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육군중앙공병학교 졸업 후 페테르부르크 공병단 제도반에 근무하다가 스물세 살 나이에 전업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고 퇴역 후 수차례 퇴고 끝에 발표하여 일약 '제2의 고골리'라는 칭송과 함께 러시아 문학의 총아로 떠오르게 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처녀작이자 당시 사회 제도의 가혹한 조건에서 우뚝 선 고결하고 순결한 사람들의 정신적 결합을 그린 러시아 최초'사회소설'로 설레는 봄 4월 8일 데부시킨의 편지로부터, 사랑을 잃고 비통함에 절규하는 9월 30일의 차마 끝맺지 못하는 마지막 편지까지, 55통의 편지, 즉 데부시킨 31통, 바르바라 24통, 그리고 데부시킨의 부치지 못한 편지 1통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때 또 하나의 이야기가 내 눈앞에 떠올랐다. 한 초라한 셋방, 어느 올바르고 마음이 깨끗한 하급관리 9등문관, 그와 함께 등장한 것은 업신여김과 모욕을 당해 슬픔에 잠긴 한 처녀였다."
페테르부르크 빈민가, 서민 공동주택에서 마당을 마주하고 방을 한 칸씩 세들어 살고 있는 두 가난한 사람, 고아 처녀 바르바라 알렉세예브나 (바레니카)와 40대 후반의 9등 문관 하급관리 마르카 알렉세예비치. 이들은 먼 친척간이지만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기도 하다.
지주의 관리인이었던 아버지가 지주가 바뀌는 바람에 실직하고 페테스부르크로 이사를 오지만 아버지는 새로운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가난에 내몰리다가 죽고, 어머니마저 결핵으로 죽게 되자 오갈 데 없어진 바르바라는 친척이라고 우기는 사악한 여자 안나 표토르브나의 집에 몸을 의탁하지만 안나로부터 멸시 천대를 당한다. 소설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아마도 안나는 그녀 자신이 매춘부거나 뚜쟁이인 듯하다. 안나의 집에는 가난 때문에 학업을 포기하고 병마에 시달리는 전직 대학생 포트르 포크로프키가 바르바라의 친척인 사샤와 바르바라의 가정교사 역할을 하고 있었고, 바르바라는 포크로프키를 사랑하지만 그는 결핵으로 죽고 만다. 의지가지 없어진 바르바라는 안나와 그 주위 남자들을 피해 먼 친척 마르카의 도움으로 빈민가 공동주택에 방을 세들게 되고, 돌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랑을 키워나간다.
배운 것 없고 능력도 없이 하급관리로 문서 정서를 하며 순종적인 태도로 조용하게 살던 40대 중년의 데부시킨은 먼 친척뻘이 되는 아가씨 바르바라를 알게 되면서 마치 잠에서 깨어난 듯 일상에 활력을 얻는다. 그녀에게 새 거처를 마련해주고 자신은 이웃집 가장 저렴한 방으로 옮겨온다. 넉넉지 않은 형편이지만 최선을 다해 그녀를 보살피려는 그는 월급을 가불하고 돈을 빌리러 다니다가 모욕을 당하기도 하며, 하급관리에게 필수품이자 분신과도 같은 존엄성의 상징인 제복마저 바르바라를 위해 기꺼이 팔아치우고 추운 거리를 헤맨다. 이것은 나같이 불행한 사람에게는 무엇보다도 즐거움이 되는 것이며 게다가 방세도 쌉니다. ...... 차도 늘 마실 수 없었는데 이번에는 차와 설탕 값이 생긴 셈입니다. 그런데 바레니카, 차를 마시지 않는다는 건 어쩐지 창피한 것 같더군요. ...... 이래서는 마치 남 때문에, 모양새 때문에, 품위 때문에 차를 마시는 것 같습니다만,33
자신을 모두 희생해서라도 그녀를 보살피려하지만 결국 무일푼 신세가 되고 바르바라 또한 데부시킨에게 한없이 감사한 마음을 지니지만 나빠져가는 건강과, 피폐해가는 데부시킨을 지켜보며 괴로워한다. 극도의 제적 빈곤, 나이 차가 많은 커플에 대한 사람들의 조롱과 따가운 시선 속에서 미래가 보이지 않는 하루하루를 절박하게 살아가는 두 사람에게는 자신보다 상대를 더 사랑하는 숭고한 자기희생을 행복으로 여기며 삶의 보람을 느낀다.
"저 봐, 저런 나이의 늙은이가 나이 어린 계집애하고 붙었구려." 148
그러던 중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서로에게서 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르바라에게 지주이자 호색한인 브이코프가 찾아와 청혼을 하고, 빈곤과 결핍과 불행에서 그녀를 구해주겠다고 약속을 한다. 그리고 데부시킨에게도 500루불의 돈을 주겠다고 하고
당신은 아직 어려서 시를 읽고 있다. 소설 같은 것은 젊은 처녀들을 파멸시킬 뿐이다. 책 따위는 도덕을 파괴할 뿐이다. 215
바르바라는 도피하듯 결혼을 결심한다. 전 애써 남에게 다정하게 해 주려고 노력할 작정입니다. 필요하면 제 성격까지도 바꿀 생각이죠. 물론 남들 틈에 끼어 살고타인의 자비를 찾고 자기감정을 숨기고 마음에 없는 짓을 하는 것은 괴롭고 쓰라린 일임에 틀림없지만 신의 도움으로 견뎌나갈 수 있겠죠 그리고 한평생 너울가지가 없는 사람으로 지낼 수도 없습니다. 121
저는 남김없이 당신에게 알려드렸어요, 당신은 저의 괴로운 심정을 알아주시리라고 믿고 있어요. 저의 이 결심을 저로 하여금 바꾸게 하지 마세요. 그것은 헛수고일 것입니다. 제가 이러한 행동을 하게 된 사정을 당신의 가슴 속에서 잘 헤아려 주십시오. 처음에는 무척 불안했지만 지금은 한결 가라앉았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저는 모릅니다. 결국 될 대로 되겠지요. 신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217 바보 같은 데부시킨은 그녀의 결혼 준비를 위해 출근을 하지 않으면서까지 그녀를 도우며 그녀의 행복을 빌어주고 아무튼 행복해 주십시요. 나는 기쁩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이 행복할 것 같으면 나도 기쁠 겁니다. 225
떠나는 그녀의 마음은 찢어진다. 다 끝나버렸어요! 제 운명의 주사위는 떨어졌습니다.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주님의 뜻에 따를 뿐입니다. 내일 저희들은 떠납니다. 제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친구요, 저의 은인이요, 저의 가장 친한 분이신 마카르 알렉세예비치님, 마지막으로 당신과 작별합니다! 저를 슬퍼 마시고 부디 행복하게 지내세요. 저를 기억해 주세요. 신의 축복이 당신 위에 내리옵기를! 저는 마음속으로, 기도를 드릴 때 자주 당신을 생각해낼 겁니다. 이것으로 우리들의 시절은 끝나 버렸습니다! 지나간 것에 관한 추억 속에서 즐거웠던 것을 새로운 생활로 가지고 그런 만큼 당신에 대한 추억은 더 소중할 것이고 저의 마음에 더 소중할 것입니다. 가는 것이 적은 만큼 당신은 저의 유일한 친구이고 당신 한 사람만이 저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당신께서 어떻게 저를 사랑해 주셨는지 저는 다 보고 있었습니다.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저의 웃는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저의 편지 한 줄만으로도 행복하셨습니다. 당신은 이제부터 제가 없는 생활에 익숙해지셔야 합니다. 여기에 어떻게 혼자 남아 계실 건지요! 누구를 의지하고 남아 계실 건지요, 친절한 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단 한 분의제 친구인 마카르 알렉세예비치님! 책이고 수틀이고 쓰다 만 편지고 당신에게 남겨 놓습니다. 그 쓰다 만 몇 줄의 편지를 보실 때 그다음은 마음속으로 이어서 읽어 주세요. 저한테서 들었으면 싶거나 제가 읽어 주었으면 싶거나 한 모든 것을, 그리고 제가 당신께 썼으면 싶은 모든 것을 마음속으로 읽어 주세요. 지금의 저는 어떤 것이든 다 쓸 것 같은 심경입니다! 당신을 이렇게 깊이 사랑했던 당신의 불쌍한 바레니카를 생각해 주세요. 당신의 편지는 모두 표도라의 옷장 맨 위 서랍에 남겨 놓았습니다. .... 이제 영원히 작별하십시다. 저의 사랑하는 벗이여, 그리운 벗이여, 영원히! ......229
하지만 곧 그녀가 불행해질 것을 알게 된 데부시킨은 그녀에게 떠나지 말 것을 애원하는 편지를 쓰지만 그 편지는 더 이상 그녀에게 가 닿지 않는다. 아, 사랑하는 바레니카!……… 그건 안 됩니다. 다시 한 번 편지를 주십시오. 다시 한 번 모든 것에 대한 편지를 주십시오. 그리고 떠나시면, 그러시면 거기에서 편지를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나의 천사여, 이것이 마지막 편지가 되지 않습니까. 이것이 마지막편지가 되다니 그런 일은 도저히 있을 수 없습니다. 글쎄 이것이 그렇게 갑자기 어떻게 마지막 편지가 확실하단 말입니까! 하지만안 됩니다. 나는 편지를 쓰겠습니다. 그러니까 당신도 쓰십시오. 이제 내 문장도 형식이 잡히고 있으니까……… 아아, 바레니카, 문장 따위가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내가 무엇을 쓰고 있는지 도무지 모릅니다. 전혀 모릅니다. 하나도 모릅니다. 다시 읽어 보지도 않습니다, 문장도고치지 않습니다. 그저 썼으면 싶으니까 쓸 뿐입니다. 조금이라도 많이 당신에게 썼으면 싶으니까 쓰는 것뿐입니다………… 아아, 나의 귀여운 바레니카, 나의 그리운 바레니카, 나의 사랑하는 바레니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