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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골고다에서 십자가보혈을 흘리시기전에 주님의 사역을 대변하실이가 오실것을 말씀하셨다. 주님이 가시면 보혜사성령님을 보내어 주신다는 말씀이었다. 보혜사란 주님옆에서 대변해주시는분이라는 뜻이다. 성령님께선 예수님을 주로 고백한 자들 안에 찾아와 계신다. 구약시대의 귀로듣던 성부하나님이었고, 예수님시대는 눈으로 보던 이땅의 성자하나님이었지만 오늘날 역사하시는 분은 성령하나님 이시다.
오스왈드챔버스 목사님의 성령론 "그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에서는 주신이도 주님이시고, 거두시는 이도 주님이시기에 보혜사성령님은 오직 예수만을 영화로이 하신다는 고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고귀한 내용, 너무나 당연한 내용이 평상시에 단순상식으로 지나쳐지지 않았는지 내자신에게 스스로 물어볼일이다. 주님홀로 영광받으셔야 당연함을 입으로 시인하고 있지만 알게모르게 성령의 은사와 체험을 받음으로 주께 간증하며 주님의 십자가고난 대신 이생애에서의 자기스스로의 인생역경의 고난과 핍박이 대신 들어차서 영적교만으로 치솟는경우를 무시할수 없는것이다.
성령님께서 주님을 통하여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며 우리를 영화로운 단계까지 안착시키시려는 영화로운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드린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라 자칭하는 저마다의 모습을 다시금 돌아보게 하는 시간을 갖게하여 설령, 나자신은 아니라고 부인하지만 어쩌면 평상시 강하게 부인하던 인물이 나자신이 될수가 있음을 "그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를 읽으며 도전받게 되어 이책을 주변의 이웃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책이다. |
인상깊은 구절우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한 목적 외에 다른 목적으로 성령 세례를 원하여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응답하실 수 없다.
챔버스 목사님의 책들을 읽다보면 내 신앙을 되돌아보게 되고 고민하게 된다. 그동안 읽은 [산상수훈], [기도], [주님은 나의 최고봉]이 그랬고, 이 책도 마찬가지였다. 더 묵상해서인지 진도는 늦게 나갔지만 나와 예수님, 성령님에 대해 생각하고, 그 생각을 조금이나마 정리할 수 있는 값진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성령 충만하면 흔히들 방언과 같은 은사들을 생각하는데 성령은 은사나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이 보내신 인격체로서 우리의 삶 전체를 주관하시고, 구원받은 우리 안에 나 자신이 아닌 예수님이 주인이 되심을 알려주시는 분이시다. 성령을 받으려면 오직 예수님만을 붙들어야함을 강조하고, 특히 저자는 우리의 중심이 예수님이 되어야 함을 말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결단하는 것이 아니라, 텅 빈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오면, 예수님이 자신의 것으로 우리를 채우시고, 우리는 그 채우심으로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주님을 위해 일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 역사하시는 것이다. 모든 것은 주님이 하신다!
사실 책을 읽으면서 구원에 대해 혼란이 생겼다. 저자는 ‘사람의 믿음은 그가 그리스도인이 된 후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다’ (49페이지) 라고 말하지만 성경에는 분명히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라고 말한다. 우리의 행위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분명하다. 하지만 예수님이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믿어야 천국의 영생을 선물로 받는 것이 아닐까? 신학을 공부하거나 신학적 지식이 없기에 판단하지는 못하겠지만, 이 부분은 극단적 예정론이 아닐까 싶다. 물론 내가 잘못 이해했을 수도 있을테다...
이 책의 원제는 <He Shall Glorify Me - Talks on the Holy Spirit and other themes>이다. 성령과 다른 주제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까? 부제 ‘오스왈드 챔버스의 성령론’이라 해서 성령에 대한 내용이라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다. 성령에서 시작해서 제자의 삶까지 이르는 37개의 챕터에는 주옥같은 글로 가득 차 있다. 이 보석이 빛을 발하려면 읽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목사님의 말씀처럼, 자신을 예수님께 온전히 내려놓고, 주님이 행하실 일들을 기대하면서 살아야 할 것이다.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통해서 나도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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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만 역사하신다"(15).
그렇게 하는 것이 허락된다면, 나는 이 책에 담긴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의 문장(표현)과 가르침만으로 이 글을 쓰고 싶다. 나의 말을 섞지 않고 말이다. 영적 진리를 이보다 더 명쾌하고 분명하게, 그리고 확신있게 선포하는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보지 못한 듯하다. 언제나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의 가르침은 철저하게 예수가 달린 십자가를 향하여 있고, 놀라운 영감으로 가득차 있다.
<그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는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의 '성령론'이다. 오순절 교단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신학 공부를 하고, 또 목회자로 사역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특별히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의 '성령론'이 더욱 궁금했다. 오스왈드 목사님의 가르침을 읽을 때면, 엠마오로 향하는 두 제자처럼 마음이 뜨겁게 달구어지는 역사가 일어나고 가던 길을 돌이키는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이 책에 대한 기대감이 나를 설레게 했다.
그런데 나는 제목만 읽고도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의 가르침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성령론'에 관한 책인데 제목이 <그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라니! '성령'을 주제로 한 어떤 설교나 가르침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메시지이다.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만 역사하신다"(15).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의 '성령론'은 바로 이 한 문장 안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모든 가르침의 핵심이 들어 있다. "성령은 언제나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신다. 바로 이 점이 우리가 성령을 받아야 하는 가장 절대적인 이유이다"(37).
역사적으로 '성령'이 나타나시는 '현상' 때문에 오해와 비난과 핍박을 당했던 오순절 교단에서는, 전통적으로 성령을 체험하는 성경적 현상과 그 의미를 해석하는 작업에 주안점을 두고 성령론을 펼쳐온 것이 사실이다. 성령세례와 방언 현상이라든지, 신유와 같은 성령의 능력에 관한 연구 논문이 많다. 그런데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은 성령을 선물로 받은 사람의 특징을 이렇게 정의한다. "성령을 선물로 받은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을 향한 헌신이다"(31). 성령을 선물로 받은 증거는 하나님을 향한 헌신이라는 것이다! 성령론을 가르칠 때,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는 구절을 근거로 '성도의 유익'을 많이 강조해왔는데,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은 그 초점을 완전히 뒤바꿔놓는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성령을 받고 하나님을 향한 헌신의 사람이 되는 것을 성도의 '유익'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의 '성령론'에는 '오순절' 사건을 인류 역사 가운데 다시는 반복될 수 없는 단 한 번의 사건으로 보는 관점(33-36) 등 아직 신학적인 논쟁의 여지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그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는 우리가 반드시 붙들어야 할 푯대, 그러나 대부분이 놓치고 있는 그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보여준다. "성령을 어떤 능력으로만 생각할 때 내주하시는 성령에 대한 놀라움을 잃게 된다. 성령 사역에서 많이 간과되는 부분은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주님께 영광을 돌리게 한다는 점이다"(36). 성령을 사모하는 자마다 그 간절함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진지한 질문해봐야 할 것이다.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은 이렇게 답한다. "당신은 왜 성령으로 세례 받기를 원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52-53).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은 언제가 '내'가 아니라, '주님'만 바라보도록 영적 시각을 교정해주며,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보다 하나님께서 내게 행하실 일을 기대하게 만들어준다. "우리 안에 임하시는 성령은 예수님을 위하여 뭔가 '하도록 하는' 영이 아니라 우리로 주님의 완전한 기쁨이 '되게 하는' 영이다"(32). 하나님을 위해 위대하고 성공적인 모험을 하라고 성령 세계를 주신 것이 아니다. 성령 세례를 주신 것은 "오히려 우리가 지금 있는 곳에서 예수님의 만족이 되라고 주신 것이다"(70).
이 책의 제목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듯이, 성령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한다! 복음을 쉽게 설명한 '4영리'를 보면, '내'가 앉아 있는 자리에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구원이요, 거듭남이라고 설명한다.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의 가르침은 언제나 내가 있어야 할 자리, 그리고 예수님을 모셔야 할 자리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성령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의 밑바탕에는 부요가 아니라 궁핍이 있다고 말씀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결단이 아니라 완전한 좌절감이 있다는 것이다.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의 가르침은, 그 완전한 좌절감 속에서만 비로소 누릴 수 있는 영적인 자유함을 선물한다! 해방의 기쁨은 얽매인 고통이 클수록 더 벅차오르는 법이다. 이 책은 나의 내면을 변화시킬 성령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집중하게 만든다. 내가 주님을 위해 할 일이 아니라, 주님이 내게 이루실 일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 차오르게 한다. 이 순간에도 내가 기대하지 않는 방법으로 나의 삶에 침투하실 성령님을 기대한다!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의 '성령론'은 특별하고 새로운 신학이 아니다. 가장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성경적 가르침이다. 모든 성령론은 바로 이 토대 위에 세워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 누구에게보다 내가 속한 오순절 교단에 필독서로 추천하는 바이다! <그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이 말씀 앞에 나의 얉은 신앙을 회개한다. 이 말씀이 중심에 서야 하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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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가 사람들로 하여금 비난을 받고 있다. 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을 우리 그리스도인이 만들어 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는 늘 듣는 것에만 익숙해져 있다. 설교를 통해 하나님 말씀을 즐겨 듣지만 하나님 말씀대로 행동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바라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드리기보다는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받고자 새벽부터 저녁까지 밤을 새도록 기도하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는 무엇인가를 내어놓기보다는 무엇인가를 채워 넣으려는 습성이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성령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인격이신 성령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보다는 어떠한 능력이거나, 어떠한 해결책으로 이용하거나 은사적으로만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보니 크리스천으로서의 삶의 변화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성령을 받기에만 급급해있기도 하다. 물론 성령을 받는다는 의미조차도 잘 이해하지 못하기도 하다. 성령의 시대,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천이 이 땅에 20%가 넘지만 불법이 성행하고, 더 많은 사건과 사고가 생기는 것 역시, 우리가 잘못된 신앙에 젖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의 책들은 이러한 잘못된 우리의 신앙을 늘 바로 잡는 내용이다. 그분의 책들은 곧은 그분의 성품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이 책 역시 우리가 깨닫지 못했거나, 잘못 깨닫고 있는 것을 수정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특히 성령에 대한 우리의 인식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단순히 성령을 하나의 능력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이 책은 인격이신 성령님을 소개하고 있다. 그 중의 한 부분을 써본다면 다음과 같다. ‘성령을 받을 때 곧바로 나타나는 현상은 평화나 기쁨이 아니라, 당황함과 놀라움이며, 우리는 안정감이 아니라 괴리감을 가지게 된다.’ 우리가 그동안 들어왔던 부분과는 조금은 다른 생각임에 분명하다. 사실 우리는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하지 않으면 머릿속이 복잡할 필요가 없다. 그저 한 광고의 카피처럼 내 생각대로 내키는 대로 행동하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령이 함께하실 때에는 결코 내 생각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성령님은 우리 자신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결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위한 그분의 영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늘 기도하기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채워달라며, 성령의 능력을 덧입혀 달라고 기도하고 있지만, 그것이 올바른 기도인지 아닌지에 큰 관심이 없다. 그러나 성령님은 우리에게 단순히 능력을 주시거나 어떠한 해결책이 아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땅끝까지 전하도록 하는 분이 성령이시다. 사실 이 책이 쉬운 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동안 내 안에 있던 성령님에 대해서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책이다. 요즘 드는 생각이지만, 나를 비롯한 크리스천들이 성령세례를 받고 성령충만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지만 성령님과 동행하고 있지는 않는 것 같다. 그 이유는 우리의 삶의 모습이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님이 나와 동행하신다면 우리도 성령이 하시는 사역을 감당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저 입으로만 성령을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성령께 지배되도록 기도해야 할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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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만 역사하신다!” “오순절을 개인적인 체험으로만 보려는 발상을 주의하라. 성령 강림 사건은 체험적이라기보다 역사적인다…체험은 계시에 근거하고 계시에 의해 점검되어야 한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글을 읽고 있으면 예화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설교하시는 존경하는 목사님이 계속해서 생각이 난다. 자신이 깨달은 진리대로 살아가는 믿음의 선배를 글을 통해 만나는 영광을 누린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버림받고 짓밟히는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깨끗하고 바르고 당당하게 사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이 부분은 나 역시 동의한다. 동의한다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을 것 같지만, 나는 이 부분을 자주 잊어버리고 산다. 법 없이 살 것 같은 사람도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원이 필요하다! 최근 개인적으로 중보기도에 대해 많이 말씀해 주시고 계시는데 이 책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내가 예수님과 연합되어 있으면 나의 체험에 대해 강조하지 않고 나 자신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하나이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과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모든 부분이 그러하겠지만, 특히 이 부분은 삶으로 경험했음을 내 마음에 전달되었다. 내 기도생활을 돌아보면 확실하다는 생각이 든다. ‘영적 여정에서 가장 큰 위험은 신앙 체험이라는 낮은 해변을 깊은 바다로 오해하는데 있다!’ 성공적인 사역을 마친 후에 우리는 기쁨과 환희로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이때 더욱 무릎을 꿇고 겸손히 기도할 수 있어야 안전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러한 기도의 시간이 없다면 우리 영혼은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이다. 진짜 맞는 말씀이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더 많이 더 열심히 했을 경우, 그 후에 찾아오는 방황(?)을 경험했었다. 사탄에 덫에 걸리지 않도록 기도로 나아가는 시간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의 자연스러운 절차와 같이 중요함을 깨달았다. (26장 하나님과 함께하는 골방) 교회 안에서의 성령의 거하심은 아직 완전하지 않다. 이 세대의 기독교 공동체에는 불순물이 얼마나 많이 섞여 있는지! 그리스도께서 주신 특별한 그리스도의 몸, 교회를 세우기 위함이다. 그런데 저자의 눈에 비친 것처럼 내 눈에 보이는 많은 공동체가 사람의 재능만을 성령의 은사처럼 여기는 점이 아쉽다. 나는 교회에서 나누어 지는 ‘간증’이 아주 은혜로울 때도 많지만, 때로는 아주 불편할 때가 있다. 저자의 말처럼 많은 간증의 약점이 주님께서 자신들을 위해 행하신 ‘일’에 근거하여 증거한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도 내가 체험한 것을 경험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하신 일들을 증거해야 해”라고 전달될 경우가 많다. 저자는 이 말은 듣기는 좋지만 성경적이지 않다라고 말한다. 개인적으로 청년부에서 성경공부를 나누면서 16장(패배에 대한 두려움)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의 후예들과 문명’에 대해 배우는 중이었는데 팀원들과 문명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어떻게 나누어야 하는지 몹시 난감했는데 제때에 그 부분을 읽게 하셨다. 문명이 옳은 것이며 인간이 아는 최고의 것이라면 이와 반대로 기독교는 심각한 실수가 된다. 성경으로 돌아가면 문명은 우리가 아는 최고의 것이 아니며 철저하게 잘못된 기반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 이유는 문명의 중심은 ‘이성’에 부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어느 시대라도 동일하겠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잊고 사는 부분을 일깨워 주는 부분이라 생각이 된다. 책을 읽으면서 깜짝 놀란 부분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지성이 언제 가장 최상의 상태인지 잘 알고 있다. 만일 그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자신의 개발을 위해 사용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다. 재정의 십일조, 시간의 십일조를 드리는데 그치지 마라. 최상의 것을 드린 마리아와 전부를 드린 한 드라크마 드린 여인이 생각났다. 이 책을 읽으면서 꽤 자주 접하게 되는 문장이 있다. ‘무엇과 무엇은 다르다,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무엇이라는 생각은 위험하다,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라는 표현인데 그러한 문장을 만날 때마다 한편으로는 두려운 마음이 있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평소 생각하지만 긴가민가했던 부분을 명백하게 설명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평소 책을 다룰 때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다시 읽어봐야 할 부분은 밑줄을 밑줄을 그어가면 읽는데 오스왈드 챔버스의 책은 그 밑줄이 가득하다. 안타까운 점은 부제로 한글로는 ‘오스왈드 챔버스의 성령론’이라고 되어 있는데, 원제목처럼 ‘Talks on the Holy Spirit and other themes Oswald Chambers’처럼 ‘성령론과 다른 주제들’이라는 제목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사실 이 점은 아주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부분은 아니라고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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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가 오스왈드 챔버스의 ‘성령론’이라고 되어 있기에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진술 위주의 책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었는데, 그러한 생각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책이었습니다. 오히려 이전에 읽었던 ‘주님의 나의 최고봉’이나 ‘산상수훈’과 같이 깊은 묵상에서 나온, 그래서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게 해 주는 저자 특유의 저술 방식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책이었습니다. 이 책은 모두 3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성령님에 대해 다룬 부분은 주로 1부에 국한되어 있었고, 2부는 주님의 능력과 그로 말미암은 승리에 대해, 그리고 3부는 주님의 제자로서의 순종하는 삶에 대해 묵상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성령론에 대해 다루고 있는 분량이 생각보다 적어서 조금은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분량이 적은 만큼 저자의 성령론에 대해 깊이 있게 살펴보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자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말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저자는 성령세례를 거듭남과 동일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저자는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라는 니고데모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이것은 성령님을 선물로 받음으로 가능하다(20쪽).“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성령세례를 통해 거듭나게 되고, 중생의 씻음을 경험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예수님과 연합하게 된다는 점을 강조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성령세례를 통한 개인적 체험의 결과는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53쪽). 성령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바로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에, 성령을 그 속에 모신 자들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자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이러한 주장과 더불어 우리가 성령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이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주장도 함께 펼치고 있었습니다. 저자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53쪽).”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령세례를 받으려면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주님만 붙들어야 한다(53쪽).”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지금 이 시대는 성령의 세대이니 성령을 구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말하지만, 그럼에도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성령을 개인적으로 받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29쪽). 그런데 이러한 저자의 앞의 주장과 조금 상충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기도는 이미 거듭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결국 저로서는 저자의 이러한 주장들을 서로 조화시키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결론은 ‘간절한 기도를 통해 성령세례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거듭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결론에 따르면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라는 고백을 하는 것만으로는 거듭났다고 할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오늘날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대부분의 기독교인들 중에 간절한 기도를 통해 성령세례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거듭났다고 할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명목상의 기독교인일 뿐 거듭난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말이 됩니다. 따라서 그 모든 명목상의 기독교인들은 간절한 기도를 통해 성령세례를 받아야만 하고, 그래서 거듭나야만 하고, 예수님과 연합해야만 하고,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인으로써 살아가기 위힌 성령님의 능력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라는 결론이 내려지게 됩니다. 사실 한 번 정도 읽어 본 것만으로 저자의 주장을 정확하게 이해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자로서는 이렇게 정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러한 저의 정리가 저자의 주장을 바르게 정리한 것이라고 할 때, 사영리와 같은 전도 방법을 통해 자신이 믿음의 결단을 했기 때문에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과연 이러한 저자의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이러한 저자의 주장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고 거부하고 반발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목회자들 중에도 이러한 저자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못할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자의 이러한 주장은 현대 교회의 안일한 가르침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저자가 성령세례에 대해 어떤 체험적인 부분이나 신비스러운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저자는 성령세례를 통해 얻는 체험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러한 체험은 영적 여정의 초기 단계에서 누리는 것으로써, 신앙이 점점 더 깊은 곳으로 가게 되면 그러한 체험을 중요시 하지 않게 되며, 오직 주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에 더 깊은 관심을 두게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32쪽). 그런 점에서 저자가 주장하고 있는 성령세례가 오늘날의 신비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말하여지는 성령세례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소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할 때, 앞서 정리한 저자의 주장은 우리가 결코 가볍게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자가 말하고 있는 성령세례의 필요성은 결국 거듭남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삶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반드시 선택해야만 하는 문제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저자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진실로 거듭났는가?’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돌아볼 수 있게 해 주는 중요한 기회를 제공해 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성령세례에 대한 신비주의적인 주장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세례에 대한 바른 이해와 체험을 통해 신앙의 진보를 경험하고자 하는 분들에게 적지 않은 도움이 될만한 책이라 생각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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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할 의무가 있다.육신의 부모도 당신들을 기쁘게 해 드리면 작은것 하나에도 기쁨 을 금할 수 없어 하시는데 하물며 영의 아버지인 하나님은 더하시지 않을까? 예수님 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렸듯이 우리 또한 성령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한 다. 그러나 우리는 이마저도 우리의 축복을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 기준이 아닌 내 기 준에 맞추고 있다. .....하기 전에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후에 영광 을 올려 드리고 있다. 이것이 예수님이 영광을 드린것과 우리가 드리는 영광의 극명 한 차이점이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설교집 <그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는 성령의 사역과 특성을 중 심으로 어떻게 성령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아서 그 분을 영화롭게 해 드릴 수 있을까 에 내용이 맞춰져 있다.
챔버스 목사님의 설교는 늘 깊고 오묘해서 그 깊이를 되새김질을 하면서 씹고 또 씹 어야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있지만 그래도 이 책을 통해서 성령님에 관한 사역, 그 정 교함의 깊이를 알게 된것이 기쁘기만 하다. 목사님이 추구하는 진리의 깊이가 너무 깊어서 때로는 이성이 미처 닿기도 전에 잊혀지기도 하지만, 읽고 묵상하다 보면 언 젠가는 깊고 맑은 맛의 청량함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상의 선물은 예수님이시고 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 물은 성령님이다. 이 성령님은 수정처럼 투명하셔서 우리의 모든것이 발가벗긴 듯 드 러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죄성으로 얼룩져 있는 영혼의 묵은 때를 이 성령 님을 의존해서 씻김을 받고 더 거룩한 생활로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의지해야 된다. 이렇게 사람이 바뀌는 것은 우리의 믿음 때문이 아니라 오 직 성령을 받음으로만 가능하다.
믿음은 내 편에서 붙들 수 있는 것이기에 나를 더 강조한다. 그러나 성령을 받게 되면 전적으로 성령님이 하시는 사역이기에 영광도 그 분의 몫이 된다. 우리가 성령을 의 지할 때에도 이전의 상황은 아무 소용이 없다. 영적세계에선 오직 '지금'이 중요하 다. 지금 이시간, 내가 성령님을 의지하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바로 이 사실이 우리 가 구원 받아서 다른 사람으로 변하였는가? 하는 영적인 자각,깨우침의 물음을 늘 진 지하게 자신에게 물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기준이 오직 성령님께 있기 때문 에, 그럼으로 우리는 성령님과의 관계의 끈을 늘 놓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된다.
"믿음은 체험이 아니라 체험으로는 붙들 수 없는 하나님께 두어야 한다" 현대의 기독교가 성령의 사역을 이렇게 오해하고 있거나 '체험'이라는 이 테투리 안 에 고정 시켜 버리면 성령님을 제한시켜서 우린 성령님에 대해서 더 이상의 무한한 것들을 볼 수 없게 된다. 스스로가 제한한 것 때문에 우리 또한 그 이상의 사역에 제 한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 슬픈일이다.
기독교의 믿음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성령님에 의해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안에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하나 님이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하실 수 있느냐는 부차적인 문제이다. 오히려 내가 먼저 하 나님과 인격적으로 올바른 선상에 서 있느냐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 관계를 늘 점검 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일이다. 이 일 조차도 우리 스스로 는 할 수 없다. 내가 얼마나 부족한 자인가를 더 깊이 깨달을수록 성령님을 의지하는 강도도 더 깊어질 수 있다.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영적인 오랜 습 관 때문에 이 일이 게을러지지는 않았는지 무디어지지는 않았는지..? 이 책을 통해서 점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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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2천년 역사 동안 무수한 논쟁이 있어왔다. 그 논쟁들을 중심으로 각 시기를 살펴보면 오늘날은 성령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오늘의 주요 화두는 성령이다. 초대교회에는 아직 교회의 기틀이 마련되지 않은 까닭에 외부로부터 교회를 지키고, 바른 교리의 확립을 통해 교회의 정체성을 세우는데 주력했다. 중세에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이해를 쌓는데 힘썼다. 그리고 근대에 이르러 그리스도에 대한 신학적 논쟁이 일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가운데서 성령에 대한 조명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러나 다른 지식들이 체계를 잡은 오늘, 드디어 성령에게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 했다. 2천년 동안 수많은 논쟁과 대립을 통해 성부, 성자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쌓여 그에 대한 이해의 양분은 이제 보기 힘들다. 하지만 근자에 성령론이 화두가 되면서, 다시 말해서 성령에 대한 지식이 이제 막 쌓이기 시작하면서 많은 문제점이 발생했다. 성령에 대한 바른 이해와 지식이 적다보니 성령을 오해하는 일이 잦았다. 검증되지 않은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부터 집중되기 시작한 성령에 대한 관심은 다른 관심사항들과 마찬가지로 무수한 논쟁을 가져왔다. 특히 성령에 대한 이해에 있어 중요한 문제는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 그리고 은사(주로 방언)였다. 이에 대한 논쟁은 오순절 은사주의로 인해 더욱 뜨거워졌다. 그들은 성령의 강력한 역사의 결정적 증거로 방언을 제시 했다. 그들로 말미암아 방언은 미국을 중심으로 하여 전 세계적으로 확산 되었다. 따라서 성령 세례와 방언의 은사는 성령론에 있어서 논쟁의 핵심으로 확실히 자리 잡았다.
'그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이 책의 저자인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는 짧은 인생을 살았다. 하지만 '주님은 나의 최고봉'이라는 최장기 베스트셀러 등을 남겨 지금까지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는 챔버스 목사의 성령론을 담고 있다. 요한복음 16장 13, 14절을 중심으로 제목과 같이 성령님이 우리를 어떻게 영화롭게 하시고, 우리에게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말해주고 있다. 성령님의 역사에 대한 챔버스 목사의 이해와 가르침이 돋보인다. 이 책을 통해 그분이 우리에게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알고, 우리가 그분의 역사에 어떻게 동참하면 되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그분과 어떻게 관계를 쌓고, 예수의 증인이 될 수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이 책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성령론을 다루고 있다고는 하지만 사실 성령에 대한 언급은 초반을 제외하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물론 넓게 본다면 성령의 역사를 담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언급하고, 그에 대한 집중을 보인다. 이 책의 주 제재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그분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따라서 말 그대로 '성령론'에 대한 챔버스 목사의 가르침을 원한다면 별 소득이 없어 실망하게 될 것이다. 대신 주님이 우리에게 무얼 원하시는지, 무얼 말씀하시는지 등을 성경적으로 알고 싶다면 이 책이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책 초반에 성령 세례에 대한 챔버스 목사의 언급은 앞서 그것이 성령론의 주요 화두라고 말했듯이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에 대한 - 신학 논쟁을 위한 책이 아니기 때문에 - 명확한 설명 없이 단지 언급만 하고 넘어가기 때문에 아쉬움이 남는다.
성경에서 성령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비해 상당히 적게 언급 되고 있다. 따라서 그분이 역사 하시는 방법과 현재 우리에게 나타나는 일들과의 연관성을 찾는 일은 매우 복잡하고, 어렵다. 그렇지만 현재 숱하게 일어나고 있는 논쟁은 계속 되어야 하고, 그것은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지난날 성부, 성자 하나님에 대한 논쟁이 보여 주듯이 그것을 통해 성령님에 대한 바른 이해와 분별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역사에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부족한 이해와 지식으로 인해 많은 혼란이 있었지만 그러한 과정을 통해 명확한 분별이 생긴 것처럼 성령에 대한 지금의 논쟁과 혼란은 우리의 다음 세대에게 더욱 분명한 지식과 섬김을 제공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