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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판관 포청천’ 이라는 외화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지방관이던 포청천이 공명정대하게 일을 처리해 나가는 이야기를 담은 것이었는데, 드라마 말미에 이르면 작두를 대령하라고 호령하던 포청청의 일성은 유행어로 회자될 정도로 우리 대중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던 기억이 난다. 주인공 포청천은 드라마 상의 캐릭터가 아니라, 중국 송나라 대 청렴하고 강직했던 실존인물로, 중국의 대표적인 청백리였다고 해서 더욱 관심을 끌었다. 중국의 청백리 제도는 고려에 이르러 우리나라에도 도입되었고, 조선으로도 이어졌다. 조선에서는 청렴결백한 관리 청백리는 표창하고 부정부패한 장리는 징계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청백리는 태조 때 다섯 명을 뽑은 이후 모두 217명에 달했다고 하는데, 청백리안에 기재된 관료들에게는 승진과 보직은 물론이고 사후에는 자손들에게 벼슬이 내려질 정도로 우대해주었다. 반대로 부패한 관리는 장리안에 수록함으로써, 본인의 관직생활은 물론이고, 그 자손들에게까지 과거응시를 제한하는 제도를 통해 관료들을 관리했다.
황희나 맹사성, 성현, 이언적, 조광조, 이원익, 이항복, 유성룡, 이덕형 등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청백리이다. 이들은 수기(修己) 한 뒤에 치인(治人)해야 한다는, 개인에게 고도로 도덕성을 요구했던 유교적 덕목에 충실한 처신과 행정을 보였던 것이다. 청백리 중에서 선조 대의 심희수와 이광정이 눈길을 끈다. 심희수는 소싯적에는 공부와 담쌓고 지내다가 기생 일타홍의 헌신적인 뒷바라지로 관리가 된 경우였고, 이광정은 다스리던 고을에서 혼기가 꽉 차고도 처자 다섯을 중매해주는 인간미 있는 목민관의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이다.
조선의 청백리 34인에 대한 자취를 더듬다 그들의 생몰 연대를 보고 셈해봤더니, 청백리 가운데에는 장수하는 인물이 많았다. 황희는 아흔한 살에, 맹사성은 일흔 아홉, 이원익 여든 여덟 등 당시로서는 놀라울 정도로 장수를 누렸다는 것은 그들이 생활 속에서도 절제하고, 수기를 실천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 아닐까 짐작하게 한다.
이이는 ‘격몽요결’을, 정약용은 ‘목민심서’를 통해 전통시대 관료가 가져야 할 심성과 행동의 준칙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이는 청렴과 근면을, 정약용 역시 ‘청렴이야 말로 수령의 본분이자, 선과 덕의 원천’이라고 청렴을 강조할 정도로, 조선의 관리들은 청렴에 대해 유난히 강하게 주문받고 있었던 것이다. 관리들이 부패할 경우에는 백성들은 관리들에게 직접 수탈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기에 조선시대에는 관리들에게 유학정신에 입각한 청렴을 갖추도록 요구하는 것이 가장 강한 견제장치로 작동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조선시대 관료들이 유교의 영향으로 개인적 도덕성을 갖춘다 해도, 조선시대는 법치보다는 인치에 의존했던 전근대적인 통치 방식이었고, 더구나 지방관의 경우 그들이 가진 막대한 재량권에 비해, 청백리나 장리제도 또는 암행어사제도로 관리들을 견제하기에는 제도적 장치가 미흡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가 없다.
조선 말기에 민란이 수시로 발생하게 되는 데에는 지방 관리들의 가렴주구가 큰 원인을 차지하고 있다. 1894년 동학농민 전쟁만 하더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의 학정이 직접적인 도화선이 됐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조선왕조의 통치 체제는 과거를 통해 선발한 우수한 인재들을 관료로 등용해, 그들이 서로 견제하는 시스템으로 운영됐는데, 그런 점에서 보자면 관리들의 부패는 조선사회의 몰락을 가속시킨 요인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전근대적인 관료상인 청백리를 다시 언급하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지는 일로 비춰질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공무원이 뇌물을 받는 것이 아직도 관행처럼 여겨지고, 전직 대통령 일가까지 검찰에 소환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공직자의 청렴이 여전히 문제되고 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말로는 법치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사적인 관계에 의존해서 공적인 영역의 결정이 이루어지고 있는 전근대적인 관행이 유지되고 있다는 우리 사회의 미성숙한 일면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으니 말이다. 그것은 법치나 제도적 장치만으로는 관료사회의 투명성과 청렴이 확보되지는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비록 시대는 더 복잡해졌고, 요구되는 관료의 모습도 달라졌지만, 조선의 청백리들은 수신제가치국 평천하를 되새기며, 공적인 영역과 개인적인 도덕성을 별개로 분리시키지 않고 실천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만 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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