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실, 나는 이영화를 극장에서 두번, dvd로 한번 이렇게 세번을 봤다. 첫 느낌은 한 마디로 충격이었다. 그러나 그 아래 감동과 고민을 몇 겹 숨겨둔 충격이라, 또 다시 그 충격을 맛보고 싶단 열망은 다시 나를 극장으로 옮겨놓았다. 두번째엔 영화를 이해해 보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런던에 있을 적이라 영어를 완벽히 이해하지 못한 이유도 있다. 세번 째 dvd를 보구선 얼마정도 감이 잡힌 듯했다. 어떤 이는 이 영화가 성 정체성의 혼란을 그리고 있다고도 했다. 그러나 나는 절대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정면으로 생을 응시합니다 언제나 정면으로 생을 응시합니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삶을 알게됩니다 마침내 이해하고..사랑하고.. 그리고 그것을 떠나 보냅니다" 이는 버지나아가 마지막으로 남편에게 남긴 편짓 말이다. 그녀가 그토록 작품을 통해, 그녀의 삶 한순간 한순간을 통해 심각히 고민했던 것이 바로 삶이 란 것이었다. 그저 그렇게 범부들이 살아내는 것 처럼 삶을 사는데 서툴렀던 그녀는, 남편에게도, 의사에게도, 같은 여자인 가정부들에게도, 그리고 자신의 친 언니에게 마저도 이해하기 힘든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고뇌와 고통속에서 핀 그녀의 작품들은 범인들의 수고를 덜어 인생을 이해하도록 돕고 있지 않은가! 물론, 그 어떤 작품도 인생에 대한 완벽한 해답을 싣고 있진 않다. 왜냐면 그녀 또한 생을 마치기 얼마전에야 삶을 이해하고 사랑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두번째 여인 줄리안 무어, 남편과 아이를 둔 평범한 주부이다. 이웃의 친구가 불임을 비관하며 아이를 둔 그녀를 부러워한다. 그러나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들 때문에 그녀는 숨이 막힐지경이다. 남편의 지위와 벌이덕에 안락한 삶을 사는 책속의 댈러웨이 부인의 하루를 지켜보면서 그녀는 그녀 자신을 보았을 것이다. 결국 그 생활로 부터 도피를 선택한 그녀이다. 그녀가 선택한 삶이 아닌 주어진 삶은 그녀에게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 세번째 여인 메릴 스트립, 앞의 두 여인의 삶의 응집이랄까. 아무튼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여인이다. 자신의 일을 가져 독립적이고 여성의 특권인 출산을 경험하였고 같은 여자-동거하던 이-로 부터 삶의 힘겨움을 위로받고 한 남자를 어려움 속에 사랑하고. 세 사람은 얽히고 얽혀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하고 사랑하고 있다. 왜냐면 세사람은 모두 여자로서의 한 생애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없다. 손 끝에서 맺혀 자판으로 옮겨지지는 않는 무슨 말이 있긴 한데, 도저히 모르겠다. "레오나드! 언제나 우리 둘 사이의 세월은 사랑이었고 영원한 시간이었습니다." 버지니아의 이 말을 끝으로 부족한 서평을 마치며, 여자라면 꼭 권해드리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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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를 위하여, 그들이 버린 것 >
처음에는 호기심이었다. 마이클 커닝햄의 원작 소설인 |
| 제가 좋아하는 여배우 니콜 키드만, 줄리언 무어, 메릴 스트립이 나온다는것만으로도 무척 마음에 끌렸던 영화예요. 게다가 니콜 키드만이 버지니아 울프로의 변신은 무척 놀라왔습니다. 그냥 보면 니콜 키드만이라고는 전혀 상상히 되지 않아요. 코의 변화만으로도 이렇게 사람이 달라 질수 있으려나? 그녀의 신경질적인 면의 연기는 니콜 키드만의 외모로써의 변신뿐만아니라 연기도 무척 아름다웠습니다. 자신의 삶을 비극적으로 마감한 그녀... 무척 안타깝고 답답한 마음을 일으키네요. 로라 역시 현실의 세계가 무척 답답하기만 합니다. 약간의 산후 우울증을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은 그녀의 불안을 더 증폭시키지요. 평범하고 행복해 보이는 가정... 그러나 눈에 보이는것이 전부가 아니예요. 그래서인지 오히려 더 불안하고 폭팔적인 감정이 전해지는것 같습니다 클라리사역의 메릴 스트립 - 그녀가 꽃을 들고 가는 장면은 무척 인상적입니다. 처음에는 클라리사의 모습과 '댈러웨이'의 모습이 겹쳐저 약간은 혼돈스러웠어요. 그녀 역시 평범한 삶을 살아온것은 아니예요. 자신의 성정체성을 찾고 남편과 이혼후에 새 삶은 사는 그녀는 에이즈에 걸린 전 남편의 문학상 수상을 기념키 위해 파티를 준비합니다. 이야기는 무척 잔잔하게 흘러서 어쩌면 조금은 지루하게 느껴질지도 모를 영화입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세 여인이 어떻게 얽히게 되는지가 나오면서 많은 생각을 주는 영화였어요. 어찌보면 우울증이 있는 분들이 보면 사실 그리 좋은것 같지는 않아요. 약간 사람을 우울하게 만드는 영화거든요. 그래도 여성으로써의 삶에 대해서 다시 생각할수 있는 기회를 주는 영화랍니다. |
| 시간은 모든 것이 한꺼번에 주어지는 것을 지연하는 것이지만, 때로는 추억이란 것들이 우리를 통째로 뒤흔들어 놓기도 한다. 시간이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이런 일들은 종종 우리의 삶 위에 내던져지며, 기억과 감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채 서로를 감싸안는다. 오늘 하루종일 영화에 미쳐 살아서일까.... 글이 쓰고싶어 손가락이 다 간지러운 날이다. 감정적인 것들이 물밀듯이 들이닥치는 이런 일들이 요즘은 너무나도 행복하게만 느껴진다. 니콜 키드먼의 결벽증과 환청, 우울증, 정신분열까지 내가 꿈꾸는 모든 삶의 조건을 갖춘 버지니아 울프가 시간속에 숨쉬고 있었다. 다양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내 꿈이지만, 가끔은 모든 것이 뒤섞여 버려. 물론 새벽은 언제나 혼돈을 가져오지만 말이야. 물속의 고기가 목말라 한다는 말을 듣고 나는 웃는다. |
| 그럼 이 영화에는 여성의 목소리만 등장하는 것일까? 이 영화에는 항상 "여성영화"라는 수식어가 따라붙기 마련인데 한 번 영화속의 남성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영화 속에는 과거 속의 남성들인 버지니아의 남편과 로라의 남편, 그리고 현대의 남성들인 리처드, 그리고 리처드의 전 애인인 루이스가 등장한다. 버지니아의 남편은 버지니아를 런던으로부터 시골로 데려와 조그마한 인쇄소를 운영하고 있다. 그 때문에 버지니아는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었지만, 되려 그는 버지니아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는데 "고마워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그녀를 다그친다. 사랑하는 여성을 아끼고 생각하지만 그가 생각하는 "위함"은 여성의 입장이 아니라 남성의 시각에서 비춰진 것일 뿐이다. 로라의 남편은 아름다운 여성과 평온한 집을 짓고 사랑스러운 아이와 함께 가정을 꾸리고 사는 것을 '이상적인 삶'으로 생각하는 전형적인 남성이다. 그의 아내가 겪고있는 마음속의 혼란은 눈에 보이지 않고 자신의 행복이 만족되면 그만이며, 슬픔에 흐느끼는 아내에게 어서 침대로 들어오라고 손짓하고 있다. 반면 현대의 남성들 중인 루이스는 리처드의 전애인으로서 동성애자이다. 대학교수이면서 제자와 빠진 그는, 남이 보기에 위험하고 미친 삶을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루이스는 기꺼이 자신의 행복에 충실한 삶을 위해 기꺼이 감수한다. 남성들은 동성애에 대해서 상당히 거부적인 모습을 가진다. 남자 동성애자들을 "남성답지 못하다"고 치부하며, 남자가 여자같아지는 것을 DEGRADE 되는 것이라고 믿는 남성중심적인 사회에서 어쩌면 리처드는 혁명적인 인물처럼 보이기까지 한다.리처드는 더 나아가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가라고 외치고 있다. 영화 속에는 여성들의 목소리 뿐아니라 남성들의 목소리도 들린다. 남성들에게도 변하라고 외치고 있는 이 영화는 내게는 단순히 "여성영화"가 아닌 것이다. 다시 영화의 끝은 버지니아의 죽음을 보여준다. 이제 버지니아가 죽음을 통해 삶이 아름다울 수 있음을 들려주는 대상은 영화 속이나 그녀의 작품 속 인물이 아니라 관객이 되는 것이다. 우리 정말 우리 자신에게 충실한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우리의 삶이 아름답게 느껴지고 있는가? 영화의 DVD 음질은 사실 잘 모르겠다. 내가 5.1 채널의 홈시어터 시스템을 갖고 있는게 아니긴 하지만, 영화속의 사운드는 상당히 깨끗하다고 느꼈고 인물들의 대사가 실은 느낌을 충분히 잘 전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화질은 매우 깔끔하고 선명하며 각 시대가 보여주는 색감 - 버지니아가 사는 시대의 자연스러운 색깔, 로라가 사는 시대의 인위적인 느낌, 클라리사가 사는 창백하고 어두운 색감- 은 탁월하게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
| 버지니아 울프가 강물에서 자살하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그녀는 왜 죽음을 택하는 것일까? 이 영화는 다른 시대, 다른 환경에서 살고 있는 세 여성 -- 1920년대 영국에서 사는 버지니아 울프, 1950년대 미국에 사는 로라 브라운, 2000년대의 클라리사 --의 하루에 주목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우울증 치료를 받으며 이미 두 번이나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지만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작품을 구상하고, 로라는 그 책을 읽고 있으며, 클라리사는 시인이자 작가인 리처드로부터 델러웨이 부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과연 댈러웨이 부인은 어떤 인물인가.. 댈러웨이 부인, 그녀는 -로라가 말하는 것처럼 - 자신감있고 활기찬 여성이지만, 그건 다른 사람들이 그녀를 그렇게 보고 있을 뿐, 그녀의 삶은 공허하다. 침묵을 피하기 위해 파티를 여는 작품 속의 댈러웨이 부인은, 런던으로부터 언니를 초대하는 버지니아, 남편의 생일을 위해 파티를 여는 로라, 친구인 리처드의 시상식을 축하하기 위해 파티를 여는 클라리사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당신은 누구를 위한 삶을 살고 있는거지?" 리처드는 자신을 위해 파티를 열어주겠다는 클라리사에게 질문하고, 그녀의 삶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정곡을 찔린 클라리사는 당혹해한다. 로라는 친구인 키티를 사랑하지만 자신의 성 정체성을 무시하고 사회의 기준대로 남자를 만나 결혼하여 아이를 갖고 가정을 꾸려가는, 키티가 보기에 "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아간다. 남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로라는 케익을 만들지만, 어린 아들 리처드의 말처럼 남편이 "사랑받고 있음을 알리기 위한 것" 에 불과하다. 세 여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 중의 하나가 동성애이다. 버지니아는 언니를 사랑하고, 로라는 친구인 키티를 사랑하고, 클라리사에게는 샐리라는 애인이 있다. 하지만 버지니아의 사랑은 금기시 되어있고, 로라는 50년대 당시 여성으로서의 평범한 삶을 위해 자신의 성 정체성을 무시하고 억누르고 있다. 세월이 흘러 2000년대가 되어 클라리사에게처럼 동성애는 숨길 것이 아니고, 딸도 그 관계를 인정하고 있긴 하지만 샐리와의 관계는 격정적이지 못하다. 모두 자신 속에 열정적인 삶에 대한 갈망이 존재하지만 버지니아는 미친 사람 취급을 받고, 로라는 삶을 포기하려 하며, 클라리사는 그 열정의 목적을 모르는 채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영화 전반에는 죽음이라는 키워드가 관통하고 있다. 버지니아는 두 번이나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으며 영화의 첫 시작에서 죽는 모습을 보여준다. 로라는 자신의 가식적인 삶을 버리기 위해 자살을 맘먹는다. 리처드는 클라리사의 앞에서 죽음의 길로 뛰어든다. 과연 영화 속에서 죽음이 말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버지니아 울프는 시골을 떠나 런던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매순간이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시골의 삶보다 격정적인 런던의 삶을 살고 싶어하는 그녀는, 투쟁하는 삶을 통해 진정한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얘기한다. "왜 누군가가 죽어야 하지?"라는 남편의 질문에, 버지니아는 남아있는 사람들이 반대로 살아있음에 고마움을 느낄 수 있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그런 면에서 죽음은 소멸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을 불러일으키는 의미를 갖기 시작한다. 리처드의 죽음은 클라리사가 리처드의 어머니인 로라와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준다. 원래 자살을 하려고 마음먹었지만, 그녀는 다시 마음을 바꿔 둘째 아이를 낳음과 동시에 남편과 아이를 버리고 떠난다. 사회적인 관념으로 볼 때 욕먹어 마땅하고 용서받지 못한 일을 저지른 듯 보이지만, 그녀는 죽음같은 현실보다 삶을 택한 용기있는 여성인 것이다. 리처드에게 상을 안겨주었다는 그 소설은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이며, 어머니가 죽는 설정의 내용을 담고 있다. 클라리사를 아는 주변인물들은 그게 클라리사에 관한 "논픽션"인 것으로 알 만큼 서로의 삶은 비슷하게 닮아있었다. 하지만 리처드가 죽인 것은 남성중심적 사회가 만들어놓은 여성으로서 바람직하다는 삶을 살아가던 어머니의 모습이었고, 클라리사는 자신이 한계를 지닌 삶, 나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한 삶을 살아왔음을, 소설 속의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 발견하게 된다. 마치 로라가 "댈러웨이 부인"을 읽으면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듯이 말이다. 이제 클라리사는 리처드의 죽음, 리처드의 소설 속에서 한 여성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삶과 열정을 되찾고 애인에게 애정어린 입맞춤을 해줄 수 있게 된다. 나는 로라라는 여성에 대해서 좀더 생각을 해보고 싶다. 그녀는 정작 자신의 삶을 위해 가족을 뒤로 하고 캐나다에서 사서로서 일을 해왔지만, 자신의 능력을 믿고 가족과의 단절을 겪고 어머니로서의 여성성을 포기한 그녀의 삶은 공허하고 외롭기는 마찬가지다. 여성으로서 자신의 성공이 전체 여성에게 이익을 가져다줄것이라 생각하는 여성들에게 조심스럽게 그 한계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이제 클라리사의 딸이 로라를 만난다. 클라리사의 딸은 어머니의 동성애를 이해하고 "여성적인" 옷보다는 활동적인 옷을 입는 젊은 세대이며, 앞으로의 여성을의 다음 세대 - 미래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로라가 클라리사의 딸에게 계속하여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은, 남성사회라는 한계 속에서 진정한 여성으로서의 삶을 살려고 노력해왔지만 시간이 흘렀어도 변한 것이 별로 없는 것에 대한 미안함 때문일 것이고, 이제 구세대와 신세대가 마주 보고 서로를 끌어안는다. |
| "당신은 누구를 위한 삶을 살고 있는거지?" 리처드는 자신을 위해 파티를 열어주겠다는 클라리사에게 질문하고, 그녀의 삶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정곡을 찔린 클라리사는 당혹해한다. 로라는 친구인 키티를 사랑하지만 자신의 성 정체성을 무시하고 사회의 기준대로 남자를 만나 결혼하여 아이를 갖고 가정을 꾸려가는, 키티가 보기에 "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아간다. 남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로라는 케익을 만들지만, 어린 아들 리처드의 말처럼 남편이 "사랑받고 있음을 알리기 위한 것" 에 불과하다. 영화 전반에는 죽음이라는 키워드가 관통하고 있다. 버지니아는 두 번이나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으며 영화의 첫 시작에서 죽는 모습을 보여준다. 로라는 자신의 가식적인 삶을 버리기 위해 자살을 맘먹는다. 리처드는 클라리사의 앞에서 죽음의 길로 뛰어든다. 과연 영화 속에서 죽음이 말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버지니아 울프는 시골을 떠나 런던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매순간이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시골의 삶보다 격정적인 런던의 삶을 살고 싶어하는 그녀는, 투쟁하는 삶을 통해 진정한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얘기한다. "왜 누군가가 죽어야 하지?"라는 남편의 질문에, 버지니아는 남아있는 사람들이 반대로 살아있음에 고마움을 느낄 수 있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그런 면에서 죽음은 소멸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을 불러일으키는 의미를 갖기 시작한다. 리처드의 죽음은 클라리사가 리처드의 어머니인 로라와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준다. 원래 자살을 하려고 마음먹었지만, 그녀는 다시 마음을 바꿔 둘째 아이를 낳음과 동시에 남편과 아이를 버리고 떠난다. 사회적인 관념으로 볼 때 욕먹어 마땅하고 용서받지 못한 일을 저지른 듯 보이지만, 그녀는 죽음같은 현실보다 삶을 택한 용기있는 여성인 것이다. 리처드에게 상을 안겨주었다는 그 소설은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이며, 어머니가 죽는 설정의 내용을 담고 있다. 클라리사를 아는 주변인물들은 그게 클라리사에 관한 "논픽션"인 것으로 알 만큼 서로의 삶은 비슷하게 닮아있었다. 하지만 리처드가 죽인 것은 남성중심적 사회가 만들어놓은 여성으로서 바람직하다는 삶을 살아가던 어머니의 모습이었고, 클라리사는 자신이 한계를 지닌 삶, 나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한 삶을 살아왔음을, 소설 속의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 발견하게 된다. 마치 로라가 "댈러웨이 부인"을 읽으면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듯이 말이다. 이제 클라리사는 리처드의 죽음, 리처드의 소설 속에서 한 여성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삶과 열정을 되찾고 애인에게 애정어린 입맞춤을 해줄 수 있게 된다. 나는 로라라는 여성에 대해서 좀더 생각을 해보고 싶다. 그녀는 정작 자신의 삶을 위해 가족을 뒤로 하고 캐나다에서 사서로서 일을 해왔지만, 자신의 능력을 믿고 가족과의 단절을 겪고 어머니로서의 여성성을 포기한 그녀의 삶은 공허하고 외롭기는 마찬가지다. 여성으로서 자신의 성공이 전체 여성에게 이익을 가져다줄것이라 생각하는 여성들에게 조심스럽게 그 한계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이제 클라리사의 딸이 로라를 만난다. 클라리사의 딸은 어머니의 동성애를 이해하고 "여성적인" 옷보다는 활동적인 옷을 입는 젊은 세대이며, 앞으로의 여성을의 다음 세대 - 미래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로라가 클라리사의 딸에게 계속하여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은, 남성사회라는 한계 속에서 진정한 여성으로서의 삶을 살려고 노력해왔지만 시간이 흘렀어도 변한 것이 별로 없는 것에 대한 미안함 때문일 것이고, 이제 구세대와 신세대가 마주 보고 서로를 끌어안는다. 그럼 이 영화에는 여성의 목소리만 등장하는 것일까? 이 영화에는 항상 "여성영화"라는 수식어가 따라붙기 마련인데 한 번 영화속의 남성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영화 속에는 과거 속의 남성들인 버지니아의 남편과 로라의 남편, 그리고 현대의 남성들인 리처드, 그리고 리처드의 전 애인인 루이스가 등장한다. 버지니아의 남편은 버지니아를 런던으로부터 시골로 데려와 조그마한 인쇄소를 운영하고 있다. 그 때문에 버지니아는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었지만, 되려 그는 버지니아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는데 "고마워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그녀를 다그친다. 사랑하는 여성을 아끼고 생각하지만 그가 생각하는 "위함"은 여성의 입장이 아니라 남성의 시각에서 비춰진 것일 뿐이다. 로라의 남편은 아름다운 여성과 평온한 집을 짓고 사랑스러운 아이와 함께 가정을 꾸리고 사는 것을 이상적인 삶으로 생각하는 전형적인 남성이다. 그의 아내가 겪고있는 마음속의 혼란은 눈에 보이지 않고 자신의 행복이 만족되면 그만이며, 슬픔에 흐느끼는 아내에게 어서 침대로 들어오라고 손짓하고 있다. 반면 현대의 남성들 중인 루이스는 리처드의 전애인으로서 동성애자이다. 대학교수이면서 제자와 빠진 그는, 남이 보기에 위험하고 미친 삶을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루이스는 기꺼이 자신의 행복에 충실한 삶을 위해 기꺼이 감수한다. 남성들은 동성애에 대해서 상당히 거부적인 모습을 가진다. 남자 동성애자들을 "남성답지 못하다"고 치부하며, 남자가 여자같아지는 것을 DEGRADE 되는 것이라고 믿는 남성중심적인 사회에서 어쩌면 리처드는 혁명적인 인물처럼 보이기까지 한다.리처드는 더 나아가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가라고 외치고 있다. 영화 속에는 여성들의 목소리 뿐아니라 남성들의 목소리도 들린다. 남성들에게도 변하라고 외치고 있는 이 영화는 내게는 단순히 "여성영화"가 아닌 것이다. 다시 영화의 끝은 버지니아의 죽음을 보여준다. 이제 버지니아가 죽음을 통해 삶이 아름다울 수 있음을 들려주는 대상은 영화 속이나 그녀의 작품 속 인물이 아니라 관객이 되고, 동시에 관객은 이러한 질문을 스스로 하도록 남겨진다. 우리 정말 우리 자신에게 충실한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우리의 삶이 아름답게 느껴지고 있는가? 리처드가 죽기 전에 부르짖듯이 우리의 삶에는 "더 많은 빛"이 필요하다. |
| 미국에서 조차도 최고의 영화 그리고 최악의 영화에 동시에 뽑힌 영화... 그 정도로 많은 관심을 가졌다라고 할 수 있는데... 물론 최악의 영화에만 뽑혔더라도 내 자신 조차도 이 영화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겠지만... 분명 이 영화 또한 최고의 영화에 뽑혔기에... 당연히 보아야 할 영화 중에 하나라고 생각을 했다... 세 명의 연기 잘 하는 배우들... 게다가 물이 오른 니콜 키드만의 연기를 이 영화에서 볼 수 있다라는 자체만으로도 이 영화를 분명 보아야 할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 이다... 이 영화에서 니콜 키드먼은 여류 최고의 작가 버지니아 울프의 역을 맡고 있다... 사색적이면서 언제나 얼굴에 근심이 가득한 그 버지니아 울프의 연기를 너무도 잘 소화해 냈다라고 개인적으로 평을 내리고 싶다... 여하튼 분명 이 영화는 당연히 보아야 할 영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