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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시간이 날 때면 헌책방에 들러 책 구경을 한다. 그런 와중에 내게 걸려든 책이 돌베개에서 나온 <한국공산주의운동사1>이었다. 3권으로 구성된 책인데 2,3권은 어디로 사라지고 달랑 1권만 나와 있었다. (내가 학교에 다닐 때는 여기 저기 깔렸을 책을 그 때는 못보고 이제야 보는 뒤늦음도 그렇고 출판사에 전화를 했건만 절판이라 구할 수 없다는 안타까운 답변만을 들었다) 한국 공산주의의 기원에서 해방 전까지 역사를 다룬 1권을 흥미진진하게 보긴 했는데 내용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일단 기초지식이 너무도 없는데다가 광범위한 내용의 압축적 요약, 자료의 부족 등이 그 원인이었을 것이다.
<한국 사회주의 기원>은 위 책 1권에 담겨 있는 내용의 1/3에 해당하는 (전체 300쪽 중 1대략 100여 쪽) 주제에만 장장 560여 쪽을 할애하고 있다. 저자는 일제 식민지시기 한국 사회주의운동의 역사 4부작이라는 원대한 구상을 하고 있고 이 책은 그 1부에 해당하는 셈이다. 1부가 다루고 있는 시간은 1917년에서 1921년까지이며 해외시대라 부를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고양된 국제적 혁명운동, 러시아 혁명의 발발과 치열한 내전, 3. 1 운동 이후 외교론에 대한 비판적 견해와 새로운 전략의 대두, 즉 세계혁명의 일환으로 한국독립전쟁이 수행이라는 독립전쟁론 등을 배경으로 1918년 <한인사회당>이라는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이 창립되었다. 결국 한국독립이라는 관점에서 사회주의 사상이 수용된 것이다. 이후 한국의 사회주의자들에게는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이라는 이중의 과제가 제기되었고 둘 사이의 관계 설정은 혁명론과 노선 투쟁의 본질적인 쟁점이 되었다. 이 시기 사회주의 그룹은 크게 두 분파로 나뉘어 막판까지 가는 끝없는 내부투쟁에 시달렸다. 소위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라 불리는 두 그룹은 민족주의자들과 연대문제, 즉 상해임시정부와 민족통일전선 전략의 수용 여부를 두고 첨예하게 대립되었다. 각 정파가 장악한 곳을 통과하는 타 정파 당원의 신변 안전을 보장할 수 없고 서로에 대한 테러가 자행될 정도로 적대적이었으며 결국 자유시 참변이라는 극단적 결과를 가져오고 만다. 하지만 각 정파의 권력투쟁이 야기한 분파투쟁의 해악으로만 파악해서는 안 된다. 당면 정세인식과 혁명론에 대한 상이한 입장이 대립의 본질적인 축이었던 것이다. 연속혁명론의 입장에서 민족해방, 즉 부르조아 민주주의 혁명의 일차적 수행과 뒤따르는 사회주의 혁명 노선과 민족혁명의 상대적 독립성을 부인하고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두 문제를 동시에 해결한다는 노선의 차이는, 그에 따른 전략 전술의 상이성, 부르조아 다시 말해 민족주의자를 혁명 동조세력으로 포함할 것인가? 이는 결국 상해임시정부와 전략적 연합, 민족통일전선이 필요한가의 문제로 대두되며 당면 핵심과제 역시 다른 목표를 제시하게 된다. 내전 중인 혁명 완수를 위해 한인 사회주의자들의 도움(특히 군사적 도움)이 필요했던 러시아 당국의 입장 역시 주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일본과 적대적 관계였던 시기에는 한인 무장세력을 지원하지만 일본과 조약을 통해 화평이 이루어지는 시기에는 한인 무장 세력에 대한 일정한 억제를 강요한다. 게다가 한인 사회주의를 담당하는 기관이 통일되지 못한 채 각 기관 별로 독립적이고 고립적으로 한국 사회주의 운동을 지원함으로써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분열을 가속화시켰다. 혁명적 기운의 쇠진, 미, 일 양국의 전쟁이 임박했다는 정세인식과 달리 워싱턴 회의를 통해 제국주의자들이 합의에 도달함으로써 한국 독립운동은 장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동일한 정세 인식에 기초를 둔 외교론, 독립전쟁론 모두 그 효용성을 상실했으며 독립을 향한 새로운 전략이 필요한 시점에 이른 것이다. 민족주의자들은 문화운동론을 들고 나왔고 사회주의자들은 대중운동으로 전환하였다. 동시에 운동의 중심이 해외에서 국내로 이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정 사안에 대한 이견과 쟁점이 있겠지만 전체적인 서술은 대단히 뛰어난 책이다. 초기 한국 사회주의 역사를 이해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책이라고 판단된다. 외적 요인들, 국제 정세와 특히 러시아 실정과 긴밀히 결합되어있으며 무엇보다 복잡하기 그지없는 온갖 단체들과 인물들의 난맥상이라는 밀림에서 길을 잃지 않고 일관되고 구체적으로 역사를 그려내고 있다. (모스크바 지원금을 둘러싼 논쟁, 임시정부의 개조론과 창조론의 대립, 코민테른과 극동공화국의 혼란스러운 개입 등등에 대한 나름의 이해를 얻게 되었다) 사회주의 운동 내부의 분파투쟁에 초점을 맞추고 비판했던 과거의 관점을 벗어나 단순한 정파간 알력이 아니라 상이한 입장 차이에 따른 대립에 초점을 맞춘 것도 신선했다. 이 지점에서 조선 시대 정치를 정권욕과 분파간의 이합집산으로 평가절하했던 식민지 역사관이 겹쳐진다. 동시에 분파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원론적으로 분파 자체는 악이 아니다. 분파 없음이야말로 전체주의적인 세계관이 아닌가? 다양한 분파가 전체적 통일에 파괴적 악영향을 끼치지 않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가 문제의 관건이다. 역사의 공백으로 남아있는 시기에 대한 호기심이 사회주의 역사에 대한 관심으로, 다시 민족과 민족주의에 대한 관심으로 점점 확장되어 간다. 적어도 우리에게 민족 문제는 어떤 이념을 선택하든 핵심 주제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문제의식이다. 한국의 좌파들에게 민족은 고민의 한 축이었으리라. 마르크스주의 자체의 민족에 대한 견해의 불충분은 제 3세계 혁명가들에게 수많은 고뇌와 상상력을 요구했다. 일제 식민지 시기 한국 사회주의자들이 이 공백을 포착했는지, 주체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대목이다. 저자의 다음 권을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