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 준. 하. 그 이름을 소리낼 때 나오는 중저음(中低音)과 끄트머리의 개방음이 주는 여운 때문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영부영 다니던 학원 종합반을 때려치우고 동네의 월 4만원 짜리 독서실에 칩거했던 91년의 가을이었다. 독서실 한편에 쌓여있던 철 지난 『신동아』책더미를 헤집어보다 그의 기사를 발견하고 몇 번이나 혀로 그 이름을 굴려보았던 기억이 있다. 흑백 사진으로 남은 장준하의 풍채 좋고 수려한 외모도 그 삶에 대해 흥미를 갖게된 이유중의 하나였다면 부끄러운 고백이 될까. 내 나이 스무 살, 고등학교 졸업, 무직...... 재수생이라는 사회적 지위와 그 나이가 가져다주는 삐딱함은 충성이나 인내, 헌신 따위의 미덕보다는 반역, 혁명, 투쟁 등 거친 단어에 좀더 매력을 느끼는 법이다. 그런데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이런 어휘들을 그는 한 몸에 끌어 담고 있었다. 장. 준. 하. 「장준하, 그 의문의 죽음」. 당시 월간 『신동아』과월호에서 전율을 느끼며 읽었던 기사제목이다. 91년 가을쯤이면 ― 그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은 잘 알겠지만 ― 고문치사, 분신자살이란 말은 흔했어도 의문사란 단어는 아직 개념조차 정립되어 있지 않던 시절이다. 그가 생존했던 박정희 시대라면 악명 높은 <남산>, 즉 중앙정보부가 사람을 끌고 가 초죽음을 만들어 놨다는 얘긴 종종 들었어도 정치인·지식인을 암살했단 얘긴 들어본 적이 없는 터라 더더욱 흥미가 동했을 것이다.(어쨌거나 민완기자가 파헤친 장준하의 실족사는 의혹 덩어리였으며, 후일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라는 게 설치되었을 때 심도 있게 다루어진 걸로 알고 있다. 그러나 새롭게 밝혀진 사실은 없는 것 같다.) 나는 그 뒤로 자신의 본분을 잊고 한동안 우리 현대사의 이면들을 파헤치고 다녔었다. 십 여 년이 흐르고 이렇게 장준하의 전기가 새 단장을 해서 나왔다. 그 사이 조각조각 그의 이야기들을 읽어왔지만 통째로 그의 삶 전부를 보게 된 것은 이게 처음이 아닐까 싶다. 그가 일본군으로 강제 징병을 당하고 몇 달 동안의 고초 끝에 탈출, 중경으로 옮겨가 있던 임시정부까지 걸어갔다는 일화 ― 도착하자마자 광복군에 합류해 일본군과 싸우기를 간청했다는 일화는 장준하의 꼿꼿한 모습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너무나 부족함이 많을 정도다. 수많은 정파로 나뉘어져 각자의 세(勢)를 불리기에 혈안이 된 임시정부 요인들 앞에서 쏟아 낸 일갈(一喝)을 보자. "가능하다면 여기를 빨리 떠나 다시 일본군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 지금의 제 심정입니다. 제가 만약 일본군에 다시 들어간다면 꼭 그들의 항공대에 지원하고 싶습니다. 일본군 항공대에 들어간다면 저는 중경 폭격을 지원하여 여기 임정의 청사에 폭탄을 투하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그 많은 사선을 넘으며 이곳을 찾아온 것은 조국을 위하여 죽을 자리를 찾자는 것이지 결코 여러 선배들이 일삼고 있는 당쟁의 이용물이 되고자 해서가 아닙니다......"(본문 162쪽) 생명을 걸고 독립운동 한다는 임정요인들의 잘잘못을 추궁하는 데도 이렇게 준열할진대, 하물며 일본군 장교 다카키 마사오(후일 오카모토 미노루로 개명, 한국명은 박정희朴正熙)가 해방조국에서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을 때는 오죽했을 것인가. "대한민국 대통령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단 한 사람, 박정희는 자격이 없다." 물론 박정희 치하 18년을 통틀어 반독재 투쟁의 명언으로는 김영삼의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영원히 살기 위하여 잠시 죽는 길을 택하겠다." 등등이 꼽히는 건 사실이다. 허나, 김영삼이 그 말을 했을 때는 국민들의 불만이 그득했던 유신말기라는 것을 염두에 두자. 장준하가 박정희 무자격론, 밀수 왕초론을 들고 일어났을 때는 박정희에 대해 국민들이 아직 긴가민가 하고있던 60년대 중·후반이었다. 또한 서슬 퍼런 김형욱 중앙정보부가 버티고 있던 '까딱하면 목숨이 위태로운' 시대였기도 했다. 박정희가 총통제를 모델로 한 영구집권을 획책하리라고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던 시절, 장준하는 그의 집권욕을 꿰뚫어 본 사람이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직설적인 어법으로 만천하에 폭로하는 걸 서슴지 않았던 인물이기도 했다. 작금의 정치권이 늘 써먹는 수법대로, 그가 운영하던 <사상계>사 까지도 정권의 보복 음모에 휘말려 문을 닫게 되었으나 장준하의 입은 다물어지지 않는다. 무엇인가 굳은 결단을 내리고, 몇몇 동지와의 회합을 준비하던 그에게, 문득 뜻하지 않은 죽음이 찾아온다. 1975년 8월 17일...... 절벽에서 실족사한 시신치고는 너무나 깨끗하고 단정한 자세로. 우리 어렸을 때 읽었던 숱한 위인전의 주인공들은 지금 생각해보면 반신반인(半神半人)에 가깝게 그려졌던 듯하다. 어쩌면 그렇게 완전무결한 삶을 살 수 있었을까. 요즈음 유행처럼 쏟아지고 있는 전기(傳記)류는, 이젠 그런 찬양 일변도의 서술이 씨알도 안 먹힐 것 같아서 그랬는지 몰라도 인물의 단점까지도 포함시키고 있는 평전 형태라 그나마 다행이다. 이 『장준하』는 비교적 담담하게 그의 삶을 조명할 뿐, 과잉 예찬이나 비난은 삼가고 있다. 장준하의 용기, 의지, 청빈함을 여러 예화를 통해 칭찬하고 있지만, 가정에는 지나치게 소홀했던 면도 빼놓지 않아서 장준하도 살과 뼈로 이루어진 하나의 인간임을 환기시켜 준다. 이제 그 누구의 감동적인 삶을 전해 듣는다 해도, 내 자신의 삶이 '혁명적'으로 바뀔 만큼 영향을 받기는 어려운 나이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최소한 삶이 더 이상 썩지 않도록 하는 방부제의 역할을 그것들이 충분히 해 줄 것이라 믿는다. 내 나이 스무 살이었던 그 때......오갈 데 없이 서성이던 시절에, 장준하의 기사를 읽으면서 했던 결심을 이루지는 못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사상계>남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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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부터 장준하 장준하해서 그분이 누구신지 궁금하고 특히 의문사규명위원회에서 장준하선생의 약사봉에서의 의문사에 대해 집요하게 추적하는걸 보고 궁금해 그냥 사보았다. 일제시대부터 현대정치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그분의 삶이 녹아든 역사인줄은 정말 몰랐다. 이런분을 모르고서 역사에대해 이제껏 논해왔다는게 부끄럽고 죄스럽다. 늦었지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일제시대 그분은 탈영해 구절양장을 해 상해임정으로오지만 그곳은 또 하나의 사색당파가 있는 조선시대 한양의 풍경일뿐 의기란 없는곳이었다. 또 해방후 고국에 돌아왔지만 일제잔병들의 여전한 무장과 미국의 이간책으로 우리는 찢기고 밟히는데도 좋다고 독립군출신들은 기생집에서 술타령이나 하고 있다. 장준하선생은 이승만독재와 싸웠고 김구선생을 유일하게 존경했으며 장면정권에서 국토건설본부에서 우리의 미래를 개척한 경제건설계획을 손수짜셨기에 우리의 풍요가 있었고 3공의 경제발전이 실현될 수 있었다. 우리 먹거리의 숨은 공로자가 우장춘 박사시라면 우리경제발전의 숨은 공로가는 장준하선생이셨다 또 현재 민주주의의 산증인이며 우리가 누리는 자유를 가져다준 숨은 공로자가 장준하선생이라는걸 이제야 깨닫는다. 7.4남북공동성명이 10월유신을 위한 연막작전이고 김일성도 박정희에게 속았다니 참 어이가 없다.
장준하선생이 못푼것 두가지 첫째 정당은 곡 정치 자금이 그 생성과 유지를 좌우하고 그 같은 거액의 자금을 조성하자면 막후의 거래와 협상 또는 야합을 불가피하게 하는게 우리나라 정치의 풍토요 생리라 하는데 나 하나만 독야청청해서 무슨 소용이랴 근본을 고치지 않고는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
둘쨰. 지역감정 주위에선 지역감정이 태초부터 있는 것으로 오해해 어떤 지성과 지식을 가지고 있는 분들고 지역감정만 나오면 흥분을 하는걸 너무 자주 아니 일상사로 본다. 안타깝다.
박정희장군에게 왜 그는 우월감을 가졌을까 상대가 일본군대위일때 자기는 고초를 극하는 우국충정의 광복군대위였다는 자부심이 늘 저변에 깔려 있었기 때문일것이다.
몇가지만 인용하자면 4.19이후 군내 하극상사건의 주역이었으며 비상한 두뇌의 정보 장교 출신으로 알려진 핸섬한 인상의 김종필의 나이는 36세, 거기에 만고풍상을 겪고 앞에 불려와 앉은 장준하는 44세로서 최고 실권자 박정희보다 한 살이 아래였다. 장준하는 잠깐 국토건설본부의 자기 책상 서랍에 들어 있던 예비역 중령 김종필의 이력서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때 자기가 조금만 일찍 서둘러 이 사람을 불러다 면접했더라면 어떤 모양이었을까를 상상해 보았다. 페이지 329
장준하는 후일의 술회에서 민주당 정권이 너무 짧아서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무리를 하나도 못한 것을 아쉬워하고 5.16세력의 순서가 바뀐 경제 개발을 개탄하였다. 그 후 군사정권에서라도 그때의 그 일을 그대로만 계승하여 추진하였던들 오늘날의 건설이라면서 농촌은 버려둔채 도회 건설을 먼저하며 국가 중흥이니 조국 근대화니 하고 떠들어대는 망발은 없었을 것이다. 장준하가 심혈을 기울였던 국토건설본부는 군사 정부에 그대로 접수.승계되었음은 앞서 밝힌 바 있거니와, 그것은 곧바로 국토건설청이 되고 이어서 건설부로 되어 오늘날에 이른다. 그리고 거기에서 청ㅅ6ㅏ진이 떠졌던 계획 경제 개발의 안은 5.16후 발족하는 경제기획원의 모태가 되고 있다.
지금은 세상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때만 해도 사람들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진실들을 그는 선거전에서 마구 내뱉는다 "박정희씨는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군 장교가 되어 우리의 독립 광복군에 총부리를 겨누었으니 이런 인물이 우리나라 대통령으로 있는 것은 우리의 국가와 민족의 수치입니다. 또 박정희씨는 국민을 물건으로 취급하여 우리나라 청년을 월남에 팔아먹고 있고 그 피를 판 돈으로 정권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또 박씨는 과거 공산주의의 남로당 조직책으로 임명되어 남한에서 지하조직활동을 한 사람이며 조직원 동료를 팔아 희생키시면서 자기 한 목숨을 산 사람입니다." 이런 유세를 듣는 이들은 모두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과연 저러고도 무사할까 싶어 박수조차 잊은 채 물을 끼얹은 듯 듣고만 있었다. --- 대단한 배포다 이러니 그런 큰 일들을 평생 해내실 수가 있었지 존경...
이 시대의 청백리요 딸깍발이
대학교수건 법조계의 고위직간부를 했건 퇴직후 후학들보단 자기밥그릇 챙기기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본다. 아니 거의 다다 장준하선생님의 삶을 보자. 내가 만약 고위직이라면 밑에 사람들에게 꼭 돌리고 싶은 책 두권 하나 침묵의 봄 둘 장준하평전 통일이되면 꼭 읽어야할 통일세대의 책이다.
이태영이 달려와 갑자기 미망인이 된 그 부인의 손을 붙들고 울면서 미성한 자식들을 데리고 어떻게 살 거냐고 통탄하자 몽유병자 같이 된 김희숙은 남의 이야기를 하듯 중얼거렸다. "언제 저 양반이 생활비 가져온 적 있나요." 장준하가 67년 대통령 선거 유세시 연사로 전국을 누빌 때 박순천은 후보인 윤보선과 함께 그의 셋집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가서 보니 장준하는 부산 방면으로 유세를 나가 없고 부인 김희숙이 헝겊으로 조화를 접고 있었다. "그걸 뭣에 쓰려고 접는 거요?" 유보선이 의아해서 묻자 김희숙이 사실대로 대답했다. "팔려고 접습니다." 그 말을 들은 윤보선과 박순천은 이 집의 형편이 그렇게까지 된 줄은 몰랐다며 함께 김희숙을 붙들고 울었다는 일화가 있다. |
| 장준하가 남긴 것은 너무나 많다. 그리고 그 분은 우리나라를 지키고자 했다. 너무나 힘든 시기에 사셨다. 우리나라가 해방되면 무엇이 문제인가를 알았다. 남북이 분단될지도 모른다는 거... 우리가 차라리 직접 나섰더라면 그렇게 억울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게 힘들게 싸워왔던 것들은 원자폭탄 2개로 박살나고 말았다. 우리나라가 해방된 것은 좋았으나 정말 시련이였다. 북은 소련이 남은 미국이... 이렇게 갈라진 것을 우린 보고만 있어야 했다. 김구선생님과 막고자 했다. 그러나 김일성과 이승만은 지들 밥그릇이나 챙기기 바뻤다. 이승만은 너무 비겁쟁이였다. 어떻게 그런 사람이 우리나라 대통령을 했는지 원.... 한숨만 절로 나온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였으니까.... 김구 선생님 암살 당하시고 장준하 선생님 고생하셨던 것 같다. 마음이 괸장히 아팠을 것이다. 지금 그 분이 이루어 놓으신 거...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피를 흘리신 분들에게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은 받기만 했다. 독립투쟁을 하면서 정말 그 분들 가족은 쥐죽은 듯이 살아야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해택받아야 할 명단에 친일파 후손 이름이 들어가 있다. 정말 한심한 짓거리다. 그렇다해도...그 정신이라도 알고 있을까... 알아야 한다. |
| 위인전도 그렇고 평전도 그렇고 인물을 다룬 책들은 그 어떤 책들보다 흥미롭다. 우선 어느 하룻밤도 편히 다리를 뻗고 잠들 여유도 허락되지 않는 시대 속에서 그들처럼 생별의 꼭지점에서 애국이냐 배국이냐를 결정해야 했던 그 삶을, 편한 시간을 내어 이토록 한 권의 소설을 읽듯, 한 편의 영화를 보듯 통째로 관망할 수 있는 나의 생활은 그들에게 비추었을 때, 얼마나 큰 사치일까. 장준하라는 인물의 손을 잡고, 그와 함께 광복군이 되어 보고 "사상계"라는 잡지를 만들러 뛰어다니고 군부독재에 맞서 거리에서 투쟁을 하며 굴곡의 역사 속을 순교자적 희생정신으로 살았던 나는 그와 함께 1975년 8월, 그가 태어났던 달에 그와 함께 의문의 추락사로 주검으로 발견된다... 내 나라, 내가 태어난 국가에 대한 정체성이라는 것이 내게는 대체 어느 정도의 농도를 유지하고 있을까...끝없이 묻게 되는 책이다. 일찌기 나라 하나 지켜내기 위해, 당할 일은 거의 당해본 나라에서 국민의 삶이란 역사가 증언하는 인물들의 삶의 공통점만 들여다 보아도 한권의 역사서가 되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그들의 삶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열정이고, 용기이고, 실천이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그들의 위대함이란 짧게 말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스스로 결단하는 일에 대한 정확한 판단력이 있은 후라야 열정도 열정이고 용기도 용기가 되는 것. 다분히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사고의 영향이라 해석되는, '절대선도 절대악도 없다.', 또는 '꼭 선할 이유는 뭔가?', '착한 것은 손해다-바보다.'라는 식의 물질본위주의적이고 말초적이기 만한 가치관들이 팽배해가는 요즘의 의식들에 대해 우리가 심각히 생각해 봐야 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꼭 정의를 내릴 수는 없지만, '양심'에 비추어 좋은 일이 선한 일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무런 고뇌도 없이 그저 편한 길로, 중간길로만 걷고 싶어하는 지금의 냉소주의적 가치관을 내림으로 물려주는 역사는 희망이 없다. 왜냐하면, 존경할 만한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 없는 나라가 기록하는 역사라는 것이 너무나 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분명 하늘이-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는 때가 있는데, 바로 장준하 같은 인물을 대하게 되면서이다. 하늘은 분명 마땅한 때에 마땅한 사람을 시켜 일하게 한다는 생각을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기 때문에. 만약 그때에, 이 나라에 장준하가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는 어땠을까라는 물음이 꼬리를 물면서 아찔해지는 순간이기도 하고... 물론 흠없이 순전한 삶을 살다간 인간이란 세상에 없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유, 인간이기에... 모두가 찬사해 마지않는, 우리 역사의 등불과 같은 존재라 일컬어지는 장준하의 삶에서도, 일평생 뜨거운 가슴을 잃지 않았던 문익환도, 하물며 김구의 생애에서도 순간의 선택에 의한 조금의 흠결은 차라리 그들이 완전한 인간이 아니었다는 데서 내게는 더욱 큰 도전이 되어 오기도 하고, 분명 그들이 나와 같은 인간으로 태어나 같은 사람으로만 살지 않았기에 존경받아 마땅하다는 확실한 명제를 만들기도 한다. 모든 것들은 시간에 의해 덮히고, 시간이 쌓아둔 먼지같은 그 흔적들은 꼭 역사의 평가를 받게 된다고 봤을 때, 같은 상황에서 비겁한 눈을 굴리며 침묵하는 사람과 묵묵히 실천한 사람을 같은 잣대로만 잴 수는 없다는 결론은 천만번 당연하다. ...동족을 일본인에게 팔고, 피로써 일본에(천황에) 충성을 맹세한 입술로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자유민주주의를 주창했던 박정희라는 사람의 딸이, 일본 잔재청산을 부르짖는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바로 들고 더 큰 목소리로 나랏일을 걱정하는 일이 버젓이 일어나는 나라가 아직 우리나라라는 생각을 할 때마다 나는 이 나라가 안쓰럽기만 하다. 그러나, "이것 역시 곧 지나가리라!" 다음 세대가 오고 있거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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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항일독립투사, 민주화 투쟁의 선봉장, 재야대통령 그리고 사상계. 하나로 엮이지 못했던 단어들이 비로소 장준하, 이름 석자 아래에 연사필름처럼 스쳐 지나간다.
현대사를 산 인물의 평전은 고전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진행형이다. 대학교 때 읽었던 이상재 평전에서도 느낀거지만, 그러나 불과 반세기 전의 대한민국은 마치 안드로메다 같아 현재와 동일선 상에 놓고 생각하기 어렵다. 특히 한국 현대사는 급격한 흐름과 변화로 인해, 사람이 신념대로 살 수 없는 토양이었다. 아니, 신념대로 살아도 어제와 오늘의 그 신념에 대한 평가가 극과 극으로 달라져 버리던 세월. 어제의 아군이 내일의 적이 되는, 신념대로 살기에는 옳고 그른 것이 애매했던, 말 그대로 '격동의 50년'. 옳고 그른 것에 대해 지금의 기준으로 판단할 수 없었던 것도 그렇고, 모두가 선의로 행동해도 최악의 결과가 나오고 마는 아이러니가 그렇다.
장준하 선생이 영향을 받았다는 네비어스 교육법(낯선 이국의 선교인이 그 나라와 지방의 인습, 전통, 가치관, 민족성 등을 존중하고 인정하며 그 토대 위에서 교리와 교육을 펴나가자는 취지의 교육)만 해도 그렇다. 강압적이고 강제적인 교육 방식보다 네비어스 교육방법이 더 좋은가? 라고 물어보면, yes.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다양성을 논하고 존중하는 가치관을, 비강압보다 더 옳다고 판단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네비어스 교육법은 '선교'와 '순화'라는 커다란 틀 안에서의 방법론이라면, 우리는 그보다 고차원적인 '다양성의 존중'을 논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각설하고. [장준하, 민족주의자의 길]을 다 읽고 든 생각은 장준하 선생이 정말 인물은 인물이었구나-라는 것이었다. 신념을 가질 줄 아는 것, 표현할 줄 아는 것, 주장할 줄 아는 것이 그랬고, 룸펜에 그치지 않고 (지저분할지라도) 직접 전장에 뛰어들 줄 아는 용기가 그랬고, 30여 년 후인 지금, 21세기를 내다 본 선견지명이 그랬다. 그가 살면서 겪어야 했던 숱한 위기에서 귀인을 만날 수 있었던 것 역시, 하늘이 낸 사람은 하늘이 돕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종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독립운동가와 민주항쟁의사. 워낙에 많은 것을 이루고, 많은 것을 꿈꾸셨던 분이기도 하고, 선생이 사셨던 시대가 한 두 마디로 요약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나도 나누어서 정리해 보고 싶다.
1. 민족주의자
개인적으로, 1910년대에 태어나 1920년대를 살고 1930년대에 독립운동을 했던 독립운동가들을 그렇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의 몇 백배는 더 존경한다. 1910년대는 이미 일제의 억압과 수탈이 시작되었고, 그 분들이 10대를 보내는 1920년대는 각종 '일체화' 시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치관과 자아가 생성되고 다져질 나이에 '신민통치'를 받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민족의식을 갖는 것은 몇 배는 더 어려울 것이다. 장준하 선생이 그런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식민지배를 '원래 그런 것'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게다가 '그렇다'에서 끝나지 않고 직접 실천에 옮기게 된 것도 그에게 직접 몸으로 보여준 아버지의 역할이 컸다. 그게 비록 하느님의 힘에 의한 것이라고 쳐도(...), 그래 역시 가정교육이 중요하구나-_-
언제나 교과서나 역사책에서 글로 접하니까 쉬워보이지, 그 시대의 독립 운동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다. 장준하 선생이 임정 요인들을 만나기까지의 여정도 마찬가지로 길고 험했다. 존경하던 교장이 신사 참배를 거부하여 해임되고, 일본에 유학 갔다가 학도병에 징집되며, 중국으로 차출되자 목숨을 건 탈출을 하게 된다.
비록 선생이 찾아갔던 그 임정청사는 아니지만, 얼마 전 상해에 있는 임정청사를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일본'이라는 공동의 적에 대해 중국은 아군이었으며, 임정은 중국 정부에서 지원하는 재정 원조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후에 중공군은 6.25 분단의 말초를 제공한 외세가 된다. 이러한 역사적 흐름을 제 3자의 입장에서 볼 수 밖에 없었던 나로써는, 임정청사 안에 무수하게 반복되고 있던 '중국/상해의 동지들에게 감사한다'는 말들이 거슬렸고, 삐딱해질 수 밖에 없었다.
다른 이유였지만 장준하 선생도 임정에 크게 실망하게 된다. (이 부분을 읽은 후, 나도 크게 실망했다-_-) 임정때부터도 당쟁은 개판이었구나. 정식 정부도 아니고, 임시정부. 그 요인이 얼마나 된다고 그 속에서 당을 다섯 개도 넘게 잘라먹으며, 중국 정부의 재정적 지원에 기대 살면서 제 편 만들기에 돈 쏟아붓는 꼴 하며, ..................후우........... 이광수, 최남선 등 한 때 민족주의자였던 분들이 무정부주의자가 되어버린(한간에서는 기회주의자가 됐다고도 하지만), 이유를 알 것 같다. 사실 남의 나라 땅에 가서 원거리 항쟁을 하신 분들이고 존경해야 마땅하나, 한 소리 하고 싶구나.
니들이 그 모양으로 한게 지금까지 오는거 아냐!!!!!!
아. 몰랐던 사실도 알았다. 연대가 민족연세가 못된 이유. 연희전문학교가 신사 '참배'를 '참례' 정도로 편법 절충하여 폐교만은 면했다는 사실.
2. 민주주의자
민주주의자로서의 장준하 선생은 '사상계'로 요약된다. 학부 때 어떤 수업에서였나... 완전한 객관은 없다, 라는 교수님의 한 마디가 굉장히 인상깊었던 기억이 난다. 장준하 선생도 이렇게 말씀하셨지. [언론의 중립이란 있을 수 없다. 언론은 언론운동이다.] 라고. 이는 신영복 교수의 [신뢰집단] 개념과 비슷하다고 생각된다. 언론은 대중에게 방향성을 제시하는 역할을 해야 하며, 따라서 절대적인 중립성이란 있을 수 없다는 거다. 그리고 그 밑바탕에는 민주주의가 있다. 여기에서의 민주주의는 공론의 장에서 다양한 의견의 교환을 통해 방향성을 잡아 나가는 것. 즉 외부의 억압과 강압이 없는 완전한 공론의 장과 건강한 토론을 통해 탄생하는 것, 혹은 그 탄생을 돕는 것이 신뢰집단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민주주의는 어떤가. 형식으로써의 민주주의와 이념으로써의 민주주의가 있을 때, 우리는 이념으로써의 민주주의는 추상화 하기 바쁘고, 형식적 민주주의는 입맛에 맞게 변형시키기 바빴다. 이럴 때 귀담아 들어야 하는 장준하 선생의 연설 중 일부.
"박정희 씨는 대통령 선거에서 유세 때 '구정치인들의 민주주의는 가식된 서구적 민주주의'이고 자기의 민주주의는 '민족적인 또는 한국적인 민주주의'라고 했다. 그리고 김종필 씨는 어제 이 자리에서 이번에는 또 더욱 무슨 소린지 모를 '자유민주주의가 바탕이 된 민족주의' 운운했다. 도대체 민주주의나 민족주의 위에 왜 그런 긴 관사들이 따로 붙어야 하느냐 말이다."
맞는 말이다. [등불], [사상계], [씨알의 소리] 등을 통해 진화해 온 장준하 선생의 민주주의는 점점 더 간결한 직선이 되어가는데, 현실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배배 꼬이고 있으니. 쯧. 민주항쟁 때 연사로 뛰던 장준하 선생에게 학생회가 주었던 아젠다들이 "민족주의와 혁명 정부, 대학생의 사회 참여, 언론 자유와 민족주의, 제3공화국의 민주적 전망"이었다는 것을 보고 다시 한 번 실감했다. 30여년 간 대한민국은 제자리 걸음 중인거냐. 응?
간결하다고 그 해석이 추상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선생의 '민주주의'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국제연구소를 사상계사 안에 설치하면서, 사상계사는 국가 정책의 산실 같은 국책 연구기관 역할을 했고, 장준하 선생 본인은 국토건설본부를 맡아 아래로부터의 국토 개발 계획, 즉 농촌에서부터 도시로 올라가는 형태의 plan을 짜기도 했다. 물론 박정희가 다 말아먹었지만. 어쩔 수 없는 출발이기도 했고, 유진산이 신민당 당수가 되면서 여당과 밀월을 시작하자 "집권 의지와 당성이 사라진 정당에 더 있을 이유가 없다"고 멋진 한마디를 날리며 뛰쳐나오기는 했지만, 국회의원으로 직접 정치판에 뛰어들기도 했다.
물론 장준하 선생의 이러한 활동들이 가능했던 것은, 재야대통령이라고도 불릴 만큼 민중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문제의식이 있고 대안이 있어도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무 소용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국민 대다수가 '아니다'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그게 아니게 되는게 아니란 말이다. '한비 사카린 밀수 사건'의 내막을 알게 된 민중은 시위에 나섰다. 삼성 비리? 대운하 건설? ....................................후우............
어쨌든. 보다 현 시점과 가까워지는 현대사로 올수록, 가슴이 답답해진다. 지금 이 사회의 모순과 비상식의 시작이 그 때만 같아서.
임시정부 당면정책 14개 조항의 마지막 항은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와 매국적에 대하여는 공개적으로 막중히 처벌할 것] 이었다. 이 조항만 철저히 지켜졌더라면, 굴욕적인 한일 차관은 없었을거고, 군부독재도 없었겠지. 그러면 비로소, 태국인들처럼 'That's just history'라고 웃을 수 있을지 모른다. 덤으로, 1968년 난데없이 제정되어 달달 외워야 했던 '국민교육헌장'따위. 볼 일도 없었겠지. (나 국민학교 때 교과서 앞에 떡 하니 붙어있던 국민교육헌장에 쫄았던 기억이 선명하다. 다행히 우리 때는 외우라 시키지는 않았지만.) 김구, 이승만이 황해도 출신임을 따지는 사람이 있었던가. 박정희가 독재와 영구집권의 수단으로 지방색을 갈라 놓았고 그 폐해는 오늘날까지 가히 민족적인 차원의 것이 되어 버렸다. 선거 때마다 지방색에 놀아나는 일 따위 없었겠지.
아. 딴 얘기지만, 고대가 잘 뭉치는 이유를 알았다. 유진오 전 고대 총장 아래에서 민주항쟁을 주도했던 고대. 명박이만 거기 출신이 아니라면 좋으련만.. 그리고 또 하나 놀라운 것. 송복 교수가 사상계 기자였나!! 근데 왜......?
3. 마무리
지하철에서 장준하 책을 보고 있을 때, 어느 어르신이 쯔쯔 혀를 찼다. 좌파, 공산당, 빨갱이라는거지. 음. 보자. 좌파는 경제학에 무지하다고들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장준하 선생이 좌파라고 하면 넌센스도 던져버릴 넌센스겠지만, 지금의 기준으로는 그렇게 얘기할 사람들 분명 있으므로. 선생은 사상계를 출판하면서, 상품의 가치는 화폐로 표시된 가격으로 평가된다는 경제학적 논리를 철저히 지켰다. 그네들이 '빨갱이'라고 선생을 매도한다면, '상품의 가치'와 '인간의 가치'를 혼동하기 때문일 것이리라. 인간을 상품으로 치면서(상품이라는 말이 거슬리면 리소스라고 하자), 그것이 곧 경제적인 것처럼 혼용되기 시작한 현대의 가치관을 탓할 일이지, 사람을 중시했던 선생이 매도당할 일은 결단코 아니다. (물론 지금 회사에서 공공연하게 '리소스'를 운운하는 내가 떳떳하게 할 얘기는 아니다. 다만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자고 늘 다짐할 뿐이다. ) 이 책은 10.26 사태 뒤에는 미국이 있다는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신빙성 있는 추측으로 마무리된다. 결국 우리나라 역사에서 대한민국 국민이 제 역할을 해 온 부분은 미미한건가, 싶어 답답한 마음으로 책을 덮는다.
덧붙이자면. 글을 맛깔나게 써 주신 박경수 소설가님께 감사.
[민주당의 조병옥 사망, 진보당 위원장 조봉암 사망, 이렇게 다른 사람은 허망하게 잘도 죽는데 살만큼 훨씬 살고도 남은 이승만은 불사신인 것 같았다.]
이 부분은 최고였어요!
마지막으로 내 마음을 흔든 함석헌 선생님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의 일부를 발췌한다.
우리나라 시대시대의 정치업자 놈들은 예나 이제나 한결같이 그저 짜먹으려만 들었다. 민주주의의 물결이 세계를 뒤덮을 때 우리만이 그 물결을 타지 못한 것은 우리나라의 씨알이 양반이라는 이리떼보다 더 심히 짜먹는 놈들의 등살에 여지없이 파괴를 당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서 해방이 됐다고 하나 참 해방은 조금도 된 것 없다. 도리어 전보다 더 참혹한 것은 전에 상전이 하나던 대신 지금은 둘셋인 것이다. 일본시대에는 종살이라도 부모형제가 한 집에 살 수 있고 동포가 서로 교통할 수는 있지 않았는가? 지금은 그것도 못해 부모처자가 남북으로 헤어져 헤매는 나라가 자유는 무슨 자유, 해방은 무슨 해방인가. 남한은 북한을 소련, 중공의 꼭두각시라 하고 북한은 남한을 미국의 꼭두각시라 하니 있는 것은 꼭두각시뿐이지 나라가 아니다.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다. 그러니 6.25는 꼭두각시의 놀음이다. 민중의 시대에 민중이 살아야 할 터인데 민중이 죽었으니 남의 꼭두각시밖에는 될 것이 없지 않은가. 6.25 전쟁은 미국을 배경으로 한 이승만과 소련, 중공을 배경으로 한 김일성의 싸움이었지 민중이 한 싸움은 안다. 그러니까 서울을 빼앗겼을 때 저 임진왜란 때 선조가 그랬듯이 이승만도 국민은 다 버리고 민중 잡아 먹고 토실토실 살이 찐 강아지 같은 벼슬아치들과 여우 같은 비서 나부랭이들만 끌고 야밤에 한강을 건너 도망을 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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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숙연해 지는 책, 『장준하』는 장준하 개인의 평전이라기 보다 우리 시대의 역사라고 보는 편이 오히려 맞을지 모른다. 그는 진흙탕 같은 우리 현대사의 연못에 핀 연꽃 같은 존재로, 일제시대에서부터 70년대 중반까지 치열하게 삶을 살아간 민족의 지도자이다. 이 책은 1995년에 『재야의 빛 장준하』란 제목으로 출판된 것을 내용을 보완하여 재집필한 것으로, 장준하의 사상계 시절부터 함께 같이 일해 왔던 소설가 박경수의 평전이라서 사실감이 물씬 피어오르곤 한다.
장준하는 부친 장석인이 독립운동으로 인해 일본 경찰에 쫓겨 온 가족이 삭주(朔州)로 이사함에 따라 어렵게 어린 시절을 보낸다. 그 후 그의 삶은 크게 세 분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첫째가 20대였던 젊은 시절 일제 하에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광복군에 참여한 때이고, 둘째가 1953년 『思想界』를 창간하여 정부의 부정 부패와 독재에 항거한 때이며, 셋째가 국회의원이 된 이후 신민당을 탈당하여 무소속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유신 독재에 항거하며 투쟁한 민주화 운동에서 헌신하던 때이다.
그에게는 참으로 많은 일화들이 있었다. 그것은 장준하의 삶이 올곧게 민족과 민주주의를 위해 전 생애를 불태운 것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나타난 일들이었다. 신안 소학교의 교사가 된 그는 여학생의 머리를 가위로 잘라 단발령을 내린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과수원을 뒤엎고 새로운 교사를 짓는 일까지 하고자 하는 일은 반드시 해내고 마는 성격으로 인해 도사 선생이라는 별호를 얻는다. 일본군 학병 시절에는 동상이 걸린 왼손 엄지손가락을 마취도 하지 않은 채 난자질을 당하듯 수술하면서도 아프다는 소리 한 번 지르지 않아 지독한 놈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광복군 훈련소 시절 같은 반원 중에서 난동을 부린 반원이 중국 육군 형부소로 이감을 가게 될 때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들을 구명하면서 순교적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장준하는 『사상계』를 자신의 분신처럼 여겼다. 그는 3·15부정선거에 다한 집권당의 횡포를 규탄하는 것을 필두로, 5·16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한·일 굴욕 외교 반대투쟁위원회의 초청연사로 전국을 순회하며 박정희 정권의 매국(賣國)외교를 규탄했으며, '특정재벌의 사카린 밀수의 진상 폭로, 야권의 정치 지도자에 대한 '사자회담(四者會談-유진오·윤보선·이범석·백낙준)' 주선 등 현대 정치사에 굵직굵직한 족적을 남긴다. 이러한 『사상계』였기에 정부의 모진 탄압을 받게 된다. 그 탄압은 반품사태. 책이 팔려 나갔다가 그 다음 월간지가 나올 때를 맞춰 반품이 무더기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인쇄비는 인쇄비대로 나가고, 반품으로 인해 자금이 돌지 않아 서서히 고사시키는 전략이 반품이었다. 게다가 세무조사를 받아 억울한 중과세를 당하기도 한다. 그런 와중에 그는 민주화 운동의 길을 연다.
그의 민주화 운동은 그리 길지 못했다. 1973년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그는 10월 유신을 반대하는 선봉에 선다. 그것은 말 그대로의 운동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볼 때 사투라 해야 옳은 일이다. 유신이 선포되고, 통일주체국민회의가 만들어지면서 종신 대통령이 되려는 야욕을 표방하는 박정희 정권에 마주하여 재야의 대통령으로서 장렬히 투쟁한 삶이었다. 박정희가 '장준하를 그냥 두고서는 대통령을 못해 먹겠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그는 박정희의 천적이었다. 그런 장준하는 1975년 8월 17일 포천군 이동면 약사봉에서 의문은 죽음을 맞는다. 그의 죽음에 애도하는 수많은 지기, 재야 인사, 정치 지망생과 학생들이 명동성당을 가득 메웠고, 아직도 『사상계』동인은 매년 그가 잠들어 있는 파주시 광탄면의 묘소에서 그를 추모하는 행사를 열고 있다. [인상깊은구절] "우리 『사상계』의 장준하 사장을 후보로 합시다. 어때요?" 물론 하도 이야기가 난항을 거듭하니까 의표를 찌르느라 나온 말이었다. 그러나 이 말이 새어나가 훗날 장준하에게는 '재야 대통령'이라는 별칭이 붙게 된다. |
| 중학교 때였을 거다. 우연하게 도서관에서 접하게된 '장준하'선생님의 위인전기, 내 기억으로는 청소년을 위한 책이어서 그런지... 무척 얇고 또한 동화적인 그림까지 곁들여 한손에 쏙 들어오는 책이었다. 그래서 더욱 그 자리에 한권을 다 읽을 수 있을런지 모른다. 내 심장을 뜨겁게 만들었던 바로 그 책의 중인공, 내 머리 속 깊은 곳에서 숨쉬던 그 분. 그리고 10여년의 시간이 흘렀다. 비록 그 때 그 책은 아니었지만... 10여년 세월 속에 사회의 첫걸음을 준비하는 나에게 순수했던 청년의 다짐을 다시금 불러일으킨 책이 있었으니... 바로 '장준하, 민족주의자의 길'이었다. 끝없는 광야의 폭염을 뚫고 장정 6천리의 생사길을 넘은 애국 청년의 삶을 시작으로 진정한 민족주의란 수식어가 필요 없다며 '민족적 민주주의'와 '한국적 민족주의'의 가식과 독재의 또 다른 표현이라며 부르짖던 지정한 민족주의자, 형식적인 언론의 중립론을 서슴없이 파기하고 항상 민중의 편에서서 그릇된 정치로부터 그 민중을 보호하고 치자의 비정을 가차없이 고발하고 또한 민중을 대변하는 것이 본질이라는 언론인. 합병증으로 인해 손가락이 3분의 1이 들어갈만큼 퉁퉁 부어오른 자신의 다리를 보며 목숨이 위태로운 중병에 걸린 상태가 오히려 분열되어 결집 못하는 민주 회복 세력의 설득에 효용이 있다면서 좋아하는 그의 살신 성인. 끝없는 투쟁의 삶 속에서 보다 새로운 빛이 되어 우리의 앞길을 밝혀주기 위해 잠시 숨은 그 였기에 아직까지 영원히 감동이자 삶의 지상으로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특히 옥중 출마 중 그의 정신적인 벗인 함석헌 선생님의 찬조 연설은 나의 두 눈과 가슴을 뜨겁게 물들게 해주었다. 흙탕물 같은 우리 현대사의 연못에 핀 연꽃 같은 존재, 순교자적인 희생정신으로 내 삶의 방향을 일으킨 그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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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장준하가 생전에 남겼던 글과, 교유했던 지인들의 저술과 생생한 증언들을 토대로 장준하의 일생을 매우 충실하고 구체적으로 서술했다. 장준하의 민족과 조국에 대한 신념과 그에 따른 행동, 그리고 격변의 현대사를 헤쳐나가는 참 지식인의 고뇌와 인간적인 모습 등이 매우 극적이면서도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사상계』의 발행인, 장준하> '사상계'는 어두운 시절 함석헌 등 진보 지식인들과 민중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였고, 그 한복판에 장준하가 있었다. 이승만 정권 시절인 1958년 독재정권을 정면으로 비판했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함석헌의 글로 인해 구속과 탄압을 받게 되지만 오히려 '사상계'는 더 유명해졌다. 4.19혁명의 이론적인 토대는 사상계가 한 역할이 크다. 5.16군사정권하에서도 집권세력의 탄압은 장준하 개인에 대한 매도에서 시작하여 사상계의 판매방해 및 심각한 경제적 손실초래로 이어졌다. 장준하는 경제적, 사법적 압박에도 국회의원에 출마하게 되는 1967년까지 사상계를 이끌고 갔다. 계속되는 정권의 탄압으로 이미 한계에 도달한 사상계는 1970년 5월호에는 김지하의 시 '오적(五賊)'을 실었다가 당국으로부터 폐간이라는 사형선고를 맞았다.
<실천적 민족주의자,="" 장준하=""> 만주에서 탈출을 기획하며 학도병으로 훈련 받던 시절, 동상에 걸린 엄지손가락을 마취제 없이 다섯 군데를 째는 과정에서도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인 앞에서 아프다고 소리 지르는 것은 죽기보다 싫은 치욕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사선을 넘어 임시정부에 도착하였으나, 막상 장준하를 반긴 것은 임정내의 여타의 파벌싸움이었다. 장준하는 정치논쟁이 아닌 싸우다 죽기를 갈망하며 한반도 침투 공작대에 자원한다. 철기 이범석이 투입직전에 유능한 인재를 남겨둬야 한다는 목적으로 장준하를 남기려 하자 장준하는 개인사물을 모두 태우고 이범석을 설득한다. 그때 광복군이 투입되었다면 우리의 역사도 지금처럼 외세에 휘둘리는 않았으리라.
장준하가 언론인이 아닌 정치인으로서의 변모는 박정희 비판으로 인하여 구속 수감되었을 때부터이다. 1963년 유신철폐 백만인 서명운동까지 장준하는 정치인이라기 보다는 타협하거나 굴복하지 않는 재야인사로 활동했다. 유신헌법을 통해 영구집권을 꾀했던 독재정권과의 끝없는 싸움의 과정에 OSS(CIA의 전신)의 특수훈련을 받았고 산을 능수능란하게 탔던 장준하는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의 추락사로 유명을 달리했다. 제국주의의 압제와 독재의 핍박 속에서도 권력과 타협하지 않고, 오직 민족 자존과 민중의 생존을 위한 올곧은 살아온 장준하의 삶을 통해서 죽지 않는 민족혼을 깨우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 보인다. [인상깊은구절] 내 영혼 저 노을처럼 번지리 겨레의 가슴마다 핏빛으로 내 영혼 영원히 헤엄치리 조국의 역사속에 핏빛으로 실천적> |
| 이 리뷰는 저자의 이전 판을 읽고 쓴 것입니다. 최근에 구입한 책인 문익환 평전을 읽다가 420쪽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장준하 선생은 저보다 나이로 말하면 몇 달 늦고 학교로 말하면 제 동생과 한 반이어서 3년 후배지요. 늘 동생처럼 생각해 왔고 그러다가 해방 후 서울에 와서 같이 지내면서 보니까 너무너무 내 눈이 미치지 않을 정도로 앞서가고 있는 대 선배라고 하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문익환은 장준하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장례위원장을 맞게 되었고 그의 죽음을 땅에 묻어서는 안 된다, 그래 장준하가 못한 일을 내가 해 주마 하는 심정으로 민주화 운동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한 유명한 인터넷 서점에서 장준하라는 석자를 입력시키고 보니 별로 많은 책이 없었다. 좀 실망이 되었다. 그 중에서 장준하에 대한 평전은 단 1권뿐(다른 한 권은 평전이라고 보기 어려웠다)이었다. 그런데 그게 오래 전에 읽은 책과 목차가 같았고 저자가 같아서 책을 구입하지는 않고 다시 오래된 책을 읽어 보게 되었다. 집안 내력이나 환경 그 모든 것이 애국의 길로 가게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물론 선생의 성품으로 보아 당연히 그러했으리라. 젊은 시절 중국의 선구적 작가 노신에 심취한 것만 보아도 그렇다. 수학여행을 일본으로 가는 것으로 결정될 순간에 제 나라 안의 명산도 보지 못하고 남의 나라 상징산부터 구경하겠다는 것인가 하면서 이건 수학여행이라기보다 우리 신성의 수치다라고 했다고 한다. 물론 수학여행은 가장 희망자가 적었던 금강산으로 가게 되었고. 저자는 이러한 신성의 수치라는 갈파한 어법이 후일에 ‘일본군 출신이 대통령이 되는 것 나라의 수치’라는 사자후로 부활한다고 한다. 리영희 교수의 책이었던가. 세계적으로 2차 대전 이후에 독립하면서 독립운동을 하지 않은 사람이 대통령이 된 곳이 우리나라와 베트남 뿐이라고 했던 것 같다. 정말 이 점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니 진정한 독립이 되지 않은 것 아닌가. 나는 박정희 정권 하에서 교육을 받은 결과로 가장 부끄러운 것이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도 나오지만 1968년 12월 5일에 ‘국민교육헌장’이라는 것을 줄줄 외웠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1972년에 통일주체국민회의가 되면 통일이 되는 줄 알았다는 점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 국민교육헌장이 일본 천황의 교육칙어를 빼닮았다는 이야기도 있었다고 한다. 또 하나 놀라운 일은 얼마 전에 서울시가 철거 운운한 이순신 장군 동상이 1968년 초에 세워졌다고 하는 것이다. 어쩌면 나로서는 위안이 되는지 모른다. 장준하 선생도 1972년 7월 4일 소위 7ㆍ4 남북공동성명이 나오자 ‘이 7ㆍ4 성명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거울이다’ 하면서 두말 없는 찬사를 보냈다고 하니 말이다. 물론 장준하 선생으로서는 통일에 대한 염원이 무척 크기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다가 김삼웅이 장준하의 충실한 추종자라고 나와서 김삼웅이 지은 친일파 관련 책도 두 권을 다시 읽었다. 장준하의 사망과 관련해서도 그 험한 암벽을 굴렀는데도 상처가 하나 밖에 없고 얌전히 두 손을 가슴에 얹었으며 편안한 자세로 누워 숨질 수가 있을까 하고 저자는 안타까워 하고 있다. 지금도 유족들은 그간 장 선생이 75년 유신정권에 맞서 흩어진 재야와 야당을 통합하겠다며 제2의 100만인 개헌 서명운동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의문사한 점, 추락사임에도 불구하고 사체 상태가 별 손상 없이 깨끗한 점, 사고 목격자인 김모 씨의 사건경위 설명이 납득하기 어려운 점, 당시 중앙정보부가 장 선생의 동향을 밀착감시하던 상태였다는 점 등을 들며 타살 의혹을 제기해왔다고 한다. 이 평전을 읽으면서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민족과 국가를 생각하는 지도자의 가는 길을 배울 수가 있고, 어려운 시대에 한 인간이 양심의 명령대로 올바른 길을 가는 것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이 가슴에 와 닿는다. 그래도 그 어려운 길을 간 선생은 우리 민족의 역사에 크게 남을 위인이라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