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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인에 대한 처절함에 가까운 집착이 '순수'라는 단어와 어울리기 위해서는 최소한 몇가지 추가적인 조건들이 필요하지 싶다. 일단 그 집착의 대상물(또는 사람)이 그것에 대해 거부감이나 부담감을 갖지 않아야 할 것이 첫번째 조건이 될 것이요, 그 집착을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이 최소한 연민은 느낄지언정 혐오스러움을 느끼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 두번째 조건이 아닐까 싶다.
책을 읽으며 어쩔 수 없이 그것을 바라봐야하는 '주변인'이 되어버린 나로서는 이 책의 제목인 '순수'의 의미를 지켜주기 위해 최소한 혐오스러움을 느끼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예의라 생각해.. 될 수 있으면 주관적인 감정의 개입을 가까스로 자제하는 '숨고르기'를 여러차례 했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서른살에 약혼을 앞둔 케말은 우연한 기회에 자신보다 열 두살이나 어린 먼 친척 퓌순을 만나게 된다. 어린 시절 잠깐 만난 기억만 있는 그녀의 성숙한 모습에 반해 버린 케말은 곧 그녀를 사랑하게 되고, 약혼식을 앞두고 거의 매일 그녀와 사랑을 나누게 된다. 약혼식에 참석한 후 곧 종적을 감춰버린 그녀를 찾아 케말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현실을 외면한 채, 그녀의 흔적을 쫓아가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작품의 처음에서는 오르한 파묵의 문체에 매료되어 의외로 깊은 '몰입'을 맛보았다. 그러나 이야기의 흐름이 깊어지면서 무섭도록 섬세한 집착의 묘사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무책임함과 끈질김이 마치 '순수'와 '깊은 사랑'의 증거인양 지루하게 페이지를 이어갈 즈음에는 주인공 케말의 행동이 철없는 아이의 불장난 같이 불안해지며, 그동안의 몰입에서 유발된 마음 속 '공감'의 공간에는 어느새 '쓴웃음'이 대신 자리잡고 있었다.
진정으로 아름다운 사랑, 순수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랑이라는 건, 사랑하는 상대방의 행복을 빌어주고, 또 상대방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라 그동안 늘 들어왔고, 또 그리 믿어왔었는데.. 이 소설의 주인공 우리의 '케말'은 그러한 사회적 통념의 '순수'와는 또 다른 종류의 순수함(?)을 보여주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타인의 상처나 고통에 무심해질 수 있을 정도의 집착과 열정이 똘똘 뭉친 '새빨간색의 순수'.. 철이 없고 무모한 어린아이의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순수같은 것?
케말이 아주 오랜 기간동안 보여준 집착에 당사자 퓌순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망가져버린 남자가 정말 사랑스러웠을까.. 그리고 행복했을까? 그가 그녀에 대해 거의 병적인 사랑을 간직해온 동안 그녀는 싫고 좋음의 분명한 반응없이 왜 그리도 무심했던 것일까? 그녀도 계속 그를 마음속으로 깊이 사랑해온 것일까? 현재 남편이 그녀에 대한 사랑을 식히고, 아름다운 여배우와 외도를 하지 않았어도, 그녀는 정말 케말에게 돌아갈 결심을 하였을까? 그를 이용하여 영화배우로서 성공하고 싶은 욕망이 그의 집착의 시기동안 그녀가 그를 외면하지 않은 진정한 이유는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들이, 행간에서 튀어나오는 '불순'한 느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읽는 내내 나의 '순수함'을 지켜주려는 의지를 괴롭혔지만.. 그것은 작품을 읽는 나의 자세, 나의 순수하지 못한 마음 때문이라며 그런 생각들과 느낌을 작품과 결부시키지 않고, 예의 상 나만의 문제로 애써 안아냈던거 같다. (어떤 의미에선 대견하달까.. -.-)
죽음, 짧은 만남 뒤에 곧바로 닥친 영원한 이별이 결국 '순수'를 끝까지 간당간당하게나마 지켜낼 수 있었던 마지막 보루가 되버린건 아닌가 싶다. 사랑이라는건 '어린시절'과 마찬가지로 다 지나고 나면 아름다운 추억으로만 남아버리는 법이니.. 결국은 그 '지나감'이 순수를 완성했다고 해도 될까.. 파묵은 이 소설로 자신이 기억되기를 원한다고 했지만, 어쩐지 '그러지 마요..'라고 그를 쪼금은 말려보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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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지명도를 가지고 있는 오르한 파묵. 그는 이 소설로 자신이 기억될 것이라 자신한다. 과연 이 소설은 그만큼 대단할까?
오르한 파묵의 '순수박물관' 2권을 펼친다. 1권의 연장선에서 케말은 정확히 칠년하고도 열달간, 2864일 동안 퓌순을 만나러 저녁식사 시간에 추쿠르주마(퓌순의 집)으로 간다. 강박관념이 휩싸인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 것이라는 것을 자신도 알지만 오직 한가지, 퓌순과 결혼하게 되리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인간에게 삶은 진심을 다해 살아가야 하는 행복한 것이 아니라, 압력과 처벌 그리고 믿을 수 밖에 없는 거짓들로 이루어진 좁은 공간에서 연기를 계속해 가는 것임을, 이즈음 처음으로 느끼기 시작한 것 같다 (2권 17쪽)". 이럴 수 있었던 배경엔 터키인 특유의 '함께 앉아있는' 의미로 설명되어진다. 퓌순의 눈빛, 행동 하나하나에 행복과 희열과 상심을 하지만, 긴 세월이 지나 이 순간의 나날들이 행복이었음을 그는 떠올린다.
내게 있어 행복은 이처럼 잊히지 않는 어떤 순간을 다시 경험하는 것이다. 우리 삶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처럼 선이 아니라, 이런 감정적인 순간들을 하나하나 놓고 생각하는 것임을 알면, 연인의 식탁에서 팔 년을 기다린 것이 조롱거리나 기행이나 강박관념처럼 보이지 않고, 그저 퓌순 가족의 식탁에서 보냈던 행복한 1593일의 밤으로 보일 것이다. 추쿠르주마에 있는 집에 저녁을 먹으러 갔던 모든 날들을 - 가장 힘들고, 가장 절망적이고, 가장 자존심 상하는 날조차 - 지금은 크나큰 행복으로 기억하고 있다. (2권 37쪽)
그는 집착적으로 사랑하지만 '소유할 수 없는' 퓌순에게서, 작지만 어떤 일부를 떼어내는 행복의 하나로 그녀가 한번이라도 만졌던 물건을 가지고(가족들도 알고있는 훔치는 행위) 멜하메트 아파트(그녀와의 추억이 있는...)에 가져가 상실의 아픔을 행복으로 대체한다. 물론 나중에 순수박물관에 전시하는 주요한 전시자료가 된다. 그에게 있어 사랑은 퓌순이 거닐 때나 앉을 때 그녀를 바라보는 애착이라는 표현은 순수한 사랑에 빠져본 사람은 그 의미를 안다. 세상의 심오함과 아름다움과 무한함이 함께하는 그 감정의 포만함을...
결혼식을 올리전에 떠나는 유럽여행! 첫 호텔 '그랜드 세미라미스'에서 운전사 체틴의 주관하에 약혼 반지를 끼고 간단히 약혼식을 치룬다. 모든 것이 아름답고 의미있는 밤이다. 퓌순은 그에게 파고 들었고, 그는 그녀의 그 멋진 향기를 맡으며 잠에 빠져 들었다(2권 326쪽).
정말 식상한 3류 스토리를 이리저리 늘려놓았다고 생각할 즈음 본격문학의 정수가 시작된다. 사고에서 살아남은 케말은 퓌순을 잊기위해 파리의 작은 박물관을 돌아보다가, 모든 사람들이 낭비했다고 생각하는 그의 삶을, 퓌순이 남겨놓은 것들과 그의 이야기들과 함께 누군가에게 교훈이 될 수 있는 박물관에 전시해 설명할 수 있을거라고 상상하며 행복해 한다. 그리고 퓌순이 살던 집을 박물관으로 내부를 바꾼다. 진정한 박물관은 '시간'이 '공간'으로 변하는 곳이다(372쪽)는 말이 마음의 공동(空洞)을 울린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순간들로 이루어진 선이 시간이라고 했던 것처럼, 물건들이 모여 선을 이루면 하나의 이야기가 될 것임을 깨닫고 (375쪽) 그는 작가 오르한 파묵을 만난다.
이렇게 순수박물관은 끝이 났다. 과연 순수한 사랑이었는지는 좀 더 많은 시간이 지난다면 더 깊이 정리가 되겠지만, 한 여인을 지순하게 사랑한 케말의 끌림과 행동력은 머릿 속의 울림통을 가득 채우고도 남는다. 나의 지나간 가슴앓이도 케말과 별반 다르지 않았으니... (가슴 앓이만...^^)
케말이 전하는 마지막 말은 안타까움으로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하면서도 씁쓰레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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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에서 퓌순이 사라진 다음에서야 그녀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케말이 그녀의 종적을 뒤쫓지만 묘연하기만 하던 그녀와 가족이 사는 곳을 결국은 찾아내게 되고, 그녀가 원했던 자전거와 귀걸이 한짝을 돌려준다는 핑계로 집을 찾아가지만 그녀는 이미 영화감독 페리둔과 결혼을 한 사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집을 찾아가기를 2864일... 이 시점에서 퓌순에 대한 케말의 사랑을 재평가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집념이라고 매도하기보다는 작가가 의도한 순수함에 동의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퓌순과의 관계를 시벨과의 결혼과는 무관한 혼외의 사랑으로 가져가려는 단순한 생각이 잘 못된 선택이었기에 먼 길을 돌아가는 엄청난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고, 작가는 이러한 케말의 사랑을 집념이라는 값싼 단어보다는 순수함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이겠습니다. “독자들이나 관람객들은 내가 그 순간과 상황을 경험할 때는 전적으로 진심이었으며 항상 순수했다는 것을 제발 기억해주었으면 한다.(89쪽)”
그러면 퓌순이 케말 앞에 다시 나타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 점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전편의 끝장면에서 가난한 퓌순이 영화배우가 되려는 꿈을 이루기 위하여 케말이 영화제작을 지원하는 도움이 절실해서였던 것처럼 묘사되고 있습니다. “돈 때문에 나를 만난다는 것을 이제는 숨기려고조차 하지 않았다.(15쪽)” 퓌순의 어머니 역시 그런 소망을 노골적으로 지원해달라 요청하기도 합니다. 케말은 퓌순의 그런 의도가 불순하다는 생각에 거리를 두지만 결국은 퓌순과 그녀의 남편 페리둔을 지원하기로 결심하게 되는 것은 그녀에 대한 절절한 사랑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케말은 신체적 접촉을 거부하는 퓌순의 눈치를 보게 되는데, 그러다 보니 퓌순의 집을 방문하여 가족들과 시간을 함께 하는 것에도 감지덕지 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고 보니 중학생 무렵 친하게 지내던 친구의 집을 찾아가더라도 가끔 바둑을 두기도 하지만 따라 책을 읽던가 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이 편하게 느껴졌던 것인데, 이런 기억에서 케말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페리둔이 시나리오를 완성하여 촬영에 들어가지만 퓌순은 상대 남자배우와의 신체적 접촉을 꺼려하는 페리둔과 케말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면서 배우로 데뷔를 하지 못하게 됩니다. 퓌순의 미모에 반한 다른 영화감독이 그녀를 기용하고자 하였지만, 역시 두 사람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이런 정황이 퓌순의 마음에 상처로 남았던 모양입니다. 한편 페리둔과 퓌순의 결혼생활에는 비밀이 있었고, 결국은 페리둔이 감독한 영화의 주연배우 파파트야와 사랑에 빠지면서 퓌순과 페리둔이 파경을 맞게 되고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케말에게 다시 기회가 주어지게 됩니다. 처음 만났을 때 쉽게 몸을 열었던 퓌순이었지만, 페리둔과의 결혼생활에서 육체적 관계는 없었다고 강변하는 한편, 케말과 결혼을 약속하고 있음에도 혼전관계를 거부하는 단호함을 보여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해답을 아직 얻지 못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케말은 퓌순과 어머니 네시메고모와 함께 유럽으로 신혼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불가리아에서인가 술을 마신 퓌순이 차를 운전하면서 버드나무로 돌진하여 자신은 현장에서 죽음을 맞고 케말은 큰 부상을 입었지만, 살아남게 되는 불행한 상황을 맞게 된다는 점입니다. 이런 상황에 앞서 배우로 데뷔하지 못한 자신의 처지에 대하여 강한 비난을 퍼부었다는 점으로 보아 퓌순은 자신의 운명을 이미 결정하고 있었다는 추측이 가능해집니다. 그래도 케말과 동반자살을 꿈꾸었다고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케말은 퓌순이 떠난 다음에 그녀와 연관이 있는 물건을 수집하며 그녀를 기억하려 노력하였는데, 퓌순이 죽은 다음에는 그녀가 살던 집을 아예 박물관으로 꾸며 그녀와 관련된 물건들을 전시하려 기획하게 됩니다. “소설과 박물관의 목적은, 우리의 기억을 진심으로 설명하여 우리의 행복을 다른 사람들의 행복으로 만드는 것(113쪽)”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름하여 순수박물관인데, 순수박물관을 기획하는 과정에서 5,723곳의 박물관을 직접 방문하여 참고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마치 저자가 이토록 많은 박물관을 방문한 것으로 오해할 수 있어 보입니다. 작가의 나이를 고려하였을 때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케말이 방문한 박물관 가운데 프랑스 일리에콩브레에 있는 마르셀 프루스트 박물관이 있습니다. 오르한 파묵이 소설 <순수박물관>에서 케말의 행적을 그리는 과정이 프루스트의 소설을 읽는 느낌이 드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알 듯도 합니다. 작가는 퓌순의 아버지 타륵씨의 벽시계 이야기를 통하여 시간과 기억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학>에서 ‘지금’이라는 하나하나의 순간들과 ‘시간’을 구분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분자처럼, 이 하나하나의 순간은 나뉠 수 없고 쪼개질 수 없다. 시간은 이런 나뉠 수 없는 순간들을 합친 선이다.(35쪽)” 즉 순간들을 모은 시간이 바로 기억이 된다는 점입니다.
기억에 남아있는 것들을 글로 남긴 프루스트는 “우리의 사념, 우리의 생활, 곧 실재를 구성하는 것은, 서서히 기억에 의하여 보존된 일련의 부정확한 인상의 사슬인바, 거기엔 우리가 실제로 겪은 바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이른바 ‘체험’의 예술이란, 이와 같은 허위를 재현시킬 뿐이다.(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1; 돌아온 시간, 289쪽)”라고 적어 기억의 불확실성을 짚고 있기도 합니다.
케말은 바로 시간을 기억하고자 순수박물관을 만들려는 생각을 하게 되고, 파묵에게 부탁하여 퓌순과의 사랑이야기를 소설로 만들어달라 부탁하였다는 것입니다. 파묵이 <소설가와 소설>에서 언급한 것처럼 <순수박물관>의 주인공 케말인 것으로 혼동하는 독자들은 무언가 착각하는 것으로 보면 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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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한 파묵의 글을 처음 대했던게 아마 3년쯤 전이었던 듯 하다. 당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이라는 제목의 책이 번역되어 나왔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영역판을 구입해서 읽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쩌면 가격 문제였던 것 같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말 번역본이 나오면 행간을 운동장처럼 비워두고 글씨도 장판처럼 키워서 나오는데 이 덕분에 약 400페이지면 충분히 들어갈 내용을 두 권으로 나눠서 약 800페이지 이상의 분량으로 조정하여 영역본 페이퍼 백으로 잘 해봐야 만원이면 될 책을 3만원은 되는 가격에 판매를 하니 당연히 주머니 사정이 야박한 나 같은 한량들이야 싼 쪽을 택하는 것이 나은 선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천천히 천천히 정말 읽기가 이렇게 어렵게 읽게 된 책이 내 인생에 또 있었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괴로운 마음으로 한 페이지 한 페이지 꾸역꾸역 읽어나갔던 것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물론 어학의 문제는 아니다.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4,5백 페이지 정도 분량의 책은 하루면 읽어치울 수 있다. 단지 그 분위기와 일반적인 소설과는 너무나도 판이한 구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각 장 마다 인물의 시점이 달라지고, 심지어 소설의 전개 상황과 연결된 세밀화 소재들의 서사까지... 그 때 받은 인상으로 개인적으로는 그의 팬이 되었고, 그의 소설 <My Name is Red>로부터 시작해 <Snow>, 수필집 <Istanbul>, 그리고 마지막으로(물론 절대로 그가 삶을 마감할 때까지는 마지막이 아니겠지만) 이 <순수 박물관>이라는 작품을 읽게 되었다. 지금 읽은 후에 느낌은 역시 파묵이라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소재는 매우 진부한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매우 새로울 수 밖에 없다. 그것은 고정된 것 혹은 하늘의 이상으로 우리에게 제시될 수 없는 것이면서도(다시 말해, 매우 구체적인 것이면서도), 동시에 작품 속에서 작가가 주인공 케말의 입을 빌어 말하듯이 그것은 무시간적일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케말의 퓌순에 대한 집착적 사랑이, 혹은 일방적인 사랑이 진정한 의미의 사랑일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두 사람은 서로 사랑을 하게 된다. 한 사람의 너무나 아름다운 여인에 대한 사랑으로 케말은 자신이 가질 수 있는 어떤 정상적인 생활의 가능성을 포기해 버린다. 분명 사랑은 일종의 사건과 같은 것이다. 구지 자동차 사고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사랑은 한 사람 그리고 또 다른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정상성의 삶 또는 일상의 모든 것을 깨부수게 된다. 문제는 이 사건과 같은 만남의 이후가 문제인 것이다. 어느 사랑에 관련된 비극적 소설에서나 그렇듯이, 이 소설에서도 두 사람의 사랑은 분명히 한 번의 어그러짐을 맞게 된다. 이 둘의 만남과 짧은 사랑의 지속 이후, 두 사람은 서로가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인 격차(일종의 계급) 그리고 가족적 가치(약혼한 남자의 문제)와 마주하여 파국을 겪게 된다. 그리고 이후에 이 한 사람, 케말의 집착적이고 일방적인 사랑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미 무능한 남자와 결혼관계에 들어간 다른 한 사람(퓌순)은 이를 핑계로 다른 한 사람(케말)의 사랑을 거부한다. 8년간이나 이 거부당한 한 사람은 자신이 영위하던 모든 상류사회의 삶을 버리고, 심지어 자신의 가족 관계마저도 내팽겨치다시피 하면서 그 거부당한 사랑의 주위를 맴돈다. 물론 그가 퓌순의 가정에 끼쳤던 회복할 수 없는 아픔을 생각한다면 당연한 벌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아버지(타르크씨)와 어머니(니시베 고모)의 그 능수능란한 연기에 파묻혀 일종의 위장된 평안을 얻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러한 평안이 과연 사랑과 같은 것 혹은 동등한 무게를 지닌 등가물이 될 수 있을까. 어쨌든 케말은 8년간을 그녀의 집에서 그녀의 남편(페리둔)을 포함한 가족들과 얼굴을 마주하며 보낸다. 오직 그녀가 다시 그와 함께 하리라는 희망으로... 그리고 마침내 그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그녀의 무능한 남편과 그녀가 갈라서게 되고 다시 함께 미래를 꿈꿀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퓌순은 더 이상 과거의 그녀가 아니다. 8년 전의 18세 소녀의 사랑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를 품고 있는 사람이다. 물론 퓌순 역시 케말을 사랑하고 있다. 이혼 이후에 다시 사랑하게 된 것이지만 그들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더 이상 없으며 그들의 사랑은 지속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배우가 되고자 하는 야망이 남아있다. 그리고 배우가 여기에서 그 오랜 세월 동안 그녀를 사로잡고 있던 야망은 케말에 대한 그녀의 사랑이 우선인지 아니면 배우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 우선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그녀가 배우가 될 기회를 막았던 그녀의 전 남편 페이둔과 케말에 대한 원망이 우선인지 알 수가 없게 된다. 결국 도로 위에 있던 검은 개를 피하고자 하던 퓌순이 운전대를 잡은 차는 케말을 조수석에 태우고 그대로 포플러 나무로 돌진한다. 시속 105킬로미터의 속도로 105살이 된 나무를 향해서 말이다. (어쩌면 여기서 우리는 다시 What women want?라는 후기 프로이트의 오래 된 질문으로 돌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여자들 조차도 그 답을 알지 못한다면... 아니 적어도 알지 못하는 것 같다면...) 내 생각에 정말로 이야기가 시작되는 지점은 바로 여기서부터일 것이다. 케말은 이 아름답지만 혼란스러운 사랑으로 이끌려가던 자신의 삶이 그대로 아름다운 애인과 함께 끝나게 된다면 그것 자체로 좋은 삶이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그러나 사고에서 살아남았고, 회복 된 이후, 더 이상 순수하지 않은(또는 순수할 수 없는) 그녀에 대한 순수의 열정(또는 순수에 대한 집착)으로 케말은 5723 곳의 박물관을 돌아다니며, 그녀에 대한 기억을 고착시키기 위한 순수 박물관을 만들기 위한 아이디어를 얻는다. 어쩌면 그렇기에 그에게 있어 이 삶이 행복하고 만족할 만한 것이라는 마지막 고백을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교통사고가 나고 그녀가 그를 향해 살고 싶다는 듯한 표정을 지을 때, 그가 그녀에게 그저 약간은 이해하기 힘들만한 웃음을 보낼 때, 그의 삶은 그 사고의 자리에서 '행복하게' 끝을 맺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의 삶은 그저 케말이라는 이름의 자동기계(automaton)가 그 죽음의 순간 또는 자신의 대상의 행복한 기억으로 움직이고 있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사랑일까. 이런 어떠한 가능성의 차원도 없이 그저 과거의 시간을 고착화시키는 무시간적 시간이... 물론 사랑은 무시간적인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 무시간적인 이유는 두 사람의 사랑이 마치 소설에서(그리고 다른 소설들에서도) 언급되는 레일라와 마즈눈의 사랑과 같이 시간을 뛰어넘어 기억될 수 있기 때문일 뿐, 이런 과거의 수집품, 보다 정확히 말해서, 기억의 대용물을 모으는 것과는 별 관계가 없는 듯 하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순수 박물관>은 오히려 파묵의 집요한 과거에 대한 사랑의 고백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의 소설은 그가 글쓰기 또는 자신의 집필에 대해 얼마나 집요하며 집착적인가를 보여준다. 그의 소설들에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코드는(적어도 내가 읽은 작품들에서는) 언제나 서양과 동양, 현대와 전통의 대립이다. <My Name is Red>에서의 베니스에서 건너온 원근법적 형식과 터키의 전통적인 세밀화가 보여주는 평면구도의 대립, <Snow>의 현대 또는 세속적 국가관과 전통적 가치 및 교육의 대립(여자들의 자살 이유, 교육감의 살해...) 등이 나타나며, 동시에 모든 시간을 통해 문제가 되는 과거의 연인에 대한 사랑과 제회 이후의 다시 시작되는 뜨거운 사랑이 그려진다. 과거의 가치에 대한 기억과 집착. 이 소설 <순수 박물관>에서도 그러한 기억의 수집과 보존은 진행되고 있다. 소설가는 남들에게 부끄러운 치부를 드러낼 수 있는 약간은 노출증적 성향을 가지는 사람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소설의 말미에서 작가는 인물들의 입을 빌어 이런 투의 말을 한다. 수집가(아니 보다 정확히는 수집광)에게 있어 수집물들은 일종의 부끄러운 치부가 되지만, 그 수집물들을 보여주게 되면 자랑스러운 것이 된다고. 마치 유럽사람들이 그러듯이 자부심을 가지고 보여줄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파묵의 글쓰기에 대한 집착은 마치 이런 수집광들의 집착을 보여주는 듯 하다. 그가 말로 만들어낸 세계 속에서 그는 자신의 말로 이루어진 과거의 기억이라는 수집물들을 모으고 구성하여 소설을 쓴다. 마치 케말이 퓌순의 기억으로 <순수 박물관>을 만들어 내듯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케말과 파묵은 동일인이다. 파묵의 자전적 수필집 <Istanbul>에 그려진 그의 젊은 시절 이스탄불의 아름다운 기억들에 속해서, 누군가에게 보여지면 부끄러울 수집물들을 자랑스럽게 펼쳐놓고 있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파묵의 책들은 분명 이런 수집물들을 갖추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하루키의 작품들과 같은 전시관이기 보다는 박물관이라 말하고 싶다. 그리고 나는 그가 만들어 놓고 내게 보여주는 그의 <순수 박물관>을 사랑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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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여행을 앞둔 상황에서, 이 책의 장점을 꼽아본다면..무엇보다도 그 시절의 터키, 혹은...터키가 깔고 앉아 있는 관습이나 사회적 분위기를 얼핏 엿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나라가 달라도, 우리의 그것처럼 빈부격차에 따라서 하는짓이 별난 것은 세계공통인가보다.
1권에서도 슬슬...지겹다 생각했는데, 2권까지 일관된 사랑과 집착은...짜증이 날 지경이다. 콜레라 시대의 사랑,은 재미나게 읽었는데 이 책은 재미없다기 보단...뭐랄까 더운 날씨처럼 답답하여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는 것이 맞을 게다. 보통 소설을 읽다보면, 주인공에 이입하거나..아니면 그들의 행동에 공감하거나, 거부반응을 느끼거나, 마음 아파 하거나, 함께 기뻐하면서 글을 따라가기 마련인데...이 책은 퓌순에 대한 병적인 집착과 박물관을 만들기 위한 찌질한 도둑질에 대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오니...마음이 답답하여, 테러는 저런 놈한테 나야하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지독한 사랑 이야기를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책에 따라서 지독하게 아파하며 그 결을 좇아갔던 것 같은데...웬걸. 퓌순이 하는 짓도 예뻐 보이지 않고...특히, 운전면허를 획득하기 위해 고집을 피우는 부분과 가족이 모두 빠리로 여행을 가야한다며 유난을 떠는 모습은 여주인공에 대한 애정마저 사라지게했다.
헛 웃음이 나왔던 것은 퓌순이 음주 운전(?)으로 사고가 나서 죽은 다음일게다. 자, 둘다 술을 엄청 퍼 먹고 나서는...대단치도 않은 일로 고집을 피우다, 그럼 호텔로 돌아가는 길까지 본인이 운전을 하겠다는 이 미친년과... 그것을 뜯어말리지 않는 이 미친놈을 어떻게 용서할 수가 있을까.
너무 다행인건, 길가에 서 있는 개를 치지는 않고 지네들만 나무에 쳐박고 난 다음에 퓌순만 죽어서 너무 너무 너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퓌순이 죽고 나서 본격적으로 박물관을 만들기에 들어가는 케말을 보고서는...나는 책이 몇 장 남았나 계속 뒷 페이지를 세보았다.--;
이 책이 주는 교훈은 무엇이고 마음속에 남기는 메세지는 무엇일까?
첫째, 이 지루한 책의 시발점은 명품 가방이다. 시벨이 샹젤리제 부띠끄의 '제니콜롱'이라는 명품 가방을 눈여겨 보지 않았더라면, 케말이 그 상점에 가서 퓌순을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둘째, 인생에는 항상 선택의 순간이 있고,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 한다. 돈도 있고, 예쁜 약혼녀도 있는데...가방가게 점원이랑 바람이 난다. 약혼을 하지 말던지, 바람난 친척여동생을 그냥..바람이라 여기고 끝내던지. 이 답답한 소설이 나온 이유는 둘 중의 하나에서 이것도 저것도 버리지 못하고 손에 꽉 쥐고 있으려던 남자의 잘못된 선택에 기인한다.
셋째, 작가들의 지갑에 현금이 꽂히면...확실히 글빨이 좀 줄어드는 경향이 있다. 노벨 문학상을 탄 이후의 첫 작품이라더니, 역시...아쉽다. 노벨 문학상이든 뭐든...상만타면..인기만 있어지면...작가는 초심을 잃기 쉽상이다. 오르한 파묵이 본인은 이 책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했는데, 천만에. 어쨌거나 그의 대표작은 '내이름은 빨강'이 될 것이다.
1권의 리뷰에서도 썼지만...오르한 파묵도 잘 썼겠지만, 이난아의 번역도 참 매끄럽지 않나 싶다. 뭐, 원문을 본적이 없으니 뭐라 말할 수는 없지만...남녀 주인공에 참 정이 가지 않아서 그렇지..읽히기는 정말 잘 읽힌다. 얼른 이 책을 잊고 오르한 파묵의 다른 책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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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 박물관>은 부러울것 없는 남자 케말에 대한 이야기이며, 갑자기 나타난 여인 퓌순의 이야기이기도하다. 케말은 터키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잘나가는 회사에 다니는 남자로 자신과 비슷한 출신의 애인 시벨과 결혼을 앞두고 있다. 먼 친척의 딸인 퓌순을 우연히 만나며 그의 삶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다. 케말은 자신도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푸쉰에게 자꾸 이끌리게 되는데 그녀와의 밀회가 거듭되면서 케말은 자신과 비슷한 집안 출신인 시벨과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한편으로, 퓌순과도 계속 만나면서 삶을 즐길 생각을 하게된다. 가족과 친구들을 초대한 성대한 약혼식. 행복해하던 케말은 퓌순이 하객으로 온 것을 보고 그저 반갑기만 하다. 그러나 약혼식 다음 날, 퓌순과 만나기로 한 시간에 퓌순은 오지 않고 그 후 어디서도 그녀를 볼 수 없게 된다.
이 책 <순수 박물관>은 한 남자가 단 44일 동안 사랑한 한 여자를 평생 동안 사랑하며, 그녀와 관련된 추억을 간직한 물건들을 모으고, 결국 그 물건들을 전시할 박물관을 만들고, 그 이야기를 책으로 쓴다는 이야기이다. 케말은 퓌순과 관련된 모든 물건을 모아 그녀를 만나기 위해 자신이 8년 동안 드나들었던 집을 사서 그곳을 박물관으로 개조한다. 박물관의 이름은 다름아닌 '순수 박물관'. 사랑하는 사람의 물건들이 가득한 이 곳 박물관에서 케말과 퓌순, 그리고 그들의 모든 경험을 확인할 수 있다.
어떤 글이든 누구의 입장에서 씌여졌는지 또 누구의 입장에서 읽는지에따라 참 많이 내용들이 달라질것 같다. 이 글은 한 남자 케말의 입장에서 씌여진 글이라 아름답고 이 세상에 다시는 없을것 같은 아름다운 이야기처럼 보인다. 나는 조금 생각을 달리 해 봤다. 시벨의 입장에서 이 글을 쓴다면 어떻게 내용이 달라질까? 나와 약혼한 사람이 나 아닌 다른 여자를 잊지못해 평생을 그녀와 관련된 자료들을 모으고 박물관까지 짓는다고 생각하면... 괜스레 그녀의 삶이 너무 허무할 것만 같다.
한 여자와 만나 44일 동안 사랑하고, 339일 동안 그녀를 찾아 헤맸으며, 2864일 동안 그녀를 바라본 한 남자의 30년에 걸친 처절하고 지독한 사랑과 집착.. 그래, 내게는 아름다운 사랑이기보다 왠지 집착으로 보인다. 내가 너무 가칠한 것인지 모르지만...
<순수 박물관>은 터키에서 출간한지 2주만에 10만부를 돌파할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 작품으로 저자인 '오르한 파묵'의 필력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나는 이 소설로 기억될 것이다'라는 오르한 파묵의 말처럼 이 소설은 독자들의 마음을 끄는 매력이 있는 책이다.
오르한 파묵은 이 책의 집필을 위해 실제 전 세계 박물관 5,723군데를 돌아 다니며 자신의 박물관을 어떤 형태로 만들지 고민했다고 한다. 또한 소설 속 케말이 '순수 박물관'을 만드는 바로 그 자리에 실제 '순수 박물관'을 만들고 있기도 하다. 책 속에는 이 박물관에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입장권이 들어 있기도 하며, 터키 이스탄불 박물관 지도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아무래도 '순수 박물관'을 실제 가 봐야 할 것 같은 생각이 자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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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의 작품답게 쉴틈 없이 흘러가는 전개가 훌륭하다. 대단한 스토리가 있는 건 아니고 단순한 사랑 이야기인데 세밀한 묘사와 남자 주인공의 심리의 변화에 대한 묘사 등이 인상적이다. 사랑 소설에 종류가 여러 가지 있지만 이 작품은 터키를 배경으로 했다는 점에서 또 다른 느낌이다. 이스탄불을 배경으로 쓰여진 이 소설은 이스탄불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사람이 읽는다면 분명 여행이 더 특별해질 것이라고 생각된다. 사랑이야기이지만 터키라는 배경과 어우러져서 이국적인 느낌이 들기에 꼭 읽어보길 추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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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바지에 이를때가지 해피.. 엔딩으로 끝나, 케말이 퓌순의 집에 매일밤 가서 그들의 가족들과 저녁시간을 함께 했던 그 공간을 행복한 순수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역시나.. 해피 엔딩이 아니었다. 퓌순을 기리기 위해 만든 박물관.. 그러므로. 퓌순은 그 자리에 없었던 것이다.
케말은 파혼 후 다시 만난 퓌순의 결혼에 충격을 받았지만, 그 이후로 퓌순 가족들의 저녁식사 시간에 8년동안 일주일에 4번정도 참석하게 된다. 퓌순이 유부녀가 되었음을 알게 된 그 순간 이후에도 케말은 매일 저녁, 그들 가족의 저녁식사시간에 오직 퓌순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었다. 그리고 다시 퓌순의 물건들을 훔쳐와 자신과 퓌순의 그 공간에 갔다 놓았다. 어떻게 보면, 케말의 이 행동들이, 아주 깊은 집착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미 유부녀가 된 그녀이지만, 그녀의 물건을 훔친다거나, 매일 저녁 들른다거나 하는.. 하지만 전혀 그렇게 불순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의 한 여자에 대한 순수한 마음과 사랑이, 왜 이리 애틋해 보였는지..
그런데, 퓌순이 이혼을 하게 되면서, 케말의 사랑은 빛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두 사람의 결합.. 곧 결혼을 앞두고 두 사람은 퓌순의 어머니와 케말의 운전사 아저씨. 이렇게 총 4명이 행복한 파리 여행을 시작한다. 그날밤, 케말과 퓌순은 행복한 사랑의 밤을 맞이하지만, 다음날 아침 술에 취한 퓌순의 운전으로 케말의 사랑은 다시 좌절의 아픔을 맛본다. 오직 그녀를 위한 순수 박물관. 케말은 그렇게 이 순수 박물관을 세우게 된다.
여기서 재밌는 점은.. 오르한 파묵이 이 순수 박물관을 책에 나오는 그 지역에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단 한 여자만을 위한 박물관. 그녀가 쓰던 물건들과 체취가 담겨져 있는 순수 박물관. 오르한 파묵이 만들어 놓은 책의 환상과, 직접 존재하는 퓌순의 순수 박물관. 책에서 빠져나와 그곳의 박물관에 직접 가보고 싶다는 마음이 너무도 강렬했던 작품이었다. 오르한 파묵 작가의 빠져들듯한 멋진 작품이었다..
케스킨 씨네 집 식탁에 앉아 있던 팔 년 동안, 나는 퓌순이 피운 4213개의 담배꽁초를 가져와서 모았다. 한쪽 끝이 퓌순의 장미꽃 같은 입술에 닿고, 입속으로 들어가고, 입술에 닿아 젖고 입술에 바른 립스틱 때문에 붉은색으로 멋ㅁ지게 물들어 있는 이 담배꽁초 하나하나는, 깊은 슬픔과 행복한 순간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아주 특별하고 은밀한 물건들이다. (p.199)
여자와 남자가 단 둘이 만나지 못하고, 마주 보며 대화하지 못하는 나라에는 사랑이 있을 수 없다. 왜 그런지 아니? 남자들은 적당한 여자다 싶으면, 착한지 나쁜지, 예쁜지 못생겼는지를 보는게 아니라, 몇 주 동안 굶주린 동물처럼 달려들기 때문이야. 그게 습관이 됐어. 나중에는 이게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이런 곳에서 사랑이 존재할 수 있겠니? 절대 너 자신을 속여선 안 돼. (p.2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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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그 것은 시간의 흐름에 거스르는 행동인지 모르겠다. 흘러가는 시간을 처음 그리고 익숙한 감정을 담아 놓아두는 그런 행위 인지 모르겠다. 세상의 변화에 적응하지 않으며 단 하나의 존재에 적응 되어지고 몰두하여야 하는 행위, 그리고 그렇지 못하면 내가 망가지고 견디지 못할 것 같은 그런 감정이 아닌지 모르겠다. 이런 감정의 흐름을 잡아 두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 흐름을 거슬러 하나의 존재를 나의 느낌으로 담아 두고 싶었던 것일까? 박물관은 시간의 흐름을 담아 두는 장소이다. 누군가가 상용하였을 것 같은 그릇 혹은 누군가의 생명을 지켜주었을 것 같은 칼, 혹은 창, 그리고 누구의 몸을 보호하였을 것 같은 옷가지들 그리고 그들의 기록을 담아 둔 책들 그리고 그림들... 이런 익숙한 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박물관의 기억이다. 이런 기억 속에서 우리는 지난 시간을 보는 것이다. 순수 박물관은 그럼 무엇에 대한 박물관이 대어야 할까? 순수함에 대한 기록 그리고 흔적이 되어야 할 것인가? 이 벽시계는 시간을 떠올리고 무언가 변했다고 생각하게 하기보다는, 정반대로 그 무엇도 변하지 않았다고 느끼게 하고 믿게 해 주었다. - Page 30 시간의 변화를 알려 주는 시계의 용도조차도 변하지 않게 만들어 주는 힘 바로 사랑이라 말하고 싶은 감정이다. 이 주인공의 가련한 사랑은 숫자가 보여주는 처절함 보다도 그 인생의 전반을 지배한 그 감정속의 주인공에 대한 기억의 보관 장소로 박물관을 선택한다. 자신의 기억을 남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혹은 자신의 사랑의 부끄러움을 당당하게 드러내 놓기 위해서 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집착과 사랑의 경계 혹은 혼란 속에서 시간은 그에게 그다지 변화의 요인이 되지 못한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뒷 감정을 남겨둔 작품은 그렇게 흔하지 않았던 것 같다. 사랑이라 쉽게 말하기에는 한 남자의 일생은 집착이라 말하기에도 부족함이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그의 순수한 감정을 집착이나 정신병적 증상이라 말하기에는 그의 감정이 너무 순수하고 고결하며 그의 행동 역시 일반적인 사람의 행동에서 벗어남이 없다. 오르한 파묵은 나에게 묻고 있다. 어떤 것이 사랑의 감정이라 정의할 수 있겠느냐고? 그녀의 자유를 위해 내가 놓아 주고 추억으로 간직하는 것이 사랑이었을까? 끝까지 그처럼 그녀의 흔적을 그녀의 자취를 찾아 해매며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것이 사랑이었을까? 하고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다시 사랑이 아이었다 말하기도 하고 헤어지기도 한다. 이런 저런 감정의 혼란 속에서 순수박물관에서 보여주는 한 남자의 사랑은 집착도 아니고 정신적 병리 증세도 아니다. 다만 그녀를 향한 한 남자의 그저 순고한 느낌과 사랑이 었음을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요즘의 흔한 이별의 결말을 예고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평생의 짐처럼 안고 가면서도 힘든지 모르고 행복감에 젖어 있는 그런 사랑처럼 말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가 옆에 없는 것 보다는 덜 힘들 거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랑. 그런 사랑의 표본을 전시하고 싶은 오르한 파묵의 메시지가 아닐지 모르겠다. 시간의 흐름조차 사랑 앞에서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상징으로 느껴질 만큼의 사랑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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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박물관은 소설책이 아니다... 소설책을 읽으면서 한 편의 영화가 머리 속에서 그려진다... 소설에서 영화의 효과를 제대로 느낄수 있었다...
내가 영화감독이라면 순수박물관을 영화화하고 싶다는 욕구가 치밀어오른다...
주인공 케말 대신에 내가 주인공이 된 것 같다... (내가 주인공에 빙의되기 까지도 했었다...) 케말과 퓌순의 사랑... 참 지독했다... 하지만 박물관을 세우는 모습과 더붙어... 이 말이 기억에 남는다... "인생은 자부심으로 살아가야 한다."
소설을 다 읽고나서 리뷰를 쓰게할 정도로 이 감동적인 기분을 느낀 것은 처음이다... 단순한 사랑이야기 인줄 알았는데... 마치 한편의 인생드라마를 본 것 같다... 이 소설로 이스탄불의 모습을 보기보다는 그냥 어떠한 해석도 필요없이... 그냥 천천히 읽어보아라...
30년에 걸친 한 남자의 처절한 사랑이 광기처럼 보일때도 있었다... 하지만 소설을 다 읽고나서는내 마음 한 구석이 아려온다... 읽고나서 가슴이 먹먹해지는 소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