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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 중 다행을 찾아나서는 사람들의 이야기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를 읽고
어디선가 톱질과 망치질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들을 들으면서 애정(이라고 쓰고 애증이라 읽어도 무방)한 이와의 영원한 작별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다. 큰 아들 캐시가 몸져누운 어머니 애디의 '관(棺)'을 만들고 그 모습을 애디가 바라본다. 둘째 아들 달과 셋째 아들 주얼은 3달러를 벌기 위해 집을 나섰고, 넷째이자 집안의 유일한 딸 듀이 델은 어머니 곁에서 연신 부채질을 해댄다. 막내 아들 바더만도 가계 경제에 보탬이 되고자 물고기를 잡으러 다니는데, 애디의 남편이자 아이들의 아버지 앤스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모든 상황을 지켜볼 뿐이다. 애디의 죽음 앞에서 번드런네 사람들의 수상한 행각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무더운 여름날 온가족이 애디의 유언에 따라 고향 땅에 시신을 묻기 위해 영면한 애디의 관을 싣고 40마일이 넘는 길을 떠난 것이다. 미국 작가 윌리엄 포크너가 쓴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는 이렇게 시작한다. 소설의 서사뿐 아니라 그것을 풀어나가는 방식도 퍽 흥미롭다. 59개의 장(章)이 화자의 시점을 특정인으로 고정하지 않고, 번드런 가족과 더불어 그들과 관계를 맺은 이웃 부부, 의사, 목사, 청년들 등 총 15명의 독백으로 채워져 있다. 처음에는 말하는 이가 많다 보니 마치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는 것처럼 책의 갈피를 잡기가 어려울지도 모른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하나 애디 역시 그 누구보다 힘주어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 그렇지만 고삐를 당기듯 각 장에서 화자인 '나'를 찾아낸 다음에 그들이 전하는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을 좇아가다 보면 곧 저자가 독자에게 던지려는 여러 질문들과 마주하게 된다. 먼저 '삶과 죽음'에 관한 것이다. 소설의 구성적 측면에서 볼 때 애디의 이야기는 단 한 장뿐이다. 그러나 각 장에서 남겨진 이들의 목소리로 애디의 삶이 어렵지 않게 재구성된다. 애디는 한평생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오랫동안 죽어 있을 준비를 하기 위해서(191쪽)"라는 아버지의 말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모습이다. 결혼 전까지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친 일과 결혼 후 아내와 어머니라는 역할까지도 의무적으로 수행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출산한 뒤부터는 스스로를 죽은 존재로 인식하여 남은 삶을 말 그대로 '죽어 있을 준비'를 위한 나날들로 메꿔나가기에 이른다. 번드런네 가족이 죽어가는 애디를 대하는 태도가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도 하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어 누워 있을 때까지도 물음표가 사라지지 않는 본연의 나를 비롯하여 교사, 배우자, 어머니로서 1인 다역을 소화해야 하는 한 개인으로서, 그가 짊어진 삶의 무게가 과연 타자의 저울(시선)로 가늠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다음으로 앤스라는 인물을 통해 '신념(집념) 혹은 '욕망'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를 되돌아보게 된다. 문득 청개구리 우화가 떠오른다. 자신의 무덤을 개울가에 만들어 달라는 엄마의 유언만큼은 꼭 따르고자 한 아들과 같이, 소설 속 앤스는 애디가 살아생전 남긴 말을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겠다는 집념을 보인다. 아울러 이보다 앞서 젊은 시절 땀 흘려 일하다가 죽을 고비를 넘긴 이후부터 땀을 흘리는 날이 곧 자신의 제삿날이라고 선언하며 나머지 가족들이 생계를 이어나가는 걸 두 손 놓고 바라만 본다. 아이들이 차례대로 몸과 마음의 상처를 얻어도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의 속도에 맞춰 강행군하는 그를 보면서 그래도 아버지라고 불리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목적지에 다다라서 드러난 그의 민낯에서 집념이 아닌 집착의 눈빛을 발견하는 동시에, 인간의 욕망이 이토록 비루하고 잔인할 수 있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또한 목수일이든 어떤 것이든 매사 균형미를 중시하는 캐시,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미치광이로 보이지만 그들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한 달, 따뜻한 말(言) 한 마디 주고 받기 어려운 가족보다 말은 못하더라도 교감할 수 있는 말(馬)을 더 애정하는 주얼, 원치 않았으나 죽음과 생명은 계속 교차됨을 몸소 보여주는 듀이 델, 불가해한 죽음마저도 동심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기에) 하려는 바더만. 어머니의 부재 이후 각자가 존재의 이유를 찾기 위해 자기만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내는 번드런네 아이들의 모습에서 우리의 자화상을 엿볼 수 있다. 그밖에 종교적 신념으로 번드런네 식구들을 평가하는 이웃 부부와 종교적 윤리를 벗어나 번민하다 애디의 죽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정신승리에 도취된 목사를 보면서 어쩌면 삶이란 부조리한 것투성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또다시 머릿속을 스친다. 삶과 죽음 그리고 그 여정에서 매순간 옳고 그름을 선택해야만 하는 것이 인생이고, 그것이 우리의 일임을 모르지 않는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서 있는 곳에서 바라보는 풍경도 저마다 크고 작은 차이를 그려낸다. 어떤 면에서 그들은 불행 중 다행을 찾는 데 혈안이 된 사람들 같기도 하다. 이처럼 독자로 하여금 소설 안팎의 것들에 대하여 다채로운 해석을 시도하도록 만드는 작품이 바로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라고 말할 수 있겠다. "정상적이거나 비정상적인 갖가지 일을 저지른 후, 다시금 똑같은 공포와 놀라움으로 자신의 광기 어린 행위를 지켜보는 누군가가 우리 안에 들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269쪽)"는 캐시의 말처럼 이 소설을 읽고 소설과 현실 속 그 누군가를 찾아 만나보는 시간을 가져봐도 좋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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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어 누워 있을때, 세계문학전집을 한권씩 읽기로 마음먹으면서 구매했다. 책 어플을 통해서였던가? 추천작으로 가끔 눈에 들어왔다. 아무 생각없이, 그래 읽어보자 하며 집어들게 되었지만 이게 왠걸? 작가가 다름아닌 윌리엄 포크너이다. 몇일전 무라카미 하루키의 '반딧불이'를 읽으면서 '헛간을 태우다'라는 작품을 읽었을때 원래 '헛간을 태우다'의 원작이 바로 윌리엄포크너의 소설이기 때문에 더욱이 이 작가의 이름을 기억한다. 또한 몇개월전 개봉한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에서 윌리엄 포크너의 책이 잠시나마 등장했다. 그래서 더욱 작가의 이름은 내 머릿속에 남아있다. 내가죽어누워있을때.... 이름부터가 자극적이다. 이 책의 내용은 대략 죽은 어머니를 묻기 위해 관을 끌고 더운 여름날 장지(?)로 먼길을 떠나며 벌어지는 일들이다. 본 소설은 언뜻 매우 단순한 이야기 같으나 실상 복잡하고 다중적인 해석이 가능한 작품이다. 아버지는 아내를 생각하고 신앙이 두터운 사람 처럼 보이지만, 실상 가장 무능력하다. 그 예로 강물에 떠내려가는 상황에서 아버지는 말로만 떠들뿐 막상 그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은 자식들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상실감들은 다른것들로 대체된다. 아버지는 자식의 돈을 빼앗으며까지 의치를 하고 후처를 얻고, 캐시는 새어머니가 가져오는 축음기에 기뻐하며, 듀이델과 바더만은 바나나를 먹는 일상으로 복귀 그들이 겪는 상처는 시간이 지남에 치유되는 것이 아닌 잊혀지는 것이다. 다른것이 또 다른 공간을 채우고, 그 공간이 비워지면 다른것을 채움으로써 온전히 마음속에 간직하는 것이 아닌 무엇인가에 채우기에 급급한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달은 상실을 무엇으로 대체할 수 없어 홀로 정신병원으로 향하는데 책을 읽다보면, 달의 행동에 의문을 가지게 되지만, 책을 읽고 난 후 오히려 달이 정상은 아닐까?하는 생각들을 하게된다. 슬픔을 다른것을 통해 채우고, 그리고 현재를 살아간다. 인간은 감정의 항상성이 있다고 한다. 항상성이란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을 말하는데 슬픔도 시간이 지나면 원래대로 돌아오고 기뻐도 시간이 지나면 원래대로 돌아오는 성질을 말하는데 위의 항상성은 우리가 많이들 알고 있는 '이 또한 지나가리라'와 비슷하다. 어머니가 죽어 누워있을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어머니를 잃은 가족들의 태도는 다양하다. 그들의 상처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른것들로 대체가 된다.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처럼,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처가 치유 될 수 있지만서도 치유로 보이지만, 어쩌면 상처받지 않기 위해 잊혀질 무언가 찾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부조리한 심리를 그린다. 지혜와 지식은 다르다처럼, 머리는 명석한데 삶에 대한 성찰과 느낌이 없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상상력도 없다. 우리의 행동이 하나하나가 어쩌면 이기적인 행동임을 자각할 수 있는 부분을 이 책은 여러군데 짚어준다. 사실 내가 위의 리뷰를 쓰면서 잔상들을 적은 것이다. 자식들의 이름도 햇갈릴정도였다. 실은 이 책이 머리로 잘 이해가 안되었다. 무엇이 문제일까? 생각하던중 한가지이다. 이 책은 화자가 자식들을 포함해 여러번 바뀐다. 즉 한 문체와 리딩의 흐름이 불규칙하다는 것이다. 이 책의 재미를 느끼기 위해서는 이 책을 짤라 보는걸 권하지 않는다. 실제 요즘 갑작스레 바빠진 관계로 대중교통으로 이동 또는 약속장소에서 틈날때마다 읽었던게 오히려 해악이 되었다 그래서 조만간 다시 읽어보려 한다. 이 책을 읽을 예정이거나, 재미를 배로 느끼고 싶다면 꼭! 한번에 읽거나 최소한의 분할로 읽기를 권한다. 물론 힘들겠지만 말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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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어 누워있을때>를 읽고
한 가족이 있다. 엄마가 누워있는 침대옆 창문 밖에서 관을 짜는 캐시, 그 곁에서 부채질을 하는 딸 듀이 델, 3달러를 벌기위해 떠난 달과 주얼, 막내 바더만. 무기력하게 바라보는 남편 앤스. 열흘 동안 누워있으면서 애디는 가족들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애디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가족들이 예상한대로 애디는 죽었다. 그리고 그녀의 유언대로 그녀를 묻기위해 제퍼슨으로 향했다. 비가 억수로 퍼부어 건널 수 있는 다리가 모두 물에 잠기고 끊어지는 바람에 한나절이면 갈 수 있는 거리가 열흘이 걸리는 긴 여정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가족들은 아무도 그 여정을 멈추자고 말하지 않는다. 제각각 다른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목적을 슬픔 아래에 감추고 썩어가는 엄마를 마차에 싣고 말똥가리의 배웅을 받으며 가족들은 끝까지 임무를 완수해낸다.
엄마의 죽음앞에서 가족들의 모습은 죽음을 애도하는 슬픔에 찬 모습만은 아니다.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기위해 발버둥치는 우리들의 온갖 궁상스런 모습을 가지가지로 보여주고 있다. 죽음을 슬퍼하는 듯 하면서 우리는 뒤로 딴생각을 품는다. 왜냐면 우리는 살아있으니까. 아직 살아내야할 남은 생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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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포크너는 미국 모더니즘 문학의 개척자로서 전통적인 소설 형식을 파괴하고 소설 문법에 혁신을 가져온 작가로 높게 평가 받는다. 그의 소설 가운데 “내가 죽어 누워있을 때”는 각 장마다 화자가 모두 다른 매우 독특한 형식을 띠고 있다. 그래서 작품을 읽을 때 상황과 줄거리 파악이 쉽지 않다. 그런데, 각 장의 제목인 화자를 염두에 두고 읽으면 각 인물의 내면의 심리를 알 수 있어서 작품을 읽는 묘미와 깊이를 더한다. 미국 남부의 농촌마을, 가난하고 열악한 상황 속에 한 가족이 있고 그들의 엄마가 어느 날 죽음을 맞는다. 그런데, 그 죽음 앞에 가족들은 모두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보인다. 무책임하고 무능한 가장인 앤스 번드런은 아내의 유언이라며, 죽은 아내를 이곳에서 무려 40마일이나 떨어진 그녀의 친정 제퍼슨에 묻어야 한다고 공언한다. 그렇게 앤스 번드런과 그의 자녀 다섯은 무더운 여름날, 무리한 장례 여행을 떠난다. 그녀의 다섯 남매가 그녀의 죽음을 애 닳아 하는 것도 아님에도 이 여행에 반대하는 자식은 또 한명도 없다. 어쨌든 이들은 모두 각자의 임무에만 몰두하면서 함께 여행을 이어간다. 목수인 큰 아들 “캐시”는 엄마의 관을 만드는 일에만 집중하더니, 엄마가 죽은 후에는 자신의 목공 도구에만 집착을 한다. 둘째 아들 “달”은 자신은 엄마가 없다고 생각하고, 셋째 아들 “주얼”은 자신이 일한 돈으로 마련한 말에만 집착을 한다. 외동딸 “듀이 델”은 아무에게도 말 할 수 없는 비밀로 고민에 싸이고, 너무 어린 막내아들 “바더만”은 물고기의 죽음과 엄마의 죽음을 동일시 하며 현실을 부정한다. 무더운 날씨와 쏟아 붓는 비 때문에 이들은 여행 도중에 크게 다치기도 하고, 부패되는 시체의 고약한 냄새 때문에 이웃들에게 민폐만 끼친다. 그러면서 쥬얼이 혼외 자식임이 밝혀지기도 하고, 달은 자신도 모를 분노가 폭발하며 방화를 저지르기도 한다. 그럼에도 여행은 이어지고, 마침내 제퍼슨에 도착한 이들은 우여곡절 끝에 그들의 엄마 애디 번드런을 매장한다. 그리고 소설은 아버지 앤스 번드런이 모두의 뒷통수를 때리는 반전으로 마무리 된다. 소설을 읽는 내내 불편한 감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무능한 가장이 이끄는 가정이 얼마나 황폐화 될 수 있는지 그 민낯을 보게 된 것 같아 몹시 안타까웠다. 그 속에서 아내와 아이들은 정서적으로 피폐해지고, 서로 원망하며 갈등하게 된다. 물리적으로 함께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파편화 되어 가는 한 가족의 불행을 속속들이 알게 되는 과정은 참으로 불편했다. 그들 주변의 인물들은 그나마 모두 상식적인 생각과 판단을 하였다. 그들의 등장이 그나마 숨통을 트여주었으나, 주변사람들의 조언은 들은 체도 않는 앤스네 가족들의 태도에 또 한 번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러나 냉정히 생각해 보면, 큰 일이 닥쳤을 때 내 자신도 늘 이성적으로 올바른 판단을 한다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생의 대부분의 일에 비이성적, 불합리적으로 대처하며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 발자국 만 떨어져서 생각하면 답이 보이는 일인데도, 막상 눈앞에 닥쳐 내 일이 되면 허둥거리면서 엉뚱한 것에만 매달려 일을 그르치고 만다. 책의 제목이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임을 생각할 때 죽은 자인 “에디”가 주인공일 것 같은데, 막상 에디의 이야기는 책 전체에서 딱 한 챕터만 등장한다. 어려서부터 평범하지 못했던 시절을 겪었던 그녀는 “우리가 살아 있는 이유는 오랫동안 죽어 있을 준비를 하기 위해서”라는 그녀 아버지의 말을 오랫동안 부정하면서 살았지만, 결국, 그녀도 그 말에 따라 죽음을 맞이 한 것으로 보인다. 애디는 어쩌면 타고난 우울증 같은 것에 시달리다 남편과 아이들과 멀어지고, 결국 죽음을 맞은 것이 아닐까? 그로인해 아이들도 하나같이 정상적인 정서를 갖지 못해 보인다. 아버지와 남편에 대해 깊은 증오같은 것도 느껴지고, 사람들의 위선에 대해서도 애디는 인정할 수 없었다. 특히, 사람의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들에 대해, 그것을 진짜로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의 “말”의 유희에 아주 큰 거부감을 나타낸다.
애디의 챕터가 결국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아이들이 태어난다고 부부가 저절로 부모가 되는 것도 아니며, 아이들을 낳고 모유를 준다고 저절로 모성애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가족은 끊임없이 노력하고 서로를 돌보며 의무를 다 해야 완전한 모습이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느 가족이나 문제가 있고, 갈등이 있다. 그런 문제와 갈등을 현명하게 풀어내고 극복해내는 데에 삶의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내 옆에는 누가 남아 있을까? 그들은 나에 대해 뭐라고 얘기 할까? 난 어떤 사람으로 내 주위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야 할까?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그들이 나의 죽음에 신경이나 쓸까? 인간이란 살아서나, 죽어서나 고독한 존재임을 인정한다면 죽음을 맞을 때 좀 의연해 질 수 있으려나? 책을 덮으며 마음이 많이 무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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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인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를 읽었습니다. 시점이 섞여서 진행되는 느낌 등 쉽게 술술 읽히지는 않을 법한 특징이 여럿 있는데, 그 특징에 일단 적응하고 나면 이 소설만의 인상적인 재미와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
| 퓰리처상과 노벨상을 모두 수상한 윌리엄 포크너의 작품입니다 윌리엄 포크너의 작품은 난해하다고 알려져 있어서 읽기 전부터 부담스러웠는데 막상 다 읽고나니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역시 고전은 꼭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입니다 삶의 이유는 죽음을 준비하기 위함이라는 에디 아버지의 말이 계속 생각납니다 한 점으로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하며 존재가 확대되는 기쁜 체험이 있길 바란다는 역자의 말에 공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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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문학전집에 포함되어있는, 20세기 현대미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윌리엄 포크너의 7번째 소설인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를 드디어 구입하여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제목부터 '내가 누워 죽어 있을 때'라니.. 신선하게 느껴졌습니다. 이 작품은 번드런 가의 아주인 애디의 죽음과, 장례를 치르는 가족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요. 단순한 장례 여행기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 삶과 죽음, 선과 악 등 인생의 교훈을 제시하는 수작으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책을 읽으며 텍스트 너머로 인물들 저마다의 욕망, 각자의 갈등이 생생하게 느껴졌습니다. 당장 현재에 출판되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훌륭한 작품이었네요. ^^ |
| 윌리엄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있을때의 감상평이다. 제목이 굉장히 강렬하다. 내가 죽어 누워있을때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궁금해서 구매했다. 각 인물의 시점을 통해 죽음과 가족의 의미를 묵직하게 드러낸 작품이었다. 각자의 내면이 솔직한 고백처럼 느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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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독서모임에서 읽자고 해서 시작했다. 약간 읽기에 박찼다. 중간 중간 의미에 쉽게 와 닿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다의적으로 읽힌다는 의미도 될 수 있기 때문에, 내가 읽기에 벅차다고 해서 나쁜 작품이 아님은 분명하다. 줄거리는 간단한데, 그 간단한 줄거리에 담긴 의미는 간단하지 않다. 애디는 고향 땅에 묻어 달라고 유언하며 죽었다. 남편 앤스와 그들의 자식 오남매는 애디를 고향 땅에 묻기 위해 애디의 관을 수레에 싣고 40마일 떨어진 제퍼슨으로 간다. 가는 중에 큰 비가 내리고 다리는 끊기지만, 결국 관에서 썩어가는 시체를 싣고 제퍼슨까지 간다. 앤스는 애디를 묻자 마자 자식들의 돈을 빌려 틀니를 새로 하고 새 장가를 간다. 둘째 달은 제퍼슨으로 오는 중에 정신병이 발병해 병원으로 간다. 40마일의 여정에서 가장인 앤스는 어느 것 하나 현명한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그나마, 아내의 장례를 치르자마자 새장가를 간 게 유일하게 현명한 결정이다. 다리가 부러진 첫째 캐시, 정신병원으로 간 달, 자신이 스스로 일해 번 돈으로 산 말을 잃은 주얼. 자식들의 불신. 이웃들의 불신. 이 와중에 앤스는 오직 아내의 유언을 지키겠다는 심정으로 모든 것을 희생하며 제퍼슨으로 간다. 결론은, 당연히 이기적이고 멍청한 앤스만 행복하고 다 불행할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다. 자식들은 또 나름대로 다 만족한다. 새어머니가 가져온 축음기를 보고 좋아하는 캐시, 어차피 주변의 이런 저런 일들에 흔들리지 않는 주얼, 바나나를 먹는 일상으로 금새 복귀한 듀이 델과 바더만. 그 와중에 듀이 델은 혼전 임신을 한 것을 숨기고 있다가 낙태를 하라고 남자친구가 준 돈을 아빠 앤스에게 뺐긴다. 앤스는 그걸로 틀니를 새로 하고 새장가를 든다. 그럼 , 누가 불행한 건가? 죽은 애디? 애디도 이해는 안 간다. 원하지 않는 결혼, 임신, 거기다가 다섯 아이 . 뭐 하나 원하는 대로 안 되는 삶인데도 그 얘기를 어디에다가도 하지 않는다. 신에게도 하지 않는다. 작가는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중요한 것은 제 3자인 독자가 보기에 콩가루 집안인데, 앤스 집안은 또 나름 만족하며, 그리고 게으르지 않게 최선을 다해 산다는 것이다. 질긴 생명력으로. 참 나. 삶이란 무엇일까. 모르겠다. 이해하기 어려운 삶. 나의 삶. 너의 삶. 우리 모두의 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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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어 누워 있을때
나는 죽어가고 있다. 그래서 아들 캐시는 관을 준비한다. 나는 이제 곧 그 관에 들어갈 것이다 나는 죽었다. 나는 내가 태어난 곳에 묻히고 싶어. 내가 죽으면 태어난 곳에 묻어달라고 가족에게 말했었지. 남편과 나의 아이들은 아마도 그 소원을 들어 줄거야.
애디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온 가족들은 슬퍼할 겨를이 없다. 아니 좀 더 정확히 애디의 장례로 할일이 많아졌다. 애디의 소원대로 제퍼슨에 장례를 치르러 가야 하니까. 그런데 하필 비가오고 다리가 무너지고 불이난다. 그 여정은 험난하다. 고난의 행군이었다. 그 제퍼슨에 묻기위해서 가는 동안 그들은 그 가는 동안에 자신이 그곳에 가야하는 이유들을 찾고 있었다. 마치 겸사겸사 .가는 날이 장날이듯. 하지만 제퍼슨에 가는 이유는 애디를 묻기 위해서다.
각 단락의 이야기가 여러 화자들의 1인칭 시점으로 되어있어 그들의 상황도 그들의 생각도 읽을 수 있었다. 그들에게는 무수한 사연이 있었다. 왜 제퍼슨에 묻어 달라고 했는지도 왜 재퍼슨에 가는 길이 험난 한데도 포기하지 않는지 알 듯하다. 그들에게도 제퍼슨으로 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죽음과 삶은 별개지만 또 같은 듯한 양면이 존재했다. 죽음이 하나의 계기도 만들어주고 죽음이 치유도 했다가 해방의 이유도 되었다. 슬프다는 마음보다 때로는 장례를 잘 치르는 행사에 짜여진 극본대로 움직이고 있는 듯하다.
마지막에 아이의 돈을 갈취해 새의치를하고 새엄마를 데려오는 아빠에게 화가 나는 게 아니라 새엄마가 가져오는 축음기에 반해버리고 만 아이를 보며 어쩌면 이리 현실을 잘 그렸을까 생각했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라는 말이 되새겨진다.
나도 모르게 이상한 아집으로 이상한 관념으로 살아가는건 아닐까 반문하게 한다. 내 사는 모습은 책을 읽는 나는 어떤 사람이지. 제퍼슨에 묻어달라는 사람 제퍼슨에 묻으로 가는 사람 인생에 정답은 없겠지만 이 책을 읽으며 드는 생각은 무리한 부탁도 무모한 판단도 많은 이들의 수고로움을 동반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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