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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갖는 욕구라는 건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하나는 '필요성'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선호'라고 말할 수 있지 싶다. 무슨 말인고 하면.. 이를테면 '콜라를 마시고 싶다' 라는 욕구를 예를 들면 편한 설명이 될 수 있는데.. 콜라를 마시고 싶은 욕구는 두 가지의 '원함'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하나는 '목이 마르니 시원한 음료가 필요해' 라는 필요성이고, 다른 하나는 '콜라가 정말 좋아.. 그러니 꼭 마시고 싶다'라는 선호.
필요성이라는 것은 꼭 콜라가 아니더라도 시원한 물이나, 다른 음료로 이른바 '대리만족'이 가능한 부분인데 반해, 선호라는 것은 필요성과는 달리 딱 그것이 아니면 안 되는 '유니크'한 것이다. 두 사람이 가지고 있는 콜라를 마시고 싶은 욕구는 설령 (계량이 가능하다는 전제 하에) 그 크기가 같더라도 두가지 구성인자의 비중이 서로 다를 수 있으므로 어떤 이는 아무 음료나 손에 잡히는 것을 들이킴으로써 그 욕구가 쉽게 해소되나, 또 다른 이는 반드시 콜라를 마셔야만 욕구를 해소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구지 콜라만 우겨대는 사람을 까탈스럽다 핀잔하지 말자^^)
콜라의 예를 들었지만.. 사람을 사랑하는 문제나, 종교를 갖는 문제도 다 비슷하게 끼워 맞출 수 있다. '이 사람이 아니면 안돼'라는 선호에 입각한 사랑의 감정과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고 싶어'라는 필요성을 바탕으로 한 감정이 전체 안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따라, 오직 한사람만을 위한 지고지순한 '순정'과 세간에서 흔히 이르는 바람둥이의 '바람끼'로 구분될 수 있는데.. 어쩜 당사자가 느끼는 애틋한 욕구의 전체 크기는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선.. 바람둥이도 나름대로는 진지한 감정을 가지고 있을 것이니 역시 너무 나무라지 말자^^)
서두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 책의 작가 한수산님이 천주교 신앙을 가지게 되는 과정을 읽던 중 콜라를 마시다가 갑자기 이런 일련의 생각이 떠 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꽤 열심히는 아니지만 꾸준히 오랫동안 성당을 다녀온 신자(나이롱이지만..^^)의 입장에서 '우리는 왜 종교를 갖는가?'라는 문제를 그간 진지하게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사실이 매우 새삼스러웠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 하느님을 믿는 다는 것, 나약한 인간에게 종교가 필요하다는 것을 하나의 욕구로 본다면.. '나를 온전히 의지하고 믿을 절대적인 무언가가 필요해'라는 필요성과 '오직 한 분.. 그 분만이 내가 유일하게 믿고 의지하는 나의 주님'이라는 선호(?)는 많이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이야기는 고 김수환 추기경님의 삶의 흔적을 되짚어가는 작가의 이야기라는 형식을 갖고 있지만.. 정작 이야기의 주요한 주제는 작가 스스로의 '나에게 잘못한 이를 결코 용서하지 못하는' 인간적인(?) 고뇌이다. 80년대 전두환 정권이 민주화 운동에 대한 무식한 탄압을 하던 중, 작가 역시 중앙일보에 불온(?) 소설을 연재하였다는 이유로 연행되어 엄청난 고문을 받게 된다. 함께 고문을 받던 지인 중 누군가는 결국 고문의 후유증으로 죽음을 맞게 되고, 작가 역시 정신적인 고통으로 인해 더 이상 이땅에 머물지 못하고 일본으로 떠나 장기간 체류를 하게 된다.
고문의 상처와 그로 인한 정신적 고통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츰 줄어가면서 비교적 정상적인 생활패턴을 찾게 되나.. 고통은 가셔도 흉터는 남는 법.. 작가 한수산님에게 씻기지 않는 흉터는 바로 자신에게 이유없이 고통한 가한 사람들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는 것.
「흔히들 말하지요.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말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용서하지 못하는 그 절박함이 끝내는 자신의 삶을 가로막는 장애가 되고 더 비극적인 것들은 만들어낸다면, 그것은 고통을 준 자들을 용서하지 못한 자기파멸이 아니라 그들에 의한 희생입니다. 누구를 위한 희생인가요. 제 삶이 무너지고 쓰러져 무력하게 희생되는 걸 피하기 위해서라도 용서하라는 말일까요. 너 자신을 위해서..」 [Page 284]
십여년이라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작가는 고 김수한 추기경님의 선종 이후 그의 발자취를 따라 밟아가면서 비로서 '용서'라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된다.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고.. 그간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난 후에야..
「누구를 참으로 용서한다는 것은 그를 참으로 잊어버려야 가능한 게 아닐까요? 하느님이라면 가능하지만 그건 인간으로서는 좀처럼 이루어내기 힘든 일이지요..」 [Page 329]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라는 예수님이 친히 가르쳐주신 '주의 기도' 기도문의 진정한 의미는.. 결국 자신이 용서받기 위해 타인이 자신에게 잘못한 것을 용서해야 한다라는 것임을 깨달은 작가는 이제 자신을 위해, 자기 자신이 용서받기 위해, 오랜세월 용서할 수 없었던 그 흉터를 용서하고자 한다.
한수산이라는 작가의 문체가 부담이 없어서인지.. 곧곧에 등장하는 성당을 비롯한 정경묘사가 평화로와서인지.. 실제 내용이 개인적 고뇌와 격정적인 분노를 기저에 계속 깔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정심으로 편안하게 읽을 수 있었다. 그런 편안함은 아무래도 천주교와 인연이 적지 않은 나의 개인적 처지에 기인한 바도 꽤 있으리라..
살면서 '내가 미워하는 사람의 숫자 만큼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도 늘어가는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누구에게 미움을 받고, 용서받지 못할 일을 저질러 죄인으로 사는 것만큼이나 불편한 감정이, 남을 미워하고 남을 죄인으로 만드는 짓은 아닐런지.. '늘 당신의 뜻대로 내게 이루어 지소서..'라는 피상적이고, 시니컬하며, 스스로에겐 무책임한 기도만 하던 나였지만.. 이번 주말에는 좀 더 경건한 마음으로 '내안의 미워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나의 가족들과 주변의 지인들을 죄인으로 만들지 않게 해 주세요..' 라는 색다른, 그러나 개인적으론 의미 깊은 기도를 해야 겠다는 결심을 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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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종교는 기독교이다. 하지만 추기경님에 대해서 카톨릭에 대해서 알고 싶었다. 추기경님 때문에 카톨릭에 흥미가 생기고 관심이 생긴것 같다. 솔직히 기독교 외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냥 내가 믿는 종교가 최고라고 생각했던것 같다. 하지만 작년에 추기경님이 돌아가시고 추기경님에 대해서 나올때 정말 훌륭한 분이 돌아가셨구나 라는 생각을 가게 되었다. 이런 삶을 살기란 정말 쉽지 않다. 그래서 그런지 왠지 카톨릭에서 종교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훌륭한 분들이 많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리고 또한 추기경님에 대해서 잘 몰라서 이 책을 통해서 읽어보고 알아보고 싶었다.
기독교 외에는 잘모른다. 그런데 추기경님의 소식을 들고 추기경님에 대해서 알고 싶었다. 어떤 삶을 살았는데 사람들이 이렇게 찾아가고 방송에서 계속해서 나올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이런 삶을 살기란 쉽지 않아서 나 또한 배워야 할점이 많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항상 성경의 말씀는 말로 하고 실천하지 않는 분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이런 분들에 비해서 추기경님은 정말 훌륭한 분 중에 하나이라고 생각이 든다. 이런 분를 낳고 키우는 부모인 어머님에 계셔서 그럴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옛날에 어릴때 이야기들과 그리고 어머님의 이야기가 나왔는데 어머님의 임종을 맞이할때 이야기를 읽으면서 울고도 했던 것 같다. 훌륭한 어머님 밑에서 자란 자식이라서 그런지 항상 신부님을 맞이할때도 정말 집부터 깨끗하게 정리하는 것들을 읽을때 정말 훌륭한 어머님이 계시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정성으로 신부님을 맞이하는 분이 얼마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집안의 한분이 순교를 당해서 집안의 혈통의 자부심이 대단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어머님 또한 아들들을 신부로 만들기로 항상 기도 하신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추기경님은 항상 가난에서 고생하시는 어머님을 모시고 결혼해서 행복하게 효도하면 살고 싶어했다. 하지만 어머님의 소원대로 신부님이 되신것 같다. 그때에는 일본에 가서 유학을 공부를 하기가 힘든 상황이였던 것 같다. 그때가 우리나라가 일본의 신민지로서 지배를 받고 있었을때 시기인데 일본에서 공부를 하는것이 마음이 편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때에 많은 고민을 했던 걸로 나와있다. 이런 가운데 있어서도 어머님의 소원대로 어머님의 뜻을 따라 신부가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을 보고 정말 효도자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않고 어머님의 소원대로 자기의 삶을 살기란 정말 어떻게 생각하면 후회도 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자기의 소심껏 신부의 일을 다 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까지 전하는 모습을 볼때 정말 뭐라고 할 말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님은 또한 돌아가시기 몇시전에는 성당에 가셔서 고해성서라고 해야 하나 자기의 죄를 다 고백했고 또한 몸이 좋지 않는 상태에서 자신의 몸을 이끌고 직접 걸어서 힘들게 성당에 갔다는 글을 읽어보고 정말 죽을 힘을 다 해서 갔다왔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정말 아들들을 위해서 몸도 아깝게 생각하지 않고 또한 아들들의 미래의 모습을 소원하면서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들을 읽어볼때 정말 대단하구나 라는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다.
이 세상에는 자식에게 아낌없이 주는 부모님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추기경님의 어머님처럼 정말 최선을 다해서 자식에게 그리고 자식들에게 모범이 되는 부모님들을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나 또한 이 어머님의 모습을 닮아가고 싶다. 그래서 자식들이 정말 훌륭한 사람들이 될수 있게 노력해 보고 싶다. 또한 지금 나의 부모님 우리 시부모님께도 최선을 다해서 잘해드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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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갑자기 내가 납치되어 지하밀실에서 각종 고문을 겪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고문이 너무도 강도가 심해서 판단력과 분별력이 흐려진다면 나는 아마 짓지도 않은 죄를 만들어서 고백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수환 추기경의 말씀처럼 사랑하고 또 사랑하라는 말씀이 무색해질 것 같다. 역사라는 것...지금의 우리들이 존재하기까지 매일의 편안한 일상을 우리들이 지루해하고 있지만 격변의 시기를 살았던 한수산 작가에게는 그 순간들이 너무도 선연하여 글로 전달하고 있지만 읽는 우리들에게는 영화처럼 이미지화되어 가슴에 깊이 박히니 말이다. 아침 출근 버스에서 잡은 이 책은 김수환 추기경이라는 분의 이름 석자와 함께 편안하게 읽어내려가려고 하였으나 갑자기 작가의 일생이야기에 외딴 골짜기에서 래프팅을 하듯이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고문 장면을 작가가 써내려가면서 뼈에 사무치는 고통이 떠올라 무척 힘들지 않았을까 한다. 그래도 그 힘든 순간을 잘 이겨내시고 불의에 맞서지 않으며 목숨을 내려놓지 않아서 이런 작품을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용서란 무엇일까? 사람이 누구나 내마음 같지 않아 가족 내에서도 사회에서도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싫고 미운 사람들이 꽤 있는 것이 인지상정일게다. 그렇지만 그들을 우리가 싫어하고 미워한다고 해서 고통받는 것은 자기 자신 외 다름 아닐 것이다. 여러 책을 읽어보아도 다른 사람을 바꾸는 것보다는 자기 자신을 바꾸는 것이 가장 빠르고 나은 방법이라고 하니 나에게 아픈 기억을 주었을 누군가를 가슴에 담아 독을 품느니 용서와 화해를 통해 내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이 마음의 건강을 위해서도 좋을 것이다. 내가 특별히 종교가 없다는 이유로 김수환 추기경의 가치에 대해서 그리 깊이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추기경님의 사후에 발간된 많은 책들을 통해 그 분이 진정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멘토가 되어 주셨으며 퍽퍽한 우리네 삶을 잘 버텨갈 수 있도록 큰 지혜를 주고 가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의 삶...그리고 추기경님의 삶이 잘 어우러진 책이라고 생각한다. 추기경님의 성장과정은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나 또다른 책을 참고했으므로 100퍼센트 사실은 아닐테지만 비교적 잘 그려져 있다는 생각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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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전쟁을 겪은 세대가 아니다. 또한 민주화운동으로 나라가 들썩이고 많은 사람들이 시대의 아픔을 몸으로 감내해야 했던 시절을 지나온 세대도 아니다. 그저 영화를 통해 보거나 소설을 통해 접하기만 한 그 소름끼치는 일들을 한권의 소설을 통해 다시 만났다. 한수산의 장편소설 <용서를 위하여>이다.
<용서를 위하여>는 지난해 선종하신 김수환 추기경의 삶과 저자의 개인적인 아픔에 대한 고백을 교차하여 엮어낸 소설이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력을 가지고 온 국민의 입을 닫게 했으며 무고한 사람들에게 고문을 가한 것으로 악명이 높은 제 5공화국 시절, 최고인기 작가였던 저자가 국군 보안 사령부로 연행돼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무자비한 폭력과 고문으로 육체적인 고통과 모욕감을 주는 고초를 겪게 된다. 30년이 지났지만 그 때 겪었던 일들을 떠올리기도 싫었을 텐데 생생하고 담담하게 묘사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세상을 자신을 향한 분노도 감당하기 힘들었을텐데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으로 그분에 대한 그리움과 우리들에게 남긴 말씀 "서로 용서하세요"로 치유해가는 저자의 모습이 참으로 멋지다는 생각을 한다.
종교는 늘 나와는 멀리있는 것 같았다. 어릴적 성당에 다니긴 했으나 지금은 냉담자로서 정말 급할때나 하느님을 찾는 얄팍하고 이기적인 마음과 내게 직접적으로 가해지는 힘겨움이 아니라면 관심을 두지 않았고 무슨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도 아니면서 "나만 아니면 돼!!"라는 생각으로 세상을 살고 있었다. 그런데 책을 읽다보니 슬그머니 내가 부끄러워진다. 지금 내가 누리는 이 평화로움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하고 노력하고 투쟁했을텐데 나 혼자만의 안위에 행복에 급급하며 살아오며 그들의 값진 피흘림을 모른척 하며 살아온 것은 아닌지 하고 말이다. 공감은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들이 겪었을 많은 고통을 이해하려 노력하며 감싸안아주는 시늉이라도 했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사람이 무섭고 사람이 살고 있는 세상이 싫을 법한 그 고통의 시간 이후로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주시고 가신 잔잔한 감동을 통해 저자 스스로 황폐한 우물속에서 벗어나는 것을 보니 아직은 적대감을 가지고 죽이고 싶을만큼 미운사람이 없다는 것에도 감사해야겠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만큼 자신이 더욱 힘겨워진다는 말처럼 작가가 80년대 영문도 모르고 당했던 일들을 그 오랜시간에 걸려서라도 잊고 용서하려 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니 일상생활에서 아무것도 아닌 일로 싸우고 미워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저 나와좀 다르다는 이유로 내 뜻을 거스른다는 이유로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는 것은 아니란 마음이다.
종교를 떠나서 지난간 역사속 한 페이지를 들여다 보고, 내 삶을 돌아보고 앞으로 어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생각케 하는 좋은 시간이었던 거 같다. 아프지만 힘겹지만 조금 더 세상을 품으며 살수 있는 그런 내가 되기를 김수환 추기경님의 좋은 말씀들과 함께 되새겨 보고자 한다. 나도 나누어 주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책이다.
세상을 살고 있었다. "짙은 어둠 속에서 사랑을 잃고 절망에 빠져들 때 나를 감싸주는 부드러운 한마디. 이 또한 지나가리라. 세상이 내게 주는 많은 기쁨과 힘겨운 시련 중에도 나를 지켜주는 지혜로운 한마디. 이 또한 지나가리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 p303 김웅렬 신부님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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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님이 우리들의 곁을 떠나신 날을 생생하다. 나는 그날 방송으로 전해지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하염없이 쏟아냈다. 내가 통제가 되지 않을정도로 쏟아지는 눈물에 나조차도 놀라울 지경이었다. 길게 늘어뜨려진 조문행렬이 이어짐에도 사람들은 어떠한 불만을 토로해내지 않았고, 차를 나눠마시는 모습과 부모님의 손을 잡고 온 어린아이에서부터 아주 연세가 드신 어르신들까지도 오랜 기다림에 그저 숙연할 뿐이었다. 김수환 추기경님의 삶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이 책을 보면서, 김수환 추기경님의 삶을 다시 볼 수 있는 시간이 되어 마음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그 분이 내 옆에 살아계셨으면 하는 생각도 가졌다. 온화한 웃음속에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신 듯한 모습이 아직도 그립다. 그 분의 발자취를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뜻 깊은 시간이었다.
어떤 사람의 삶에나 형성기 혹은 수업시대라는 것이 있다. 훗날 그를 만들어내는 자양이 되고, 자아가 뿌리를 내래는 시기이다. 김 추기경님에게 그 시기는 언제였을까. -본문 중- 글을 읽으며, 김수환 추기경님의 청년시절 고뇌를 만나볼 수 있었다. 나만 흔들리고, 나만 고뇌하던 시기가 있는것으로 착각하며 살았던 때가 있었는데 그때의 그 느낌을 무엇으로 표현하면 좋을지 몰랐다. 그런데 저자의 수업시대, 형성기라는 표현이 마음에 쏙 들어왔다. 김수환 추기경님에게도 고뇌의 시간이 존재한 듯 보였다. 하지만 그 크기와 자리는 너무나 나와 달랐다. 김수환 추기경님이 뮐러교수님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너무 인상적이었다. 나 또한 나의 수업시대에 대화를 나눌수 있는 존재가 계셨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대화를 마치 보는 것이 아닌 듣는 것 같았고, 청강생이 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저자의 글은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문체부터 모든 것이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느껴졌다. 글을 읽는동안 지루함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나는 심취해 있었다.
고문은 인간에게서 추상명사를 빼앗는 일이었다. 우리는 일상을 보통명사로 살아간다고 믿는다. -본문 중- 온몸의 피가 들끓으며 숨구멍 하나하나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은 인간에 대한 두려움... 허위라는 공포가 각질이 되어 굳어져 갔다. 그의 글은 마치 내가 느낀 용서에 대한 고뇌를 마음속에 들어왔다 나간것처럼 표현해주고 있었다. 용서할 수 없어 괴롭고, 마치 그 사람이 나의 인생의 키라도 쥐고 있는 것 같은 소름이 돋아나는 것 같은 경험, 모든 것이 역류하는 듯 하지만 내가 무엇조차 할 수 없는 듯한 경험, 용서해준다 말하기도 싫었고, 그렇다고 똑같은 방법을 쓰기도 싫었으며, 가만히 있는 것도 너무나 싫었던 경험들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글을 보며 나는 마치 모든 것이 깨끗하게 비워진 느낌이었다. 용서라는 이름앞에 괴로웠던 시간들도 과거에서 이제는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 지경이 되었다. 추기경님은 내게 너무 큰 존재이시다. 그저 그속에 빠져들게 만드는 힘이 느껴진다. 저자의 글, 좋은 말씀들, 김수환 추기경님의 뜻을 보면서 내 안에 있는 내면과 마주했다. 용서! 나는 그것을 존중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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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를 위하여.... 주여 김 추기경에게 안식을 주소서. 추기경님, 우리를 기억하소서] 책의 시작은 2009년 2월.
경북군위.
"너거집 천주교 믿는다매?" / "어, 칸데 와?" 이 모욕. 나는 이제 없었다. 이 치욕, 다 버리자. 다 없다. 나는 없다. 여기서 무언가 사람으로 있을 생각은 말자.
모진 고문을 당하고 그 후 다시 제주도에 내려온 작가는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벌레처럼 사는것도 죽은것도 아닌 세월을 보내게된다. 매일 제주도 바닷가에서 방황을 하던 그에게 불현 듯 성당을 떠올리며 성당을 향한다. 카톨릭과의 만남... 하지만 그 만남을 지속적으로 유지하지 못하고 아직 받아드릴 준비를 하지 못한다.
이런 용서할수도 용서할 필요도 없는 일들을 김수환추기경은 말한다. 서로 사랑하라고, 서로 하나가 되라고... 서로 사랑하라가 아닙니다. 용서는 서로 화해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나 잘해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후 고통속에 살아가는 작가는 도망치듯 한국을 떠나 일본으로 유배 아닌 유배를 스스로 가게된다. 1989년 일본에서 지인을 통해 이경재신부님과의 만나게 되는데 그는 백두산에서 눈물속에 세례를 받게 된다. (본문중/)
책의 사이 사이에는 1836년 신학생이 되어 마카오로 떠난 최방제. 최양업. 김대건신부의 이야기도 함께 소개되어. 우리나라의 천주교의 역사와 그들의 억압과 노력이 함께 이야기된다.
지난 날의 고통을 극복하고 다시 글을 쓰는 작가에게 보내는 팬들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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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많이 아팠다 펑펑 울기도 하고...자신뿐만이 아니라 자신 때문에 고통받은 많은 사람들 때문에도 용서는 더 힘이 들었으리라 생각한다 백두산에서의 그 청청한 물로의 세례 감명받았다 그러나 가슴이 터질도록 감동을 했던것은 찜질을 해 주던 사람의 편지였다 그당시 국정원의 근무는 얼마나 능력이 있고 뽐낼 일이고 부러워할 일이었을텐데 무고한 사람의 고통을 보며 안정된 일과 명예를 접고 지방에 내려가 식당을 하겠다는 결심. 글로 다할 수 없는 인간에 대한 감사와 감동이 있었다 시골의 굴뚝에서의 연기만 보면 가족이 오붓하게 모여 사랑을 나누겠다 싶어 부러워한 추기경님이 몹시도 그립다 언제나 겸손하시고 남을 먼저 배려하며 모든 것을 희생하신 우리의 영원하신 추기경님 지금 이 많은 분란과 갈등을 보시며 한말씀만 해 주시면 좋으련만.. 좋은 글 써주신 한수산님 감사 드리며 늘 건강하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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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요즘 나의 생활에서 많이 들여다보게 되는 단어이다. 가슴이 먹먹해 지면서도 끊임없이 되새기는 말, 용서. 그토록 용서를 바라는 이유는, 미움은 품을수록 커지고, 불행에 옭아매어 나를 해치기 때문이리라. 작가의 이름 때문도, 김수환 추기경 때문도 아닌,
제목으로 끌리기는 했으나 이 책을 통하여 김수환 추기경에 대해 알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다.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래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찾아올까 궁금했었다.
그런데 이 책은 단순히 추기경의 삶을 담아, 그를 그리기 위한 책이 아니었다. 상처를 치유해가는 자신의 모습을 이 소설을 통하여 풀어내고 있다. 왜 이런 전개방식을 사용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자료를 검색해보니 작가의 실제 경험을 담은 이야기였다.. 그 모든 것이 사실에 바탕을 두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너무나 두려웠다.
'아 주님. 제가 용서하지 못하면서 저는 어떻게 용서받겠습니까. 제가 용서하지 못한다면 저 또한 용서받지 못하는 것을. 그래서 감히 비교하기도 죄송스럽고, 나의 상처가 세상에서 제일 크다 울부짖었던 내 모습이 부끄러워지지만, 가까이 부르시고, 성숙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아, 하나님. 저도 고백합니다.
주여, 나와 함께 하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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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할 수 있는 축복
책을 읽다보면 어느새 시간이 훌쩍 몇 시간을 지나있다. 뻑뻑해진 눈에게 잠시 휴식을 주고자 TV를 틀었다. 무심코 여러 채널을 돌리다 평화방송에서 멈췄다. 꼭 어디선가 본 사람이 나와서 강연을 하고 있었다. 누구지? 그리곤 다시 책을 보았다. 책 표지에 웃고 있는 모습으로 사진이 찍힌 한수산 작가였다. 방금 전까지 읽었던 책의 작가를 글로서 뿐만 아니라 목소리를 듣고 생생하게 그 모습을 볼 수 있다니……. 이런 우연이 있을까 싶었다. 그가 펴놓은 책 ‘용서를 위하여’는 내가 처음으로 읽은 한수산 작가의 책이자 7년 만에 세상에 펼쳐 보인 그의 마음이 담겨있다. 왜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는지는 이 책을 읽다보면 저절로 이해가 된다. 용서할 수 없는 이를 용서하기까지의 작가의 자전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소설이라기 보단 수필에 가깝기도 하지만, 그가 용서를 하기까지 그를 증오와 용서 속에서 번민하게 했던 김수환 추기경의 삶을 따라가면서 마침내 용서를 하게 되고 자신도 용서받았음을 고백한다. 세상에 ‘한수산 필화사건’ 으로 알려지는 이 일은 한수산 작가가 전두환 정권 당시 보안사령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한 일을 말한다. 이 책에서 가장 긴 페이지에 걸쳐 기록된 이 일은 예전 ‘모래시계’라는 드라마에서 보았던 내용을 그대로 떠올리게 한다. 죄가 없는 사람을 잡아다 무작정 죄를 토설하라고 하며 감히 인간에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여지없이 하는 그들 앞에 작가는 자신이 인간인것 조차 잊었었다고 고백한다. 참으로 가슴 아픈 건 인간에게 해서는 일을 한 이들조차도 인간이라는 점이며, 한 시대의 아픔이라고 치부하기엔 그 상처가 너무도 커 보이고 지금도 얼마든지 그러한 일들이 자행될 수 있다는 점이다. 작가는 그 모진 고문으로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기도 했고 증오로 피가 철철 끓었다. 누구라도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화해와 일치는 남을 받아주고 용서하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용서는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용서는 참으로 우리에게 한없이 큰 위로가 되고 그것은 곧 우리로 하여금 죄에서 다시 일어서게 하는 힘이 되고, 어둠에서 빛으로, 실망과 좌절에서 희망과 재기로, 죽음에서 부활로 인도하는 구원과 생명이 됩니다.”
그는 김수환 추기경이 말하는 용서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용서와 화해와 일치를 말하는 추기경의 이야기에는 선행될 무엇인가가 있다고 생각한다.
“상처나 고통을 준 자들의 뉘우침이 없는데 오히려 상처받은 자들이 먼저 그들을 용서하라는 건가요? 김 추기경의 주장, 그건 정말이지 무책임한 말입니다. 용서해야 하는 쪽의 또 다른 고통을 생각해 보지도 않은 무책임입니다. 잊어야 하는데 잊히지도 않고, 용서해야 하는데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평생 이 고통, 용서하지 못하는 고통을 안고 살아가도록 저를 처박았다는 것, 이걸 더욱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김수환 추기경의 삶을 더듬어 떠난 일본에서 만난 프랑스인 네랑 신부는 용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누구를 참으로 용서한다는 것은 그를 참으로 잊어버려야 가능한 게 아닐까요? 하느님이라면 가능하지만 그건 인간으로서는 좀처럼 이루어내기 힘든 일이지요.”
문득 ‘밀양’ 이란 영화가 떠오른다. 여주인공은 납치범에게 자식을 잃는다. 그리곤 신앙의 믿음으로 그를 용서하기로 마음먹고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찾아간다. 그러나 살인자는 너무도 평온한 얼굴로 자신은 이미 신께 용서받았다고 말한다. 그녀는 배신감을 느낀다. 자신은 이토록 고통 속을 헤매며 겨우 용서를 하려고 하는데 신이 그를 용서했다니.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이를 용서했다니. 신의용서 이전에 인간의 용서가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물음을 이 영화는 던졌었다.
어렵게 가톨릭 신자가 되고 믿음을 가진 이들 속에서 자신의 믿음을 키워가면서 작가는 깨닫는다. 자신이 모진 고문을 당하지 않았다면 신학교 공부를 하러 떠나는 최양업 신부를 압록강 건너 국경까지 데려다주고 순교하는 정하상 성인과 모진 고문 끝에 순교하는 아버지 최경환 성인의 이야기를 쓸 수 있었겠는가 하고. 그 고문마저도, 미약하고 보잘 것 없는 자신을 더 견고하게 하기 위한, 사회와 역사에 더 깊이 눈을 돌리게 해서 하느님이 자신을 쓰시기 위한 담금질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감격과 놀라움을 느끼게 된다.
이 책은 용서를 향해 가는 과정을 기술한 책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한 인물의 아픔이 치유되는 과정을 보면서 그것이 비단 종교적 용서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만 보이진 않는다. 우리의 삶에서 용서란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렵게 이루어지며 또 그것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이란 것을 깨닫는다. 왜냐하면 용서를 통해 결국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고 한 인간이 완성되어지는 일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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