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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거정(張居正) 평전 - 주동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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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얼마 전 개정판이 출시되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읽은 책은 2014년판이므로 해당 에디션을 염두에 두고 리뷰를 쓰도록 하겠습니다. )군주도 감히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인신(人臣)이 있으니 바로 그의 왕사(王師)입니다. 고려 조에는 당대의 고승 대덕이 이 직에 초빙되었으나 대개는 당대의 석학, 대유(大儒)가 맡아 국가의 대본(大本)을 이을 후계자를 훈육한 것이 보통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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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얼마 전 개정판이 출시되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읽은 책은 2014년판이므로 해당 에디션을 염두에 두고 리뷰를 쓰도록 하겠습니다. )

군주도 감히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인신(人臣)이 있으니 바로 그의 왕사(王師)입니다. 고려 조에는 당대의 고승 대덕이 이 직에 초빙되었으나 대개는 당대의 석학, 대유(大儒)가 맡아 국가의 대본(大本)을 이을 후계자를 훈육한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세자 시절 연산군을 가르친 이가 형조 정랑을 역임한 꼬장꼬장한 조지서였는데, 이분이 사춘기 소년에게 감정적 배려를 전혀 하지 않고 인간적 모멸감까지 줘 가며 호된 방식으로 다룬 게 역사에 큰 부작용을 낳았다는 뒷말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설령 그보다 선배였던 병조정랑 허침이 세자의 강습을 전담했다 한들, 이미 마음에 큰 가닥이 어긋나 성정이 비뚤어진 이가 새삼 개과천선의 길을 걸었을 듯하지는 않습니다.

장거정은 어려서부터 수재로 손 꼽히고 학문적 역량이 뛰어나 주위의 칭송이 자자했을 뿐 아니라, 과거 급제 후 벼슬길에 올라서는 경제제민의 수완을 탁월히 증명한 천생 관료였습니다. 40주차 리뷰에서 당 덕종 연간에 양세법이라는 개혁 세제가 도입되어 열악하고 번잡한 세정(稅政) 쇄신에 큰 도움을 주고 민생 안정에도 기여했다고 적었는데, 언젯적 양세법이 물경 700년이 지나도록 대륙의 수취 제도 핵심의 지위를 그대로 지니고 있었습니다. 장거정이 이를 대거 손 보아, 세목(稅目 혹은 細目)을 단일화하고 인두세 중심에서 토지세 중심으로 성격을 근본 재편하였습니다. 이는 마치 조선 후기 영정법이나 대동법 개혁을 함께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고, 시행 시기도 우리가 그리 늦지 않습니다.

장거정은 특유의 카리스마를 발휘하여 난잡했던 당쟁을 억제하고, 황제의 리더십을 강화한다는 명분으로 언로(言路)를 제한하여, 그간 대단히 난항을 겪은 중앙 정치 무대의 당쟁을 일시 진정시켰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오히려 장거정 일파의 전횡으로 이어지며, 억압 당한 제 당파의 불만은 하늘을 찌를 듯했고, 기본적으로 비판의 채널을 폐색하여 정국의 안정을 도모하겠다는 발상부터가 건전한 게 못 되었습니다.

명 중기에는 이른바 북로남왜의 화가 끊이질 않았는데, 장거정과 비슷한 연배인 정치적 동료 척계광이 이른바 절강 병법이라는 것을 개발하여, 기다란 창과 대병력을 동원한 전술로 왜구의 준동을 일시 진정시켰습니다. 장거정이 이십대 초반 진사시에 합격하고 3년 후, 몽골의 알탄 칸이 북경을 포위하는 이른바 경술지변이 일어났는데, 이때를 계기로 오히려 명나라의 시스템은 대혁신을 맞아 북방 유목 민족의 효율적 경략에도 더 뛰어난 성과를 보였습니다. 1571년에는 양측이 화약을 맺었는데, 국력 지출 없이 변경의 평화를 일시 이뤄냈다는 점에서 재상으로서 장거정이 커리어의 정점에 도달했다고도 평가 받습니다.

그의 가장 큰 약점은 부정부패와 치부(致富)였습니다. 생전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으려 애쓴 만력제는, 천하를 거칠 것 없이 경영하던 일세의 대재상이 죽고 나서 그의 치부(恥部)가 속속 드러나자 일종의 공황 상태에 빠졌습니다. 개인적 원한은 원한이고 한번 달성한 체제의 평화라는 좋은 유산은 그대로 지켜 나갔어야 옳았는데, 명나라의 대소 신료와 황제는 그럴 만한 안목과 기량이 부족했습니다. 이후 명나라는 반동성 퇴행 정책이 거듭되고, 국정은 다시 혼란에 빠졌고, 임진란에의 개입으로 국력을 크게 소비하여 결국 망국에의 길을 걷게 됩니다.

v*****7 2017.11.06.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