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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순간을 직관하는 디카시 세계 - 이상옥, 『앙코르 디카詩』 이상옥은 디카시 운동을 선도하고 있는 대표적인 이론가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앙코르 디카詩』(국학자료원, 2010)에서 “디카시는 포토포엠보다 진화된 시다. 디카시는 자연이나 사물이 스스로의 상상력으로 시적 형상을 구축하고 있는 것을 디카로 찍어서 문자로 재현한 것이다.”(37쪽)라고 주장하며 디카시와 포토포엠을 분명하게 구별하고 있다. 그는 발상의 문제를 디카시 이론화의 핵심적 사안으로 삼고 있는 듯하다. 이를테면 그는 “디카시는 사진 이전에 자연이나 사물 속에서 시적 형상을 포착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52쪽)는 점을 전제로 ‘날시(raw poem)’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정확히 시적 발상의 개념과 맞닿아 있다.
‘날시’는 범박하게 말하면 현실 여기저기에 퍼져 있는 시적 정황을 (극)순간적으로 포착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아직 언어로 표현되지 않았으므로 시라고 할 수 없지만, 한 편의 시가 탄생하는 무한한 토대가 된다는 점에서 그것은 이미 시라고 할 수 있다. 이상옥의 ‘날시’ 개념은 디카시에 내포된 두 경계를 아우르는 과정에서 산출되고 있는바, “디카시는 언어 너머 혹은 언어 이전의 시적 형상을 전제로 한다.”(91쪽)는 그의 핵심적인 주장은 실상 이러한 ‘날시’ 개념에 밑바탕을 두고 있다고 하겠다. 자작 디카시인 「고성가도(固城街道)」의 시작 과정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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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봄날 늦은 오후 구형 프린스는 통영 캠퍼스로 달린다 차창을 스치는 환한 슬픈 벚꽃들 아랑곳 하지 않고 쭉 뻗은 고성 가도街道 의 가등은 아직 파란 눈을 켜고 있다. - 이상옥, 「고성가도」 전문 이 시는 ‘고성 가도’로 출퇴근하면서 쓴 디카시를 묶어서 출간한 디카시집 고성 가도의 표제시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비 오는 어느 봄날 통영캠퍼스 야간 수업을 하기 위해서 가던 길에 포착한 것이다. (……) 그 당시 고성 터널 가는 길가에는 벚꽃들이 만발했었다. 그때, 터널을 지나기 전에 차를 멈추고 주변의 벚꽃들을 감상해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강의 시간에 맞추기 위해서 차를 계속 달려야 했었다. 터널을 지나니, 고성 가도의 신호등은 노란불과 파란불이 동시에 켜져 있었다. 곧 빨간 신호로 바뀌게 되는 순간이므로 빨간불이 들어오기 전에 어서 속히 달려가라는 메시지로 읽혀졌다. 이는 삶의 진실을 환기하는 소위 날시였던 것이다. 그래서 운전 중에 그 순간을 디카로 포착하고 문자 재현한 것이 바로 디카시 「고성 가도」이다. (24~25쪽)
이상옥의 디카시에는 일상의 세목들을 직관하는 시인의 정서가 잘 드러나 있다. 그는 특별한 풍경을 찍은 사진보다는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을 찍은 사진을 선호한다. 자연 속 사물들의 시적 형상에 주목하는 여타의 시인들에 비한다면, 이상옥의 디카시는 디카나 스마트폰을 들고 일상을 살아가는 일상인의 삶과 밀착된 디카시를 쓰고 있는 셈이다. 위 시에 드러나는바, 그는 출근길에 포착한 풍경(날시)을 디카로 찍고(날시-사진), 그것을 문자로 표현(사진-언어표현)하는 디카시의 시작 과정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일상의 너머를 지향하지만, 일상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는 디카시의 실존적 조건을 이상옥의 시를 통해 간명하게 살펴볼 수 있는 셈이다.
디카시 창작은 그러므로 (극)순간적으로 포착된 ‘날시’가 디카시로 표현되는 시 쓰기 과정에서 성패가 좌우된다고 볼 수 있다. 시인의 눈에 감지된 ‘날시’는 디카를 통해 이미지로 저장되고, 그것은 문자로 옮겨져 한 편의 디카시가 만들어진다. 날시-사진(이미지)-문자(언어)로 이어지는 시화(詩化)의 과정은 ‘날시’에서 문자로 이어지는 기존의 시 창작과는 다르게 진행된다. 요컨대 기존의 시 창작 과정에는 부재한 사진 이미지가 제시됨으로써 디카시 창작의 과정은 날시-사진(①)과 사진-언어표현(②)의 두 단계로 나뉘게 된다. 굳이 ①과 ②로 구분하여 설명한 이유는, 사진과 시가 함의하는 내용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최초의 발상인 ‘날시’가 사진으로 재현되면, 사진은 하나의 의미체가 되면서 동시에 문자시를 낳는 또 다른 발상의 대상물로 시인에게 수용된다. 이상옥의 견해를 따른다면, 날시는 언어 이전 상태의 사물이 스스로 내뱉는 원초적 언어(영상)에 속하는 것이다. 사물이 말을 하면 시인은 그것을 사진으로 재현하고 문자로 표현한다. 에이전트(agent)로서의 시인의 위상은 이 지점에서 성립하고 있거니와, “디카시에서 시를 쓰는 주체는 사물”(37쪽)이라는 언명은 무엇보다 디카시가 사물 중심의 시학에 기울어지고 있음을 분명히 예증한다고 하겠다.
지은이는 사물 중심의 시학을 신성(계시성)이라는 말로 정리하고 있다. 중국의 쓰촨성에서 강진이 발생하기 전, 떼를 지어 어딘가로 이동한 두꺼비들의 사진을 예시로 들면서 그는 사회적 차원으로 확산될 수 있는 디카시의 가능성을 진단한다. 사진은 그 자체로 인간 문명은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어떤 지점이 있음을 보여준다. 환경운동가들의 수많은 말에는 반응을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두꺼비들의 행태에 드리워진 신비로운 현상에는 열광한다. 사물(자연)이 말을 한다는 주장은 바로 이 지점과 연결되는바, 이렇게 보면 “디카시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자연이나 사물에서 시적 형상으로 깃든 신성(계시성)을 포착하는 것”(100쪽)이라는 이상옥의 주장은 일면 타당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두꺼비의 이동 사진은 디카시가 아니라 날시-사진의 단계에 머물러 있다. 독자들은 사진을 보고 충격을 받은 것이지, 그 사진을 문자로 표현한 ‘디카시’를 보고 충격을 받은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계시성이 강한 사진들이 실릴수록 디카시는 사진-언어표현의 과정이 상대적으로 경시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띠고 있다. 사진 이미지와 언어(문자) 표현을 동시에 실현하려는 디카시의 목적은 이처럼 자칫 간과될 수 있는 문제들을 세밀하게 점검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사진과 언어 표현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디카시의 주요 이념, 곧 사물이 스스로 말을 하고, 시인은 그것을 받아 적는 사물 중심의 시학 또한 크게 보면 존재의 말을 기록하는 자로서 시인을 규정한 하이데거의 시학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 시(론)와의 변별점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디카시는 시가 진화한 형식의 새로운 시인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디카시에 ‘시’라는 명칭이 붙어 있는 한, 디카시는 사진 이미지를 언어로 표현한 문자시의 성과에 따라 그 가치가 평가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문자시의 가치가 사물의 신성(계시성)으로부터 생성되는 것이라면 기존 시의 논리와 디카시를 구분하는 것은 무엇인가? 디카시를 시의 진화 형식으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질문에 디카시 스스로 분명한 답변을 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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