지 않았다.  제목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느
"[느림과 비움의 미학]" 내용보기

나는 장자의 [장자]를 모두 읽어 보지는 못했다. 내편(7권)만 간신히 읽어봤을 뿐이다. 나머지(총 33편이라고 하니 26편)는 읽어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래서 더욱 이책에 호기심이 발동했는지도 모르겠다.

처음 시작은 말그대로 호기심이었다. 책을 고를때 작가의 이름을 그닥 비중을 두는 편이 아니라 장석주란 작가에 대한 생각은 크지 않았다. 

제목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느림과 비움이라는 단어 자체가 요즘 세대를 살고 있는,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다람쥐가 채바퀴를 돌 듯, 물론 의미없는 회전은 아니듯, 우리의 반복.규칙적인 삶도 돌아보면 인생이란 단어로 시작과 진행과 결말로 나누어지는 한편의 드라마처럼 매순간에 의미를 담자면 끝도 없겠지만, 그렇게 의미지어질 그래서 열심히 살아야한다는 의무를 지고 사는 나에게 매우 신선하게 다가오는 단어들이다. '서두르지 말자'.' 다그치지 말자'  아무리 각인하고 각인해도 입밖으로 튀어나오는 말은 '조금만 빨리~ '. '조금만 더~'를 끊임없이 내뱉는 걸 보면 난 영락없는 세인일 뿐이다. 

책의 시작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호접몽'이다. 장자의 나비 꿈 이야기.. 꿈속에 나비였던 장자는 꿈이 깨고나서도 내가 나비인지..나비가 나인지.. 가끔 나도 꿈을 깨고 나서 꿈속과 현실에서 잠시 갸우뚱~한적이 있다보니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이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호접몽을 연상케 한다.

장자이야기인가 싶으면, 작가의 소소한 생활이야기가 덧붙여져 나오고를 반복한다.

책 중반을 넘어서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꿈이고 꿈 속에서 보는 세상이 현실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시 머물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깨어 있는 이 시간들이 내게는 훨~씬 많으니 이를 현실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장자의 아내가 죽었을때, 문상가는 이들앞에 장자는 질그릇을 두드리며 노래까지 하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묻는 이들에게 답한 '본래 삶이란게 없었네, 본래 삶이 없었을 뿐 아니라 기도 없었던 거지, 그저 흐릿한 어둠 속에 섞여 있다 변하여 기가 되고 기가 변하여 형체가 되고, 형체가 변하여 삶이 되었지. 이제 다시 변해 죽음이 된 것인데, 마치 봄 여름 가을 여울 사계의 흐름과 맞먹는 일이다'라는 장자의 말은 머리로는 '그렇구나~'하면서도 내 마음은 기괴한 장면일 뿐이다. 작가도 그랬을까?

제자(故박완숙)의 죽음에 '벗들 얼굴이 하나씩 떠오르면 다시 금생의 어느날로 달려나와 환생하고 싶지 않으신가. ...그립지 않은가..아서라, 환생은 꿈도 꾸지 말아라!'하며 못내 안타까움을 표현해 놓은 구절이 더욱 가슴에 와닿는다.

조금은 다급하고 처한 현실이 답답하다 여겨지는 이들이라면 한번 권하고 싶은 책이다.

인생은 일장춘몽이라고 덧없다 여기기 보다는, 어느쪽이 진짜일까 고민하기 보다는, 꿈도 내것이요~

현실도 내것이다~하면서 멋지게 살아봄이 어떨지~...^^   

 

d*****k 2010.07.17.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