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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사법잔재의 그늘; 검사작성의 피의자신문조서를 바탕으로
"일제사법잔재의 그늘; 검사작성의 피의자신문조서를 바탕으로" 내용보기
Ⅰ. 서론   1. 문제 제기 및 탐구 목적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에 대한 설문조사 1위가 검찰개혁이었을 정도로 과도한 검찰권에 대한 국민적 우려와 개혁 필요성에 대한 요구가 과거부터 지속되어 특히 요즘에 그 어느 때보다 높은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문재인 대통령은 검찰 개혁에 대한 대선 공약에서 “수사권과 기소권을 분리하여 검찰과 경찰의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제
"일제사법잔재의 그늘; 검사작성의 피의자신문조서를 바탕으로" 내용보기

. 서론

 

1. 문제 제기 및 탐구 목적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에 대한 설문조사 1위가 검찰개혁이었을 정도로 과도한 검찰권에 대한 국민적 우려와 개혁 필요성에 대한 요구가 과거부터 지속되어 특히 요즘에 그 어느 때보다 높은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문재인 대통령은 검찰 개혁에 대한 대선 공약에서 수사권과 기소권을 분리하여 검찰과 경찰의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제대로 작동하도록 검·경 수사권을 조정하겠다고 말하였을 정도이다. 또한 최근 20194월에 뜨거운 논란을 몰고 온 신속처리법안(이하 패스트 트랙) 지정에서도 국회 논의를 거쳐 형사소송법, 검찰청법 등의 개정안이 포함되기도 하였다. 이 안에는 경찰에 1차 수사권과 수사 종결권을 부여하고, 검찰의 수사지휘권을 폐지하는 내용 등이 담겨있었다.

한편, 지난 712일 헌법재판소는 유해용 변호사(전 대법원 수석재판탐구관)가 낸 헌법 소원을 사전 심사한 결과 각하사유가 없다고 보고 전원재판부에 회부하였다. 헌법 소원의 배경은 이렇다. 유 변호사는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으로 기소되어 수사와 재판을 받으면서 검찰에서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 받을 때 작성된 조서의 증거능력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왔다. 자신의 사건을 심리하는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8(박남천 부장판사)에 위헌법률심판제청을 신청하였으나 기각되자 헌법재판소법 제 682항에 따라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하게 된 것이다. 유 변호사가 위헌성이 있다고 주장한 조항은 형사소송법 제200(피의자의 출석 요구)와 제312(검사 또는 사법경찰관의 조서 등) 1·2항이다. 특히 제3121·2항이 문제가 되는데, 검사가 피의자를 신문한 조서는 재판에서 피고인(수사 당시 피의자)이 내용을 부인하더라도 강압 등 불법적으로 작성된 것이 아닌 이상 증거로 채택될 수 있도록 한 부분이다. (그러나 첨언을 하자면, 탐구자는 이를 중점적으로 살펴본 것은 아니다.)

이렇듯 검사의 수사권에서의 능력, 특히 그 중에서도 피의자 신문조서를 둘러싸고 많은 논란이 발생하고 있다. 그러는 한편, 많은 학계에서 지적하는 바로는 이 피의자 신문조서에 증거능력을 부여하는 세계에 유례가 없는 형사소송법 제3121항은 일제 식민지 시절로 그 연원이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이다. 당시 본토에서도 시행하지 못하였던 국가주의 형사제도를 일제가 식민지에서 실험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일제는 대만과 조선, 그리고 괴뢰 만주국에서 검찰 주도 형사사법제도를 만들었었다. 이에 탐구자는 피의자 신문조서가 일제의 식민지 시대로부터 유래했다는 것에 의문을 품고, 과연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날 우리나라 형소법 제3121항이 생겨나는데 영향을 끼친 것인지 그 시초를 한 번 알아보고자 하였다.

검찰의 피의자 신문조서에 증거능력을 부여해오던 와중에, 우리나라는 올해로 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및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일제 식민 사법 잔재로 남은 제도들을 다시 돌이켜보고 개혁할 시기에 이르렀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앞에서 살펴본 형소법 제3121항의 내용이 과연 역사적으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고, 본 탐구자는 이의 역사적 기원을 살피는 것을 탐구의 목적으로 하였음을 밝힌다.

 

2. 탐구의 필요성 및 연계성

본 탐구는 피의자 신문조서가 일제 강점기시대에 어떠한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 탐구는 다음과 같은 점들로 인해 탐구의 필요성의 가치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첫째, 피의자 신문조서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살펴보면서 오늘날 일제 사법 잔재로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해방 직후 이승만 정권에 들어서 식민지의 잔재를 청산하려 했던 시도는 물거품이 되었으며, 그동안 현대사에 들어서 식민 잔재를 청산하려는 노력이 계속되었으나 아직까지 완전히 해소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특히 올해는 3·1 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하였으므로 오늘날 남아 있는 일제 강점기 식민지 잔재를 파악하려는 시도는 꽤나 많은 가치를 지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본 탐구는 역사적인 측면 말고도, 형소법의 측면에서도 역시 많은 시사점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우리나라 형사소송법 제3121항은 국가의 형벌권을 재판하는 판사가 아닌 수사하는 검사가 행사하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는 다른 나라의 형사 소송법과 비교해 보았을 때 우리나라에만 있는 유례없는 법 조항으로, 오늘날 검찰개혁을 시도하려는 사법부의 노력으로 보았을 때 핵심이 되는 소재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대한민국 검사가 사생활에 전반적으로 개입하게 만들고, 정치 분쟁을 모조리 검찰로 넘기는 현실에서 정치에까지 개입하게 만들 수 있다는 지적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며 피의자 신문조서의 관심을 다시금 환기시킬 수 있을 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그리고 첨언하자면 본 탐구는 검찰의 피의자 신문조서에 증거 능력을 부여해 온 수사 과정 조정에 대한 탐구자의 개선 방향을 제시하는 것을 다룬 것은 아니다. 오히려 탐구자는 본 탐구를 하면서 근대 사법 체계, 그 중에서도 형소법 피의자 신문조서를 역사적으로 살피는 것에 집중하였음을 알린다. 사법 체계 개혁의 개선 방향을 짚기 위해서는 이러한 사법 체계가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역사 속에서 특히 근대 사법 체계의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친 프랑스 등의 형사 소송법 등을 살펴보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로부터 영향을 받은 일제 식민 사법 체계와 또 다시 이에 영향을 받은 조선 형사령을 중점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오늘날의 사법 체계의 개혁 개선 방향을 함께 모색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법사학적인 측면에서 그동안의 탐구가 짚고 넘어가지 못했던 부분들을 살펴보면서 오늘날 대다수 쟁점이 대한민국의 검찰 개혁, 검사의 수사 과정의 측면에의 개선 방향 쪽에 치우쳐 있는 것을 보완할 것으로도 예상하는 바이다. 특히 법 체계의 영향을 받는 자국민들의 권리를 보호함에 있어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므로 본 탐구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인권 측면에서의 논란이 끊이질 않고 있는 피의자 신문조서였던 만큼, 국민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존재하는 형사소송절차에서 도움이 될 만한 메시지를 역사적으로 탐구한 끝에 내린 결론으로 마무리하려고 한다.

아울러 본 탐구는 형사 소송법, 재판, 역사, 인권이라는 다양한 분야의 학제적 접근이 요구되는데, 이를 통해 역사학 분야의 탐구를 희망하고 있는 본 탐구자가 앞으로의 우리 사회의 문제를 바라봄에 있어 역사적인 사실들의 조사 및 탐구를 통해 현재를 돌이켜볼 수 있도록 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3. 선행 연구에 대한 분석 및 탐구 방향성 제시

(DBpia, 한국학술정보, 한국탐구재단 기준) 최근에 작성된 논문들을 살펴봐도 피의자 신문조서라는 소재를 다루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오히려 1960, 70년대 혹은 2000년대에 작성된 논문들이 주를 이루었고, 2010년대에 작성된 논문들조차도 최근과는 약간의 거리가 있는 시간차를 보였다. 따라서 특히 이번 년도에 들어서 화두에 중심에 서있는 만큼, 오늘날의 측면에서 본 주제를 다룰 필요가 있어 보였다. 또한 논문들의 약 80% 정도는 피의자 신문조서의 능력을 단순히 부정하면서도, 그에 대한 대안방법은 내놓지 않고 추상적인 말로만 대체하는 경향을 보였다. 또한 근대 사법 체계를 프랑스, 독일 등의 형사 소송법과 관련하여 연혁적으로 다루는 논문들에 있어서도 피의자 신문조서의 증거능력을 단순히 비교하면서 살펴보는 것에 그쳤을 뿐, 그러한 역사를 통해 현재 우리나라 사법 체계에서 배울 수 있는 점들이 주된 언급으로 나타나지 않은 점이 아쉬웠다. 특히 왜 오늘날 우리나라에 피의자 신문조서 해당 조항이 생겨났는지를 식민잔재로서 파악하는 과정을 집중적으로 다룬 논문이 많이 없어서 아쉽기도 하였다. 이에 탐구자는 우리나라 식민지 상황에 빗대어 어떤 특수한 상황이 피의자 신문조서에 영향을 주었는지 파악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본 탐구에서는 일제 사법 체계 형성에 영향을 준 시초인 프랑스의 치죄법을 알아보고, 나아가 일제의 형사 소송법 또한 함께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이에 영향을 받은 조선 형사령을 함께 살펴, 어떠한 과정 속에서 피의자 신문조서가 형성이 되었는지를 당대 식민지 상황과 관련지어 역사적 사실 및 근거에 기초하여 탐구해보려고 한다. , 간결한 논문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피의자 신문조서의 역사적 기원에만 초점을 맞추고 여기서 깨달은 바를 기술하였다고 보면 될 것이다.

본격적인 내용에 들어가기에 앞서 본 탐구의 방향을 명확하게 미리 알린다. 본 탐구는 철저하게 법사학적인 측면에 맞춰 당대 역사적 상황을 충분히 참고하고자 하는 내용이므로 당대 형사소송법을 파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로써 당시 우리나라 식민지 시절의 형사소송법이 일제 사법 체제로부터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음을 피의자 신문조서와 연관 지어 밝혀낼 것이다. 물론 당대 역사적 상황을 전부 고려하기란 불가능하며, 형소법의 조항을 일일이 분석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탐구를 위해 탐구자는 다른 조항은 어느 정도 제외시켜두고, 피의자 신문조서 조항이 주로 나타나는 검사의 수사 과정에 대한 내용이 있는 형사소송법 조항들을 위주로 살펴보았다.

한편 탐구자는 그 모든 역사적, 법전의 자료를 파악한 것은 아니지만, 그 공백을 최대한 좁히려고 했음을 알린다. 실제 역사 탐구 역시 마찬가지인데, 역사적 사료가 많지 않을 때에는 양적 탐구보다는 주요 사건들을 중점적으로 살피면서 탐구를 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탐구자 역시 역사적 사료와, 형사소송법 자료를 통해서 본인만의 객관적인 추론을 하며 탐구를 할 것임을 알린다.

이와 같이, 탐구자가 이와 같은 논문을 작성하는 것은 100주년을 맞은 우리나라의 사법제도의 문제점을 일제 식민 잔재라는 측면에서 한 번 살펴보고, 그동안의 선행탐구들이 단순히 검사가 갖는 피의자 신문조서가 갖는 능력을 축소, 폐지해야 한다며 추상적으로 개선방향을 제시하였던 것을, 필자 본인만의 내용으로 재구성하기 위한 것이다. 오늘날 검찰개혁, 헌법소원, 패스트 트랙 등의 키워드로 얼룩진 오늘날 대한민국 정치계, 법조계의 논란에 대해 이를 바라보는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면 잠시 멈춰 서서 법사학적인 측면에서 살피는 것 또한 의미 있는 일이라고 탐구자는 여기기 때문이다. 특히 본 탐구에서는 일제 사법 잔재라고만 여겨졌던 피의자 신문조서 능력이 그 자체로의 문제점을 지니기 보다는 당시 일제의 영향을 받아 얼룩진 상태로 나타난 결과임을 확인할 것이다. 아울러 이를 통해 현대 사회 법과 제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역사적으로 살피는 것이 매우 중요함 또한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 이론적 배경

본 탐구에 들어가기에 앞서 미리 알리자면, 본 논문에는 생소한 법률 용어가 굉장히 많이 등장하게 된다. 따라서 탐구 자료를 읽을 때 낯설게 느껴질 수 있는 것들을 미리 앞에서 이론적으로 개념 설명을 할 필요가 있어보였다. 우선 크게 피의자 신문조서와 예심제도에 대한 이해를 하고 넘어갈 것이다. 피의자 신문조서는 본 탐구의 핵심 소재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하게 다뤄져야 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이에 예심제도까지 다루는 이유는 피의자 신문조서와 예심제도의 도입 목적의 본질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예심제도 역시 이론적으로 다룰 필요가 있어보였다. 그 외의 형사 소송법과 관련한 개념들은 아래 각주를 통해 확인할 수 있도록 하였으니 참고하길 바란다.

 

0. 형사소송절차

논문의 핵심이 되는 형사소송절차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를 하고 넘어갈 필요를 느꼈다. 우선 다음 아래의 형사소송절차([그림1]참고.)를 통해 한눈에 파악해보자.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형사소송절차 흐름.png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878pixel, 세로 254pixel 우선 형사소송법은 크게 수사와 기소, 그리고 공판으로 나뉠 수 있다. 순서대로 보자면 수사기소공판집행의 절차로 이루어진다. 이 절차를 단계별로 알아보자.

 

1) 수사

수사는 범죄가 발생하였을 때 또는 발생한 것으로 고려되는 사정이 있을 때, 이를 형사사선으로 처리하기 위하여 범인을 발견하고 증거를 수집 및 보존하는 절차를 말한다. 수사의 단서(현행범의 체포, 변사자의 검시, 고소, 고발, 자주, 범죄신고, 범죄 인지 등)를 발견하고 고소 또는 고발로 수사가 개시되는데, 이것을 수사개시라고 하며 수사 개시가 된 이후에 피의자로서 지칭된다. 수사 개시 후 수사방식은 임의수사와 강제 수사로 나뉘는데, 여기서 수사 기관은 검사와 사법경찰관을 말한다. 수사기관에 의해 피의자는 유죄 또는 무죄로 판정되는데 무죄가 될 시에는 불기소가 됨으로써 수사가 종결되고, 유죄로 확정시 마찬가지로 수사가 종결되는 것은 맞지만 기소가 되어 다음 단계인 공판으로 넘어가게 된다.

 

2) 기소

기소란 검사가 법원에 대하여 특정한 형사사건의 심판을 청구하는 소송행위를 일컫는다. 우리나라는 국가기관만이 형사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국가소추주의가 시행되고 있고, 그 국가기관은 검사이며, 그에게 공소 제기권을 독점시키는 검사기소주의와 기소독점주의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검사가 피의자에게 범죄혐의가 인정되고 소송조건이 갖추어진 경우에도 기소유예처분이라는 불기소처분을 할 수 있는 재량권을 가지는 기소편의주의를 취하고 있다. 기소가 되면 피의자는 피고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3) 공판(소송)

공소가 제기되고 난 이후 소송을 계속하면서 진행하는 공개재판을 의미하며 법원(모든 판사와 합의부)과 법관이 이를 판단한다. 판단 이후 판결, 결정, 명령 등이 이어지며 이를 집행한다.

이 논문의 핵심이 되는 우리나라 피의자 신문조서는 수사 단계에서 검사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피의자 신문조서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걸까?

 

 

1. 피의자 신문조서

우리나라 형사소송법에서 소송 관련자의 진술을 기재하는 조서는 공판정 내에서 판사 면전에서 이루어진 진술을 기재한 심문조서와 공판정 외에서 피고인, 증인, 감정인, 통역인, 번역인에 대한 신문 결과를 기재하는 신문조서’, 수사기관이 수사관서 또는 임의의 장소에서 피의자를 대상으로 신문하여 진술 내용을 기록한 피의자 신문조서’, 피의자가 아닌 자의 진술을 기재한 진술조서 등이 있다. 법정 내·외라는 장소를 기준으로 하여 심문과 신문으로 구분한다. 법정이 아닌 관서 또는 임의의 장송서 검사나 수사기관이 피의자의 진술을 기재한 것에 대해 신문조서라고 하고, 피의자가 아닌 자의 진술을 기재한 조서를 진술조서라고 하는 것이다. 본 탐구에서는 검사 작성 신문조서, 우리나라로 치면 피의자 신문조서를 대상으로 탐구가 진행됨 또한 참고로 알린다.

원래 조서는 전근대 규문주의 형사절차의 서면절차와 더불어 탄생한 것이었다. 중세의 탄핵주의적 재판 절차는 구두주의가 관철되어 조서작성과 같은 서면절차가 필요하지 않았다. 사인소추제도를 대체하여 공적 소추제도가 도입되면서, 수사판사가 비공개리에 피고인·증인을 신문하고 그 진행상황과 신문내용을 기록하여 이를 근거로 검사가 의견을 제시해 다음 절차로 이행하고, 판결법원은 조서에 기재된 것에 의거하여 그 직권으로 유·무죄를 판단하게 된 것이다.

논란의 핵심은 비공개적 신문절차에는 언제나 허위와 자의가 끼어들 우려가 있으므로 신문의 권한을 일정한 자에게만 허용하고, 신문의 절차·조서·기재 방법 등에 관해 엄격한 규칙을 두어야 한다는 것에 있다. 신문조서는 문답형식을 취하고, 신문하는 관리나 본인이 아닌 입회한 서기가 작성하게 하며, 신문 종료 이후 피신문자에게 신문조서를 낭독해주고 틀림이 없는지 확인하게 하는 등의 규제가 많다. 이는 신문조서의 진실성을 확보하고, 동시에 사후에 조서에 기하여 신문절차의 형식적 적법성 및 유·무죄를 판단하는 자료로 활용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2. 예심제도의 이해

여기서 예심제도에 대한 이해를 하고 넘어가는 이유는 . 본론에서 살펴 볼 피의자 신문조서의 기원을 살펴봄에 있어 그 기원이 된 핵심 사법이론에 예심판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심판사는 경찰을 지휘하고 사건을 수사하며, 구속영장을 발부하고 기소를 하는 판사를 말한다. 1808년 프랑스에서 나폴레옹 시대에 도입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제도이다. 이들은 수사판사라고도 불리며 용의자를 수사, 심문하고 공소 기각/유지 여부를 결정하는 일을 한다. 수사의 주재자라는 면에서 우리나라 검찰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된다. 반면 일제가 근대 형사소송체계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특히 식민지 조선에서의 형사소송법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예심판사의 권한을 축소하고 검사의 권한을 확대하여 오늘날과 같은 피의자 신문조서 관행이 남아 있는 것이다.

프랑스의 경우 범죄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형사재판은 다음과 같이 구분되어 진행된다.

1) 담당 검사가 결정되고 해당 검사가 사법 경찰에게 예비 수사를 맡긴다.

2) 사법 경찰은 위법성을 확인하고 조서를 꾸민다. 여기서 용의자는 원칙적으로 24시간 동안만 구금할 수 있다.

3)세 번째 단계로, 예심이 있다. 예심 판사가 위법자들을 수사하고 구인장이나 체포 영장으로 용의자를 출두시켜 심문한 뒤에 공소를 기각할 것인지, 아니면 해당 재판소로 사건을 송치할 것인가를 결정한다.

4) 마지막 단계는 당연히 공판으로, 중죄 재판소에 피소된 피고이건, 경범죄로 경범재판소에서 재판을 받는 용의자이건 법정에 나가 재판장의 심문을 받아야 한다. 증인들이 출두되고 검사와 변호인들의 변론이 진행되며, 배심원들이 협의하기 위해 자리를 뜨면 이어서 판결이 내려진다.

이렇듯 여기서는 예심판사제도에 대한 간략한 이해만 하고 넘어가고, .본론에서 이어지는 역사적 기원을 함께 살펴보면서 이로부터 나온 피의자 신문조서에 대한 이해 역시 해보려고 한다.

 

. 본론

-피의자 신문조서의 역사적 기원을 중심으로

지금부터는 피의자 신문조서의 기원을 근대 형사소송법을 함께 살펴보고, 일제 강점기 시대의 식민 사법 체계와 관련하여 형사소송법을 살펴보면서 이에 영향을 받은 조선 형사령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로부터 이어지는 대한민국 형사소송법을 함께 살펴보면서 피의자 신문조서가 어떠한 맥락에서 탄생한 것인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이를 통해 피의자 신문조서의 기원을 살펴보는 것이 역사적으로 어떠한 의의가 있는지 역시 탐구자만의 의견을 바탕으로 제시하며 . 본론의 내용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1. 우리나라 형사 소송법 규정의 변천

1) 조선후기 사회체제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조선의 봉건질서가 점차 붕괴되기 시작하였고, 실학사상이 등장하였으나, 아직까지 전반적인 사회체제 및 봉건질서가 유지되는 상황이었다. 특히 조선은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과 구미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따라 근대화가 아닌 국가 패망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개화파 지식인들의 개혁운동 및 농민 운동 등도 있었으나 이마저도 실패하고 일본에 의한 조선 식민지화는 본격적으로 시작될 터였다. 그렇다면 조선의 형사 소송법과 관련된 절차는 언제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것일까 

2) 재판소 구성법 및 검사 직제

지금부터는 검사의 피의자 신문조서 작성과 관련된 형사 소송법 규정을 알아보고자 한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근대적 의미의 사법제도로 개혁되기 시작한 것은 갑오개혁 이후부터이다. 고종 32(1895)에 제정된 재판소 구성법(법률 제1) 혹은 검사직제(법부령 제2)에는 검사의 피의자 신문조서에 관한 규정을 발견할 수는 없다. 재판소 구성법에 따르면 범죄의 죄질에 따라 첫 조사가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 판사가 직접 조사하거나 다른 판사 또는 경찰관에게 조사하도록 할 수 있었다. 검사는 영장의 발송, 증거 수집과 재판의 집행, 기타 검찰 사무를 진행하였으며, 감옥을 검열하여 이유 없이 잡아오거나 구류하는 일이 있는지 살피는 임무가 주어졌다(38). 이 시기 피의자 신문조서라는 용어나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공판정에 대한 각종 기록의 작성은 해당 서기의 권한이었다.

3) 민형 소송 규칙

그렇다면 피의자 신문과 검사의 조서 작성 권한에 관한 법률 규정은 언제 나타난 것일까? 이에 대한 법률 규정은 일제가 통감부를 설치하고 난 이후인 1908년에 처음 등장하였다. 1908713일에 제정된 민형 소송규칙에 의하면 조서라는 용어가 등장하고, 조서의 작성은 재판소 서기의 일이었다. 검사는 범죄가 있다고 생각할 때에는 수사를 할 수 있다고 규정(149)하였다. 물론 이를 작성하는 주체가 검사임을 명문화한 것은 아니지만, 피의자 신문조서의 개념이 처음 등장하였다는 점에서 눈 여겨 볼만하다.

4) 사법 사무 취급령

그렇다면 검사가 중심이 되어 피의자를 신문하고 조서를 작성하는 규정은 언제부터 나타난 것일까? 민형소송규칙이 생기고 난 이후인 이듬해 제정된 통감부재판소사법사무취급령(칙령 제236, 19091016)의 검사 작성 조서 관련 규정을 보면 법률인 민형소송규칙과의 차이를 보이기 시작한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형사소송절차를 나타낸 제3장에 형사절차에 관한 검사의 임무와 권한 규정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따라 검사는 급속의 처분을 요하는 자로 사료하는 때에 공소제기 전에 한하여 검증, 수색, 물건 집류를 하거나, 피고인, 증인을 신문하거나 감정을 명하는 등 예심판사에 속한 처분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하면서 이를 사법경찰관으로 하여금 처분할 수 있도록 하였다. 검사의 수사 이후 사법 경찰관으로 하여금 검찰 송치를 하는 모습은 오늘날의 사법 체계와도 닮아 있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는 예심판사의 권한 중 일부가 얼마든지 검사가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임의로 행사될 수 있는 여지를 열어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예심판사에 속한 처분에는 피의자를 신문하고 조서를 작성할 수 있는 권한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그런데 탐구를 진행하면서 느꼈던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사법 사무 취급령에 나타난 검사의 권한에 대해서는 당시 일본의 형사소송법 그 어디에도 규정되어 있지 않은 것이었다. 이어서 확인하겠지만 일본 본국에서 급속을 요하는 사건의 처분에 관한 검사의 권한이 기재된 조항1924년부터 시행되는 다이쇼 형사소송법에서부터 기재되어있을 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10년도 앞서 해당 조항이 나타났는데 말이다. 탐구자는 이렇게 한 가지 법조항을 가지고 시기가 엇갈리는 점에 의문을 가지고 이를 중점적으로 탐구할 필요성을 느꼈다. 특히 해당 조항이 통감부 재판소에 의해 제정된 것이라는 점에서 이를 들여온 일본의 의도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일본의 근대 사법 체계의 형성 과정을 파악해야 했다. 아래에 이어지는 내용은 그러한 내용들을 탐구한 과정을 나타낸 것이다.

 

2. 근대 일본의 형사 소송절차의 확립

앞서 살펴 본 것처럼 일본의 다이쇼 형소법에 앞서 조선에서의 통감부재판사법사무취급령에 검사의 피의자 신문조서 관련 조항이 나타나 있음을 확인하였다. 지금부터 살펴 볼 과정은 과연 정말로 일본의 형사소송법의 연혁적 기록에서 해당 조항이 언제부터 언급되기 시작하였는지를 살펴보는 탐구이다.

 

1) 프랑스 치죄법

지금부터는 근대 일본의 형사 소송절차의 확립 변천을 역사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의 형사 소송법이 확립되기까지는 근대 서양 열강들의 법 시스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예를 들어, 최초의 일본의 형사 소송법은 1880년에 제정된 메이지 치죄법이고, 이것은 1808년 프랑스 치죄법으로부터 비롯하였다. 따라서 지금부터는 프랑스 치죄법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과연 프랑스 치죄법은 어떠한 내용을 규정하고 있을까 

사실 중세 시대 전 세계의 형사사법 시스템에서는 검사의 권한이 그리 크지 않았다. 중세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서양의 선진국조차 경찰과 법원만으로 형사사법을 운용하였으며, 물론 중세의 절대 군주 치하나 종교재판 과정에서 마녀사냥과 같은 고문수사와 잔혹한 형집행이 자행된 시기가 있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 이후 이에 대한 반성과 사법개혁의 일환으로 1808년에 제정된 프랑스 치죄법은 공화국의 대관으로서 검사 제도를 창안하여 시행하였다. 치죄법이 바로 검사의 어머니인 것이다. 이 법에 의해서 확립된 프랑스의 형사절차는 공판단계에 있어서는 공개, 구두의 당사자 주의(탄핵주의) 형식을 취해 무죄 추정의 원칙이 나타나는 법규였다.

그러나 이에 앞서 원칙 수사 및 예심의 단계(공판 전 단계)에 있어서는 비밀, 서면, 규문의 절차가 취해져서 완전히 무죄 추정의 원칙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왜냐하면 수사의 결과와 스스로 행한 심문의 결과에 기해서 예심판사가 작성한 예심조서는 공판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증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여 프랑스 치죄법 하에서의 형사절차는 규문적인 공판 전 절차(예심)와 탄핵적인 공판 절차로부터 성립하고 있어서 반규문적 반 탄핵적이라고 평해도 좋은 것이긴 하나 일단은 무죄추정의 원칙에 기하고 있기 때문에 피고인의 방어권을 상당히 인정하는 절차구조가 취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공판 법원에 있어서 당사자의 주장에 구속되지 않은 검사의 자유 재량권을 상당히 넓게 부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치죄법의 형사절차는 진보적인 것에서 자유주의적 성격이 강하였으므로, 개혁된 형사절차로서 유럽 전토에 보급해 각국의 유럽 대륙형 형사절차의 모태가 되었다. 즉 절대왕정을 타도하고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되찾기 위한 흐름이 당대 형사 소송법 체계에도 고스란히 영향을 미친 것이다.

2) 메이지 치죄법

앞에서 살펴본 )프랑스 치죄법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탄생한 것이 1880년에 제정된 일본 메이지 치죄법이다. 어떠한 과정을 통해 메이지 치죄법이 프랑스 치죄법에 영향을 준 것인지는 현재 남아 있는 기록으로서는 파악하기가 어렵지만, 예심판사 등의 내용 규정이 일본 형소법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으로 보아 대다수의 학자들이 이렇게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당시 메이지 치죄법은 검사가 피의자를 직접 취조하거나 소송 서류를 작성하는 권한은 부여되지 않았다. 당시 검사는 사법 경찰이 작성한 서면을 토대로 판단하여 기소와 불기소를 결정하여 예심을 청구하거나 공판을 청구할 수 있을 권한을 행사하도록 규정하였다. 1890년 제정된 메이지 치죄 형사소송법에서 역시 검사가 피의자를 취조하여 조서를 작성할 권한은 부여되지 아니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수사 실무에서였다. 일부 범죄사건 수사과정에서 검사가 피의자를 직접 취조하고 이를 조서로 작성하여 증거로 현출하려 하였던 것이다. 일본 대심원 형사 판결록을 보면 절도 사건에 대하여 검사가 피의자를 직접 조사하여 작성한 조서를 단죄의 증거로 채택하는 것은 위법이라는 취지로 원심을 파훼하여 미야기 항소원으로 이송한 사례(메이지 26(1893) 410일 선고, 메이지 26년 형제290호 사건. 출처 : 일본 국회 도서관)를 들 수 있다. 판결의 취지는 이러하였다. 피의자를 신문하는 것은 예심 처분으로서 예심판사의 직권이므로 검사는 피의자를 신문하여 조서를 작성할 수 없다는 것이다. 메이지 형사소송법 제62조에 따라 검사는 사법 경찰관으로부터 사건을 송치 받아 예심을 청구하거나 기소할 수 있을 뿐이며, 피고인을 신문하고 조서를 작성하는 것은 판사의 직권 중 하나였다. 이렇듯 형사 소송법에 검사의 피의자 신문과 조서 작성 권한에 관한 규정이 존재하지 않고, 대심원도 그것이 위헌이라는 취지로 거듭 판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일본 검사는 수사단계에서 피의자를 직접 신문하고 이를 조서와 같은 서면으로 작성하려는 시도를 계속하였다. 당시 일본 검찰의 이 같은 시도는 다이쇼 5(1916) 사법성의 형사소송법 개정안에 나타났는데, 급속을 요하는 요급사건의 경우 검사에게 일정한 강제 처분권을 허용하는 것을 포함시킨 것이다. 그러나 1924년 시행된 다이쇼 형사소송법에서도 계속 유지된 것은 피의자를 신문하고 조서를 작성하는 것이 여전히 일차적으로는 예심판사의 권한에 속한다는 규정이었다. 이를 통해 당시 일본 입법가들은 여전히 검사의 직접 수사나 제한적인 강제 처분권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이 다이쇼 형소법은 피의자 신문조서에 관해 전과는 다른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음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3) 일본의 검사 작성 피의자 신문조서의 도입

이렇듯 다이쇼 형사소송법에 이르기 까지 일본은 검사의 피의자 신문조서의 작성 권한을 명문화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예심판사의 권함임을 명백히 규정하였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사의 피의자 신문조서의 작성 권한의 분위기가 슬며시 형성되고 있었다. 당시 형성되고 있던 기소편의주의는 검사에게 보다 세밀한 조사를 요구하였다. 1905년 형법에 집행 유예 제도가 도입되었는데, 집행유예가 예상될 경우 검사가 미리 범죄의 정상까지 조사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경찰로부터 사건을 송치 받은 검사가 피의자 및 증인을 재신문하는 등 사건을 면밀히 재조사하는 수사실무를 정착시키는 관행이 형성되어 버렸다. 이후 1907년에 이르러 기소유예라는 용어가 형성되면서 검사가 직접 취조하는 것이 일반화되기에 이르렀고 이는 달라진 검찰의 위상과 역할을 표하는 것이다. 즉 수사 및 검찰 기관의 강제 처분권을 확대하고, 예심절차의 위상을 축소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당시 일본에서는 왜 이러한 관행이 나타나게 된 것일까? 이는 당시 일본의 시대적 상황을 함께 살펴봐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4) 개화기 일본의 시대사

일본의 메이지 시대의 개혁과 개방은 급속적인 변화의 시대상황을 맞이하게 하였다. 급격한 사회변화와 프랑스 등의 유럽식 사법체계의 도입, 아시아 대륙을 향한 침략 전쟁 등 일본이 감당해야 할 갈등과 혼란은 범죄의 급격한 증가 현상으로 이어졌다. 당시 상비 병력보다 재감수형자의 수가 더 많은 기현상이 있었다는 통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증가하는 범죄를 소수의 예심판사로 모두 감당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랐다. 사회 현상의 변화와 형사절차 실무 환경의 변화는 일본 검찰이 기소 편의주의와 제도의 도입을 주장하게 할 분위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다만 프랑스 법률가들이 검사의 소추재량권 남용을 견제하기 위해, 긴 논의 끝에 범죄 피해자가 직접 예심을 청구할 수 있는 사인소추제도를 마련한 것과는 달리, 일본은 기소독점주의를 그대로 유지하였다.

이러한 사법 분위기와 더불어 당시 메이지 형사 소송법이 검사의 피의자 신문과 조서의 증거능력을 부정하는 대심원들의 여럿 판결에 대하여 일본 검찰이 서면의 증거 방법에 대해 명확히 규율하지 않은 점 또한 일본 검사의 피의자 신문조서 확립에 영향을 끼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는 것이 대다수 학자들의 의견이라 볼 수 있었다.

한편, 일본의 피의자 신문조서가 나타나게 된 대표적인 사건이 있는데 바로 청취서 문제이다. 종전과 같이 임의수사의 형식으로 피의자 및 증인 등을 취조하되 그 진술 내용을 문답형식이 아니라 서사 형식에 의해 마치 진술서처럼 진술내용을 기재하고 서면의 명칭도 신문조서가 아닌 청취서로 바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메이지 형사소송법이 이 또한 명확한 규정을 하지 않은 것이다. 메이지 형소법 제2192항에 의하면 공판에서 증거조사의 대상이 되는 서면에 대해 필요한 조서 기타 증빙서류는 서기로 하여금 낭독하게 한다라는 규정만을 두고 있을 뿐이다. 이는 일본 검찰이 서면 방법을 명확히 규율하지 않았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사례가 될 것이다.

 

5) 다이쇼 형사 소송법

앞에서 확인하였겠지만 다이쇼 형사 소송법이 제정되고 나서도 검사의 피의자 신문조서 능력의 권한을 수사 단계에서 공식적으로 규정화한 규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여전히 피의자 및 증인을 신문한 조서의 권한은 예심판사에게 있었다. 그런데 메이지 형사 소송법과 비교해보면 그 전과 달라진 점이 여럿 있었다. 이것의 핵심은 검찰이 추구해왔던 수사 및 검찰 기관의 강제 처분권 확대, 기소편의 주의의 명문화, 예심의 기능 축소 등을 실현하는 한편, 예심의 규문적 성격을 완화하고 취약한 피고인의 지위를 강화하자는 개혁 요구를 반영하였다. 크게 달라진 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 급속 처분과 재판상 수사처분을 도입하여 수사 상 검사의 권한과 편의를 도모하였다. 다이쇼 형소법은 검사가 요급 사건, 즉 현행범 및 준 현행범 사건 외에도 급속을 요할 때는 피의자를 구인, 구류하고 피의자, 증인을 신문하여 압수 수색 검증 등의 처분을 할 수 있으며 이를 다른 검사 또는 사법 경찰관에게 촉탁 명령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를 급속처분이라 한다. 또한 검사는 수사 상 필요한 경우에 공소제기 전이라도 예심판사 또는 구재 판소 판사에게 압수수색검증, 피의자 구류, 피의자 및 증인의 신문 감정 등의 처분을 청구할 수 있게 하였다(255). 이를 재판상 수사 처분이라고 한다. 앞에서 언급하기를 검사의 피의자 신문조서의 권한을 명백히 하지 않았다고 하였지만, 이의 본질적인 문제는 급속 처분과 재판상 수사 처분을 규정화한 조항에서 두드러지는 필요한 경우에이다. 아직까지는 예심판사의 일차적 권한으로 남겨 두었지만 결국에는 검사의 피의자 신문조서의 권한을 시초로 제정한 것이나 다름없는 조항이었다.

 

) 기소편의주의를 명문으로 규정하였다. 275조에 의하면 검사는 범인의 성격, 연령, 환경 및 범죄의 정상과 범죄 후 정황으로 인해 소추가 필요하지 않을 때는 공소를 제기하지 않을 수 있다라고 나와 있다. 이는 중죄 사건이라도 더 이상 검사의 예심 청구가 필수적이지 않게 된 것이다. 오히려 검사는 선택적으로 예심절차를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 피고인의 방어권과 변호권을 신장시키고 예심 절차에 변론주의적 요소를 도입하였다. 피고인이 공소제기 이후 언제든지 변호인을 선임할 수 있도록 하여 예심단계부터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수 있게 하였고(39), 신문 시 피고 사실의 고지, 피고인에게 이익이 되는 사실을 진술할 기회를 부여하는 등(134, 135) 신문 시 피고인 보호를 위한 규정을 신설하였다. 또 변호인은 예심판사의 허가를 받아 서류와 증거물을 열람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303), 추후 공판정에서 신문하기 곤란하다고 판단되는 증인 신문에는 검사와 변호인의 입회권을 인정하고(3021), 검사 피고인 변호인은 예심 중 언제라도 필요한 처분을 예심판사에게 청구할 수 있게 하였다(3031). 그러나 피고인 신문 시에 변호인의 입회가 허용되지 않았고, 검사와 달리 변호인은 오직 판사의 허가가 있어야 서류 및 증거물을 열람할 수 있게 하였다는 점에서 검사와 차별화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바이다. 따라서 변호인의 권익을 확대하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한계가 있는 것으로 보였다.

 

) 공판절차와 서면의 증거 능력에 관한 규정을 보완하였다. 공판 준비절차를 대폭 보완하여 공판 기일 전에 피고인, 증인 신문, 압수수색검증 등의 증거조사를 통하여 공판 기일의 심리를 준비할 수 있게 하였다. 이제는 변호인도 재판장의 허가를 받아 피고인을 신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직접주의를 강화하였다는 점에서 지방재판소공판에서는 피고인 및 증인의 진술을 녹취한 서류는 법령에 의하여 작성된 조서가 아닌 한, 진술자의 사망 및 질병 등의 기타 상로 진술자를 신문할 수 없거나, 소송 관계인의 이의가 없을 때만 증거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343). 그 결과 적어도 지방재판소 공판에서는 법령에 의하여 작성된 조서가 아닌 수사 기관의 청취서는 원칙적으로 증거로 사용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피의자 신문조서의 효력을 더욱 강화시킬 뿐이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검사 등의 검찰 기관의 지위, 권한 등이 이전보다 대폭 강화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 탐구에서 유심히 지켜보아야 할 점은 다이쇼 형사소송법이 추구하려고 하였던 것은 수사 과정에서의 구조 개혁이었다. 피의자를 신문한 조서의 증거 능력이 공판에서 어떻게 쓰이는 지, 증거 능력의 권한이 어떠한지, 그리고 누구한테 있는지를 따지기보다는 수사구조의 과정에 초점을 맞춘 듯하였다. 또한 피의자 측의 변호인의 권익을 확대한 것 역시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다이쇼 형소법 또한 큰 문제점을 안고 있는데 바로 피의자 및 피고인에게 극히 불리한 상황을 야기하였다는 점이다. 피의자 및 피고인은 수사와 예심절차에서 자신을 방어할 효과적인 수단을 찾지 못했고, 변호인의 권익이 확대된 것은 둘째 치더라도 검경의 수사단계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증거를 수집할 수 있는 수사구조 수단이 존재하지 않았다. 특히 다이쇼 형소법의 재판상 수사 처분은 독일의 형소법을 참고한 것이지만, 독일 법에서 인정된 피의자의 증거보전 신청권에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독일 형소법 제164조는 구재판소 판사가 피의자를 신문할 때 피의자가 면책증거 조사를 신청할 경우 구재판소 판사는 그 증거조사가 중요하다고 인정하거나 증거가 멸실될 우려가 있거나 피의자 석방의 근거가 될 수 있을 때는 증거조사를 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피의자 단계에서 자기에게 유리한 증거를 보전할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된 것이다. 또한 제176조는 원칙적으로 예심을 하지 않는 구재판소 관할 사건에서도 피의자가 자기변호를 준비하기 위해 예심을 청구하면 예심을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일본에 도입된 해당 조항은 독일의 그것과 많이 달랐다.

지금까지 살펴본 다이쇼 형소법에 의하면 피의자를 수사하는 검사의 수사권이 크게 확대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봐도 여전히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피의자 신문조서에 관한 것은 이미 10년 전 조선에서 시행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물론 다이쇼 5년인 1916년 형소법 개정안에 이와 비슷한 내용이 담겨 있기 하였으나, 이마저도 통감부재판소사법사무취급령에 비해서는 7년이라는 시간 차이가 있다. 이는 즉, 일본이 다이쇼 형사소송법을 시작으로 검사의 수사권 권한 확대를 하기 시작한 것은 오히려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단계에서 영향을 받았을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과연 왜 일본은 자국보다 일찍이 조선에서 피의자를 대상으로 하는 신문조서를 시행하려고 하였던 것일까? 지금부터는 조선의 사법 체계 현실을 파악하며 어떠한 시대적 맥락 속에서 피의자 신문조서가 확립되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3. 조선 식민지의 형사 사법제도

1) 급속 처분에서의 검사의 지위

1.에서 조선후기의 사회변화를 거점으로 하여 재판소 구성법 및 검사 직제, 민형 소송규칙, 사법 사무 취급령까지 살펴보면서 검사의 피의자를 신문할 수 있는 권한이 언급이 되기 시작하였음을 확인하였다. 지금부터의 단계는 그러한 규정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명문화되어 있는 지를 살펴보는 과정이다.

 

) 재판사무 규칙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난 이후 통감부가 설치되고 나서 19066월에 제정된 법률 제56한국에서의 재판사무에 관한 법률과 칙령 제164통감부법무원관제’, 칙령 제166한국에서의 재판사무취급규칙(이하 재판사무규칙)’이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에게 적용되었다. ‘재판사무규칙에는 기존의 영사재판제도상 인정되었던 특례 외에도 대만과 관동주의 형사절차법에서 나타나는 특례가 포함되었다. 대표적으로 검사는 급속한 처분을 요한다고 사료될 때 공소제기 전에 한하여 검증, 수색, 물건 차압, 피고인 및 증인의 신문, 감정의 명령 등 예심판사에 속한 처분을 할 수 있다. 다만 굴장은 발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요급사건에서 검사에게 구류를 제외한 강제 처분권을 대폭 부여한 것으로 여기에는 검사가 작성하는 피의자 신문조서에 관한 내용도 포함되어있었던 것이다.

 

) 통감부 재판소 사법사무 취급령

다음은 문제의 사법사무취급령을 살펴 보자. 19091016일 칙령 제237조로 공포된 이후에도 재판사무규칙의 조항은 그대로 이어졌다. 특히 제25조를 1항과 2항을 살펴보자.

 25검사는 급속한 처분을 요한다고 사료하는 때는 공소제기 전에 한하여 검증, 수색, 물건차압을 행하거나 피고인 및 증인을 신문하거나, 감정을 명하는 등 예심판사에 속한 처분을 할 수 있다. 다만 구류장을 발하고 벌금, 과료 및 비용 배상의 선고를 행하거나 선서를 하게 하지는 못한다.

검사는 사법경찰관으로써 전항의 처분을 행하게 할 수 있다.

이처럼 재판사무규칙의 조항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눈 여겨 볼 점은 통감부 재판소에 제정된 사법사무취급령 제251항의 내용이 일본의 메이지 치죄법에서 먼저 등장한 것이 아닌, 오히려 사법 사무 취급령이 나타나고 10년도 더 이후인 다이쇼 형소법에서 나타난 것이다. 여기서 탐구자는 의문점을 갖고 그 이후의 조선 형사 소송법을 찾아보았다.

 

) 조선형사령

경술국치(1910.8.27.) 이후 내각 법제국에 의해 심의된 조선 형사령(조선신문1912. 3. 18. 제령 제11)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실려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2 검사는 현행범이 아닌 사건이라 하더라도 수사의 결과 급속한 처분을 요한다고 사료하는 때는 공소제기 전에 한하여 영장을 발하여 검증, 수색, 물건차압을 하거나, 피고인 및 증인을 신문하거나 또는 감정을 명할 수 있다. 다만, 벌금, 과료 또는 비용배상의 언도를 하거나 선서를 시킬 수는 없다. 전항의 규정에 의하여 검사에게 허용한 직무는 사법경찰관도 이를 임시로 역시 할 수 있다. 다만 구류장을 발할 수는 없다.

 13 사법경찰관이 전조 제2항의 규정에 의하여 피고인을 신문한 뒤 금고 이상의 형에 해당한다고 사료하는 대는 14일을 초과하지 않은 기간에 유치할 수 있다.

 15조 검사가 피고인을 구류한 경우 20일 이내에 기소의 수속을 하지 않은 때 이를 석방하여야 한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사법경찰관이 임시적이라 하더라도 구류장 발부를 제외한 처분을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형사령에 의해 사법 경찰관에게 허용된 14일 이내의 피고인 유치권이다. 이는 이전의 법률과 규칙에서 확인할 수 없는 내용이며, 대만과 관동주 법령에도 전례가 없는 것이라 한다. 한국인에게만 적용되었던 가장 독창적인 발명품이라 일컬어지는 내용이었다. 여전히 피의자를 대상으로 하는 수사 구조에서는 별다른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지만, 일본의 입장에서는 본국에서 시행하고 있는 형사소송법보다 먼저 피의자 신문조서 권한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개정 조선형사령

1912년 조선 형사령의 강제처분권한의 구조가 일본에서 19225월 제정된 다이쇼형소법(1924. 1. 1 시행)의 시행에 발맞추어 개정된 조선 형사령(1922. 12. 17 개성, 제령 제14, 1924. 1. 1 시행, 총독부령 제95)은 검사의 자유로운 수사에 관한 내용이 담기기 시작하였다.

 12검사는 형사소송법에 규정한 경우 외에 사건이 금고 이상의 형에 해당하고 급속의 처분을 요한다고 사료하는 때는 공소제기 전에 한하여 압수, 수색, 검증 및 피의자의 구인, 피의자 또는 증인의 신문, 감정, 통역 또는 번역의 처분을 할 수 있다.

전항의 규정에 의하여 검사에게 허용한 처분은 사법 경찰관이 이를 행할 수 있다.

 13사법 경찰관은 전조 제2항의 규정에 의하여 피의자를 신문한 뒤 형사 소송법 제87조 제1항 각호에 규정한 사유가 있다고 사료하는 때는 10일을 초과하지 않는 기간에 피의자를 유치할 수 있다.

사법경찰관은 전항의 유치기간 내에 서류 및 증거물과 함께 피의자를 관할재판소 검사 또는 그에 상당하는 관서에 송치하는 수속을 해야 한다.

2항의 규정은 사법 경찰관이 형사 소송법 제127조의 규정에 의하여 피의자를 신문하여 금고 이상의 형에 해당한다고 사료하는 경우에 이를 준용한다.

 15검사는 제12조의 규정에 의하여 피의자를 신문한 뒤 형사소송법 제90조 제1항에 규정한 원유가 있다고 사료하는 때는 피의자를 구류할 수 있다. 이 경우에는 형사소송법 제91조 및 제131조의 규정을 준용한다.

검사가 전항의 규정에 의하여 피의자를 구류한 겅우에 10일 내에 공소를 제기하지 않을 때는 구류를 취소해야 한다.

검사가 피의자를 구류할 때는 다시 형사소송법 제255조의 규정에 의하여 구류를 청구할 수 없다.

 

피의자를 구류할 수 있는 권한이 나타나면서 피의자를 상대로 수사구조에서 검사가 갖는 권한은 더욱 강화되었으며, 여전히 피의자를 신문하고 조서를 작성하는 권한은 유지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처럼 조선 형사령은 신문권을 활용하여 검사와 경찰이 피의자와 증인을 신문하여 신문조서를 작성할 수 있고, 이 신문조서는 법령에 의하여 작성된 신문조서로서 당연히 증거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수사기관이 임의처분을 하여 청취서를 작성한 경우 다이쇼 형소법에 의해 증거능력이 제한될 우려가 있었으며, 따라서 개정 조선형사령이 실시되면서 법무국장 통첩을 통하여 지방법원 합의부에 관할에 속하는 사건의 경우 형사령 제12조의 급속처분에 의해 증거를 수집하라고 한 것이다. 이들 사건은  불경죄, 사형 및 무기 또는 단기 1년 이상의 징역 또는 금고에 해당하는 사건 등- 다이쇼 형소법상 지방재판소 공판에 해당하여 청취서에 당연히 증거능력이 부여되지 않기 때문에, 처음부터 급속처분을 활용하여 신문조서를 확보하라는 것이었다. 이는 굳이 사안의 성질이 강제수사를 할 만한 사안이 아니더라도, 증거확보를 위하여 강제수사를 하라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드는 의문은 이러할 것이다. 다이쇼 형소법에서는 이미 10년도 더 이전인 통감부재판소사법사무취급령에서 시행하고 있는 조항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은 그렇다 치자. 그런데, 일제는 왜 하필 피의자를 상대로 하는 신문 조서 절차를 자국(다이쇼형소법 기준.)이 아닌 우리나라(개정조선 형사령 기준.)에서 특히나 더욱 강압적으로 하였던 것일까? 이는 당시 우리나라 식민지의 상황을 파악해보아야 알 수 있는 것이다.

, 앞으로 풀어야 할 숙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왜 일제는 본국보다 빠르게 피의자 신문조서를 시행하였고, 이를 본국에서의 시행하기 이전에 조선에서 강화하여 운영하였는가 

이는 아래부터 이어지는 당대 우리나라의 식민지 상황을 파악하며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2) 식민지 상황

) 검사기관 구조의 한계

당시 우리나라는 검사국 수사의 통제를 받고 있었으며 사법경찰관 및 사법경찰직무를 수행하는 자로부터 송치를 받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러나 당시 식민지 상황을 따져보았을 때 사상탄압, 독립운동가들 탄압으로 인한 범죄율의 증가 등으로 인해 검사에게 들어오는 사건의 양이 갈수록 늘어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다음 [그림2]는 검사의 사건 수리 건수를 그래프로 나타낸 것이다.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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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665pixel, 세로 449pixel 다음의 그래프에서 확인 할 수 있듯이 검사가 수리한 사건의 수는 1930년대 초까지 꾸준하게 상승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1920년대부터 강조되던 수사에서의 검사의 역할이 반영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사건 수 자체가 많아도 이를 뒷받침할 검찰당국의 인원 충당만 제대로 이루어지면 별로 문제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검사 1인당 맡는 사건부담은 오늘날에 비해 높았다. 애초에 검사 인력이 부족한 것이 문제였다. 1910년대에는 총 60여 명의 검사가 있었는데, 그중 고등법원과 복심법원 소속검사, 기타 감독관 지위에 있는 검사를 빼고 나면 실제 일선에서 수사와 송무(소송에 관한 사무나 업무)를 담당할 인력은 절반수준으로 떨어진다.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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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656pixel, 세로 467pixel 한편, 검사 인원의 부족 때문에 초기에는 지방법원 지청검사의 직무도 대부분 경부 및 경시에게 대리시키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검사가 적극적으로 수사권과 수사지휘권을 발휘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음 [그림3]은 검사수리사건을 당시 검사 인원수로 나누어 검사 1인당 사건부담을 나타낸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또 드는 의문점은 이것이다. 왜 검사 1인당 맡는 사건 수가 늘어났을까? 초창기에는 범죄자의 수가 늘어나서인 것도 있겠지만 이에 더하여 애초에 검사의 인력 자체가 적었다. 당시 검사가 속한 검찰, 또 이 검찰이 속해 있는 조선총독부의 전제적인 성격은 식민지라는 환경과 더불어 사법 관료들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기에 충분하였다. 따라서 일본 본토에서 자격을 갖춘 젊은 사법관을 조선총독부 재판소에 충원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애초에 1907년에서 1909년 사이 통감부의 일부 고위 판, 검사 보직자들은 자신들의 연줄망을 활용하여 지인과 후배들을 통감부로 데리고 왔다. 이들이 병탄 직전과 직후의 조선총독부 사법의 중추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경성, 평양, 대구 등 같은 조선의 대도시 이외의 지방 지청에 일반임용 출신의 신진 사법관을 유인하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상급 법원이 있었던 조선의 일부 대도시에서는 비교적 괜찮은 수준의 생활이 가능했지만, 일본에서 제국대학을 졸업하거나 어려운 등용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에게 조선총독부의 일선지청은 애초에 매력적인 장소가 아니었나 보다. 또한 조선의 지방도시에 부임하게 되면, 많은 일본인 관료들이 가족과 생이별을 하는 일이 잦았는데, 게다가 대부분의 지방법원 지청 재판소와 검사분국의 정원은 1-2인에 불과하였고, 간혹 1인의 조선인 판사와 검사가 배치된 실정이었다.

이에 총독부는 재판소 재직 판, 검사들에게는 본봉 이외에 가봉과 사택료를 지급하는 등의 유인책을 썼다. 또한 본토 사법부에 비해 사법관에 대한 상대적으로 낮은 처우도 불만이었는데, 일본의 재판소 구성법이 시행되지 않았던 식민지 조선에서 사법관의 신분 보장은 조선총독부 재판소령이거나 판례상 검사였다. 이를 통해 검사의 수가 그리 늘지 않은 이유를 확인할 수 있길 바란다. 그리고 이는 일제가 후에 검사의 권한을 확대하기로 한 시초가 된다.

) 검사 기관의 권한 확대

앞서 살펴본 그림( [그림3] )은 감독관에 해당하는 칙임관을 제외하고 주임관 검사인원을 기준으로 하여 사건부담은 계산한 것이다. 1911년에는 하루 1건 정도였던 것이 1930년대에 들어서는 하루 4.3건까지 치솟았다. 이는 오늘날과 비교해도 그리 낮은 수치가 아니다.

검사에게로 송치 받는 사건의 수가 이렇게 증가한 것은 당시 검사국이 직수한 사건의 유형과도 관련이 깊다. 1911년부터 1929년까지의 상황을 확인하자면 1910년대 검사직수사건 중 많게는 90% 이상이 고소사건이었다. 고소사건은 19111,995건에서 19245,761건까지 완만하게 증가하였다가 이후 다시 완만히 감소하였다. 반면 고발사건의 경우 1920년대 들어 급격히 증가하였는데 이 시기는 사인에 의한 고발뿐만 아니라 국가에 의한 고발까지도 증가하였던 것이 그 요인이었다. 조세범을 비롯한 행정범의 증가는 당시 1920년 대 일제에 의한 문화 통치로 인해 경찰병력이 3배 이상씩 증가한 것도 한 몫한 영향으로 볼 수 있다.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1910년 대 조선의 사법당국은 경비절감을 이유로 기소유예처분을 장려하였다. 일본보다 감옥 설비가 부족한 상황을 고려해볼 때 경미한 사건에 대해 한층 신속한 처리가 요구된다는 것이었다. 또한 그에 따라서 검사의 불기소 처분 등 사건종결처리수가 20년대에 들어서 높아지고 있었다. 다음 [그림4]를 통해 확인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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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641pixel, 세로 479pixel 위 그래프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3.1운동 직후인 1920년에 불기소처분이 급격하게 증가한다는 것인데, 이는 문화통치기 총독부 측의 달라진 방침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19215월 검사국 감독관회의 석사에서 나카무라 다케오 고등법원 검사장은 조선의 정세와 검사의 형사사건처리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여 종전의 고식적인 사건처리를 탈피하여 사건의 성질에 따라 기소와 기소유예를 탄력적으로 운영하고 기소유예처분을 확대할 것을 지시하였고, 그에 따라 검사의 수사단계에서의 불기소처분을 내림으로써 사건을 종결시키는 수순을 밟아온 것이다. 공판에 넘기지 아니하고 검사의 수사 단계에서 사건을 종결시켜달라는 무언의 압박과 함께 검사는 이 단계에서 피의자를 신문하는 조서 절차를 더욱 강화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탐구자가 든 의문은 왜 검사는 서둘러 사건을 종결시키려고 한 것일까, 였다. 이는 역시 당대 식민지 사법 체계를 효율적으로운영하기 위한 일제의 의도였다고 볼 수 있다. 뒤에서도 확인하겠지만 형무소 시설은 늘려도 재정상 한계로 인해 자연히 축소되며, 자기네들 의도로는 한 번에 많이 잡아들이는 게 효과적일테지만 막상 “7인의 유죄자를 검거하기 위해 100인을 검거하는 무능과 가혹을 벌이는 마당에 검사 혼자서 그 모든 것을 감당해야 했던 것이다. 이는 검사가 불기소처분을 내려버려 서둘러 사건을 종결시켜 있는 형무소 시설이라도 제대로 운영해버리자는 의도도 있을 테다.

이러한 영향은 예심절차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론적 배경에서도 설명하였지만 예심절차는 공판에 앞서서 사건이 공판에 회부할 만큼 충분한 혐의가 있는지 예심판사가 조사하는 절차이다. 192212월 다이쇼 형소법의 시행에 대비하여 개최된 재판소·검사국 감독관 회의는 예심은 사건공판에 회부할 것인가 아닌가를 결정함으로 족하지만, 조선의 실정에 비추어 종래와 같이 죄의 유무를 결정하기에 필요한 증거를 수집함이 상당하다고 협의·결정하였다. ‘조선의 실정이라 함은 검사의 인원부족으로 인한 검사 1인당 맡는 사건의 부담 증가, 형무소 시설 부족 등을 의미한다.

또한 이외에도 조선총독부의 검사들은 본국에서와 마찬가지로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검사의 적극적인 수사를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사실 왜 특히 1920년대에 들어서 이러한 수사관행이 생겨났는지는 의미심장하다. 원래 일제는 1912년 치안유지를 명목으로 조선 태형령을 제정하여 즉결 심판 대상이 되는 행위를 한 조선인들에게 태형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1919, 3.1운동 참가자들이 너무 많아 일제는 이들을 신속하게 처벌하기 위하여 행동에 나선 것이다. 1921126월 검찰사무취급에 관한 고등법원 검사국통첩을 통해, 중대한 사건에 대해서도 일반보통의 사건과 마찬가지로 주된 수사를 사법경찰관에게 일임하고 검사는 겨우 보충수사를 하는 데 그쳤던 관행을 지양하고, 중대한 형사사건에 관해서는 사정이 허락하는 한 그 발생과 동시에 검사 스스로 수사를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검사국이 수리한 사건의 수사를 보조하기 위해 1923년에는 지방법원 검사국과 지청 검사분국의 서기와 고원이 사법경찰관리의 직무를 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1926년에는 검사가 직수한 사건은 특히 직접 수사할 필요가 있다고 사료되지 않는 한 사법 경찰관으로 하여금 수사하게 한다는 방침이 있지만, 그 취지를 오해하여 검사가 대소경중을 불문하고 사법 경찰관에게 일임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검사가 수사의 수뇌라는 정신을 몰각한 것으로서, 영향이 중대하거나 뚜렷하게 사회의 이목을 끄는 사건은 반드시 검사 스스로 수사할 것을 강조하였다.

19354월 검사국 감독관에 대한 훈시에서 가사이 고등법원 검사장은 1924년 고등법원 검사국 통첩은 수사의 본지에 반하는 것이므로 모든 직수사건을 가급적 검사 스스로 수사할 것을 촉구하였다.

3) 사법 시설의 변화

한편, 일제가 본국과 우리나라에 1923, 1924년을 기점으로 하여 검사의 수사권을 확대한 것은 당시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사법 시설의 계획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사실 1910년 강제 합병 이후에도 사법 시설의 정비와 신축은 지속적으로 중요한 사업으로 취급되었다. 조선 총독부가 간행한 조선총독부시정연부중 유일하게 1911년의 것에만 관서별 영선공사내역이 기재되어 있는데, 창고를 제외하면 재판소의 경우가 가장 많은 신축, 증축 건수를 보이고 있으며, 지출된 금액도 감옥 다음으로 두 번째로 높아 사법시설의 정비가 매우 중요한 사업이었음을 알려준다. 다음 그림은 국가 기록원 소장 건축도면을 통해 확인되는 내용을 정리한 것으로 기본적으로 기존 시설을 승계한 각 기관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부족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청사의 증축을 진행하였으며 여건에 따라 새로운 청사를 신축하기도 하였다. ([그림5] )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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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422pixel, 세로 1125pixel

 

이를 눈여겨봐야 하는 이유는 바로 사법 시설의 기능별 공간과 변화가 나타난 점 때문이다. 당대 일제강점기 사법시설의 내부 공간은 매우 단순하게 구성되었다. 각종 편의시설이 들어가는 부속가를 제외하고는, 청사는 법정, 판사실과 검사실, 서기와 사무실을 기본으로 하며, 경웨 따라 응접실, 회의실 등의 기타 공간이 구성되었다. , 현재의 법원과 검찰청의 기능이 한 건물 내에 함께 수용되어 있었는데, 이는 현재까지도 법원과 검찰청이 항상 같은 부지 내에 지어지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한편 법정은 1920년대 중반까지는 4(법정 2, 검사정 1, 예심정 1)가 설치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이후로는 3(법정 1, 검사정 1, 예심정 1)가 설치되는 것이 더 일반화되고 있다. 반면 법정의 총 면적은 청사 전체 면적이 증가하는 것에 맞추어 꾸준히 늘어나는 경향을 보였다.

판사실과 검사실의 면적 변화 역시 이 시기 눈에 띄는 변화이다. 1910년대의 지청 청사는 모두 판사실이 검사실보다 넓게 계획되었지만, 1923년부터는 검사실이 판사실보다 넓게 계획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에 탐구자는 본 탐구를 진행하면서 이것이 당시 조선형사령의 영향 탓이라고 생각을 하였다. 특히 개정조선형사령의 영향으로 인하여 사법 시설의 기능이 재판에서 수사로 비중이 점차 변하고 있음을 파악해볼 때 당대 식민지 현실과 사법 체계의 변화가 동시에 맞물려 움직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부족한 형무소 시설을 늘렸지만, 이는 재정상의 한계로 인해 오히려 또 다른 문제점을 가져 왔다. 형무소 운영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조선 총독부는 재정의 한계로 인해 1925년에는 형무소 1개소(영등포), 형무지소 2개소(강릉, 제주도)를 폐지해야 했을 정도였다. 1927년 현재 형무소 1평당 평균 수용 인원은 2.9명이었는데, 같은 시점 일본의 1평당 수용 인원은 0.4, 대만은 0.5명이었다. 전쟁과 경제 불황으로 범죄가 증가하고, 전시체제로의 재편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1935년의 1평당 평균수용인원은 조선 3.1, 일본 1.1, 대만 1.3명이었다. 반면에 출옥자의 갱생보호사업단체 수는 조선 26, 일본 823, 대만 60, 갱생보호단체 1개당 석방자는 조선 1,028, 일본과 대만은 122명이었다. 즉 조선의 감옥은 일본이나 대만에 비해 3배 정도 과밀하였고, 조선의 석방자는 출소 이후 거의 방치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검사의 인력부족은 오히려 검사의 수사단계에서의 검사의 권한을 더욱 확대하여 공판으로 넘기지 않는 경향을 확대시켰고, 특히 피의자를 신문하고 조서를 작성하는 것과 관련해서는 더욱 그러하였다. 다이쇼 형소법이 갱신회수에 제한은 없었지만 미결구금기간을 최장 2개월로 한 것과는 달리, 조선 형사령 제16조는 이를 3개월로 늘려버렸다. 또 재판소 및 검사국의 감독관 회의의 협의결정을 통해 예심의 비밀유지를 위해 변호인의 서류 및 증거열람· 등사권을 극도로 제한하였다. 그에 따르면 조선의 변호1인은 자신이 직접 입회한 예심처분을 제외하고는 서류와 증거물을 열람·등사할 기회를 봉쇄당하였다. 이처럼 식민지 조선의 강압적인 통치는 형무시설부족으로 이어졌고, 이에 대한 해결에 대한 책임을 검사에게로 돌려버려 가급적 신속하게 사건을 종결시켜버리라는 의도가 있었다. 그래서 7명을 검거할 것을 100명을 한꺼번에 조사해버리는 이상한 절차가 관행이 되었으며, 결국 불기소처분만 받고 돌아가 버리는 피의자들이 팽배해 있었던 것이다. 이는 곧 피의자로 하여금 강압적이고 비인권적인 수사 구조를 묵인하게 만들었음 또한 위의 조선 형사령 제16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문제는 단순히 효율적이고 신속한 식민지 운영을 위해서 검사의 수사단계를 더욱 더 강압적으로 하여 빠르게 수사를 종결시키려는 의도가 내비치고 있는 것이었다. 이는 피의자 신문조서로서 보다 쉽게 달성할 수 있는 의도였다. 그러나 이로 인해 당시 조선인들은 강압적인 수사로 인해 핍박을 받는 경우가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박은식 선생은 다음과 같이 무단통치기 형사절차의 실상을 생생히 말해주고 있다.

박은식 , “경찰이 보아 죄를 범했다고 인정되는 자는 사법에 의하지 않고 직접 체포했으며, 그자뿐만 아니라 그의 친척, 친구까지 관련시켜 사실의 유무와 경중을 불문하고 신문에 앞서 악형을 가했다. 그리하여 인사불성이 되게 하여 여러 날을 감금한 두에 비로소 신문하기 시작하는데, 또한 악형을 가하여 자백을 강요하여 아무런 증거도 없이 자백만으로 죄를 성립시킨다.() 증거를 수사함에 있어서도 모두 강제처분을 하였다. 증인, 감정인 또한 강박과 고문으로 그 범죄사실을 위증하게 한다. 물론 압수와 수색은 소유자의 승낙이나 입회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그 물품이 범죄사실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라도 압수한다. 형사 피고인의 경우에는 20종 이상의 형구로 혹독하게 고문을 실시하여 거짓자백을 시키고 범죄사건을 위조했으며 절대로 그 원통함을 밝히지 못하도록 했다.”

 

지금까지 살펴 본 내용은 일제가 피의자 신문조서를 담당하는 검사의 권한을 확대시킬 수밖에 없었던 조선의 식민지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왜 일제는 재정상의 어려움, 사법 체계 운영의 한계 등의 해결 방안을 검사의 피의자 신문조서 작성이라는 수사 절차의 강화에서 찾은 것일까?

사실 이는 이미 앞 내용에서 확인하였던 내용이다. 일제는 계속해서 증가하는 조선의 독립운동을 제압하고, 사상을 탄압하기 위하여 형사소송체계를 강화하려고 하였다. 일제가 이것의 강화를 수사 절차에서 찾은 이유는 당시 일제로부터 검사를 더욱 더 끌어오기 위함이었다. 앞에서 확인하였듯이 당시 조선은 검사들이 오기에 매력적인 장소는 아니었으며, 따라서 이들을 끌어당길 무언가가 필요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조선인 검사에게는 딱히 관심이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일제가 조선인 검사, 사법 경찰 등의 사법관을 많이 등용하면서도(그러나 이는 부족한 사법관을 메우기 위해 조선 총독부에 의해 특별 임용된 사람들이었다.) 조선인 판사에게는 예심판사의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다. 식민지 사법에서 예심판사는 심리 개시 이전에 행하는 준수사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사건을 정식 재판에 회부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자리였고, 따라서 예심판사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겨우 피의자를 구금할 수 있는 권한이 조선인에게는 부여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수동성은 법원 및 서기 및 통역생에서도 나타났다. 법원 서기 중 감독직은 검사의 결원이나 부재 시 검사의 역할을 대신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는데, 대체로 판임관 관등이 가장 높은 자가 맡는 직책이었다. 하지만 판임관 가운데 조선인이 가장 관등이 높은 경우에는 차석의 일본인 서기가 감독을 맡았으며, 이 역시 예외가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일제는 조선을 자기들 입맛대로 통치하기 위해서는 본국의 인재들(일제 기준)을 끌어 모으는 것이 중요하였고, 특히나 검사의 인력 충원을 위해 일본인 검사를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일제는 검사의 수사 권한을 대폭 강화하여 그들을 유인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일제 강점기 초기 검사는 경찰의 수사결과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사건을 법원에 넘겨주는 역할에 그칠 수밖에 없었으나, 총독부의 검찰 관료들은 자신들 스스로도 만족하지 않았으며, 더욱 더 많은 일본의 검사를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수사주재자로서 보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지위를 얻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1920년대 중반 피의자 신문조서가 그 시초가 되어 검사의 권한이 더욱 더 강화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렇듯이 피의자 신문조서를 둘러싸고 식민지 조선의 검찰은 일본 내부의 흐름과 연동하면서 일본에서의 논의 성과들을 취사 선택하여 받아들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또한 제국의 최전선이고 제국 중심부의 입헌정치와 절연되어 있는 식민지 조선에서는 검찰권 강화를 둘러싼 첨예한 법적, 정치적 논쟁이 벌어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피의자 신문조서는 조선 식민지의 특수한 상황에 맞물려 이를 공식적인 절차화시키려는 일제의 의도가 있었으며, 1920년대 후반부터 사상범죄, 노동·소작쟁의, 사회운동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개시되었고, 1930년대 후반 전시체제로 돌입하면서는 후방치안과 전시통치체제를 뒷받침하기 위해 형사정책이 보다 경화(硬化)되어 버리게 된다. 해방 직후 미군정 시기 이후 역시 신생국가에서 조서를 쓰지 않기에는 효율성의 측면에서 보아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으므로 피의자 신문조서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만 것이다.

. 결론

1) 탐구 내용 요약

서론에서 피의자 신문조서가 현재에 들어와 논란이 되고 있음을 언급해줌과 동시에, 많은 이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피의자 신문조서의 그 기원이 일제 강점기 연원으로 흘러간다는 것에 의문점을 가지고 이의 역사적 기원을 탐구해보았다. 절대왕정의 타도와 개인의 자유와 권리 보장을 내세웠던 프랑스 대혁명 이후로 프랑스의 형사소송법이 구체적으로 체계화되었으며, 이로부터 근대 국가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의도에서 프랑스 치죄법에 예심판사제도가 등장하였다. 이는 다시 일본 메이지 치죄법이 형성되는 데에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당대 일본의 검사들이 범죄사건을 직접 취조하고 증거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작성한 조서를 재판장에서 증거로 현출하려 하였고, 이로 인해 그 후 점차 예심판사의 권한은 축소되기에 이르렀다. 물론 다이쇼 형소법에 이르기까지 검사의 피의자 신문조서의 작성권한은 공식적인 절차에서 존재하지 않았지만, ‘청취서 문제등 점차 검사의 권한을 확대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는 당시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제국주의 관행 및 아시아 대륙을 침략하기 위한 목적에서 통치의 효율성과 신속성을 제고하기 위한 개화기 일본의 시대 상황과도 맞물려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눈 여겨 볼 점은 다이쇼 형소법(1924년 시행) 에 이르러 피의자가 신문 조서를 작성할 수 있는 권한이 언급되기 시작하였는데, 똑같은 해당 조항이 이미 10년도 더 이전인 조선의 사법사무취급령(1909년 시행)에 똑같이 기재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검사가 축소된 예심판사의 권한을 이어받아 피의자를 신문하고 조서를 작성할 수 있는 권한은 이미 조선에서 시행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해석은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 조선에서 시행할 목적으로 이를 제정하였고, 발맞추어 이어서 본국에서도 똑같이 시행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탐구자는 왜 하필 조선에서 먼저 시행되고 난 이후에 본국에서 시행하기에 이르렀을까, 하는 의문점을 가진 채 당대 식민지라는 특수한 상황에 집중하였다. 당시 일본 검사들은 경술국치(1910) 이후 조선이라는 상대적으로 본국에 비해 시설도 환경도 좋지 않았던 지역에 와서 검사의 실무 수사를 진행하기란 여간 꺼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일본은 무단 통치기 조선을 효율적이고 강압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조선인 검사보다 일본인 검사에게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하려고 하였으며, 이는 3.1운동이 터지면서 이어 일제가 문화 통치기 더 많은 사상 탄압을 하기에 이르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수사 대상자의 대폭 증가 및 검사 인력 부족 등으로 인하여 형무소 시설 및 검사 기관의 건물을 대폭 증가시켜 설치함과 동시에 검사의 권한을 더욱 더 확대시킨 것으로 보인다. 검사의 권한 확대는 수사 단계에서의 권한으로 집중되었으며, 이는 곧 수사 단계에서 피의자를 신문하는 절차를 더욱 더 강화시키는 것으로 나타남과 더불어 변호인의 권리는 배제시키는 것 또한 함께 나타났다. 왜 하필 조서를 작성하는 권한을 확대하였냐면, 당시 조선인과 일본인 검사의 언어가 서로 달라 빠른 수사진행을 위해서는 글로써 적고 통역을 하는 것이 훨씬 시간이 절약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개정 조선 형사령에서 검사의 피의자 신문조서 작성의 권한이 더욱 확대되는 결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러한 수사관행은 오히려 불기소처분을 받고 수사종결을 내리는 사건의 수를 대폭 증가시켰다. 빠른 수사를 위해서 신변의 확인도 없이 수사 이전 절차를 제대로 거치지 않아 무작위로 피의자를 잡아들였기 때문에 실제 기소를 받고 넘어가는 이들의 수가 많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당대 형무소 시설의 부족과도 맞물리는 현상으로도 파악할 수가 있었는데, 형무소 시설을 늘렸더라도 그에 맞는 수요가 이를 워낙 압도하는 경향이 생겨 불기소처분의 비율 또한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는 다시 검사가 수사 단계에 있어 피의자를 신문하고 조서를 작성하여 신속하게 수사를 종결해버리고자 하는 현상으로 나타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그렇게 피의자 신문조서는 1930년 대 후반 전시체제로 돌입하면서부터 후방 치안과 통치 체제를 뒷받침하기 위해 형사정책이 보다 경화되어버림으로써 피의자 신문조서는 오늘날까지 이르게 된다.

 

2) 역사적 의의

1912년부터 조선에서 전면 실시된 예심제도는 검사의 신청으로 예심판사가 사건을 먼저 심리한 뒤 객관적으로 범죄 성립에 확신이 있을 때만 재판을 시작하도록 한 제도이다. 혐의가 불분명한데도 검사가 함부로 기소하는 것을 막기 위한 인권보호차원의 제도였으나, 일제는 이를 조선인들을 핍박하는 수단으로 변질시켰다. 예심단계에서 검사나 사법경찰은 피의자를 무기한 붙잡아 둘 수 있었으며, 이들이 작성한 조서는 재판에서 중요한 증거로 쓰였다. 인권을 보호하려고 만든 제도를 자백을 할 때까지 가둬놓고 갖은 고문을 가해 거짓조서를 만들어 낸 도구로 활용한 셈이다. 그러는 동안 사법경찰권을 더욱 더 강화시켰으며, 공판절차는 간소화하고 수사절차를 강화시켜 피의자 신문제도는 더욱더 독립운동가들의 숨통을 조이게 된 것이다. 또한 일본 형사소송법에서는 현행범만 제한적으로 검사가 범죄 현장에서 예심 판사에게 속하는 강제처분을 하도록 했으나 조선형사령에서는 현행범의 경우 검사뿐 아니라 사법경찰도 예심 판사에 속하는 처벌을 할 수 있었고, 비 현행범도 검사나 사법경찰이 수사의 결과 급속한 처분을 요하는 것으로 생각할 때공소 제기 전에 영장을 발부해 각종 검증 및 수색, 신문을 할 수 있었다.

특히 피의자를 신문하고 조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변호인의 권리를 제한하고 고문 등의 폭력 행위를 일삼았으며, 오랜 기간 구금을 시켜 온 수사 관행은 오늘날 피의자 신문조서를 작성하게 됨으로써 이어지고 있다. 물론 고문 등의 행위는 사라졌으나, 장기간 구금 및 여전히 녹취 및 영상 녹화 방식이 전면적으로 도입이 되지 않는 등 피의자의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호할 제도 등이 마련되지 않아서 논란을 빚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일제 강점기에 형성된 피의자 신문조서 관행이 오늘날에까지 이어지는 과정에서 완전히 수사 절차상의 문제가 해결이 되지는 않은 상황이라고 탐구자는 조심스레 언급하여 본다. 그리고 이러한 수사 절차의 측면에서 개선이 이루어지는 것이 오늘날 검찰개혁의 핵심이라고 제언해본다.

물론, 탐구자는 본 탐구에서 주로 피의자 신문조서가 작성되게 된 역사적 기원 및 배경을 살펴본 것일 뿐 오늘날의 제3121항과의 비교 및 분석을 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오늘날 피의자 신문조서가 현대적으로 어떤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지를 면밀히 분석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전 세계 어디에도 없는 피의자 신문조서가 오늘날에 와서 많은 논란이 되고 있으며, 이 시초가 일제 강점기였다는 사실은 본 탐구자로 하여금 역사적 교훈을 생각해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역사를 배우는 이유 중 하나로, ‘과거를 탐구함으로써 잘못된 것을 거울삼아 현재를 바로 잡기 위함이라고 들어왔다. 그러나 사실대로 말하자면 탐구자는 지금까지 이 말이 무엇인지 쉽게 와 닿지는 않았던 터라,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그냥 단순히 흥미진진한 대서사를 탐구하는 것 그 자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본 탐구를 진행하면서, 이 말이 깊이 와 닿았다. 피의자 신문조서라는 것을 매개로 하여 과거와 현재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통해서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피의자 신문조서는 우리 과거의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으며, 우리는 현재 이 관행에 대하여 깊이 논의하지 않은 채 단순히 형사소송체제의 영향을 받고 있다. 최근에 들어서 이것에 대해 많은 이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 또한 꽤 고무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피의자 신문조서의 역사적 기원을 살펴 이것이 일제 사법 잔재의 그늘로서 오늘날 남아 있다는 것 또한 함께 파악할 수 있다면 오늘날 피의자 신문조서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개선해나가는데 조금 더 깊이 있는 논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덧붙여, 본 탐구를 하면서 살펴봤듯이 피의자 신문조서가 오늘날과 같이 단단히 자리 잡은 데에는 순수한 목적이기 보다는, 일제가 조선에서의 통치를 보다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행하기 위한 논리를 실현시키기 위한 의도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였음 하는 바이다. 피의자 신문조서가 생긴 배경에는 일제의 이러한 의도 및 목적이 있었기에 이러한 연유로도 오늘날 피의자 신문조서가 개혁될 필요성이 있으리라. 이 탐구가 피의자 신문조서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였다면 탐구자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한다.

3) 느낀 점

법과 역사라는 방대한 자료를 다루는 학문에의 융합을 꾀하는 주제를 택하고 탐구를 하는 과정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힘이 드는 일이었다. 이미 5월 달에 정치와 법 신문스크랩을 하면서 주제를 선정하였고, 그때부터 약 4개월 간 근대시기 일본, 우리나라의 형사소송법 자료를 찾아 뒤지면서 또 비교하면서 피의자 신문조서의 역사적 기원이라는 비밀을 파헤치는 과정은 흥미진진하기도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매우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는 일이기도 하였다. 1차적으로 원고를 다 작성하고 나서도 법적으로, 역사적으로 오류가 없는지 살펴 재차 수정을 거듭하는 것 또한 솔직히 말해서 고통의 연속이긴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모든 탐구의 과정이 이런 식으로 진행되리라는 생각을 했다. 탐구란, 정말 자신이 궁금해 했던 것, 관심이 있는 주제에서 심화하여 알아보고자 하는 것을 찾아보면서 그 과정을 세세하게 드러내 누가 보더라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탐구자가 이 주제를 선정하게 된 계기 역시 정치와 법 시간에 수행평가로 진행한 신문스크랩 활동(뉴스로 보는 사회탐구)에서 발견한 기사를 읽으며 의문점, 궁금한 점을 가지고 이와 같은 탐구 과정을 도출해내었으며, 그 과정에서는 본인의 진로이자 관심 분야인 역사와도 깊은 관련이 있었다. 또한 본 탐구 역시 역사, 법이라는 방대한 학문 분야를 다루고 있기에 상세한 설명과 인과관계입증이 필요하였는데, 그러한 과정을 담기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하였던 것이 지금 돌이켜보면 의미 있고, 보람차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특히 평소에는 법이라는 것에 그리 많은 관심을 보이지 않던 탐구자는 탐구를 진행하면서 본인의 진로 분야인 역사학에서도 이라는 것이 인류사를 이해하는 한 축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국가 형성에서 근간이 되었고, 지금도 그러한 법은 일상생활 속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다. 그러한 법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과정이 역사 탐구에 있어서도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음을 깨달은 것 같다. 특히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은 오늘날, 다시 한 번 일제강점기의 뼈아픈 역사가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탐구자의 역사 인식 또한 향상한 것으로 느껴지니 더욱 더 의미 있는 탐구가 되지 않았나 싶다

d********2 2020.03.10.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