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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종 님은 ‘티벳에서 온 편지’라는 책을 통해서 처음으로 접했던 저자이다. 그 분의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그 책 이후로 다른 글들은 거의 접해보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이 짧고 독특한 책이 지난 세월의 흐름만큼 개인적인 관심을 갖게 했다.
기존에 읽어왔던 인문 서적과 비교해서 이 책의 문체와 형식은 독특했다. 아마도 인문서적을 많이 접하지 못해서일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1:1의 대화체 느낌 안에 자유로움과 독특함이 묻어 나왔다. 상당히 은유적이면서도 그 안에서 21세기 현실과 이성에 대해 직설적이고 노골적인 비판이 엿보인다.
이 책은 학창시절에 한 번쯤은 들어봤던 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을 모티브로 했다. 500년 전 에라스무스는 그 당시 권력의 축에 있으면서 사람들을 현혹시키기도 했고 두려워하게도 만들었던 교회와 성직자를 대상으로 ‘우신예찬’을 통해서 신랄하게 비판하고 풍자했다. 저자는 이러한 ‘우신예찬’의 바보 여신을 다시 불러내고 인간들의 삶에 투영하여 21세기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사회제도 등을 비판하고 풍자한다. 이러한 근원적인 핵심인 지식을 날카롭게 파헤치며 비판했고, 이러한 부조리한 세상에서 적응하며 잘 살아보려는, 성공하려는 사람들의 노력들을 현자인 척하는 어리석음에 속아서 자신의 본모습을 잃은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따라서 지식과 이성에 의해서 제한되어진 가려진 틀을 깨고 본연의 모습에 존재하는 ‘건강한 바보’를 깨워서 참된 인간의 삶으로 돌아가기를 조언한다.
이 책의 바보 여신은 자본주의와 물질문명의 이중적인 양면성과 지식을 통해서 견고해진 이성이라는 틀 안에서 사람들이 어리석음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점을 바보를 내세워 현자 노릇하려는 현자우신을 통해서 속속들이 파헤치고 이러한 바보 상업주의를 경계한다. 이성을 거부하면서도 버릴 수 없는 굴레인 양 이끌어나가지만, 이를 통해서 어리석음 속에서 진정한 현명함을 이끌어내어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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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이성과 의식이 판치는 세상을 비판하는 듯한 글이다. 이성과 의식이 지나쳐 꾸밈과 가식이 넘치기도 하니까 비판할 만도 하다. 모든 자리에 너무나 점잖게 참여해야 하는 자리에서 조금만 튀는 행동을 하면 오버했다고 집에 돌아와서 "왜 그랬을까"를 반복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연스러운 행동이라 전혀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조금쯤은 바보스러운 행동을 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정신건강에도 좋단다. 그러한 모든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란다.
이상한 형태의 인형이 바보여신이란다. 관중을 모아놓고 앞에서 연설하듯이 글은 진행된다. 연설의 주체는 바보여신이다. 본인이 연설을 하고 사람들의 반응도 이야기한다. 반응이 본인의 이야기에 미심쩍어 하면 또 다른 논리를 전개해서 호응을 이끌어 내기도 한다. 어찌보면 생방송을 보는 듯 하기도 하다. 바보여신은 부의 신과 곡물의 여신 사이에서 태어났단다. 생부는 부를 관장하는데 좀더 공평하고 객관적으로 나누어 주기 위해서 눈을 감고 부를 배분한단다. 눈을 뜨고 있으면 지역..학력으로 연결되는 이들에게 더 분배하게 될까봐 아예 눈을 감고 한단다. 생부가 모든 이들을 정화시킬때 정화되지 않는 이들이 있었단다. 그들이 현자로 지칭하는 지식인들이자 권력의 고위층이란다. 그들에게 절망감을 느낀 생부가 바보여신을 키울때에 거의 세상의 이성을 따라가지 않도록 철저하게 바보로 키우셨단다.
처음에는 재밌네 하다가...그 담엔 뭐 이런글이 있나 하다가...어 그럴수도 있겠다란 생각이 들 정도다...그러면서 점점 고개가 끄득 끄득 해 진다. 점점 바보여신의 말에 공감이 가는 것이다. 어이없는 논리인것 같지만 또한 그것이 사실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사실이기도 하지만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요즘 세상에 어쩌면 바보로 살아가는 것도 한 방법일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든다. 너무 아는체 해도 보기가 안좋다. 모두가 잘 났고 모두가 현명하고 모두가 목에 힘을 주는 세상이기에 삶을 살아가는데는 편치않다. 가끔은 바보처럼 모든것을 어깨에서 손에서 놓아버리면 삶은 더 윤택해지고 정신건강에도 더 도움이 될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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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시 쓰는 21세기의 '우신예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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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스무스의 우신예찬 500주년인 21세기에 김영종에게 다시 태어난 책의 이름은 "헤이 바보 예찬"이다.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선택한 책이였다. 사실 요즘 우리 현실이 똑똑하고 정확한것에만 너무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는것 같다. 느린것 어수룩함은 나태하고 안좋게 해석되고 있기도 하다. 난 좀 바보에 가까운것 같다. 남들과 함께 바쁘게 빠르게 살아가는 그 장단이 힘겹다. 삶과 철학이 담겨진 내용이라서 그런가 조금 생소하고 이해안가는 내용도 있지만 빡빡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에게 충고를 잊지않는다. 이제 30살 겨우 먹은 나이.. 세상에 쓴맛, 단맛을 다 아는 나이는 아니지만 살짝 욕심을 내려놓으면 마음이 편해진다는것쯤은 안다. 현대인들은 오직 자기만을 위한 삶을 살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보이지 않는 손에 조종되고 있다는것. 예를들어 빌딩, 돈, 냉장고, 여당, 야당, 좌우등을 벗어나서 보이지않는 손을 똑바로 보고 조롱할때만 개인도 사회도 뇌의 통제권을 되찾아 살아날수 있다고 한다.
솔직히 앞만보고 살다보면 가끔씩 내가 무엇을 위해 이렇게 살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든다. 저자의 말처럼 누군가에게 조종당하여 기계처럼 살고있지는 않은지.. 정도 없고 점점 메말라가는 개인주의적 성향들로 가득찬 현대사회~!!
옆사람도 보고 앞도보고 힘들면 조금 쉬어가면서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느끼면 살고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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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에서 성직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한 책이 있었다. 네덜란드의 인문학자 에라스무스가 1511년에 쓴 『우신예찬』이 바로 그 것. 당시 에라스무스는 모리아(바보 여신)를 친구 이름에서 따온다. 그래서 이 책은 『모리아예찬』이라고도 한다. 이 책에는 철학자, 신학자들의 쓸데없는 논쟁, 신학자, 교황을 비롯한 성직자들의 위선, 그리고 교회의 부패 등에 대해 신랄하게 조소한다. 그런데 500년이 지난 21세기에 바보 여신이 다시 나타났다. 김영종이라는 저자를 통해서다.
『헤이, 바보 예찬』은 500년전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시대의 변화에 따른 차이다. 그래서 교회의 부패 따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대신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이 사람들을 어떻게 변화를 시켰고, 이성과 지성이라는 허울 아래 내면의 자신을 잃어버리는 인간들을 향해 바보로 돌아갈 것을 요구한다.
바보 여신이 바라는 세계는 차별이 없고 모자람이 없는 풍요로운 세계다. 축제의 세계다. 그래서 자신의 생부는 '부의 신'이고, 외할머니는 '곡물의 여신'이다. 그리고 자신의 유모는 '무지'와 '만취'다. '자존심', '아첨', '망각', '게으름', '쾌락' , '경솔', '안일함'은 바보 여신의 친구다. 이들은 '절제와 금욕의 신'을 무력화 시키는 존재로 축제의 세계를 멋지게 장식하기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될 친구들이다.
바보 여신은 미래의 희망을 '계산과 계획의 신'이 만들어 낸 가장 무서운 '악마의 유혹'이라고 한다. 교육에 의해 세뇌당한 것으로 손으로 잡을 수 없는 생각과 행동을 규제하는 고정관념이라는 것. 나온 역사도 500년도 안되는 짧은 기간이란다. 그래서 현재만이 희망이라고 당당히 규정한다.
흔히들 이야기 하는 것 중 '배움은 신성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바보 여신은 과감히 가장 신성치 못한 것으로 규정해 버린다. 이유는 평가라는 것을 통하기 때문이란다. 능력을 평가하는 건 사탄이 하는 일로, 배움이 신성한 것이 되려면 평가가 아니라 점검을 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 이유다. 이는 무한 경쟁에 내모는 우리의 교육 현실을 잘 표현해 준다고 느껴진다.
별로 많지 않은 분량이지만 책 읽기가 약간은 난해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대신 몇 번 반복해 읽다 보면 저자가 바보 여신의 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을 간파할 수 있다.
책이 흥미를 돋구는 것은 각설이 타령, 야바위 노래, 랩, 판소리 등 다양한 형태의 글로 독자에게 다가 온다. 김영종 저자는 지금 프레시안에 『잡설』이라는 것을 연재 중이란다. 책에 따르면 이 글이 『헤이, 바보 예찬』의 주석서 격이란다. 한번 확인 해 봐야겠다.
이 글을 쓰는 지금 가장 최근의 글은 <엘리트주의만 남은 진보②>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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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 바보예찬
책을 읽다보니 왠지 모를 통쾌함이 느꼈집니다.. 이 책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과, 그리고 우리이 만든 이 거대 문명사회에 대해 통열한 비판을 가하고 있네요.
이성의 지배와 우상의 배격, 제국주의와 근대화, 기독교의 승리와 자본주의 등이 만든 현재의 왜곡된 세계속에서 우리는 덫에 걸렸다고 말하네요.. 세상은 진보하고요.. 진보의 끝은 하나님의 세상, 유토피아가 기다리고 있지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유토피아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어제보다 나은 내일을 살아야합니다.. 오늘은 빛나는 내일을 살기위한 수단에 불과하죠..
우리는 미래에 대한 보상을 담보로 오늘을 반납했습니다.. 만약 미래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오늘을 즐기는 사람이 있다면 지탄의 대상이고 어리석은 자이죠..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은 논리정연하게 이루어져있죠.. 그리고 선과 악으로 구분되어져 있죠.. 모든 것은 선이 아니면 악에 속합니다. 게으름, 직감, 비이성, 단잠, 정욕, 나태, 분노와 같은 것들은 과거 우리와 친숙한 것들이었지만 이제 우리사회에서는 추방당해야할 것들이죠.. 문명인인 우리는 항상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부지런해야 하며, 무엇인지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자신의 몸값을 항상 높이려고해야 하고.. 궁극적으로 [돈]을 잘 벌어야 하죠..
작가[김영종]은 현재 우리의 모습을 뒤돌아보며 우리가 어쩌면 어리석은 삶을, 노예와 같은 삶을, 오늘의 빼앗기고, 나의 자아감을 빼앗기고 그저 부품처럼 살고 있지는 않는지 강하게 어필하고 있네요.. 아이처럼 시간에 구속되지 않고 항상 즐거워하며 무엇이든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춤추며, 노래하며, 놀고 또 놀고 피곤해서 잘때는 정말 어떤 근심, 걱정없은 단잠을 자는 모습이 진정한 우리의 모습이 아나냐!!!! 그래서 우리의 진정한 모습을 다시 찾아보자.. 어때 할 수 있지 않느냐!!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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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 바보예찬』의 원전이 되는 『우신예찬(Moriae Encomium)』은 에라스뮈스의 책으로, 빛나는 르네상스 문학 중 하나로 손꼽힌다. 네덜란드의 인문학자인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는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부패한 기성교회에도 급격한 루터파에도 속하지 않아 스스로 고립을 자초했던 인물이지만 학문적인 면에서는 뛰어난 실력과 명성을 가지고 있던 인문주의자였다. 그리스, 라틴 고잔의 인문정신과 기독교의 융합을 꿈꾸었던 그는 보편적 인간성에 기초한 미덕에 대한 믿음, 중용과 관용을 통한 개혁이 가능하다는 믿음, 위대한 고전 저작을 읽고 이해하는 것을 통해 인간이 좀 더 사려 깊고 선해질 수 있다는 믿음을 간직했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쓴 『우신예찬』은 과연 어떤 내용일까? 알프스를 여행하는 중에 떠오른 수도원 생활을 풍자한 작품을 일주일 동안 정리한 책이라는데, 어리석음의 여신인 모리아가 화자(話者)로 등장하여 어리석음을 통해 진정으로 현명한 것이 무엇인지 밝히단다.
사실 이 책, 김영종 작가가 쓴 『헤이, 바보예찬』 이란 책이 아니였다면 관심도 가지지 않았을 책이었을 것이다. 『우신예찬』이라니~~ 이 어려워만 보이는 책을 어떻게 읽느냔 말이냐. 그런데 『헤이, 바보예찬』을 읽고 나니까 너무 유쾌하기도 하고 그가 풍자하고자 하는 바가 꼭 『우신예찬』에서 차용한 것 같아서 찾아봤더니 알게 된 내용이다. 처음에 봤던 ‘우신’이 뭔가 싶었는데 ‘어리석은 신’이란 뜻이란 것도 이제서야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우신예찬』 이란 책은 에라스뮈스라는 과거의 인물이 썼을 뿐이지 그다지 현학적이거나 어렵지 않은 글이라는 것을 알게 되니 상당히 가깝게 느껴진다. 그런데 글의 진행방식이 참으로 독특했다. 『헤이, 바보예찬』의 서두를 읽으면 누군가가 등장해서 아니, ‘바보 여신’이 등장해서 독자에게 말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뜬금없는 일이라 읽기에 좀 어색했기 때문에 혹시 『우신예찬』도 그런지 궁금했다. 아직 읽지 않았긴 했지만 김영종 작가가 『우신예찬』에 맞춰서 쓴 것이니 아마도 서술방식이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에라스뮈스가 신학자, 군주, 궁정인, 교황, 추기경, 주교, 수도사, 신부 등 그 시대의 지식인과 지도층을 모두 풍자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처럼 김영종 작가도 현재 우리가 당면한 하나의 사실을 공격하기에 바쁘다. 가진 자는 더 가질 수 있게 되고, 못 가진 자는 그 빈함을 대물림할 수 밖에 없는 자본주의의 현실과, 그 아래에서 신음하며 소리없이 살아가야 하는 우리네 삶에 대해, 공공 장소에서의 오버를 하지 못할 정도로 짓눌려 사는 인간의 가슴 아픈 체면에 대해서 시니컬하게 공격한다. 세상에 있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바보와 똑똑한 체 하는 바보들 중, 똑똑한 체 하는 바보를 가장 신랄하게 비판한다. 무시당하기 싫어서, 누군가를 이겨먹으려고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한다면 그는 그 무지한 상태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이 분명한 그들을 깨우치지 않으면 안되니까. 누군가 말했던 것처럼, 아는 것은 안다고 말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지만 그런 현실을 직면할 수 있을 때야 비로소 제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을, 아니 축제를 즐기기 위해 방종과 나태함을 요구하는 ‘바보 신’에게서 벗어나고 싶은가. 아마도 기회만 주어진다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충분히 ‘바보 신’에게서 절대 충성할 수 있을 것임을 안다. 이 세상이 추구하는 모든 것에 다 반기를 들라고 하면서 오히려 홀가분해지는 자신을 느낄 수 있게 하는 ‘바보 신’을 어찌 미워할 수 있을까. 그런 바보라면 나조차도 제일 앞줄에 설 것이다. 다만 절대적인 진리조차도 부인하는 그이기에 나로서는 그의 모든 주장이 달갑지는 않지만, 사회적으로는 이런 파격적인 잡소리도 필요하다고 본다. 또한 과거 에라스뮈스가 『우신예찬』를 발표한 때처럼 이번 김영종의 『헤이, 바보예찬』이 발표와 동시에 센세이션을 일으키거나 금서(禁書)될 가능성은 전무하지만, 이 시대에는 이 시대만의 풍자가 필요하지 않은가. 요즘엔 세상이 팍팍하게 돌아가니 이런 잡설이나 풍자가 무척이나 반갑다. 유쾌함이나 황당함이 일회성으로 끝나버린다고 해도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하나로 모아진다면 불가능할 거라 여겼던 일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는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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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소재와 유니크해보이는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요즘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정말이지 많은 것들을 예찬하고 우러러보고, 또는 이상화하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이도 저도 아닌 '바보'를 예찬한다니 이게 웬 해괴망칙한 이야기인가. 처음에는 그저 갸우뚱 거릴 수밖에 없는 이러한 김영종님의 이야기가, 책 한장 한장 넘겨가면서는 그저 처음에 제목이나 표지를 보면서 느꼈던 것처럼, 괴짜처럼 들리지만은 않게 된다.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어떤 것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을까. 우리는 아주 어렸을때부터 무언가를 암기하고 배우고 학습하면서 내 머릿속에 무언가에 대한 정보를 끊임없이 넣어가며 살아가고 있기를 반복하고있다. 그건 기억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아주 어린시절부터 꾸준히 해왔던 학습방법일진데 그것이 지금 몇십년이 지나서 소위, '성인'이나 '어른'이라고 일컬어지는 나이에 와서도 역시 하나도 변하지 않고 무언가 분야에 대해서 달라졌을 뿐. 아니면 조금더 그 깊이가 깊어졌을 뿐. 그 어떤 것도 무엇하나 쉬이 변하지 않은 채로 여전히 수많은 정보와 지식들을 머릿 속안에 차곡차곡 쌓아가기만을 반복하고 있는 현실 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들과 정보들을 활용하여, 우리는 우리가 정해놓은 괜찮은 사람, 이라는 지성인 혹은 지식인이라고 하는 잣대로 우리들을 나누기 시작하고는 모든 일상과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 있어서도 이성이라는 것으로써 잠재우고 깨우치곤 한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토록 많은 것들을 습득하고 학습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아무래도 (그 누구라도 이렇게 대답할 것 같다) 지금보다 조금은 더 나은.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것들이 아닐까. 그렇다면 행복이라는 것이 무엇이기에 그러한 삶을 위하여 우리는 이렇게 어려서부터 거의 죽을때까지 학습을 반복해야 하는 걸까. 소위 많은 생각과 지식, 지성으로 똘똘 뭉쳐있다고 말할 수 있는 고대의 철학자들을 생각해보자. 과연 그들은 최고의 인내력과 결단력과 학습의지로 인해, 그 누구보다도 행복한 삶을 살았을까. 과연 그들은 못배우고 무지하고 그저 삶을 (자기 나름대로는) 즐겁고 유쾌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행복했을까. 대답은 No. 단언하건데, 절대 아니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위대한 고대의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는 죽으면서 외로움에 치를 떨었다고 하지 않는가. 철학을 하는 가장 궁극적인 이유는 행복해지기 위한 것이라고 할수 있을진데, 이렇게 된다면 지식이라는 것보다도 우리네들의 삶에는 훨씬 중요한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 다시 한 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무엇을 예찬하며 살아야 하는 걸까. 김영종님의 이 책, <헤이 바보예찬>이 그 대답을 주리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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