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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퐁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퐁주" 내용보기
일반적으로 자크 데리다를 평가할 때 심심지 않게 오르내리는 말 중의 하나가 철학과 문학의 경계를 허무는―물론 '해체한다(deconstruct)'라는 말이 더 적절하겠지만 이 말에 따라붙는 오해와 질시를 견디지 못해 일반적인 말을 쓰겠습니다―철학자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데리다의 작업 중에서 개별 문학 텍스트를 분석한 글이 상당수를 차지하기도 합니다. 또한 해체―해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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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자크 데리다를 평가할 때 심심지 않게 오르내리는 말 중의 하나가 철학과 문학의 경계를 허무는―물론 '해체한다(deconstruct)'라는 말이 더 적절하겠지만 이 말에 따라붙는 오해와 질시를 견디지 못해 일반적인 말을 쓰겠습니다―철학자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데리다의 작업 중에서 개별 문학 텍스트를 분석한 글이 상당수를 차지하기도 합니다. 또한 해체―해체'론'이 아니라 해체라고 해야겠지요―가 급속도로 수용되고 나름대로 자신의 뿌리를 내린 미국의 경우만 보더라도 문학비평 쪽에서의 반응이 일차적이었고 나름대로 기여를 했지요―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문학의 경계를 넘어서 정치학, 미학 등의 분야에서도 해체가 새롭게 해석되고 수용되고 있다는군요. 그렇지만 이러한 수용과 해석에도 불구하고 데리다 자신이 문학과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겠지요. 국내에 데리다의 작업이 거의 번역되지 않은 상황에서 프랑시스 퐁주의 시세계를 분석하는 {시네퐁주}가 나왔다는 것은 데리다와 문학 사이의 관계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는 그나마 위안이 될 것이다. 물론 데리다에게는 '시네퐁주'만이 아니라 예컨대 제임스 조이스에게서 빌려온 "예, 예"(yes, yes)와 같은 신선한 단어들이 아주 많다는 것을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시네퐁주}를 읽을 때 생각해야 할 주제는 문학, 철학, 언어학 그리고 또한 번역의 문제를 가로지르는 영역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이다. 번역본의 역자 해제에 간간이 소개되고 있는 데리다의 인터뷰―"문학이라 불리는 이상한 제도"―에서 데리다는 문학을 '모든 것을 말할 수 있게 하는' 글쓰기의 경험이라고 밝히고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문학은 근대 민주주의 제도의 성립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왜 이상한 제도이냐 하면 문학이 반드시 모든 것을 다 말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이에 대한 답을 알고 싶다면, 왜 데리다가 가장 일반화될 수 없는 시인 프랑시스 퐁주(Francis Ponge)의 이름에서 출발해 우리말로는 도저히 번역될 수 없을 것 같은 새로운 언어인 시네퐁주(Sign ponge)로 나아가는지 생각해보라. 나는 단지 이에 대해 하나의 사유 실험을 제시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문제를 풀기 위해 우리가 흔히 선문답을 주고받을 때 사용하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의 비유를 선택했다. 즉 만약 내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킨다면, 당신은 내 손가락을 볼 것인가 아니면 당연히(?) 달을 바라볼 것인가하는 상황이다―물론 여기에는 대화 상대 사이의 어느 정도의 협력이 전제되어 있다. 당신이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다면, 언어는 지시가 아니라 쓰임새임을 알 것이다. 나 역시 그런 비트겐슈타인적인 관점에 반대하지 않는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하다. 손가락과 달, 그리고 당신의 시선 사이에서 발생하는 커뮤니케이션의 가능성의 조건은 무엇인가? 어, 이거 칸트잖아라고 말할까봐 예를 하나 더 들어보겠다. 당신은 누군가로부터 낯선 단어를 들었고, 잠시 궁리한 뒤에 당신 곁의 사전을 뒤적이거나 아니면 정보의 백과사전인 인터넷에 접속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내가 당신에게 단어의 용법을 설명해주는 사전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정보를 제공해주는 인터넷에 대해서 사전의 사전이나 인터넷(internet)의 인터넷(inter-net)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당신은 이러한 무한 회귀하는 물음에 대해 '그런 쓸데없는 형이상학적인 물음을 던지다니, 도대체 원하는 게 뭐야?'하고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쨌든 문제는 그대로 남아있고 우리는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여기서 데리다가 전개시키는 기호학자 프랑시스 퐁주의 말을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즉 우리가 응당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서로간의 커뮤니케이션이 어떻게 혼란에 빠지는지를 한번 살펴보는 것이다. 먼저 첫째 퐁주가 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프랑시스 퐁주라는 이름을 우리가 알아보기 위해서 퐁주는 자신의 이름을 서명한다(Sign Ponge)―그런데 퐁주가 서명으로 기록되자마자 우리는 그것이 각기 다양한 발음으로 읽혀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기호는 퐁주이다(Signe est Ponge), 기호와 퐁주(le signe et Ponge), 기호는 퐁주를 증오한다(le signe hait Ponge), 퐁주라고 서명하시오(Signez Ponge), 서명하시오 퐁주!(Signez, Ponge!). 그렇지만 한번 오염되기 시작한 퐁주의 서명은 그 끝을 모른 채 계속 펴져 나간다: sign ponge―마찬가지로 발음상으로는 기호와 퐁주(signe et Ponge), 기호 해면(le signe ponge), 기호는 퐁주이다(le signe est Ponge), 기호는 퐁주를 증오한다(le signe hait Ponge), 퐁주 서명(signe- -Ponge), 퐁주라고 서명하시오(Signez Ponge), 서명하시요 퐁주!(Signez, Ponge!)와 동일하다. 고유명 Ponge는 기록되는 순간 자신의 고유성을 상실한 채 보통명사인 해면( ponges)으로 형질 전화한다. 한 사람의 이름인 퐁주는 언어를 사용하면서 하나의 기호 사물이 되고, 이제 그 사물은 다시 한 사물―해면―의 이름이 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아니 그게 뭐가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시답잖은 말장난으로 사람을 현혹하는 그런 유희에는 이젠 정말 질려버렸다니깐! 사실 나도 당신에게 정확히 어떻게 무슨 말로 이 기적 같은 일을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만약 당신이 {시네퐁주}를 읽고 이 놀라운 변증법을 이해하게 된다면, 내게도 꼭 연락주기를. 내가 당신에게 마지막으로 줄 수 있는 링크는 바로 프랑시스 퐁주다. <말에 의한 사물의 변형에 관하여> 주위의 여러 효과들 가운데서 인지되어 명명된 것으로서의 차가움이 물결 속으로 들어가면, 그 물결을 얼음이 대치한다. 마찬가지로 시선은 단번에 어떤 새로운 공간에 적응한다. 그것은 주의력이라고 하는 총괄적인 움직임에 의해 새로운 대상이 고정, 포착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러한 것은 기다림, 정신의 고요함의 결과이다. 행위인 동시에 결과이며, 요컨대 하나의 변형이다. 물결 속으로, 즉 자신의 내용물을 가득 채우는 혹은 최소한 어느 정도까지는 내용물의 형태를 따르는 무정형의 전체 속으로, 기다림, 순응, 마찬가지의 어떤 주의력에 힘입어서 변형을 일으키는 것이 개입할 수 있다. 말이 바로 그것이다. 가장 뚜렷하게 눈에 띄는 것은 일
c******k 2000.03.23. 신고 공감 1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