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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는 '정의'라는 것에 대해 '철학'적으로 접근해 본 일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저 신앙인으로써 내가 섬기는 신이 정해 놓은 기준에 합치되게 살면 그것이 바로 '정의'롭게 사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만, 이 책을 읽으면서 '정의'라는 주제에 대해 '철학'적인 고민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유익한 경험이었습니다.
저자는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다루어져온 '정의'에 관한 철학적 담론을 역사적인 순서가 아니라 '행복, 자유, 미덕'이라는 세 가지 관점에 따라 순서대로 소개해 나가면서 그 장, 단점을 꼼꼼하게 짚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이론에 관한 저자의 설명은 독자들로 하여금 '정의'에 관한 이론 중 그 어떤 이론도 하나로써는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결론에 가서 저자는 자신이 소개 해 온 세 가지 관점 중에서 자신이 선호하는 한 가지 관점을 밝히고,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이전의 다양한 논의 속에서 드러난 각각의 이론들이 가지고 있는 단점들로 인해 저자의 주장은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옵니다.
저자가 자신의 논리를 풀어가는 데 있어 탁월하게 느껴졌던 점은, 어떤 예에 있어서 '정의'롭다고 여겨졌던 결론이, 다른 예에 있어서는 전혀 '정의'롭지 못한 결론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줌으로써, 어떤 결론이 정의롭다는 주장을 도출하는데 사용된 근거가, 과연 그러한 결론을 도출하는 데에 '적합한' 근거인가를 고민하게 해 주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러한 저자의 방식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다양한 이론들의 정당성을 확인해 보는 데에 있어서 참으로 의미있는 수단이 되고 있었으며, 그런 점에서 '정의'에 관한 견해에서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다양한 견해에 있어서도 자신의 주장이 참으로 정당한가를 시험해 보는 데에 유용하게 사용해 볼 수 있는 수단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랜만에 철학과 관련된 책을 읽으면서 녹슬어 있던 뇌를 청소하고 새롭게 운전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명쾌하게 정리된 논리들을 하나씩 짚어 가는 동안 아주 시원하고 상쾌한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저자가 소개하는 다양한 철학적 담론들을 접하면서 때로는 처음 접하는 입장에서 새로운 것을 배우는 즐거움을, 때로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이지만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책의 내용이 깊이 있는 만큼 번역의 질이 중요한데 나무랄 데 없이 깔끔했고, 내용 이해에도 큰 무리가 없었습니다. 그저 아쉬움 몇 가지를 지적해 본다면 첫째로, 옮긴이의 말을 책의 맨 뒤에 실어 놓았다는 점입니다. 옮긴이의 말에 기록된 내용을 통해 이 책의 역자가 원서의 내용을 충실히 숙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런 점에서 책의 내용을 읽기에 앞서 옮긴이의 말을 먼저 읽었다면 책을 읽어 가면서 더 쉽고 즐겁게 읽어갈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둘째로, 깊이 있는 내용을 다루고 있는 것에 비해 쉼표를 많이 아껴 사용했다는 점입니다. 가끔씩 문장을 어디에서 끊어 읽어야 하는지 순간적으로 혼동이 올 때가 있었습니다. 번역의 문제라기 보다는 쉼표의 부재로 인한 혼동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재판을 찍을 때에는 혼동이 될만한 문장에 쉼표를 많이 기입해서 문장의 의미를 더 분명하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오자 한 곳, 탈자 한 곳, 어색한 곳 한 곳이 발견되었습니다. 173쪽 맨 아래로부터 다섯 째 줄에 '필요해 의헤'는 '필요에 의해'로 고쳐야 합니다. 그리고, 331쪽 맨 위에서부터 여덟째 줄에 '형에 관한 를'에서 '를' 앞에 무슨 글자인지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아마 '정보'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또, 306쪽 맨 위에서부터 네째 줄에 '정의는 좋은 삶을 단정하지 않고'는 '정의는 좋은 삶을 단정하지 말고'로 바꾸었으면 싶습니다. 약간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책을 다 읽고 덮으면서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을 읽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정치적인 입장에서든, 사회적인 입장에서든, 경제적인 입장에서든, 세상에는 '정의'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는 분들이라면 한 번쯤 읽고 고민해 보아야 할 책이라 생각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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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원평가를 하라고 학교에서 공문이 왔다. 2010년 한국의 학부모로서 할 일 중 하나가 바로 교원평가이다. 그런데 나는 교원평가를 하기 싫다.
그런데도 해야 한다면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이다. 첫 번째로 생각해 볼 이유는 학부모가 혹은 학생이 하는 교원평가가 우리 사회 전체적으로 유익해야 할 것이다. 최소한 그 손실보다 이익이 더 커야 할 것이다.
교원평가를 하면 부적격 교사를 확실히 퇴치할 수 있고 학생의 학습권을 신장할 것이며 그러한 이유로 학생의 성적은 혹은 학업능력은 올라갈 것이라는 예측이다. 그에 대한 손실은 부적격 교사의 억울함 정도랄까.
두 번째로 생각해 볼 이유는 이 사회가 교원을 평가해야 할 도덕적 필요이다. 국가 혹은 학교는 교사를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고용한다. 그런데 그 고용이 거의 종신고용에 가깝다 보니 교사들이 점차 태만해진다.
그래서 그 태만해짐을 방지하기 위해서 혹은 처벌하기 위해서 학생과 학부모는 교사를 평가한다. 즉 교사와 국가 혹은 국민과의 합의를 잘 이행하고 있는 지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첫 번째 이유는 공리주의적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고 두 번째 이유는 자유주의적 입장을 대변한다. 즉 지금 교과부의 주장은 이 두 가지만을 고려한 것이다. 사실 요즘의 이슈가 되는 거의 모든 일들에서 정부는 이 두 가지 이유만을 고려한다.
보다 높은 정신적, 도덕적 가치는 실종된 것이다. 경제적으로는 비용·편익 분석만을 고려하고 정치적으로는 대의민주주의 사회에서의 정치적 합의(대통령 당선과 국회의원의 수)만을 고려한다.
그 비용·편익 분석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과연 이런 일들이 이 두 가지 관점만을 가지고 논의해야 할 일들일까? 이 책은 그러한 정치적 이슈 혹은 사회적 논란에서 보다 높은 도덕적, 정신적 분석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 책은 벤담의 공리주의로 시작해서 루소의 사회계약 그리고 칸트의 도덕철학을 거쳐 존 롤스의 정의론까지 간다. 그 후에 다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으로 돌아간 후 드디어 마지막으로 이 책의 저자인 마이클 샌델의 공동체 이론으로 끝난다.
각 장에서는 각각의 이론들의 장점과 단점 혹은 논란거리와 논박이 이어지는데 그 해결방안을 제시하는 것이 마치 롤러 코스터를 타듯 빠르게 전개된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동성혼이나 군대의 징집 문제 혹은 낙태 등에 관해 자신의 견해를 분명히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논리적 근거에 대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이 책을 읽게 되면 꽤 많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자신이 주장하는 사실과 근거가 여지없이 깨지게 되고 자신의 일관성에 회의가 들 것이다.
그러나 그 회의가 더 나은 결론에 이르게 할 것이기 때문에 이 책을 꼭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각 이슈에 대해 도덕적 중립을 지키는 것이 어렵다는 것도 깨닫게 될 것이고 정의를 올바로 정의하는 것 또한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책은 강의를 책으로 편 것이라 아주 풍부한 예시를 하고 있다. 구제금융, 빌 게이츠, 마이클 조던, 테드 카진스키, 로버트 케네디 등등... 이 모든 일들에 대해 각각의 입장을 쉽고 논리적으로 꼼꼼하게 짚고 있는 것이다.
이 저자의 입장은 암살당한 로버트 케네디의 연설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연설문을 발췌하자면 이렇다. ‘우리 국민총생산은 한 해 8000억 달러가 넘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대기오염, 담배 광고, 시체가 즐비한 고속도로를 치우는 구급차도 포함됩니다. 우리 문을 잠그는 특수 자물쇠, 그리고 그것을 부수는 사람들을 가둘 교도소도 포함됩니다. 미국삼나무 숲이 파괴되고, 무섭게 뻗은 울창한 자연의 경이로움이 사라지는 것도 포함됩니다.
네이팜탄도 포함되고, 핵탄두와 도시 폭동 제압용 무장 경찰차량도 포함됩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팔기 위해 폭력을 미화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도 포함됩니다. 그러나 국민총생산은 우리 아이들의 건강, 교육의 질, 놀이의 즐거움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국민총생산에는 우리 시의 아름다움, 결혼의 장점, 공개 토론에 나타나는 지성, 공무원의 청렴성이 포함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해학이나 용기도, 우리 지혜나 배움도, 국가에 대한 우리의 헌신이나 열정도 포함되지 않습니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을 측정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미국인이라는 사실이 왜 자랑스러운가를 제외하고 미국에 관한 모든 것을 말해줄 수 있습니다.’
항상 이런 아름다운 글에 반박하는 사람들은 이런 글들에 논리적이거나 문학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전개해 가지 않는다. 단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폭력과 ‘빨갱이’라는 딱지일 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이 바뀐 게 하나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징병제에 관한 것이었다. 대한민국에 사는 여성들 사이에서 절대 논의되지 않는 것 중의 하나인 군대 문제에 관하여 경제적 규모만 된다면 모병제를 시행해야 하고 모병제가 더 도덕적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것이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전쟁을 끝내지 못하는 이유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군대가 모병제로 변하면 군대는 시민의 관심사에서 멀어지고 그 강력한 힘의 사용은 오로지 비판받지 않는 정부에게 완전히 이양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지금도 우리 사회의 지도층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혹은 그 자식들의 대부분은 소위 전방이라고 하는 곳에 배치되지 않았거나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전쟁을 더 쉽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내 자식이 총을 들고 싸워야 한다면 혹은 내 남자친구, 남편이 싸워야 한다면 전쟁이란 말을 그리 쉽게 꺼낼 수 없을 것이고 전쟁은 보다 신중하게 일어날 것이다(최근의 전쟁에 대한 연구 경향은 전쟁 당사국의 지도층의 결정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의 눈으로 고전을 읽는 것은 항상 위험한 일이다. 우리는 칸트를 보통은 직접 읽지 않고 철학개론서를 통해서 만난다. 그렇기에 진심으로 그가 한 말에 대해 의심을 가지고 있다.
이는 예전에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읽을 때도 느낀 바인데 플라톤을 직접 읽지 않고 포퍼의 눈을 통해 플라톤을 읽게 되면 우리는 쉽게 플라톤에 대해 비판적이 된다.
샌델은 조심성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남의 눈을 통해 보는 위험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사족이라면 샌델도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입장이 아렌트와 비슷해서 또다른 기쁨을 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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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여름 휴가 때 챙긴 책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의 호기심은 그것에서 출발했고, 모처럼 까다로운 책을 읽었다.
소감?
나는 이 책을 “번지르르한 위선”에 비유하고 싶다. 원래 직설적으로 말하니 이해 바란다. 위선이라고 말하는 건, 정의타령을 하면서 뭔가를 알려주는 듯 하지만 알고 보면 그것은 하버드생을 위한 것이며 또한 책상 앞에서나 통할 법한 것들을 주구장창 들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버드생으로 상징되는 부자라면 열심히 읽어도 될 듯. 어차피 1%에 안착한 그대들에게는 이런 식으로 좀 더 양심적인 것이 필요할 것이니까. 그 외에는 글쎄?)
이 책으로 말하자면,
공리주의, 자유지상주의 등의 서양사회를 들썩였던 이론들을 몇몇 사례들을 통해 자문자답하는 형식으로 풀어내고 있다. 강의를 옳겼다고 하는데 읽다보면 정말 강의를 듣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강의는 강의로 족하다는 것이 문제다.
이 강의에서 말하는 정의란 것은 도대체 어디에서 써먹을 수 있는 것일까?
말도 안 되는 대학 등록금을 내야 하는 이곳에서, 비싼 돈 내고 대학 다녔더니 88만원 세대라며 안쓰러워하면서도 취직자리 안 주는 이곳에서, 기껏 취직했더니 인턴이라며 막 부려먹는 이곳에서, 이 정의는 어디에서 사용할 수 있을까? 정말 이 책 읽고 정의로워졌다고 생각합니까? 정말? 진짜? 말도 안 되는 최저생계비에 죽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바로 주변에서 보이는데 책 읽으며 정의타령을 합니까? 그게 정말 정의입니까?
그렇다면 이 책의 의도에 완전히 당한 거다.
이 책이 말하려는 그것들은, 대학 졸업해도 걱정 없는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의 양심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려는 것들인데, 그걸 받아들이고 만 거다. 그래서 정말 정의가 필요한 곳에서는 정의를 찾지 않고 책상 앞에서나 정의를 찾으며 나는 정의를 좀 찾았다고 희희낙락하고 마는 거다. 이렇게 하는 건,
불편하지 않기 위해서다.
불편해야 하는데 불편하지 않고 양심을 편하게 보존하려는 것이다.
기껏 책을 읽으며 정의란 무엇인가, 를 찾고 싶다면 ‘불편해도 괜찮아’를 권한다. 그나마 그 책이 정의에 좀 더 가깝다. 이런 하버드생 강의 청강하면서 나는 정의를 좀 배웠다 하는 자기합리화에 빠지지 말고 진실을 보자.
진실은 아주 가까운 데 있다. 하기야 알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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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왜 일본이 한국에게 과거사에 대해 공개 사죄해야 하고 더불어 금전적인 배상까지 해야 하는지에 대해 논리적인 근거를 명쾌히 제시해주는 책이다. 저자는 앞에선 주로 공리주의와 자유지상주의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공리주의를 주장한 사람들과 자유지상주의를 주장한 사람들을 소개하면서 그들의 논리를 설명해주고 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뒷부분에 저자가 진정 하고 싶은 말에 대한 초석을 깔기 위한 것일 뿐 중요한 내용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없거나 공리주의나 자유지상주의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9장부터 읽어도 무방하다. 9장이 이 책의 하이라이트이자 핵심이기 때문이다.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 난 왜 이 책이 베스트셀러인지 의문이 들었다. 공리주의나 자유지상주의에 관한 내용은 학창시절에 지겹도록 배운 것이고 이미 이에 대한 논의는 충분히 이루어져 법과 제도 어느 정도 반영이 되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8장까지 읽었을 때만 해도 난 왜 사람들이 대충 다 아는 얘길 다시 지껄이나 싶었다. 그리고 왜 이런 얘길 21C인 지금에 와서 다시 거론하는 것인지 그 저의가 궁금했다. 그런데 9장을 읽으면서 난 내 판단이 성급했고 이 책을 오해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자가 9장에서야 비로소 자신이 이 책을 낸 이유와 공동체주의가 왜 중요한지에 대해 설명해주었기 때문이다. 역사적 부당 행위에 대한 집단적 사죄 및 보상에 대해 이야기한 부분은 이 책의 백미 중의 백미다. 저자가 이 이야기를 함으로써 이 책은 명저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고 본다. 지구상에 정의가 바로 서고 도덕과 윤리가 제대로 자리 잡히기 위해선 저자와 마찬가지로 난 공동체주의 사상이 널리 퍼져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박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총 10개의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부터 난 내가 주목한 것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내가 주목한 것은 아홉 번째 강의에서 “조상의 죄를 우리가 속죄해야 하는가?”라는 소제목이 달린 부분이다. 난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일본을 비난하면서 살아왔다. 그 이유는 과거 일본이 우리나라를 부당하게 점령한 것은 물론이고 우리민족을 노예처럼 핍박하고 유린했으면서도 제대로 된 공개 사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친일파 및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왜 21C인 지금에 와서 다 지나간 과거를 끄집어내어 동북아의 평화적인 분위기를 흐리느냐고 물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과거 조상들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왜 아무 관련도 없는 자신들이 사죄를 하고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물을지도 모른다. 이들의 주장은 틀린 말은 아니다. 분명 과거사를 들추는 행위는 한국과 일본의 미래를 위해서 결코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그리고 지금 일본인들은 우리민족을 핍박하지도 유린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죄가 없다. 하지만 이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 채 이런 소리를 지껄인 것이다. 지금 일본은 약간 주춤하긴 했지만 세계가 알아주는 경제대국이다. 이는 과거 그들의 조상들이 이룬 업적으로 지금의 일본인들은 그들의 조상이 이룩해놓은 것을 단지 그 나라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누리고 있는 것이다. 일본이 한국에 사죄를 못하는 논리를 근거로 따지자면 현재의 일본인들은 과거 조상들이 이룬 부를 누려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건 어디까지나 그들의 조상들이 이룬 부지 후손인 그들이 이룬 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웃기지 않은가? 조상의 죄는 자신들과 상관없다고 주장하면서 왜 조상들이 이룩한 부는 물려받는단 말인가! 이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는가!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논리에 얼마나 큰 허점이 있는지 제대로 자각하지 못한 모양이다. 만약 이런 모순을 인식했다면 일본인들은 절대 자신들의 조상들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나 몰라라 하지 못했을 것이다. 21C인 지금도 일본은 과거 자신들의 조상들이 저지른 죄에 대해 공개 사과는 물론이고 납득할 만한 배상도 하지 않고 있다. 논리적으로 말도 안 되는 주장을 근거로 자신들과 무관하다고 떠들어대지만 그들이 일본에 살면서 그들 조상들이 이룬 모든 것을 누리고 사는 이상 그들에겐 분명 과거사에 대한 책임이 있다. 이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다면 일본과 한국은 천 년 만 년이 지나도 친해질 수 없다. 일본은 이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왜 우리가 정의에 대해 배워야 하고 익혀야 하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다면 꼭 이 책을 읽어보기 바란다. 인상적인 글귀 “옳은 일을 하기란 늘 쉽지는 않은 법이다.” “문명화된 사회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재능을 개발할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모두 똑같은 출발선에 서서 경기를 할 때라야 승자도 포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 “공정하게 행동해야 공정한 사람이 되고, 절제된 행동을 해야 절제하는 사람이 되고, 용감한 행동을 해야 용감한 사람이 된다.” “‘미안해’라고 말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공개 행위로서 공식 사죄는 과거의 상처를 감싸고 도덕적·정치적 화해의 기초를 다진다.” “인간은 이야기하는 존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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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철학, 이마누엘 칸트... 처음 책을 읽을 땐 모두 만만찮고 나와는 좀 상관이 없는 단어인 것처럼 다가온다. 과연 정의로운 것은 어떤 것일까? 정부는 부자에게 세금을 부과해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하는가? 자유시장은 과연 공정한가? 진실을 말하는 것이 잘못인 때도 있는가? 도덕적으로 살인을 해야 하는 때도 있는가? 도덕을 입법화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기여입학제는 허용해야 하는가? 이 책은 이러한 논쟁에서 도전적인 발상들을 선보이면서 이와 같은 질문에 스스로 답을 찾아가도록 우리를 유도하고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 저자는 '정의'를 이해하는 세 가지 방식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행복의 극대화, 자유, 미덕의 추구가 그것이다. 저자는 이 3가지 이론들의 장단점들을 실제 일어난 오늘날의 이야기들과 논쟁들을 통해 설명함으로써 독자들의 관심과 시선을 끌어들인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칸트, 제레미 벤담, 존 스튜어트 밀, 존 롤스에 이르기까지 고대부터 근현대 정치철학을 자연스럽게 만나게 된다. 하지만 전혀 낯설지 않은 것은 바로 이러한 철학자들이 오늘날 우리가 겪는 이야기들에 대한 해결방안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소개되기 때문일 것이다.
정의와 행복의 극대화를 연관짓는 이론은 바로 공리주의이다.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와 방법을 그럴듯하게 설명한다. 시장 중심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우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더 잘살게 되리라고 기대한다. 따라서 사회적 풍요로움을 높이는 것이야말로 행복을 높이는 길이다. 오늘날 각종 정치적, 사회적 이슈의 추진문제를 비용/편익분석을 통해 결정하려는 움직임이 이러한 사상을 바탕에 깔고 있다.
이 책은 하버드 대학 강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라고 한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질문과 그 이유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갈팡질팡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에 위의 3가지 철학적 근거들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게 된다. 또한 우리주변의 사회문제를 보다 분명하게 인식하는 계기를 가졌다는 느낌을 받게 같다. 학창 시절 명강의가 진행되는 강의장에 와있는 듯한 느낌도 그대로 전달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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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영어표현인 'Justice' 의 사전적 의미는 공평성, 공정성으로 해석되고, 우리말 사전은“개인 간의 올바른 도리. 또는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공정한 도리.”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바로 ‘올바른 도리’나, ‘공정한 도리’, ‘공평성’이라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을까? 무엇이 올바른 것인가? 대체 공정하다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에 이르면 그만 모호해지고, 수많은 견해들이 갈등한다. 이 저작에는 우리들이 좀처럼 결정을 할 수 없는 질문들이 예시되고 있다. 남대서양 한가운데 구명보트에 표류하는 4인이 있다. 그러나 병약한 17살 소년을 죽여서 먹으면 나머지 세 사람이 살 수 있다. 그래서 살해하여 식용하면서 연명했고 드디어 구조되어 생환했다. 과연 이 행위는 정의로운가? 우린 어떠한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여기서‘제레미 벤담’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功利主義)이론을 통해 한 명의 고통을 통해 세 명의 행복이 달성 되었으니 정당하다고 주장해보자. 정말 그럴까? 그러나 생존자와 생존자 가족의 기쁨을 고려한다 해도 이러한 죽음을 허용할 경우 사회전체의 행복이 증가할까 하는 질문에 이르면 공리주의적 판단을 하더라도 결코 도덕적이라고 할 수 있지는 못하다. 나아가서 도덕 문제를 모조리 쾌락과 고통이라는 하나의 저울로 측정하려는 공리주의가 빠뜨리고 있는 것이 분명 있지 않을까? 인간의 존엄성과 개인의 의지에 반하는 죽음 즉, 개인의 권리를 소홀히 취급하는 자유의 권리와 충돌하고 있지 않은가? 좀체 정의를 획일적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가능치 않을 것 같다. 저자는 정의를 공리주의자들의 행복을 비롯해서 자유와 미덕이라는 세 가지 이상(理想)을 통해 고민하고 있다. 한 가지 문제에 공리주의적 관점, 자유지상주의자의 관점, 칸트의‘순수실천이성’과 정언명령에 의해서, 그리고 존 롤스의 ‘무지의 장막’이라는 원초적 평등에 기초한 차등원칙, 아리스토텔레스의 텔로스(telos:목적,본질)와 영광이라는 삶의 목적론적 사고에 의한 도덕적 미덕으로서의 판단이 어떻게 개인과 인간사회의 정의에 관여하는지 설명하고 있다. 일례로서 우리의 헌법은 적정 연령에 이른 남성을 징집대상으로 하고 군에 입대하여 국방의 의무를 부담 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만일‘대리복무’제도를 헌법에 도입하여, 즉 적정의 댓가를 지불하고 누군가를 대신하여 군복무를 할 수 있도록 한다면 이는 정당한가? 아니면 부당한가? 부당하다면 왜 부당하다고 하는 것인가? 또한 대리복무가 아니라 납세자들이 세금을 조금 더 부담하여 아예‘자원병제’를 도입하여 희망자가 자발적으로 군에 입대하여 복무케 하는 것은 어떨까? 이는 대리복무보다 더 도덕적인가? 자유주의자들은 징병제는 심각하게 개인의 자유, 즉 선택을 제한하는 노예제라 비판할 것이고, 공리주의자는 서로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거래를 금지하여 전체의 행복을 감소시킨다고 비판할 것이다. 이들 자유주의자와 공리주의자의 비판은 옳은 이야기일까? 만약 오류가 있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자원병제나 대리복무제는 애초에 공정성의 문제를 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즉 청년실업이 상습화되어 가난과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는 것 아닌가. 결국 강제의 형태만 다를 뿐 사실상 자원군은 경제적 어려움이 강제하고 있는 것으로 이미 기회의 균등이 적절하지 못하며, 자유로운 의사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군 복무를 상품 취급해 모든 시민은 나라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미덕과 공동선을 파괴하고 있다 할 수 있다. 의무를 시장에서 거래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급기야 댓가를 받고 임신을 하는 일과 같이 임신을 서비스로, 아이를 생산물로 취급하여 거래하는 계약도 있다. 세상에는 시장이 존중하지 않는 그리고 돈으로 살 수 있는 미덕과 고귀한 재화가 있을까 할 정도로 인간을 상품화하고 거래의 대상으로 하기에 이르고 있다. 이는 정의로운 행위인가? 아기나 임신을 상품으로 취급하는 것에서 과연 가치는 어떻게 평가하는 것인가? 존중 받아야 할 인간이 사용가치로 인식되는 것과 같이 일반적 생산을 지배하는 준거로 대체 할 수 있는 것일까? 칸트는 이와 같이 우연히 생기는 욕구에서 도덕을 끌어내는 것은 도덕을 생각하는 방식부터 그르친다고 이들 자유지상주의와 공리주의를 비판한다. “쾌락(편리함, 위험의 면제 등등)을 준다는 이유만으로 옳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을 전체의 행복을 위한 도구로 보는 것처럼 인간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은 도덕적 일 수 없다는 것으로 인간은 그 자체의 목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바로 인간의 존엄성 존중이라는 의미를 강조한다. 다시 말해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려는 욕망에 내 몰리지 않고 이성이 우리의 의지를 통치하게 할 때 우리는 자율적 존재이며 선택 할 능력이 비로소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순수실천이성이 참여 할 때 도덕법을 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적절한 기회균등이나 공정한 상태가 어떠한 것인가에 대한 ‘존 롤스’의 누구도 우월한 위치에 있지 않는 원초적 평등한 상황을 말하는 평등주의, 즉 롤스가 주장하는 차등원칙은 자율과 호혜에 대한 도덕적 평가에 있어 중요한 기준을 제시해 주고 있다. 출생이라는 우연을 기준으로 소득, 재산, 기회, 권력과 같은 도덕적 임의성은 불공평을 조장하고, 더구나 혜택 받은 가정환경의 산물로서 우연의 영향을 받는다면 노력의 미덕도 인정치 않는다. 이러한 도덕적 임의성을 배제하고 엄격한 평등을 추구하여, 사회의 기본 구조를 조정해 우연한 차이가 행운을 타고나지 못한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쓰이도록 하는 차등원칙의 주장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설명하는 고귀한 도덕적 배경이 되어준다. 한편‘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사고에 입각한 텔로스와 영광을 통한 정의를 통하여 시민의 도덕적 미덕을 강조하고, 인간존재를 서사의 개념으로 파악한‘매킨타이어’를 통해 “도덕적 고민은 내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라기보다는 내 삶의 이야기를 해석하는 것”이라며, 우리에게는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그리고 사회계약의 결과로도 돌릴 수 없는 도덕적 의무를 설명한다. 이것은 역사적 부당행위에 대해 집단적 사죄와 보상을 해야 하는가와 같은 질문이 가능하다. 개인은 단지 자신의 선택과 행동만 책임지면 그만이라고 한다면, 즉 자신이 출생하기도 전에 일어난 일을 사과할 책임이 없다고 주장한다면 정당하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러나 해외에서 추한 한국인을 보았을 경우 우린 수치심을 느끼고, 국가대표 축구선수가 월드컵에서 승리하면 우린 자부심을 느끼는데, 이는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는 정체성을 공유한다는 전제에서 나오는 도덕 감정으로 자신의 선택과 상관없이 도덕적으로 한데 묶여 있으며, 우리를 도덕적 행위자로 만드는 서사에 연관된 사람들임을 부정할 수 없게 한다. 즉 이러한‘연대의식’은 자연적 의무나 합의를 필요로 하는 자발적 의무를 넘어서는 의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연대나 가족에 대한 충성(직)이 도덕과 충돌할 때가 있다. 내 형제가 악질의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정의의 심판대에 세우는 것이 정당한가, 아니면 그의 도피를 돕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 질문처럼 공동선과 개인의 연대의식은 어느 것이 정의라고 결정하기가 버거운 상황이 있다. 도덕적 개인주의라고 비난하여야 하는가? 과연 우린 연대의식 없이 삶을 살아 갈 수 있는가? 연대는 우리에게 도덕적 부담을 안겨주기도 하며, 또한 도덕적 힘이 필요하기도 하다. 도덕보다 가족의 연대가 더 무거울 수 있다는 사실에 우린 놀라기도 하지만 정의를‘공적 이성’에만 호소할 수 없다는 것도 이해 할 수 있다. 이처럼 도덕적 판단이나 정의에 대한 판단을 위해서 우리가 생각하여야 하는 요소는 실로 다양하다. 특정 이데올로기나 관념에 입각하여 판이한 정의를 주장할 수 있다. 자유와 행복, 공동체로부터 영광과 인정을 받을 가치와 같은 미덕을 생각하기도 해야 하며, 목적, 즉 텔로스를 묻기도 해봐야 한다. 정의로운 사회는 행복을 극대화하거나 선택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만으로 만들 수도 없으며, 삶의 의미를 함께 고민하고 서로의 이견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논의하는 문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정의에 대한 생각의 다양성들 중에서, 오늘의 현대사회에서 판단의 중요한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는 공리주의, 아리스토텔레스의 텔로스, 존 롤스의 차등원칙, 칸트의 순수실천이성, 자유(지상)주의이념을 중심으로 적절한 사례를 통한 비판과 반박의 이론으로 정의의 이상에 한 발 가까이 가게 해주는 이 저작은 도덕철학, 도덕정치학의 진수이다. 특히 우리를 도덕적 딜레마에 빠지게 하는 일상의 문제들에서 보다 정의롭고 좋은 삶에 대한 미덕의 실현에 기여하게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도덕 교과서라 할 수도 있다. 풍부하고 정교한 지식과 재치 넘치는 서술로 도덕철학을 이렇게 흥미롭게 읽었던 적은 없는 것 같다. 가히 탁월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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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2010년을 대표하는 책 한권을 뽑는다면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첫번째로 꼽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이 올해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책의 알찬 내용과 샌델 교수의 날카로운 비평이 주는 속시원함도 한 몫을 했지만, 무엇보다 시대적 요구에 부응한 바가 더 크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초등 교과서에서나 나올 듯한 '정의'니 '도덕'이니 하는 식상한 단어들이 올해의 화두로 떠 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세계화와 자유주의로 대표되는 그간 세상을 주름잡던 트랜드의 부산물로서 부작용이 표면화되어 많은 이들이 이를 몸으로 느끼고 실감하는데서 시작하지 않았을까 싶다. 거대기업과 정치권의 모랄해저드와 지역간, 계층간 빈부격차의 심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심각해진 성장의 불균형 등을 통해 체감되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불안, 그리고 그 불안 만큼이나 조급해진 사람들의 마음이 한동안 진부한 것으로 여겨 거들떠 보지도 않았던 정의니 도덕이니 하는 문제에 근본적 의문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된 건 아닌지.. 다소 개운치 않은 추론을 해 본다.
이 책은, 정의의 본질에 대한 다양한 철학적 관점을 제시하는데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공동체의 '행복 극대화'라고 하는 과거 밴덤의 공리주의적 접근부터 시작해, 정의란 개개인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는 것이라는 자유주의 관점과 이 흐름의 한 축을 형성했던 칸트의 도덕철학과, 롤스의 자유주의적 평등주의,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사고체계를 대표하는 텔로스(Telos) 등을 소개한다. 저자는 단순한 소개에 그치지 않고, 하나하나 현실적인 사안들 예로 들어 각 관점의 차이를 명확하게 적시하는 방법을 통해 자칫 애매하고 사변적일 수 있는 철학적 문제를 현실로 끌어내려 감정적이고 직관적으로 느껴볼 수 있게 해 준다.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거기에 있다.
저자는 정의는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민하느데서 출발해야한다고 말한다. 모든 분야에서 다양성이 중시되는 요즘의 경향에서 볼 때, 이질적 다양성 너머에 존재하는 미덕과 그 미덕의 현신(現身)인 공동선이 선언적 개념 이상으로 얼마나 구체적인 모습을 할 수 있을런지는 다소 걱정스럽지만, 그 문제제기와 방향제시의 참신함에는 충분히 귀를 기울일만 하다. 다소 겉넘은 나의 '걱정'은 그의 또 다른 저서 「왜 도덕인가?」 를 읽은 후로 당분간 미루어놓을 생각이다.
그의 이 책의 논조를 따라가다보니, 난감하고 아리송한 문제들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일관성을 견지하기 어려운지, 그리고 또 얼마나 쉽게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삶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살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사회구성원으로서 도덕적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간다는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반증하는 사례를 몸으로 느낀다고나 할까..
「정의란 무엇인가」 라는 책의 정체성을 한마디로 말하기는 참 어렵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음에도 이 책은 철학서적으로서의 위상을 논하기에는 어딘가 한참 부족한 느낌이다. 정의와 미덕이라는 현대 철학과 정치학의 가장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면서도 하나의 주류 내지는 대안으로 자리매김하기엔 자기 목소리의 색깔이 불분명하고, 자신에 대한 반론과 비판을 의식한 듯한 소극적인 표출이 종종 보여지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이런 관점에서 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라는 문제제기만으로는 '정의란 무엇인가'를 온전히 설명하기에 다소 부족했다는 느낌을 끝내 지우지 못하고 책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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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인문학 서적이 베스트셀러라고 한다. 책을 읽으면서 베스트셀러라고 하는 것에 크게 구애를 받지 않았으나, 그 책이 인문학서적이고 더욱이 책 제목이 정의란 무엇이냐고 묻기에 관심이 클 수밖에 없었다. 책을 구매해놓고도 막상 읽기를 주저하다가 연휴기간에 집어 들었다. 작금의 상황에서 정의란 무엇인지에 사람들의 관심이 많은 것을 보고 약간은 의외다 싶다. 정의란 무엇일까? 정의란 것이 꼭 있어야 될까? 그렇다면 지금 우리사회에는 정의가 있는 것 일까? 의문은 머리 속에서 꼬리를 물고 일어나지만, 나 역시 똑 부러지게 뭐라 할말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지금 정의로운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니며, 말로만 정의를 외친다고 정의가 오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올 정의라면 30년전 정의사회 구현을 정권의 모토로 내걸었을 때 이미 왔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라는 것이 사람들에게 관심을 불러일으킬수록 그것이 하루라도 빨리 이 사회에 정착되리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헛된 믿음인지는 모르겠다. 저자가 30년 가까이 하버드대학에서 정치철학을 가르치면서 정의라는 수업을 여러 차례 진행하였다고 한다. 학생들에게 정의를 다룬 뛰어난 철학서를 소개하고, 철학적 문제를 제기하는 오늘날의 법적, 정치적 논쟁을 다루는 수업이었다고 한다. 그가 정의라는 것에 대해서 학생들과 토론하고 논쟁하고, 소개한 철학서의 내용은 이러하다. 사회가 정의로운지를 묻는 것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 이를테면 소득과 부, 의무와 권리, 권력과 기회, 공직과 영광 등을 어떻게 분배하는지를 묻는 것 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러한 분배를 이해하는데 세가지 방식이 있으니 그것이 행복, 자유, 미덕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들 중 행복극대화는 자연스럽게 공리주의에 눈을 돌려야 하며, 그것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와 방법을 그들이 가장 그럴듯하게 설명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음으로 정의를 자유와 연관 짓기 위해서는 정의가 자유와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 이라는, 정의는 보편적 인권을 존중하는 것 이라는 자유시장주의자들의 이론을 살펴봐야 한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정의가 미덕, 그리고 좋은 삶과 연관 된다고 보는 이론은 오늘날 보수주의, 그리고 우파와 동일시 되지만, 정의로운 사회라면 미덕과 좋은 삶에 대한 견해가 뚜렷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저자는 이 책이 사상에 대한 역사서가 아니라 정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고찰하면서 확인하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고민하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라고 말한다. 정의란 무엇인가? 일단은 저자가 주장하는 철학적 담론들을 따라 가본다. 먼저 그는 공리주의적 정의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다. 영국의 도덕철학자이자 법개혁가인 제러미 벤담이 주창한 공리주의의 핵심사상은 “도덕의 최고 원칙은 행복을 극대화 하는 것, 쾌락이 고통을 넘어서도록 하여 전반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라고 한다. 옳은 행위는 공리를 극대화하는 모든 행위이고, 그가 말하는 공리란 쾌락이나 행복을 가져오고 고통을 막는 것 일체를 가리킨다. 따라서 벤담의 공리주의에 따르면 행복극대화를 위해선 고통은 무시될 수 있으며, 오직 만족의 총합에만 관심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이에 대하여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으며, 모든 도덕적 행위의 가치를 쾌락과 고통이라는 하나의 도량형으로 환산할 수 있다는 주장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리주의적 발상은 오늘날에도 정책입안자, 경제학자, 경영자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저자는 공리주의에 이어 자유지상주의자들에게 있어 정의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규제 없는 시장을 옹호하면서 정부규제에 반대하는데, 그 명분은 경제효율성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다. 이들의 핵심주장은 우리들 개인에게는 자유라는 기본권이 있다는 점이다. 달리 말해 다른 사람의 권리도 똑같이 존중한다면 우리 소유물은 우리 마음대로 쓸 수 있다고 말한다. 이들은 현대국가들이 하는 행위의 대부분이 위법이며, 국가는 계약을 집행하고, 개인의 재산을 보호하며, 평화를 유지하는 단지 그것만을 하는 최소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소득과 부의 재분배에 대해서는 자신이 자발적으로 하지 않는 한 그 어느 것으로도 그것을 강제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시장은 도덕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현대의 정치철학자들이 자유시장을 옹호하는 것은 두 가지 주장에 근거한다고 한다. 자유와 행복에 관한 주장이 그것인데, 자유는 자발적 교환을 허용하는 것이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 이라는 자유지상주의자들의 주장이고, 행복은 자유시장이 전체의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다고 하는 공리주의자들의 그것이라고 한다. 저자는 정의를 설명하기 위해 칸트의 자유와 도덕적 가치, 존 롤스의 평등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사고까지 끌어 들인다. 칸트는 정의를 이해하면서 공리주의적 시각과 미덕 장려의 시각을 거부하고 정의와 도덕을 자유와 연관 짓는 시각을 열렬히 옹호하였다고 한다. 자유로운 행동은 주어진 목적에 걸맞은 최선의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를 선택하는 것이며, 칸트가 말하는 자율은 행동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고 한다. 따라서 칸트에게 있어 어떤 행동의 도덕적 가치는 그 결과가 아니라 동기에 있다. 그런가 하면 존 롤스는 정의를 고민하는 올바른 방법은 원초적으로 평등한 상황에서 어떤 원칙에 동의해야 하는가를 묻는 것 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정의의 원칙은 기본적인 자유를 모든 시민에게 평등하게 제공해야 한다는 것과, 모든 시민이 사회적, 경제적으로 평등해야 한다는 것 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회적, 경제적 평등은 사회에서 가장 약자에 속하는 사람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경우에만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을 인정하는 차등의 원칙을 말한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정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는 적합성의 문제이다. 그는 그들이 분배하고자 하는 것을 공정하게 분배하려면 그것의 텔로스, 즉 목적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칸트와 롤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을 거부하는 이유는 우리가 선을 스스로 선택할 여지를 남겨두지 않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정의에 대한 세가지 관점을 설명하고, 철학자들의 그것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은 정의가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민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나의 원칙이나 절차가 있어서 그에 따라 소득, 권력, 기회를 정당하게 분배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정의에는 어쩔 수 없이 판단이 끼어든다고 한다. 어떤 논란을 벌이든, 정의는 영광과 미덕, 자부심과 인정 등 대립하는 여러 개념과 연관된다고 한다. 정의는 올바른 분배만의 문제가 아니라, 올바른 가치 측정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책은 정의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여야 되는지, 이해하는 방법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는 지를 소개 하고 있다. 저자는 각 주장들에 대하여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책 말미에 자신은 정의를 이해하는 세가지 방법 중에서,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민하는 것이 곧 정의라 생각하고 있다고 말할 뿐이다. 저자가 말하는 정의는 언뜻 보면 공리주의자나 자유시장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다소 동떨어지지만,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것과 동일하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의 주장은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와는 다르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미국이라는 사회와 우리의 사회가 다르고, 또 정의를 바라보는 시선 역시 다를 수밖에 없지만,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듯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타이르는듯한 그의 정의를 읽으면서 행복과 자유와 미덕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이해하는 정의는 없는지를 생각해 본다. 차라리 이 사회에서는 롤스가 주장하는 차등의 원칙이 정의를 가르는 기준이 된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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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라는 낱말 앞에는 수식어가 참 많이 붙는다. 사회적 정의, 분배적 정의, 법적 정의, 지역사회 정의 등의 다양한 단어와 맞물려 있다는 것이 정의라는 말의 중요성을 대변하는 듯하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내가 처한 특정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정의롭고 최선인지 가늠해보는 경우가 많았다. 이 책에서 마이클 샌델 교수는 정의가 무엇인지를 조목조목 짚어주고 있지만, 사실 한편으로 나는 정의가 무엇인지를 논하는 것 자체에 대해서 회의감이 들기도 한다. 구체적인 밑그림이 그려지지 않은 논의가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는 것에 비해 너무나 작게 느껴지기 때문이랄까. 하지만 이 책의 판매 부수가 진정한 정의를 갈구하는 우리의 바람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정의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희망의 신호탄이라 여겨도 좋을 것 같다.
그런데 누군가가 '이것이 진정한 정의이다!' 라고 구호를 외칠 때, 오직 피아 식별과 아군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서 정의라는 깃발을 내거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울 때도 있다. 게다가 정의 실현을 위한 일은 아이러니하게도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불의(不義)인 경우가 많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예를 들어, 법적 정의를 지키기 위해 제정된 법 자체에 문제가 있다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일부 불의를 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정의와 불의를 가르는 판단은 누가 할 수 있는가? 법안 공포 후 시행되고부터는 그것의 정의롭지 못한 법안이라고 해도 합법적으로 불의가 행해지는 것을 막을 방법이 있는가? 이런 물음들에 대해 한 마디로 답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샌델 교수는 이런 복잡한 정의(正義)를 정의(定義)하기 위해 여러 사례를 들면서 정의의 기준을 제시하는 철학 이론이나 법칙을 깊숙이 파고든다.
이 책은 마이클 샌델 교수의 하버드 대학 경영학 강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책이 꾸준히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유지하는 것처럼, 강의도 예외가 아니다. 샌델 교수가 20년간 강의한 이 과목은 하버드 역사상 가장 많은 학생이 청강한 강의 중 하나라고 한다. 나도 문득 호기심이 생겨 유투브에 올라온 동영상 강의를 찾아본 적이 있다. 강의 서두에서부터 끊임없이 던져지는 교수님의 물음은 점점 우리를 미궁으로 빠져들게 한다. 그 난해한 질문 중 하나는 이것이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기차가 달려오는 것을 다리 위에서 우연히 보게 되었다고 하자. 옆에 서 있는 덩치 큰 남자를 밀어서 다리 아래 철로로 떨어뜨리면 기차가 멈춘다고 가정하자. 그 행동으로 철로에서 일하는 인부 세 명을 구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한 명의 목숨으로 세 명을 구하는 행동은 과연 정의로운 것일까? 이 문제는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한 것이기는 하지만, 충분히 생각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난제를 풀어가기 위해 샌델 교수가 제시하는 정의의 판단 기준은 행복, 자유, 미덕의 세 가지이다.
첫번째 기준인 행복에 대한 논의는 제러미 벤담에서 존 스튜어트 밀로 이어지는 공리주의로부터 출발한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실현을 궁극적 목적으로 하는 공리주의는 개개인의 행복을 수치로 환산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 정의의 합은 그와 반대인 부정의 합보다 많을까? 그것을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까? 이 책에서 나오는 예를 보자. 어느 지하 도시에 갇힌 소녀의 슬픔의 반대급부로 그 도시 사람들이 행복해진다고 하자. 벤담의 공리주의에 의하면 그 소녀의 속박은 정의로운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개인이나 집단의 행위 동기에 중점을 두기보다는 만족스러운 결과를 도출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칸트는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며, 행위의 결과보다 동기에 초점을 맞춘다. 그는 정언명령, 가언명령의 개념을 제시하며 정언명령에 따르는 행위만이 정의로운 것으로 여겼다. 샌델 교수는 누구의 손을 들어줄 것인가? 물론 인생에 정답이 없듯이, 철학 이론에도 어떤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샌델 교수의 철학 강의 목적은, 우리가 좀 더 철학에 친숙해지고 그 친밀함을 바탕으로 철학사를 파헤쳐 넓고 깊은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 아닐까.
이 책은 철학과목을 배우는 학생, 그리고 철학에 관심있는 분들께도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딱딱하게 느껴지는 철학서적과 달리, 흥미로운 저자의 경험과 철학자들의 주 논쟁거리를 적절하게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어 이해하기가 한결 수월하다. 논제에 대한 적절한 예시는 독자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문득, 소소한 나의 일상 경험을 떠올리며 저자의 견해에 무릎을 치는 경우도 꽤 있었다.
계약에 대한 합의와 이행 의무에 관해서는 특히 그러했다. 얼마 전, 내가 만화대여점에서 만화책을 빌렸는데 그 중 한 권은 예전에 본 것이었다. 이미 보았던 책을 다시 보지 않고 대여한 다음 날 다른 책과 함께 돌려주었다면, 나는 그 계약으로 호혜를 입은 적이 없으므로 계약 이행 의무가 없는 것일까? 이 물음에는 대부분 동의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내가 하루 동안 책을 소유하고 있지 않았다면, 대여점 사장님은 그 책을 다른 이에게 빌려줄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다시 말하자면 기회비용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제 질문을 약간 바꿔보자. 만약 만화책을 빌려서 대금을 지불한 후 대여점 문을 나서서 내가 그 책을 이미 읽었던 기억이 났다고 하자. 곧바로 대여점으로 돌아가서 사장님께 대여료의 반환을 요구하면 사장님은 내게 반환할 의무가 있을까? 분명히 계약에 대한 합의는 하였지만, 이 경우에는 대여료 반환이 정당하다고 인정하는 분들이 많을 듯하다. 이와 같은 계약에 관해서 샌델 교수는 필수 조건 두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는 당사자 간의 합의이며, 둘째는 그 계약으로 인해 계약자 둘 다 이익을 얻어야 한다는 호혜 조건이다. 샌델 교수는 합의가 있어도 계약 이행 의무가 없는 경우와, 합의가 없어도 이행 의무가 저절로 생기는 예를 몇 가지 보여준다.
이 책에 대한 감상을 자세히 말하자면 끝이 없다. 철학자들의 이론을 정치나 경제 등의 어려운 사례가 아닌 우리 실생활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사례들에 접목시켜 놓았으므로, 오히려 철학 이론을 잊어버리는 것이 어려울 지경에 이른다고나 할까. 철학을 이토록 쉽게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내가 마치 위대한 철학자가 된 듯한 기쁨을 누리고 있다. 좋은 강의를 책으로 접할 수 있어 더없이 행복하다. 저자인 마이클 샌델 교수님과 역자인 이창신 님, 그리고 김영사 관계자 분들께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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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은 ‘선택’으로 이루어진다.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잠들기 전까지 선택으로 시작하여 선택으로 끝난다.(여기서 선택은 개인의 자유(wiil)와 같다.) 이런 선택의 가장 기본적인 지향점은 아무래도 ‘정의(선)’가 아닐까 한다. 사전적인 의미의 정의는 ‘언제 어디서나 추구하고자 하는 바르고 곧은 것’이라 하지만, 선택을 할 때 이미 우리의 행동은 ‘자유(will)’에 의해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정의는 우리 내면에 ‘이미 형성되어 있는 도덕성’에 근거하는 행동이라고 생각된다. 도덕성이 결여되어 있는 이들은 선택에서도 ‘바르고 곧은 것’과는 반대의 행동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최민식이 사이코패스로 열연한 <악마를 보았다>에는 정의로운 한 남자(이병헌)이 등장한다. 남자에게는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는데 사이코패스(최민식)에게 납치되어 성폭행 당한 후 잔인하게 살해당하였다. 이후 남자는 사이코패스(최민식)을 찾아 따라다니며 자신의 고통에 대한 복수를 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복수한 이 남자를 ‘정의’롭다고 할 수 있는가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나는 한동안 도덕적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감정이나 고통을 모르는 사이코패스를 모른 척 했다면 더 많은 사람이 희생당하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정의로운 사람이라도 누군가를 정죄할 권리가 있을까?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를 희생하는 공리주의 측면에서는 어쩌면 이 남자(이병헌)은 ‘정의’로울 수 있다. 그러나, 자유지상주의의 입장에서 사이코패스(최민식)의 자유권을 침해한 행위가 될 수 있다. 사회가 불평등하다고 국가가 개입하여 빌 게이츠에게 세금을 부과하여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줄 수 없는 것처럼, 설령 사이코패스라 하더라도 처벌할 수 있는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이렇게 사회는 점점 도덕이나 정의가 복합화 되어 가고, 사회의 구조 역시도 복잡다단해지고 있기 때문에 현재의 ‘정의’는 추구하기 힘든 , 도달하기 힘든 목표가 되어가고 있다. 극단적인 예는 영화만이 아니라 현실에도 널려있다. 오늘의 메인 뉴스에는 ‘엄마에게 뺨을 맞은 9살짜리 아들이 엄마를 경찰에 신고했다’ 가 대서특필 되었다. 기본 테제로서는 엄마이자 어른이기 때문에 아이를 혼낼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보여지지만 안티테제로는 아이의 사생활 침해가 성립된다. 그러나, 정의의 관점으로 볼 때 사건의 심각성은 현재의 정의가 봉착한 딜레마가 무엇인지를 적확하게 보여주는 뉴스라는 점이다. 위에 말했듯이 정의란 선을 지향하는 내적인 마음에서 비롯된다. 법이란 불법적 행위를 금하는 외적 명령이다. 바로 이 내적 명령과 외적 명령의 선택영역에서 발생하게 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사회 곳곳에서 발생한다. 누군가에게는 옳은 것이 누군가에는 그른 것이 될 수 있는 사회의 ‘정의’라는 것, 마이클 샌델은 정의가 무엇인지 알려면 고대의 정치철학사와 근대의 정치철학사에서 찾아야 한다고 한다. 미덕에서 출발하는 고대의 정의론과 달리 자유로 출발하는 근현대의 정의론을 통해 정의'란 무엇인지를 살펴보게 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이론은 현대의 자유주의의 사상적 출발선이라고 할 수 있는 공리주의의 벤담과 밀의 사상적 차이와 칸트, 롤스의 정의론까지 체계적이며 실질적인 예들로 정의를 짚어주고 있다. 그렇다면 결론은 무엇일까?
공리주의, 자유주의, 자본주의 이러한 사상들이 우리의 권리를 규정하는 정의의 원칙에 흔들리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매 삶에 선택을 하는 것처럼, 인류의 생존은 정의를 추구하는 것으로 발전해왔다. 사회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나쁘고 악한 것이라고 규정해왔던 것들이 언제고 '정의(선)'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앞에 서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 시장사회에 접어들면서 부유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삶이 분리되어 불평등이 심화되어가는 것처럼 '정의'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기본적인 내적 명령인 양심 '바르고 곧은 것'의 의미는 점점 더 모호해져 갈 것이다. 정의를 고민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 바로 우리 모두가 간절히 추구해야 할 '공동선'이자 정의에 이르는 길이 아닐까.
간만에 가슴 떨리는 책을 만났다. 이 책이 한참 베스트셀러였을 때, 나의 독서수준은 초등학교 수준이었다는 것을 먼저 고백해야겠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사두고는 선뜻 읽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거꾸로 <정의의 한계>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읽고 나니 조금 용기를 얻어 펼쳐보게 되었고 다 읽고나서도 아쉬움이 남아 EBS 강의 동영상을 보았는데 책으로 읽는 것보다 더한 감동이 느껴졌다. 강의실 가득 메운 학생들과 대담하는 마이클 샌델의 자신감이 넘쳐나는 말투에서 왠지 정의라는 것은 스스로 확신하고 확언할 때 더욱 견고하게 굳어가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보기도 하였다. 누군가 내게 정의란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나는 생각하는 것(thinking)에 답이 있다고 말할 것이다.
우리 권리를 규정하는 정의의 원칙은 미덕과 최선의 삶에 관한 주관적 견해에 좌우되지 말아야 한다. 정의로운 사회라면 개인의 자유를 존중해, 각자 좋은 삶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정의를 고민하는 것은 곧 최선의 삶을 고민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