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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와 선불교를 대하는 엇갈린 시각...
"초기불교와 선불교를 대하는 엇갈린 시각..." 내용보기
방경일씨의 <초기불교 vs 선불교>는 “붓다의 친설이 아니라고 佛說이 아니라면 니까야도 佛說이 아니”라 말한 권오민교수가 촉발한 논쟁과 관련한 책이다. 저자는 권오민교수가 그랬듯 니까야(초기불교도들이 주장하는 붓다의 원음이 실린 경전)가 붓다의 친설이 아니라는 관점에 따라 책을 써내려갔다.(37 페이지) 물론 저자는 붓다를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인물로 인정했다.(18 페이
"초기불교와 선불교를 대하는 엇갈린 시각..." 내용보기

방경일씨의 <초기불교 vs 선불교>는 “붓다의 친설이 아니라고 佛說이 아니라면 니까야도 佛說이 아니”라 말한 권오민교수가 촉발한 논쟁과 관련한 책이다. 저자는 권오민교수가 그랬듯 니까야(초기불교도들이 주장하는 붓다의 원음이 실린 경전)가 붓다의 친설이 아니라는 관점에 따라 책을 써내려갔다.(37 페이지) 물론 저자는 붓다를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인물로 인정했다.(18 페이지) 하지만 <초기불교 vs 선불교>는 초기불교도들이 듣기에 불편한 말들이 가득한 책이다. 예컨대 그는 4성제를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초기불교도들을 집단 의식화로 인해 정신에 병이 든 사람들이라 본다는 말을 했다.(55 페이지)  

 

그 외에 저자는 많은 파격적 인식을 나타내보였다. 그 유명한 불교의 5온(蘊)에 대해 저자는 색(色)을 연하여 수(受)가 생기고 수(受)를 연하여 상(想), 행(行), 식(識) 등이 차례로 생기니 이는 색 즉 물질로부터 모든 것이 비롯된 것이기에 결국 불교는 유뮬론이 될 수 밖에 없고 이의 해결책은 심(心)을 제 1원인으로 인정하면 된다는 것이다. (69 페이지) 심(心)을 제 1원인으로 인정하는 것은 유식(唯識)이나 선사상(禪思想)을 인정하면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초기불교도들은 죽음 이후 제한된 의미의 윤회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오직 물질만이 실재하기에 죽음 이후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조건적일망정 윤회를 인정하는 종교를 어떻게 유물론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이해할 수 없는 여러 부분들 가운데 가장 먼저 손꼽아야 할 대목은 저자가 초기불교도들은 죽음 이후에는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고 말한 부분이다.(108 페이지) 그러면서 그는 우리의 삶에 소멸이란 없으며 재생이나 환생 등을 통한 무한반복만이 있다는 말을 한다. 이 말에서는 어쩔 수 없이 힌두적 분위기가 느껴진다. 저자는 붓다가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 무지하게 어렵다고 했다는 말을 하면서 이런 구조에서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은 완전한 소멸을 이루는 것이라 말한다.(108 페이지)  

 

저자가 말한 ‘완전한 소멸’과 초기불교도들이 말하는 죽음 이후에 ‘아무 것도 없는 것‘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초기불교도들은 깨달음의 네 가지 단계 중 최고 단계인 아라한만이 죽음으로써 완전한 소멸을 이룬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해저 2만리>가 소설에서 현실이 되었다는 말을 하며 자신이 연기설에 대해 소설을 쓰고 있지만 결국 현실로 증명될 것이란 말을 한다.(109 페이지) 그러나 관념적인 종교 현상들이 어떻게 과학적으로 입증될 수 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저자의 파격적인 주장들 가운데 가장 크게 다가오는 부분은 무아와 윤회는 양립 가능할 뿐 아니라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 말한 부분이다.(143 페이지) 힌두교에서 말하는 진아(眞我)를 불교의 무아(無我)에서 비롯된 개념(144 페이지)이라 말하기도 한 저자는 ‘무아와 윤회는 양립 가능할 뿐 아니라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는 말과 매치되지 않는 듯 보이는 이런 말도 했다. 무아윤회설은 궤변이라는. 윤회라는 문제를 해결할 방법으로 무아를 지목했음에도 무아와 윤회는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양립 가능하다는 것이다. ‘무아윤회설은 궤변’이라는 말과 ‘무아와 윤회의 양립은 가능하다’는 말의 차이는 무엇인지 모르겠다.  

 

저자의 주장대로 힌두교의 진아 개념이 불교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해도 진아를 곧바로 무아로 간주해서는 안된다. 불교의 무아가 힌두교의 진아의 원천이라지만 힌두교로 들어간 진아는 무아와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각묵스님은 간화선은 무전제의 수행인데 이 수행을 진아, 대아, 아뜨만식의 그 무엇을 세우는 수행과 동일시 하는 것은 큰 문제라는 말을 했다. 저자는 무아를 직접 체험하면 윤회를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을 했다.(149 페이지) 이는 무아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아픈 이야기로 들릴 수 있다.  

 

저자는 초기불교도들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불교인들이 불교가 힌두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것은 착각이라 말한다.(170 페이지) 그리고 보살(菩薩)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만 한다면 실재하지 않는다 해도 괜찮다고 말함으로써 다불(多佛), 다보살(多菩薩) 사상에 대한 신뢰를 표했다.(180 페이지) 그러나 저자는 불교가 힌두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생각은 착각이라는 말과 합치되지 않는 이런 말도 했다. 마두보살, 청경보살 등은 불교가 힌두교의 시바신을 받아들여 형상화한 것이라는.(170 페이지) 논리적 일관성이 결여된 것이 아닐 수 없다.  

 

저자에 의하면 불교는 힌두교보다 먼저 생겨난 종교이다.(170 페이지 -“불교가 시작되었을 때 힌두교는 없었다.“) 하지만 힌두교가 생겨나 두 종교가 공존하게 된 이후에는 원론적으로 불교는 얼마든 힌두교의 영향을 받는 것이 가능했다고 해야 한다. 지적하고 싶은 저자의 오류 가운데 하나는 이것이다. 저자는 초기불교를 겨냥해 팔정도를 닦으면서 바른 생활을 하는 것이 불교의 목적이 아니라면서 그게 목적이라면 불교는 윤리지 종교가 아니라는 말을 했다.(175 페이지)  

 

하지만 초기불교도들이 팔정도를 닦고 바른 생활을 하는 것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것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저자는 더구나 붓다가 배격한 주문(呪文)을 외울 것을 주문(注文)했다.(175 페이지) 그러나 독자인 내가 보기에 주문은 기복과 연관된 것이다. 물론 문제는 기복(祈福)이냐 작복(作福)이냐가 아니라 깨달음이다. 대승불교도들은 수시로 成佛하라는 말을 한다. 그런데 주문을 외우고 복을 구하기만 하면 언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인지... 

 

전술한 대로 저자는 니까야를 붓다의 친설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대승불교의 공(空)은 초기불교의 무아(無我)를 달리 표현한 것이라는 말을 했다.(160 페이지) 이어 유식(唯識)도 불설이며 결국 대승 자체가 불설이라는 말을 했다. 저자는 진아의 존재방식에 대해 이름만 진아요 아뜨만이지 내용은 무아라고 주장한다.(173 페이지) 앞서 거론한 각묵스님의 말과 얼마나 다른가 보라.  

 

저자는 니까야는 붓다의 親說이 아니기에 佛說이 아닌 반면 대승경전은 祖師들의 말이지만 붓다의 원음에 합치하는 글이기에 불설이라는 말을 했다. 하지만 저자의 주장에서 문제가 되는 바는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를 바라보는 2중적 관점이다. 저자는 초기불교에 대해서는 붓다의 親說이냐 아니냐를 기준으로 삼은 반면 대승불교에 대해서는 붓다의 말씀과 합치하느냐 아니냐를 기준으로 삼았다. 대승불교 경전들이 祖師들의 말이지만 붓다의 말씀과 합치하느냐 아니냐를 따졌다면 니까야에 대해서도 누구의 말이냐를 따질 것이 아니라 붓다의 말씀과 합치하느냐 아니냐를 따져야 옳을 것이다.  

 

‘선종은 불교와는 다른 종교인가?‘와 ’간화선만이 정통인가?‘에서 저자는 대승불교는 초기불교와 상통하되 수준이 높은 불교라는 취지의 말을 한다. 사실 내가 저자로부터 귀하게 배운 것이 있다면 위에서 말한 두 개의 챕터에서였다. 일상의 비근한 언어들이 아닌 학술적인 개념어들이 복잡한 계보들과 얽혀 다가오지만 선불교 전체의 풍경화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된 것은 사실이다. 물론 초기불교도라 하지 않고 초기불교주의자라 칭한 저자의 어법은 다소 실망스럽다. 또한 초기불교도들을 굉장히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불편하게 다가온 것도 사실이지만 역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초기불교 vs 선불교>는 불교도도 아니면서 몇년 전 위빠사나 수행을 했었다는 이유만으로 고른 책이다. 논쟁을 좋아하는 성격이지만 불교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서평을 쓴 것은 나름의 정리를 위해서이다. 잘못 쓴 부분이 있다면 누구든 지적해 주기를 바란다. 

m******1 2012.02.11. 신고 공감 2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