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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에 바치는 위로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에 바치는 위로" 내용보기
신경숙 작가의 신작을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봄날들, 그 봄이 꽃으로 들어찬 손바닥들을 내보이려는 순간에 "전화벨"은 울렸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작가는 새벽 세시부터 오전 아홉시까지 이 소설을 썼다고 했다. 고요한 여섯 시간 동안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손끝에서는, 어떤 뜨거운 것들이 번져나왔던 걸까. 뜨거운 사랑으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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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 작가의 신작을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봄날들,

그 봄이 꽃으로 들어찬 손바닥들을 내보이려는 순간에 "전화벨"은 울렸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작가는 새벽 세시부터 오전 아홉시까지 이 소설을 썼다고 했다. 고요한 여섯 시간 동안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손끝에서는, 어떤 뜨거운 것들이 번져나왔던 걸까. 뜨거운 사랑으로 말미암은 뜨거운 청춘과 부르짖음과 상처…… 그것들을 써 나가다 참지 못해 울먹이고야 마는 작가의 모습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이 작품에는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몰랐던 '그때'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p.236

윤. 제대할 때까지 바깥세상의 누구에게도 편지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는 걸 보면 그런 다짐은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것 같다. 백지에 대고 정윤이라고 썼다가 윤이라고 썼다가 다시 정윤과 윤 사이를 열 번은 오고갔다. 지금 막 다시 윤이라고 쓰고 마침표를 찍고 오래 네 이름을 보고 앉아 있었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남김없이 마친 후에 나는 낙엽처럼 아스러져 울었다. 그러니까, 누군가의 비밀 일기장을 훔쳐보고 난 뒤에 느끼는 공감과 연민같이 묵직하게 밀려오는 감정 때문이었을 테다. 오래된 공책 귀퉁이에 윤, 미루, 단, 명서, 윤교수를 차례로 끼적이기도 했다. 책 속에서 밥 먹고 잠자는 마음으로 읽어낸 쓰린 문장들을 도로 게우기 위해 애썼지만 마음대로 할 수 없었고 몸 어딘가에 지독하게 펼쳐진 잿빛 파노라마 때문에 흐트러질 것만 같았다. 격렬하고 첨예한 시대의 흙더미 속으로 걸어들어간 청춘들. 누가, 거기에서, 그 계절 속에서, 사랑하지 않고 싶었겠는가.

 

p.291

살아 있는 것들이 끝없이 변하는 한 우리의 희망도 사그라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살아 있으라. 마지막 한 모금의 숨이 남이 있는 그 순간까지 이 세계 속에서 사랑하고 투쟁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며 살아 있으라.

 

하얗고 물렀던 초등학교 시절이었을까. 가장 친한 친구들이 하나 둘씩 전학을 갔다. 친구가 교탁 앞에서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떠난 날이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그렇게나 서러웠다. 꿀컥꿀컥, 뭔지도 잘 모르는 감정을 삼키면서 내 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활짝 웃는 얼굴인 엄마가 "눈이 빨개졌네? 속상한 일 있었구나?" 하면 그제야 왈칵 눈물이 쏟아지곤 했었다. 

신경숙 작가의 작품은 그때 나를 꼭 안아주던 엄마, 내 집 현관 같다. 늘 그렇다. 마음으로 씌어진 글이 또 다른 사람의 마음에 다가가 착 붙는다는 건, 말하지 않았는데도 안다는 건, 그래서 아픔과 죄책감으로 점철된 그 사람 가슴에 이불을 덮어준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에도 늘 그렇다.   

 

상처를 보듬기 위해 상처를 쓰는 작가, 신경숙. 그녀의 신작『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를 아파하는 이에게 건네고 싶다. 운동장 지름을 따라 걷는 청춘들, 캠퍼스 가득한 녹음 속에서 사랑을 말하는 청춘들, 자신이 지나쳐온 뜨거웠던 시절을 '그래도 좋았다' 라고 추억하는 모든 이들에게 권하고 싶다. 어두웠던 시대와 그 시대를 견뎌내려 애썼던 이들의 사랑과 그 사랑이 열렬하게 남기고 간 청춘의 흔적. 그 모든 것을 어디 하나 덧나지 않게 엮은 섬세함을 나누고 싶은 마음, 그뿐이다. 

 

 

 

 

 

 

c********7 2010.05.26. 신고 공감 26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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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병 같은 시절을 같이 걷는 사람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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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이라는 말에는 푸른 물이 들어있다. 돌아보면 그랬다. 새로운 곳에 소속되고, 처음 자유를 만나고, 어색한 자리들을 전전하고, 하얗게 밤을 새우고, 자꾸 도시로 들어가려고 하고, 운전을 배우고, 시간이 섬광처럼 지나가고, 낯선 곳을 두리번거리고, 자꾸 취해서 쓰러지고, 난데없이 소중한 사람들을 잃고... 그런 시간들을 다 지나고 돌아보면, 모든 것은 마땅한 자리로 가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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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이라는 말에는 푸른 물이 들어있다.

돌아보면 그랬다.

새로운 곳에 소속되고, 처음 자유를 만나고, 어색한 자리들을 전전하고, 하얗게 밤을 새우고, 자꾸 도시로 들어가려고 하고, 운전을 배우고, 시간이 섬광처럼 지나가고, 낯선 곳을 두리번거리고, 자꾸 취해서 쓰러지고, 난데없이 소중한 사람들을 잃고...

그런 시간들을 다 지나고 돌아보면, 모든 것은 마땅한 자리로 가 있었다.

 

신경숙은 물 같은 담백한 문장으로 이번엔 청춘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은 나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가장 아픈 시절이기도 했다.

왜 청춘은, 왜 아름다움은 기쁨이지만은 않을까. 왜 슬픔이고 절망이기도 할까.

 

<엄마를 부탁해>를 읽으며 내 눈물을 바깥으로 쏟아내야만 했었다면, 이번엔 가슴의 고요한 중심에 그 눈물을 내려놓게 된다.

'나의 엄마'에 대한 소회와 '나 자신'에 대한 소회가 이렇듯 다른 것이다.

너무 놀라면 눈물조차 나오지 않고 가만히 얼굴을 쓸어내리게 되는 것처럼.

 

소설은 열병 같은 시절을 보내고 있는, 또는 한 때 그러하였던 모든 이에게 보내는 한 통의 긴 편지 같다.

삶은 기쁨도 절망도 아니라고.

삶은 그 모든 것들을 가슴에 안고 같이 길을 걷는 사람들의 옆얼굴을 보아주는 일이라고.

그리하여 이제 '나의 엄마'에게 그랬듯이, '나의 사람들'에게 다가가 깊이 안아보라고.

b*********o 2010.05.26. 신고 공감 18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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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칠듯한 청춘의 성장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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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쁨 만큼이나 상실의 아픔을 통과하며 세상을 향해 한발씩 나아가고 있는 청춘들, 병으로 엄마를 떠나보낸 상실감과 고독감에 쌓여 세상과 소통을 하지 못한채 겉돌고 있는 정윤. 자신의 방의 창문에 검을 도화지를 붙일만큼 외부에대한 자신의 마음에도 벽을 쌓아간다.   입학과 휴학.. 그리고. 복학한 정윤의 첫 수업에서의 윤교수의 크리스토프에 관한 이야기가 가슴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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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쁨 만큼이나 상실의 아픔을 통과하며 세상을 향해 한발씩 나아가고 있는 청춘들, 병으로 엄마를 떠나보낸 상실감과 고독감에 쌓여 세상과 소통을 하지 못한채 겉돌고 있는 정윤. 자신의 방의 창문에 검을 도화지를 붙일만큼 외부에대한 자신의 마음에도 벽을 쌓아간다.

 

입학과 휴학.. 그리고.

복학한 정윤의 첫 수업에서의 윤교수의 크리스토프에 관한 이야기가 가슴속에 새겨진다.

 

 

그는 강물에 빠져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어린 예수를 무사히 강 건너 편으로 옮겨주었다."여러분은 각기 크리스토프들이네. 서로가 서로에게 크리스토프가 되어주는 것이네. 함께 아이를 강 저편으로 실어 나르게" -p 63

 

 

은근히 시선을 모으는 남학생과 그의 옆에 얼굴을 숙이고있는 여학생, 윤교수의 교재타이핑을 자처한 정윤은 교수 사무실에서 그 두학생과 조우하게 된다. 예쁜외모에 쭈글쭈글하고 이상한 손을 가진 여학생, 그에대해 묘한 동질감과 호감을 가지게 된다. 그 후 우연히 시위가 일어난 거리에서 남학생을 만나게되고 이 세명의 인연이 시작되게 되는데...

 

 

어떤 경우에도용기를 잃지 말라.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힘든 일은절대 생기지 않는다.

                                                                                                                          - 톨스토이 

 

 

애인의 죽음을 뒤따른 언니의 분신자살, 그때문에 미루의 손에 남겨진 화상상처들이 그것이었다. 속내를 공유하는 그들에게 잠시나마 밝은 빛이 스쳐간다. '오늘을 잊지말자'라고 말할 수 있는 사이였고, 더 이상 과거의 아픔으로 고개를 숙이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매 순간이 추억이 되어 가슴에 흔적을 남겼고, 서로에게 크리스토프가 되어 세상과의 벽을 허무는데 성공하는듯 보였다.

 

 

하지만....

 

 

위태로운 마음을 의지하던 대들보 윤교수가 시대적 상황을 이기지 못하고 사임하며, 윤을 짝사랑 하던 고향친구 단이 쓸쓸히 군에서 세상을 떠나고, 미루역시 가족과의 불화로 자취를 감춰버린다. 자아를 확립해야 하고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시기에 그들은 너무나도 큰 시련을 연속적으로 맞이하게 되는 현실에 또다시 좌절과 고통의 시간을 가져야 했다. "사랑이야기가 아니라 죽음 이야기가 되버렸다"는 작가의 말 따나 20대의 그들이 이겨내기엔 너무나도 큰 시련이 그들을 구석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과연 내가 그들이었다면..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고 이겨낼수 있다는 자신감은 미루의 행적처럼 묘연해지기만 했다.

 

지독하리만큼 어린나이의 이들에게 '죽음'이라는 위기와 슬픔이 자주 찾아온다. 어느누가 주변사람이 다 죽어나가는데 잘 이겨낼 수 있겠는지 작가에게 반문하고 싶었다. 새벽3시에 일어나 아침 9시까지 글을 썼다는 작가는 죽음의 이야기가 되어버린 소설을 바꾸기위해 기쁜일만 생각하려 애썼다고 한다. 어둠부터 아침이 밝아오는 시간까지 글을 썼기때문일까? 다행히도 죽음으로 뒤엉킨 이 소설은 기쁨이 깃든 새벽녘의 햇살처럼 기대와 희망을 말하며 끝맺음 된다. 끝까지 우울하고 비극적이었다면 신경숙작가의 집에 전화벨좀 울려 드렸으리라..

 

 

크리스토프 와 전화벨

 

서로에게 힘이되어주고 손을 잡아주어야할 시기, 윤이 화상으로 일그러져버린 미루의 손을 잡아주었던것 처럼 작은 관심어린 행동과 마음이 상대방의 마음을 깨어나게 한다. 책속에서 계속해서 울려대는 전화벨, 그것은 정윤이 미루에게 내민 손처럼 따뜻한 관심과 배려를 그리고 상처의 치유를 원하는 사람들의 구조요청이자 나를 향해오는 손길이었다. 윤교수의 크리스토프처럼 우린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 받으며 힘든 시기를 이겨내는 법을 배우며, 앞으로 한걸음 더 나아갈 지혜를 알아가야한다.

  

 

 

 "살아 있으라, 마지막 한 모금의 숨이 남아 있는 그 순간까지 이 세계 속에서 사랑하고 투쟁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며 살아 있으라."  - p291

 

 

 

슬픔을 이기지 못해 남은 사람들에게 더 큰 상처를 남기고 간 단이나 미루와는 달리, 나는 윤처럼 그 모든 고뇌를 이겨내고 살아 있겠노라 다짐한다. 죽을만큼 힘들땐 나의 마음을 담은 전화를 하면 될테니..(헵시바님 전화번호는 저장중..-_-) 그리고 나를 찾는 전화벨에도 마음을 다해 대할거라고.. 힘들땐 날 찾아.

 

 

내.가.그.쪽.으.로.갈.게

 

 

 

 

 



n******s 2010.06.05. 신고 공감 13 댓글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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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상실의 터널을 지난 청춘들의 성장기
"어두운 상실의 터널을 지난 청춘들의 성장기" 내용보기
불행히도 지상의 인간은 가볍게 이 세상의 중력으로부터 해방되어 비상하듯 살 수는 없습니다. 인생의 매순간 우리에게 힘든 결단과 희생을 요구합니다. 산다는 것은 무無의 허공을 지나는 것이 아니라 무게와 부피와 질감을 지닌 실존하는 것들의 관계망을 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살아 있는 것들이 끝없이 변하는 한 우리의 희망도 사그라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마지막 여
"어두운 상실의 터널을 지난 청춘들의 성장기" 내용보기
불행히도 지상의 인간은 가볍게 이 세상의 중력으로부터 해방되어 비상하듯 살 수는 없습니다. 인생의 매순간 우리에게 힘든 결단과 희생을 요구합니다. 산다는 것은 무無의 허공을 지나는 것이 아니라 무게와 부피와 질감을 지닌 실존하는 것들의 관계망을 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살아 있는 것들이 끝없이 변하는 한 우리의 희망도 사그라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마지막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살아 있으라. 마지막 한 모금의 숨이 남아 있는 그 순간까지 이 세계 속에서 사랑하고 투쟁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며 살아 있으라. –p291

 

어두운 상실의 터널을 지난 청춘들의 성장기

 

신경숙 작가의 신작,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를 인터넷 서점에서 구입할 즈음 “그냥 걸었어”라는 노래로 1990년대 인기를 끌었던 가수의 부고를 접했다. 비도 오고 울적해서 그냥 걸었는데, 걷다 보니 그녀의 집 앞이라는 노래. 노래 속에 전화 벨이 흐르던 노래. 한 시인은 이 노래 속 여인의 “어떡해?”라는 문장만큼 상대를 걱정해 주는 문장이 있겠냐고.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고,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떡해?’ 하도록 하자는 강연을 하기도 했다.

 

신경숙 작가의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엔 제목처럼 전화벨 이야기가 숱하게 나온다. 그러고 보니, <풍금이 있던 자리>에서 주인공 여자가 사랑하던 남자(유부남)를 마음에서 접은 것도 남자의 아내가 아이에게, “아빠에게 전화 받으시라고 해라”라는 대목에서였고, <깊은 슬픔>에서도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나한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묻자, “전화한다고 했으면 전화해”라고 대답했던 것 같다. 그 사람이 어디에 있든 통화가 되는 핸드폰이 아니라, 누군가는 기다릴 수밖에 없는 그 옛날 전화기. 이 책을 읽으며 그 때 그 어린 시절들이 자꾸 떠올랐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는 성장 연애 소설을 지향한다. 저자 스스로도 <데미안>같은 외국 소설도, 요즘 젊은이들이 읽는 일본소설도 아닌, 한국어로 쓰여진 청춘 소설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시작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책에는 5월이면 거리는 시위 진압을 위한 최루가스로로 거리가 자욱해지고, 어떤 학생들은 소리소문 없이 실종되던 시절,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두 명의 남자, 두 명의 여자들이 등장한다. 인간의 많고 많은 감성 중, 슬픔을 가장 잘 표현하는 작가답게 중간쯤 읽다 보면, 이미 슬픈 결말이 예견된다.

 

젊은 시절 숱한 약속들은 사라지고, 잊혀지고, 지켜지지 못한다. 청춘이란 이렇게 혹독하다. 그러나, 젊은 시절 그들의 분노와 슬픔, 치기 어린 투쟁들은 그들을 훌쩍 성장시킨다. 산다는 것은 ‘무無의 허공을 지나는 것이 아니라 무게와 부피와 질감을 지닌 실존하는 것들의 관계망을 지나는 것’이므로.

 

책의 후반부에 두 명의 청춘은 사라지고, 두 명의 청춘은 남는다. 그리고 미력한 ‘희망’을 보이면서 끝을 낸다. 결론에 대해 극단적인 것 아닌가라는 생각도 해보지만, 신경숙 작가의 작품 중 이 정도의 ‘희망’을 보인 작품이 또 있었나…생각해보니, 처음인 것도 같다.

 

책을 마치고 나면, 꼭 흰 쌀밥을 지어 ‘깻잎’을 얹어 먹고 싶어진다.

그리고 ‘오늘을 기억할’ 무엇인가를 하며, ‘언젠가’ 하고 싶은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진다.


살아 있으라. 마지막 한 모금의 숨이 남아 있는 그 순간까지 이 세계 속에서 사랑하고 투쟁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며 살아 있으라.

c*******e 2010.06.02. 신고 공감 13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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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젊음의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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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을 규정짓는다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다. 청춘은 이미 훌쩍 자라버린 어색해진 제 껍데기를 끌어안은 채 붙박여 멈춰 서 버린 낯선 느낌이며, 갈피를 잃은 정신을 가다듬는 혼란의 숨 가쁜 상태로 그려지곤 한다. 누구나 청춘의 뜨거움에 질식하고 때론 그 청춘이 죽을 만큼 힘겹게 덮쳐 오는 불편한 정경에 목말라 한다. 그런데도 지나고 보면 그때 그 시절만큼 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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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춘을 규정짓는다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다. 청춘은 이미 훌쩍 자라버린 어색해진 제 껍데기를 끌어안은 채 붙박여 멈춰 서 버린 낯선 느낌이며, 갈피를 잃은 정신을 가다듬는 혼란의 숨 가쁜 상태로 그려지곤 한다. 누구나 청춘의 뜨거움에 질식하고 때론 그 청춘이 죽을 만큼 힘겹게 덮쳐 오는 불편한 정경에 목말라 한다. 그런데도 지나고 보면 그때 그 시절만큼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때도 없다. 이처럼 청춘의 열병은 젊음을 시샘하는 삶의 통과의례처럼 빗나간 육신과 마음을 다듬고 깎아 제자리에 맞추는 조탁의 과정인지 모른다. 그러므로 청춘은 홧홧한 열정의 에너지를 쉼 없이 발산하고 방황도 때로는 동경의 대상이 되곤 한다. 그래서 일까? 세상을 향한 청춘의 몸짓은 서툴고 어색하기는 하지만 끊임없이 삶에서 결락된 무언가를 찾는 여정이 지상과제인양 삶의 이상理想이 되기도 하는 것을 빈번하게 목격한다.


        그렇기에 청춘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불꽃처럼 화려하기도 눈꽃처럼 시리기도 하다. 세상은 무언가 정체모를 이물감이 어딘가에 탁 걸려 그 답답함으로 인해 온몸으로 번지는 막연한 불안처럼 냉소적이고 허무하다. 어쩌면 청춘이 이방인의 고독에 어울리는 멜랑콜리의 입맞춤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청춘은 푸르른 몸짓만큼 회복도 생기도 충만하다. 태어나 처음으로 겪는 이별, 사랑, 연민, 상처는 새살이 돋고 아물기를 반복하다 보면 그 젊음에 후회가 될지언정 습관처럼 회고하고 읊조리는 시절이 찾아든다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과 타협이 될 수도 포옹이 될 수도 있겠으나 누구나 거쳐 야 할, 건너야 할 통과제의가 아니겠는가.


        신경숙 작가의 이 책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는 내게 그렇게 읽힌다. 존재의 상실을 통한 아픔과 부재에 대한 허망한 교태가 합작한 청춘의 출발선에 선 가녀린 영혼들의 절규와 같이 살처럼 콕콕 날아 와 박힌다. 오염된 세상의 파편에 쓰러지고 울부짖는 청춘의 뜨거운 몸부림은 위태롭다. 세대의 접경지대에 선 청춘은 오르페우스적 욕망에 사로잡히고 교차된 혼돈의 무게에 힘겨워한다. 성장의 순간은 아픔을 딛고 일어선다고는 하지만 산화되지 못한 슬픔은 미래의 시간마저 과거의 자리에 포위당하고 말 것처럼 고통스럽다. 그러므로 설계된 대로 흐르지 못하는 삶의 불가해성으로부터 이어지는 정체성의 혼란은 현기증이 난다. 그것이 누구나 짊어진 원죄에 대한 프로메테우스의 형벌처럼 처참하고 가혹하다면 청춘은 또한 아련해진다.


        신경숙 작가는 사랑을 통해 청춘을 위무했다. 긴장이 도처에 떠돌고 아픔이 곳곳에 지뢰밭처럼 묻혀 있던 그 독재의 시절, 청춘을 노래했다. 작가의 눈을 통해 재단된 청춘은 문장의 행간을 이어주고 공감을 유도한다. 이미 전작 <엄마를 부탁해>로 눈물샘을 말려 버린 그녀의 필력이기에 달리 썰을 풀어낸다는 것은 중언부언처럼 민망하다. 그래서 온전히 나는 그녀의 시선을 쫓아 생각이 머무는 곳에 안주하기로 했다. 그녀가 설정한 젊은 영혼들의 외침에 동참하고 세파의 부침에 맞서고 싶은 충동이 읽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이다.”(2000. 민음사. 헤르만 헤세, 데미안 中에서) 아픔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껍질을 벗어야 한다. 청춘은, 누구에게나 겪고 방황하고 또 상처받는 시기가 있다. 청춘의 기록은 그래서 치열하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신경숙 작가의 글은 페이소스처럼 정열적이다. "살아 있으라, 마지막 한 모금의 숨이 남아 있는 그 순간까지 이 세계 속에서 사랑하고 투쟁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며 살아 있으라."(p.291)


        소설은 화두를 던진다. 청춘에 대해. 신경숙 작가가 이 책을 통해 던진 화두는 크리스토프의 명제에 오롯이 담겼다. 소설 속 인물인 윤, 단, 명서, 미루를 가로지르며 관통해 나가며 깃든 삶의 무게는 크리스토프를 통해 인식된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짊어진 어깨 위 아이의 무게를 홀로 감내하는 우리의 모습이자 고독의 항체처럼 질긴 운명인지 모른다. 오늘을 잊지 말자는 자조 섞인 희망에서 슬픔을 극복해 낸 순간의 떨리는 윤의 바람처럼 나는 그들과 연대감으로 묶였다. 이따금 삶은 날 선 세상에 아프고 뜨겁다. 고통은 삶을 무두질하며 신열이 열꽃처럼 번져 오르기도 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흡수되고 소실된다. 역설적이게도 고통은 삶의 좌절과 절망을 구분 짓는 힘이 되기도 한다. 힘은 아름다움으로 승화되고 희망이 된다. 타성에 젖지 않은 순수의 청춘이 사무치게 아름다운 것은 이 때문이리라. 그러므로 크리스토프의 메타포는 세상에 맞서는 자세이며 자아를 찾는 과정의 일환이다. 


        소설 속 윤은 어머니를 잃었다. 아픔이 오래도록 침전되어 빛을 상실했다. 존재의 상실에 대한 아픔은 윤에게 트라우마다. 도시에 나와 옥탑 방에 기거하면서부터 걷기 시작한 행위는 어머니를 잃은 상실의 그림자를 뒤쫓는 과정을 통해 번민하고 슬퍼함으로써 결국에는 그것을 끌어안는 행위로 새겨진다. 걷는다는 것은 목적지를 염두에 두고 가늠하게 된다. 누군가를 만나든 어딘가로 이어지든 길은 걷기를 동행하는 벗이다. 윤에게 걷기는 씻김과 떠나보내기의 과정쯤으로 보아진다. 그러므로 명서가 윤에게 이어지는 과정은 자연스럽다. 인간은 감정이 침잠하고 가라앉을 때 방심한다. 방심은 긴장을 놓고 의지하려는 마음이 앞서며 아픔을 나누고픈 마음이 간절해진다. 그렇게 윤에게는 명서와 아픔을 연대하고 서로의 틈입 사이로 밀어 넣는 관계로 발전한다. 반면 미루는 언니를 잃었다. 미루에게 언니는 세상이었고 존재 그 자체였다. 그 옛날 외할머니 댁을 찾았다 닥쳐든 뜻밖의 사고로 인해 무릎을 다친 언니의 추락을 지켜보는 것은 미루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 일로 인해 빛을 잃어 버린 별처럼 침몰하기만 하던 언니는 어느 남자를 만나고 서야 안정과 행복을 되찾게 된다. 그런데 행복은 길지 않았다. 남자의 실종, 사회적 타살 소식에 언니는 분신자살로 맞서고 미루의 손에 지울 수 없는 상실의 기억을 아로 새기게 된다.


        윤에게 단은 아이에서 어른으로 이어주는 길목에서 만난 풋풋한 관계다. 윤이 어머니를 잃은 아픔으로 방황할 때 단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단은 먼발치에서 윤을 지지하고 윤의 앞에 나서 길을 가는 방해물을 제거하고 등불이 되어주는 역할을 자청했다. 하지만 윤과 단은 친구 이상 전진할 수 없었다. 단이 불합리한 제도에 맞서 방황할 때 윤은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단은 내성적이었지만 굳건했고 순수했다. 그러나 단의 순수는 오염된 현실에 내 버려진 가녀린 존재에 불과했으며 이방인으로 내모는 구실이 되었다. 단의 내몰림은 그렇게 총기자살을 가장한 도피로 이어지며 청춘의 흔적을 지워 버렸다. 이렇게 단과 윤의 관계는 비이성적인 영역에 머문다. 기다리는 사랑은 피를 말리고 허파를 타들어가게 하는 아픔이다. 나는 단과 윤이 맺어지기를 은연중에 바랬다. 하지만 그것이 작가가 던진 화두를 푸는 키워드는 아님을 또한 일찌감치 알아챘다. 이 또한 삶의 단면임을 말이다.


        다시 돌아가서 명서와 윤의 관계가 낙관적이지 못했음은 그 시대의 비릿한 울분과 상황이 만든 아픔임을 비로써 인식하게 된다. 또한 윤에게 미루는 거울과 같은 존재였다. 미루가 언니의 부재를 극복하기 위해 실종된 언니의 남자를 찾아 헤매는 것도, 윤이 걷는 것도 닮았다. 그들의 이동은 회피의 수단이라기보다 맞서서 찾는 본성의 감정에 충실한 흔적이다. 작가의 의도적인 설정인지는 모르겠으나 아픔을 연대하고 극복하는 과정에서 사랑의 오묘한 진실을 찾는 여정은 어딘지 모르게 누구나 한 번쯤 겪었을 그 마음과 닿아있다. 그래서 윤과 명서는 서로에게 다가가기를 바랐으며 명서가 미루를 잃은 절박한 심정을 위로하고 제 것인 양 끌어안고 싶었는지 모른다. 내가 그쪽으로 갈게. 건너간다는 의미는 피안과 차안의 경계를 연상케 한다. 따라서 그쪽으로 간다는 말은 고독 속에 뒹구는 영혼을 끌어안겠다는 포용의 시도처럼 들린다. 더불어 희망 섞인 바람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서 크리스토프를 언급한 윤 교수의 존재는 젊음을 인도하는 길잡이처럼 그려진다. 나의 크리스토프들, 함께해주어 고마웠네. 슬퍼하지 말게. 모든 것엔 끝이 찾아오지. 젊음도 고통도 열정도 공허도 전쟁도 폭력도. 꽃이 피면 지지 않나. 나도 발생했으니 소멸하는 것이네. 하늘을 올려다보게. 거기엔 별이 있어. 별은 우리가 바라볼 때도 잊고 있을 때도 죽은 뒤에도 그 자리에서 빛나고 있을 걸세. 한 사람 한 사람 이 세상의 단 하나의 별빛들이 되게."(p-354)  원망도 미움도 열정도 시간 앞에서는 허무하고 부질없다. 윤 교수를 통해 작가는 내면의 변화를 관찰하고 보다 깊이 있게 삶을 이해하기를 바랐다. 마치 한 순간 암전 후 찾아드는 광명처럼 윤 교수의 말은 새록새록 마음으로 새겨진다. 이러한 가르침은 참된 자아를 찾는 탈출구가 되며 충실한 삶을 이어주는 매개체가 된다. 삶은 어디서든 계속된다는 말처럼 별빛처럼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경숙 작가의 이 소설은 성장소설을 표방한 세태소설이다. 어두운 시절을 통과한 젊음 이들의 사랑을 간결하게 빗어 낸 문장들은 읽는 이의 마음을 공명하게 한다. 윤과 단, 명서와 미루를 통해 세상이 할퀴고 간 트라우마의 흔적과 극복의 과정을 공감하게 되고 하나의 지향점을 만들며 성장해 간다는 이치를 배우게 된다. 끊임없이 울리는 전화벨처럼 희망이 울려 퍼지고 기쁨과 환희가 커져가기를 작가의 프리즘을 통해 드려다 보았다. 슬픔보다는 기쁨에 저울추가 기울어지기를 바랐다는 신경숙 작가의 바람은 이 책을 통해 충실한 성공작이 되지 않을까 한다. 누구나 쓰리고 아픈 기억의 지울 수 없는 흔적을 안고 살기 마련이므로 세상과 용서하는 계기가 되지 않겠는가? 소망해 본다. 작가의 여명의 바람처럼 모두 뜨겁게 달궈 굳어진 손 위의 돌을 내려놓고 낙관의 희열을 만끽하게 되기를 말이다. 용서는 자신과 하는 약속이며 삶을 바로 세우는 균형추에 다름 아니므로.



a******e 2010.08.27. 신고 공감 10 댓글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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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울리지를 않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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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 내가 아주 잘 알고 있는 작가라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신경숙의 작품을 읽은 것이 없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엄마를 부탁해]와 [리진]을 읽었을 뿐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친숙한 느낌이 드는 걸까? 그리고 그녀의 작품을 보면 무언가 꼭 집어 얘기할 수는 없지만,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 있다. [엄마를 부탁해]에서도 그랬고, 이 작품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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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숙, 내가 아주 잘 알고 있는 작가라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신경숙의 작품을 읽은 것이 없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엄마를 부탁해] [리진]을 읽었을 뿐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친숙한 느낌이 드는 걸까? 그리고 그녀의 작품을 보면 무언가 꼭 집어 얘기할 수는 없지만,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 있다. [엄마를 부탁해]에서도 그랬고, 이 작품에서도 어김없이 책을 읽는 동안 계속 마음을 불편하다. 아마 이야기가 나의 젊은 시절과 겹쳐지기 때문은 아닌지, 그 시대를 살아온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에 그런 것은 아닌지, 자꾸만 소설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동일시 하려는 마음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팔년만에 걸려온 전화, 수화기 저편에서 여보세요? 하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어디야? 하고 물었다. 소설은 처음 이렇게 시작하지만, 이것이 마음을 심난하게 만든다. 언제였던가? 이십몇년만에 걸려온 전화, 전화기에 뜬 번호는 모르는 번호임을 나타내듯 그냥 숫자만 나열되어 있었지만, 여보세요? 소리를 듣는 순간, 난 그녀임을 알아챘다. 내입에서 무의식적으로 튀어나간 소리 역시 어디야? 이었다. 잘 있었냐는, 어떻게 지냈냐는,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냐는 일상적인 물음이 아니라 어디야? 하고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묻고는, 그 물음이 침묵으로 빠져들게 만들 수 밖에 없는 물음이었음을 뒤늦게 알아채고 있었다.

 

사랑이야기인줄 알았는데 그것이 죽음이야기라는 것이 또 내 가슴을 헤집어 놓고 있다. 윤미래의 그 남자가 그렇고, 윤미래가 그렇고, 또 윤미루가 그렇고 단이가 그렇다. 몇 걸음 걷다가 돌아보니 단이는 그 자리에 붙박인 듯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몇 걸음 걷다가 다시 돌아보면 여전히 그러고 있었다. 나는 어서 들어가라고 손을 흔들었으나 단이는 거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얼만큼 걷다가 다시 돌아다보니 단이가 고개를 툭 떨구었다. 어렸던 시절, 그녀는 앞만 보고 걸어가고 있었다. 단 한번이라도 뒤돌아볼지 몰라 그녀가 눈에서 사라지는 순간까지, 희미하게 하나의 점이 되는 그 순간까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녀는 단 한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다만, 한번.. 딱 한번 움찔했을 뿐 이었다.

 

엄마가 자신을 이 도시로 보내고, 그리고 자신에게서 떠나가고, 단이가 그녀를 부르며 스러지는 가운데 고통을 하나, 둘 가슴속에 담아놓고 추스리기도 힘이 드는데, 또 미루 마저, 그리고 명서가 흔들리면, 어떻게 그것들을 다 감당할수 있을까. 고단한 삶 속에서 정윤은 그렇게 성장했고, 그렇게 이 도시에서 살아남았으며, 그리고 그렇게 고통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이십몇년만에 걸려온 그 전화를 받고, 내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정윤이 명서의 갈색노트 마지막장에 적어 넣었던 그 말, 내가 그 쪽으로 갈께! 이었다. 소설은 성장소설이기도 하고, 청춘소설이자 연애소설이기도 하고, 그리고 아픈 시대를 살아왔던 우리 젊은날의 기록이기도 하다. 신경숙이라는 작가의 손끝에서 피어나는 아픔이, 외로움이, 자꾸 뒤돌아보게 한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다시 울릴 것만 같다.



k*****1 2010.09.21. 신고 공감 9 댓글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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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하지마. 너를 잊지 않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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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의 연휴 기간동안 단 한 권의 책만을 읽었다. 정확하게 말해서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를 덮고 난 후, 그 어떤 책도 손에 잡히질 않았다.   단, 윤, 명서, 미루야...   윤교수가 눈 감기전에 손가락을 펜대삼아 제자들에게 남긴 말을, 오늘 나는 대신하고자 한다.       "나의 크리스토프들, 함께해주어 고마웠네. 슬퍼하지 말게. 모든 것엔 끝이 찾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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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의 연휴 기간동안 단 한 권의 책만을 읽었다.

정확하게 말해서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를 덮고 난 후, 그 어떤 책도 손에 잡히질 않았다.

 

단, 윤, 명서, 미루야...

 

윤교수가 눈 감기전에 손가락을 펜대삼아 제자들에게 남긴 말을, 오늘 나는 대신하고자 한다.

 

 

 

"나의 크리스토프들, 함께해주어 고마웠네. 슬퍼하지 말게. 모든 것엔 끝이 찾아오지. 젊음도 고통도 열정도 공허도 전쟁도 폭력도. 꽃이 피면 지지 않나. 나도 발생했으니 소멸하는 것이네. 하늘을 올려다보게. 거기엔 별이 있어. 별은 우리가 바라볼 때도 잊고 있을 때도 죽은 뒤에도 그 자리에서 빛나고 있을걸세. 한 사람 한 사람 이 세상의 단 하나의 별빛들이 되게."

 

p354 신경숙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부슬비가 내리는 오후, 노란 <어.나.벨>을 들고 홍대길을 거닐었다.

 

"이 소설에서 어쩌든 슬픔을 딛고 사랑 가까이 가보려 하는 사람의 마음이 읽히기를, 비관보다는 낙관 쪽에 한쪽 손가락이 가 닿게 되기를, 그리하여 이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언젠가'라는 말에 실려 있는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꿈이 읽는 당신의 마음속에 새벽빛으로 번지기를......"

 

p378 '작가의 말' 중에서

 

 

 

 

공교롭게도 이 몇 자를 끄적이는 오늘은 '그 분'의 1주기이기도 하다.

단순히 슬퍼하지만은 않겠다.

위로만 요하지도 않겠다.

한 사람 한 사람 이 세상의 작고 희미한 빛을 보겠다.

빛이 되겠다.

 

 

 

*'힘든' 오늘을 지내고 있는 사람에게 이 책을 꼭 선물하겠다

m*******9 2010.05.23. 신고 공감 8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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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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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봄의 기억.. 거리로 나오다 지금부터 20년여년 전이다. 대학입학과 동시에 벌어진 이른바 '등록금 투쟁'을 시작으로 당시의 대학생활과 학생운동은 대부분의 학생에게 있어 평균 50%정도의 교집합을 형성하는 유사어였다. 그 비율이 50%를 넘어 동의어에 가까와질 수록 그들은 '운동권'으로 분류되었고, 비율이 50%이하는 경우엔 학생 본연의 직무에 충실한 학구파나 개똥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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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봄의 기억.. 거리로 나오다


지금부터 20년여년 전이다. 대학입학과 동시에 벌어진 이른바 '등록금 투쟁'을 시작으로 당시의 대학생활과 학생운동은 대부분의 학생에게 있어 평균 50%정도의 교집합을 형성하는 유사어였다. 그 비율이 50%를 넘어 동의어에 가까와질 수록 그들은 '운동권'으로 분류되었고, 비율이 50%이하는 경우엔 학생 본연의 직무에 충실한 학구파나 개똥철학이나 읊어대며 여유가 넘치는 학사일정 덕에 여자꼬시기에 한 집중하는 백수이거나 둘 중 하나로 분류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나는 늘 50% 언저리를 배회했다. 어느 것에도 확신을 할 수 없었던 혼돈의 시절이었다. 시대의 비극을 나몰라라 하는 이들을 보면서는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생각을 지울 수 없었음에도, 또한 그 비극의 주인공을 자처하는 이들의 얼굴에서는 묘한 '광기'를 읽었다. 그리고 나는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모습에서 느껴지는 혐오감만큼이나 그 광기가 두려웠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박쥐를 연상하면 당시의 내 꼴에 대한 가급적 정확한 객관화가 가능할런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난 이후에도 그 박쥐같은.. 이라는 말을 참으로 싫어했다.

그날은 어쩌다 50%를 훌쩍 넘어버린 아웃라이어 같은 날이었다. 신입생 시절에도 개인적으로 호감을 갖고있던 선배들의 손에 이끌려 교내 집회에는 수차례 수업을 제껴가며 참석해왔지만, 가두 투쟁이라는 건 여전히 개인적으로 다소 생소한 경험이었던 시절이었다. 정오 즈음의 신촌로타리에 평소보다 엄청난 수의 학생들이 모였다. 그리고 누군가의 선창으로 시작된 도로 점거.. 교통경찰들은 차들을 돌려보내기 바빴고, 곧 화이버를 쓴 전투경찰들과 촌스런 스노우진 자켓과 바지를 갖춰입은 백골단들이 들어닥쳤다. 가늠할 수 없을 만큼의 수는 학생이나 전경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제 선배가 된데다 그간 몇 차례 시위의 유경험자라는  이유로 신입생 후배들의 안전을 확보해야한다는 사명을 띠고 SOC(Soldier of College)조로 편입되어 쇠파이프를 들고 그들과 대치했더랬다. 2-3 미터 간격으로 서너 줄 신촌 로타리 도로를 점령하고 스카프로 얼굴을 가린 채 시위대의 맨 앞 전면에서 전경들과 대치한 SOC조의 맨 선두라인은 베테랑 선배들로 포진되었고, 나는 끝에서 두번째 라인의 가장자리 즈음에 배치되었다. 두려움에 떨리는 손을 주체할 수 없어 쇠파이프를 땅에 짚고 두 손으로 꼭 붙들었다. 사방을 살피는 눈동자는 쉼 없이 움직였다.

빠빠방- 지랄탄과 사과탄이 동시에 터지고 곧 함성소리를 내며 전경들이 달려들었다. 나는 그들이 첫줄의 선배들과 싸움이 붙는 틈에 쇠파이프를 버리고는 뒤도 안돌아보고 도망치기 시작했고, 달리는 도중에도 발 밑으로 매캐한 연기를 뿜으며 지랄탄들이 어리럽게 날아다녔다. 달리며 얼핏 돌아본 뒤로 함께 그날 함께 SOC를 했던 같은 학과 친구의 모습이 도망치는 사람들 틈 속에서 얼핏 보였다. 골목길까지 한 걸음에 달려간 나는 여전히 뒤를 쫓고있는 전경들을 피해 문이 열려있는 건물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내가 들어가고 난 후 얼른 문을 닫아버리는 누군가의 모습에 약간은 안도를 하며 주변을 살피니 그곳은 여관이었다. 주인인지 종업원인지 모를 아주머니는 나를 2층으로 올라가 아무 방에나 들어가 있으라 일러주셨다. 2층으로 뛰어올라가 반쯤 열려있는 방 안으로 들어가니 거기엔 이미 한 여학생이 놀란 토끼눈을 하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곧이어 아래층에서 어수선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얼른 문가로 가 문을 닫고는 안에서 잠궈버렸다. 둘 다 전투경찰을 피해 어쩔 수 없이 도망친 처지였지만, 공교롭게도 장소가 여관인지라 서로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불안함과 민망함이 뒤섞인 묘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그녀가 먼저 그 침묵을 깼다. 그녀는 이웃학교에 다니는 나보다 한 학년 선배였다. 통성명을 한 후 자신이 선배라는 사실을 확인한 그녀는 어쩔 줄 몰라 당황해하는 나를 보고는 상황을 자신이 챙겨야 겠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곧 문 밖에서 웅성임과 함께 노크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나에게 조용히하라고 입에 손가락을 갖다 댄 뒤 '네-' 라고 노크소리에 응대했다. 이어서 들리는 주인아주머니와 어떤 남자들의 웅성임이 들렸고.. 그 웅성임은 점차 멀어져갔다.

그녀는 나에게 일단 화장실로 가서 머리를 감으라고 했다. 머리에서 최루탄 냄새가 많이 나면 그들이 의심할 거라며. 나는 들어가 찬 물과 비누로 대충 머리를 감고 나왔고, 곧바로 그녀 역시 화장실로 들어가 머리를 감았다. 그러는 사이 바깥의 소란함도 잦아들었다. 학생들의 구호 소리와 전경들의 함성소리, 그리고 어지럽게 울려대던 뜀박질소리도 모두 사라져있었고, 간간히 차들이 질러대는 경적소리와 자동차 엔진음만이 들려오고 있었다. 잠시 후 똑똑- 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곧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학생들.. 인제 문 열어. 경찰들 다 갔어..'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문을 열었고, 아주머니는 우리의 젖은 머리를 보며 잠깐 의아해하는 표정을 보이다가는 곧 미소를 머금으며 '좀 더 있고 싶은 인제는 돈 내야돼..^^' 라고 농담을 덛붙이셨다.

밖으로 나오니 골목 양쪽에 전경들이 바닥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나와 그녀는 그 사이를 걸어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갑자기 내 팔짱을 꼈고, 나는 순간 흠칫- 놀랐지만, 곧 상황을 이해하고 그녀의 팔을 자연스레 받아들였다. 전경들은 채 마르지 않은 머리칼로 대낮에 여관에서 나오는 우리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빤히 쳐다보기도 하고, 휘파람을 휘- 하고 불어대기도 하며 자기들끼리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녀와 나는 그런 주변을 의식하지 않은 척 앞만 보고 걸어갔고 그 장소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비교적 안전하다고 판단될 즈음 서둘러 팔을 풀러 일미터 쯤 떨어졌다. 서로의 학교로 향하는 갈림길에서 우리는 가벼운 목례만 한 채 헤어졌다.

학교로 돌아와 상황을 보니 많은 학생들이 학교로 돌아오지 못했다 했다. 핸드폰이나 삐삐가 없던 시절이니, 연락할 방법이 없는 우리는 해질녘까지 행방이 묘연한 많은 이들을 뒤로 한채 각자 흩어졌다. 그리고 다음 날, 함께 SOC조에 있던 친구가 경찰에 '달렸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그 친구의 뒷주머니에서 나온 스카프가 증거가 되어 경찰이 찍은 사진과 대조작업이 이루어졌고, 집시법 위반으로 입건되었다는 사실이 전해졌다. 결국 그 친구는 구치소까지 가게 되었고 한동안을 그곳에서 보낸 뒤 징역 6개월인지 1년에 집행유예 1년내지 2년을 받고 풀려났다.


회색.. 그 한 없는 공허의 늪 속에 빠져들다

그 친구가 잡혀간 날 이후 난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나중에 친구들이 구치소로 면회를 가자고 했을 때도 난 핑계를 대며 그들과는 다른 날, 다른 시간을 정해 따로 친구를 만났다. 함께 면회를 한 친구들 앞에서 그 친구가 나에게 무슨 말을 할지가 불안했고, 같은 장소에서 우연(?)이라는 이유로 그 친구와 운명이 엇갈려버린 내 처지가 미안했다. 구치소에서 친구를 만났을 때도 난 사식으로 전기구이 통닭을 넣었으니 맛있게 먹으라는 말과, 잘 될거야.. 라는 말 말고는 아무말도 해 줄 수 없었다. 심지어는 미안하다는 말 조차도 하지 못했다. 그 말이 결국 나 자신이 가진 민망함의 이유를 내가 아니다- 라고 부정하고 싶은 방향으로 객관화해 확정시켜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순간 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잘못을 인정하는 셈이 되니까.

그 친구는 결국 학교로 복귀한 이후 곧 군대로 다시 끌려갔고, 전방 GP에 배치되었다가 문제가 생겨 의가사제대를 하게 되었다 했다. 그러나, 그 친구 말고는 누구도 그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정확하게 몰랐다. 그는 이후 그 문제에 대해 어떤 힌트도 주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몇 년전 소식을 알게된 이 친구는 당시 방배동에서 노무사사무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방배동에 우연찮게 들릴 기회가 있어 신경 써 주위를 살피다가 그 친구의 성씨로 시작하는 노무법인 간판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들려볼까.. 한 참을 망설이다 다음 기회로 미루었지만, 결국 다음 기회는 늘 그렇듯 다시 오지 않았더랬다. 얼마전 방배동에 다시 들렀을 땐, 그 간판은 사라지고 없었다. 지금은 그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젼혀 모른다.

내가 50%를 넘지 않기위해 몸부림치면서 낮선 장소에서 방위조차 모른채 어두운 밤을 헤메듯 모호한 대학생활을 하기 시작한 시점이 이 때부터이지 싶다. 이후 난 '배신자'라는 주위의 모진 눈총을 피해 늘 먼 곳에 시선을 두고 다녔고, 나를 여전히 운동권으로 인지하는 학구파와 백수들의 불편한 시선들 속에서 길잃은 강아지처럼 위축되어갔다. 어쩌면 내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잘 마주보지 못하고 자꾸 눈길을 피하는 습관이 생겨버린것도 이때부터였지 싶다.

지난 이십년간 거의 잊고지내던 이 기억을 난 신경숙님의 작품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를 읽으며 불현듯 떠올렸다. 그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잊고 지냈다는 사실도 그렇지만, 하필 별로 시대적인 유사성과 주인공의 나이또래와 당시의 내 나이가 비슷하다는 점을 제외하면, 별반 공통점을 찾기 힘든 작품이 기억을 떠올리는 매개물로 작용했다는 점이 더 신기하다. 어쩌면 나는 그것이 무엇이되었건 나의 이 씁쓸한 기억을 다시금 떠올려줄 무언가를 무의식적으로 간절히 원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제대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당시 일련의 내 행동방식에 대한 불편함 때문에 무의식 저편에 꼭꼭 숨겨두었던 이 사실을 도대체 난 왜 이제와 비자발적으로 살짝 들쳐지기를 원했을까..

그 시절 떠올리고 싶지 않은 나의 불편한 기억을 묻어버리면 내 젊은 날의 이야기는 온전한 형태를 갖추지 못한다. 그리고 그 온전함에 미달하는 부분만큼 내 젊은날은 부인(否認)되는 것이다. 스므살 즈음의 젊은 날이 씨앗이 뿌려지는 시간들이라면, 이제는 그 씨앗이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는 만큼, 내 삶의 풍요로움이 영향을 받을 시간이다. 당시 나의 젊음의 일부를 부인해버리면, 그만큼 현재의 내 정체성의 지지대 역시 약해지고 흔들릴 수 밖에 없다. 내 무의식은 현재의 위태로운 정체성에 대한 보호본능으로 내게 그 사실을 일깨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 작품에서 수시로 등장하는 언.젠.가.는. 이라는 말의 의미가 내게 무겁게 다가오는 것도 그런 이유이지 싶다. 그 흔하고 가벼운 단어에 이 작품이 얹어낸 무게에 더해 내겐 나만의 또다른 무게가 더해졌고 그 중의적 무게가 애써 삼킨채 잊고 지내던 내 불편하다라는 말 말고 달리 표현이 어려운 기억을 다시 토해내게 만들었다. 이제 오랜 숙성의 시간을 거친 덕에 약간은 삭아버린 기 기억을 잘 으깨어 내 현재의 정체성의 불안한 지지대를 보수하는 일이 남았다. 그것이 앞으로 연쇄적인 구토의 방아쇠로서의 역할을 할 지라도.. 언.젠.가.는. 이라는 말로 울렁이는 속을 달래기를 더는 계속해서는 안될 것 같다.


문학은 해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 정윤, 명서, 미루, 은 그 시절의 젊은 날을 대표하는 상징이다. 각기 운명, 사명, 아픔, 순수를 상징하는 네 젊은이는 그 네가지 단어가 우리의 젊은 날 속에서 필연적으로 어우러진 것처럼 그렇게 운명적으로 엮인 삶을 살아간다. 절망과 희망이 방황의 시소질을 하는 젊음의 시간이 소진되어가면서 결국 아픔과 순수는 투명하게 스러져가고 운명과 사명의 두 축만이 그들을 젊음의 시간에서 건져내 차가운 바람에 옷을 말리게 한다. 이 작품은 거기에 어떠한 이유도 달지 않는다. 문학은 해답이 아니고 질문이기 때문이며, 그래서 작품은 누구도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진다. '이걸로 괜찮은 건가요..?' 라고.

어쩌면 그 해답은 우리들 마음 속에 이미 있는지도 모른다. 괜찮다거나 그렇지 않다거나 등의 단답형은 아니더라도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삶과 그 시절 우리의 마음속에서 자라나고 있던 꿈의 연결고리만 명확하게 짚어갈 수 있다면, 그 고리의 형태를 묘사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 질문에 대한 충분한 답을 할 수 있을게다. 서른 살 이전에 세상을 떠난 이들의 작품을 모았다는 윤교수의 사무실 책꽂이 한켠에 돌려져 꽂힌 미루의 노트 안에도 그 해답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노트를 열어보아서는 안된다.  그것이 서른 이전에 세상을 떠난 자들에 대한 예의이며, 또 결국 해답은 스스로 찾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은 질문일 뿐 해답이 아니기에..

저자 신경숙님은 이 작품이 주인공들과 비슷한 연배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청춘의 과정을 거치는 하나의 관문처럼 읽혀지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그런 작품의 필요성을 느껴 이 작품을 썼다고 했다. 그래서였을까.. 시대적 아픔이나 당시 대학생활의 암울함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그려 소재화하고 주관을 최대한 배제하려는 절제된 감정선이 엿보이며, 될 수 있으면 네 사람의 '마음'에 포커스가 맞추어졌다는 느낌이다. 그러나, 당시와는 사뭇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요즘 세대의 아픔과 소설 속 네 사람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아픔이 얼마나 높은 싱크로의 공명을 보여줄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긍정적인 느낌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 시절의 아픔을 무의식에 묻어두고 당시의 마음과는 많이 달라진 마음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그 시절 청춘들에게 더 '울림'이 크지 않을까.. 싶다.
 
이 작품이 출간될 즈음, 어딘지 묘한 '끌림'을 주는 제목과 몇몇 Early Adopter 리뷰어의 리뷰에 이끌려 읽을 작정으로 책을 주문해놓고는 누군가의 생일 선물로 슬쩍- 넘겨준 다음 이후 서너명 정도의 생일 선물로 역시 이 책을 구매했더랬다. 보통은 책을 선물할 때, 일방적으로 책을 정하기보다는 혹- 읽은 책이나, 취향이 어긋난 책을 선물할까 싶어 미리 몇 권의 책을 소개하고 그 중에 한 두권을 고르라 하는데, 당시의 많은 이들이 역시 작품 제목에 끌려서인지 이 책을 선택했다. 그렇게 너댓권을 선물하고나니, 나중에는 정작 읽자고 주문하기가 어딘지 꺼려졌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한동안 잊고 지내다 몇일 전 우연히 회사 도서실에서 이 책이 나란히 세권 꽃혀 있는 것을 발견해 그 중 가운데 것을 빼내어 빌렸다.

그렇게 책을 읽고 있는데, 후배가 지나가다 '어..? 선배 이 책 읽네요. 도서관에서 빌리셨구나. 저 이 책 있는데, 저랑 잘 안맞아서 읽다 팽개쳐두었어요. 원하시면 드릴까요..?' 하는 거다. 그래서 냉큼 좋다고 했다. 읽는 것과는 별개로 왠지 내 책장 안켠에 늘 꽂혀있어 앞으로도 내 젊은날 기억의 매개체 역할을 꾸준히 해 주었음 하는 마음이 들어서다. 늘 책을 읽고 난 후엔 타인에게 주거나 도서관에 기증을 해 책장엔 안 읽은 책만 수두룩한 내겐 약간 별일이다.

 



p***i 2011.05.11. 신고 공감 7 댓글 7
리뷰 총점 종이책
전화벨이 울리고 나는 살아 있음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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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들, 크리스토프라는 사람 이야기를 들어 보았나? 크리스토프는 중세 서양의 전설에 나오는 성인 이름일세. 전래에 의하면 크리스토프는 가나안 사람이라네. 거인으로 힘이 장사였던 그는 무서운 게 없었어. 자신은 오직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위대한 사람에게만 봉사하겠다고 결심했지. 하지만 아무리 여기저기 떠돌아도 자신을 바칠 만한 위대한 인물을 찾을 수가 없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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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들, 크리스토프라는 사람 이야기를 들어 보았나? 크리스토프는 중세 서양의 전설에 나오는 성인 이름일세. 전래에 의하면 크리스토프는 가나안 사람이라네. 거인으로 힘이 장사였던 그는 무서운 게 없었어. 자신은 오직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위대한 사람에게만 봉사하겠다고 결심했지. 하지만 아무리 여기저기 떠돌아도 자신을 바칠 만한 위대한 인물을 찾을 수가 없었지. 실의에 빠진 크리스토프는 어느 강가에 집을 짓고 강 저편으로 건너가려는 여행자들을 건네주는 일을 하며 지냈다네.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센 크리스토프는 겨우 삿대 하나만 지닌 채로, 강물이 아무리 불어나도 그 삿대로 강물을 헤쳐 나가며 사람들을 강 저편으로 건네주었다네. 배도 없이 맨몸으로 사람들을 태워 건네주는 뱃사공 역할을 한 셈이지.

어느 날 밤이었어. 크리스토프가 깊은 잠에 빠져 있다가 자신을 부르는 희미한 목소리를 들었다네. 세 번째 부르는 소리에 크리스토프는 기이하게 여기며 삿대를 들고 집 밖으로 나가 강으로 갔지. 어둠 속의 강가에 한 아이가 있었어. 아이는 오늘 밤 안에 강 저편으로 건너가야 한다면서 간청을 했지. 크리스토프는 깊은 밤이긴 하지만 이깟 쯤이야! 여기며 아이를 어깨에 태우고 강물 속으로 들어갔다네. 그런데 크리스토프가 강물 속으로 들어가자 강물이 마구 불어나 순식간에 키를 넘을 지경으로 강물이 범람했지. 뿐인가. 처음엔 가벼웠던 아이도 강물이 불어남에 따라 점점 무거워지기 시작했어. 아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거대한 철근 같은 무게가 크리스토프의 어깨에 내려앉았지. 자신만만하던 크리스토프는 처음으로 자신이 강물에 빠져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어. 삿대로 겨우 균형을 유지하며 아이를 어깨에 태운 채 불어난 강물을 헤치고 간신히 강 저편에 이르렀지. 크리스토프가 말했지. “너 때문에 내가 죽는 줄 알았다. 너는 이리 작은데 너무 무거워서 마치 이 세상 전체를 내 어깨에 지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껏 너보다 더 무거운 사람을 실어 나른 적이 없구나.” 그 순간 아이는 사라지고 눈부신 빛에 둘러싸인 예수가 눈앞에 나타났지. 그러고는 말했다네. “크리스토프! 그대가 방금 짊어진 건 어린아이가 아니라 바로 나, 그리스도다. 그러니 그대는 저 강물을 건널 때 사실은 이 세상 전체를 짊어지고 있었던 것이다”라고.

 

page 59~61 윤교수의 강의

 

 

우리는 크리스토프일까, 아니면 그 등에 업힌 아이일까?

 

조금 길지만 이 책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를 얘기하며 이 일화를 빼놓을 순 없을 것 같았다. 이 책 전체를 동맥처럼 흐르며 생명을 불어 넣어 주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너무 가슴이 아팠다. 주인공 정윤, 명서, 미루, 단. 네 사람의 엇갈린 사랑과 이별이, 그 과정이 살을 에듯 내게 전해져 왔다. 이 책을 뭐라 표현할까? 연애 소설?, 사회소설?, 성장소설? 한 마디로 정의 내리기가 힘들다.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지만 그보다 더 많이 지면에 오르내리는 것은 “죽음”, “절망”,“헤어짐” 이다.

네 사람은 각자가 가진 아픔과 상처를 서로를 통해 치유 받고 치유한다.

먼저 이 책의 화자 중 한 사람인 주인공 정윤은 엄마의 죽음을 목도한 후 혼자만의 세계로 침잠해 들어가,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아가는 우울한 청춘이다. 그의 대학 동기 명서와 명서의 친구 미루는 아픈 과거를 공유하며 과거로부터 해방되지 못하고 삶을 유리하고 있다. 정윤의 어릴 적 친구 단은 정윤을 사랑하는 마음을 자신도 알지 못하여 스스로를 벌 주고, 상처 입고, 결국엔…….

 

네 청춘은 함께 있을 때 더 큰 힘이 되었고, 서로에게 없어선 안 될 그림자 같은 사이로 발전하지만, 한편으론 명서의 말대로 서로 알지 못했더라면 서로에게 닥칠 불행을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엄마를 먼저 하늘로 보내고 윤은 사촌 언니집에 기거하며 스스로 몇 가지 다짐을 한다.

 

          책을 다시 읽을 것.

          책을 읽을 때마다 발견한 새로운 단어와

          그 뜻을 노트에 적어 개인사전을 만들 것.

          일주일에 시 한 편씩을 외울 것.

          추석 때까지는 엄마 묘소에 가지 말 것.

          이 도시를 하루에 두 시간 이상씩 걸을 것.

 

 

윤의 이러한 다짐들은 오래 전 한 사람을 보낸 나의 다짐과도 겹치는 부분이 있었다.

책을 읽을 것. 도시를 걸을 것. 시를 외울 것……

수많은 분초를 지나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윤의 다짐을 보며 잠시 그 때 그 사람 생각도 해 보았다. 책을 읽을 때 경험하는 신비로움은 책 속 어느 단어, 어느 문장이 내 삶을 말해 줄 때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 인생이 다 거기서 거기인 모양이다.

 

일련의 슬픔을 겪은 후 윤과 명서는 윤 교수를 찾아가고, 윤 교수는 절망에 빠진 두 청춘을 이끌고 눈 덮인 산으로 들어간다. 눈 덮인 소나무 숲에서 두 사람은 윤 교수와 함께 긴 장대로 눈을 털어내며 하는 말은 윤 교수가 삶에 지친 곧 두 사람에게 하고픈 금언이었다.

 

  눈을 털어주게. 여기서 겨울을 지내보니 이 상태에서 내일 또 눈이 내리면 이 나뭇가지들이 견디지 못하고 뚝뚝 부러질 거야. 그런 일이 생기기 전에 자네들과 내가 눈을 털어주세.

 

멈추지 않고 계속 눈을 털어내는 윤을 명서가 말리려 하자 윤 교수는 만류하며 스스로 멈출 때까지 그냥 두라고 한다.

 

청춘은 아프다. 그 아픔을 견디는 만큼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해지고, 더 애착을 갖게 될 것이다. 신경숙 작가는 이 책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를 통해 말한다.

 

마지막 숨이 남아 있는 그 순간까지 이 세계 속에서 사랑하고 투쟁하고 분노하고 살아 있으라. 고

 

나의 삶이 어디까지 이를지

그 누가 말해줄 수 있을까.

나는 아직도 폭풍 속을 거닐고 있는가.

물결이 되어 연못 속에 살고 있는가.

아니면, 아직도 나는 이른 봄 추위에

얼어붙은 창백한 자작나무일 뿐인가?

 

-릴케, 『나의 삶』



k*****m 2012.07.21. 신고 공감 7 댓글 4
리뷰 총점 종이책
마음속으로 스며드는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마음속으로 스며드는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내용보기
신경숙 작가의 책을 읽으면 마음속에 조금씩 조금씩 무게가 커지는 기분이 든다. 항상 소설속의 인물들도 그렇고, 내용도 그렇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책을 잠시 덮어두고 표지를 보는데 "신경숙의 글은 눈처럼 처음에는 가볍게 독자의 마음속에 쌓이다가, 책을 덮는 순간 그 가벼운 눈들이 독자의 마음에 눈사태처럼 퍼진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나 역시 이 책을 딱 덮는순간 마
"마음속으로 스며드는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내용보기

  신경숙 작가의 책을 읽으면 마음속에 조금씩 조금씩 무게가 커지는 기분이 든다. 항상 소설속의 인물들도 그렇고, 내용도 그렇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책을 잠시 덮어두고 표지를 보는데 "신경숙의 글은 눈처럼 처음에는 가볍게 독자의 마음속에 쌓이다가, 책을 덮는 순간 그 가벼운 눈들이 독자의 마음에 눈사태처럼 퍼진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나 역시 이 책을 딱 덮는순간 마음속에 일렁이는 감동은 눈사태와 같았다.

 

  ○ 내가 보내고 있는 20대와 그들의 20대는 무척이나 다르고, 나는 슬퍼졌다.

  부끄럽지만, '에밀리 디킨슨'이 누군지 몰라서 책을 읽는 초반부에 검색을 하면서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책속에 인물들이 이야기하는 '청춘의 상징'이 나에게는 낯설고 어색했다. 그리고 그렇게 '젊음'의 시기의 상징이 되는 인물이, 시, 책이 있다는게 부러웠다. 과연 지금 나를 포함하는 20대에게는 나중에 현재를 회고할만한 인물에 누가 있을까? 시를 적고, 외우고, 책에 대해 이야기하던 청춘의 모습은 과연 어디에서 끊겨버린걸까?

  그들의 청춘은 너무 암울하고 우울했다. 어쩌면 우울하고 답답한 현실을 겪어나가면서 돌파구가 되어준 것들이 그들에겐 문학이고 시위였을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의문에 실종을 겪고, 사라지고, 죽어나갔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다치고 뒤틀리고 꼬여나갔다. 그래도 그들은 웃고, 사랑을 하고, 꿈을 꾸며 하루하루를 보내기 시작했다.

 

  ● 비극, 그리고 또 비극

  하늘하늘한 스커트 차림의 윤미루는 이 소설속에서 가장 비극적인 운명을 살아가는 캐릭터였다.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언니의 삶을 항상 닮아가고, 응원하며 살아왔고, 나중에는 언니의 삶의 굴레까지 짊어지다 그렇게 운명의 마지막을 맞이했다. 이 책에서는 많은 사람들의 끝이 비극이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그리고 울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중 책장을 덮을 때까지 생존해있는 인물보다 죽은 인물이 더 많을 정도로 비극적이다.

 

  ○ 그.럼.에.도.불.구.하.고

  이 책에는 항상 '타자기'처럼 한 글자씩 띄어 입력하는 글귀가 등장하곤 한다. 세상은 어두침침하다. 세상은 항상 의문투성이고, 어느것 하나 확실한 것은 없다. 하지만 이들은 웃을 수 있는 일들을 하나하나 찾아나간다. 서로의 아픔을 공유하고, 그리고 그 아픔을 나누면서...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의미있는 사람들이 되어간다.

  미루가 살아간 흔적을 남기기 위해 적어나가던 '음식물'들의 기록노트에 서로가 이야기를 남기며 '그 들의 노트'로 만들어가던 행복한 시간이 있었다. 우울한 지하방에는 백합을 심어 행복한 공간으로 만들어나갔고, 서로가 서로에게 전화를 걸며 그렇게 항상 '의미'가 되었다. 어쩌면 항상 손에 핸드폰을 쥐고 살고, 누군가가 전화를 했다면 '부재중 통화'에 기록이 남는 그 세대와는 다른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의 의미는 어마어마하다.

 

  세상은 갈수록 실시간의 시대로 접어들어가고 있다. 항상 손끝에 전화기가 있고, 항상 누군가를 향해 기록을 남길 수 있다. 이젠 공중전화기를 찾아다닐 이유도 없고, 엽서를 쓰고, 편지를 보내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살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을 덮고 나서 나의 생활에 순간에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신경숙 작가는 책 끝에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말로 글을 쓰는 작가로서, 우리식의 청춘소설이 없는게 슬펐다고..." 이 책은 그래서 의미가 있고, 읽는 '재미'가 있다. 그녀에게 고맙다. 내가 몰랐던 우리나라의 청춘을 소개해줘서...! 이 순간, 왠지 누가 나에게 전화했을지 목소리를 듣기전까지 모르고 설레는 그런 전화를 받고 싶어진다.



YES마니아 : 골드 m******2 2011.12.12. 신고 공감 7 댓글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