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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한 인간인 오이디푸스가 자신을 되돌아보고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 다시말해 자아에 대한 물음, 정체성에 대한 탐구와 고뇌를 다룬다. <프롤로그> 테바이의 왕 라이오스는 아들이 그를 죽이고 그의 아내와 결혼한다는 예언을 듣고는 아들을 죽이도록 명령한다. 그러나 양치기는 차마 갓태어난 생명을 죽이지 못하고 다른 이에게 키우도록 한다. 아이는 그 사실을 모른채 성인이 되었고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었는데, 그때는 라이오스왕이 죽은 이후였으므로 그는 라이오스왕의 아내와 결혼하여 테바이의 왕이 된다. 그가 오이디푸스이다. 왕이된 오이디푸스에게 테바이의 시민들이 탄원을 하기위해 모여있고 오이디푸스는 거만하게 등장한다.
제사장은 자연의 질서가 파괴된것을 잔인하고 세밀히 묘사함으로써 그 원인을 밝혀야 함을 요청한다. (*당시의 정치는 왕과 국가를 동일시하는 신탁통치였으므로 그 나라의 기근과 재앙은 곧 왕의 부패로 인한것으로 간주되었다.) 즉 오이디푸스가 엄청난 죄를 지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 영웅이 된 오이디푸스(외적 자아)와 자연의 질서를 파괴한 오이디푸스(내적 자아)를 대조시킴으로써 갈등의 구조를 알려준다. <파로도스> 현 사회의 재앙에 대해서 신의 도움을 갈구하는 노래 <첫번째 에피소드~네번째 에피소드: 라이오스 왕을 죽인 범인을 밝히는 과정이다.> 방금 신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신이 나와야 할 자리에 오이디푸스가 등장함으로써 그의 오만함을 나타낸다.
눈먼 예언자인 테이레시아스는 오이디푸스의 하마르티아를 지적하며 오이디푸스가 라이오스왕을 죽인 범인이라고 하며 앞으로의 비극을 예견하지만, 오이디푸스는 인정하지 않는다.
볼수없는 자가 보는것을 볼수있는 자는 보지 못하고 있다. 인간의 어리석음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부분이다.
이제 오이디푸스는 왕의 살해자로 밝혀진다. 그런데 여기서 그친다면 인간의 정의(법)이 적용되는 것일 뿐이나 이후 천륜의 어김이 밝혀진다면 신의 정의가 적용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오이디푸스가 그의 어머니와 결혼한다는 예언마저 맞을까바 두려워할때 그의 아내는 말한다.
*프로이트는 이 작품에서 이름을 따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된다. 결국 오이디푸스는 그의 어머니와 결혼했다는것이 밝혀졌다. 그는 절망과 죄의식에 사로잡힌다.
거만하고 오만하고 거침없었던 오이디푸스의 자기인식(자기 객관화)가 이루어지는 부분이다. <엑소도스: 오이디푸스가 자기 눈을 찌른다.> 오이디푸스는 죄를 인정하고, 신이 부여한 고통의 운명을 짊어지면서 스스로를 벌한다. 비록 운명을 바꾸지는 못하지만 그 안에서 책임지는 모습으로 연민을 이끌어내어 관객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드라마는 파데이 마토스( pathei mathos :고난을 통해 지혜를 얻는다.)를 알려주는 노래로 끝을 맺는다.
인간의 본질은 결핍이며 완전하지 않으므로, 이것을 모르는 자는 오만함에 빠진다. 그래서 오만함을 극복하려면 고통, 고뇌를 겪어야 한다. *참고:강유원의 라디오 인문학 |
| 고대 희랍 비극의 대표적인 작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을 더욱 대중이 가까이 느낄 수 있도록 해 준 사람은 프로이트이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정신분석학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서 고전 『오이디푸스 왕』을 끌어와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 내용은 작품의 내용에 부합한다. 작품에서 그랬던 것처럼 보통 어린 남자아이는 어머니를 사랑하고, 어머니를 사랑하면서도 자신보다 힘이 센 아버지를 경쟁자로 생각한다. 그러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하면 신경증이 발생한다는 것이 프로이트의 이론이다. 이 작품이 고대부터 상연되면서 사람들에게 운명의 존재를 인식시켜 주었다면,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필두로 하는 무의식을 발견함으로써 근대 철학에 있어서 중요한 개념이었던 ‘주체’를 해체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이 작품의 주인공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운명을 타고난다. 그의 아버지는 오이디푸스를 죽일 것을 명령하지만 불쌍히 여긴 하인은 그를 살려준다. 왕자로 성장하여 그 운명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는 지금의 아버지가 친아버지인 줄 알고 운명을 피하기 위해 성을 떠나 거리에서 한 노인을 만나 시비 끝에 죽이게 된다. 죽임을 당한 그 노인이 바로 오이디푸스의 친아버지였다. 테베에서 왕이 된 오이디푸스는 결국 자신의 친어머니 이오카스테를 아내로 맞이하게 된다. 모든 사실이 밝혀지자 이오카스테는 자살하고 오이디푸스는 두 눈을 뽑는 등 이야기는 비극으로 치닫는다. 운명이 그대로 이루어졌음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가 두 눈을 뽑는 행위에는 분명히 어떤 의미가 담겨져 있을 것이다. 자신의 의지대로 운명을 바꾸어보려 했지만 피하려하면 할수록 오이디푸스는 점점 더 운명으로 가까이 갔다. 오이디푸스가 운명을 알고도 성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친아버지를 죽이고 친어머니와 결혼을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운명을 피하려던 오이디푸스에게 그가 한 행위는 최선이었다. 인간에게는 운명을 바꾸고 싶은 의지가 있어도 바꿀만한 힘이 없다. 이러한 메시지를 담은 『오이디푸스 왕』이 오래도록 살아남아 고전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것은 그러한 사실이 많은 사람으로부터 공감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비극을 보고 있으면 하늘은 항상 인간에게 가혹한 운명만을 내리는 것 같아 보인다. 동양 철학에서는 ‘자연(自然)’이라는 말이 있다.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로서 ‘도(道)’내지는 ‘본체(本體)’ 등의 개념이 있는데 스스로 그러한 도를 거스르지 않는 것이 자연이고, 자연에 순응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이디푸스가 동양 철학을 신봉했더라면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었을지 상상해본다. 일이 그렇게까지 비극으로 치닫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머리를 깎고 산 속으로 수행을 하러 들어갔을지도 모르겠다. 운명에 순응하는 심정으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했다면 오히려 운명을 바꿀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인생을 어떻게 아는가? 인간에게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존재하는 것은 모르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삶에 대해 모르고 죽음에 대해 모른다. 끝없이 치달은 비극을 보고 싶지 않아 눈을 뽑는 것밖에는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이 가장 절망적이다. 사람들은 슬퍼하면서도 비극을 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인간이 비극을 보는 것은 비극을 봄으로써 영혼을 청정화하는 것, 즉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영혼을 청정화 한다는 것은 곧 영혼의 불순물을 제거한다는 뜻이다. 심리요법으로써 카타르시스는 좋은 치료효과를 보인다고 한다.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그 효과를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현재 처한 상황이 어려워도 비극의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보다는 낫다는 생각에 안도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문학 작품이나 드라마, 영화가 해피 엔딩인 것도 다행스럽게 느끼긴 하지만 뭔가 싱겁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사람들은 바닥을 치는 비극을 봄으로써 다시 열심히 살아보고자 하는 의지를 갖게 되는 것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