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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행과 역설 Parallels & Paradoxes 다니엘 바렌보임, 에드워드 사이드(지음), 장영준(옮김), 생각의 나무 (현재는 마티에서 출간된 것으로 구할 수 있다. 역자도 바뀌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의 전투가 이어지고 있는 지금, 작년 내내 띄엄띄엄 읽었던 바렌보임과 사이드과의 대화를 담은 <<평행과 역설>>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유대인인 바렌보임과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아랍인(팔레스타인이 고향인) 에드워드 사이드. 이 둘의 대화는 여러모로 의미심장했다. 사람들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갈등을 떠올리면, 종교라든가 인종 갈등을 떠올리기 쉽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실은 세계 2차 대전의 희생자로서의 유대인에 대한 서구 사회의 일종의 책임감, 죄의식 등이 뒤섞여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만들어졌으나, 그 곳에 몇 천년 간 살아온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예루살렘은 기독교 사회에서도 성지이겠지만, 이슬람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제 도리어 이스라엘 유대인들에 대해 전 세계적으로 비판 여론이 높아지고 있으나, 우리 대부분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이 책은 정치적인 책은 아니다. 대부분 베토벤, 바그너, 그리고 음악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지만, 어쩔 수 없이 둘은 음악을 이야기하면서 음악 연주를 둘러싼 개인적인 의견을 나누고 이를 넘어서 예술과 정치, 역사와 차별, 그리고 정체성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우리의 삶이 가지고 있는 역설 뿐 아니라 평행 혹은 유사성까지도 함께 풀어보고자 했다. 자의식을 털어버린 채 그렇게 하는 것이 뭐가 잘못이겠는가. (사이드), 7쪽 책을 읽으면서 바렌보임과 사이드는 닮은꼴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 둘은 예술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설득력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지식도 갖추고 있었다. 또한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교류하면서 다양한 의견들과 주장, 일부는 서로 반대되는 방향을 향하고 있더라도 이 앞에서 자신의 의견을 체계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놀라운 것은 사이드보다는 바렌보임일 것이다. 세계적인 석학인 에드워드 사이드와 거의 동일한 수준에서 음악과 예술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는 바렌보임을 새롭게 알게 되니 말이다. 내가 읽은 것은 장영준 선생이 옮긴 <<평행과 역설>>(생각의 나무)이며, 지금 구할 수 있는 건 번역가 노승림 선생의 <<평행과 역설>>(마티)이다. 책을 읽으며 메모해 둔 것을 옮긴다. 노트를 보면서 왜 메모를 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해, 책을 다시 꺼내 살폈다. 음악 이론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하는 탓에, 그런 부분들은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했다. 그리고 바그너는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다. 올해는 이 책에서 언급된 여러 음악들을 다시 찾아 듣고 난 다음, 다시 읽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정말 근사한 선물과도 같은 책이다. 좋은 책이다. 우리의 정체성이란 고정된 장소와 붙박이인 어떤 물체가 아니라 끝없이 흐르는 것, 물처럼 흐르는 조수와 같다는 생각입니다. (사이드), 27쪽 내가 놀라웠던 것은 우리가 ‘타자’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가 하는 것입니다. (바렌보임), 34쪽 바렌보임: 팔레스타인 필하모니는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사이드: 전혀 못 들어보았는 걸요. 하지만 부모님은 들어보셨는지 종종 토스카니니가 카이로에서 팔레스타인 필하모니를 지휘했을 때에 대해 이야기하시곤 했어요. - 45쪽 아시다비피 음악은 다른 예술과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런 말을 사용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되풀이 되지 않는 점이지요. (바렌보임), 55쪽 사이드: 침묵에 도전하며 음을 연장시키는 한 가지 방법이죠. 당신도 그렇게 봅시니까?(사이드) 바렌보임: 그렇습니다. 그러나 음악은 여러 면에서 물리법칙에 대한 도전이죠. 그 중 하나가 침묵과의 관계입니다. 베토벤의 교향곡과 셰익스피어의 소네트가 크게 다른 점은 이런 것이겠죠. 물론 악보가 베토벤의 상상을 표기하는 기호에 지나지 않을 것처럼, 셰익스피어의 책에 씌어진 언어들도 그의 사상을 문자로 표기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셰익스피어의 글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은 셰익스피어의 마음 속은 물론 독자들의 마음 속에도 똑같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러나 베토벤 교향곡은 악보 위의 음들이 실제로 이 세상에 구현되는 과정에서 다른 요인들이 개입합니다. 다시 말해 교향곡 5번의 음들은 악보 자체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죠. (바렌보임), 71쪽 절대적 음악을 표현하는 진실한 방법은 소리의 세계와 그들의 관계 자체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렌보임), 103쪽 청음학이란 실내에서 나는 소리의 존재라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뜻합니다. 바그너는 그러한 개념을 진정한 음악적 개념으로 발전시켰습니다. (바렌보임), 160쪽 말을 바꾸면, 문자 그대로라는 말은 최소한의 거부에서 최대한의 거부라고 하는 양 극단 사이에 알맞게 적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음악에서는 가장 가치 있는 라인이 가장 저항감 있는 라인인 셈이지요. 그러므로 문자 그대로란 말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텍스트를 변형하는 문제에 대해, 템포에 대해, 강약법에 대해, 밸런스에 대해, 음의 길이에 대해 모두 이야기해야 합니다. (바렌보임), 171쪽 진정성이란 아시다시피 과거와 관련해 현재를 정당화하려는 개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내가 만일 이것이 진정하다고 말하면 이는 곧 내가 이것이 진실된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셈이지요. (사이드), 240쪽 아도르노의 논리는 이런 것입니다. 오늘날 음악이 혼을 빼놓을 정도로 복잡해져, 음악으로 하여금 사회의 반대축이나 균형죽과 같은 역할을 담당하도록 강요하는 비인간적인 사회를 고발하는 것이 현재 음악이 갖는 의미라는 것이지요. 음악이 사회의 반대축 역할을 담당해야 할 이유는 자명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사이드), 251쪽 작품은 에피소드처럼 단절되어 있으면서 파편화되어 있고 또 동질감이 없는, 그런 식으로 디자인되었습니다. (사이드), 257쪽 베토벤은 아주 긴 크레센도와 셈여림에서 갑작스런 여림인 수비토 피아노의 효과를 이용한 최초의 작곡가였습니다. 크레센도를 끝까지 밀고 가다가 마치 벼랑에 도달해 갑자기 멈춰서는 것 같은 효과를 내기란 정말로 많은 용기와 에너지를 필요로 합니다. (바렌보임), 271쪽 내 생각에 오늘날 진정한 문제는 이 두 극단 사이를 중재할 중간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하나로 동질화해 버리든가, 아니면 외국인을 몰아내야 한다든가, 이런 극단적인 태도만 있지 둘 사이의 교류 같은 개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이드), 286쪽 모든 것이 무대 위에 있을 때, 연주와 표현과 모든 것이 끊임없이 상호의존적이 될 때, 음악은 분해할 수 없는 것이 됩니다. 이런 점이 신비로운 셈이지요. 왜냐하면 이 신비로움은 종교나 신에 대한 것과 똑 같은 개념이거든요. 즉 당신이 더는 분해할 수 없는 어떤 것이 갑자기 출현하는 것입니다. (바렌보임), 293쪽 드뷔시의 피아니시모 곡은 몸이 없는 것같다면, 베토벤의 피아니시모곡은 표현과 소리의 물리적 핵을 가지고 있다. (바렌보임), 324쪽 |
| 바렌보임과 사이드. 얼핏 어울리지 않는다. 한 사람은 피아니스트 출신의 유명한 지휘자, 또 한사람은 저명한 인류학자. 게다가 한 사람은 유대인, 또 한사람은 팔레스타인. 이 두 사람이 만나 음악, 문학, 신화, 문명에 대해 논한다. 결론은 진지하고 심각하지만 읽어볼만한 책이라는 것이다. 바그너를 잘 몰라도, 후르크 뱅글러가 누군지 몰라도 상관없다. 이 두 사람이 세계에 왜 열린 마음을 가져야하는지를 알수 있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개인적인 호기심시 있어서인지 바렌보임의 아내였던 드 퓌레에 대한 이야기는 안 나오데? 아, 이 속물근성 |
| 바렌보임 씨는 베를린 필 상임은 놓쳤지만 최강의 시카고 심포니와 전통있는 도이체 슈타츠오퍼 베를린의 음악감독을 맡고 계신 세계적인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고, 사이드 씨는 '오리엔탈리즘'을 비롯해서 많은 히트작을 배출한 교수십니다. 이런 대단한 분들이 만나서 나눈 대담집이라 그런지 매우 수준 높은 대화가 오간 것 같습니다. 두 분은 유태계 러시아계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계 미국인인데, 인종으로 보자면 적대적일 것도 같지만 국적으로 보면 사이가 좋을 것도 같습니다. 어쨌든 두 분은 음악을 매개로 해서 절친한 친구가 되셨다는데, 이 책에는 95-2002년 사이에 있었던 대담 6개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주로 대화의 주도권은 바렌보임 씨가 쥐고 계신 것 같은데, 대부분의 대담이 클래식 음악을 소재로 해서 이루어져서 그런 것 같습니다. 가끔 사이드 씨가 날카로운 이견을 제기하는데 바렌보임 씨는 전혀 밀리지 않는 말발을 보여 주셔서 역시 7살 때부터 연주회를 가진 엄청난 천재구나 싶습니다. 그리고 바렌보임 씨를 보면 재클린 두 프레이 씨를 비정하게 팽개친 냉혈한이라는 인상이 강했었는데 상당히 인간적인 모습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인상적인 대목을 몇 들자면, 바렌보임 씨는 바이마르에서 이스라엘과 이슬람권 연주자들을 모아서 연주회를 가졌었는데, 처음에는 적대적이던 그들이 연주를 하면서 조금씩 이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면서, 함께 연주를 했던 그들이 예전과 완전히 같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바렌보임 씨는 베토벤과 브람스가 독일적이라고 하는 것은 괜찮지만 그 음악을 독일인만이 연주할 수 있다는 식의 민족주의라면 곤란하다고 하고, 사이드 씨는 현재 미국이 다양성을 추구하는 대신 민족국가-민족주의가 있을 수 없는 미국으로서는 수입한 개념-적으로 흐르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세계적인 지휘자는 과연 어떻게 음악을 해석하는 것인지 바렌보임 씨의 말씀으로 어렴풋이 알 수 있는데, 여러 번 강조되는 주제는 음악은 소리로 구현되는 예술이므로 악보 자체가 음악일 수 없다는 점입니다. 작품의 템포를 설정하는 것도 메트로놈에 의존하는 기계적 해석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면서 피에르 불레즈 씨의 예를 듭니다. 불레즈 씨는 자신이 작곡할 때 머리 속에 있던 음악과 실제 연주되는 음악은 다를 수 밖에 없다면서 템포를 지휘자가 알아서 조정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셨답니다. 그리고 음악이 연주되는 연주장의 음향 상태에 따라서 템포나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조절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합니다. 현재의 정격 음악과 순수주의자들이 너무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있어서 오히려 작품 해석을 한정시키는 우를 범하고 있다고도 합니다. 바그너 음악을 이스라엘에서 연주해서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던 바렌보임 씨는 바그너가 대단한 유태인 혐오주의자였음에는 틀림없는 것 같지만 그의 작품들에서는 그다지 반유태적 요소를 찾아볼 수 없다며, 미메와 베크메서가 어느 정도 유태인 캐릭터를 가지고 있지만 샤일록처럼 사악하게 그려지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사이드 씨는 뉘른베르크의 장인가수의 한스 작스의 마지막 노래에서 위대한 인물이 나타났으니 믿고 따르라는 식의 전체주의 분위기가 풍기는 것 같고, 어딘가 외국인 혐오증 같은 느낌이 든다고 합니다. 독일인들이 유태인들을 학살했다고 해서 그들을 영원히 증오한다면 결국 똑같은 인간이 될 뿐이라는 바렌보임 씨 말씀도 있습니다. 바렌보임 씨는 훌륭한 음악가란 수동적인 경탄의 감정과 능동적인 용기를 모두 갖추어야 한다고 하는데, 그가 함께 연주했던 초일류 오케스트라들중 도이체 슈타츠오퍼 베를린만이 그런 자질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뭐, 최근에 함께 한 시디가 텔덱에서 많이 나와서 광고 목적도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슈타츠오퍼 베를린은 과거 동독에 기반을 둔 오페라 오케스트라인데, 나치와 공산주의라는 전체주의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음악을 들으며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어쩌면 예술이란 그런 점에서 사회에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이드 씨는 바그너가 형편없는 인간이었다고 하더라도 그의 작품까지 적대시하는 태도는 어른스럽지 못한 것이라고 하고,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절대로 필요하다면서 팔레스타인-이스라엘 관계 정상화를 반대하는 것은 별로 지혜로운 일이 못 된다고 합니다. 원문 자체가 쉽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번역이 아주 매끄럽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고, 푸르트벵글러는 프루트벵글러, 질리는 기글리, 미메는 마임 식의 영어식 발음 같은 표기,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굴레', 6번 교향곡 '목가극' 등 개성 있는 번역어들이 눈에 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