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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은 생각보다 힘들었습니다. 일 안 하고 노니 좋은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정신적으로 불안한 게 꾀 괴롭습니다. 정신적인 불안함은 두려움 때문인데요. 그렇다면 파업 참여가 두려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모르기 때문입니다. ‘파업이 어떻게 끝날까’ ‘파업이 끝난 뒤 난 어떻게 될까’ ‘회사는 좀 변할까’ ‘사람들이 파업에 잘 참여할까’ ‘외부의 시선은 어떨까’ 등등. 어떤 질문에도 답할 수 없습니다. 하물며 ‘과연 우린 파업을 해야 할까’ ‘파업이 정말 옳은 것일까’란 의문에 혼란스러운 때도 있습니다. 한 마디로 인간의 이해력은 너무나 부족합니다. 올리비에 푸리올은 이런 인간을 두고 “인간은 장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19)라고 말합니다. 파업 상황에 대한 어두운 시각은 절 끊임없이 불안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제 모습이었습니다. 두려움에 불안해하면서도 전 열심히 파업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동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의 이해력도 유한한 건 매한가지며, 때문에 그들도 몹시 두려워할 겁니다. 하지만 모두들 적극적으로 파업에 동참한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의 의지엔 한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인간은 무언가를 이해하지 못했을 때도, 우리 의지는 그것을 ‘참’이라고 긍정할 수 있습니다.”(19) 다시 말해 파업이 어떻게 될 지 전혀 모르더라도, 행동할 수 있는 의지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푸리올은 “의지가 무한하기 때문에 문제를 야기한다 하더라도, 한편으로 그 무한성 덕에 문제의 해답을 구하기도 한다”(19)라고 말했는데, 실제로 의지가 모여 발생한 파업은 현재 회사의 문제를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될 지도 모릅니다. 심지어 의심의 철학자라 불린 데카르트조차 “행동하는 것이 바람직할 때는 생각을 하지마라”라고 말하기도 했으니까요.
올리비에 푸리올의 얘기를 좀 더 들어보겠습니다. “만약 자신의 행위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 미리 아는 경우에만 행동하기로 결심한다면, 우리의 이해력은 그 유한성에도 불구하고 의지보다 우위에서 의지를 억제하면서 자신이 인식하는 것만을 욕망하도록 의지를 제한할 것입니다. 그것은 대단히 순조롭고 안락하지만 완전히 고립된 삶입니다. 모든 차이와 위험, 새로움을 전적으로 거부하는 삶, 간단히 말해 순전히 자급자족적인 삶, 즉 죽음과 흡사한 삶이겠죠.” 그렇습니다. 실제로 우린 이번 파업이 어떻게 될지 전혀 모릅니다만, 가만히 앉아 죽음과 흡사한 삶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의지는 이미 현 상황의 ‘참’과 ‘거짓’을 판명해, 우리를 움직이게 만든 겁니다.
회사의 한 경영진이 적극적으로 시위하는 후배에게 ‘뭣도 모르고 행동하지 말라’는 식으로 말한 적이 있습니다. 데카르트의 생각과 정면으로 위배되는 말을 한 셈인데요. 위에서 언급한대로 우린 완벽히 이해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모든 것을 완벽하고 이해하기 전까진 절대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는 그 분의 지적은, 한 마디로 영원히 닥치고 살라는 말 밖에 안 됩니다. 나이 든 경영진이 생각하는 행동 임계점이 우리보다 훨씬 높을지는 모릅니다. 그래도 ‘어린놈들이 뭣도 모르고 무모하게 행동한다’는 말은 절대 해서는 안 됩니다. 무한한 의지로 욕망하는 데는 지식과 나이가 상관없기 때문입니다. 그 분께 데카르트의 말을 대신 전합니다. “이해력이 열쇠를 제공하지 못할 때, 행위로 이끄는 데 필요한 결단력을 제공해주는 것은 바로 의지이다. 행위는 실천하기로 결단해야만 단호하게 밀고 나갈 수 있습니다.”(21)
무한한 의지로 자유롭게 욕망하는 것. 바로 여기에서 ‘자유’라는 의미가 도출됩니다. ‘자유’라는 말은 지겹게도 많이 들었지만 막상 ‘자유’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의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과연 인간에게 자유라는 것이 있기는 할까. 결국 복잡하게 구성된 사회의 조작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는 아닐까.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서 매트릭스 안에 사는 사람과 다를 바 없지 않을까. 의심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욕망은 무한합니다. 자유롭게 욕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욕망이 곧 자유는 아닙니다. 자유로운 욕망은 인간의 의지라는 틀을 거쳐 행동으로 연결됩니다. 바로 욕망이 곧 행위로 전환될 때, ‘자유’라는 개념이 떠오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르누비에는 “만약 자유가 필연적이라면, 자유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했습니다. ‘2+3=5’는 필연적인 법칙입니다. 우리가 자유롭게 ‘2+3=3’이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자유는 ‘2+3=5’같은 법칙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유롭다’라는 법칙도 없습니다. 르누비에는 만약 ‘인간은 자유롭다’라는 법칙이 존재한다면, 그 순간부터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고 말한 겁니다. “자유는 증명되지 않습니다. 자유는 우리 의지의 행위입니다. 자유는 우리가 확인하는 소유권이 아니라, 우리가 내리는 결정입니다.... 자유는 관념이 아니라 행위라는 것을 내면 깊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철학을 할 수 없습니다.” (122-123) 결국 광장을 가득 채운 파업의 현장이 곧 ‘자유’입니다. 유한한 이해력 때문에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면서도, 광장에 모여 자존감을 지키려는 동료들을 보며, 전 ‘자유’라는 개념을 이해합니다.
그런데 파업 참가자나 불참자 중에는 이런 사람이 있을 지도 모릅니다. (저를 포함해서요) ‘만약 내가 파업에 참여하지 않으면 친한 동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지 않을까’ ‘다 파업하니 나도 그냥 같이 해야지’라고 생각해서 파업에 참여한 사람. 반대로 ‘파업에 참여하면 이번 승진에 실패할지도 몰라’ ‘팀장과의 의리가 있는데 내가 어떻게 파업에 참여하겠어’라고 생각해서 파업에 불참한 사람. 어쩌면 제 내면 깊은 곳에는 남의 시선을 신경 쓰는 신경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신경이 절 파업현장에 끌어냈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데카르트나 스피노자는 제 행동이 ‘고매한’ 행동이 아니라고 말할 겁니다.
데카르트는 “고매함이란 자신에게 자유를 주는 것, 자신을 믿는 것, 욕망하겠다고 스스로 약속하는 것”(196)이라고 말했습니다. 스피노자는 능동적 인간과 수동적 인간을 구분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 자신이 적합한 원인일 때 우리는 능동적이고, 부분적인 원인에 불과할 때는 수동적입니다.”(225) 즉, 이번 파업이 전적인 제 신념 때문이라면, 전 능동적인 인간이고, 남의 시선 때문에 못 이겨 나왔다면 수동적인 인간입니다. 물론 능동과 수동을 명확하게 구분하긴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우린 노력할 수는 있습니다. 능동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고매한 행동을 하기 위해 애쓸 수 있습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자유에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자유는 결코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노력해서 사용할 때 존재하는 겁니다. “선택하는 것, 그것은 자신의 자유를 존재하도록 하는 행위입니다. 그처럼 자유는 오직 사용할 때만 존재한다는 이상한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196) 때문에 경영진이 보내는 협박 문자를 보고 회사에 돌아간다면, 전 선험적으로 주어진 제 자유를 제 발로 차버리는 꼴이 되고 맙니다. 회사 경영진도 수동적이고 고매하지 못한 후배들이 자랑스럽진 않을 겁니다. 제가 회사로 돌아갈 수 없는 이유입니다.
프랑스의 젊은 철학자 올리비에 푸리올은 <스튜디오 필로; 철학이 젊음에 답하다>에서 영화를 통해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난해한 철학을 쉽게 풀어내고 있습니다.(물론 쉽게 풀어낸 결과물도 쉽지만은 않습니다.) 덕분에 전 책을 읽는 내내 철학을 좀 더 가깝게 만나는 쾌락을 만끽했습니다. 전 철학은 행동과 연결될 때만 의미가 있는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철학을 최고의 실용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철학을 통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프랑스 철학자 뤽페리는 심지어 서양 철학사를 다룬 자신의 저서 제목을 <사는 법을 배우다>로 짓기도 했습니다. 올리비에 푸리올 역시 각 챕터의 제목을 ‘~사용법’이라고 붙였습니다. 그리고 의지, 자유, 의심, 고매함, 모방, 상상력 등의 사용법을 알려줍니다.
물론 실천하기 어려운 내용들입니다. 하지만 어둠과 안개로 가득했던 삶의 여정에 희미한 불빛이 밝혀진 기분이 듭니다. 이게 바로 철학을 만날 때의 쾌락입니다. 올리비에 푸리올이 알려준 사용법을 얼마나 잘 사용할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번 파업은 일종의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올리비에 푸리올은 젊음의 질문에 철학으로 답을 해줬습니다. 이제 행동으로 스스로의 자유를 만들어 내야 할 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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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를 보고 읽게 되었다.프랑스, 영화관에서의 강의, 바칼로레아, 화려한 저자의 이력 등 관심이 가는 면면이 있었으나 가장 관심을 끌었던 것은 목차였다. '무언가를 선택한다는 의미', '욕망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 '인간은 시간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저 내용 아래 무엇이 써 있을까 상상만으로도 군침이 도는 주제들이다. 읽고 보니..우주를 담고 있는 책이네.
책을 읽으면서 부끄러운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대학시절에 동서양의 고전을 읽는 세미나에 참여한 적이 있었는데 10개의 강의 중 참아 가면서 5개를 듣고 더 이상 지속할 수가 없었다. 책을 읽는다고 도서관에 줄창 앉아 있었으나 무슨 말인지 알아먹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입시지옥을 거쳐 대학에 들어왔으니 이제 교양인으로서 지성을 쌓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의지만 있었을 뿐 문제의식도 그것을 따라갈 논리도 없었었다. 아니, 논리로만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철학이란 책상머리에 앉아서 세상을 그려보는 것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삶을 통해 문제를 인식해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므로. 그런 면에서 프랑스의 풍토에 참 부러움을 느끼게 된다. 고교 졸업생들이 이런 내용에 대해 이야기하고 또 이해할 수 있다니..(사실, 나이차이도 나랑 별로 안 나는 저자가 이 정도로 자유자재로 개념을 쉽게 가지고 놀 수 있다는 것도 참 질투가 난다.)
이 책을 읽다보면 철학자들이란 우리의 선입견과는 달리 건강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희망을 포기하는 것이 유익하다'를 설명하는 부분이 단적인 예인데- 프리올 선생은 그것이 스피노자의 것인지 그의 것인지 아니면 그냥 나처럼 평범한 이가 말하는 것인지 전혀 어렵지 않게 파이트 클럽을 끌여들여 술술 설명해낸다.- 희망이란 기본적으로 미래를 상정하고 있으므로 결국은 희망은 현재가 우리를 실망시키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라는 것이다. 그리고 희망은 본래 희망하는 것이 일어나지 않을 것에 대한 두려움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희망을 버린다는 것은 현재를 직시하며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버린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완전함을 이해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차갑게 인식하는 것이 스피노자가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이다. 시니컬해 보이지만 들여다보면 완전 낙관적인 것이지..(그렇지 않고 자기를 기만하면서 만족을 얻는 것을 이 책에서는 술주정뱅이의 행복이라고 말한다.)
여튼, 이 책은 그 동안 거의 포기했던 철학책 읽기를 다시 시작할 용기를 주었다. 저자 스스로도 처음엔 데카르트에 대해 적개심(?)을 가지고 있다가 알랭에게서 많은 도움을 얻었다고 한다.(물론, 난 알랭을 이 책에서 처음 알았다. 알랭드 보통의 그 알랭 아니다.) 이 책에서도 그의 설명을 많은 부분 인용하고 있다. 그렇다. 원전은 원래 어려운 것이라고 위안을 삼아본다. 절대 내 머리가 나쁜 것이 아니고!
매 문장문장마다 밑줄을 그어야 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밑줄 긋기를 포기했을 정도로 참말로 명석한 책이다. 문제의식은 있으되, 나처럼 원전은 버거운 사람에게는 정말 보석같은 책이다.
덧1. 아이폰의 스마트함에 담뿍 빠져 스티브 잡스에게 절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이 책의 저자에게도 비슷한 심정.
덧2.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토드 부크홀츠 저) 이런 책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강추.
덧3. 이 책은 젊음에게 답할 뿐만 아니라 중년에게도 답해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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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외국인이 나한테 길 물어보고 고마워했다고 허세 떨고 다닐 게 아니라, 진짜 프랑스어를 어서 배워야겠다. 올리비에 푸리올의 강의를 보고 끄덕일 수 있게, 적어도 올리비에 푸리올의 블로그(http://studiophilo.fr)에 가서 대충 알아들을 수라도 있게 기본이라도 좀 배워야겠다. 당연히 그 전에 내가 언어로 사용할 가능성이 그나마 높은 외국말인 영어부터 대충 해결을 봐야 내 성격이 용납을 하겠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그 다음에는 일본어를, 그 다음에는 스페인어를 해야 한다. 공식적인 '교육'을 받으며 그나마 배워본 것이니까. 음? 너무 뒤로 밀리는데? 그럼 해당 언어를 사용하는 현지 문화권에 들어가 보는 것을 언어학습 우선순위의 결정 조건으로 삼자. 그럼 스페인어를 제끼고 프랑스어를 배울 수 있으려나? 그것도 안 되겠다. 크메르어를 배워야 할 테니까....
아무래도 올 해 안에 프랑스어 배우는 건 안 되겠다. 일단 영어 앞에서 작아지는 내 모습이 꼴 보기 싫으니 언어를 배우려거든 영어부터. 아,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평소에도 가장 배우고 싶은 언어인 프랑스어에 대한 학습 욕구가 갑자기 또 솟구친 이유는 올리비에 푸리올 때문이다. 바로 이 책의 저자, 올리비에 푸리올은 영화감독이자 소설가라는데 사실 나는 처음 접했다. 그의 영화는 프랑스권에서만 유명했던 것 같고, 번역본이 출간된 지역을 보니 모두 유럽권에 국한돼 있는 걸 보니 나같은 일개 아시아인이 모르는 건 무리도 아니었던 듯하다. 하지만 뒤늦게 알게 된 그는 너무나 매력적이다.
올리비에 푸리올은 영화를 통해 철학 강연을 해왔다. 영화관에서 시작된 '시네필로'라는 강연은 젊은이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스튜디오 필로'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으로 편성되었다. 스튜디오 필로는 이 책이 한국에 출간된 2010년 당시 시즌 5까지 진행됐다. 앞서 언급한 올리비에 푸리올의 블로그에 가보니 현재 시즌 7까지 나왔다. 영상도 제공된다. 지금 올라와 있는 것에서는 발터 벤야민, 히틀러 등이 언급되고 있고 제목을 사전을 이용해 뒤져보니 전쟁론이라는데...... 아오! 이래서 프랑스어를 배우고 싶어졌다. 파리 13구역의 영화관에 가지 않아도, 프랑스 오랑주 TV를 보지 않아도, 인터넷을 통해 볼 수 있는 그의 강연을 번역이 안 돼서 못 본다는 건 정말 눈물겹다. 나는 지금 그저 그의 매력 철철 넘치는 프랑스어를 음악처럼 감상하는 수밖에 없다.
이 책은 그의 영화를 통한 철학 강의 중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편을 엮은 것이다. 책을 통해 짐작해보자면 그의 강연은 진지하고 똑부러지면서 친절하고 경쾌하며 재치있다.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철학을 그들의 저서의 부분들을 인용해 보여주고, 프랑스 철학자인 알랭의 글을 통해 다시 읽은 후, <포레스트 검프> <베를린 천사의 시> <매트릭스> <파이트 클럽> <아메리칸 뷰티>와 같은 유명한 영화를 통해 심도있으면서도 쉬운 언어로 설명한다. 이들 철학에서 탐구하는 내용도 인간의 욕망과 의지, 행복 등 철학의 근본적인 문제이자 많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궁금해하는 내용이어서 무척 흥미롭다. 또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와 더불어 디오게네스, 칸트, 니체, 데리다, 베르그송 등 다양한 철학자들도 언급하며 철학사를 아우른다.
영화와 철학 어느 것 하나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상생을 말하는 올리비에 푸리올. 그의 이 책은 철학에 대한 이해를 영화를 통해 쉽게 보여준다는 다른 수많은 저서들과 조금 다르다. 각 칼럼에서 한 영화와 한 가지 주제를 엮고 끝맺는 것이 아니라, 실제 강연을 듣는 듯 여러 영화를 이어지는 주제의 흐름에 맞추어 자유자재로 엮는다. a라는 주제에 대한 설명을 A라는 영화를 통해서 한 후 자연스럽게 a'의 문제로 넘어갔을 때 B의 영화를 들여온 다음, b라는 주제로 순차적으로 넘어간 후 C라는 영화를 들여오면서 다시 A라는 영화와도 연관시키는 식이다. 덕분에 책 한 권을 덮었을 때 기립박수를 치고 싶어진다. 그리고 프랑스어를 배우고 싶어진다.
의지가 욕망으로 강등될 때, 자유는 저속한 욕구로 떨어집니다. 한 인간이 위험을 인식하면서 행동하는 경우에만 용감하다고 말할 수 있듯이, 인간은 뭔가를 자유롭게 선택한 경우에만 그 선택을 자랑스러워할 수 있습니다. (40쪽)
자기 자신을 살필 때, 현재 자신의 징표들을 찾으려 애쓸 때, 사람들은 욕망하고 상상하는 것을 포기합니다. 징표들을 찾으려 애쓸 때, 그것을 살피는 행위 자체가 징표를 더 늘릴 뿐만 아니라 없는 것도 만들어내기 때문에 결국 징표를 발견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정신이 무엇을 믿든 우리의 정신이 가진 능력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자기가 믿는 것을 존재하게 하는 것. 우리는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을 태어나게 합니다. (118쪽)
우리는 분리할 수 없는 육체와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상은 언제나 우리에게 나타나는 최초의 생각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거쳐 나오면서 극복하려 노력할 수는 있습니다. 말하자면 내부에서 극복하려 노력하는 것이죠. 육체와 정신의 분리는 오직 생각으로만 가능합니다. 이미지는 보조 도구이자 시금석입니다. 진실은 시금석이지요. 우리가 여전히 이미지 단계에 머물러 있다면, 그 이유는 우리가 아직 사유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191쪽)
"우리와 유사한 것들"이 슬픈 정념을 느끼는 것을 영화에서 보는 건 위험하지 않을까? 슬픔은 전염성이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식으로 부정적인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는 건 아닐까? 안심하십시오, 그 대답은 '그렇지 않다'이니까요. 분명,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스피노자 역시 대체로 과잉을 만류합니다. 특히 슬픈 픽션을 너무 자주 접하지 말라고 조언하죠. 하지만 스피노자는 어떤 반박도 하지 않습니다. 데카르트가 설사 슬픈 정념이라 해도 허구에서 정념을 경험하는 것은 언제나 지적인 기쁨을 생겨나게 한다고 밝히고 있다면, 스피노자는 정신은 이해를 통해 항상 기쁨을 느끼는 한편 슬픈 정념이 상상의 존재들에 결부되어 있는 한 인간은 상상하는 능력을 그런 식으로 행사하면서 기쁨을 느낀다는 점을 덧붙입니다. (307쪽)
상상한다는 게 잘못이 아니라,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알려주는 관념이 결여된 채로 단지 상상만을 품고 있는 것이 잘못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영화를 볼 때,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우리는 오류에 빠져 있지 않습니다. 영화관에서 우리는 코넬리우스 같은 상황에 처해 있지 않습니다. 우리 경험이 상상의 산물임을 잘 알고 있으니까요. 바로 그 점으로 인해 역설적으로 경험이 참이 됩니다. (392쪽)
매순간 존재의 본질은 정확히 존재하는 그대로이며, 그 존재는 존재하는 한 충분히 완전합니다. 장님은 시력을 잃은 사람이 아니라, 그렇게 존재하는 것으로 충분히 완전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뭔가 잃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현재가 달라질 수 있을 거라고 상상하는 것입니다. 올바로 조절되지 않은 상상은 슬픈 정념을 태어나게 합니다. 후회, 선망뿐만 아니라 희망까지도. 우리의 조건이 어떠하든, 현재의 완전함을 생각하는 것이 힘과 기쁨을 증가시키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487쪽)
우리는 어떤 선택의 가치를 내용으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 선택의 확고부동함으로 판단합니다. 의지는 우리에게 신의 차원을 열어줍니다. 하지만 우리의 의지와 달리, 신의 의지에는 전능함이 수반되지요. 흔히 말하는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소서!"라는 기도는 쓸데없는 바람입니다. 신의 의지는 항상 욕망하는 것과 동시에 이루어지니까요. 반면 우리 인간들에게는 무한한 의지에 유한한 능력만이 수반될 뿐이지요.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이룰 수는 없지만, 모든 것을 욕망할 수는 있습니다. (4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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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낳은 가장 위대한 예술은 뭘까?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영화(映畵)’가 아닐까 한다. 20세기 과학기술의 발달이 빚어낸 영화라는 예술 장르는 이전까지 있었던 그림, 음악, 무용, 문학, 건축, 패션 등 모든 예술 장르를 아우르는 종합예술로서, 현재는 대중들에게 가장 친근하면서 사랑받는 장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최근에는 정규 교육과정에 ‘영화’가 하나의 과목으로 편성되어 교육이 이루어질 정도가 되었다. 위와 같은 영화의 급속한 발전과 대중친화성은 다른 장르의 예술이나 학문들이 영화와의 결합과 크로스오버를 통해 대중들에게 좀 더 친숙하게 다가가기 위한 매개체로 영화를 사용하는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문학, 그림, 건축, 법, 심리학, 철학 등 인근 학문들이 영화와의 교류와 접목을 통한 작업을 바탕으로, 대중들에게 쉽게 다가가기 위한 책들을 속속 출간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철학이라는 주제와의 접목이 상당히 매력이 있는 것 같다. 영화라는 장르도 연출자의 사상과 생각이 녹아 있는 만큼 연출자 자신의 철학이 화면 곳곳에 투영되어 나타난다. 영화 평론가들이 영화를 해석하고 평론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이런 생각을 읽는 것이 재미있는 것처럼, 다른 학문과의 접목은 영화와 다른 인접 학문을 같이 읽는다는 점에서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하는 것 같다. ‘철학(사진, 법) 영화를 캐스팅하다’ 시리즈는 잘 알려진 영화와 인접 학문의 크로스오버적인 글쓰기의 대표적인 예이다. 그런데 이런 경향은 우리나라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영화의 본 고장이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 파리에서 이루어진 영화와 철학에 대한 강의를 담고 있는 이 책은 2005년부터 매주 토요일 파리 13구역의 영화관 MK2에서 진행된 강의 내용이다. 영화감독이자 철학자이며 소설가인 올리비에 푸리올의 철학 강의 ‘시네필로(Cinephilo)’ 중 시즌 1에서 다룬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철학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강의는 현재도 진행될 정도로 인기가 많다고 한다. 책은 ‘의지, 의심, 자유, 정념, 고매함, 만남, 모방, 의식, 상상력, 인식’ 이라는 열 가지의 중요한 철학적 개념들을 약 서른 편의 영화를 통해 탐구한다. 일단 우리에게 친숙한 영화를를 가지고 철학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난해하고 추상적이기만 한 철학적 개념들이 좀 더 친숙하고 편하게 다가온다. 위 개념들을 설명하기 위해 선택한 영화들도 대부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영화들이어서 책을 읽는데는 부담이 없다. 의지는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포레스트 검프’, 데카르트 철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주제와 관련된 ‘매트릭스’, 정신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행동 능력을 고려할 때 느끼며, 자기 자신과 더불어 자신의 행동 능력을 더 명확히 상상할수록 더 큰 기쁨을 느낀다, 라는 ’에티카‘를 증명하는 ’베를린 천사의 시‘, 현실을 활력넘치게 만들어 주기도 하지만 파멸로 몰고 갈 수도 있는 정념의 미묘한 역학을 다루는 ’아메리칸 뷰티‘, 인간을 진정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고매함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나의 건축가‘, 타인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영향을 주고 받는지에 대한 ’엑스맨‘ 등, 지은이는 다양한 장르의 영화 속에서 데카르트의 철학적 개념들을 꺼집어 내어 설명하고 있다. 원래 영화와 철학을 접목시키는 이유는 철학을 좀 더 이해하기 쉽고 편하게 하기 위한 장치로 영화를 이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책이 영화보다는 철학적인 접목이 두드러지는 경향이 강하다. 이 책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한다. 철학을 이해하는 방법론 중의 하나로 영화를 선택한 것 같다. 책 제목만 본다면 철학 전반을 다루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지은이의 강의 중 시즌 1만 다루다보니 데카르트의 철학이 주가 되어 있어 있다. 그래서 생각보다 이해도가 떨어지는 측면이 있으며, 다소 지루한 느낌도 드는 아쉬움이 남는다. 지은이의 전체 강의를 소화했더라면 좀 더 나은 글이 되지 않았을까 한다. 사회는 점점 복잡해지고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거기다가 경제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이런 정서에 편승하여 서점가에는 처세서나 자기계발서, 심리학과 관련된 책들이 넘쳐난다. 하지만 이런 책들은 대부분 당장 눈앞의 현실을 타개해보려는 얄팍한 수준의 내용들이 많다. 진지하게 나 자신과 나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에 대해서 고민하고 생각해보는 책들이 아쉬운 때다. 비록 영화라는 매체의 그릇에 담긴 철학이라는 음식이지만 조금씩 조금씩 씹다보면 깊은 맛이 우러나오지 않을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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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의 힘이란 참으로 강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전통이 없는 나라에서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단기간에 수십, 수백년간 쌓아올린 문화를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하다. 설사 따라잡은 것처럼 보이더라도 실상은 흉내내기인 경우가 대부분으로, 결국에는 쉽사리 무너져내리기 마련이고 말이다. 인간이 창조한 무엇이든 이 법칙에서 벗어나지 못하겠지만, 교육만큼 이러한 법칙이 잘 드러나는 것은 없는 것 같다. 교육이 백년지대계임은 이 말이 흔하게 사용되는 정도에 비례하여 진실인 것이 아닐지.. 아직도 대학입시를 위해서만 12년의 교육과정이 투자되는 우리의 현실을 돌이켜보면 흔히 하는 말이라고 그 말의 중요성을 실감하는 것은 아닌 듯 하지만 말이다.
이 책 스튜디오 필로를 읽으면서 이런 철학강의를 들을 수 있는 프랑스의 고3학생들이 부러워졌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했을 바칼로레아 입시제도는 한층 더 부러웠고 말이다. 삶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는 것도 대입 후로 미루고, 의미도 이해하지 못한 철학 개념을 요약암기하고 있을 우리나라의 고3들을 생각해보면 안쓰러울 따름이다. 가장 기본적인 생의 선후관계조차 혼돈시켜두는 교육에 어떤 미래를 바래야되는 것일지...
이 책은 철학의 근본이 되는 뿌리 개념들을 친절하게 안내해주면서 그것이 삶 속에서 어떤 중요성을 가지는지 생각해보도록 도와주는 책이다. 여러 철학자들을 인용하고 있지만 철학자를 이해하기 위해 설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설명을 위해 철학자의 문제의식을 끌어들이는 방식을 택한다. 똑같은 방식으로 친밀한 영화 속의 장면들을 인용하고 있기도 하다. 영화로 철학을 배우고자 하는 책이야 많았지만 영화를 중심에 두고 철학적 개념을 끌어들이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책은 철학적 원리를 중심에 두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강의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보다 구조적인 쪽을 택한 것이 아닌가 한다. 강의의 제목이 '의지의 사용법', '의심의 사용법', '자유의 사용법' 등으로 붙여진 것으로도 알 수 있는 바이지만 말이다. 때문에 자칫 철학강의를 들을 때 느끼게 되는 공허함 없이 말그대로 삶의 철학을 논한다는 인상이 든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라 생각된다.
책의 시작이 의지와 관련된 행동의 원리라는 점이 인상에 남는다. 보통 인식론에서 시작하고 의지론을 후반부에 다루는 것이 일반적인 것을 감안해보면 저자의 의도가 엿보이는 부분이다. 철학은 어떻게 생각하고 결정할 것인가에 대해 대답하기 위한 학문이기보다는 그 결정을 어떻게 행동으로 옮길 것인가에 대한 학문이여야 하지 않을까? 벌써부터 자리에 앉아 고민하는 것만을 배우고 있을 학생들에게, 혹은 이미 앉아서 고민만 하고 있는 나와 같은 어른들에게 권할만한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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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이기 때문에 특별한 정보 없이, 제목에 확 끌려서 집어들게 된 '스튜디오 필로'. 자주 활동하는 캠퍼스가 아닌, 의과대학 쪽 캠퍼스에 유일하게 한 권이 들어와 20분을 걸어가서 간신히 빌린 책이니 만큼 나름대로 애착을 가질 수 밖에 없는 독서였음에도 불구하고 책의 절반쯤 읽었을 때 굉장한 고통을 느낄 수 밖에 없는 비운의 책이었다. 이래서 책은 미리 사전 정보를 어느 정도 알고 선택해야 하는 것일까? 영화와 철학을 접목시킨 책은 이전부터 꽤 다양한 변주로 소개되어왔다. 영화학적인 접근과 철학적인 접근을 섞어놓은 듯한 이런 작품들은 세미철학서로서 영화학적인 접근보다는 철학적인 접근의 비율을 높게 가진다. 물론 이런 작품들이 가지는 철학의 비율이래봐야 철학자들의 이름이 나올 정도로 거창한 것이 아닌, 그야말로 생활철학에 가깝다고 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영화를 철학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은 영화를 좀 더 심도 있게 해석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런 특성 때문에 이런 책들은 철학과 영화에 나름대로의 관심이 있지만 자세한 정보를 모르는 이들을 위한 책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동시에 영화팬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좀 더 대중적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는 것이고. 그러나 '스튜디오 필로, 영화가 젊음에 답하다' 는 조금 다른 방향성을 띈다. 실제로 데카르트 읽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스튜디오 필로'는 세미철학이라기 보다는 진지한 철학을 이야기한다. 영화에서 철학을 읽어내는 것이 아니라, 철학을 읽는 방법론으로서 영화를 선택한 느낌이랄까. 그것은 결국 영화가 담고 있는 철학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철학을 드러내는 영화를 선택한 것에 가까워 보인다. 일례로 데카르트와 관련된 철학을 수 없이 담고 있는 매트릭스를 이야기하는데 책은 대부분의 페이지를 할애한다. 물론 매트릭스 팬이라면 나름대로 흥미로운 이야기이겠지만, 어디까지나 매트릭스 자체가 말하는 철학이 아닌, 영화를 파편화 시켜 그것을 통해 철학을 재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에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이건 거의 루소의 '에밀'을 읽는 느낌이랄까. 그 정도로 꽤 높은 난이도를 자랑하는 것이 바로 '스튜디오 필로'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튜디오 필로'를 영화철학 서적으로 분류하기는 조금 어렵다. 실제로 소개되는 영화도 많지 않을 뿐더러 영화의 전체적인 주제를 따오는 것이 아니라, 영화의 세부적인 부분을 인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서 이 책을 데카르트 입문서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목적에 부합하는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그 정도로 '스튜디오 필로'는 철학서에 가깝다. 그러나 이런 제목을 보고 이 책을 데카르트 입문서라고 판단할 독자가 얼마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철학 실용서'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표지는 그야말로 책의 안티가 되어버리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물론 조금의 인내심과 집중력을 발휘한다면 이런 식의 영화 읽기는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책의 목적성이 학문에 있지 않다는 것은 대부분의 이들이 공감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독자는 기쁜 마음으로 책을 집어들어 1/3도 읽지 못하고 분노에 가득차 책을 집어던질 확률이 크다.(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의 경우에도 책을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을 한 32번쯤 느꼈다. 물론 빌린책이어서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영화철학을 접하고 싶은 사람에게라면 이 책은 비추. 데카르트를 심층적으로 읽고 싶다면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