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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회의 방식으로 보여주는 이 땅의 허와 실...
"우회의 방식으로 보여주는 이 땅의 허와 실..." 내용보기
누군가가 왜 최근 서평을 올리지 않는지 물어왔다. 그것도 이런 식으로... “내가 쓴 서평 때문에 기죽어서 안 올리는 거야?” 그러니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헐...” 그런데 후회된다. 요렇게 말했어야 하는데... “뷁... 그 무슨 책벌레가 돈 갉아먹는 소리야. 나는 그저 내가 좋아서 읽고 쓰는 거라고. 그러니 네가 말하는 그런 것에 영향받을 턱이 없잖아, 흥.” 돌이켜보면
"우회의 방식으로 보여주는 이 땅의 허와 실..." 내용보기
누군가가 왜 최근 서평을 올리지 않는지 물어왔다. 그것도 이런 식으로... “내가 쓴 서평 때문에 기죽어서 안 올리는 거야?” 그러니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헐...” 그런데 후회된다. 요렇게 말했어야 하는데... “뷁... 그 무슨 책벌레가 돈 갉아먹는 소리야. 나는 그저 내가 좋아서 읽고 쓰는 거라고. 그러니 네가 말하는 그런 것에 영향받을 턱이 없잖아, 흥.” 돌이켜보면 꽤 어린 시절부터 책을 읽었다. 계몽사에서 나온 50권짜리 동화책 전집을(세계명작의 대폭 축약본이며 어린이용 각색본이었음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던) 초등학교 입학 전에 읽었다(고 한다. 기억도 안 난다, 실은). 철이 들고 가장 먼저 읽은 책은 중학교 때 읽은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이었고, 고등학교 때는 가스통 바슐라르가 쓴 『로뜨레아몽...』(제목이 이것이 맞는지는 모르겠으나, 동네 서점에서 『말도로르의 노래』를 사는데 실패하여 그 보복 내지는 대체용으로 산 기억이 난다)을 읽다가 선생한테 뺐긴 경험이 있다. 도대체 그것 빼앗아다가 뭘 하려고, 읽지도 않을 거면서... 재수를 할 때는 강남역 지하에 있던 대형 문고에서 이문열을 열심히 읽었다. 잔뜩 쌓여 있는 이문열의 책을 학원 점심 시간에 들른 서점에서 읽고, 아무도 몰래 책갈피를 끼어서 맨 아래에 슬쩍 밀어 놓았다가 다음 날 다시 읽는 식으로 그의 작품들을(지금은 내가 기울였던 노고가 치욕스럽지만, 그래도 어딘가 사서 본 것은 아니잖은가) 독파했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는 주로 맑스레닌주의 책들을 읽었는데, (여기서 잠깐 김하기의 『항로없는 비행』의 작중 인물 하나가 떠오른다. 어느 날 그는 책을 읽으면서 길을 걷고 있었는데 자꾸 발을 절게 되었단다. 그래서 왜 그런가 보니, 책을 읽느라 정신이 없어 한 쪽 발은 턱 위의 인도를 다른 한 쪽 발은 턱 아래의 차도를 걷고 있었던 것, 그러니 자연스레 절름발이가 되어 버린 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괄호 안의 예 정도는 아니어도, 술에 쩔어 필름이 끊긴 상태에서도 다음 날 학습에 필요한 책을 펼쳐 놓은 상태에서 잠에 곯아 떨어지는 정도의 열성을 보였다. 뭐 그 이후로도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술을 마시고 또 마시다 남은 돈은 모조리 책을 샀으니(라고 하면 별반 책을 산 적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 돈 내고 술 안 마셨으니까, 번 돈의 대부분은 책 샀다...^^), 그리고 돈이 아까와 거의 빼먹지 않고 읽었으니 꽤 읽었으리라. 이후에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간혹 술마시고 남는 시간을 쪼개어 빠지지 않고 읽었으므로, 내 인생은 술에 취한 시간과 돈을 버는 시간, 그리고 책을 읽는 시간으로만 분할될 뿐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해야겠다. “그러니 친구여, 뷁, 걱정하지 말아라. 새롭게 시작한 직장생활에 적응하느라 조금 지친 것일 뿐, 쉬지 않고 읽고 있다.” 그건 그렇고 윤흥길의 중편소설집 『낙원? 천사?』에는 모두 세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낙원? 천사?」. 한 대학 캠퍼스에서 살고 있는 오군.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대학생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대추놔라 감놔라, 연애 성사에 논문 대필에 하지 않는 것이 없는 오군. 그리고 이런 오군을 천사라고 기억하는 대학 학보사 기자와 오군의 죽음. 그 죽음의 진실 또는 죽음 이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한 인터뷰 내용으로 소설은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결국 내 기사는 주간 교수의 벽에 가로막혀 학보에 실리지 못하고 만다. “... 자네는 복잡다단한 세상 전체를 단순히 선악 이분법으로만 파악하려 하고 있어. 선과 악 두 가지 중 어느 하나에 속하지 않는 것은 처음부터 존재할 수도 없고 존재할 가치도 없다, 디런 식이지. 예를 들어서 말하자면, 오군은 선이고 학교는 악이다, 그런고로 오군과 친한 것은 선의 세력이고 오군과 불친한 것은 악의 세력이다……... 아직도 배우는 과정에 있는 학생 신분으로서, 그리고 예비 지성인으로서 그런 식의 극단적이고 과격한 논리는 대단히 옳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주 위험한 것이네.” 컴퍼스라는 낙원?을(또는 캠퍼스만을) 자신의 무대로 삼아 천사?로(또는 자신을 천사로 여기는 자들만의 천사로) 살았던 오군의 이야기... 「산불」. 불구경. 쌈구경과 함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재미의 하나로 꼽히는 불구경을 소재로 하고 있다(기 보다는 불을 향한 어떤 열망, 불이 지닌 어떤 속성을 향한 열망을). “도대체 산에 불지르는 게 뭐가 그렇게 감동적인가?” “지난날 잘못된 것, 옳지 못한 것들을 몽땅 다 불태워 없앤 자리에서 새롭게 돋아나는 아름다운 생명체들이 주는 감동이죠. 말하자면 불이 가진 정화작용, 재생 능력 같은 것에 흠뻑 매료당한다고나 할까요.” 고아로 자라났지만 그 식구들의 총애를 받으며 대학에 입학한 김건식은 그러나 사회의 부조리에 눈뜨고 화염병을 들었다가 잡혀 친구들의 이름을 불고 풀려난다. 그리고 그 이후 대학을 떠난 김건식은 지방의 한 대학촌에 자리를 잡지만, 이유없이 일어나는 산불의 용의자로 지목되면서 다시 한번 곤욕을 치른다. 그리고 그 대학에 자리를 잡고 있던 대학교수인 내게 두툼한 원고 뭉치를 맡긴 채 그 도시를 떠난다. 그가 썼다는 원고(경찰서에서의 취조 과정이 취록된 듯한)와 그의 원고를 발표하는 내가 대신 쓰는 작가의 말로 이루어진 특이한 액자 형식의 소설. 「쌀」. 대저 쌀이란 무엇일까. 그저 의식주의 한 축을 이루는 식의 대표격인 무엇일까. 아니면 우리네 땅과 그 땅을 일군 사람들, 그리고 땅의 영혼이 함축된 무엇일까. 북한땅에 고향을 둔 실향민인 장인 장모가 북한에서 공수되었다는 쌀(실은 다른 쌀로 대치된 가짜 북한쌀)을 병증의 치료제로 이용한다는 사실이 사위인 최재식에겐 못마땅하지만 그들에게는 변변치 않은 명약들보다 한 수 윗길의 방편이다. “고향쌀은 고향에서 생산된 단순한 의미의 곡물이 아니야. 고향쌀은 바로 고향 그 자체야. 우리네 한국인들 심성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쌀에 대한 관념은 거의 종교에 가까울 정도로 신성시의 대상이 되지. 왜냐하면 땅과 쌀과 사람은 제각각 별개의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 순환관계를 이루고 있는 동일체이기 때문이지. 어제의 땅은 오늘의 쌀이 되고, 오늘의 쌀은 오늘의 사람과 한몸을 이루고, 오늘의 사람은 다시 내일의 땅이 되는 법이야. 땅이 곧 쌀이고, 쌀은 곧 사람이고, 사람은 곧 땅인 그 오묘한 이치를 최 서방 같은 젊은 세대가 알 턱이 없지. 암, 알 턱이 없고말고.” 장인의 지청구에 더해 고향 땅 제사상에서 터져 나오는 우르과이 라운드와 쌀의 관계를 모른다며 가해지는 타박은 도시사람 최재식을 궁지로 몰아 넣는다. 여하튼 최재식의 결론은 이렇다. “... 어떤 사람에게는 그냥 뱃구레를 채우기 위해 입안으로 꾸역꾸역 들여보내는 단순한 음식물에 지나지 않는 쌀이 다른 어떤 사람에게는 쌀 아닌 그 어떤 것, 쌀 이상의 그 무엇, 다시 말해서 사람의 영혼 구석구석까지 스며들어 때로는 병을 고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슬픔을 어루만지기도 하다가 종당에는 구원마저 가능케 만들어주는, 놀라운 신통력을 지닌, 영험한 존재로, 초자연적인 존재로 매우 황감하게 받아들여질 가능성도 있다...” 쌀에 대한 경외심을 은근슬쩍 우회의 방식으로 보여주는 윤흥길식의 작법이 보기 좋은 작품이다.
YES마니아 : 플래티넘 k******i 2004.09.14. 신고 공감 1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