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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한국사회에서 미국의 상류사회를, 달리 말하면 뉴요커를 동경(憧憬)하는 풍조가 생겨났다.
가십걸(Gossip Girl)이나 섹스앤더시티(Sex and the City) 에 나오는 패션과 상류층의 삶을 무작정 동경하는 이들은 굳이 어렵게 찾지않으려 하더라도 주변에서 넘쳐난다.
물론 가십걸(Gossip Girl)이나 섹스앤더시티(Sex and the City)를 시청하는 사람들이 잘못된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을 뉴욕의 전부라고 믿는 사람들이 잘못된것일뿐.....
미드를 시청하고 미국내 상류층의 삶에 대리만족을 느끼는 그들을 보면서 그들에게 뉴욕이란 과연 어떤존재일까하는 생각을 해본적이 있었다. 섹스앤더시티(Sex and the City)에서 사라제시커 파커나 킴 캐트럴이 입었던 옷과 드라마속 대사까지 줄줄 외워대며 드라마속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에 침튀겨가며 환호하는 이들도 오프라인과 온라인에 너무많아 말하기가 귀찮을 정도다. 오죽하면 럭셔리제너레이션 [Luxury Generation]이라는 웃지못할 말도 생겨났을까! 주(註) - 명품소비를 통해 자아의 정체성을 찾는 세대.(네이버 백과사전 인용)
오래전 미국내수용 분유인 엔파밀(enfamil)과 씨밀락(similac)을 두고 미국내에서 백인 상류층과 유색인종간에는 특정브랜드를 주로 먹인다는 이야기를하는 주부들을 실제로 여러번 본적도 있고 정말 기가찬것은 방송에서도 동일부류 주부들의 유사한 이야기가 방영된적이 있었다.
근거도 대지 못하면서 못하면서 데이비드 레터맨(David Michael Letterman)쇼는 수준이 높고 한국의 예능프로그램이나 토크쇼는 수준낮아서 못보겠다는 한심한 이들도 여러번 보았다. 무작정 미국상류사회에 대한 동경(憧憬)을 품고서 이민을 꿈꾸는 사람이나 창피(猖披)도 모르고 얼굴에 철판깔고 여행비자로 원정출산을가서 불법체류로 미국현지에서 아이를 분만하고 태어난 자신의 아이에게 미국시민권을 선물했다고 좋아하는것도 모자라서 주위에 자랑까지 하는 사람들.... 그들은 정말 모르는 것일까?? 한국사회에서 비교적 중산층이상으로 전문직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도 미국이민후 세탁소나 슈퍼운영 또는 단순직으로 일하는 사람들도 많다. TV에서는 한국인 출신의 정치인들이나 교포사회의 밝은면을 보여주는 장면이 많지만 실상은 과연 어떨런지?? 하지만 그들을 탓할수만은 없는일이다. 세상에 품위있고 부유한 생활을 꿈꾸지 않는 이는 없을것이다. 하지만 겉으로는 황금으로 포장된것 같이 보이는 뉴욕의 실상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본 한국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런지 의문이다. 명품옷과 향수 고급레스토랑에서의 식사 고급자동차와 화려한 파티문화 뒤에 숨은 사회적 빈곤과 약자들이 공존하는 뉴욕에 대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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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본문중 브런치를 즐기며 레스토랑에서 한가로운 여가를 보내는 시민들과 주로 이민자층이 차지하고 있는 법으로 정해진 최저임금도 보장받지 못하는 레스토랑 근로자들의 사진 뉴요커를 무작정 동경하는 사람들중에 본문에 소개된 내용처럼 화려해 보이기만 하는 뉴욕인구의 20%이상을 절대빈곤층이 차지한다는것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과연 몇%나 될지 의문이다. 자유와 기회의 땅이라는 미국은 적어도 아직까지는 가로열고(이민자 제외)라는 말이 적절해 보인다.
본문중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내용중의 하나가 유니온 광장에는 있지만 서울 광화문 광장에는 없는 그것? 이었다.
정말 저자의 말처럼 지금의 광화문 광장에 가장 잘어울리는 것은 전의경이다!
왜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건축물을 자신의 업적으로 생각하는것일까?
이에 대한 이야기는 일단 접고 내용중 개인적으로 흥미를 끌었던 부분은 양키스에 관한 내용이었다.
오래전 양키스의 에이스 데이비드 콘의 변화구에 대해 거짓말 좀 보태면 그의 마구같은 스플리터나 커브를 보면서 야구에 흥미를 느꼇던 적도 있었지만 예나 지금이나 양키스의 돈으로 우승을 사려는 선수영입과 구단운영은 마음에 들지않는다.
이런점에서는 축구의 레알마드리드와 비슷하다. 선수구성이야 리그 올스타급이지만 팀웍이라는고는 찾아보기 힘든 모래알같은 팀말이다.
미국국민은 아니지만 화가나는 것은 15억 달러의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신축한 양키 스타디움이 면세채권이라는 세금보조로 지어지고 좌석수를 줄이면서 고급좌석의 가격을 높이는 책에서 언급하는 "야구를 좋아하는 팬보다 고급소비자에 초점을 맞추는 정책"이라는 점이다.
그뿐인가 미국의 대다수의 구단들이 경기장 신축이나 세제감면 혜택등을 주지않으면 타지역으로 연고를 옮기겠다고 지방정부를 협박하고있다는 내용또한 야구팬의 한사람으로서 짜증나는 사실이었다.
이부분에서 정말 화가나는 것은 미국의 작게 말하면 뉴욕시의 정책도 양키스와 크게 다를바 없게 보인다는 것이다.
서민과 부자가 공존하는 사회가 아니라 부자를 위한 사회, 서민이나 빈곤층은 사회적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이 그들이 말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의 실체가 아닐까??
가십걸(Gossip Girl)의 상류층 자제들이 다니는 명문고등학교와 미국의 아이비리그(Ivy League) 를 동경하는 이들도 주위에 넘쳐나는 실정이다.
대출을 받아서라도 자녀를 초등학교부터 유학을 보내거나 안되면 고등학생도 되기전에 어학연수라도 보내고 싶다는 사람들도 주변에 (당연히 한국에서) 부지기수이다.
주변에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민을 가서도 현지학교에서 한국식 치마바람?(촌지나 우리아이만 잘봐달라는 청탁)을 일으켜서 한국을 국제 망신시키는 일도전혀 아랑곳하지않는다고 한다.
가끔씩 다큐에 나오는 중퇴의 왕국이나 범죄의 도시(범죄율이 높은) 뉴욕에 대한것은 관심도 없으며(관심이 있을때는 미드속에서의 과학수사물정도의 가십거리정도) 금새 상류층의 부유한 판타지에 황홀해진다.
본문 내용처럼 같은 뉴욕에 속하지만 같다고 할수없는 맨하튼과 브룩클린의 동떨어진 삶처럼.....
도서 표지에 "뉴욕에 관한 편파적 보고서"라고 표기되어 있지만 뉴욕의 실제로 20%가 넘는 빈곤층이나 미국 국립교육통계센터(NCES)에 따르면 뉴욕주 전체 성인의 22%가 문맹이라는 사실(2010년기준)에 대해서 뉴요커의 럭셔리한 삶만큼 관심이 가는 한국인은 과연 몇이나 될런지 궁금하다?(화려한 뉴욕의 겉모습에만 열광하는 사람들이야 말로 편파적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이 사랑하는 또는 동경(憧憬)하는 뉴욕은 정말 진짜입니까??
혹 판타지소설(fantasy novel)이나 가십(gossip)은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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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화려함과 풍요속에 감춰진 , 가리려고 하면 할수록 결코 감출수없는 진실을 보고 싶은 사람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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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여 전, 뉴욕. 이곳에 첫발을 디딘 청년은 휘둥그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믿기지 않는 눈치다. 변화를 목적으로 두지 않았던 여행객이자, ‘까르페디엠(carpe diem)’을 외치며 순간을 즐기는 것에 초점을 둔 그는, 사진 속 뉴욕이 제 눈앞에 펼쳐지자 그만 정신줄을 놓고(?) 말았다. 말하자면, 뻑 갔다는 얘기다. 짧은 시간, 뉴욕에 사는 친구와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곳만 다니고, 좋은 것만 먹고 마셨으니, 좋을 수밖에. 이방인에게 뉴욕은 더할 나위 없는 별천지였다. 뉴욕은 먹기 좋은 솜사탕이었다. 맞다. 인정해야겠다. ‘관광객의 시선’으로 경험한 뉴욕이었다. 표백제로 말끔히 얼룩이 탈색된 뉴욕. 고작 여행을 떠나 잠시 스친 뉴욕에 내 로망을 던졌다. 물론 인정했다. 여행하는 이방인의 찰나적 도착증에 가깝다는 것. 정작 도시의 속살은 알지 못한다는 것. 휘황찬란함과 빛나는 문화예술 역시 노동자들이 지탱하고 있으리란 것. 그렇다고 그 로망을 압도할 순 없었다. 내 짧은 뉴욕은 ‘신자유주의의 중심 요새’라는 강박적 관념을 일순간에 날릴 정도로, 나를 휘감았으니까.
영화, 뉴욕을 만나다. 그해 겨울, 뉴욕으로 떠나기 전 읽은 책이 『안녕 뉴욕』. 저자 백은하(의 글)를 흠모했던 나로선, 그녀가 기자질을 털어내고 훌쩍 뉴욕으로 떠나 영화와 함께 한 408일이 참 좋았다. 그녀처럼 온전하게 털어내지 못했지만, 그 휴가의 끝물에는 털어내야 할, 아니 털어내기로 작정한 직장이 있었다. 영화로 뉴욕을 즐긴 그녀만큼은 아녔지만, 뉴욕의 여느 명소 따윈 필요 없어! 책이 말하는 곳이 곧, 나의 발걸음이었다. 아는 사람은 알잖아! 내 심장을 건드린 영화의 장소에 발을 디딘다는 것. 그건 곧 영화가 다시 내 눈앞에 펼쳐진다는 것과 동의어 아니던가! 아, 물론 아니면 말공. ^^; 뷰티풀 워킹 뉴욕데이즈! 뉴욕촌놈, 그래도 뉴요커였던 친구 녀석과 싸돌아다녔다. 녀석은 집과 회사밖에 몰랐던 전형적인 워커홀릭이었다. 당시 나의 뉴욕행 덕분에 뉴욕을 함께 엿본 녀석이 더 놀랬다. 아니, 뉴욕에 이런 것이~ <세렌디피티>의 흔적을 찾아, <인 더 컴퍼니>의 사랑이 꽃피는 커피하우스 등을 찾아다니며 황홀했다. 그저 나는 여행객이었으니까. 나는 어떤 일로부터도 구속당하지 않을 휴가를 받은 상태였으니까. 아, 걷고 또 걸어도 아름다운 뉴욕의 날들이여. 그땐 그랬다.
![]() 뉴욕, 한국을 삼키다. 그건 틀린 말이 아니다. 뉴욕은 하나의 유토피아처럼 채색되고 있었다. 그건 점점 더 가팔라지고 있다. ‘뉴욕 스타일’이라는 이름의 유령(?)도 배회했다. 한국 사회까진 몰라도 적어도 내가 발 디딘 서울은 그렇게 뉴욕에 목을 매고 있었다. “현란한 형용사에 매혹당한 한국 사회는 뉴욕의 창조성, 예술, 문화, 라이프스타일에 관한 이야기에만 취해 있다.”(p.8) 다소 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지만, 뉴욕에서 좋은 기억만 품고 온 나로선, 달리 방법이 없었다. “나도 며칠 가봤는데, 뉴욕 정말 좋더라.” 내가 뉴욕의 속살을 제대로 맛보기라도 했어야지. 관념이야 뻔했다. 뉴욕 역시 먹고사는 게 전쟁이며, 각국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의 삶은 고달프고 힘겨울 거라는. 안타깝게도 내가 헤매고 다닌 뉴욕의 거리와 시간은 내게 그런 삶을 보여주지 않았다. 아니, 내가 보질 못했다. 나라고 다를 바 있었겠나. 나는 고작해야 뉴욕의 빛나는 문화예술의 현장을 목도하고 싶은 이방인이었다. 브로드웨이 뮤지컬, 첼시의 화랑, 타임스광장, 센트럴파크, 소호 등. 월스트리트 정도만 빼고는 내게 뉴욕은 뷰티풀, 판타스틱, 어메이징 시티였다. ‘시크한 디즈니랜드’, 뉴욕. 그럴듯한 묘사다. 어른들의 로망이랄까. 시크함이라는 표현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도시. 뉴욕은 그렇게 소비되고 있다. 최소한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어쩌면 나도 그 스타일 소비에 작게나마 일조했을지도 모르겠다. 뉴욕 꼭 가보라며, 주위를 선동하면서 환상을 주입한 죄! 뉴욕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진짜 뉴욕을 구성하는 존재들에 대해선 쥐뿔도 모르면서. 나는, 반성해야 한다. “한국 사회가 만들어낸 뉴욕은 ‘하이퍼뉴욕 hyper-New York’이라고 할 만하다. 우리는 대중문화․잡지와 신문을 통해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뉴욕을 경험하지만, 그 경험의 과정은 데이비드 하비가 말한 것처럼 “기원의 흔적을 철저하게 은폐시키며, 그것들을 생산해낸 노동과정이나 생산에 내포된 사회적 관계들의 흔적도 모두 은폐시킨다.”(p.29)
『너 자신의 뉴욕을 소유하라』. 이 책의 미덕은 이렇다. 스타일로서만 존재하던 뉴욕에 어떤 피가 흐르고, 속살을 벗기면 어떤 아픔이 있는지, 무엇이 진짜 뉴욕을 지탱하는지를 알려준다. 그러고 보니 뉴욕에 들렀을 때, 그 표피에 압도당한 탓에, 나는 몰랐다. 커피 한 잔을 마실 때, 커피를 뽑아주는 사람, 커피를 건네주는 사람, 커피 값을 계산해주는 사람, 그들도 나 같은 노동자임을. 그들은 투명인간이 아니었다. 나처럼 기쁨과 슬픔을 느끼며, 행복 하고 싶고, 꿈을 꾸고 가꾸면서 하루를 버티는 노동자. 어디 매장이나 식당을 들러도 역시나 비슷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노동자들. 진짜 뉴욕의 모습이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은 ‘뉴욕 (라이프)스타일’이 아닌 뉴욕의 속살을 볼 수 있다. 고난의 시절을 거쳐 뉴욕에서 잘 나가게 됐다는, 가령 한국인의 뉴욕 유수의 투자은행(IB) 입문기였던 『서른 살, 꿈에 미쳐라』와 같은 성공 서사로 포장된 뉴욕 소유담, 아니다. 꿈도 아닌, 어떤 목표에 도달한 것을 놓고선, 성찰이나 세계에 대한 고민 없이 ‘나처럼 따라하면 돼’라고 읊조렸던 어이없던 기록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생생한 뉴욕. 눈에 띄지 않지만, 뉴욕을 진짜 지탱하는 것에 대한 사실적 기록이다. “…소비자본주의 시대 한국에서는 뉴욕에서 우아한 라이프스타일을 누리는 한국인 뉴요커의 도전과 좌절, 성공과 실패, 자아 찾기 식의 서사가 많아졌다. 아이비리그에 도전하는 사람들의 꿈과 노력이 부각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러나 불안정한 노동시장에 뛰어들어야 하는 이민자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다.”(p.261) 브런치의 사회적 의미를 아는가. 이전까지 생각해보지 않았다. 브런치. 우리가 ‘아점’이라고 부르던. 그런데 브런치라고 호명함으로써, 그것은 다른 의미를 띤다. 이른바 ‘구별 짓기’가 이뤄진다. 아점을 먹는 사람과 브런치를 먹는 사람 사이. 생각해보라. 그 이미지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웃긴 거다. 브런치는 하나의 뉴욕 라이프 스타일을 대변하는 ‘상품’이 됐다. 그러나 저자는 브런치가 뉴욕의 보편적 문화도 아니요, 중간계급 이상의 전문직업인, 예술가, 대학생 등 충분한 여가시간과 경제적 능력을 가진 계층이 선호하는 것임을 분명히 밝힌다. 브런치가 곧 뉴욕, 아니올시다.
뭣보다 브런치를 내놓는 사람들은 노동자다. 그 사실을 우리는 잊고 있다. 한국의 많은 사람들에게 의식적이건, 그렇지 않건, 하나의 계급적 상징이자 남과 구별 짓기 위한 기호로 쓰이는 브런치. 그 우아하고 맛있는 브런치를 내놓기 위해 누군가는 일해야 한다. 저자는 말한다. “한 사람의 라이프스타일은 다른 사람의 노동을 통해서만 추구되고 충족될 수 있다. 식료품점에서 물건을 정리하거나 레스토랑에서 물을 따라주고 가는 히스패닉계 노동자들, 네일숍에서 손발을 다듬고 매니큐어를 칠해주는 아시아 여성 노동자들이 없다면 우리가 상상하는 뉴요커의 삶은 결코 있을 수 없다.”(p.46)
![]() 브런치의 가격이 비싸지 않은 이유가 있더라. 다른 도시보다 임대료가 높은 뉴욕임에도 레스토랑의 브런치 혹은 식사료가 다른 도시와 비슷하거나 낮은 이유는 바로 저임금 이주노동자 때문이다. 이들은 물론 뉴욕의 화려한 때깔과 매끄럽게 다듬어진 풍경 뒤에서 보이지 않는다. 디폴트임에도, 모두에게 쉽게 인식될 수 없는 비극. 그들이 자취를 드러내면, 브런치는, 뉴욕(스타일)은 없어지는 모순. 젠장, 일하는 사람들의 고단함이란. 커피노동자인 내게도 그것은 어쩌면 슬픔이다. 커피를 볶고 추출해서 손님에게 건네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한다. 커피 생산자들의 노고와 자연의 고마움을 인식하고 있지만, 나의 고단한 노동은 아마 베일 속에 가려있을 것이다. 커피 한 잔에 담긴 노동의 가치를 알아달라고 응석을 부리는 것은 아니다. 종종 커피 한 잔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에게서, “커피가 맛있다”는 말 한마디에서 커피 노동의 보람과 행복을 찾지만, 그것이 이 팍팍하고 부박한 현실의 삶을 바꾸진 못한다. 그저 그것은 버티고 견뎌야 하는 일일 뿐이다.
‘워킹푸어’가 떠올랐다. 뉴욕이나 서울, 이 커다란 도시에서 저임금 노동으로 유지되는 삶. 일하고 있지만,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 일할수록 가난의 덫에 더 강하게 묶일 수밖에 없는 노동자. 가난하다는 이유로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받아야만 하는 외로운 존재. 뉴욕이든 서울이든, 그곳이 제공하는 많은 삶의 기회는 그런 저임금 노동으로 유지되고 있음을 우리는 제대로 알고 있었던 걸까. “월스트리트의 부와 타임스광장의 대중문화, 소호와 첼시의 예술이 뉴욕을 활기차게 만들지만, 이민자들의 저임금 노동이 없다면 뉴욕은 제대로 굴러가지 않을 것이다.”(p.65) 이 말은 분명한 현실이기에 아프다. “이제 부지런히 일하던 이들이 도시의 주인임을 주장하던 시절은 지나가버렸다. 한때 사회민주주의적 도시를 경험했던 노동자들은 지금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냉혹한 시대를 살아간다.”(p.66) 저임금 노동자들이 없으면, 한 도시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을 거라고 확신함에도, 누구나 이에 동의할 것임에도, 누구도 그만한 대접을 하지 않는다. 뉴욕에서도 그렇겠지만, 한국의 어느 도시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여기, 뉴욕의 속살을 보면서 한국의 도시를, 당신과 내 노동의 실상을 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뉴욕은 그래봤는지 몰라도, 노동자가 한국에서 어느 한 도시의 주인이었던 적은 없다. 하긴 지금은 거기나 여기나 매한가지다. 비극은 그것. 워킹푸어 혹은 가난의 경계에서 외줄타기를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한 사회의 지탱 혹은 번영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임에도, 그들의 행복은 사회 전체에서 없어서는 안 될 부분으로 다뤄지지 않고 있다는 것. 그건 정혜윤의 말인데, 뉴욕의 저임금 이주노동자나 이 땅의 저임금 노동자에게나 마찬가지다. 며칠 전, 지방선거가 있었다. 『너 자신의 뉴욕을 소유하라』는 뉴욕에 어느 시장이 들어서는가에 따라 변화된 모습, 즉 뉴욕의 역사와 감성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도 알려준다. 흥미롭다. 내가 잘못 알고 있던 것도 책은 수정해줬다. 줄리아니가 범죄적 뉴욕을 바꿨다고 생각했었다. 그것도 하나의 이유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러면서 내가 발붙이고 사는 서울을 생각한다. 이곳의 시장은 앞선 4년 전과 같은 사람이다. 아마 삽질은 계속 될 것이다. 노동자를, 워킹 푸어를, 청년을 생각하지 않는 건 매한가지일 거라고 예단(!)하고 있다. 국가와 마찬가지로 지방 정부도 가난을 구제하고 약자를 지켜야하는 책임이 있지만, 나는 여전히 그 책임이 회복되지 않을 4년을 속단(!)하고 있다. 편파적인 생각이라도 어쩌겠나. 지난 4년의 학습효과다. 실은 걱정이다. 커피 노동자이면서, 서울 시장이랑 니 삶이 무슨 상관이냐고? 그렇게 묻는 당신에게, “당연히 상관있다”고 말하겠다. 지금 서울은 내 삶의 터전이고, 내 삶의 질은 도시 내 사람들의 관계 속에서 좌우된다. 르네상스 시장의 재등장은 기존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려는 사람들의 정치적 기획이 아직은 건재함을 보여준다. 변화가 필요하다는 열망이 들끓었지만, 아쉽게도 그것은 뒤로 미뤄졌다. 아마, 커피 노동자로서의 내 삶은 서울을 지탱할 의무가 없음에도 서울을 지탱하는 작은 한 축이 될 것이며, 내 삶을 향상시켜줄 의무가 있는 서울시는 언제 그런 의무가 있었냐는 듯이 말간 얼굴로 삽질을 계속할 것이다. ‘새로운 서울 만들기’라고? 그러면서 만든 구호들은 붕붕 떠다닌다. ‘세계 디자인 수도’ ‘명품도시 마케팅’ ‘한강 르네상스’ 등등. 그런데, 그게 좀 웃긴다. 서울에 사는 보통 사람들, 노동자들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말이 없다. 말만 번지르르하다. 서울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경쟁력을 높이겠단다. 브랜드 가치는 뭐고, 경쟁력은 또 대체 우리의 삶에 어떻게 삼투압할 건데? 그저 성과를 자랑질할 수 있는 수치에만 죽도록 매달린다. ““‘파리지앵’이나 ‘뉴요커’처럼 서울 시민도 서울이란 도시에 강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들겠다며 자신의 비전을 정당화하지만, 어떤 파리지앵이고 뉴요커인지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도시 마케팅에 수천억을 쏟아 붓고, 한강 인공 섬을 만드는 데 9백억을 들여 서울을 『뉴욕 타임스』가 선정한 ‘2010년 꼭 가봐야 할 여행지’ 3위에 올려놓는 성과(?)를 이뤄냈다.”(p.262) 광장이 필요해. 뉴욕의 광장에 대한 언급도 빠지지 않았다. 1910년대의 유니언광장. “우리는 혁명을 하기 위해 모였고, 계속 이야기를 나눴다.…… 유니언광장에서 말할 권리는 우리가 땀 흘려 버는 빵보다 더 중요했다.”(p.163) 광장에서 말할 권리와 개방성. 광장의 정신은 ‘Let It Be’라고 했다. 그런데, 당신과 내게 있는 광장에는 그 정신이 없다. 우리의 것도 아니다. “…광화문광장에서는 권력의 조급함과 강박증만 느껴진다.… 정치적 야심을 위해 만들었건 건축학적으로 실패작이건 시민들에게 주어져야 비로소 ‘광장’이 된다.”(p.170) 물론 뉴욕이나 여기나 마찬가지다. 이윤과 분리주의에 입각한 공공장소의 개방성 축소문제. “이런 현상은 뉴욕뿐 아니라 전 세계의 많은 도시에서 나타나고 있다. 정치인과 관료들은 어떤 특정한 인구를 끌어들이고 다른 특정한 인구를 배제하는 정책을 펼친다. 소비하러 오는 이들에게는 개방적이지만, 저항하러 오는 자들에게는 닫혀 있다. 돈 미첼은 공공장소에 대한 위협은 단순히 “공공장소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을 배제하고 사회적․문화적 다양성을 줄이는 관리와 디자인의 방식이다.”라고 주장한다.”(p.167)
![]() 다시 뉴욕을 생각한다. 지난 뉴욕 방문에서, 나는 ‘뉴욕’과 관계를 맺은 것이 아니었다. 진짜 뉴욕을 만드는 노동자들과 사회적 관계를 맺은 것이 아니었다. 특정 시공간과 인간 사이의 구체적 관계에 집중하지 못하고 뉴욕 스타일에만 현혹됐던 게다. 상품화된 라이프스타일, 즉 교환가치를 가진 기호에 홀딱 넘어가면서 뉴욕의 속살을 살펴보고 사유하지 못했다. 책을 읽고 난 지금, 뉴욕을 낭만으로만 인식했던 허약한 사유체질의 껍데기를 벗을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다시 뉴욕을 간다면, 스타일이 아닌, 생활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뉴욕은 미국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 말했고, 뉴욕 스스로도 그렇게 선언했다. “소설가 폴 오스터는 어느 인터뷰에서 “뉴욕이 미국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독립적 도시국가가 되는 것을 보고 싶다”라고 말했다. 그만이 아니라 뉴욕에 애정을 가진 많은 이들의 바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뉴욕에 사는 사람들은 ‘아메리칸’보다는 ‘뉴요커’라고 불리기를 원하고, 제국의 국민보다는 관용이 살아 있는 뉴욕의 시민이 되고 싶어 한다. 이들은 이민자와 이방인에 대한 관용의 정신이 뉴욕을 뉴욕답게 만드는 힘이라고 말한다.”(pp.342~343) 그러나 지금은 뉴욕이 그 뉴욕이 아니다. “그러나 ‘뉴욕다움’은 계속 사라지고 있다. 한 공연에서 부시 행정부를 풍자하던 코미디언이 이렇게 말했다. “이제 더 이상 뉴욕을 사랑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뉴욕이 점점 아메리카처럼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청중들은 오래된 농담 같은 그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뉴요커로서의 자부심과 미국인으로서의 자괴감이 뒤섞인 씁쓸한 웃음이었다.”(p.343) 관용은 휘발되고 법과 처벌을 강조하며 사회적 약자를 배재하고 추방하는 현실. 내가 있는 이곳의 지금이라고 다른가. 너 자신의 뉴욕을 소유하라! 이 책의 제목이 품고 있듯, 여기 나온 뉴욕도 뉴욕의 모든 것이 아니다. 편파적 보고서라고 일찌감치 선언하지 않았던가. 모든 뉴욕은 모두 편파적이다. 그게 뉴욕이다. 너의 뉴욕, 나의 뉴욕, 그들의 뉴욕. 저자는 뉴욕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일상인으로서 뉴욕을 전해줬다. 이방인이자 여행객으로 뉴욕을 살짝 맛보고 온 나의 뉴욕이라고 마냥 틀린 것은 아니다. 벗겨보지 못한 속살을 남겨뒀을 뿐. 그 속살의 일부를 저자가 전해줬을 뿐. 간혹은 그가 전하는 뉴욕의 흔적에 내 마음이 흔들렸다. 뉴욕은 여전히 내 기억의 숲속에 둥지를 틀고 있는 게다. 내게 한 뼘 정도는 넓어진 뉴욕, 언젠가는 그곳에 내 일상을 담아보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면 아마 내 세계는 두 뼘 정도 더 넓어지고, 내 우주는 더 많은 사람을 만나는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물론 그때도 여전히 나는 노동자로서, 뉴욕을 지탱하는 저임금 이주노동자로 살아갈 것이다. 그러면서 언젠가 내 자신의 뉴욕을 소유하는 날, 당신에게도 그 이야길 들려주고 싶다.
p.s. 책은 아쉽게도, 오타가 간혹 보인다. 아프리칸 이메리칸(p.56) -> 아프리칸 아메리칸 신보주수주의자들의...(p.203) -> 신보수주의자들의... 미국 국세청 규정의미국 국세청은...(p.240) -> 미국 국세청은...
2쇄 찍을 때 교정을 보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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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가정 먼저 떠오른 책이 조지오웰의 “파리, 런던의 밑바닥 생활”이었다. 마치 배경만 파리에서 뉴욕으로 옮겨 놓은 것 같았다. 거기에다 바바라 에렌라이흐의 “빈곤의 경제”을 거치면서 뒤로 갈수록 오웰의 “1984”가 떠올랐다. 우리가 알고, 부러워하고, 생각하던 찬란한 뉴욕의 밤, 현란한 네온사인의 불빛과 수많은 가계와 명소들, 하지만 뉴욕은 악사와 걸인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의 도시이기도 하다. 너무나 다른 모습들 이것 또한 진실이다. 뉴요커와 브런치라는 단어로 치장된 우리의 잡지, 신문들. 누가 뉴요커인지? 뉴요커는 문화소비가 일상화된 대중이 욕망하는 주체라고 정의된다. 우리는 뉴욕의 지적, 예술적, 문화적 흐름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한국적 수용을 모색하여 소위 소비와 관련된 부분만을 받아들여 문화, 예술도 그 자체가 아닌 소비의 도구(지적)로 편집하여 왜곡하는 현실이다. 관광객들이 보는, 만든 뉴욕은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한국사회가 만들어낸 하이퍼 뉴욕은 일부 철없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상상의 이미지이자 소비의 현혹이다. 미식가의 천국 맨해튼은 관광객들과 중상층에게는 천국이나, 유지하는 이는 천사가 아닌 저임금에 착취당하는 일꾼들이다. 뉴욕은 소득불평등이 가장 심각하고, 인종과 계층에 따른 주거지 분리(교외화로 인한 대도시 내부의 슬럼화로 도시의 게토)가 가장 심한 도시이다. 신자유주의속의 기업은 금융, 지식서비스 산업 위주의 경제구조를 전환하고, 글로벌화한 시장경쟁, 노동조합의 약화, 하청구조의 확대 속에서 노동비용 축소를 통한 이윤 추구한다. 미국은 이민자와 자유, 기회의 땅 그리고 아메리카 드림을 상징하지만, 개방적이라는 것이 빈손으로 건너온 가난한 이민자들에게 열려 있다는 뜻에 지나지 않는다. 뉴욕의 치안은 치안 범죄퇴치라는 목적을 넘어 경제성장에 기여하지 않는 하위 계층과 비생산인구를 통제하고 관리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사회 양극화를 가속화하고, 빈곤과 저항을 범죄화하는 현상, 자유주의적, 가부장주의, 기업과 상층에게는 무제한 자유를 하층과 저항자에게는 억압과 징벌을 내린다. 모든 것이 상품화되거나 상업화된다. 소호의 다양한 문화 예술과 로프트는 투박함, 이질성, 개방성 깊은 미학을 제공했지만, 도시저소득층 지역의 고급화로 고급주택지와 쇼핑지역으로 변했고, 문화와 예술이 상품화되어 버렸다. 유니언 광장은 정치적 저항의 상징이자, 중심지이나, 공공영역의 민영화라는 보이지 않는 싸움이 진행되고 있다. 센터럴파크는 처음부터 시민을 위한 공원으로 계획, 민주적 공간, 도심 속 전원풍경이며 공공장소에서 올바른 행위는 무엇인지 묻는 정치적, 문화적 행위들의 실험장이다. 공공부문 축소로 인한 사회적 공백을 자원봉사 활동을 메운다. 그럼 누가 이익을 보는 것 인가? 야구는 국민적 정체성과 관련된 스포츠이며 문화다. 하지만 양키스의 고급소비자에 서비스의 초점을 맞추는 경영 전략과 공적 자금을 이용한 스포츠경기장 건설. 왜 국민의 세금이 이런 곳에 쓰이는지. 학교는 중퇴공장으로 대도시 공립학교에서 저소득층 자녀의 70%만 4년 이내 졸업하고, 매년 120만명 중퇴해서 낙오학생방지법이 생겼다니. 이런 것들이 과연 효과가 있을까? 가정이 안정이 되지 않는 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일 것이다. 교육을 자본주의에 입각한 소비행위로 전락시켜 학교선택권을 가진 소비자로 교육과정에 참여하거나, 공립학교 민영화를 통해 시장 원리를 공교육 제도에 적용한다. 여기에 교사노조는 직업 안정성, 교사의 자율성 확보에 주력하고, 많은 학생을 절망으로 밀어 넣는 사회를 바꾸지 못한다면 어떤 교육개혁도 성공하지 못한다. 수많은 교육전문가들이 그들만의 방법을 제시하지만. “실패자는 자신의 교육관에 바탕으로 한 정책만이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 온다고 믿는다는 것” 기업의 교육 개혁 지원은 비판적 사고력을 가진 민주시민을 양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본적 직무를 수행할 정도의 독해와 수리능력을 가진 노동력을 창출하기 위한 것. “전쟁은 평화다”라니. 오웰은 언어의 악용은 거짓말을 진실처럼 보이게 하고 민주주의를 타락시키는 주범이라고 경고한다. 감시탑과 강력한 치안력은 9.11로 인한 테러와의 전쟁(시민의 자유에 대한 전쟁, 일상에서도 수행되고 대다수가 인지하지 못하도록 국가안보의 강화라는 외피아래 이루어질 뿐이다.)의 다른 모습이다. 미국에서 테러로 죽거나 다친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그보다 휠씬 많은 사람들이 범죄로 희생되고, 테러방지라는 목적으로 많은 군인들이 해외에서 죽는다. 그들은 무엇을 두려워 하는가? 젊은이들이 언론의 역할을 대신하는 데일리쇼(코미디)에 열광하는 것은 미국저널리즘의 무능과 태만을 보여준다 기존의 매체는 기업과 정치권력의 지배하에 있기에, 더 이상 정치권력과 기업을 감시하는 언론의 기능 하지 못하고, 오래 전 포기한 미국 언론의 현실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청취자들의 기부에 의해 운영되는 정의와 평화의 WBAI 커뮤니티 라디오에서 다양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복권은 고약하게도 고단한 삶을 위로하는 척하며 희망을 착취한다. 부자에게는 감세를 서민에게는 복지를 줄이고 대신 복권과 도박할 기회를 제공한다. 지금처럼 국가가 나서서 모든 사람을 노름꾼으로 만들려고 한 사회는 없었다. 우리는 이런 면은 아주 빨리 배우지요. 강원랜드와 로또 국가가 주도하는 도박산업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도박의 돈으로 배움을 지원한다니 뭐 담배나 술 가지고 세금 마련하는데 도박은 어때서. 서울의 광화문은 자유의 광장이기를 거부한 많은 사람들로 도시의 섬이 되어가는 것은 아닌지? 누구를 위한 곳인가. 우리에게도 프로야구라는 것들이 언제, 어떻게 생겨, 어떻게 국민들을 집어 삼켜 버렸는지. 신자유주의-뉴욕-편파적 보고서라고 하지만, 반쪽의 뉴욕을 잘 보여주는 책이다. 우리들이 부러워하는 화려한 뉴욕, 우리들의 욕망이 만든 뉴욕은 없다. 세상의 어디에던 존재하는 부와 빈곤 그리고 평등과 복지라는 이념들. 뉴욕을 통해 본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할까?
----------------------------------------- 이상한 부분: p. 240의 밑에서 10번째 줄 미국 국세청 규정의미국 국세청은 프로스포츠의 경기장 건설에 -> 미국 국세청 규정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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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TV나 신문 지상에서 ‘뉴요커’라는 말이 자주 오르내리고 있다. 뉴욕 스타일의 패션, 음식, 음악, 문화, 예술 등.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미국 드라마 ‘프렌즈(Friends)’나 ‘섹스 앤 더 시티(Sex And The City)' 등에서 그려지는 뉴욕은 그저 아름다고 화려하기만 하다. 편안하게 브런치를 즐기고 책을 보며 여유롭게 산책하거나 운동하는 모습, 넥타이를 반쯤 푼 채 일에 몰두하는 샐러리맨 등 언제부터인가 뉴욕이라는 단어는 세련되고 멋스러우며 깔끔한 이미지를 연상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뉴욕은 미국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세계의 문화, 예술, 패션, 금융 등 세계의 중심지로 많은 이들이 동경하는 도시다. 누구나 한 번쯤 방문하고 싶고, 살고 싶은 곳으로 꼽히고 있다. ‘뉴욕 스타일’은 이제 한국 사회에서 하나의 문화현상이 되었다. 뉴욕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입고, 여행하는 스타일을 소비하는 것이 시크(chic)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데 정작 뉴욕이라는 도시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나 성찰은 빠져 있다. 신자유주의가 휩쓸고 간 뉴욕이라는 도시의 진정한 모습은 들여다보지 못한 채, 우리 눈으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는 것이다. 뉴욕이 주는 이미지만을 소비하고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자신의 욕망을 뉴욕이라는 이미지로 대체하여 소비하고 있는 것이다. 지은이는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소비하고 있는 뉴욕이라는 이미지에 대한 한 번쯤 곰곰이 생각해 보는 시간을 주고 있다. 책은 ‘NEW YORKER', 'NEW YORK CITY', 'NEW YORK LIFE'등 세 개의 파트로 나누어져 있다. 먼저 NEW YORKER에서는 요즘 한국 사회에 불어닥친 브런치(brunch) 열풍, 복권, 랩, 힙합 등을 이야기 하면서, 지금의 화려한 뉴욕을 떠받치고 있는 워킹 푸어(working poor, 열심히 일하지만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근로 빈곤층), 인종차별과 사회적 약자를 배제하는 혹독한 현실을 그리고 있다. 우리가 받아들이고 있는 뉴욕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우리는 대중문화, 잡지와 신문을 통해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뉴욕을 경험하지만, 그 경험의 과정은 데이비드 하비가 말한 것처럼 “기원의 흔적을 철저하게 은폐시키며, 그것들을 생산해낸 노동과정인 생산에 내포된 사회적 관계들의 흔적도 모두 은폐시킨 것이다.”(본서 제29쪽 참조). 즉 한국 사회가 만들어낸 뉴욕은 장 보드리야르가 말한 것처럼 실재보다 더 실재처럼 재현된 하이퍼 뉴욕(hyper-New York)이라고 할 만하다 “우리가 아는 뉴욕 라이프 스타일은 실제 뉴욕에 사는 많은 사람의 이질적 삶의 결을 표현해내지 못한다. 한국 사회는 자발적으로 뉴욕 라이프스타일의 상품화 과정에 동참하여, 텅 빈 욕망의 상자 같은 ’뉴요커‘라는 기표에 세련됨, 쿨함, 시크함 같은 의미를 채워 넣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세계시민이라는 거부하기 힘든 언술로 그 상자를 단단히 묶고 있다. 뉴요과 뉴요커는 멋있어서 욕망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 욕망하기 때문에 더 멋있게 재현된다.”(본서 제71쪽 참조) 말이 상당히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NEW YORK CITY에서는 소호, 유니언 광장, 타임스광장, 센트럴파크, 줄리아니 시장, 양키스 등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예술적으로 충만한 공간이었던 소호가 경제논리에 의해 상업시설과 부자들에 의해 지배당하고, 시민들이 자유롭게 활보하고 여유를 즐기며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이야기할 수 있는 개방적 공간이 되어야 할 광장이 정치인과 관료들에 의해 어떤 특정한 인구를 끌어들이고 다른 특정한 인구를 배제하는 정책으로, 소비하러 오는 이들에게는 개방적이지만, 저항하러 오는 자들에게는 닫혀 있는 현실을 지적하면서, 현재 ‘세계명품도시’로 만들겠다는 한국의 서울이라는 도시와 광장을 빗대어서 현재의 정책에 대해 꼬집고 있다. 뉴타운 같은 개발과 브랜드 가치 극대화 전략으로 서울의 모습을 바꾸려고 한다면 사회적 양극화를 그대로 재생산하는 도시공간을 구축할 뿐이다. 아름다운 기부와 봉사활동으로 가꾸어진 센트럴파크는 우리도 한 번쯤 생각해볼 만한 모습이다. 줄리아니 뉴욕 시장은 ‘법과 질서’, ‘제로 톨레랑스’ 등의 정책을 통해 뉴욕을 재탄생시켰다고 홍보했지만, 이는 민주주의와 시민권의 공격, 빈곤의 범죄화, 사회적 약자의 추방을 불러 왔다. 이는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현재 우리 이명박 정부가 취임 초기부터 주장해오는 한국 사회의 법치질서와도 일맥상통하는 느낌이어서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뉴욕은 물질주의적이고 배타적인 미국적 삶이 아니라 다양성과 관용이라는 가치와 쿨한 라이프스타일을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뉴욕이라는 공간도 부자들과 상업주의에 떠밀려 가장 미국적이지 않은 곳이라고 생각했던 뉴요커들의 자부심을 흔들어 놓았다. 그런데 희안하게도 사회제도와 삶의 모든 면에서 미국문화를 이루어낸 한국은 독특함과 고유성을 잃어버린 뉴욕과 사랑에 빠져 있다. “사실 우리는 시크한 신자유주의 도시 뉴욕의 현실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욕망을 투사한 뉴욕과 뉴요커들 보며 사랑에 빠진 것이다. 마치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사랑에 빠진 나르키소스처럼 말이다.”(본서 제269쪽 참조)라는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NEW YORK LIFE에서는 학교교육, 감시시스템, 테러, 언론 등에 대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뉴욕 맨해튼의 한 사립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하는 텔레비전 드라마 ‘가십걸’과 브루클린의 공립학교가 배경인 독립영화 ‘하프넬슨’을 비교하면서 위기의 미국 교육과 교육개혁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현재 한국 사회의 교육 문제와도 많은 부분이 닿아 있어서 생각할 점이 많았다. ‘9.11 테러’ 이후 점점 거세어지는 감시체계, 그로 인해 백인보다 흑인이나 히스패닉계에 대한 불심검문이 몇 배나 더 이루어지고, 이슬람 커뮤니티에 대한 감시와 차별이 심해진 것은 안전한 뉴욕이 가진 또 다른 모습으로 조지 오웰이 쓴 소설 ‘1984’를 연상시킨다. 짝퉁 뉴스인 ‘존 스튜어트의 데일리 쇼’와 뉴욕의 커뮤니티 라디오 'WBAI'는 보도와 분석을 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을 왜곡하고 무시하며 정치권력과 기업을 감시하는 언론 자체의 본연의 임무를 져버리고 있는 한국 주류 언론의 행태에 대한 좋은 본보기가 되는 내용이 아닐까 한다.
요즘 서점가에는 각 도시를 소개하는 여행에세이가 베스트셀러가 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 여행객들의 눈에 비친 감상(感傷)과 주관적인 느낌이 대부분이다. 영국의 사회학자 존 어리가 말한 ‘관광객의 시선(tourist gaze)'으로 다른 세상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 책은 그와 같은 책과는 다른 시선을 담고 있다. 시크한 모습과 이미지로 다가오는 뉴욕을 무비판적으로 소개하는 일반적인 여행에세이가 아니다. 여행에세이라고 생각하고 읽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다. 신자유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뉴욕의 현실을 들여다 볼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뉴욕이라는 이미지를 소비하고 있는 현재의 한국 사회에 대해서 은근히 일침을 가하고 있다. 묵직한 주제를 뉴요커라는 최근의 트렌드와 매치시켜, 눈으로만 보이는 외형이 아닌 그 이면을 볼 수 있는 시선을 가져다 준 신선한 내용의 책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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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느낌을 뭐라고 해야할까, 뉴욕에 대한 적나라한 이야기가 담겨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한국인들이 뉴욕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부인할 것만 같은 이 먹먹함같은 느낌을. "이제 더 이상 뉴욕을 사랑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뉴욕이 점점 아메리카처럼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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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내내 '세계 디자인 수도' '명품도시 마케팅' '한강 르네상스' 등을 통해 서울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경쟁력을 높이겠다고 동분서주했던 오세훈 서울시장이 재선에 성공했다. 도시 마케팅에 수천억을 쏟아붓고, 한강에 인공섬을 띄우는데 9백억을 들여 뉴욕타임즈 선정 '2010년 꼭 가봐야 할 여행지' 3위에 입성해 서울의 질을 높이는 것과 서울의 보통시민들의 삶의 질과의 상관관계는 설명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저 서울이 유명해지면 대다수의 서울시민들의 삶의 질 또한 덩달아 높아질 것이라는 부스러기심리가 작용하고 있다고 해야할까.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오세훈 서울 시장은 부자들 동네라는 몇몇 곳을 제외하면 상대후보에 비해 낮은 지지율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보통 서울 시민은 부자서울 보다는 서민들이 살만한 서울을 희망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글로벌시티로의 부상을 꿈꾸는 오세훈 시장은 분명 부의 집중을 가속화 시키고, 도심을 고급화해 부동산 가격의 폭등을 유도하고, 기업하고 관광하기 좋은 도시로 중상류층과 부유한 관광객의 삶을 질은 높이고 보통시민들의 삶의 질과는 거리가 먼 양극화의 상징인 세계명품도시, 뉴욕을 벤치마킹하고 있다. 거기에 미국적 삶을 동경하는 한국인들은 스타벅스에 앉아 마치 뉴요커라도 되는양 보여지는 이미지로 현실의 삶을 감추며 동조한다.
한때는 미국에서 가장 급진적이고 민주적인 제도를 구축했다던 뉴욕은 1970년대 이후 사회적 연대와 관용, 복지의 담론을 거부하고 사회적 약자를 배제하고 추방하는 냉혹한 현실의 신자유주의의 무대가 되고 있다. 뉴욕이 '시크'해지기 위해선 그늘 뒤로 숨은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 우리가 현재 닮으려고 하는 뉴욕의 모습은 화려한 브런치 상을 받고있는 사람들의 모습이지, 브런치를 만들기 위해 땀흘리는 저임금 노동자의 모습은 아닌 것이다. 스포트라이트는 항상 무대위의 사람들에게만 비춰지듯 우리의 시각도 양극화된 사회경제적 구조의 밑바닥은 보지 못한다. 아니 보기를 거부한다. 누구나가 나는 브런치를 즐기는 무대위의 사람이라고 착각한다.
한 사람의 뉴요커가 있기 위해서는 다른 한 사람 혹은 여러사람의 숨은 노동은 필수적이다. 뉴요커로 자처하는 당사자 조차도 사실은 누군가의 라이프스타일을 위해 노동하고 있을 것이고, 그는 뉴요커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대신 세계에서 가장 비싼 수준의 커피값을 내기 위해 점심을 라면으로 떼워야 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뉴요커가 아닌데 뉴요커다운 라이프스타일을 꾸미고 싶은 내 욕망이 사실은 나를 좀먹고 있는 것이다.
자본의 축적을 위한 도심개발은 그 장소, 그 곳이 삶이고 생활이고 직업이던 사람들을 몰아낸다. 그들을 몰아낸 그 자리에는 화려한 상업시설말고는 들어설 것이 없다. 몰려난 보통의 사람들은 어디로 가야할까. 사실은 그들이 소비의 주체이고 사회를 굴려가는 실체들인데 그들은 몰리고 몰려 더이상은 서야할 곳이 없어지고 있다. 우리는 진정 뉴요커가 되고 싶은 걸까... 우리다운 것은 정말 부끄러운 것일까.... '2010 G20 서울 정상회의'가 다가오고 있다. 보여지는 서울을 위해 또 얼마나 많은 서민들은 뒤로 숨어야 하는 걸까. 보여지는 서울이 아닌 살아가는 서울은 부끄러운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는 나는 진정한 '된장녀'도 되지 못하는 부끄러운 '워킹푸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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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mocracy Now! 이책의 마지막 장에 소개되는 라디오 프로의 제목이다. 미국은 민주주의 국가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소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 민주주의라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 그 라디오 프로그램의 주장이며 뉴욕의 현재라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뉴욕은 어떤 곳인가? 저자는 이책을 우리가 알고 있는 시크한 뉴욕이 정말 시크한 곳인가? 우리가 생각하는 뉴욕의 시크함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으로 시작한다. 뉴욕이란 이름은 세계의 변방에 사는 우리에게 세계의 중심을 말하며 중심의 라이프스타일을 말하는 곳이다. 뉴욕 스타일, 뉴요커가 즐기는 것이란 말은 최고의 것을 말하고 창조적인 삶을 말하며 삶의 여유를 즐기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말하는 뉴욕 스타일이란 실체가 있는 것인가? 실체란 말이 지나치다면 그 실상은 무엇인가? 저자는 묻는다. 우리에게 뉴욕 스타일의 상징은 스타벅스라 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스타벅스가 최고의 커피는 아니다. 물론 질 좋은 원두를 쓰기 때문에 고품질의 맛을 내는 것은 사실이지만 맛이 최고이기 때문에 우리가 스타벅스에 가는 것은 아니다. 스타벅스라는 브랜드가 갖는 호소력은 미국식 소비문화의 호소력이며 미국의 아이콘인 뉴욕의 호소력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바로 그 소비문화가 우리가 열광하는 뉴욕의 실체라는 것이다. 뉴욕 스타일이란 말이 상징하는 라이프 스타일은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다. 60-70년대 반문화와 반전운동을 주도했던 베이비붐 세대의 개성을 중시하는 라이프 스타일이며 ‘뉴욕’이란 잡지에 소개되었던 그들의 감수성이 상업화된 문화이다. 그 문화는 살만한 경제적 여유가 있는 계층의 문화이다. 그러나 그 문화가 가능하게 된 기반은 뉴욕의 특성인 다양성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싶어한다. 힙합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저자는 본다. 힙합이 태어난 것은 흑인들의 게토였다. 흑인들은 자신의 삶의 고단함과 울분, 절망을 거리에 모여 몸으로 표현했고 재즈가 그렇게 태어났듯이 힙합은 그들의 거리 문화에서 태어났다. 뉴욕의 힘은 바로 그런 소수의 약자들이 만들어낸 것이며 그 힘이 가능했던 것은 다양성을 관용하고 포용하는 여유에서 나왔다고 저자는 말한다. 주류 백인은 1/3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흑인과 히스패닉 아시아계의 소수인종들이 모여사는 곳, 미국에서 가장 다양성이 넘치는 곳인 뉴욕의 매력은 그 다양성이 뿜어내는 힘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다양성에 대한 불관용이 뉴욕을 지배하게 되면서 뉴욕은 갈수록 다른 글로벌 시티들과 다를 바 없는 곳으로 바뀌고 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예를 들어 소호 지역을 보자. 소호지역은 원래 공업지역이었다. 거주구역이 아니기 때문에 임대료가 싼 곳일 수 밖에 없었고 뉴욕의 살인적인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는 가난한 예술가들이 작업실과 거주지를 겸하는 곳을 찾아 소호 지역에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이곳은 예술가들의 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파리의 몽마르트 거리가 그렇게 되었듯이 예술적 분위기라는 것이 상품화가 되면서 소호 거리는 돈 있는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임대료가 올라가면서 정작 예술가들은 다른 곳으로 쫓겨가게 되었다. 소호 거리의 변화는 돈의 논리가 뉴욕을 어떻게 획일적인 장소로 바꾸고 있고 다양성이란 뉴욕의 힘이 어떻게 자본화하면서 파괴되는 지를 보여주는 예이다. 소호거리의 역사는 부동산 시장의 논리니 어쩔 수 없다고 할 수 도 있다. 그러나 70년대 이후 미국의 보수화는 뉴욕의 다양성을 확실하게 파괴해가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빈민층에 대한 복지가 갈수록 줄어들고 약자일 수 밖에 없는 그들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사라져 가면서 시장에서 실패한 자는 무능한 쓰레기일 뿐이며 위험한 범죄자 후보일 뿐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해져 갔다는 것이다. 줄리아니 시장이 벌인 범죄와의 전쟁은 그런 분위기를 대표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9.11 사태로 그런 분위기는 더욱 강해지기만 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러한 불관용의 시선이 어떻게 뉴욕의 다양성을 죽이는지, 다양성이 넘치는 리버럴의 도시로 불리던 뉴욕이 어떻게 다른 미국의 도시와 마찬가지로 바뀌고 있는지 이책에서 보여주려 한다. ‘시크한 신자유주의 도시 뉴욕에 관한 편파적 보고서’란 이책의 부제는 이상에서 요약한 내용을 짧게 요약하고 있다. 이책은 뉴욕의 매력에 대해 말하는 책이 아니다. 더더군다나 지금이 뉴욕의 멋진 곳을 탐험하는 책도 아니다. 이책은 미국의 보수화가 뉴욕에선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그 결과를 왼쪽에서 바라본 음울한 보고서이다. 그렇다면 이책의 가치는 무엇인가? 이책의 가치는 위에서 말한 저자의 목적이 얼마나 이루어져 있는가에 달렸다고 할 수 있다. 400페이지에 가깝고 그 페이지의 상당지면을 컬러 사진으로 채우고 있고 가능한 뉴욕의 다양한 거리 모습을 담아내고 있는 이책은 어느 정도 저자의 의도를 실현하고 잇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책은 데이비드 하비의 ‘파리 모더니티’와 같은 체계적인 관점이 결여되어 있다. 뉴욕이 어떻게 바뀌고 있다는 현상은 생생하게 소개하고 있지만 그 현상들 너머에 저자가 신자유주의라고 요약하고 있는 본질적인 흐름은 애매모호하게 암시하는 수준에서 넘어간다. 결국 이책은 현상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뉴욕을 60년대부터 지금까지 역사적 흐름 위에서 살펴보는 장기적 시선과 뉴욕 구석구석의 다른 책들은 다루지 않는 어두움을 훑고 잇다는 점에서 이책의 가치는 충분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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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정말 지겹다 못해 싸보이기까지하는 뉴요커, 파리지엥;;
별 하잘 것 없는 것도 뉴요커라는 말을 붙이는 상술이 판을 친다
게다가 그 상술마저도 드라마에서 나오는 판타지같은 뉴욕...
게다가 서울을 뉴욕처럼 세계도시로 만들겠다는 포부들까지...
정말 상술에서 써먹는 뉴욕 같을까...
그냥 뉴욕을 동경하는 이 분위기에 따라가기 보다는
뉴욕이 왜 세계도시인지 뉴욕 자체를 편견없이 알고 싶었다
그 점에서 이 책이 맘에 들었다
뉴욕 그 자체를 소개하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지금 그렇게 뉴욕을 따라가는게 왜 문제인지
그 환상의 뉴욕도 지금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제대로 까발려 주는 시원함
처음에는 미드처럼 브런치를 먹고 파티를 즐길거라는 환상
그런 완벽한 모습을 한 뉴요커들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 화려함을 유지시키기 위한 뉴요커들도 존재한다는 사실
뉴욕은 화려하기만 한게 아니라 그만큼 불평등한 도시라는 것
뉴욕이 화려해지면 화려해 질 수록
뉴욕은 내국인을 위한 도시가 아니라 외국인을 위한 도시가 되버렸다
뉴욕 복지를 위한 복지기금을 복권으로 대체하면서
하지만 복권으로 인해 저급문화 양산과
빈곤을 벗어날길 없는 중하층 뉴요커에게
복지는 커녕 복권을 권하는 분위기...
테러로 인해 인종갈등과 강경한 정치태도
지하철의 무언가를 보면 신고하라는 분위기에 이유모를 압박감
그로 인한 강경하고 위압적인 경찰들과 보호를 위한 경찰에
보호를 받기 위한 CCTV인지 감시를 위한 CCTV인지 괴로운 상황
문화지구를 위한 소호, 자유로운 예술가들의 거리도
나름의 발전을 꾀한다는 게 내지인을 내몰아버리고 상류층을 위한 문화로
멋진 문화지구지만 결국 상류층을 위한 거리가 되버린 소호...
하지만 그럼에도 뉴욕은 세계적이다
누구에게나 개방되어있는 모두를 위한 공원과
그곳에서 자유롭게 나누고 진행되는 정치에 대한 토론들과 시위들
각자 자기만의 뉴욕을 위한 정책안을 들고오는 정치인들과
그런 정치인을 정말 날카롭게 찝어줄 수 있는 뉴욕의 매스미디어들
뉴욕은 화려한 만큼 불공평하고 그만큼 완벽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문제이자 치부를 모르는 척 하는 것이 아니라
다치부를 꼼꼼히 살피고 문제를 제기하고 부딪히면서 뉴욕을 만들어내가고 있다
완벽하고 멋지기에 세계적인 도시 뉴욕인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기 위해 가장 노력하기에 세계적인 도시 뉴욕인 것이다
그런 뉴욕을 그저 결과만 보고 겉껍데기만 보고 따라하는 것...
광화문에 나름 공원을 만들었지만
자유로운 시위와 토론이 아닌 전경들이 열을 맞춰서있는 공원
당장 시급 4000원으로 생활비는 커녕 존재조차 불가능한 상황에
우리의 치부를 들여다보려고 하기는 커녕
세계도시를 만들겠다는 내국인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외관만 뜯어고치고자하는 정책과
뉴욕처럼 날카로운 매스미디어의 부재를 알려줌으로 이 책은 끝을 맺는다
이 책을 통해서야
환상과 실제의 뉴욕의 차이를 통해
뉴욕을 환상만 바라보며 보려고 하지 않았던 한국의 치부를 들여다보는 기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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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아침, 햄버거를 입에 문채 바삐 걸어가는 회사원, 지금 한창 한국 중산층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브런치 문화, 패션의 도시, 소비의 도시 등 다양하다. 하지만 이 모습초자 뉴욕의 일부분일 뿐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모습만 기억한다. 나 또한 그런 사람들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저자는 글의 서문에 이렇게 쓰고 있다. 잠깐 저자의 말을 빌려쓰자면 매끈하고 깨끗한 거울로 아름다운 도시 뉴욕을 비추는 대신 투박하고 굴곡진데다 어쩌면 금까지 가기 시작한 거울 앞으로 독자들을 안내하겠다고 한다. 즉 시크한 신자유도시 뉴욕에 대한 저자의 편파적 보고서를 제시하겠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책을 읽기에 앞서 이 말에 참 공감이 갔다. 우리가 알고 있고 동경하는 도시 뉴욕의 숨겨진 이야기. 화려한 불빛아래 숨겨진 뉴욕의 진면목을 살펴볼 기회가 내게 왔기 때문이다.
꼼꼼히 책을 읽어 내려가면서 내가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 알 수 있었다. 다양한 인종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도시 뉴욕의 또 다른 면. 각계각층의 다양한 이민자를 포용하는 것 같지만 그 속엔 분명한 차별이 존재하고, 화려한 건물 한켠에 차지하는 홈리스, 풍요 속 빈곤 노동자 계층 등 이제껏 보려고 하지 않았던 뉴욕의 다른 면을 보게 됐다. 책에는 브런치, 센트럴파크 공원, 소호, 유니언 광장, 페허의 도시에서 태어난 힙합 등 다양한 뉴욕을 소개한다. 단순히 뉴욕을 여행 위한 가이드 책이 아니라 지금의 시크한 뉴욕이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을 70년대 신자유주의에서 찾고 있다. 자본축적을 통해 이룩한 상업무대에서 노동자계층을 도시 외곽으로 몰아내고 꺼지지 않는 뉴욕의 불빛을 위해 뒷골목에 숨어야하는 사회적 약자들. 그들이 있기에 지금의 뉴욕이 있고 뉴요커라 불리우는 사람들이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뉴욕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나라 서울이 생각났다. 몇 년 전 아름다운 도시 녹지공간 서울을 만들겠다는 일념하게 시작된 청계천 공사. 많은 사람들이 반발속에 시작됐지만 지금은 서울의 가장 유명한 관광지가 됐다. 하지만 그 뒤에 남모르게 눈물 흘려야해던 시민들이 분명 있었다. 우리가 그들에게 어떤 시선을 보내고 있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아름다운 도시 서울의 얼굴 뒤에 감춰진 또 다른 현실도 분명 서울의 얼굴이란걸 잊지 말아야하겠다.
언제부턴가 언론매체를 통해서 심심치 않게 흘러나온 말 “뉴요커”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고 때론 어설픈 흉내도 내곤했던 나 자신을 한 번 뒤돌아보게해준 작가에게 감사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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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자신의 뉴욕을 소유하라' 탁선호 2010
가벼운 여행 책 같은 제목 뒤에, 뉴욕과 미국의 정치, 사회, 현상에 관한 깊이 있고 유용한 정보가 있는 책. 뉴욕을 관광을 위해 전달되는 단순화된 이미지로 제안하지 않고, 도시가 그러한 이미지를 가지도록 해주는/만드는 사람들의 여러 얼굴을 보여준다. 뉴욕시장의 변천에 따라 달라져온 도시의 모습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 각도에서, 마주친 장소들을 그 꼭지로 삼아서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줄리아니 시장재임시 뉴욕이 기업, 중상류층, 관광객을 위한 도시로 탈바꿈시켰다는 이야기는 오세훈 시장의 서울을 떠올리기도 하고 씁쓸. 블룸버그 시장의 세금감면 혜택과 대형건설 프로젝트에 대한 비판, 학교 등급에 따른 교사교장 보너스 차등지급하는 뉴욕의 교육제도, 뉴욕의 매체, 성향, 인기있는 TV쇼에 대한 소개.
단순화한, 겉모습을 보고 도시간을 비교하는 것이 얼마나 피상적이고 얄팍한지 하는 생각이 새삼 든다. 도시를 움직이고 변화하지 않고 존재하는 사물, 건물들의 조합으로 보기에, 도시에는 사람들, 성향, 그들이 축적해온 도시를 살아가는, 이끌어나가는 방식이 다르기에 책 속의 뉴욕이야기는 조금 더 마음에 와 닿기도 한다.
글쓴이는, “우리가 아는 전형적 뉴요커는.. 열정적으로 일하고 즐기며 전투적으로 살아간다. 따라서 개인적 성공과 쾌락을 동시에 추구하는 인간형을 장려하는 신자유주의 시대 한국에서 ‘뉴요커’는 이상적 모델이다.” 라고 쓰고 있는 데, 한국에 다녀오며 드는 이런 저런 생각들과 더불어, 익숙해진 개인주의적인 뉴욕에서의 생활을 떠올려 보며 나는 여기서 어떤 강요된, 도시안 에서의 내러티브를 쫓아가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