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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리석은 사내들의 싸움은 늘 엉뚱한 사람을 잡는다. 힘없는 아낙네들이나 아이들이 지은 죄도 없이 벌을 받아야 하는 싸움.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대인이라는 것 하나만으로 미움을 사서 피붙이가 목숨을 잃는 사람들도 있고...
프랑스 사람 루이 말 감독이 만든 <굿바이 칠드런 Au revoir les enfants / Goodbye, Children>에서도 지은 죄가 없음에도 핏줄을 잘못(?) 타고난 까닭에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아이들이 어떻게 바뀌어 가는지, 바라보는 어른들은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보여준다. 1987년 작품이다.
2. 파리에 가까운 성 요한 카르멜 수녀원에 있는 중학교에 다니는 열두 살의 줄리앙 캉땅(가스파르 마네스)은 방학이 끝나자 엄마와 헤어져 배움터로 돌아가는 게 싫다. 줄리앙의 엄마는 제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칭얼거리는 아들한테 말한다. "줄리앙, 또 이럴 거야. 우는 건 좋지 않아...3주 뒤에 보자...엄마와 아빠가 보러 갈 거야..." 같은 배움터에 다니는 아우 줄리앙의 그런 모습을 보고 프랑소와는 뒤에서 놀린다.
그렇지만 기차를 타고 배움터로 돌아가면 달라진다. 거기서 먹고 자면서 배우는 터라 또래들과 어울려 개구장이짓을 하느라 다른 생각이 들지 않는다.
새 학기에 전학온 아이가 있다. 말쑥한 얼굴이지만 말이 적은 장 보네(라파엘 페이토)다. 피아노도 잘 치고, 수학도 잘 하고, 아는 것도 많다. 견진성사를 하지 않기에 이교도로 몰리기도 한다. 그래서 다른 아이들한테 놀림도 많이 받는다. 줄리앙도 보네를 놀리고...
도이칠란트한테 싸움에 진 탓에 프랑스 사람들이 도이칠란트의 눈치를 보던 때라, 도이칠란트에 대들거나 나쁜 짓을 하면 잡아갔다. 밥집 따위에 '유대인 출입금지'를 써놓기도 했다.
줄리앙이 몰래 보네의 짐을 뒤지는데, 책에 쓰여있는 이름이 보네가 아니다. 프랑스 이름이 아니라 도이칠란트 이름이다. 게다가 유대인이고... 이를 어째, 쟤는 프랑스 아이가 아니잖아...누구라도 알면 잡혀갈 텐데...
3. 아이들끼리 지내는 모습은 보기에 즐겁다. 영화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만큼 생생하다. 꾸밈없는 아이들의 연기가 좋다. 영화 속 개구장이 아이들의 모습은 프랑스와 우리나라가 다를 바가 없다.
수업 시간에 보라는 책은 안 보고 엉뚱한 책을 보거나 (나도 수업 시간에 소설 책 따위를 보기도 했고...), 수도사들을 원숭이라 부르며 뒤에서 놀리거나 (우리도 선생님을 꼰대 어쩌구 하며 낮춰 불렀지), 그리라는 동그라미는 그리지 않고 컴퍼스를 갖고 점을 빼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좀 큰 아이들은 뒷산에서 모여 몰래 담배를 피우기도 한다.
밤에 침대에 오줌을 싸고는 남몰래 수건으로 닦는다고 애를 쓰고, 또 아이들이 다리를 절면서도 부엌일을 돕는 조셉을 괴롭히기도 한다.
보네와 줄리앙이 보물 찾기를 하다 산에서 길을 잃고 늦게 돌아오는데, 밤 8시면 아무도 돌아다니지 못하게 한 도이칠란트 군인들한테 들켜 배움터로 잡혀온다. 그런데도 나중에 줄리앙은 산에서 만난 멧돼지 한 마리를 수십 마리로 뻥튀기를 하고, 고스란히 잡혔으면서도 도이칠란트 군인들이 총을 많이 쏘았다느니 하며 입에 침도 안 바르고 동무들한테 거짓말을 해댄다. 짜식들, 뽐내고 싶기는...
4. 처음에는 서로 싫어하다가 무슨 일로 나중에는 사이가 좋아지고, 그러다 끝은 슬프게 되는 이야기. 아이들의 이야기든,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든, 마음이 맞지 않는 이웃 이야기든, 어디서 많이 보던 줄거리여서 느낌이 그리 새롭지는 않았다.
줄리앙이 "1월 그날의 일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했다"고 되새김질하고, 제2차 세계대전이나 프랑스와 도이칠란트를 견주는 사람들의 눈에는 좋아보일지 모르지만.
감독이 몸소 겪은 일이라 영화 속에서 유대인을 못살게 한 도이칠란트 사람들의 잘못을 보여주고, 쟝 신부의 입으로 "돈이 많은 사람들도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며 살아야 하고, 집에서 가져온 먹을거리는 동무들과 나눠 먹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일보다, 나한테는 그냥 철부지 아이들이 동무들과 어울려 놀고 공부하는 모습이 더 좋아 보인 영화다.
영화 디브이디는 잘 안 나오는 것이라 선뜻 샀으나, 화면이나 소리도 깔끔하지 못하고, 보너스는 아예 없다. 예고편마저 없는 것이라 디브이디로선 많이 아쉽다. 영화를 찍게 된 까닭이나 나온 배우들을 뽑게 된 이야기 따위가 없는 디브이디는 그저 한 여름날 미지근한 맹물일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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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회 베니스영화제 그랑프리 수상에 빛나는 루이 말 감독의 <굿바이 칠드런>에는 어떠한 자극도 없다. 그저 소년과 소년의 빛나는 우정만이 끝에 가만히 남는다. 손바닥 위에 동그랗게 말려 올려진 어떤 관계. 친구가 가는 길을 지켜봐주는 일. 그것을 우린 우정이라 부른다. 1944년 파리의 기숙학교 새학기가 시작된다. 활발하고 호기심 강한 줄리앙은 학교가기 싫어 떼를 쓰면서도 친구들과의 생활에 적응하여 흉흉한 시대를 힘차게 걸어나간다. 반에 쟝 보네가 전학오기 전까지 학교생활에 싫증과 따분함을 느끼고 있던 차였다. 총명한 눈빛에 말수가 적은 보네는 모두가 말하지 않지만 모두가 아는 이유로 공공연히 괴롭힘을 당한다. 평화로운 아이들의 어린시절에 생채기내는 건 사람과 비밀 그리고 세상이 만들어준 다름과 차이의 경계다. 수학도 피아노도 다방면으로 재능을 뽐내는 보네를 부러움과 질투 가득한 눈으로 지켜보던 줄리앙은 비밀을 눈치채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보네가 왜 그런 대접과 눈총을 받아야 하는지 몰라 답답해한다. 줄리앙과 보네는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 나누고 피아노친다. 어린 소년들의 평화로운 우정에 비극이 찾아오기 전까지 모두 무엇이 무엇을 어떻게 해서 왜 그래야만 하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어른 스스로도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산속을 헤매야 했던 보물찾기 놀이는 둘을 가까워지게 했고 이는 루이 말 감독의 체험으로부터 가져온 것이다. 기숙학교는 화해와 소통의 장이 아니라 평화와 자유 그 자체다. 이곳은 나치 정부 아래에서 은연중에 유태인을 숨겨주고 있었고 그들을 천대하거나 차별대우하지 않았다. 찰리 채플린의 <이민선>을 학생들이 단체관람하는 수업장면은 유태인이던 채플린에 대한 환기(아마 경탄이거나 찬배의 종류)와 감독 개인의 어린시절 기억 속에서 채플린의 영화를 보고 유태인 친구를 사귀던 추억과 맞물리며 무채색으로 휘감겨진 자전적 회상장면으로 기록된다. 매번 울리는 경보음, 공습으로 흔들리는 건물, 소음과 두려움 속에서 지하방공소로 내려가 진행하던 수업까지 더해지면 이 영화가 할 수 있는 1944년도의 프랑스 기숙학교의 음울함과 앞으로 벌어질 불안의 예감을 최대한 형상화하는 것이다. 소년들의 우정은 아름다웠다. 어쩌면 가장 평온의 진공상태가 약간 어긋나기만 해도 어지럼증을 느끼는 지점을 <굿바이 칠드런>은 세심하게 포착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성장인 동시에 퇴화다. 아이들은 넓고 깊은 포용으로 세상을 향해 두 팔을 활짝 펴지만 정작 이에 응답해야 할 세상은 암흑천지다. 보네와 내가 무엇이 다르냐고 묻는 줄리앙의 말에 엄마는 대답하지 않는다. 보네를 놀리고 괴롭히는 아이들도 정작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형은 줄리앙을 바보라고 응수하지만 이런 줄리앙은 사제가 꿈이다.
억압과 비자유와 우정의 상실과 죽음이라는 두려움. 이 모든 것들을 겪은 그해는 줄리앙 뿐 아니라 모두에게 절대적으로 잔인했다. 굳지 못한 소년들은 대적할 상대를 알지 못한 채 내몰린다. 세상의 비정함에 노출된 이들의 눈물이나 소리 따위는 감독의 시선 바깥에 위치한다. 끽 소리도 못내고 단검에 두 동강난 채 마른 숨을 몰아쉬다 서서히 숨을 놓는 한낱 산짐승처럼 이리저리 배회하다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 세상의 논리이자 세계을 탄생시킨 자들의 향락이라 말하는 듯하다. 아무 시선이 없어 오히려 오싹하다. 돌아보는 보네와 그의 시선에 손을 살짝 들어 흔드는 걸로 응답한 줄리앙은 이후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루이 말 감독은 나치 정권에 우호적이었던 프랑스 정부 탓에 기득권을 누리고 살았다. 그가 이토록 반나치적인 영화를 아무런 시선 없이 더욱 강렬하게 가슴에 사무치도록 그려낸 것은 그때의 죄책을 오랫동안 안고 살았기 때문일까.
그는 고다르나 트뤼포와 함께 논하기에는 방식과 방향이 많이 달랐던 누벨바그인이었으나 사회의 부조리를 짚어내고 성적 소수자 혹은 유태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들로 프랑스 영화에 새로운 길을 낸 독자적 시네아스트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치적 화두나 성적 욕망의 노골적 묘사는 그에게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기는 했지만 대부분 좋은 평가로 남았다. 각자에게 맞는 옷을 알맞게 입은 두 소년의 밀착된 연기는 마지막 장면에서 빛을 발한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주고 받는 눈빛은 두 번 다시는 잊지 못할 찡한 장면이었다. 그때 그 시간 그 장소에서 우린 왜 만나자고 해놓고 스쳐지나가 버렸을까. 잊힌 시간, 지켜지지 못한 약속, 어긋난 마음, 어딘가를 배회하고 있을 욕망과 두려움들. 마지막으로 불러본다. 굿바이, 칠드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