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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늦게까지 책을 읽어도 멀쩡하고 오늘은 10시도 안 되어 졸리고, 내일은 어떠할까.
"메이는 다리를 포개고 앉아 이제는 어디든 마음 가는 대로 갈 수 있는 길과 편편해서 쉽게 갈 수 있는, 침묵으로 가득 찬 자기 앞에 펼쳐진 세상을 바라다보았다" - <어떤 바닷가 여행> 중에서 (p.340)
단편의 특성답게, 다양한 삶을 단편적으로 엿볼 수 있는 앨리스 먼로의 단편집은 읽는 동안 행복감에 젖기에 충분했다. 일상을 일상같지 않게, 그리고 아름다운 문장들에 흠뻑 빠져들 때쯤에, 나는 이 책의 깊이를 놓치고 있었다. 그래서 옮긴이의 말을 살짝 빌려와 본다.
"이 책의 표제작이자 마지막 작품인 <행복한 그림자의 춤>은 예술, 곧 소설 세계에서 작가가 이루고자 하는 궁극의 뜻을 펼쳐 보인 작품으로 읽힌다. 삶의 가능성을 탐색할 기회의 문이 막히고 닫힌 세상에서 아이들은 물질만능사회에 물젖고 사회의 온갖 부조리에 익숙해지면서 본연의 순수한 자기를 배반한다. 자신을 지키고 살아남기 위해 '보호를 받고 싶은 욕구, 숨고 싶은 욕구, 위장하고 싶은 욕구'에 휩싸이는 그 아이들은, 그러나 본디 선량하다. 그것이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든, 모두가 그 대세를 따르는 속세에서 멀찍이 벗어나 꿋꿋하게 자기 신념을 실천하며 피아노를 가르치는 할머니 선생님의 가치관이다. "당신이 어린이의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고 거기에서 착한 마음씨와 선한 것이면 무엇이든 다 좋아하는 천성을 간직한 보물고를 찾아낼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는 마살레스 할머니 선생님의 가치관이 앨리서 먼로가 예술로 승화한 결정체이다. - p.407
나의 어제는 선량했을까. 아니면, 살아남기 위해 치열해지고 더욱 더 악독했을까. <행복한 그림자의 춤>처럼 본디는 선량했지만, 살아남기 위해 악독했을 것이고 그러나 본디는 선량했을 것이다. 다만, 거기서 나의 가치관을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다. 우왕좌왕했으며, 기회주의적이었으며, 바른 길을 가지 못했다. 어쩌면, 나의 마음속에서 어린이의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을지 모르는데, 엉뚱한 데서 그 마음을 들여다보고는 열등감에 사로잡히고 억울해했고, 화를 냈을 것이다. 지금?
하루하루가 새롭게 다가온다. 무언가의 깊이에 도달한다는 것은 신선하고 기분좋은 일이다. 책 한 권에서 아무런 가치도 발견하지 못했고, 생각없이, 그리고 아무런 목표없이 읽기 자체에만 몰두했던 지난날. 그리고 결국은 책읽기는 내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며 책읽기를 그만두자며 주저앉았던 날들이 떠오른다.
그림자가 행복할까. 그림자로 사는 것은 어떤 행복을 가져다줄까. 그래서 나와 같이 그림자가 춤춘다면. 책읽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내 삶이 새로워질 것을 믿는다. 책읽기의 작은 행복이 내게 소소한 기쁨을 주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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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나'라는 주어가 들어가면 최악의 상황은 예외가 될 거라고 믿고 싶어진다. 한없이 안전하고 안온하게 그렇게 심심하지만 부드러운 삶을 주문한다. 하지만 삶의 응답은 때로 가혹하다. 평균적인 평범한 그러한 수식어로 둘러싸인 안전망이 항상 나를 둘러싸고 보호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예외란 없는 것임을 깨달으며 늙고 죽어간다. 그게 또 삶의 또다른 단면이다. 애써 부정하고 돌아서면 바로 이러한 이야기들이 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노작가. 그녀는 영어를 쓰지만 미국도 영국 출신도 아니다. 캐나다에서 나고 자라 이제 여든을 바라본다. 게다가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젖을 수 있는 장편이 아닌 단편작가다. 단편은 때로 숨이 차고 때로 흩어지는 집중력으로 귀기울이기 힘들다. 그래서 아주 잘 쓸 수 없다면, 아주 잘 읽힐 수도 없다. 그러니 나는 그녀의 이야기에 귀기울일 준비 대신 딴 생각을 할 구석을 남겨둔다.
구석에 다림질을 할 수 있는 다리미대와 다리미를 두었다. 그곳에서 와이셔츠를 다리며 때로 드라마를 본다. 그때 기분은 아주 묘하다. 정말 주부가 된 느낌. 진짜 '나'는 어디로 가버린 느낌. 다림질이 훑고 간 자리에도 남는 주름은 나의 무능력과 나의 열패감 같다. 나른하게 행복하기도 하고 뼈아프게 슬프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