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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회빈(愍懷嬪)‘지위를 잃고 죽은 것을 슬퍼하고 가슴 아파한다’라는 뜻 이란다. 소현세자빈 강씨가 사사되고 70여 년이 지난 뒤 숙종이 그녀를 복권시키면서 내린 위호라고 한다. 최근에 역사소설이 봇물을 이루는 것 같다. 그 중에서도 여인들을 대상으로 삼는 소설들이 눈에 많이 띈다. 역사소설은 사료를 인용하고, 여기저기 그 흔적을 찾아 자료로써 사용한다 할지라도 픽션일수 밖에 없다. 재해석을 이유로 영웅주의화 하는 건 아닌지, 혹 역사에 대한 또 다른 왜곡을 하는 것은 아닌지 경계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이 책 [별궁의 노래]는 조선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의 빈이었던 강씨에 대한 팩션이다. 저자는 이시대 한국여성의 표상이 될 인물로 소현세자빈 강씨를 주저 없이 꼽고 있다. 과거 현모양처의 롤모델로 꼽히던 신사임당은 논란이 되고 있는 양처 여부를 떠나서도 이제는 시대의 표상이 될 수 없다고 이야기 한다. 그만큼 세상이 변했고, 사람들을 평가하는 시대정신도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소설을 읽으면서 17세기 당시 조선의 모습에 다시 한번 오늘을 느낀다. 소설은 광해군을 몰아내고 반정에 성공한 인조가 몽고의 침입을 받아 남한산성에서 항복하고,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 후,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간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에 대한 이야기 이다. 그곳 심양관에서 식량을 해결하기 위하여 농사를 짓고, 포로로 잡혀간 조선인들의 속환을 위해 무역을 주도한 세자빈과, 50만에 불과한 만주족이 1억의 한족을 다스리는 당시의 국제정세를 꿰뚫어 본 소현세자의 실리정책이 허울뿐인 북벌론에 휩싸여 백성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들의 권력 지키기에 혈안이 되어있던 인조, 그리고 조선 사대부들과의 갈등 속에서 세자빈 강씨가 생각하는 사상이, 그리고 그녀가 세자를 내조하는 내용이 이야기의 주이다. 같은 포로로 잡혀가 있음에도, 같은 문물을 접하고 있음에도, 현실을 인정하고 어느것이 진실로 백성과 나라를 위한 것 인지를 생각하는 소현과, 이미 사라지고 없는 명나라에 대한 끝없는 충성과 가망없는 북벌만을 간직하는 봉림대군, 사사건건 봉림대군과 같은 생각으로 트집만 잡는 인조와 조선의 신료들, 그들과의 갈등 속에서도 묵묵히 제 할 일만 하는 소현이 애처롭다. 결국 8년간의 포로생활이 끝나고 조선으로 돌아온 지 석달만에 소현세자는 인조의 왕위에 대한 불안과 후궁 조소용의 이간질로 독살된다. 그리고 세자빈 강씨도 사저로 유폐된 후 사사되며, 그의 아들들도 제주도로 유배된 후 모두 죽는다. 왕위에 대한 탐욕과 현실감 없는 인조의 인식이 삼촌을 몰아내고, 아들을 죽이고, 며느리를 죽이고 손자들마저 죽게 만든다. 가히 조선시대 밥값도 하지 못한 왕이라는 소리를 들을만도 하다. 비록 소설속의 이야기이지만, 그리고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하지만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실리외교로 조선의 강토를 보전한 광해군이 실각하지 않았더라면, 아니 청의 새로운 문물에 대한 이해와 부국강병이 결코 말로써 이루어지지 않음을 잘알고 있던 소현세자가 인조의 뒤를 이었더라면 조선후기 우리의 역사는 좀더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더불어 국가를 다스리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하는 지를 생각해 본다. 우리가 책읽기를 통해서 얻어야 하는것은, 그것이 소설속 이야기라 할지라도, 현실과 비추어 다시는 과거의 암울했던 그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백성과 나라를 생각한다는 것이 결코 말로써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허울뿐인 북벌론을 내세우던 인조와 당시의 사대부들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또한 전쟁의 폐허 속에서 백성들은 곤궁에 시달리는데도 그들 공신들의 곳간에 넘쳐나는 재물보화들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오늘의 현실 속에서 그 의미를 생각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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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과목은 그리 좋아라하는 수업이 아니었다. 말솜씨가 좋은 선생님이 재밌는 역사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아니라, 연도와 왕이름과 각 시대별 일어난 전쟁과 주변국들의 정세등 주입식으로 머리속에 집어넣고 억지로 외워서 시험답안을 채워야했던 자료의 나열뿐인 과거의 이야기는 흥미있는 과목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자연의 이치를 배우고 적용하는 과학시간이 더 재밌었다.
그래서인지 벼락치기로 외웠던 몇몇 왕들을 제외하고는 우리역사에 대해 많이 무지하다. 몇 해 전 읽은 김훈의 남한산성을 통해 '인조 때 병자호란이 있었지' 떠올렸고, 그 당시 사회 분위기를 김훈 특유의 언어유희로 알게 되었다. 풍전등화의 상황에 주화파와 척화파로 나뉘어 말로써 말을 만들고 말로써 길을 만드는 문관들의 틈바구니 안에서 세번째 도성을 버리고 남한산성으로 피신을 간 인조의 연약한 모습을 보았다. 더불어 삶은 치욕을 견디는 나날이라는 작가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그에 반해 별궁의 노래는 역사적인 배경을 같이 하고 주인공이 다른 소설이다.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와 화친을 약속하고 청의 칸에게 삼배구도구를 한 후, 그의 아들 소현세자와 빈궁이 볼모로 잡혀간 이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청나라에서 8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처음에는 오랑캐에 굴욕을 당했다는 치욕스런 생각에 복수를 꿈꾸지만, 청나라의 실리를 추구하는 생활태도와 명나라를 회유하는 모습, 서양문물의 편리성을 접하면서 조선의 개혁과 개방을 꿈꾼다. 친청정책을 펴며 직접 농지를 개간하여 농사를 짓고, 무역을 통해 상단을 꾸리는 적극적인 빈궁의 노력으로 함께 노예로 잡혀간 백성들을 속환하기도 한다. 그러나 세번의 호란을 겪으면서도 나라의 기틀을 바로 잡지 못하고 민심을 잃은 인조는 임금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세자 내외를 내치게 된다.
비록 볼모의 신분으로 청에 와있었지만, 더 넓은 세상을 보고 나라의 문제점이 무엇이었는지 깨닫고 개혁하려고 하던 구상들은 펼쳐보지 못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는 세자부부. 혹 이들이 친청정책을 쓰지 않고 친명정책을 유지했다면 우리나라는 청의 침략에 남아있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아찔한 상상과 혹 이들이 인조의 후계자가 되었었더라면 우리나라는 좀 더 빨리 발전했었을 거라는 안타까운 상상을 해본다.
역시 역사는 스토리로 배워야 잊혀지지 않고 역사의 아픔을 보고 현실과 반추하여 미래를 준비하게 되는거 같다. 왜 작가는 이 책의 제목을 별궁의 노래라고 하였을까?
하늘에 있을 때는 비익조처럼 붙어서 날아다니고 땅에서는 연리지처럼 한데 얽혀 사랑하자 하였네. 아득히 먼 훗날 이 세상 하늘과 땅이 없어질지언정 두 사람 사랑의 한은 영원히 끊이지 않으리라 당나라 백거이의 시 <장한가>
세자의 고백과 같이 눈이 하나 날개가 하나여서 서로 꼭 붙어다니는 비익조와 서로 다른 뿌리에서 나왔지만 서로 꼭 붙어서 한 나무처럼 자라는 연리지에 비교 될 만큼 사이가 좋았던 세자와 세자빈의 안타까움을 노래하고 싶었던게 아닐까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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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소설을 재미있게 읽은 게 벌써 몇 년이 된 듯하다. 김탁환 교수님과 김별아님의 소설을 한참 재미있게 읽었는데...오랜만에 만난 역사 소설. 별궁의 노래.
[별궁의 노래]는 청의 볼모로 잡혀 지낸 소현세자를 따라 그곳의 환경을 극복하고 농업, 무역, 그리고 조선시대의 외교관 역할까지 한 소현세자빈이 주인공이다. 조선시대하면 성리학과 선비의 시대이다. 그래서 그 이전의 시대보다 오히려 여성의 외향적 역할은 축소된 듯하다. 그런 시대적 어려움 속에서도 남편을 충실히 내조하기위해 택한 여러가지 일들이 오해도 불러 일으키고, 시기와 질투를 사 끝내 이 부부의 목숨을 빼앗아가고 마는 이야기이다.
역사 소설의 진위가 어디까지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느냐도 중요하지만 (김별아의 소설도 그렇고 이 소설도 꼼꼼한 작가의 공부위에 탄생한 것 같다.) 내가 초점을 두고, 또 읽으면서 수 십분 잠을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해서 생각을 해본 것도 다 책 속의 소현세자빈의 강인한 여성상이다.
자신의 일부인 아이들과 어렸을때부터 생이별을 해야하고, 척박한 청나라에서 볼모생활을 하며 오히려 그곳에서 조선의 백성을 살린 진취적인 여인. 이 조선의 세자빈을 읽으며 내 삶이 얼마나 온실 속에만 있나 생각해 보게했다. 나는 남편과 가정. 나라를 위해 무슨 일을하다 인생을 마감할 것인가..그 생각때문에 하룻밤은 잠을 잘 수가 없을 정도였다.
확실히 사람을 계몽시키고 깨이게 하는 것은 한 편의 영화보다 책인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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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접하고 단숨에 하룻밤만에 다 읽었다...
아직도 많은 차별과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땅의 많은 여성들에게...
소현세자빈 강빈은 시대를 앞서간 여성으로 한번쯤 기억할 만한 인물인 것 같다...
그녀가 왕족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김만덕같은 거상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단지 더 넓은 세상을 알았다는 이유로 아버지 인조에게 버림받은 소현세자와
강빈... 그들이 왕위를 이었다면 조선의 역사는 훨씬 앞서나갔을 것이고 우리네 삶은
더 앞섰을지도 모르겠다...역사란 만약이라는 것이 없지만
역사앞에 그래도 당당히 설 수 있는 그분들이 진정한 승자가 아닌지...
역사소설을 좋아하는 분이라면...극적인 사건이 없어도 전혀 지루하지 않은
작가의 치밀한 상상력으로 새롭게 태어난 강빈을 만나볼 만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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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지방선거 하루 전에 읽은 책이다. 읽은 시점이 묘한 탓일까? 문득 책을 읽다 말고 권력에 대해 생각했다. 누구나 다 아는 주인공을 내세운 역사소설,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연민을 가장 잘 이끌어낼 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인 소현세자빈의 이야기가 주는 권력에 대한 메시지는 참 서글프다.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인륜과 천륜, 대체적으로 순리라 말해지는 기본정서를 바탕에 깔고 이야기되는 권력과 시대에 대한 이야기에서 나는 소현세자의 아버지인 인조를 떠올렸다. 인조는 자신의 손자까지 죽이고서 행복했을까?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악을 쓴 행동이 분출해낸 그 끝도 없고 밑도 없는 분노 속에서 자신의 혈육을 죽이고 그는 어떤 마음을 지녔을까?
또한 효종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았을까? 권력앞에 비정한 것이 인지상정이라지만 별 것 없는 대의명분을 앞에 내세운 것은 아니었을까? 형의 죽음을 외면하고 자신의 정통성을 살려야했던 그에게 남은 것은 북벌뿐이었을 것이다. 선택이 제거된 하나의 길을 앞에 두고 그의 마음 속에 회한이나 연민은 없었을까? 이렇듯 나는 이 글의 주인공인 강빈보다 읽는 내내 다른 이들에게 침잠해들었다. 글의 주인공은 강빈인데 이리도 흔들리며 다른 사람들을 떠올리는 것이 참 이상도 하지만 일단 생각가는 대로 놔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보통의 가정이 아닌 권력의 최정점에 선 왕가에서 벌어진 비극은 어지 보면 잘 포장된 적나라한 인간 본성의 표출일지도 모른다. 권력을 탐하는 인간, 비정과 냉정을 오고가는 줄타기. 여기서 재미있는 상상을 펴보기도 한다. 만일 강빈이 청과 연결을 했더라면 강빈은 아마 자신의 아이들을 다 살리고 결국 왕으로 만들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러지 못함이 가지는 의미가 중요하다. 가족의 문제가 나라의 문제가 되는 배경에서 그녀는 자신이 바꾸지 못할 것이 무엇인지를 이미 잘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세상의 시비로 가리지 못할 것을 남겨준 것이 그녀의 선택이었다면 그녀는 그것으로 만족하진 못해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광활한 대륙을 보고 무언가를 해보고 싶었던 한 사람, 그리고 그 꿈을 남편의 죽음과 함께 접어야했으며 결국 자식조차 지키지 못했던 한 사람. 그녀는 그렇게 다시 가녀리고 측은한 존재가 되어 내 앞에 선다. 그러나 그러했기에 그녀는 연민을 받는다. 그녀에게 독기가 있고 오기가 있었다면 그녀의 선택이 어떠했던 연민의 대상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눈을 돌려 그녀의 주변을 바라본다.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소현세자, 어린 나이에 죽은 그녀의 두 아들, 그들과 대립하여 마주하고 있는 인조와 효종, 잔인한 권력이란 그런 것이다. 혈연이란 것이 그토록 쉽게 부정될 수 있는 냉정한 권력을 바라보는 마음은 착잡했다. 권력을 탐하는 인간, 인간의 부정할 수 없는 속성. 결국 역사에 한 줄기 흔적을 남겨 두고 두고 회자되게 만든 욕망이다.
작가는 강빈과 세손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을 드러내지만 실현되지 못한 역사에 대해 가정하는 것은 어찌 보면 부질없는 것이 될 지도 모르겠다. 어찌 아는가? 강빈이 청에 사대하며 주권의 일부를 잃게 만들지, 혹은 아이가 자라나 폭군이 될지, 벌어지지 않은 일들은 온갖 가능성의 나래를 만들지만 그 나래란 것은 그저 희미한 환영에 불과할 뿐이다. 그저 책을 읽으며 가상의 인물과 실제 인물들 사이를 노니며 즐기고 그들의 감정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으로 족할 따름이라는 생각을 하며 책을 덮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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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상의 <별궁의 노래>는 소현세자의 세자빈인 강빈이라는 여인을 주인공으로 삼은 역사소설이다. 역사의 전면에 드러나지 못했던 소현세자에 대해서는 최근 김인숙의 소설 <소현>을 통해 재조명되고 있는 터라, 소현세자빈의 이야기는 소현 세자에 대한 관심의 붐을 타고 얼마든지 흥미거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작가 서문에 따르면 이 소설은 <소현>보다 앞서 출간되었다. 작가 서문의 이러한 언급은 분명 <소현>이라는 작품을 염두에 둔 의도로 보이나 두 작품은 시대만 공유하고 있을 뿐 비교선상에 놓기가 힘들어 보인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작가의 주관적인 해석은 역사소설을 읽는 묘미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이므로 흥미롭게 살펴볼 수 있었다. 특히 그간 역사에서 조명하지 않았던 소현세자빈을 현대적 여성상으로 재해석한 시도는 참신하다. 다만 인물의 관계에서도 도식적인 선악의 구조를 답습하여 갈등구조를 단순화시킨 점은 아쉽다. 또한 인물들이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지 못하고 산만하게 흩어져 하나의 이야기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이 밖에도 이 소설은 역사소설로서의 많은 미학적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역사소설을 쓸 때는 완전한 허구의 창작물을 생산할 때 보다 더 많은 고민을 해야할 것이다. 역사는 그 자체가 하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역사소설은 자칫하면 역사적 사건의 단순 나열에 그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의 역사와 창조적 허구의 적절한 조화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역사를 왜곡하지 않아야 함은 물론이고, 역사에 대한 재해석을 내림과 동시에 허구적인 재미까지 보장해줄 수 있어야 훌륭한 역사소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역사소설에서는 시대와 언어의 정확한 고증, 인물에 대한 내밀한 탐구, 문체의 전아함, 실제 사건의 보다 극적인 구성 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별궁의 노래>는 한 시대상의 정확한 고증이 빈약하다. 인물들의 말투는 현대어에 가깝다. 또 풍속과 세태의 고증보다 참고자료의 나열에 지나지 않는 사건의 서술이 주를 이룬다. 소현세자빈을 당대의 새로운 여성상으로 묘사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이렇게 창조한 세자빈의 인물형에 큰 설득력을 부여하지는 않고 있다. 세자빈의 사회적 위치와 당대 사회 분위기와의 상호관계 속에서 형성되었을 인물형에 대한 설득력있는 설명은 부족하거나 지나치게 작위적이다. 예컨대, 민생에 대해 고민하는 세자빈의 모습이 조금이라도 그려진 것이 아닌데, 민생고를 이유로 들어 성리학을 비판하는 세자빈의 모습은 생뚱맞다. 대사를 통해 뜬금없이 성리학에 대한 마음을 드러내는 것 보다 당대 사회와의 역학관계 속에서 부딪히는 어떠한 갈등을 그림으로써 그 입장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소설의 서술에는 말하기(telling)와 보여주기(showing)의 방식이 있다. 작가가 친절하게 인물의 성격이나 심리를 일러주는 '말하기'는 독자를 편하게 하지만 독자의 상상을 차단해 소설 읽는 재미를 반감시킨다. 반면 '보여주기'는 인물의 행동을 세세하게 묘사함으로써 독자에게 그 성격과 심리를 짐작하게 한다. 이 때 독자는 소설 읽기의 녹록치 않음을 느끼지만 동시에 상상이라는 적극적인 활동을 통해 행간을 채워놓는 묘미를 느낄 수 있다. <별궁의 노래>는 모든 것을 서술자가 알려주고 있어 독자의 독서활동에 필요한 노력이 그리 필요하지는 않다. 그런만큼 긴장감이 떨어지고 여운이 적다. '말하기'를 과도하게 사용한 문체적 한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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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정의만 넘친다면 얼마나 좋을까?
자신이 노력한만큼의 댓가를 얻고, 노력한대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남을 음해하거나 헐뜯는 사람이 없는 세상.
예전에도 대학을 다닐 때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느끼고 있는 딜레마가 있다.
"부정행위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나는 늘 떳떳하게 맨 앞에 앉아서 시험을 본다.
왜냐... 나는 부정행위를 하지도 않을 것이고, 내가 노력한만큼의 결과를 바라기 때문이다.
(더 큰 이유는 내가 떳떳하지 않고는 우리 조카들에게 제대로 가르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부정행위를 하면서, 내 조카들에게 그러면 안된다고 어떻게 가르칠수가 있을까?
그래서 나는 떳떳하게 시험을 본다.)
그런데, 다른 아이들은 컨닝페이퍼니, 손바닥이나 닥치는대로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한다.
중요한 것은 나는 열심히 노력해서 80점을 받았는데, 그 아이들은 열심히 부정행위를 해서 85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내 학점을 떨어진다.
뭐, 그렇다고 꼭 부정행위를 한 애들이 다 시험을 잘 보는 건 아니다.
중간고사 때만 하더라도, 부정행위를 하지 않은 나보다 부정행위를 한 아이들이 더 시험을 못 봤으니까. ^^;;;
어쨌든 부정행위를 하는 것 자체가 너무 싫다.
어찌되었든, 나 자신에게 떳떳하지 못한 짓이 아닌가.
그래서 어떤 아이에게 진지하게 물어봤다.
(그닥 친하지 않고, 그 전에는 말도 잘 하지 않던 아이였다.)
"부정행위를 해서 학점을 잘 받는 것과 떳떳하게 학점을 못 받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당연히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학점을 잘 받아야죠. 그래야 좋은 회사에 취직하죠."
난 거기서 말문이 막혔다.
대체... 이 아이들의 생각을 어떻게 해야 바꿀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하는 것인가.
좀 얘기가 돌아왔다.
나라의 근본은 백성이다.
백성들이 힘들게 사는 것을 더 가슴 아파하던 세자와 빈궁.
그런데, 그 세자와 빈궁을 조녀는 못마땅해한다.
자격도 없는 자신이 낳은 자식이 왕위에 오르길 바라며, 임금의 눈과 귀를 자신의 멋대로 좌지우지해버린다.
그러다가 결국은 세자를 죽이고, 빈궁을 폐해서 사사하기까지 이른다.
만약 청에서 많은 과학기술을 익힌 세자가 인조 대신 왕권을 잡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대한민국은, 아니 조선은 어쩌면 미국보다 더 강대국이 되어 있지 않을까?
무능한 인조, 그런 인조를 떡주무르듯이 주물러 자기 마음대로 갖고 놀았던 조녀.
그들 때문에 조선은 백보 뒤로 퇴보하고 만다.
역사에 이런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지만, 그럴때마다 답답한 건 마찬가지이다.
제발 그런 나쁜 사람들이 없어졌으면 좋겠다.
어제 그제, 내가 우울했던 이유 중에 하나가 이 책을 읽어서이지 않을까?
백성들의 아픔에, 세자와 빈궁의 아픔에 너무나 가슴이 아파 자꾸 눈물이 났다.
70년이 지나서야 다시 복직이 되었지만, 그러기엔 너무나 두 사람이 불쌍했다.
편집에서 별을 하나 깎은 이유는, 중간중간 3~4장 정도 있었던 것 같은데, 그 꽃 그림 그려져있고 짧게 서너줄 들어있는 그 종이가 왜 있는지 도대체 이유를 모르겠다.
그렇다고 앞으로 나올 내용을 적은 것도 아니고(맨 마지막 장만 앞으로 나올 내용이었다), 앞선 세 장은 이미 나왔던 내용을 다시 보여줬다.
음... 별루다. 그냥 없는게 더 나을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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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중에서도 각 시대의 영웅들을 조명하는 소설을 읽다보면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준다. 그 시대의 생활과 그 인물의 사상들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별궁의 노래라는 소설책은 조선의 16대 왕 인조의 아들인 소현세자 내외와 봉림대군이 청나라 볼모생활을 하면서 겪은 내용을 담고 있다. 소현세자는 우리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 중에 하나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왕의 그늘에서 편안한 삶을 산게 아니고 청나라에 볼모생활을 8년간 하다가 고국으로 돌아와서는 몇 달 안 되어서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하였으나 요즘 들어 소현세자에 관련된 서적, 드라마, 연극에 까지 많이 나오니 소현세자에 대해 더 알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별궁의 노래는 마지막 페이지를 다 읽고 책을 덮는 순간 가슴 한켠이 먹먹한 느낌이 들었다. 한 시대에 살았던 인물을 이야기 한 것인데.. 왜 더 마음이 쓰이는 것일까?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몇가지 궁금한 것이 생각이 났다 첫째는 어찌 자식의 본심을 몰라줬을까? 다른 사람도 아닌 부모(조선의 16대 왕 인조)가.. 무엇 때문에 소현세자 내외를 더 싫어한 이유가 무엇일까. 사람은 진심어린 말보다는 달콤한 말이 더 끌리게 된다. 인조는 소현세자 내외의 모든 것이 못 마땅히 여기여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그 남은 삶을 송두리째 빼앗아 가버렸다. 소현세자 내외가 청나라에 사절로서 간 게 아닌 볼모로 갔지만 그곳에서 그 어떤 사절단 보다 더 열심히 청나라와의 개선을 하기위해 열심히 노력했으며 갇혀있는 생활 속에서도 꿋꿋하게 그 삶을 받아들었고 자기보다는 백성을 생각했으며 고국으로 돌아가면 새로운 학문을 펼칠려고 한 것 인데 인조(아비)의 눈에는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면 자기의 왕권의 자리를 노릴 것 이라는 생각이 더 두각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인조가 그렇게 생각한 것도 자기의 생각보다는 주변인 (즉 인조의 후궁)조소용과 간신배의 역할이 많이 적용했을 것이다. 소현세자는 볼모의 생활 자체가 고달프고 괴로운 것 보다는 어느 부모나 다 할 수 있는 애정어린 관심이 소현세자에게만 무색할 정도의 인조의 무관심이 또 한번 무너져 버린것이 아닌가 싶다. 둘째는 사람은 시대를 잘 타고나야 된다는 소리를 한다. 그게 맞는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가면서 옳은 일을 하지만 그 시대에 앞서가다 보면 그거에 대해 시기하는 사람들 때문에 제대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별궁의 노래에서 소현세자빈 (민회빈)을 봐도 그렇다. 여성이지만 남편의 그늘에서만 머물지 않고 짐 현대에서 말하는 강한 여성상을 그려지고 있다. 빈궁은 청나라에서 볼모로 지내는 것을 치욕스럽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빈궁은 불편한 상황 속에서도 백성들을 지켜내기 위해 여성으로써도 그 시대에서는 감당하기 쉽지 않은 걸 과감한 시도한 여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쩜 빈궁이 과감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백성을 위한 마음이 아니었나 싶다. 인조의 너그러운 마음을 가졌다면, 아니 소현세자의 내외의 맘을 알았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세자 내외의 더 많은 인품을 알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