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성과 여성. Sex 는 결코 위, 아래를 결정지을 수 없는 중립적인 개념이다. 하지만 이 차이는 실로 오랜 시간동안 형성된 가치 체계에 의하여 한 쪽이 다른 쪽보다 우월한 지위를 가진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는 사회의 주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은 으레 남자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빨래나 설거지를 하는 남성은 으레 여성의 일을 ‘돕는다’라고 표현한다. 이는 여성인 나에게 조차도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예전에 같은 내용의 글일지라도 남자 아이의 이름과 여자 아이의 이름을 쓴 후 그 글을 평가해보았을 때 전자에 대해서는 진취적이다, 논리적이다 등의 긍정적인 평가가 나온 반면, 후자에 관해서는 감정적이다, 논리의 비약이 심하다 등의 부정적인 평가가 나왔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었다. 주어진 두 글에 있어서의 차이는 단지 이름 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결과가 나타난 까닭은 무엇일까? 이는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남성과 여성을 평가하는 틀을 보여주는 결과인 것이다. 인구의 반은 여성이라고 하지만 우리에게 있어서 기준은 언제나 남성이었다. 남성의 언어가 사회의 공적 영역에서 중심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현실 속에서 여성은 성공을 위해 남성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 하지만 여성의 언어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더 나아가 이를 배우려 드는 남성은 없다. 이는 백인과 흑인, 영어권 국가에 사는 사람들과 비영어권 국가에 사는 사람들의 그것과 흡사하다. 하지만 특정 언어가 명백하게 우월하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언어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의 반영인 것이다. 유독 여성을 적대적으로 바라보는, 특히 성적 비하의 표현이 많은 것은 우리 사회의 여성을 바라보는 관점을 대변해준다. 같은 단어라도 남성을 지칭할 때 쓰이는 단어에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었던 성적 비하의 뉘앙스를 여성을 지칭할 때 쓰이는 단어에서는 어김없이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가 무얼까? 무심코 행해지는 성적인 발언들로부터 여성이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은 우리 사회가 여성의 성적인 매력, 재생산의 능력을 제 1의 가치로 여기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는 결코 의심 받아서는 안 되는 것으로, 경제 위기 등이 닥쳤을 때 여성을 가정 내에 머무르게 할 수 있는 좋은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기제는 각종 언론 매체를 통하여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어린 시절 보았던 교과서에는 여성을 하나같이 (치마를 입고 걸레질을 하거나 먼지를 털고 있는 등의)가사 노동의 주체로 그리고 있으나 이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 사회는 이런 전통적인 역할이 전복되려 하는 현실을 ‘위기’로 진단한다. 초등학교 교사의 여초 현상은 문제시 되지만 대학 교수의 남초 현상은 이야기되지 않고, 대학 신입생 중 남성이 많은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여성이 많은 것은 신문 기사 거리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체계는 남성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때로는 여성들도 사회가 강요하는 여성상에 너무도 익숙해진 나머지 시대가 요구하는 변화를 묵살하는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시각이 여성의 그것이 맞는지를 고민해야 된다는 것, 여성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사회적 성은 남성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의심해야 된다는 것이 조금은 어처구니 없으면서도 그것만이 여성의 언어로 여성의 세상을 노래할 수 있는 길이지 않나 생각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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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리뷰를 등록하신 다른분의 글 제목은 이 책을 읽으면서 통쾌하셨다고 표현하셨지만
언어속에 교묘하게 자리잡고 있는 섹시즘에 대해서 그 커풀을 벗겨버렸다는 점에서는 너무나도 통쾌했지만 그 사실을 하나하나 알아가면서 한 인간이 그 거대한 구조를 바꾸기엔 너무나도 나약하다는 사실 역시 깨달아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읽기가 될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모르고 지냈을때의 아가씨. 아줌마, 애기야 등등의 여성을 가리키는 호칭, 표현들이 현실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 넘치고 있고 바꿀수 없음에 , 또 제동을 걸때마다 같은 여자들에게서도 공격을 받는 상황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것이다.
부디 최소한 여자들만이라도 이 책에 씌여진 내용들을 읽고 알게 되었음 하는 바램이 든다. 적을 알아야 싸움도 할수 있을것이 아닌가.
지금 성차별 이데올로기의 처절한 싸움터에 있는 상황이라는 것도 모르는
대다수 여성분들에게 꼭 권하는 책이다. [인상깊은구절] 이렇게 말은 내면화된다. 여성자신이 차별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여성의 무의식도 여성을 차별하는 말로 구조화되어 있고 사고도 이런 말로만 가능하기 떄문이다. - 저자 서문중에서 - |
| 레이시즘이 인종을 구실로 유색인을 차별하는 것처럼, 성차별주의는 나쁘다고 저자는 말한다. 나쁜 정도가 인종차별보다 더 했으면 더 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고까지 한다. 그 이유는 이제 많은 사람들이 인종차별이 나쁜 것이고 없어져야 한다는 데 공감하고 인종차별을 없애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하고 있지만 성차별은 그것이 나쁘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이 주로 말하고 있는 언어 속에 감춰진 성차별이지만 폭넓게 계급, 인종, 지위에 따른 언어 사용에 관한 차별까지 짚어낸다. 차별적 요소에 민감한 사람도 흔히 놓치기 쉬운 언어적 차별은 생각외로 심각하다. 그리고 너무 '자연스럽'고 교묘해서 그것이 차별이라고 말하기조차 무색할 정도다. 가장 객관적인 언어라고 생각되는 사전적 정의는 오히려 차별을 구조화 시키고 공고히 하는데 큰 일조를 한다. 서울말도 분명히 방언의 일종이지만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전적 정의에 따라 '교양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일 뿐이다. 그래서 개그나 드라마에서 희극적이고, 튀는 인물은 다들 사투리를 구사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으로 인해 엔돌핀을 생성시킨다. 타인을 '수준미달'로 격하시키면서 얻는 즐거움은 이토록 빈번하다. 여성이 쓰는 말은 대부분 부정적으로 정의한다. 여성이 논리적으로 말하면 따지는 것이 되고, 부드럽게 말하면 나약한 것이 된다. 여성에게 강요된 것은 침묵이다. 말하는 여성은 그 직업이 무엇이든, 지위가 어떠하든 간에 '거센' 여자가 된다. 말하는 여성에 대한 테러는 모든 차별과 관습에 대한 저항의식과 문제의식이 있어야 할 곳인 문학계에서조차 빈번하게 아니 오히려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직장에서 '너' '야'라는 반말을 들음으로 인해 인격적 모욕감을 느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내 친구의 말에 나는 슬픔을 느낀다. 그들은 자신의 아내가, 딸이 당하는 차별에도 남성적 보호 이상의 의무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보호하는 이유는 여성의 인권을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지켜야 할 소유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언어적 차별이 여성에게만 행해지는 것은 아니다. 권력이 자신에게 있다고 느끼는 모든 사람들이 행할 수 있는 무지의 실수이기도 하고 고의적 압력이기도 하다. 식당에서 종업원에게 반말하는 손님은 '손님이 왕'이라는 말을 그대로 실천하는 인물이다. 나이 많은 사람이 어린 사람에게 (타인이라 하더라도)반말로 마음껏 꾸짖을 수 있는 권리와 심지어는 약간의 폭력까지 허용되는 것은 '나이'가 갖는 권력을 대부분이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외화더빙에서조차 여자는 남자에게 모두 존칭어를 사용하고 남자는 반말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보여주는 것인가? 이 책을 발견하고 읽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사소하게 놓치고 지나갈 만한 것들을 예리하게 짚어낸 저자에게도 박수를 보낸다. 여성학, 사회문제에 예민하게 반응하면 반응할 수록 삶이 피곤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모른다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들도 예민하게 느껴진다는 것은 분명 나를 '거세고 독한','여성답지 못한'여자로 몰아가겠지만 그렇다고 바보의 평안함을 바라지 않는다. 여성을 규정하는 말 중에 '백치미'라는 말을 혐오하는 나로서는 그런 평안함이 내 삶의 주인의 자리에서 나를 점점 쫓아낸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