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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도스토예프스키가 그의 소설속에서의 주인공들의 들끓는 감성들의 이유들을 논리화했다면, 그는 심리학자가 되었을 것이다. 한편 그의 주인공들이 풀어나가는 삶의 실존적 문제들에 대해 논리화했다면 그는 철학자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삶의 실존적 문제들을 앓고 있는 인간의 감성들을 묘사함로써, 독자들을 끌어들였기에, 그는 위대한 소설가가 되었다. 어느 날, 당신이 출근을 했는 데, 사무실 당신의 책상 근처에 당신과 똑같은 사람이 앉아 일을 하고 있다. 어이없는 이 상황에서, 너무나도 의아한 눈빛으로 인사도 못한채 그를 보고 있는데, 당신이 어제 어떤 의견을 제시하다가 무시당하고 다 좋은데,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당신을 제외한다는 소리를 했던 직장상사에게 그는 당당하게 얘길하며, 당신의 회사 사장이 와서 당신과 똑같이 생긴 그에게 칭찬을 하고 지나가며, 지금 온 당신을 그가 약간 무시하듯이 지나간다면, 당신은 그날 아침을 어떻게 하겠는가? 우리의 주인공, 골랴드킨씨는 직급이 낮은 관리이다. 그는 어떤 예의 범절이나, 외부의 규칙 혹은 사람들에게 부합해야 된다는 강박성이 있고 그것에 예민하기에, 그런 것들에 실수를 했을 때, 자기 자신을 질책하는 타입의 성격의 소유자이다. 오히려 그는 너무나 완벽하게 모든 것을 다 지킬려다 보니, 조그마한 실수에도 쉽게 스스로를 자책하는 지도 모르겠다. 이런 그의 자아는 일상생활 속에서 ‘착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병원에서 나온 그는 그의 은인인 직급이 높은 베렌제예프씨의 외동딸의 화려하고도 즐거운 생일파티에 가나, 그녀의 집에 들어갈려 할때 하인들이 그를 막고 초대받았다는 그의 얘기에도 그를 못들어가게 하는 것인데, 딱히 이유는 밝혀지지 않는다. 그는 그 파티에 들어가고 싶어 추운 겨울날 그녀의 집 어둑한 뒷문 층계에서 막무가내로 들어갈까 말까를 고민하다, 결국은 들어간다. 집안의 이곳 저곳을 거쳐 그가 마침 무도회장에 들어섰을 땐, 결국 생일파티의 주인공인 외동딸과 마주치게 되고, 모든 사람들이 하나 둘씩 그에게 싸늘한 시선을 던지는 것을 눈치챈다. 그를 내쫓을려고 다가 오는 하인에게 변명을 하고 있는 찰나, 음악이 다시 시작되고, 그도 파티의 주인공과 춤을 추고 싶어 다가가나, 결국은 붙들린채 집에서 쫓겨나게 된다. 나는 이때부터 오래전에 읽은 카프가의 소설들이 생각났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골랴드킨씨가 그의 상관들을 아버지처럼 생각했다 말에 더욱 더 도스토예프스키 스타일의 카프카적 주제를 만난 듯 했다. 골랴드킨씨는 쫓겨난 후 자정, 눈보라가 치는 밤, 열병처럼 끓어오르는 좌절감과 부끄러움에 지친 채, 집으로 걸어가는 데, 어두운 맞은 편에서 누군가가 그를 스쳐 지나간다. 그 행인은 알고 보니 놀랍게도 바로 자기 자신이다. 그런 자신이 또 한번 지나간다. 이 부분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묘사가 너무 생생하여, 나는 숨을 가쁘게 몰아쉴 정도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 후로 소설은 자신과 쌍둥이라고 할 또 다른 자신이 그의 직장에도 집에도 나타나게 되고, 끊임없이 그와 대립하면서, 그의 일을 가로채며, 결국은 또 다른 “새로운 골랴드킨”씨에게 서서히 자신의 자리를 빼앗껴가는 옛 골랴드킨씨의 환각과 정신분열의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마침내, 소설의 시작부분에 등장한 의사와 새로운 골랴드킨씨에 의해, 옛 골랴드킨씨는 정신병원(정신병원이라고 직접 언급되지는 않지만)에 갇힌다는 줄거리다. 이 소설에서 생일 파티에서 초대받았음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장면을 나는 실존적인 상징으로 이해했다. 이 세상에 초대를 받았으나, 정확한 존재의 이유를 모르기에, 존재의 결핍을 겪고 있지는 않을까? 살면서 우리가 하는 많은 행위들이 무의식적으로 우리는 존재하되 다른 한편으로 느끼는 존재의 결핍상태인 아이러니를 채우고 치유할려는 노력들이 아닐까? 그 결핍의 상태가 이 즐겁고 화려한 파티와 같은 세상에 우리를 마치 누군가가 내쫓을려고 하는 불안감을 무의식 중에서 형성하고 있지는 않을까? 억지로 들어간 파티에 많은 사람들이 골랴드킨씨를 쳐다보는 것 같자, 골랴드킨씨는 천장의 샹들리에가 파티의 주인공 머리위에 떨어졌으면 하는 상상을 한다. 그러면 그가 곧 구해 줄것이고, 그 행위가 곧 그가 파티에 있을 수 있는 확실한 존재의 이유가 될것처럼. A. D. Laing은 그의 책, Divided Self 에서 정상적인 사람들도 주변의 사람들이 그의 존재를 위협한다고 느끼는 상황들에서 도피할 수 있는 현실적인 감각을 전혀 제공받지 못할 때, 그것으로 부터 벗어날려는 물리적인 노력을 할 수 없다면, 적어도 정신적인 노력 차원에서 정신 분열 상태를 발전 시킨다고 한다. 결국은 심리적 방어기제로서 일시적 정신분열 상태가 올 수 있다. 일반인과 정신분열환자와의 차이라면, 일반인에게는 일시적인 방어기제로 왔다가 사라지는 데, 환자에게는 하나의 인격화된 것이 아닐까 한다. “정체모를 건달같은 골랴드킨씨의 재빠른 솜씨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였다.! 이를 테면, 한 사람에게 다가가자 마자 그 사람의 환심을 사고 만다. 눈깜짝하기도 전에 벌써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 있는 것이다. 두번째 사람과 말없이 친해져 호의에 찬 그의 미소를 빼앗으면.....(중략), 진짜이며 아무런 죄도 없는 골랴드킨씨는 사람들에게 모욕과 배척을 당했다. 진짜 골랴드킨씨는 마음씨가 착한데도 괄시를 받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데도 손가락질을 받았다!.”
세상으로 부터 소외된 느낌을 받았던 골랴드킨씨는 자기안에서 자신의 거짓된 자아에 의해 진정한 자아마저 소외되고 만다. 얼마전에 개봉한 나탈리 포트만의 블랙스완에서도 정신분열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착하기만 한 주인공 니나는 백조로 부터 왕자를 뺏을 유혹을 해야할 흑조의 정서적 연기에는 선천적으로 맞질 않다. 주연 오디션에서 실패를 직감한 니나는 그날 밤 집에 오는 길에, 반대편 길에서 검은 옷을 입고 매력적으로 니나에게 똑바로 다가오는 여인을 보는 데, 바로옆을 지나갈 때 니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다름아닌 검은옷을 입고 좀더 다른 화장을 한 니나 자신이다. 니나에게는 나르시스틱한 엄격한 엄마가 있고, 그녀가 늘 어머니의 세계에 부합할려고 한 것은 그녀를 늘 착하게만 해 줄 뿐이다.
발레 테크닉은 완벽하나, 늘 감성을 억눌렸다고 지적하는 발레단 단장은 어느날 밤, 니나에게 스스로를 느껴보라고 한다. 그날 아침 잠에서 깬 니나는 자위를 하는데, 흥분속에 그녀가 돌아누웠을 때, 그녀의 엄마가 침대옆 의자에 잠들어 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화들짝 놀라 돌아 누워 버린다. 나는 이 장면에서 늘 그녀를 과잉보호하며 심지어 감시하는 엄마의 시선에서 니나는 늘 그녀의 이드(id)를 억압하고 지냈음을 나타내준 것이 아닌가 한다. 결국 그녀의 예술적 완벽에 대한 집착, 현실적 모습으로서 흑조를 연기할 수 없는 자신의 나약함, 한편 결정적으로 발레단에서 그리고 그녀의 발레인생에 있어서, 이 역할을 해내지 못했을때 그녀가 겪어내야할 보이지 않는 그녀의 존재론적 불안함이 그녀에게 흑조를 연기할 수 있는 거짓된 자아를 만들어 내기 시작한다.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골랴드킨씨처럼, 그녀 또한 진정한 자아와 거짓된 자아의 분쟁의 환각를 겪으며, 나중에는 그녀가 거짓된 자아인지, 진정한 자아인지 구별을 할수 없을 지경에 이른다. 소설속의 골랴드킨씨가 거짓된 자아를 혼내줄 아버지의 역할 대신할 어떤 누군가를 찾듯, 그렇게 보여준 부성의 결핍은, 영화 블랙 스완에서, 니나의 집에서 아버지가 보이지 않는 다는 점은 비교해 볼만한 것 같다. 그것은 그녀의 욕망을 긍정적으로 발전시킬 그녀 내부의 부성의 역할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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