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래 레퀴엠은 장례식이라는 행사에 쓰이는 곡이므로 짜여진 격식과 순서가 있습니다. 그러나 존 루터의 레퀴엠은 그 격식을 크게 지키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의 레퀴엠에서는 분노와 속죄에 관한 어두운 부분들, 일례로 [진노의 날] 같은 파트 등은 빠져 있지요. 그래서 그의 레퀴엠은 죽은 자에게 평안을 심어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느껴집니다. 수록곡 모두가 축복과 은총에 대해 이야기하며, 흔들림 없는 목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있지요. 이것은 심판과 자비의 극적인 드라마가 듣는 이들의 혼을 빼앗는 기존의 장송곡들과는 다름 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곡은 오직 죽은 자가 평화 속에서 쉬기를 바라는 마음 뿐이니까요. 수록곡들 중 창작곡 [The Lord is my shepherd] 는 원래 레퀴엠 형식에는 없는 곡으로, 존 루터가 이 아름다운 곡을 일부러 집어넣은 의도를 생각해 봄으로서 이 장송곡이 지향하는 분위기를 느낄 수도 있겠습니다. 완고하지 않아 부드럽고, 압도적이지 않아 친근하고, 뜨겁지도 또한 차갑지도 않은 따뜻한 분위기의 장송곡. 루터의 레퀴엠은 심각하고 무거운 부분보다는 [The Lord...] 처럼 밝고 아름다운 부분이 훨씬 더 빛나 보입니다. 아름다운 분위기가 포레의 레퀴엠을 떠올리게 하는 [Pie Jesu] 라든가, 지속적으로 상승을 지향하는 밝은 분위기의 [Sanctus] 를 보더라도 그 특징은 뚜렷이 나타나지요. 연주 역시 곡의 특징을 잘 살리고 있습니다. 우연히 이 곡의 다른 연주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음원은 알 수 없습니다만), 그 연주는 레퀴엠의 일반적인 무게와 특성을 살린, 꽤 중량급의 연주였습니다. 그러나 이 음반은 다릅니다. 풀 오케스트라 버젼의 반주가 훨씬 간략해진 소편성 (앙상블 버젼)으로 재구성되었지요. 때문에 때로는 상쾌하기까지 한 맑고 탄력적인 연주는 어떤 부분에 다다라도 절대 처지거나 무거워지는 일이 없으며, 밝은 부분에서도 직접 파워를 내서 분위기를 올린다기보다는 "다른 누군가에 의해 슬며시 끌어 올려지는 듯한" 행복한 부유감을 안겨 줍니다. 거기에는 여성 합창단원들의 목소리 (담백하고 청아한 분위기를 풍겨서 무척 좋습니다) 라든가 하프의 울림이 적당한 잔향을 받아서, 살짝 공중에서 떠도는 분위기를 내 주는 것이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좋은 연주를 뒷받침하는 녹음 밸런스의 승리! 따뜻하고 은총 넘치는 레퀴엠에 걸맞는 최적의 연주와 녹음이라 할 수 있지요. "최적"이란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건, 이 음반의 프로듀서가 이 곡의 작곡가인 존 루터이기 때문입니다. 작곡가 자신의 의도를 거의 완전히 반영한 연주와 녹음이라 할 수 있지요. 게다가 존 루터는 이 연주를 자신의 죽은 아들(교통사고로 사망)에게 바쳤으며, 어쩌면 그 점도 연주에 반영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두려움과 압박감을 갖게 마련이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에 거기에 대고 엄한 심판과 어두운 저승길을 떠올릴 사람이 있을까요? 죽은 아들을 가없이 보살피는 아버지의 따뜻한 마음이 전례없이 밝고 간결한 연주를 만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직 죽은 자가 평화 속에서 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이지요. 레퀴엠 외에 들어있는 곡들도 딱히 흠잡을 데 없이 좋은 연주들을 보여 줍니다. 특히 녹음 당시 나이가 스물 남짓한 오르간 주자들이 들려준 썩 좋은 연주는 부럽기까지 한 면이 있습니다. ^^; 레퀴엠보다 수록시간이 긴 보너스(?) 들이지만 하나같이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어서 돈 주고 음반을 샀다는 데 대해 뿌듯함을 느끼게 해 주지요. ^^; 개인적으로 [Come down, O love divine] 이 가장 마음에 듭니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해석, 그걸 확실히 소화해 낸 좋은 연주, 그걸 또 확실히 받쳐주는 좋은 녹음과 프로듀싱. 거기다 낙소스 특유의 장점인 가격! 또 거기다가 꽤 충실한 내지에 (왠일로) 스페셜 커버의 디자인까지!? 독하게 마음먹은 분이시라도 이 음반에서 약점을 찾는다는 건 힘들겁니다. 장담하건대, 이 음반은 대놓고 추천할 수 있는 몇 안되는 "물건" 중 하나입니다. 이 리뷰를 여기까지 읽으신 만큼만 관심을 가진 분이시라면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 물건입니다. Fortun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