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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글자들이 있다. 곰곰 생각해보면 한 글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 거의 두 글자로 된 음절들을 사랑했다. 책의 제목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휘파람 소리를 내어보았다. '휘'라고 소리를 내어 발음을 해본다. 휘파람처럼 여운이 있는 글자다. 한 글자로 된 음절 속에서 이름 끝에 따라오는 여운을 음미해 본다. 바람소리처럼, 누군가의 부름처럼, 휘라는 글자가 나에게 다가섰다.
단음절로 된 글자 속에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하나의 글자로 다른 글자에 기대에 사용하는 글자들의 제목이었다. 휘, 종, 홈, 개, 못, 톡, 잠, 초라는 제목을 가진. 단음절로 된 제목 앞에서 우리의 주변에서 보았음직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직조해 냈다. 그들의 이야기는 짙은 여운을 남기고 우리의 머릿속을 부유한다. 단음절의 제목을 새기고, 그 속에 깃든 의미를 생각해 보는 시간. 이렇게 소설로 나타난 글들에서 사유의 시간을 갖는다.
「휘」 라는 단편에서, '휘'라는 이름을 가진 소년은 자신을 두고 떠난 부모를 찾는다. 악(樂)이라는 이름자가 들어간 아버지. 그래서였을까. 그가 '악'하고 소리를 낼때마다 사라진 아버지가 떠오른다. 아버지를 찾겠다고 나간 어머니 조차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때, 제 이름 마냥 바람이 되어 사라진듯한 느낌을 받았다. 누군가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불러볼 수도 없는 이름에 대한 이야기였다.
노인은 내 이름을 묻지 않았다. 노인에게는 내가 보이지 않았고 나는 창틈으로 들어와 잠시 머물다가 떠나는 이름 없는 바람이었다. (22페이지, 「휘」)
내가 여자이기 때문일까. 읽으면서 못내 불편했던 단편이 「종」이었다. 집안의 유일한 계집이고, 그러므로 가족에게 혹은 모두에게 종이었던 누이. '누구든 누이를 쳤다'라고 시작한 단편에서 한 사람이 무너질 수도 있구나. 그런 누이를 자신 또한 치지 않게 해달라고 말하는 이의 목소리는 비감에 차 있었다. 어머니의 역할까지 하게 되었던 누이는 밤마다 아버지와 함께 잤다. 그런 누이가 더렵다고 느꼈고, 한편으로 두렵기까지 했다. 자기에게 오빠라고 부르는 누이. 주인공은 모두의 종이었던 누이가 어느새 누이를 위해 울리는, 들려오는 종소리에 귀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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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단어에는 중의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휘라는 단어에 이름이 되지 못해 바람소리처럼 흩어지는가 하면, 또다른 이름이 되어 나타났다. '종'이라는 단어에도 누군가의 종이 되었다가, 어디선가 울리는 종소리의 종이 되었다. 「홈」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 책상위에 조금씩 깊에 패여가는 홈과 가정을 나타내는 홈이 이중적 의미로 나타났다. 수능을 앞둔 고등학교의 교실, 전교 십 등 안에 들지 못한 십일 등의 자살 소식에 이어 십 등의 자살이 이어졌다. 이제 구 등 차례인가. 언제부턴가 십일 등의 책상에 조그맣게 홈이 패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날이 지나갈수록 홈의 크기는 점점 커졌다. 볼펜이 들어갈 홈에서 점점 커져 다른 것도 끼워넣을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홈은 깊게 패어버린 마음의 상처인가, 동시에 집안의 아늑함을 나타낸 것이었던가.
우리는 종종 동물이 인간을 바라보는 세상을 소설 속에서 경험한다. 「개」 라는 단편에서도 개가 인간을 바라보는 이야기를 담았다. 개가 바라보는 세상은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과 다르지 않다. 외국인 아내를 둔 할배와 며느리뻘이라 하여 동네 사람들에게 며느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엄마. 그리고 진구라는 아이가 있는 가족 속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이야기이다. 혹시나 도망갈까봐 집밖에 못나가게 하는 할배. 할배를 피해서 창고에 짐을 싸놓고 나가길 주저하는 엄마. 점점 자라 반항의 시기를 겪는 진구. 사람들 사이를 떠도는 개의 시선을 바라볼 수있다.
그녀가 들려주는 연애가 한낱 블로그에 연재하는 이야기였음을 나타내는 「못」과 한 소녀가 장난으로 떨어뜨렸던 것들로 인해 비밀을 가진 「톡」, 불면증을 앓고 있는 남과 여의 이야기인 「잠」이 이어졌고, 마지막엔 세월호 이야기를 다룬 「초」라는 이야기였다. 작가가 소설을 쓴 시점이 아직도 인양되지 못한 세월호에 대해 말했는데, 거짓말처럼 세월호는 인양되었고, 다시 3년전의 악몽을 되살아나게 했다. 세월호 사건이 있었던 날들에서부터 간절한 바람으로 지켜보았던 마음, 그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달았던 노란색 리본이 다시금 보이고 있는 현재다. 조금만 대처를 잘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며, 아직도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것들이 비수가 되어 날아드는 감정들을 말했다.
비는 좌절의 상징이다. 우비를 뒤집어쓴 사람들을 내다보면서 나는 더는 한 글자도 적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쓰는 문장들이 칼날이 되어 누군가의 마음을 베어내고 상처 입힐까 봐 두려웠다. 진실을 가리는 차양이 될까 봐 망설여졌다. (247페이지, 「초」 )
단음절로 된 단어들은 이처럼 많은 뜻을 내포한다. 이것도 될 수 있고, 저것도 될 수 있는. 우리의 삶이 그러지 않을까. 조금만 방향을 틀어도 길은 엇갈리고 삶이 어떤 방향으로 흐를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미지의 길 앞에 있는 것처럼 한 글자로 된 말들은 우리의 삶 속에 깊이 파고들었다. 어두운 공간 속에 갇힌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았지만, 모두들 그 속에서 한줄기 빛을 발견하지 않았을까. 그 빛을 향해 나아가지 않았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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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는 오늘을 이야기하는데 한 글자면 충분했다. 그 한 글자의 힘이 이렇게 위대했나 싶을 정도로, 많은 의미를 함축한 단어들이었다. 휘, 종, 홈, 개, 못, 톡, 잠, 초. 그중 가장 의미 있게 들리는 건 ‘초’였고, 타인이 보는 우리 삶은 ‘개’였다. 불면의 밤으로 초대하듯 공유했던 건 ‘잠’이었고, 살벌한 전쟁터의 마지막 골인 지점 같은 ‘홈’은 욕심을 이루지 못한 서글픈 마무리였다. 가장 강렬했던 작품인, 억압과 방관을 당연하게 여기며 종용했던 ‘종’은 무서웠다. 떠올릴 수 없는 이름에 가슴 속 구멍으로 들어오는 바람 ‘휘’, 물방울 놀이의 비극적인 마음을 대신 전하던 소리 ‘톡’, 소설처럼 말하는 연애가 되어버린 ‘못’은 그대로 비밀로 머물 수밖에 없는 한 여자의 아픔처럼 들렸다.
사는 동안 우리가 속한 모든 것을 아우르는 단어였다. 가족이나 연인 사이에서 시작되는 감정과 괴리, 불화가 비극을 부른다. 학교라는 공간에서 채워야 할 욕심과 우선순위가 불행을 일으키며 존재의 사라짐으로 끝맺는다. 불면증이라 여기는 시간은 무슨 일을 벌여놓았나... 세상의 온갖 슬픔을 한 글자로 말할 수 있나 싶으면서도, 결국 그 한 글자로 이야기해놓고야 마는 이 소설이 봄날의 눈부심과 대조적으로 서글펐다. 왜 우리는 상대와 함께하는 시간을 공유하며 아픔을 나누는 게 아닌 각자의 마음과 욕심이 먼저 보이는 걸까. 그런 의문이 늘 따라다니는데도 그걸 무시하며 사는 동안 온갖 비극은 우리 곁에 딱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모르고, 불행은 이어진다. 누구 한 사람의 잘못이나 욕심이 아니라는 것 역시 안다. 그게 문제라는 것도 안다. 현실을 살면서 살펴봐야 하는 부분임을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싶지 않다는 것 역시 시사한다. 그게 뭐라고, 내 살에서 나는 피가 아닌 것처럼 내 일도 아닌데. 결국, 나만 아프지 않으면 오늘 하루가 무사한 것으로 여기는 마음이 원인인 걸까. 그런 마음이 온통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우리 사는 곳곳에 자리한 그림자를 잘 못 보고 있는 건가. 흔히 ‘소외’라는 말로 그 자리에 자리한 그들을... 그들 안에 내가 속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자주 잊는다. 이들의 비극이나 절망이 낯설면서도 익숙한 이유다. 가까이 있지만, 모른 척하듯 살다가, 어느 순간 툭 튀어나와 친숙하게 자리하는, 어쩌면 내 삶의 일부인지도 모르는 것들.
집을 나가버린 엄마를 대신해 누나가 그 자리를 채우며 내는 곡소리도 모른 척하고(「종」), 내 소유의 물건처럼 집안에 묶어두고 싶은 바람으로 한 사람의 인격을 무시한다(「개」). 어느 시골의 작은 마을에서 봤음직 한 장면이 연이어 이어지면서, 개가 보는 인간 세상이 참 우스울 것 같다. 노인에게 시집온 타국의 젊은 여자, 한국말을 제대로 못 하고 어두운 피부마저 아들에게 무시당하는 삶, 자기는 사람이 아니라며 깊은 밤 마당의 한구석에서 하소연하는 목소리로 주인공 백구는 인간 세상을 본다. 노점상 할머니의 외침에 외로움을 공감하며, 애인과 헤어지고 유기견을 모으며 그 외로움을 잊고 기다림을 품은 여인의 울부짖음에는 아무런 희망도 없다. 그렇게 흘러들어 간 어느 음식점 앞에서 마주한 인물의 반가움. 백구는 마치 고향을 찾아가든 오토바이 뒷좌석에서야 비로소 한세상 잘 구경한 것으로 느낄 듯하다. 세상 여러 사람을 만나며, 그런데도 살아가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실컷 보았을 백구의 마음에 남은 건 무엇이었을까.
외로운 사람에게서 나는 냄새를 안다. 어느 날 밤에는 할배도 죽고 일구도 죽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며느리가 할배와 일구를 마당 깊숙이 파묻어주고 창고에 숨겨두었던 짐을 짊어진 채로 마당을 빙빙 돌아가다 대문 밖으로 떠나는 모습을 상상했다. 사람은 대야 가득 물을 담아 피부를 씻어내고 나면 체취가 없어지는 줄 알고 있지만, 구덩이가 될 때까지 그들은 오랜 시간 계속 같은 냄새를 풍긴다. 잊지 못한 옛 기억의 냄새를 코끝에 품고 산다. (116페이지 「개」)
자식을 천재라 믿으며 세상 모든 우월함을 부여받은 것으로 여기(「홈」)며 가슴에 홈을 새기는 것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경각을 부르는 것 역시 잊지 않는다. 특히 「종」은 그 소리가 더 아프고 크다. 힘에 눌려 끌려가는 삶을 그렸던 누이가 베란다 한편에 자기만의 방을 만든다. 무릎이 아픈 줄도 모르고 엎드려 닦아내고 자기 짐을 옮긴다. 그때야 비로소 누이는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처럼 보였다. 무엇이 계기였을까. 하얀 발을 만지며 기도하던 그때? 어디선가 들리는 듯한 어머니의 목소리? 그게 무엇이든 중요한 건, 누이가 베란다에서 시작할 새로운 삶이다. 그런데 그것마저 허락하지 않을 자격이 누구에게 있단 말인가. 피 묻은 발바닥으로 낸 흔적은 이제 누구의 몫인가.
작가가 마지막으로 불러온 한 글자는 다시 수면 위로 오른 세월호였다. 있어서는 안 될 참사였다. 오보 속 혼란은 구조의 어려움을 더했으며, 간절한 바람은 비극이 되어 그 많은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 사이 주인공은 좀 더 어른 사회에 속한, ‘짧지만 긴 시간인 초(second)를 생각하며 고통을 공감하는, 어둠을 내쫓아 환한 순간을 만들어내는 초(candle)를 드는’ 사람이 되었다. 2017년 3월, 바다 깊은 곳에서 오른 세월호는 그 상처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그날 구슬프게 내리던 비, 살고 싶다고 외치던 소년의 목소리, 아직 제대로 떠나보내지도 못했다던 부모의 눈물. 그리고 이제 시작인 밝혀져야만 하는 진실들.
나는 북적이는 창가 자리에 앉아 커피를 내려놓고 노트북을 열었다. 단편집을 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았을 때에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초였다. 짧지만 긴 시간. 어쩌면 모든 것을 달라지게 만들 수 있는 갈림길 앞에서의 그 짧은 망설임이 내 가슴을 두드렸다. 그리고 아주 짧은 시간 타오를 것 같은 초. 바람이 불면 금세 꺼질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그 가녀린 글자를 흰 화면에 띄워놓고 한참 동안 망설이고 앉아 있을 때였다. 창밖에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찬바람과 함께 하늘을 긁으며 내리는 그 비를 한참을 올려다보았다. 여객선이 가라앉는 동안, 제주 바다의 성난 파도에 눈물처럼 뚝뚝 떨어져 내리던 그 빗물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246~247페이지 「초」)
한 글자가 뿜어내는 힘을 보여주겠다고 다짐이라도 한 듯, 작가는 한 글자가 내는 소리의 힘을 글자 수와 반비례로 들려준다. 짧고 간단하지만, 그 흐름은 너무나도 길고 복잡한 세상 속 우리 모습을 그대로 비춘다. 저마다 아무렇지도 않게 사는 오늘이 자기 모습을 놓치고 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고요한 목소리였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외치고야 마는 폭발을 이렇게 전한다. 위태롭게 지내온 시간 동안 잊고 있었던, 바라지 못했던 삶을 이제야 비로소 찾았다는 듯이, 우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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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어보는 작가의 소설집은 무척이나 흡입력있는 문장으로
휘, 종, 홈, 개, 못, 톡, 잠, 초 손솔지 작가의 글은 처음 읽어보지만 글자 하나에
삶을 표현하는게 쉬운 일이 아닌데
아버지가 어머니가 버리고 간 아이의 삶 아무도 모르게 흘러가는 바람처럼 어디선가 센치한 오늘같은 날 참 우스우면서도 가슴 묵직히 내리는 한권의 책이었다. |
그러나 불면증이 시작된 이래로 그런 꿈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불면증이란 고양이 같은 질병이다. 금방이라도 손끝에 닿을 것처럼 졸음이 다가오면,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졸음을 낚아채 떠나가며 정신을 맑게 깨워 그를 조롱한다.(193p) 휘, 종, 홈, 개, 못, 톡, 잠, 초 한글자로 이루어진 제목들을 보니 떠오르는 다른 한 권의 책 [한글자]라는 제목의 책이다. 제목 그대로 한글자 짜리 단어들을 사용해서 자신의 글을 적어 놓은 책. 아직도 생각나는 단어가 하나있다. '외'라는 단어. 어떻게 보아도 외로와 보이는 글자라고 했던가. 그 이후로 '외'라는 단어만 보면 외롭지 않니? 하고 물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그런 글자이다. 이 책에서는 저런 다양한 한 글자들을 통해서 중의적인 표현을 사용해가며 저마다 다른 이야기들을 마음껏 풀어내고 있다.
이름이 '휘'인 아이. 그 아이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바람소리가 난다. 밥이 되면 아이의 이름을 꼭 두번씩 부르던 엄마. 그 엄마는 어떤 생각으로 아이의 이름을 '휘'라고 지었을까. 휘라고 불리는 소년은 지금 어디서 또 무엇을 하고 있을까.
'樂'자가 들어가는 라는 이름을 가졌던 그 아이의 아빠는 또 어디서 무얼하고 있을까. 즐거운 락이라고 불리지만 음악처럼 뒷글자에서는 '악'이라고 발음이 되는, 하지만 아이는 여전히 아빠를 생각하며 '惡'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고 있다. 어찌보면 심벌즈를 연주하던 아버지와 가장 잘 어울리는 이름속의 한글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일초, 이초, 삼초... 시간이 지나간다. 시간을 나타내는 가장 짧은 단위인 초. 그 외에도 초는 자신의 몸을 태워서 세상을 밝혀주는 양초의 줄임말로도 사용된다. 또한 초를 치다라는 뜻으로 식초라는 의미 또한 가지고 있다. 이 이야기 속에서는 어떤 초의 의미로 사용되었을까.
3년간 물속에 있던 세월호가 건져져서 뭍으로 올라왔고 이동중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던 당시의 상황. 분명 배가 물에 잠겼는데 쥐죽은 듯이 조용하던 그 장면. 파도조차도 느껴지지 않던 고요함. 배가 물에 빠지면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나와서 소리치고 살려달라고 하고 다른 배들이 와서 이동을 해야 하는 것이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쥐죽은듯이 조용하던 그 배를 보면서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비단 나뿐인가.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그때 당시의 시간을 보냈던 주인공은 집에 돌아와서야 아무도 살아나오지 못했다는 뉴스를 듣게 된다. 일초, 이초, 삼초... 시간은 지나가는데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던 것인가. 그 당시를 배경으로 한 짧은 이야기이지만 제목에 더욱 집중해서 이야기를 읽게 된다.
바람소리 같던 휘, 달랑거리던 소리를 내던 종, 책상위에 새겨졌던 홈, 온몸이 까만데도 백구라는 이름을 가졌던 개, 벽에 박힌듯한 못, 장미가시를 뽑는 소리 톡, 밤이면 자야하지만 오지 않은 잠, 시간을 나타내는 초. 이 모든 것이 각기 저마다의 특징을 나타내며 독특함을 추구하고 있는 이야기.
귤, 분, 달, 장, 말, 시... 이 세상에 한글자는 아직도 많고 많다. 비단 명사 뿐 아니라 부사나 다른 품사까지 영역을 넓혀본다면 더욱 무궁무진할 것이다. 작가는 다른 한글자들을 바탕으로 또 다른 책을 쓸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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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태어나 내가 먼저 사용하는 언어는 한글이다. 만약 나에게 한글이 없었다면, '이런 과학 기술을 받아들일 수 있으며, 편리한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에 대해서 '아니다' 라고 대답할 것이다. 언어라는 건 나에게 개념을 부여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나가는 욕구와 욕망의 도구이다. 그러하기에 언어는 우리에게 축복이면서 지옥문이다. 언어로 인해 우리는 점점 더
복잡함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새로운 개념에 신조어를 더해 세대 차이를 이끌어낸다. 우리 사회에 갈등과 반목이 일어나고 있는 그
밑바탕에는 언어의 사용의 차이에 있으며, 그건 결국 소통할 수 없는 상황을 야기시킨다. 수많은 자기 계발서에서 행복해지려면
단순하게 살라고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단순하게 살아가면 수많은 개념이 나를 둘러싸지 않게 되며, 그러면 나와 주변 사람들
사이에 갈등은 적어진다. 개념은 생각을 낳고, 생각은 행동으로 이어지는 우리에게 단순함은 모든 것에 영향을 끼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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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언어의 단어에는 각각의 의미와 뜻이 담겨져 있다. 한글의 독특한 힘을 우리의 이야기들로 매칭시켜 풀어내는 중의적이고 둔중한 휘, 종, 홈, 개, 톡, 잠, 초 라는 단어로 이루어진 가각의 소설들은 결코 허투루 이 책 '휘'를 읽으면 독특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다. 곱씹고 곱씹어 생각을 다듬어야 하는 즐거운 시간이 되는 소설집, 한마디로 좋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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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자의 제목으로 이루어진 단편 소설[휘]. 삶의 붙잡혀 자신을 놓쳐버린 지금 여기, 우리 이야기라는 설명이 붙어 있는 소설이다.
전작 [먼지먹는 개]도 상당히 독특한 이야기였는데, 여덟 편의 이야기 역시 독특하기는 하다. 특히 가장 독특했던 것은 '개'의 편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사람이 아닌 개다. 다른 형제들과는 다른 옴몸이 검은 개. 이름 또한 검은 개에 어울리지 않는 백구다. 백구가 태어나고 얼마지나지 않아 국제 결혼으로 결혼해 한국에 와서 사는 얼굴이 까만 며느리가 낳은 아이 진구와 다섯마리의 강아지와 함께 여섯 형제가 된 집안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그리고 기억에 남는 이야기라면 마지막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이야기 '못' 상하이에서 새로 시작하려는 남자와 한국에 있는 여자의 이야기다. 이야기는 아름답지 않다. 둘의 관계는 불륜이다. 상하이에 있는 남자에게는 아내가 있지만 아랑곳 하지 않는다. 오히려 대담하게 그는 아내가 한국말을 모를거라며 집으로 한국에 있는 여자와 편지를 주고 받는다. 잘못된 것을 알지만 멈추지 못하는 둘의 관계. 그러나 마지막까지 가면 작가의 이야기에 뒤통수를 맞는다. 뭐 강하게 맞는 것은 아니지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솜씨가 앞으로의 작품을 기대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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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의 뇌리에 명확하게 박히게 하는 요소 중의 하나로 독특한 소재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와 극중 인물을 절망의 끝으로 떨어뜨려 대비효과를 뚜렷하게 나타낸다. 기발한 발상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스토리의 탄탄함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손솔지 작가는 전작 <먼지 먹는 개>에서부터 자신의 작품세계가 가진 색깔을 나타낸 바 있다. <휘>라는 작품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어지는 것 같다. 휘, 종, 홈, 개, 못, 톡, 잠, 초라는 단어가 담고 있는 함축적인 의미를 알고부터 소름이 돋았는데 우리 주변에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보호받지 못한 채 소외된 사람들이 많다. 사회고발 프로그램이나 뉴스면에서만 봤을 뿐인데 작가의 나이를 뛰어넘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각 작품마다 독자들을 몰입시키는 흡입력이 남다르다. 오히려 <먼지 먹는 개>보다 더 능숙해진 것 같다. ![]()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그만큼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평소에 가지고 있었기에 작품으로 쓸 수 있었을 것이다. 작품의 소재 또한 다양하다. 가족, 연인, 친구, 학교, 불면증, 죽음, 세월호 참사 등 이를 아우르는 작가의 힘이 느껴진다. 특히 '종'이라는 작품에 이르러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잔혹함에 분노가 치밀었다. 같은 가족인데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종 부리듯이 함부로 대할 수 있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집을 떠났고 집에는 아버지와 오빠, 누이만 있는데 화자 속의 '나'는 집에서 종 노릇을 하는 누이가 창피했고 그런 이유로 밖에서 따돌림 당하는 것이 부끄러웠다. 절정에 이르러 어머니에게 가라는 말에서 지옥같은 삶을 벗어나 교회 종을 치듯 해방된다는 결말이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 책 뒷표지를 보면 이런 문구가 나온다. 삶에 붙잡혀 자신을 놓쳐버린 지금 여기, 우리 이야기. 그렇다. 안 좋은 소식은 꼭 남의 얘기처럼 들리지만 결국 모아보면 내게도 있었던 일이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세월호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든 분명한 것은 우리가 남의 아픔을 외면하는 순간 누구도 우리를 지켜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아픔은 함께 나누고 공감할 때 비로소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너와 나의 일로 분리하며 생각할 수는 없다. 아직 가족들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이 있다. 어른들을 믿고 따랐을 뿐인데 그 댓가는 차가운 바다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는 것이다. 분명 잘못한 사람은 있는데 나서서 책임지는 사람이나 기관, 정부는 없다. <휘>라는 작품을 보면 더욱 확신이 선다. 우리의 무관심이 배려심 없고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 책장을 읽는 내내 가슴이 뛰었다. 처절해서 차마 사실이 아니길 바라거나. 극중 인물이 결국에는 행복해지기를 바랬다. 왜 곧이 곧대로 순응하며 사는 사람들은 고통을 받아야만 할까? 가해자에 대한 비난보다 더 참혹한 것은 피해자에 대한 냉대어린 시선이다. 우린 알게 모르게 이를 반복해왔고 비극을 낳았다. 작가의 나이가 많지 않은데도 이런 소재를 썼다는 것은 앞으로 해줄 얘기가 많은 듯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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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가 평소에 누리고 있는 ‘일상’이라는 것은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가? 출퇴근을 위해 버스를 타고, 식사를 하고, 친구들과 카톡을 하는 게 일상이라고 한다면, 그 일상은 팔이 부러지거나 감기에 걸리거나, 심지어 전날에 잠을 설쳤다는 이유만으로도 쉽게 붕괴하곤 한다. 하지만 그 일상이 주는 편안함과 익숙함이 너무 달콤하기에, 우리는 그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서 사회의 비극들을 외면하고, 현재 누리는 얄팍한 이권들을 부여잡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 하지만 누군가에겐 그 일상이라는 것이 탈출하고 싶은 지옥이다. 여성, 외국인, 입시생, 취준생… 이 사회에서 어느새 약자가 되어 그 존재만으로 절망의 구렁텅이 속을 헤매는 자들은 우리 시야의 밖에서 그들의 울분을 삭히고 있다는 건 사회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들을 착취하는 것 또한 이 시대의 약자이며 결국 약자들이 더 약한 자를 잡아먹는 정글의 모습이다. 2. 손솔지 작가의 단편 소설집 ‘휘’는 그런 사각지대의 약자들, 그래서 일상적인 지옥을 체험하는 이들에 대한 르포라 말할 수 있다. 주인공들은 부모에게 버림받거나 차라리 버림받았으면 하는 이들이다. 시작부터 불행한 이들이었기에 그들이 현재 처한 상황도 그다지 희망적이지 않다. 그런 인간 군상들의 처절한 일상을 활자 속에 꾹꾹 담아놓았다. 읽다보면 내 삶과 그 주변에서도 발견되는 구조적 학대와 트라우마의 조각들을 마주하게 되어 불편할 것이다. 이 책에 수록된 8개의 단편들은 한국사회의 만연한 약자에 대한 혐오와 착취의 굴레, 속칭 ‘왕따의 메커니즘’을 각기 다른 시점에서 조망한다. 절망 속에서도 피어나는 한 떨기 희망의 꽃을 노래하다가도, 장마철 자취방 벽면을 점령한 곰팡이 마냥 다시금 피어오르며 자신의 존재감을 떨치는 이 세계의 비극들을 조명한다. 단편집이라고 생각해서 가볍게 집었다가는 자신의 멘탈이 부숴져 가볍게 흩날리는 경험을 할지도 모른다. 3. 그렇다면 우리는 이 혐오와 증오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 책에 등장하는 이들은 사람에게 상처를 받지만, 동시에 사람에게서 구원을 받는다. 필연과 같은 우연이 반복되며 운명적인 만남으로 그들을 이끌어주는 것이다. 그 끝에는 가족 혹은 가족과 진배없는 이들과의 재회로 이어지기도 하고, 새로운 인연이 맺어지며 자신의 상처를 보듬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완벽한 치유는 아니다. 우리는 종종 떠오르는 기억들에 맞서 싸워야 한다. 그 기억들은 고통이면서 동시에 증거이기도 하다. 앞에 말했듯,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취약한지에 대해 종종 우리는 잊곤 한다. 일상을 잃는 데는 내 존재의 아주 작은 일부가 상처 받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일상이 지옥 같았던 이들이 그들의 일상을 회복하기 위해선 누군가의 죽음이 필요하다. 그것이 상징적 죽음이든 물리적 죽음이든, 그 죽음마저 극복한 이후에야 그들은 일상이 회복된다. 그렇기에 그들을 옥죄는 죽음의 공포와 학대의 기억마저 일상의 회복과 앞으로 보장될 평범한 일상에 대한 증거인 것이다. 4. 소설집 ‘휘’에 있는 8개의 단편 중 ‘초’는 다른 단편들에 비해 이질적이다. 단편소설이라기보다는 작가 개인의 이야기를 담은 에필로그라고 봐도 될 정도다. 소설을 빙자한 에세이에서, 주인공은 어떤 봄, 제주도를 향해 항해하던 어떤 선박에서 일어난 비극과 집권 세력의 무능, 그리고 그것에 대한 합당한 분노에 대해 침묵과 망각을 강요하는 세력에 대해 말한다. 또한, 그 세력들을 결국 패퇴시켰던 소시민들 간의 촛불의 연대에 대해서 말한다. 왜 작가는 이 8개의 단편 중 마지막에 이것을 배치했을까? 그전까지 단편들에서 작가는 질문을 던져왔다. 당신들이 보는 이 약자들의, 고통 받는 자들의 삶에 대해서 당신은 어떤 느낌이 드는가? 이들이 구원받기 위해 필요한 것은 과연 무엇인가? 아마도 작가는 일상이 지옥인자들, 그리고 일상을 잃어버린 자들에 대한 연민 그리고 연대만이 그 지옥 속에서 그들을 이끌어내고 동시에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길임을 제시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p.238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우리가 얼마나 깊이 가라앉고 있는지를. 불 꺼진 암흑 같은 마음속에서 어떻게 일어서야 하는지도 우리는 배운 적이 없었다. 더 이상 뉴스에서 기대하는 소식을 듣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사람들은 불처럼 번지는 마음속 분노와 설움을 잊기 위해서 불에 탄 부분을 싹둑 잘라냈다. 평소처럼 하루하루를 견디며 살기 위해서는 더 이상 연명하는 데에 쓸데가 없고 타기 쉬운 말랑한 부분부터 잘라내야 했다. 그중 하나가 희망이었다. p.240 나는 절대로 남이 되어보지 않고는 남의 심정을 상상할 수 없는 사람의 뒷모습이 멀리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어쩌면 세상은 이대로 잊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검푸른 바닷물 속에 잠들어 있는 진실은 그대로 영영 잊힌 유물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p.45 ˝계집은 요물이야.˝ … ˝우리를 유혹하기 위한 가느다란 목소리나 긴 머리칼을 봐라. 두부처럼 부드럽고 조기 살점처럼 뽀얀 젖가슴은 어떻고. 그들이 허연 속살을 벌려 보이며 군침을 유도하는 이유는 단 하나야. 저희 몸뚱이에 우리가 홀려버리면 그 뒤엔 우릴 제 맘대로 부리기 위해서지. 눈을 현혹하는 살덩어리와 웃음을 빌미로 우리에게 기생해서 살아가려는 거야. 흙탕물 한번 안 디디고 어깨 위에 업혀서 알맹이만 날름 핥아 먹겠다는 심산이지. 하지만, 얘야.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얼마나 가여운 족속이냐. 그렇기 때문에 속으면 안 되는 거다.˝ p.79-80 어쩌면 십일 등이나 십 등이 학교에서 죽는 것은 당연할 일인지도 모른다. 이곳은 둥지나 다름없다. 캄캄한 어둠 속을 걸어서 집에 돌아가 잠시 눈을 붙이고 다시 등교하는 수험생들은, 집 안의 가구 배치가 바뀌어도 단번에 눈치채지 못할 만큼 집보다 학교에서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책상에 엎드려 쪽잠을 자는 것에 익숙해져, 집 안에도 폭신한 침대를 놔둔 채 책상에서 꼬꾸라져 잠드는 아이들이었다. p.106-107 ˝나는 사람 아니야.˝ p.215-216 ˝나는 포기했어요. 사람은 고장난 물건 같아요. 좀처럼 맘대로 되질 않죠.˝ p.5 한글에는 한 글자마다 주문처럼 큰 힘이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단단하고 작은 몸 안에 아주 많은 의미를 끌어안고 있어서,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느새 그 속에 숨은 이야기들을 상상하게 되곤 합니다. 소설은 그 글자들을 드문드문 징검다리처럼 이어 붙여, 한 발자국씩 돌을 밟고 따라올 사람들을 내가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 속으로 인도하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p.250-251 얼굴도 모른 채로 살아온 수많은 인파가 나를 감싸고 있었다. 그 안에서 나는 내가 두려워했던 것의 실체를 깨달았다. p.249 사람들은 망설임 없이 나아갔다.끝을 알 수 없이 길게 이어지는 초의 행렬은, 한곳을 향하고 있었다. 가차 없이 잘라내고 살아가려고 해도 도저히 외면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이 모두의 마음에 빛을 밝히는 순간이었다. 나는 이 순간의 우리가, 끝없이 이어지는 질문의 대답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p.252 나는 초가 된다. 말없이 미소를 건네는 앞사람의 촛불에서 불씨를 빌려와 더 뜨거워진 불덩이를 옆으로 옮긴다. 심지가 뜨거운 초의 마음으로, 찬 바닥 한곳을 밝히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꼿꼿이 선다. 불길은 점점 더 먼 곳까지 널리 퍼져 우리는 다시 물결을 이룬다. 사방이 밝아지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고, 나는 그 누군가였다. 스위치를 눌러서 끌 수 없는, 방대하고 광활한 불길 앞에서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본다. 낯설지만 익숙한, 거울에 비친 마음 같은 표정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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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솔지의 소설은 독특하다. 때로는 한두 걸음이 아니라 세 걸음 이상의 거리를 두고 앞서나가서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독자를 뛰어넘는 상상력은 너무도 예측 가능한 뻔한 전개보다는 시선을 끈다. 고개를 갸웃거리다가도 오히려 신선하다. 제목부터 인상적이다. 학창시절이었던가. 이름에 '휘'자가 들어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휘파람 소리 같기도 하고, 강한 바람을 불어올 듯한 혁명적인 이름. 그 이름이 소설의 제목이라는 점에서 일단 내 눈길을 잡아끌었다. '휘'라는 이름에 대해 시작했지만, 작가의 상상력을 더해 소설로 완성된 것을 보니 바람이 동심원을 그리며 마음에 흔적을 남긴다. "네 이름에선 휘파람 소리가 나." 동그랗게 오므려진 소녀의 입안에서 바람이 샌다. "네 이름만으로 바람개비도 돌릴 수 있겠어."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의 천진한 얼굴이 동그랗게, 동그랗게 퍼져나가는 빗물의 동심원 속에 있다. 소녀는 모르고 있다. 내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불행해졌다. (12쪽)
이 소설의 작가는 손솔지. 2013년 경인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남성 중심적 세계를 살아가는 현대 여성의 내밀한 심리를 드러낸 등단작「한 알의 여자」(단편소설)를 통해 탄탄한 문장력을 지닌 작가, 감정의 절제를 통한 심리적 거리 확보와 상징, 은유와 같은 미학적 장치에 능숙한 작가라는 평을 받았다. 첫 장편 소설《먼지 먹는 개》는 부도덕한 인간의 이기심이 빚어낸 유전자 조작 약물이 이 사회를 어떻게 파국으로 몰고 가는가를 낱낱이 파헤친 문제작으로, 현대사회에 던지는 날카로운 시선과 문제의식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 책《휘》에는 '휘, 종, 홈, 개, 못, 톡, 잠, 초'라는 한 글자 제목의 여덟 편 소설이 실려 있다.
한글에는 한 글자마다 주문처럼 큰 힘이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단단하고 작은 몸 안에 아주 많은 의미를 끌어안고 있어서,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느새 그 속에 숨은 이야기들을 상상하게 되곤 합니다. 소설은 그 글자들을 드문드문 징검다리처럼 이어 붙여, 한 발자국씩 돌을 밟고 따라올 사람들을 내가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 속으로 인도하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작가의 말 中) 한 글자만으로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지 알 수 없다. 목차를 훑어보며 호기심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 강한 인상을 준다. 소설은 소설가 혼자 쓰는 것이 아니라 독자와 함께 완성되는 것이다. 여운을 주는 것이 좋다. 제목이든 내용이든 그 무엇이든. 스스로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주어야 내 머릿속에서 글을 이어간다.
삶에 붙잡혀 자신을 놓쳐버린 지금 여기, 우리 이야기 휘 휘, 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모두 불행해졌다. 종 누이는 집안의 유일한 계집이고 그러므로 우리의 종이었다. 홈 교실 안에서는 시체 냄새가 났다. 개 "나는 사람이 아니야. 개야. 이 망할 놈들아." 못 왜 저 여자와 결혼을 했을까. 톡 그때, 내가 떨어뜨린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잠 불면증이란 고양이 같은 질병이다. 초 심지가 뜨거운 초의 마음으로 꼿꼿이 선다. (책 뒷표지 中)
소설은 사실 '진실을 담은 거짓말'에 가깝다는 생각을 합니다. 반대로 현실은 '거짓을 담은 진실'에 가깝고 말입니다. 그렇게 소설과 현실은 거울을 두고 서로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 사이를 이어주는 것이 바로 글자인데, 글자들은 모두 개성이 강하고 힘이 아주 세기 때문에 왕왕 이리저리 움직이며 그 모양과 의미를 달리하는 위험한 존재입니다. 나를 소설과 현실의 경계에서 비틀거리게 만들곤 합니다. 그래서 나는 자주, 아슬아슬하게 금을 밟고 서 있는 기분이 듭니다. (작가의 말 中) 있을 법한 세계, 존재할 듯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소설이다. 진실과 거짓을 떠나 현실 세계에서 충분히 볼 수 있으리라 생각되는 것이다. 여덟 편의 단편 중에서 어느 것을 먼저 선택해서 읽어도 상관 없을 것이다. 단, 무방비 상태로 읽어나가다가 마음을 훑어내리는 이야기를 만나기도 하니 마음의 준비는 해두길 바란다.
손솔지 작가의 소설은 읽는다는 행위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 전작《먼지 먹는 개》에서도 그랬고, 이번에《휘》에서도 그렇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떠올리고 생각해내며 사색에 잠길 수 있도록 한다. 현실을 직시하며 사색에 잠기는 시간이 소설의 연장선이 되어 여운을 준다. 파닥파닥 뛰는 활어의 느낌이랄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야생마의 느낌이랄까. 소재의 신선함, 정형화되지 않은 소설이 주는 느낌은 독특한 세계로 안내한다. 한 글자가 주는 강렬함을 잘 붙잡아서 상상력을 더해 이야기를 풀어간 소설을 보고 나니, 아무래도 작가는 계속 소설을 써내려갈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작가의 다음 소설도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