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인문학'이라는 큰 화두로 앞서 발표했던 1권과 이번에 새롭게 발표한 2권의 모토를 이루고 있는 저자의 말이다. 전작에서는 오늘날의 사회 문화가 텍스트 중심에서 어떻게 이미지 중심으로 변화가 되었고 그 변화의 중심에 '디지털'이라는 매개체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다루며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숨은 뜻을 헤아려 보는 시간이 되었다.
그렇다면 그 후속편인 2권에서 저자가 들려주는 이미지 인문학은 어떤 내용일지 궁금해진다. 2권에서는 디지털 이미지의 세계속에 살아 숨쉬고 있는 '언캐니' 미학을 중점으로 다루고 있다. '언캐니(Uncanny)는 독일어 '운하임리히(Unheimlich)의 역어로, 심리학자 에른스트 옌치가 도입한 개념으로 '살아있는 듯한 존재가 정말로 살아 있는지, 혹은 그 반대로 생명 없는 대상이 실은 살아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운 상태'로 정의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언캐니는 '섬뜩함'을 의미한다.
디지털 이미지가 '섬뜩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사진을 예로 들어보자. 과거에는 지금처럼 컴퓨터를 통한 사진의 왜곡현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사진은 곧 역사적 사실을 의미했다. 하지만, 오늘날의 사진은 디지털 기술로 인해 역사적 사실을 사실이 아닌 사건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 또한, 존재하지 않는 사실을 존재하도록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 이미지 합성과 CG를 통해서 얼마든지 가능해졌다. 어릴적 읽던 그리스 신화 속에 등장하는 반인반수들을 기억하는가. 브라질의 작가 밀턴 몬테네그로는 그의 연작 <성운>에서 그리스 신화를 생생한 사진으로 되살려내기도 했다. 현실에서는 절대 존재할 수 없는 신화 속 인문들이지만 디지털 이미지 속에서 그들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게 살아 숨쉬고 있는 듯 하다. 피사체로 존재한 적이 없는 것을 피사체로 제시하는 것이 디지털 사진의 중요한 특징이다.
앞으로 다가올 가까운 미래에 디지털은 더이상 현실과 동떨어진 가상 세계가 아니다. 현실 그 이상의 초현실이 될지도 모르겠다. 존재하는 현 세계의 모의가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신 세계의 창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디지털 가상은 그 자체가 새로운 실재가 될 것이다. 현실과 디지털 가상을 구분지을 수 없는 미래에 이미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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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재는 흥미롭게 읽힐만한 요소가 많은데 언캐니라는 독자에게 전달하는 방식이 학자적 높이에서 어려운 인문학 용어로 쓰다보니 장벽에 괴리감이 생겨버렸다. 본인의 지적수준에 맞게 쓴건지 책에 나온 단어의 기본개념조차 이해하지 못한 채로 읽다보니 중간중간 막히는 부분이 많았다. 이미지 인문학을 읽는 사람이라면 공통적으로 느낀 어려움은 일관된 듯 싶다. 1권에서도 막히는 부분이 상당했는데 2권에서도 한계를 느끼며 이미지(그림)만 잘 보았다고 말할 수 있다. 저자가 무엇을 얘기하는지는 대강 알 것 같다. 언캐니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캐니라는 용어가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는데 사전적 의미는 섬뜩함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책에 실린 사진은 기묘하고 초현실주의적이며 섬뜩한 모습의 그림을 볼 수 있다. 다음에 혹시 개정판이 나온다면 용어만을 따로 정리해서 별책으로 정리하거나 아니면 지문을 달아주었다면 좋을 듯 싶다. 대중도서는 특정 부류의 사람만이 공유하는 지적 자원이 아니다.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문장으로 일반인들도 쉽게 읽히는 책이어야 좋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점은 아쉬운데 그래도 현재 진행되는 미디어의 개념을 논리적으로 정리해둔 것 자체만으로도 높이 평가할만하다. 전방위에 걸쳐 확산되는 새로운 개념과 시도들이 우리들의 미래를 정의내릴 수 있을 것이다. 얼마전 저자의 창의세미나에 청강한 적이 있는데 그 자리에서도 미래는 이미지가 지배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텍스트와 이미지(동영상, 음성)가 모두 포함된 게임이 시각문화를 주도할 것인데 오래전부터 게임을 즐겨운 입장에서는 매우 설득력있는 얘기다. 이미 우리는 롤플레잉과 시뮬레이션 개념이 현실에 반영되어 있으며, 이제 문화를 주도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솔직히 책에 나온 개념을 설명할 정도는 안된다. 내가 완벽하게 이해한 뒤에 쓰는 것과 긴가민간하면서 기억도 잘 나지 않은 상태에서 쓰는 것은 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의 감정에 의한 섬뜩한 이미지가 예술작품으로 표현했다는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할 이론적 배경을 갖추지 않아서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 않았다. 이제 미래는 이미지가 주도하는 사회가 될 것이다. 과거의 이미지가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만나 디지털 이미지가 되었는데 아마 이를 잘 표현한 선구자로 백남준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현실의 자아상을 여러 개의 텔레비전으로 구현하였고 예전에 없던 개념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디지털 이미지는 전통적인 범위를 넘어서서 타 분야로까지 접목시고 있는 점은 특이할만하다. 융복합이라는 개념인데 이는 앞으로도 계속 시도되리라 본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저자의 통찰력에 감탄하지만 내 지적수준의 한계를 느끼며 다시 머리를 싸매면서 볼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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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인문학 2 섬뜩한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언캐니의 세계 진중권 지음 천년의상상
요즈음 방송에서 뜨거운 감자처럼 간간히 그 모습을 드러내는 진중권의 저서이다. 서울대학교 미학과 출신인 작가의 지성을 대표하는 그가 현대 사회의 인문학을 디지털 이미지의 미학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내놓은 책이다. 섬뜩한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언캐니’라는 표제 아래 파타피지컬한 세계 속에서 인간이 갖게 되는 세계감정을 탐구한다. 분명 『이미지 인문학』 1권을 읽고 감상까지 작성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슨 내용이었는지조차 까마득하고 무지한 내게는 여전히 너무나 어려운 분야임에 틀림이 없고 또한 감을 잡을 수 조차 없다. 디지털 가상에는 어딘가 섬뜩한 특성이 있다. 실재도 아니고 가상도 아닌 이 유령 같은 존재가 발산하는 으스스한 느낌. 그것이 디지털 이미지 특유의 ‘푼크툼’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등장하는 용어 자체가 너무나 낯설고 희미할 뿐이다. 일단, 용어를 살펴보고 내용을 파악해 보자. 푼크툼(punctum)은 사진작품을 감상할 때 관객이 작가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작품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한다. 언캐니(uncany)란 섬뜩함을 뜻하는 말이라고 하는데, 18세기에 ‘숭고’의 감정이 그랬던 것처럼, 디지털의 세계감정을 특징짓는 미적 범주는 ‘언캐니’라 할 수 있다. 인 비보(in vivo)는 생체 내에서, 인 비트로(in vitro)체외에서, 인 실리코(in silico)는 가상 실험에서의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뜻하고, 인 마키나(in machino)는 생명을 창조하는 것이란다.
책을 읽는 내내 늘 당혹스러웠는데......
59쪽 '워홀이 보여준 것이 사진술과 인쇄술이라는 산업혁명의 이미지라면, 강형구가 제시하는 것은 컴퓨터그래픽이라는 정보혁명의 이미지다.'
289쪽 여기에서 말하는 '정서적 충격'이란 과연 무엇일까? 오히려 혼란만 더 가중시키고 있다. 2014.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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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인문학』 첫번째 이야기도 결코 만만히 읽을만한 내용이 아니였는데 역시나 두번째에서도 결코 만만하지 않은, 평범하다고 할 수 없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 내용이라는 또 전혀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이 책을 읽을 가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첫번째 이야기에 이어진 이야기는 익숙하지 않은 단어들이 나오는데, 디지털 이미지와 인문학의 결합이라는 내용도 솔직히 쉽지가 않은데, 푼크툼 [punctum]이라는 단어의 의미도 누구나 다 알고 있다고 할 수 없는 용어이며, 뒤이어 나오는 언캐니(uncanny, 섬뜩함)라는 단어도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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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는 이런 용어들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실제적인 예술작품들을 함께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하고 있는데 개중에는 단어에 걸맞게 계속 보고 있기가 힘든 이미지도 존재한다. 결국 인문학이든 디지털 이미지든 그 주체는 인간이고, 그런 인간의 감정에 의한 섬뜩한 이미지를 예술작품으로 표현했고, 이런 예술작품을 이용해서 디지털 이미지에서 인간에 대해서 알아 본다는 점이 결코 고개가 절로 끄덕여질만큼 단번에 완벽하게 이해된다고 자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미지들은 어느 한 분야에 국한된 것이 아니여서 역사와 철학, 미학에서도 발견할 수 있으며, 이런 이미지가 디지털 테크놀리지와 만남으로써 디지털 이미지라는 것을 창조해낸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인 진중권 교수는 디지털 이미지에는 회화나 사진과 같은 전통적으로 가장 먼저 생각해낼 수 있는 이미지뿐만 아니라 사물, 생물, DNA, 비트, 나노까지 포함된다고 말함으로써 디지털 이미지의 범위를 한정된 것으로 보고 있지 않는다는 점도 특이할만하다.
이외에도 이어서 나오는 개념들 역시 쉽지는 않겠지만, 디지털 이미지와 인문학을 통해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를 이렇게도 접근해 볼 수 있다는 취지로 부담갖지 않고 편안하게 읽어 보면 좋을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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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쉽게 읽히는 책이 아니다. 이해하기 위해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몇 번이고 읽어야 하는 책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이미『이미지 인문학 1』을 통해 이 책과의 거리감은 느끼고 있었다. 일반 대중을 위한 책은 아니고, 이 분야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을 위해 집필된 책이다. 분명 한국말을 사용하는데도 도무지 무슨 의미인지 아리송할 때가 있다. 이 책이 주는 그런 느낌을 알고 읽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이런 류의 책을 읽는 것도 역시 가끔은 필요하다. 복잡함 속에 단순함을 보게 되고.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낯설게 바라본다. 익숙한 우리 현실 세계에서 낯선 이론을 보는 듯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이 책 『이미지 인문학 2』에서는 '섬뜩한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언캐니의 세계'를 다루고 있다. 이미지 인문학 1권에서는 '현실과 은유가 중첩된 파타피직스의 세계'를 들여다보았다. 우리 삶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을 어려운 단어로 치환해놓은 듯한 느낌으로, 그냥 당연한 듯 아무 의미없이 바라보던 것을 대단한 의미를 덧입혀 바라보는 느낌으로, 그렇게 1권을 읽은 기억을 떠올린다. 파타피직스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음에도 단어만 낯설 뿐 이미 익숙하게 우리 주변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2권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2권에서는 '언캐니uncanny'라는 표제 아래 파타피지컬한 세계 속에서 인간이 갖게 되는 세계감정을 탐구한다. 디지털 가상에는 어딘가 섬뜩한uncanny 특성이 있다. 실재도 아니고 가상도 아닌 이 유령 같은 존재가 발산하는 으스스한 느낌이 디지털 이미지 특유의 '푼크툼'punctum 이다.(12쪽)
푼크툼의 강렬한 사진에 인상이 절로 찌푸려진다. 이런 섬뜩하고 으스스하며 혐오스럽기까지 한 언캐니의 세계, 그 첫 인상은 역시나 낯설다. 하지만 여기서도 낯섬 속에 익숙함이 있다. 언뜻보면 낯설게 느껴지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낯설지만은 않다.
아날로그 사진에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면, 디지털 사진에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거나 '이미 존재하는 것이 실재보다 더 강렬하게 존재'한다.이 존재의 부정합 역시 언캐니한 분위기를 발산할 수 있다. (45쪽)
꾹꾹 눌러서 읽고 생각하고 떠올려야 이해가 간다. 그런 문장들이 많아서 읽는 속도가 더디다. 그럴 수밖에 없는 책이다.
'포토리얼리즘에서 합성리얼리즘으로'에 보면 관객을 쏘아보는 사내가 있다. 이는 빈센트 반 고흐. 강형구의 <푸른 고흐>라는 작품이다.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는 예술가가 많은데, 그 중 다른 작품이 궁금해지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강형구다.
"사람들은 대개 알려진 인물의 모습을 사진으로 인식하는데, 나는 그렇게 알려진 얼굴을 그리지 않는다. 대신 그것을 파괴한다. 그리고 그렇게 파괴된 선들을 조립해 원형을 복원한다."(52쪽)
'사진 같은 그림' 혹은 '그림 같은 사진', 아니 '그림이면서 동시에 사진'이라는 모호한 설명과 함께 '강형구의 작품은 디지털 대중의 이 변화된 이미지 취향, 그들의 진화한 지각방식을 증언한다.'고 이야기한다.
언캐니의 정신분석학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밀랍인형으로 가득 찬 방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를 생각해보라. 즉 "살아 있는 듯한 것이 실은 죽었을지 모르며, 반대로 죽은 듯한 것이 실은 살아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이야말로 거의 모든 이에게 언캐니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94쪽)
언캐니적인 것을 과도하게 싫어하는 내가 읽기에 이 책은 공포 그 자체였다. 사진 하나 보거나, 글을 읽으면서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하다보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언캐니한 분위기 자체다.
올렉 도우의 <타이>, 웬디 맥머도의 <도플갱어> 연작 중 <헬렌, 백스테이지, 메를린 테아트르>를 비롯하여, 이 책을 통해 보게 되는 이미지들은 인상이 찌푸려지면서도 강렬하게 각인되는 작품이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평범한 일반인으로서 여전히 낯설다는 느낌이 들지만, 세월이 지나고 지금의 예술이 이렇게 정리될 수 있음에는 어렴풋이 동의하게 된다. 언캐니의 세계를 아름다움으로 본다는 것은 나에게 새로운 시각을 필요로 하는 것이기에 이 책에 빠져들어 집중해서 읽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 시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지금 나에게 술술 읽히지 않는 책이라고 의미 없는 책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 책을 통해 언캐니의 세계로 한 발짝 들어가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고, 좀더 세월이 흐르면 언캐니의 세계를 익숙하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생기리라 본다. 1권에서 이야기한 파타피직스의 세계에 이어 2권에서 언캐니의 세계를 살펴보며, 세상을 바라보는 또다른 시각을 잠깐 빌려 살펴보았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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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은 사실 어렵달까 용어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좀 어렵고 읽어나가기도 힘든면이 있었는데 2권은 1권을 읽고나서인지 아니면 좀더 대중적인 내용이라서 그런지 훨씬 잘 읽히는점이 좋았다 유전공학과 결합하는 예술작품이라니 조금 놀랍기도 하고 신선하기도 하고 뭔가 그로테스크하기도 하고 컬러사진으로 볼수있어서 더 기괴하기도 하고 눈을 뗄수없는것도 많았다 사진과 영화 cg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서 아바타라던가 여러 영화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을 cg로 표현하기 어렵다고 하는데 인간에게는 동물이나 다른것에 비해 더 엄격하게 보기때문이라고 한다 아무래도 영화를 봐도 인간의 얼굴이 더 어색하긴하다 완벽이 구사하는것은 아직은 기술적으로 힘든듯하다 로봇에 관해서도 너무 기계로 보이는것도 싫어하지만 안드로이드 즈 인간과 너무 똑같이 만들면 시체같다는 느낌에 섬뜩한 느낌을 갖는다고 한다 인간과 비슷하지만 조금은 다른 휴머노이드의경우가 좀더 인간이 친밀감을 느끼는듯하다 로봇의 느낌은 가지면서 인간과 가까운 사진으로 보니 눈을 감고 있는 인간과 거의 똑같은 로봇은 죽은사람같은 느낌이 많이 들긴해서 좀 이상하긴했다 그리스 신화에서 등장하는 반인반수를 사진으로 표현한 작가도 있었는데 디지털처럼 보이지만 아날로그 작업이라고 하는 그러나 굉장히 생생해서 정말 있는건가 싶은 생각도 들고 아무래도 그림과는 달리 사진은 뭔가 현실성있게 느껴져서 그런것같았다 이미지에 관한 다양한 시도와 다양한 기법 그리고 과연 이렇게까지 가능한거인가 하는 부분까지 파고든것같다 이게 뭐야 싶은 작품들도 들여다보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랄까 작가가 말하고자하는것이 무엇인지 생각학 되는것같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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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인문학 2 ] 섬뜩한 아름다움의 창조 진중권의 책은 메시지가 강하다. 이미지 인문학 1을 읽었을 때도 그런 느낌을 받았는데, 이미지 인문학 2에서는 더욱 막강해졌다. 표지는 산뜻한 복숭아빛이고 내용은 섬뜩하다. 2권에서는 언캐니에 대한 표제로 인간이 갖게 되는 세계감정을 탐구한다. 디지털 가상에는 어딘가 섬뜩한 특성이 있다. 실재로 아니고 가상도 아닌 유령 같은 존재가 발산하는 으스스한 느낌. 사실 나는 그 느낌이 너무 싫다. 싫어도 너무 싫다. 하지만, 기술적 미학이라는 이야기로 새로운 문화의 장르를 열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 책이 던지는 물음은 무엇일까? 진중권은 말한다. ‘디지털 혹은 포스트디지털 시대의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본성을 망각하고 살아간다. 기술을 사용할 때 존재망각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그럼 나는 어떤 존재이지?’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이 책의 초반부에 나오는 푼크툼의 이야기는 솔깃하다. 초반에 이 개념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아 책을 읽는데 많이 어려웠다. 푼크툼이란 <카메라 루시다>에서 바르트가 내린 정의에서 시작된다. 푼크툼은 절대적 특수자, 최고의 우발성으로 발생하는 사건이다. 즉, 사진사가 찍으려고 의도하지 않았던 디테일과 잠시 존재했다가 사라지는 시간으로 인해 발생한다. 푼크툼이란 ‘주사위 던지기’로 발생하는 절대적 우연이다. 실제로 디지털 사진을 보다보면 아날로그 사진 못지 않게 강렬한 촉각적 효과를 가져오는데 푼크툼의 개념이 적용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저자의 생각에 동의한다. 의도하지 않은 우연이 무언가를 만들어 낸다는 푼크툼의 개념이 신기하다. 복제와 합성. 이러한 작품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있을까? 강형구의 <링컨>, <마릴리몬노>, <최후의 만찬>등에는 합성사실주의를 담고 있다. 합성에 대한 대중의 새로운 취향을 대변하고 있다. 컴퓨터 그래픽이라는 정보혁명의 이미지를 드러내고 있고, 합성의 취향을 예언하고 있다. 또한 신기하게 봤던 부분은 컴퓨터 그래픽의 사실주의 부분이다. 영화 속 CG를 보다보면 실제인지, CG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때가 있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간극이 사라지는 시대가 된 것이다. MMCA에서 관람했던 작품 중 인상깊었던 루이 벡의 작품 <오페르투스 루눌라 움브라>가 이 책에 실려있었다. 인간이 그 작품 곁으로 지나가면 반응하는 모습이 신기해서 1시간을 멍하니 보고 온 적이 있었다. 루이벡은 프랑스의 인공생명 예술가이자 이론가이다. 그의 해저 생물은 가상의 동물에 불과하다. 그는 이 생물들을 드로잉. 디지털 모델링, 홀로그램, 인터랙티브 예술 등 다양한 형태로 제시한다. 또한 섭식기관, 소화기관, 순환기관, 온도조절기관 등을 갖고 있어서 주위 환경에 반응하기도 한다. 작품으로서의 인공생명이 가능해진 시대가 오다니, 정말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인 아닐까.
이제 우리는 진중권의 말대로 가상과 현실에 뒤섞인 세계를 살고 있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현실은 오늘날의 모습을 닮아있다. 그 가운데서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하는 것도 중요한 물음이다. 거대한 서사 흐름을 진중권식으로 풀어놓은 이미지 인문학1, 2는 오늘날 새로운 장르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이미지 인문학 1과 함께 작품옆에 QR코드를 좀 더 많이 넣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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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인문학2] 섬뜩한 아름다움에 몰두하는 포스트디지털리언
<이미지 인문학1>을 읽으며 2권이 몹시 궁금하였다. 1권의 본문을 읽고 예고된 2권의 목차를 보며 1권은 총론적 성격이 강하며 저자가 포착하는 ‘이미지 인문학’의 본질은 2권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1권을 통해 미학에 대한 기초 소양 유무와 관계없이 포스트디지털시대의 예술을 읽는 최소한의 눈과 힘을 기를 수 있다. 그를 바탕으로 도전한 2권에서 독자들은 본격적으로 현시대를 이끄는 포스트디지털 이미지와 맞닥뜨린다. ‘섬뜩한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언캐니의 세계’라는 부제처럼 <이미지 인문학2>의 키워드는 ‘푼크툼’과 ‘언캐니’이다.
디지털 카메라가 등장함으로써 사진의 존재론에 본질적 변화가 생겼다. 그 변화는 ‘지표성의 상실’로 요약된다. 롤랑 바르트는 <밝은 방>에서 사진의 본질을 지표성에서 찾았다. 사진의 지시대상은 “대물렌즈 앞에 놓이는 필연적으로 실재적인 사물”이며, “그것이 없이는 사진도 없으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디지털 카메라는 이 사진의 존재론을 위협한다. 장 보드리야르의 말대로 “사진은 사라짐의 순간을 보존하나 합성 이미지에서 실재는 이미 사라져”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위기에 처한 것은 바르트가 사진의 본질로 제시한 ‘푼크툼’의 개념이다. <카메라 루시다>에서 바르트가 내린 푼크툼의 정의를 다시 인용해보자. “이 자국, 이 상처들은 점이다. 스투디움을 방해하러 오는 이 두 번 째 요소를 나는 푼크툼이라 부르겠다. 왜냐하면 그것은 찌름, 작은 구멍, 작은 반점, 작은 흠, 주사위 던지기이기 때문이다. 사진의 푼크툼은 그 자체가 나를 찌르는 (또한 나를 상처 입히고 괴롭히는) 우연이다.” 푼크툼은 “절대적 특수자”. “최고의 우발성”으로서 발생하는 사건이다. - pp.37~38
정신분석학에서 ‘언캐니’는 “그동안 억압되어왔던 것이 통합된 정체성이나 미적 규범이나 사회질서 등을 파열시키면서 회귀”하는 것을 볼 때 생기는 심리적 분위기로 정의된다. (...) ‘언캐니’는 독일어 ‘운하임리히’의 역어로, 주지하다시피 심리학자 에른스트 옌치가 도입한 개념이다. 그는 언캐니의 감정을 “살아 있는 듯한 존재가 정말로 살아 있는지, 혹은 그 반대로 생명 없는 대상이 실은 살아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운 상태”로 정의했다. 옌치와 달리 프로이트는 (...) 유아기의 거세 환상은 성장과정에서 억압되고 망각되지만, 삶에서 경험하는 여러 사건을 계기로 끝없이 되돌아온다. 번번이 되돌아오는 이 환상은 원래 낯익은 것이지만 동시에 망각된 것이기에 의식에는 낯설게 느껴진다. 바로 여기서 ‘낯익은 낯섦’이라는 언캐니의 정의가 성립하게 된다. “언캐니는 억압에 의해 낯선 것이 되어버렸으나 원래는 낯익던 현상이 되살아나는 것과 관련된다. 억압되었던 것이 되살아나면서 주체는 불안해진다. 주체가 이해하기 힘든 모호한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언캐니는 이 불안한 모호함 때문에 생기는 직접적 결과다.” - pp.140~141
진중권은 포스트디지털 시대는 기본적으로 초현실주의의 맥락에서 설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초현실주의를 후기 프로이트 이론 관점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요컨대 디지털 카메라로 구현된 포스트디지털 시대의 이미지들은 사진의 본질인 지표성을 상실함으로서 존재의 해방성이 증폭되고 그로 인해 모호하고 우발적이며 특수한 ‘푼크툼’의 성질을 가진다. 그래서 존재하면서 존재하는 자신을 스스로 해치며 의미든 정체성이든 확장시킨다. 이는 기존의 기술을 계승하면서 전혀 다른 패러다임을 구축하면서, 낯익으면서 낯선 ‘언캐니’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들 이미지를 보는 현세대인들이 느끼는 공통적인 감정을 진중권은 ‘세계감정’이란 용어로 표현하는데, ‘푼크툼’과 ‘언캐니’의 속성 때문에 포스트디지털 이미지에 대한 일차적 ‘세계감정’은 거부감과 공포감이다. 그럼에도 이 섬뜩함에 아름다움을 찾으며 빠져드려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푼크툼’와 ‘언캐니’의 개념을 접하며 처음 떠올린 것은 연꽃사진 사건과 쿠사마 야요이였다. 전자는 우리나라에 디지털 카메라가 보급되기 시작하던 2003년, 디지털카메라 커뮤니티였던 디시인사이드에서 유행한 연밥사진 합성이었다. 쿠사마 야요이는 강박과 환영이란 주제로 망과 점에 집착한, 원으로 가득한 미술 작품만 발표하는 아티스트이다. 흔한 식물에 지나지 않은 연밥의 알알이 박혀 있는 속성이 다른 이미지와 합성되며 혐오와 희열을 불러일으키며 엽기문화를 열었다. 정신병원에 사는 천재 예술가란 별명을 가진 쿠사마 야요이는 유년시절 트라우마로 인한 지독한 강박증을 앓고 있는 작가인데 자기치유와 강박표출이 얽혀 독특한 미적 세계를 구축하였다. 전자는 해프닝으로 끝났고 후자는 예술이 되었지만 평범한 것을 낯설게 하고 혐오와 쾌감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는 공통점이 있다.
과학에서는 언캐니한 감정의 원인으로 다양한 설명이 제시되었다. 인간인 줄 알았던 대상에서 기대하는 행동이 나오지 않을 경우(기대 위반), 그 대상을 생명의 범주에 집어넣을지 말지 혼란스러운 경우(정체성의 역설), 그 대상이 건강한 생체와 달리 어딘지 유전적으로 병약해 보이는 경우(진화 미학), 그 대상이 감염 위험이 있는 병약한 것으로 보일 경우(혐오 이론), 그 대상이 죽음에 대한 본능적 공포를 불러일으켜 내면의 방어기제를 작동시키는 경우(공포 관리) 등. 그런가 하면 조커의 웃는 입과 실제 표정의 괴리나 더빙된 영화의 입 모양과 음성처럼, 인간행동을 구성하는 다차원의 신호들이 미묘한 부조화를 이룰 때 언캐니 효과가 발생한다는 설명도 있다. - p.97
현대인이 점점 갈수록 무엇이든 좀 더 자극적인 것을 찾는 것도 ‘푼크툼’과 ‘언캐니’로 설명할 수 있다. 진중권이 2권에서 소개하는 ‘푼크툼’과 ‘언캐니’의 대표적인 작가들로는 강형구, 키스 코팅엄, 매튜 바니, 오론 캐츠 그룹, 패트리샤 파치니니 등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미학을 구축하기 위해 진중권이 2권에서 소개하는 작가들의 이미지는 그림을 사진으로 다시 CGI로 만들거나, 수많은 사진을 합성한 후 다시 컴퓨터그래픽화하거나, 인간과 동물의 합성을 주력으로 하거나 배양육을 미술의 영역으로 가져오는 등 다채로운 방식으로 관람자로 하여금 이질감을 느끼게 한다. 이 섬뜩한 충격감을 구현하기 위해 상당히 수고스러운 일이 필요함에도 마다 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작업 방식 자체가 창조적 유희로서 기능한다.
(로봇 영역에서 논의되는) 일본과 달리 미국에서는 ‘언캐니 밸리’에 관한 논의가 주로 CGI를 둘러싸고 이루어진다. 그것은 로봇과 애니메이션에서 미국과 일본의 취향이 엇갈리기 때문이다. ‘동반자 로봇’에 집착하는 일본에서는 로봇에 되도록 인간에 가까운 외양을 부여하려 하나, ‘기능성 로봇’에 주력하는 미국의 로봇 산업은 인간과 똑같은 외관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애니메이션에서는 사정이 뒤집힌다. 일본의 ‘아니메’가 초당 7~8프레임의 움직이는 만화로 남으려 한다면, 미국의 애니메이션은 아날로그 시절부터 실사에 가까운 초당 24프레임의 사실주의를 지향해왔다. 이렇게 만화를 실사에 가깝게 만들다 보니 로봇이 아닌 CG의 영역에서 ‘언캐니 밸리’의 문제를 떠안게 되는 것이다. - p.109
일본의 로봇 공학자 모리 마사히로는 인간이 인간을 닮을수록 호감과 친밀감을 느끼지만 일정 수준 이상 닮으면 섬뜩함을 느끼며 긍정적인 감정이 급격히 떨어지는 현상을 발견하고 이를 ‘언캐니 밸리’라는 함수로 명명한다. <이미지 인문학2>의 후반부는 로봇과 CG 등 인간, 실제와 닮은 무언가들의 속성에 깃든 ‘언캐니’함에 초점을 맞춘다. 이는 인공성과 동물성, 생명으로서의 예술에 대한 고민으로 확장한다. <이미지 인문학2>의 초반부는 1권도 그러했듯 디지털 이미지의 본질부터 정의하기 위해 사진 미학이 리얼리즘에서 포토리얼리즘으로 다시 합성리얼리즘으로 초점이 옮겨감을 포착한다. 그리고 후반부로 자연스럽게 화제를 연결해 합성리얼리즘의 재능과 공포적 속성이 건드리는 철학과 과학을 바라본다.
요컨대 진중권의 ‘이미지 인문학’은 갑자기 튀어나온 생소한 개념이라기보다, 인문학적 관점으로 예술을 분석하는 미학의 속성을 십분 발휘하여 미술을 보다 풍부하게 감상하고 최신 미술의 경향을 정의하는 한 기제라고 볼 수 있다.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없다는 창조강박,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하는 시대에 합성에의 탐닉은 자연스럽다. 그런데 이것이 혐오·공포·위화감 등을 기저에 깐 유희라는 점에서 재미있다. 진중권의 분석에서 결국 우리의 ‘언캐니’한 감정은 존재상실의 위기의식에서 출발하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합성이 거듭되면 원본은 쉽게 망각된다. 혹은 그 본질을 흩트리고 해체한다. 그 대상은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는 어쩌면 인간이 대체될 수 있고 존재감을 상실하는 ‘사라짐’의 공포와 싸우기 위해, 그래서 살아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이 기기묘묘한 이미지들을 모순적으로 탐닉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