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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원에 대한 물음의 시작-플라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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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란 생성되지도 소멸되지도 않는다. ‘영원’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우리가 경험 세계에서 겪는 것을 부정하는 형태로만 이해될 수 있다. 어떤 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은 곧 그것이 생산과 소멸, 변화의 과정에 예속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진리는 무엇보다도 본질적으로 앞서 이루어진 개념적 논변에서 참된 것으로 입증된 것과의 정합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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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란 생성되지도 소멸되지도 않는다. ‘영원’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우리가 경험 세계에서 겪는 것을 부정하는 형태로만 이해될 수 있다. 어떤 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은 곧 그것이 생산과 소멸, 변화의 과정에 예속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진리는 무엇보다도 본질적으로 앞서 이루어진 개념적 논변에서 참된 것으로 입증된 것과의 정합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플라톤은 신화를 얼마나 수긍할 만한 것으로 간주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불안에서 해방된 삶을 살게 하고, 좋은 삶을 욕구하게끔 하는 인간 존재의 상과 자신을 일치시키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파이돈> -이데아와 경험세계의 관계

볼프강 빌란트 이데아를 인식하는 일은 근본적으로 언어적 규정을 불허한다. 이데아에 대한 앎은 경험에 기인하고, 또 그러한 완전히 말로 매개될 수 없는 使用知(용도 혹은 사용법에 대한 앎)의 형식을 취하기 떄문이다.(즉 이데아 상정의 밑바닥에는 언어로 매개될 수 없는 모종의 형이상학적 직관과 경험이 가로놓여 있다.)

 

<파르메니데스>-반론

1. 파르메니데스: 사물들은 이데아에 참여함으로써 그 사물이게 되는 것인가 아니면 그 이데아의 한 부분에만 참여하는 것인가?(이데아의 단일성을 부정) 하나의 전체로서 이데아가 여러 사물에 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사물들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이 단일한 이데아가 아니라 그 이데아에 참여하는 사물들만큼 많은 수의 이데아를 상정할 수밖에 없게 하기 때문이다.(이데아를 공간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대상으로 전제)

- 돛의 은유(사물들은 그 이데아 전체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이데아의 한 부분만 참여한다.)

소크라테스: 하루의 은유(이데아는 시공간적 대상이 아니다.)

 

2.파르메니데스: 이데아의 이데아를 상정하는 무한소급의 모순이 나타난다.

소크라테스: 이데아는 영혼에 있는 思想(사고된 것)이므로 제3의 이데아를 상정하는 무한 소급은 이루어질 수 없다.

파르메니데스: 사상 역시도 어떤 것의 사상일 수 밖에 없다. ‘어떤 것’은 유형적일 수 밖에 없다.

작가: 실재에 존재하지 않는 시공간의 대상이 아닌 것을 인간의 상상할 수 있다. 예컨대 기하학적인 원리가 그러하다.(그러나 그러한 기하학적인 원리나 시공간을 벗어난 사상도 현실의 실재에서 파생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작가: 이데아는 상위의 전범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어떤 것의 성질을 의미하는가를 예시하는 하나의 범례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유사관계는 특정한 공통 성질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은 경험세계에 속해 있기 때문에 그의 경험세계를 구성하고 있지 않은 사물들에 대해 알 수가 없다. 시공간적 대상으로 인식할 수 없다. 개별적 사물들에서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다.

 

알프레드 화이트헤드

“유럽의 철학적 전통은 플라톤에 대한 일련의 각주라고 하는 것이 그것을 가장 적절하게 특징짓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그로써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그의 제자들이 주저주저 하면서 열심히 그의 저술들로부터 이끌어낸 조직적인 사상의 구조물이 아니다.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그의 구석구석에서 발견할 수 있는 풍부한 근본적 사상이다.”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은 동양의 성리학과 유사한 점이 많다고 생각된다. 서양의 형이상학과 동양의 성리학을 비교해보는 것은 내 오랜 숙원인데, 언제쯤 이루어질지는 모르겠다.

동양의 성리학자들 대부분은 서양과의 비교연구보다는 동양학의 원류에서 독자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경향이 강한데, 대부분이 그 용어상과 해석상의 난해함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 해석상의 난해함은 권위 있는 주석과 사료들에 의해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성리학의 理 개념과 아주 유사하다. 파르메니데스가 이데아의 상정을 비판하고 소크라테스가 답하는 <파르메니데스>편을 보면, 이데아를 정의내리고자 하는 시도는 결국 실패하기는 하지만, 우리는 정의내릴 수는 없어도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를 절대적이고, 순수하며, 근본적이고, 모든 경험세계의 원인, 본질 등으로 이해한다고 해서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성리학의 理 역시도 그러하다. 본질을 의미하며 모든 현상은 理로 인해 가능한 원인자로 주희는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다면 이데아는 덕의 이데아 선의 이데아와 같이 각각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서술하고 있으나 理는 일원론적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주희는 理가 하나라고 정의내린 적이 없으며, 플라톤 역시도 이데아에 대해 다의적으로 설명함으로써 그것이 하나가 아니라고 정의 내리고자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공통적인 점은 주희와 플라톤 모두 분명하게 이것은 사변적인 것이므로 시공간을 초월한다고 논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개념의 불완전성은 주희와 플라톤 이후에 현재까지도 계속 논의되고 있으며 혼란을 거듭하고 있다. 그것은 파르메니데스가 말한 것처럼 인간의 경험세계에 속해 있으며 자신이 경험한 것 이외의 것을 설명하기는 어렵기 때문이거나, 언어의 불완전성 때문일 것이다. 또한 플라톤은 이데아가 개별적인 사물들과 분리할 수 없는 것으로 상정하고 있는데, 성리학에서는 이러한 의미를 氣와 더불어 설명하고 있다. 즉 理는 氣와 분리될 수도 선후를 구분할 수도 없는 것으로 본다.

이처럼 교류가 없었던 고대의 양 극단, 동양과 서양이 사변적인 영역에서의 유사점을 보인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이것은 아마도 모든 인간이 자신의 근원에 대한 고찰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혹자는 플라톤의 절대주의적이고 근원지향적인 관점을 비판하기도 하지만, 그 출발은 주희나 주돈이 등 많은 사상가와 다르지 않다. 모두 의문을 갖고는 있지만 답하기 어려워 미루고 있는 문제, 근원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물음이 시작된 이래로 정답에 가까워지고 있는지는 아직은 미지수다.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영원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아마도 우리는 해답을 얻을 수 있을까?

 

a*****a 2008.12.19.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