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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하려고 하지 말자. 내가 이 책을 읽은 이유는 나를 누군가가 소유하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ㅋㅋ 누가 들으면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이겠지만, 소위 어느정도 정치 경제 사회적 지위를 가진 혹은 사람들은 사람을 소유물로 보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선입견은 싫다. 그렇지만 내가 아직 젊다고 생각하는 20대 중후반에 겪은 대부분이 그렇다. [박씨부인전]이라고 고등학교때 서평을 써서 상을 받은 적이 있다. 그때의 나는 남자라고는 겪어본 적도 없고, 또 조선후기의 가부장적 제도에 대해서도 아는바가 없었다. 그저 여자와 남자를 나눠서, 여자가 했다는 것에 의미까지 부여를 해야 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어 비판했던 것이다. 이번에 읽은 책들의 공통 목표는 1. "사람은 결코 돈으로 살 수 없다"는 점을 다시 확인하고 2. "앞으로 내가 향유할 삶의 방식을 결정" 하기 위해서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1. 자아성찰을 하고 있거나(즉,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중) 2. 직장과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 삻의 비중을 어떻게 둘지 고민하는 20대 혹은 여성들에게 읽어볼 것을 추천하는 바이다. 이 책의 구성은 소유적 실존양식과 존재적 실존양식을 극단에 놓고 비교하며 적절한지 여부를 제시하고 이유를 설명한다. 대부분의 경우(필요적 소유 제외하고는) 에리히 프롬은 존재 실존양식을 적절한 것으로 보고, 소유를 비판한다. 위의 사례와 비교하여 크게 공감이 되었던 구절은 다음과 같다. 테니슨의 시: 소유하려는 욕망 갈라진 벽 틈새에 핀 꽃이여, 나는 너를 그 틈새에서 뽑아내어, 지금 뿌리째로 손 안에 들고있다. - 이하 생략 - 바쇼의 하이쿠: 생명을 존중 눈여겨 살펴보니 울타리 곁에 냉이꽃이 피어 있는 것이 보이누나! Chapter 2. 어떻게 살 것인가 주제가 너무 심오한 듯 하지만 아니다. 나는 아주 평범한 20대 중후반 한국 여성이다. 어떤 책(이기적유전자 혹은 사피엔스)에서는 2050년이면 인간의 생명을 무한히 연장할 수 있는 방법이 개발될 수 있다는데 더욱이 도대체 평생을 뭘하며 살 것인가 고민하게 되었다. (특히 나는 학생때부터 관심 유무에 따라 극과 극의 태도를 보였는데, 이를테면 수학과 음악은 내가 너무 좋아했고, 열심히 했다면, 사회나 역사에 대해서는 책도 펴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평생 무언가 몇년이나 더 살지 모르는 그 기간에 내가 재미없어 하는 일을 하며 사는건 끔찍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최대한의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이 책을 읽음으로써 개인의 흥미나 관심을 발견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럴바엔 MBTI를 하는 게 빠를 듯하다.) 존재적 실존 양식에 대한 정의를 함으로써 이와 같은 마음이 들도록 격려(encourage)받을 수 있다. 와닿는 구절 "존재"라는 것은 "무엇을 소유하거나 소유하려고 탐하지 않고, 기쁨에 차서 자신의 능력을 생산적으로 사용하고 세계와 하나가 되는 그런 실존양식" "존재"라는 것은 "무언가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절대적 고립의 고통을 극복해야 한다. 구제할 방법은 오로지 스스로가 자기 중심의 감옥을 깨고 나서 손을 내밀어 세계와 하나가 되는 길뿐이다. (atonement- at one ment) 소유는 사용에 의해 감소하지만, 존재는 실증에 의해 증대된다. 지금, 여기에서는 과거를 재창조하고 삶으로 환원시킬수 있다. 존재가 적으면 적을수록 삶을 덜 표출할 수 록 더 많이 소유하게되고, 그만큼 소비된 삶은 더 커진다. 국가의 관료는 이를 돈과 부로 환산하여 돌려준다. 존재하기 위해서는 텅 비워야 한다. Chapter 3. 열심히 살자 너무나도 양서가 아닌가! ㅋㅋㅋ이런 결론이 나도록 유도하다니. 혹은 내가 지치지 않기 위해 왜 살아야 하는지 탐색하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 의미있는 삶의 방식은 세계속으로 적극적으로 파고드는 활동, 세계 자체를 위한 활동이 아닌 배려하고 베푸는 삶이다. -슈바이처- 변화에 한해서만 실존할 수 있다. 이는 삶의 과정이다. 권위를 소유하고 있는지 권위를 존재하고 있는지는 합리성의 유무로 결정된다. 있는 그대로 자기 존재로 인간의 가능성을 실증해야 한다. 빈곤이란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것도 아는것이 없으며, 아무것도 가진것이 없는자가 가난한것이다. 알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야 한다. 자신이 지닌 사물과 행동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에크하르트- 난 호불호가 매우 심한 편인데, 시도때도 없이 자신의 권위를 내세워 압력을 행사하는 자를 매우 싫어한다. (결코 정치적 의도가 없음을 밝힌다.) 이와 맞닿아 있는 것이 합목적성, 근거 없이 주장하거나 이유없는 결정 등을 싫어 한다. 즉, 권위를 소유하고 있는자를 싫어하고 권위로 존재하는 자가 되고 싶다. 나는 따뜻한 카리스마를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지위에 있어도 항상 겸손하고, 누구에게나 배울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리더 자리는 커녕 한번도 반장 부반장도 하지 않았던 내가 어쩌다보니 오케스트라 회장직을 1년 간 맡았던 적이 있다. 많은 것을 느꼈다. 내가 하는 말이 실효성이 있기 위해서는 나부터 행동으로 보일 것, 더 많은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기 위해서는 내가 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시간은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등 Chapter 4. 새로운 인간 이는 앞으로 대세가 될?인간상을 에리히 프롬이 1976년에 이 글에 나타낸다. 기브앤테이크에서도 마찬가지로 공유경제를 강조하고 있다. 새로운 인간 주변과의 연대감, 자아체험, 자신감 나 자신의 그 어느 누구도 어떤 삶에도 영향을 주지 않는다 끊임없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행복함을 느낄 것 에리히 프롬의 자유론과 이 책에서 주변과의 조화와 협력을 강조하고 있다. 양의 외부효과를 낳는다는 것도 결국은 따뜻한 카리스마를 가진 사람으로서 능력을 사회에 기여한다는 것이 아닐까? 힘을 가지려는 이유는 다양하다. 되돌아 보자면, 고등학생 때 나는 내가 힘을 싫어하는 줄 알았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좋아하는 과목에서 누구보다 높은 점수를 받기를 원했고, 실수했을 적에는 울 정도로 욕심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힘을 좋아한다. 아니, 자세히 말하자면 존재이유를 확실히 하고 싶은 내 본능을 인정했다. 누군가를 복종시키기 위한 힘이 아닌, 내가 스스로 원하는 바를 이루고자 매일 아침 주어지는 그런 힘이 좋다. 언젠가는 내 능력으로 나 스스로를 넘어서 더 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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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프롬의 책으로는 사랑의 기술에 이어 두번째 얼마전 유투브에서 심리학자 김태형님의 에릭프롬에 대한 강연을 찾아 들었었다. 너무 좋은 강연이었고 강사의 에릭프롬 예찬(^^)에 끌려 구매하게 된 책이다. 서론에서 1954년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호소가 먼저 마음에 닿았다. p.15 "과감히 지금의 상황을 보십시오. 인간이 초인이 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이 초인은 초인적 힘을 지닐 만한 이성의 수준에는 올라서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이전에는 온전히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던 사실, 이 초인은 자신의 힘이 커짐과 동시에 점점 더 초라한 인간이 되어간다는 사실이 이제는 명명백백해졌습니다.....그러나 근복적으로 우리가 의식해야 할 점은, 이미 오래 전에 의색해야만 했던 점은 초인으로서의 우리는 비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슈바이처에 대해 단지 훌륭한 의사로만 알고 있었는데, 얼마전 읽은 슈테판츠바이크의 책 '우정, 나의 종교'에서 알게 된 슈바이처는 철학가였고, 신학자였고, 음악가였고, 의학자였으며 위대한 평화주의자였다. 이 책 서문의 이 글로 그때의 놀라움이 먼저 상기되었고, 사회, 과학의 발달이 점점 더 가속되어지는 요즘 사람들의 의식이 존재론적인 성향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소유론적인 수준에 머무르거나 , 오히려 소유론적인 성향이 강화될 때 일어날 수 있는 심각한 문제들에 대한 많은 지식인들의 우려와 충고가 1954년 슈바이처의 충고와 같음에 놀라움은 배가 되었다. 본문에서 에릭프롬은 소유와 존재의 의미를 설명하고, 일깨운 뒤 일상적 경험들(학습, 기억,대화, 독서, 권위행사, 지식, 신앙, 사랑)에서 소유적 실존양식과 존재적 실존양식의 차이를 구체적으로 보여준 후 소유적 실존양식에 기초해 발전해 온 현실에 만연해 있는 문제들을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인간, 존재론적인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p.154 인간의 내부에는 두가지 성향이 공존하고 있다. 소유하고자하는 성향과 존재하고자 하는 성향. 우리는 이 두 잠재성 가운데 어느 것을 개발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어느 쪽 성향이 더 우세하며, 어느 쪽이 억압당하고 있는지는 환경적 요인, 사회경제적 구조에 상당부분 달려 있다.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선택된 후 우리 사회는 '인간을 위해서 무엇이 좋은가'라는 물음보다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성장을 위해서 무엇이 좋은가'라는 물음에 의해 지금껏 성장해왔고, 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인간들은 소유적 실존 양식을 선택하도록 유도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의 성장 논리로 자연을 파괴하며 발전을 거듭해 온 인간들은 자연의 반격 앞에 속수무책으로 생존까지도 위협받고 있다. 종국에는 자연을 대하는 새로운 입장을 가져야 할 수 밖에 없는 시대, 인간의 근본적 변화에 대한 요구가 드높아지는 사회가 도래했다. p.167 존재적 실존양식에서는 개인적인 소유가 정서적으로 무의미하므로, 수백만의 사람이라도 하나의 대상을 놓고 즐거움을 공유할 수 있다. 누구도 혼자 즐기겠다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기 때문에 기쁨을 나눈다는 인간 행복의 가장 깊은 체험을 낳는다. 모든 종교적 가르침은 존재적 실존양식을 추구하도록 이끈다. p.239 인구위기, 식량위기, 환경위기에서 빠져나오게 할 기술적 영약은 없다. 과학기술로 어느 정도 위기를 완화할 수는 있지만 진정한 해결은 오로지 인간의 근본적인 자세의 혁신적이고 조속한 변화에 있다. p.252 경제와 정치를 인간의 발전에 종속시키려면, 새로운 사회의 모델을 소외되지 않은, 존재지향적인 개인의 요구에 부응하여 설계되어야 한다... 병적인 과소비로 산업을 추진시키는 악순환에서 빠져나오려면, 경제체제의 근본적인 변혁이 있어야 한다. 병든 인간을 제물로 하고서 그 건강을 부지하는 오늘날의 경제적 상황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우리의 과제는 건전한 인간을 위한 건전한 사회를 만드는 일이다. 이런 목표를 향해서 가는데 중요한 첫 걸음 '건전하고 이성적인 소비'를 지향하는 생산의 수행을 위한 여러 방법들이 마지막에 제시되며 책은 마무리 된다. 종교, 마크르스에 대한 에릭프롬의 깊은 이해 부분은 특히 인상적이었는데, 강의를 다시 들어보니 역시... 에릭 프롬은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한다. 에릭프롬이 이해하고 수용한 마르크스주의를 사회 체제의 하나로 이름 붙인다면, 인본주의적 사회주의이다. 심리학자 김태형은 소련식 공산주의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본질적으로 다르며, 소련식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소유론적인 사회체제라고 강변한다. 소련식 공산주의의 목표가 배부른 돼지가 되는 것이라면, 마르크스와 에릭프롬이 구상한 인본주의적 사회주의의 목표는 인간을 더욱 완전한 사회적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이런 사회의 구성인 민중은 존재론적인 인간이어야 하며, 존재론적인 인간으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사회혁명에 이어 바로 모든 민중들에게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정신 교육을 통해 정신혁명, 문화혁명을 동시에 추구해야한다고 한다. 사실 지금의 나에게 그런 사회는 실현 불가능한 이상적인 사회로 여겨지는데, 이는 아마도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오면서 나도 모르게 소유론적인 사람이 보편적이라고 생각이 주입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만약 내가 기본소득 정책이 이미 시행 중인 네덜란드나, 스위스, 독일 등 이와 비슷한 여러 정책들이 이루어 지고 있는 유럽과 북유럽 국가에서 태어나 자랐다면 인본주의적 사회주의를 실현 불가능한 이상적인 사회라고 여기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나는 소유론적인 사람인가 존재론적인 사람인가? 부끄럽지만 존재론적인 사람이 되고자 하는 바램을 가지고 있다. 언제부턴가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는 선긋기, 이분법적인 생각을 줄이자고 조금씩 연습하고 있었는데, 그런 생각을 소유냐, 존재냐라는 개념과 연관해 해석해보니 내 안에 있는 소유론적인 경향이 결코 작지 않으며, 소유론적 욕구들을 부정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고 누워서 침뱉는 모양새가 부끄럽게 느껴졌기 때문에 나름의 자기 합리화의 방법으로 틀린게 아니라 다른거다,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정리한 건 아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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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존재가 적으면 적을수록, 그대가 그대의 삶을 덜 표출할수록, 그만큼 그대는 더 많이 소유하게 되고, 그만큼 그대의 소외된 삶은 더 커진다." 소유냐 존재냐. 제목으로도 책의 내용이 쉬이 짐작할 수 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소유를 목적으로 할 것이냐 아니면 존재를 목적으로 할 것이냐. 책은 두가지의 관점에서 이야기 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존재하기를 바라고 있다. 소유하는 자는 자신을 바라볼 수 없다. 남들과 비교하며 자신은 무엇을 갖고 있는지, 저들이 가지고 있는 걸 자신은 가지고 있는 지, 내가 갖고 있는 것을 저들은 가지고 있는지 나만이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비교하기 바쁘다. 하지만 존재를 택한다면 남들과의 비교로 체력과 감정이 소모되지 않고 자기 자신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남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우리가 경쟁이 아닌 함께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생각하게 만든다. 소유는 내 주머니를 늘려가며 빼앗기지 않을까 남을 믿지 못하고 불안하고 초조해진다. 서로의 소유를 자랑하며 소유 자체가 사람 본인을 압도하며 소유에의해 사람의 '가치'가 정해진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런 사회 속에 있다. 그러니 살아가는 모두에게 추천하고 권하고 싶다. 어떤 방식으로 살아갈 것인지, 어느 사회에서 살아가고 싶은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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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것이 실재를 반여하고 있다고 상상하며, 그것은 우리 삶의 행로를 지시하는 지도가 된다. 이 그릇된 지도는 배척당하는 일이 없다. 배척받는 것은 실재에 관해서 아는 것, 무엇이 진실인가를 아는 것이다. 따라서 무엇이 무의식인가라고 물을 때, 그 해답은 불합리한 격정뿐만 아니라 실재에 관해서 아는 것 일체가 포함될 것이다.
무의식의 요소는 사회에 의해서 이중으로 결정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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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읽고 좋은 인상을 받아서 이 책까지 찾아오게되었습니다. 현재는 개정판이 출간되었네요. 우리는 인스타그램, 유튜브 등 다양한 매체에 당연하게 노출되기 시작했고 다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쉽게 볼 수 있게되었어요. 여기에는 긍정적인 측면도 많지만, 타인의 삶을 자신의 모습과 과도하게 비교하고 그 과정에서 박탈감을 느끼며 괴로워하는 경우도 있어요. 이런 현대인들에게 소유와 존재에 대해 통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좋은 책이라고 생각하고 추천하고싶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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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프롬은 <소유와 존재에 대한이해. (소유와 소비).>에서
또한 에릭프롬은 <소유와 존재의 심층적 고찰> 부분에서 ‘현명한 사람은 삶에 대해서만 생각하지 죽음에 대해서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가르침은, 사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가르침과 똑같다. 모든 형태의 소유에 대한 갈망, 특히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버릴수록,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그만큼 더 감소한다.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소유와 존재를 읽으면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반복해서 읽기를 거듭하였는데 소유보다는 존재의 중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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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소유냐 존재냐 - 지은이 : 에리히 프롬 - 옮긴이 : 차경아 - 출판사 : 까치 -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는 방향을 현재시대의 소유 추구에서 존재를 목적으로 해야한다고 이야기 한다. 자본주의사회가 오기 전에는 인간은 자연속에서 존재하면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하나의 동물로서 생활을 하였다. 그 시대에는 자연은 인간에게 유용한 의식주를 공급해주는 고마운 존재이면서 같이 공존해야하는 중요한 동등한 관계의 존재였다.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대량생산이 발생 하였고 그로인해서 자연은 공존의 대상에서 정복의 대상이 되었다. 자연은 인간의 만족을 위한 자원을 공급하는 대상으로 전락 한것이다. 인간은 대량생산으로 인해서 자연의존적 생활에서 탈피하여 자연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면서 자연을 착취하기 시작하였고 환경파괴 등등 모든 문제가 발생하였다. 그 이후에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공산주의,사회주의 등 다양한 이념들이 등장하였지만 한가지 중요한 점은 변하지 않았다. 즉 인간은 소유를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즉 남보다 많이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냄으로써 자신의 신분,권력,재산의 우월성을 나타내어서 자신이 남보다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소유적 상황은 소유를 한다고 해서 그 공허함이 없어지지는 않으므로 계속해서 무한한 소유를 추구하고 일단 물건을 소유하면서 또다른 물건을 찾게 된다. 즉 소유하기전에는 물건에 대한 욕망이 최고조에 이르지만 소유와 동시에 급격하게 만족감은 사라지고 그 사라진 만족감을 채워주기 위한 다른 대상을 찾게 된다는 것이고 이러한 패턴이 무한한 소비사회를 만들어 왔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패턴에서는 절대로 인간의 공허함을 채울수도 없고 인간의 존재의 이유도 찾을수 없게 된다고 이야기 한다. 그래서 작가가 제시한 길이 존재적 양식이다. 존재적 양식은 소외되거나 공허하지 안흔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가능한데 그러한 삶은 인간의 독자성,자유,비판적 이성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적 양식에 의한 인간은 참 자아에 이르고 능동적인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어찌보면 무슨 구도자의 삶 같기도 하지만 현대의 사회에서 정부나 대기업의 부속품처럼 살면서 필요 없으면 바로 퇴출되는 현대인에게는 반드시 귀기울여 볼만한 삶의 방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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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적 실존양식이냐 존재적 실존양식이냐. 당신은 어느 삶을 살고 있는가. 대부분 소유지향형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소유적 실존양식은 내가 무엇을 소유하느냐에 따라서 내가 규정되는 것이다. 하지만 소유는 결코 만족이란 게 없다. 소유욕은 더 많은 소유욕을 낳고 탐욕과 욕망으로 커진다. 소유는 사물과 관련되는 것으로 구체적으로 실존하지만 소유된 사물만 존재할 뿐 정작 자아는 소외된다. 존재는 체험이다. 소유하려는 욕구를 버리는 것과 비례하여 존재적 실존은 뚜렷해진다. 우리 사회와 지구는 이미 소유형 실존양식으로 인하여 파괴되어 가고 있다. 자연은 더이상 당하고만 있지 않을 것이며 이미 여기저기서 반격을 시도하고 있다. 파국을 막을 방법은 많은 사람들이 자각하여 소유를 버리고 존재하는 데 달려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