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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 기운으로 침묵이 강요당하는 시기에 책 제목에 마음이 끌려 읽게 되었다. <숫타니파타>, <법구경> 등과 같은 불교경전에 나오는 어록을 주제별로 엮고, 일반일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법정스님이 주석을 달았다. 불교입문서의 성격을 지닌 책이다.
지식을 얻기보다는 지혜를 깨치기 위해 필요한 책이다. 산문을 읽듯이 한번에 읽어내려가기보다는 한구절 한구절 음미하면서 읽어야 하는 책이다. 말에 의지하지 말고 뜻에 의지해 나가라는 가르침을 주는 책이다. 침묵에 귀기울이라고 가르치는 책이다.
법정스님은 우리들이 주고받는 일상의 말이 사유의 과정을 거쳐 침묵의 체로 거르지 않으면 소음이나 다를 바 없다고 강조한다. 뜻을 담은 말은 침묵을 배경으로 발음될 수 있고, 말끝에 오는 침묵은 새로운 뜻을 담은 말을 잉태한다고 한다. 살아간다는 것,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 열반의 경지에 이르는 것... 이런 모든 문제들을 차분히 생각해 보는 기회를 주는 책이다.
[마음에 남는 구절] 불교를 배운다는 것은 곧 자기를 배움이다. 자기를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잊어버림이다. 자기를 잊어버림은 자기를 텅 비우는 일. 자기를 텅 비울때 비로서 체험의 세계와 하나가 되어, 그 어떤 것과도 대립하지 않고 해탈된 자기를 알게 된다(21쪽)
만일 모든 고뇌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만족할 줄을 알아라. 넉넉함을 아는 것은 부유하고 즐거우며 평온하다. 그런 사람은 비롯 맨땅위에 누워 있을지라도 편안하고 즐겁다. (90~91쪽)
자유와 사랑은 함께 있다. 진정한 사랑은 반응이 아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니까나도 당신을 사랑한다고 하면 그건 거래요, 장사다. 진정한 사랑은 그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우리가 무엇을 주고 있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해야 한다.(125쪽)
입에 말이 적으면 어리석음이 지혜로 바뀐다.(137쪽) 부처는 말이 없는 것임을 믿으면 입에서 저절로 연꽃이 핀다(129쪽)
한번 가버린 과거사나 아직 오지 않은 불확실한 미래를 두고 근심 걱정하지 마라. 우리는 '지금 여기에 이렇게' 산다. 선은 현재를 최대한으로 사는 가르침, 순수한 집중과 몰입으로 자기자신을 마음껏 살리는 일이다.(254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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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타니파타는 불교의 수많은 경전 중에서도 가장 초기에 이루어진 경전 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후기에 이루어진 경전처럼 교학적이거나 번거로운 교리는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불교 술어는 대부분이 후기에 이루어진 것이고, 초기에는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것처럼 풀어놓은듯한 단순한 형식으로 인간이 가야 할 길을 펼쳐 보였단다. 숫타니파타는 모두 1149수의 시(詩)를 70경에 정리해 다섯 장으로 나누고 있으며, 이 책은 첫째 장에 속한 12개의 경전으로 법정스님이 1987년 11월부터 1989년 3월까지 깨달음이란 불교잡지에 한 달에 한번씩 게재한 강론이라고 한다. 이강론은 고전을 우리가 어떻게읽고, 오늘의 삶에 어떻게 받아들일인가에 대한 스님 나름의 시도였다고 한다. 눈으로만 읽지말고, 자신의 목소리로 두런두런 읽을때 그 메아리가 영혼까지 울린다고 스님은 말한다. 사람들이 집착하는 것은 마침내 근심이 된다. 집착할 것이 없는 사람은 근심할 것도 없다.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소유지향적인 삶을 살 것인지, 존재지향적인 삶을 살 것인지는 우리들이 일상에서 항상 부딪히는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스님은 어떠한 삶을 살던 지간에 그 나름의 살아가는 기쁨은 있지만, 어떤 상황에 이르면 똑 같은 조건을 두고 한쪽에선 삶의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근심 걱정의 원인으로 본다고 말한다. 내가 수도하는 사람이 아닐진대 전적으로 소유지향적인 것에서 떠날 수는 없지만, 스님이 말한 무소유란 것이 바로 나눔이란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준다. 사랑과 그리움에는 괴로움이 따르는 법 연정에서 근심걱정이 생기는 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욕망의 대상에는 우환이 있다고 한다. 홀로 있다는 것은 온전한 자신이 존재하는 것 이라고 스님은 말한다. 그러나 비록 함께 있을 때는 부분적인 나 밖에 존재할 수 없다고 해도, 사랑과 그리움에서 오는 괴로움보다는 근심걱정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스님은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어디에도 거리낌없이,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오염되지 않은 청초한 연꽃처럼 살라고 한다. 하지만 난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 이고만 싶다. 사자도, 연꽃도 아닌 그저 바람이고 싶다. 알듯 모를 듯 다가가, 나의 향기를 살며시 전할 수만 있다면, 그리움에서 오는 괴로움과 연정에서 오는 근심걱정이 생긴다 해도, 그때 비로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갈수 있을 것 같다. 관능의 욕망에서 떠나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고 쾌락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은 깊은 바다에 가라앉지 않는다. 새로운 삶을 위해서는 자기반성을 통해 삶이 개선되어야 한다고 스님은 말한다. 그러나 모든 욕망에서 벗어날수 있다는 것은, 모든 속박에서 벗어날수 있다는 것은, 매사에 쾌락을 생각하지 않을수 있다는 것은 치열한 자기성찰과 아픔이 없이는 힘들것 같다는 생각이다. 나는 매일 밤 얼마나 많은 관능의 욕망을 떠 올렸는지, 매일매일 얼마나 많은 속박 속에서 허우적거렸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쾌락을 쫓아다녔는지 생각해 본다. 오늘도 책을 읽으면서, 종교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고전으로써 경전을 읽으면서 나 자신을 생각해 본다. 나는 과연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얼마나 치열한 삶을 살고 있는지, 또 말보다는 실천이 앞서야 하고, 자신이 한말에 대해서는 책임을 질줄 알라고 하는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나는 어떤지를 돌아본다. 그리고 두런두런 소리를 내어 내 목소리를 들으면서 경전을 다시 한번 읽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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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의 <숫타니파타> 강론집이다. <숫타니파타>는 대표적인 초기 불교경전으로서 단순한 형식으로 인간이 가야할 길을 설명하고 있다고 한다. 불교 교리에 익숙하지 않는 초보자들도 초기 불교의 참모습과 부처님 가르침의 참뜻을 느낄 수 있는 장점이 있는 것 같다. 총 70개 경전중 앞부분에 있는 12개의 내용이 운문형태인 시의 형식으로 제시되어 있고 여기에 대한 법정스님의 강론이 함께 소개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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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법정스님이 초기 불교 경전 순타니파타의 첫째장에 속한 열두개의 경전을 강론한 것이다. 숫타니파타는 후기에 이루어진 경전처럼 교학적이거나 번거로운 교리는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운문인 시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어 읽기보다는 읊었던 것으로 시가 지닌 운율의 분위기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이 책은 경전을 읽을 때의 상황과 심경을 경전의 형식에 구애받지 아니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자유롭게 강론하고 있다. 책의 구성은 경전을 앞에 서술하고 법정이 그 자신의 일상과 시대상황을 빗대어 그 내용을 주해하는 방식을 따르고 있다. 경전 자체가 그리 어렵지 않아 그 구절 자체로도 이해되는 바 없지 않으나, 법정의 강론은 그 내용에 더한 깊이있고 다방면에 걸친 해석으로 읽는 이로 하여금 숫타니파타의 의의를 백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불교경전이란 게 그렇듯 내용이 매우 간결하고 단호하다. 별다른 수식없는 구절들이 내 마음을 강하게 울리는 듯 하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이 구절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로 모든 것이 표현되는 이 경전 숫타니파타는 신앙생활을 목표로 작성된 것이기는 하지만, 일상생활에서도 충분히 받아들일만한 내용이 아주 많다. 특히나 요즘같이 모두가 하나되어 바쁘고 정신없는 생활을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그래서 정신적인 안정이 절실하다고 느끼는 이들이라면 한번쯤 부담없이 책을 들어 초기 불교의 수행자의 삶을 따라 갈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어줍잖은 위안이나 평안을 얻게 될 것이라는 희망은 버리는 것이 좋을 터, 스스로 깨달음을 찾아 떠라나고 등떠미는 이 냉청하고 엄격한 교리에서 그런 편안함은 유감스럽게도 추호도 허락되지 않는다.
욕심과 화냄과 어리석음. 불교에서 깨달음에 장애가 되는 세 가지 번뇌를 읽컫는다. 줄여서 탐.진.치 삼독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것들로부터 벗어나야 진정한 깨달음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게 어찌 말 같이 쉬우랴. 남이 가진 것 보면 나도 가지고 싶은 마음이 들고, 내가 모멸당하면 나는 화를 내는 것이 당연하며, 내가 어리석음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일텐데 말이다. 그럼에도 깨달음을 향한 이들은 이러한 번뇌를 무찌르기 위해 오늘도 정진고 있다. 이러한 삼독을 물리치는 방법을 이 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세상 저 세상도 다 버린다. 뱀이 묵은 허물을 버리듯이" "사람들이 집착하는 것은 마침내 근심이 된다. 집착할 것이 없는 사람은 근심할 것도 없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곷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의혹을 넘어서고 고뇌를 떠나 열반을 즐기며 탐욕을 버리고 신들을 포함한 세계를 이끄는 사람"
살아가면서 우리는 최고의 가치를 꿈꾸고 자기확립을 희구한다. 하지만 번잡한 사바세계에서 이를 절대 호락호락하게 내버려 두지는 않는 것 같다. 해서 스스로 끊임없이 자기성찰을 함으로써만 내 꿈꾸는 바를 이룰 수 있을텐데,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질 수도 있고, 천한 사람으로 강등될 수도 있다. 해서 각성하고, 만족하며, 자제하며, 믿음을 가져야 할 것을 이 책은 역설하고 있다. 법정스님의 강론은 부드러우면서도 강직하고, 따뜻하면서도 서늘하다. 시대비판은 지금으로부터 10여년전이건만, 지금의 상황과에도 맞지 않는 부분이 없다. 사는 것은 시대와 상황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과 사랑을 향한 법정스님의 애정은 책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정말이지 고마운 분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사는 것, 나의 자격을 이 책에서 다시 되새긴다. 아니 되새겨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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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정말 말을 하지 않고 살고 싶다. 올해는 특히 부쩍 그런 생각이 많이 든다. 그럴만한 사유가 내게 있기도 했거니와 직업의 특성상 말을 계속해야하는 이유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정말 말이 싫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말을 하는 내가 우습다. <말과 침묵> 솔직히 그의 글이 좋기도 했거니와 침묵이라는 단어 하나를 보고 택한 책이다. 책 내용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이런 글이 있다. ‘진리에 의지하고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라. 뜻에 의지하고 말에 의지하지 말라. 지혜에 의지하고 지식에 의지하지 말라.’ 맞다! 정말 맞다! 무엇인가에 의지하고 나면 후회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삶이다. 하지만 신에게는 의지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신마저 없다면 이미 나는 무너지고 말았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 책은 불경에 가까운 책이지만 좋은 글이 많아 마음에 와 닿았던 것 같다. ‘침묵에 귀 기울이라’ 마치 명령처럼 들리는 이 말이 오랫동안 내 기억 속에 맴돌았다. 시끄러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 때론 나 자신이 소음이 되어 복잡한 인간관계를 어지럽히고 걱정을 만들고 있다. 말은 쏟아내는만큼 후회가 돌아온다고 한다. 그런만큼 나 자신도 잃어버린 다는 사실을 정말 뼈저리게 느낀 한해였다. 그 말을 주워 담기 위해 그 말대로 행하기 위해 나 자신을 만들어 가는 그럼 비참한 꼴을 당하게 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입에 말이 적으면 어리석음이 지혜로 바뀌고 침묵하면 입에서 저절로 연꽃이 핀다고 한다. 침묵을 사랑하라! 말을 아끼라! 마하트마 간디도 매주 월요일은 침묵의 말로 정하고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간디는 사람이 짐승보다 높은 것은 말할 능력을 가진 것이지만 그것을 부당하게 행사한다면 짐승보다 못한 사람이 된다고 했다. 그러므로 누구든 먼저 생각하고 그런 뒤에 말을 해야 한다고 당부하셨다. 언제든 남을 비난하는 말은 틀린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남을 헐뜯기에 앞서 자기 자신을 바로 보아야 한다. 법정 스님의 글을 읽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잃어버린 나 자신을 찾은 기분이 든다. 나 자신을 찾는 다는 것은 오버일수도 있지만 인생을 이렇게 살아야 겠구나 하는 다짐이 든다고 해야할까? 아무튼 가슴에 봄이 찾아와 새싹이 파릇파릇 피어난 기분이다. 사실 인생은 그 자체가 괴로움이라고 한다. 괴로움의 원인은 인간의 욕망과 애착에서 비롯된 것인데 즉 모으고 쌓은 것은 모두 괴로움으로 변한다고 한다. 재산도 지나치게 많이 모으면 괴로움이 되고 사랑도 지나치면 병이 되고 생각도 지나치면 망상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 괴로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여덟 가지 바른 길이다. 바른 견해,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활, 바른 노력, 바른 기억, 바른 명상이다. 책의 내용을 잠시 옮겨보자면, 바른 견해란 네 가지 진리인 사성제를 바로 보는 지혜이고, 바른 생각이란 번뇌 망상을 멀리하고 성냄과 원한이 생각이다. 바른 말이란 거짓말, 악담, 이간질, 그럴듯하게 꾸미는 말을 떠나서 하는 도리에 맞는 참된 말이다. 바른 행위란 살생, 도둑질, 음란한 짓을 하지 않고 올바른 생활 규범을 지키는 일이다. 바른 생활이란 불공정한 거래나 점술 따위의 수단을 떠나 정당한 방법으로 의식을 얻어 살아가는 것. 바른 노력이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나쁜 생각을 일지 않게 하고, 이미 일어난 나쁜 생각은 없애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착한 생각을 일게 하고, 이미 일어난 착한 생각은 원만히 키워나가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다. 바른 기억이란 생각을 한 곳에 집중해 몸과 마음과 진리를 바로 관찰하고 탐욕에서 일어나는 번뇌를 없애는 것. 그리고 바른 명상이란 온갖 욕심과 어지러운 생각을 가라앉혀 선정에 들어감을 말한다. 석가모니는 인생의 주인은 신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고 표현했는데 왜냐하면 내가 뿌린 씨의 열매는 먹고 사는 게 우리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인생에 대한 책임은 오로지 나에게 달려 있다. 동물 중에 가장 용맹을 떨치는 사자도 외부에서 침해를 받아서 죽는 게 아니라, 자기 몸 안에 자생하는 벌레로 말미암아 죽는다고 한다. 마치 쇠에서 나는 녹이 쇠 자체를 녹슬게 하듯이 말이다. 그러니 마음에 끌려 다니지 말고 마음의 주인이 되어 화가가 그림을 그리듯 내 뜻대로 그려 나가야 한다. 또한 그분의 책을 읽으면 마치 소경이 길을 잃고 있다가 빛을 만난 기분이다. 사실 답은 정말 간단하고 쉽고도 명확한데 머리에서 인정하고 몸으로 실천하기가 어려운 것 같다.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만족하기만 하면 된다. 넉넉함을 아는 것이 부유하고 즐거우며 평온하다. 그런 사람은 비록 맨땅 위에 누워 있을지라도 편안하고 즐겁다. 그러나 만족 할 줄을 모르는 사람은 설사 천상에 있을지라도 그 뜻에 흡족하지 않을 것이다.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은 부유한 듯 하지만 사실은 가난하고,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가난한 듯 하지만 사실은 부유하다. 법정스님의 말을 정리하자면, ‘그대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버리고 모든 속박에서 그대 자신을 해방시키라. 그리고 존재하라. 누구의 말을 빌릴 것도 없이, 인간의 목표는 풍부하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풍성하게 존재하는 것이어야 한다. 더욱 적게 가질수록 더욱 사랑할 수 있다.’ 집착하지 않은 삶이 바로 행복한 삶이라고 했듯이 사랑도 집착하지 않을 때 자유롭고 진정 상대방을 사랑할 수 있다. 헌신적인 사랑을 할 수 없을 바에는 미워도 하지 말고, 당신이 나를 사랑하니까 나도 당신을 사랑한다는 매매와 같은 사랑도 하지 말고 대가지 바라지 않은 진정한 사랑을 하라고 그는 당부했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를 덮기 전에 그는 우리에게 이런 멋진 말을 남겼다. ‘자, 이제는 남의 책은 덮어두고 자기 자신의 책을 읽을 차례다. 사람마다 한 권의 경전이 있는데 그것은 종이나 활자로 된 게 아니다. 펼쳐보아도 한 글자 없지만 항상 환한 빛을 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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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고인이 되신 법정 스님이 부처님의 설법과 조사들의 어록을 읽으면서 간간히 메모해 둔 글들을 정리하여 발간한 책이다.
우리들이 주고받는 일상의 말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고찰하면서, 침묵의 체로 거르지 않는 말은 소음이나 다름없다.. 침묵에 귀를 기울여라...라고 스님은 말씀하신다. '1.자기를 찾으라' 부터 '14.禪' 까지 총 14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장 마다 주제에 맞는 경구들과 스님 나름의 해석을 곁들어 놓았다.
어느 한 장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무한한 깊이가 느껴지는 스님의 글들은 읽는 자체만으로도 온 세상이 정화되는 듯한 평온함을 느낄 수 있다. 보너스로 선불교 수행에 대한 내용도 책 후반부에 간간히 언급되며, 선문답이라는게 어떤것인지 초심자도 이해하기 쉽게 풀어놓았다.
이 책은 불교 입문자들에게 더없이 큰 선물이 되겠지만, 꼭 종교 서적이라기 보단 누구든지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게 해주는 명상록으로써의 가치가 더 크다고 본다.
책의 서문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있다.
진리에 의지하고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라.. 뜻에 의지하고 말에 의지하지 말라.. 지혜에 의지하고 지식에 의지하지 말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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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의 책을 대하면 산림욕을 경험한 것처럼 기분이 맑아진다. 오랜 세월 수행을 통해 쌓은 스님의 청결한 영혼을 소음과 공해에 물든 속세에 찌들어 사는 내가 어찌 닮을 수 있겠냐만은 잠시라도 스님의 깨끗한 글을 통해 내 오염된 눈과 마음의 피로를 풀 수 있음으로 만족한다. 책을 읽는 내내 두메산골 오두막에서 자연을 벗삼아 홀로 살아가시는 스님의 삶이 떠올랐다. 속세의 사람인 내가 만일 인적드문 산골 기슭에서 혼사 산다면 우선은 외롭고 무섭다는 생각부터 들 것이나, 한편으론 평상에 누워 별밤을 바라보고 개울가에서 새소리를 들으며 빨래를 하는 자연친화적 삶이 부럽기도 하다. 그리고 왠지 스님의 삶에선 외로움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스님의 글은 눈과 마음의 피로회복에서 더 나아가 우리가 잊고 사는 진실앞에 스스로를 성찰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것이 엄숙하기 보다는 자연스럽기 때문에 감화받기가 쉽다. 스님앞에서 서슴없이 '지배하기 위해서'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싶다고 말하는 고시생이나, 고가의 사슴 피 먹은 일을 자랑스레 늘어놓는 중년의 아주머니의 일화는 같은 속세인인 내 낯을 뜨겁게 만들기도 했다.
『홀로 있을수록 함께 있는 것이다.』,『고독은 외로움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투명하게 만드는 귀중한 시간이다.』,『진정한 자유는 정신적인 데에 있다.』,『깨어 있는 영혼에는 세월이 스며들지 못한다.』,『삶을 마치 소유물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소멸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마음에 따르지 않고 마음의 주인이 되는 일이 중요하다.』,『닦지 않으면 오염되는 것이 우리 마음이다.』,『종교의 의미는 죽은 뒤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답게 살기 위해 있다.』,『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말수가 적고, 자신의 허물만을 고쳐갈 뿐이다.』,『신앙이나 진리는 배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겪어서 체험하는 것이다.』
휘황찬란한 다이아몬드만이 보석이 아니다. 참 종교인의 진언이야말로 진짜 빛나는 보석이 아닌지..형체로 존재하는 돌덩어리는 육체에 아름다움을 더할지는 모르지만, 좋은 책 속에 존재하는 글귀는 그보다 중요한 정신을 아름답게 가꿔준다. 중요한 것은 전자의 보석은 가치가 정해져 있지만, 후자의 보석은 독자가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그 가치도 천지차이가 난다는 것. 스님의 소중한 글귀들 중에서 특히 '깨어있는 영혼'이란 말이 가장 인상적이다. 우리의 육체가 살아있다고 해서 그 육체 속에 담긴 영혼까지 살아있다고 할 수 있을까. 사람들 중엔 육체는 살아 숨쉬지만 눈먼 영혼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예 죽은 영혼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내 영혼도 아둔한 소경일 뿐, 깨어 있는 상태가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우리같은 사람들은 몸의 청결에는 매우 신경을 쓰면서도, 정작 정신의 청결에는 무심해지곤 한다. 정신의 청결을 위해서는 읽다가 자꾸 덮히며 나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볼 수 있는 이와 같은 양서를 골라 읽는 일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갑자기 든다. [인상깊은구절] 다른 종교는 몰라도 불교는 부처님을 믿는 종교가 아니다. 부처님을 믿는다면 그것은 우상이고 미신이다. 불타 석가모니 자신 최후의 유훈을 통해서도, 저마다 자기 자신에 의지하고 진리에 의지하라고 했다. 그러기 때문에 불교는 부처님을 믿는 종교가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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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잡생각이 많을 때 시나 귀감이 되는 글을 베껴 쓴다. 얼마 전, 나는 마음을 한 곳에 두기 위해 짧은 경전 하나를 베껴 쓰기로 했다. 그런데 여유를 가지고 시작한 경전 읽기나 사경이 시간이 지나자 반복되는 글귀나 경은 눈에 익숙해져 의미를 다 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무리 강조해도 중요한 말 같지 않은데, 그렇다고 음률을 맞추는 것 같지도 않은데, 한 번씩만 쓰면 될 것을 왜 그렇게 반복해서 써 두었을까? 하며 반복해서 읽다가 한 번씩 읽고는 책장을 넘겼다.
경전을 한 구절 한 구절 음미하는 것은, 밖으로만 팔리던 눈을 안으로 거두어들이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아무 뜻도 없이 그저 형식적으로 되풀이해놓은 것은 결코 아니다. 경전의 문구가 반복되는 것은 눈과 귀에 빨리 익으라고 써 놓은 게 아니었다. 마음속에 거듭거듭 새기라고 반복하는 것이었다. 단순한 반복이 아닌 것이다. 이는 마치 어제와 오늘이 단순한 깨달아서 어제와 다른, 어제보다 나은 새로운 삶을 살라는 뜻일 것이다. 어제를 반성하겠지만 어제에 머물지 말고, 오늘은 오늘로서 열심히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반복해서 선언하는 셈이다.
오늘 하루만큼은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니 맘껏 쓰고 내일에게 물려주면 된다. 시간은 소유할 수 없다. 그저 오늘 하루가 존재하는 것이니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식을 입혀서 행복하게 미련 없이 맘껏 사용하면 되는 것이다. 시간이 모자라는 사람은 적어도 바쁘게 열심히 일상을 보내는 사람이다.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은 목표 없이 그저 시간을 흘려보내는 사람일 것이다. 무엇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기쁨이면서 동시에 걱정거리가 된다. 시간이 너무 남아돌면 그 시간을 헛짓, 헛생각으로 허송세월한다. 똑같은 조건을 두고 한쪽에서는 삶의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근심 걱정의 원인으로 본다. “자녀가 있는 이는 자녀로 말미암아 걱정하고, 소를 가진 이는 소 때문에 걱정”을 하는 것 같다.
시간뿐일까. 돈도 사람도 물건도 주어진 일도 그렇다. 너무 많으면 소중함을 느끼지 못하고, 가진 것을 빼앗길까, 노심초사하다가 하루가 간다. 자신에게 감당 못할 시간, 돈, 사람, 물건, 일 등등... 이는 집착과 욕심 때문에 과부하가 걸려 있어서 가지고도 행복하지 않고 걱정만 한다. 집착하지 말라는 것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말고, 절대 욕심내지 말하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가지되 적당히, 일을 하되 얽매이지 말라는 뜻이다. 일 욕심이 많아 이것저것 다 하다 보면,, 몸은 하나인데 여러 곳에 정신을 두어야 하니 하나도 제대로 못할 때가 있다. 물론 나는 하나만 한다고 집중이 100%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일을 할 때는 두세 개를 동시에 한다. 그래야 서로 보안도 되고 스트레스도 덜 받는다. 그러나 가끔 욕심을 내어 거절하지 못하고 하나만 더 할 때가 있다. 그때가 위험하다. ‘하나만 더’에’ 발목을 잡히고, 함정에 빠져, 그만 나머지 일도 그르칠 때가 있다.
물건도 그렇지만 사람도 그러하다. 내게 주어진 인연을 소중히 받아들인다고, 사람 욕심을 내어 이 사람 저 사람이 모두 내 사람인 양 챙긴다. 그러나 여기 힐끔 저기 힐끔 발만 걸쳐두는 관계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상대에게 ‘왜 이렇게 바빠?’, ‘우리에게까지 올 수 있겠어?’ 하는 걱정과 서운함의 소리를 듣게 된다. 나는 여기도 저기도 다 소중하다고 생각해서 놓지 못했지만 정작 상대는 서운하고 관계에 소홀한 사람으로 인식될 수 있다. 관계는 노력이다. 소유하거나 저장해 두려 해서는 안 된다. 필요할 때 자리에 있어주고, 곡 필요하지 않을 때는 자리를 비워주는 것도 관계의 노력이다. 있는 동안, 나와 함께 할 때 최선을 다해 노력하자. 소유할 수 없으니, 집착할 수도 없으니, 지금 이 순간에 정성을 다하자. 그게 사람에 대한 예의다. 부모 자식이라 할지라도 어떤 인연에 따라 만나서 함께 살다가 그 인연이 다하면 흝어지고 마는 것이 이 세상의 도리이다.
사람은 어우러져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이지만, 동시에 혼자 가야 하는 독립적 존재이다. 주변에 사람이 많다고 꼭 행복한 것은 아니다. 내가 도움을 청할 때 손들어줄 사람이 있다고 다가 아니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자기 스스로를 돌아보고 반성하고 정리할 수 있어야 한다. 마치 왕이 정복했던 나라를 버리고 가듯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팔찌가 하나일 때는 소리가 나지 않지만 두 개 이상일 때는 부딪혀 소리가 난다. 여럿이 함께 있으면 잘잘못이 생기고 번거로우니 혼자서 정진하라는 뜻이다. 사람들이 관계를 맺는 이유는 그저 그 사람이 좋아서, 친구가 되고 싶어서, 함께 일을 하고 싶어서,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때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벗을 사귀고 남에게 봉사하기도 한다. 언젠가는 이런 일이 있을 것을 미리 살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그래서 사람의 관계는 참 어렵고 어려운 것이다.
홀로 앉아 선정을 버리지 말고 모든 일에 항상 이치와 법도에 맞도록 행동하며 살아가는데 있어서 무엇이 우환인지를 똑똑히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홀로 행하고 게으르지 않으며, 비난과 칭찬에도 흔들리지 않고,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남에게 이끌리지 않고 남을 이끄는 사람, 어진 이들은 그를 성인으로 안다.”
경전은 거울이다. 우리는 매일매일 거울을 본다. 더러운 곳을 털어내고 예쁘고 단정하게 가꾼다. 이렇듯 나를 돌아보고 반성하고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기다리는 자신을 관찰하자. 그리고 깨달아 실천하자. 알았으면 오로지 그 행위로 말미암아 귀한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머리로만 알아듣고 말로만 떠벌리다가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는 사람이 된다. 경전을 읽는다는 것은 자신을 관찰하고 반성하고 깨닫는 것에 끝나는 것이 아니다. 실천하여 행복해지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건 아무리 많이 차지하고 산다 할지라도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불필요한 것을 찾아 헤매지 말고, 내가 가진 것에 넉넉함을 알아 실천하는 하루가 되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복된 경전을 의미 있게 또다시 읽어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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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의 버리고 떠나기 옛것을 읽는 즐거움. 여기에 초판본을 읽는 새로운 즐거움이 더한 하루였습니다. 책 제본 상태가 수명을 다해 조심스레 책장을 넘기느라 좀 더디게 읽힌 책, 버리고 떠나기. 법정 스님의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쓴다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스님은 이렇게 살라하는데 저는 그렇게 살고 있는 않은 이유입니다. 스님 표현으로라면 저는 실천은 없고 말만 뻔지르르한 사람인 것입니다. 제 인생 멘트인 분의 책을 그저 그렇게 쓸 수 없기에 생각하고 돌아볼 것이 많은 하루였습니다. 종교의 본질 모든 종교는 표현과 방식의 차이가 있겠지만 결국엔 사랑과 자비를 내세웁니다. 사랑이 곧 신이고 진리이며, 자비의 실현이 종교의 본질이겠지요. 사랑이란 이웃으로 향한 부드러운 눈길이요, 따뜻한 손길이며 이해와 보살핌이며 염려다. 자비와 사랑의 실천없이 깨달음이 어떻고 견성이 무어라고 지껄이는 것은 빈 골짜기를 울리는 공허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듯 사랑과 자비는 마음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겪어서 마음이 동하여 움직일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불교는 단순히 부처님을 믿는 종교는 아닙니다. 불교는 우주의신비와 생명의 실상을 깨달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본래적인 자아와 우주 질서와 그 도리를 믿고 그것을 몸소 실현하는 종교이다. 우리가 믿는 종교나 신앙심은 절이나 교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과 하나님이 법당이나 교회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불상이건 십자가. 그것은 하나의 이미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절이나 교회에 가는 것은 그런 곳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가, 깨달음을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스님으로부터 전하여 듣고 일상생활에 적응하며 지혜롭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종교를 가진 사람은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절에 나가고 계를 받고 시주하는 신자가 있습니다. 절에 나가지 않지만 부처님말씀 따라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보살계를 받고 절에 나가야만 신자일까요, 절에 다니지 않으면 진실한 신자가 아닐까요. 법회에 참여한 사람들이 방생의 뜻도 모르면서 소원을 이룬다하니까 그저 누군가 잡아 온 물고기를 다시 바다에 놓아줍니다. 가족을 위해 추운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지만 그래도 새끼만큼은 그물에서 꺼내 바다에 놓아줍니다. 과연 진실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맹목적이고 반이성적인 신앙의 맹렬성을 버리고 맑고 평온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바르게 살자. 관념적이고 개념화된 부처님과 하나님이란 이름에 얽매이지 말자. 이 우주의 진리가 굳이 어떤 종교의 경전이나 가르침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순간순간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삶 속에서 있으니 바른길로 가는 실천이 진정한 신자이고 살아있는 현자賢者일 것입니다. 머리의 종교는 공허한 이론에 지나지 않는다. 삶이 약동하는 가슴의 종교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부처님과 신은 마음 밖에서 찾으려고 하지 말자. 마음 밖에 있는 것은 허상이다. 인간이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을 때 종교나 기도가 우리를 구원할 수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종교를 믿고 기도하면 원을 들어준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종교를 가지고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은 나라는 존재가 이 우주 안에서 티끌만치 너무 작은 존재임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불안으로부터 갈구로부터 욕심으로부터 나를 내려놓으려고 노력하는데 잘 되지 않습니다. 종교와 기도는 나를 내려놓음으로써 마음의 안정을 가져다줍니다. 깨달음과 정진 어디까지 깨달아야 진정한 깨달음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개인마다 상황과 정도가 다르니 깨달음은 자신의 처지에 따라 얕고 깊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정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한꺼번에 닦고, 단박 닦는다. 혹은 더할 나위 없는 깨달음을 얻었다. 말은 그럴듯하지만 이와 같은 주장은 삶의 진실에서 벗어나 있다. 깨달음은 개인적인 체험을 하면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자신을 닦아 이를 유지하는 것이라 볼 때, 깨달음과 정진을 지키려는 사람만이 진실한 사랑과 자비를 실천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깨닫고 정진하는 것은 어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출가 수행자에게는 내일이 없어야 한다. 그 내일 때문에 얼마나 많은 세월을 보냈는가. 우리같이 일상생활을 하는 사람이 꼭 출가 수행자처럼 행동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늘 지금 이 자리에서 자기수행하며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저는 가끔 경전공부니, 봉사니, 울력이니 하며 바쁘게 돌아다녔습니다. 남들이 보기엔 신앙생활에 열심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사실은 불사니 신앙이니 핑계를 대며 여기저기 분주하게 돌아다닐 뿐이었습니다. 가족을 우선하고 집안일부터 안정이 되어야 신앙생활도 의미가 있습니다. 밖으로만 겉돌지 말고 안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밖으로 팔았던 시선이나 관심을 안으로 돌이켜 자신의 삶을 개선하는 일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선지식을 마음 밖에서 찾지 말고 그대 안에서 찾으라. 선지식이란 말뜻은 원래 좋은 벗, 착한 벗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또 나를 잘 알고 이해해 주는 마음의 벗입니다, 나에게 깨우침을 주는 선지식을 우리는 아직까지 만나지 못하고 찾고 있습니다. 선지식은 경전이나 어록, 성현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 일상의 어디나 언제나 존재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허물이 있다. 하나는 선지식을 바로 내 코앞에 두고도 엉뚱한 데서만 찾으려는 탓에서이고, 또 하나는 선지식을 맞을 만한 내 준비가 아직 없어서이다. 우리에게 보리심을 일으키게 하고 깨우침을 주는 선지식이 위대한 사람만은 아닙니다. 어린 아이일 수도, 이웃일수도, 바람과 별일 수도, 산이나 바다일 있습니다. 활짝 피어 향기를 뿜고 있는 연꽃일 수도 있습니다. 나 스스로가 수행하여 바른 길을 가고자 실천할 때 내 곁에 선지식은 머물 것이고 우리는 그 선지식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선지식은 찾고자 하는 자에게 보일 것입니다. 단순하고 간소한 삶 내가 만약 시끄러운 세상에 살면서 직업을 선택하게 된다면 청소차를 몰거나 가구를 만드는 목수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청소차를 몰고 다니면서 묵묵히 쓰레기를 치우는 사람들을 대하고 있으면 절이나 교회에서 행하는 그 어떤 종교의식보다도 훨씬 신성하고 건강하고 또한 거룩하게 느껴진다. 그랬더라면 스님은 청소하는 선지식인이 되었을 겁니다. 제가 법정 스님을 좋아하는 이유는 삶의 간소함과 실천에 있습니다. 그러나 스님은 고집이 세다고 표현할 정도로 당신의 의지나 견해를 스스럼없이 내놓았습니다. 물론 강직한 자기절제와 나눔으로 말의 힘을 실으셨습니다. 저는 매번 정리정돈을 하고 삶을 간소화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결과를 놓고 보면 무소유를 변형하여 유소유를 합니다. 차고 넘치는데도 이 정도면 무소유적인 삶을 산다고 위로까지 하고 있습니다. 나눔으로 무소유를 실천해야 한다는 스님의 말씀이 아직은 제 귀에 박히지 못하나 봅니다.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경쟁하듯, 자랑하듯 무엇을 사들입니다. 갖고 싶은 것이 있을 때 그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인지 한 번 더 생각하지 않고 구매욕을 참지 못합니다. 오히려 사야할 때를 놓치면 후회하고 원통해합니다. 자꾸만 채우려고 하는데 비우려 하지는 않습니다. 항상 차고 넘치지만 만족할 줄 모르고 또 채웁니다. 사는 속도는 빠르고 거침없습니다. 그러나 버리는 속도는 참 늦고 망설이다가 다시 되가져옵니다. 사람들은 얻는 것은 좋아하지만 잃는 것은 싫어합니다. 어떤 것을 수집할 때는 그 숫자를 헤아려야 하지만 버릴 때는 미련을 두지 말고 한꺼번에 몽땅 버려라. 인생이란 얻는 것과 잃는 것으로 얽혀져있다. 세상이란 지금 당장의 일만 가지고 손익을 따져서는 안 된다. 전 생애의 과정을 통하여 어떤 선택과 결단이 참으로 얻는 것이 되고 잃는 것이 되는지, 전체가 되기 위해서는 일단 무無가 있어야 한다. 크게 버릴 줄 알아야 크게 얻을 수 있는 법이다. 또 그것이 나와 타인에게도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생각해 봐야합니다. 채우기 위해서는 비워야 합니다. 많이 비워야 많이 채울 수 있습니다. 비우지 않고는 더 이상 채울 수 없습니다. 지난달에도 나는 책을 열 두 상자나 치워버렸다. 책의 더미로부터 자유롭고 싶어서다. 일상적인 내 삶이 성에 차지 않거나 다시 시작하고 싶을 때 나는 내가 가진 소유물을 미련없이 정리 정돈한다. 스님에게 소유물이라는 게 주로 책일 것입니다. 그 책으로부터 지식을 얻고 지혜를 얻어 행복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 겁니다. 그리고 묵은 짐이 된 책들을 치워버리시고, 그러면 다시 개운하고 홀가분해서 새로운 책을 만나 삶의 탄력과 생기가 얻을 테지요. 저게 이렇게 큰 스님과 같은 점을 발견한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입니다. 저도 복잡한 일이 생기거나 해결되지 않은 일이 생겨 고민이라도 할라치면, 혹은 새롭게 다시 시작하고 싶을 때면 정리를 합니다. 즉흥적일 때도 있고 미리 계획해서 정리정돈을 합니다. 묵은 것을 버린다는 것, 먼지를 털어낸다는 것, 그래서 깨끗이 비워둔다는 것은 정신을 맑게 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점에서 아주 효과적입니다.
절에 가면 스님들 방이 궁금합니다. 가끔 들르는 방도 있습니다. 법정스님에게도 들르는 방이 있었습니다. 다른 스님이 기거하시는 곳인데 그 방에 들르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텅빈 방이 좋아서랍니다. 그 방에는 어디나 있음직한 달력도 없고 휴지통도 없습니다. 방 가운데 오직 방석 한 장만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입니다. 절에 가면 법당보다는 스님들이 계신 방에 차를 마시거나 말씀을 들으러 가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텅 비어있는 그래서 고요하고 성스러운 그 느낌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요즘은 스님 방에도 옷장과 냉장고에 테이블과 컴퓨터가 있고 이런저런 짐들이 많아진 듯 합니다. 예전에 비해 고요 속에서 텅 빈 충만을 느끼지 못하는 아쉬움이 큽니다.
비우고 버리는 것은 비단 사물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 마음, 지위까지도 관여합니다. 지난해부터 나는 치수에 맞지 않은 옷을 한 꺼풀씩 벗어 제치고 있다. 협회나 기관에서 손을 떼고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행사에는 안팎을 가릴 것 없이 아예 발을 들여놓지 않기로 했다. 우리는 채울 곳이 없으면 물건을 버리고 그 공간을 비웁니다. 할 것이 많은데 바쁘면 중요도를 따져서 가지 않아도 되는 곳에는 가지 않고, 갈 필요가 없는 곳은 가지 않으면 시간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 시간에 좀 더 중요한 일을 하면 됩니다. 이를 이해서는 끝없는 탈출과 출발이 있어야 한다. 자연은 사계를 통하여 항상 새롭게 태어난다, 여름동안 푸르고 무성했던 잎들을 미련없이 떨쳐버린다. 이는 가을의 열매를 통해 다시 태어나기 이해서다. 그리고 겨울이며 앙상한 가지만 남아 봄을 기다립니다. 새롭게 싹을 틔우기 위해 비우는 것이겠지요. 행복의 조건은 단순하고 소박한 삶과 고양된 영혼이다. 당신 자신을 안팎으로 살피라. 무엇이 되어야 할 것인가를 당신 스스로 만들어라, 자연과 우주는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어려운 여건을 극복하고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면서고 조화와 질서를 어기지 않았습니다. 스스로를 이겨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홀로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맹목적인 삶에 편승해서 허우적거리지 말기 바랍니다. 홀로 있어야만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반성할 수 있습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해 가고 있는가,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지금 바른 길로 가고 있는가. 스스로 끊임없는 질문 속에서 성장할 것입니다.
스님이 여러 번 인용한 크리슈나무르티 말 속에는 “자기 자신을 알고자 한다면 스스로를 조용히 지켜보라. 자신의 걸음걸이, 먹는 태도, 말씨, 잡담, 미움과 시새움 등을 자세히 살펴보라, 어는 것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내부에 있는 모든 것을 깨우친 다면 그것이 명상의 한 몫이 될 것이다.” 저는 ‘명상’이란 단어를 ‘홀로 있음으로 얻는 것’이라고 바꾸고 싶습니다.
저도 법정 스님처럼 어느 겨울에 내 삶을 다시 살아보고자 했습니다. 보다 간소하게 살고 싶고 보다 단순하게 지내고 싶습니다. 그래서 오래된 묶은 생각과 물건을 정리하는 중입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성에 차지 않는 내 일상에서 벗어나 삶을 다시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소유와 관계를 정리 정돈하는 작업은 저에게 가장 중요합니다. 이런 시간 속에서 곁가지들이 잘려나가 본질을 보게 될 것 같습니다. 버리고 비우는 일은 결코 소극적인 일이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모습입니다. 차지하고 채우기만 하는 것은 어쩌면 침체된 늪에서 멀리 볼 수 없게 된다. 차지하고 채우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차지하고 채웠다가도 한 생각 돌이켜 버리고 비우는 것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나아가는 “만약 나뭇가지에 묵은 잎이 달린 채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않고 있다면 계절이 와도 새잎은 돋아나지 못할 것이다. 그 나무는 성장이 중단되었거나 시들어 버릴 병든 나무 일 것이다.”우리가 막힌 벽만 보고 달린다고 생각해 보세요. 공기가 없는 곳에서 벽만 보고 달린다는 것은 의미없는 생을 사는 것입니다. 공간과 여백을 찾아가며 달리는 것이 진짜 살아가는 삶이 될 것입니다. 하루가, 한 달이, 일 년이, 내 일생이...지금 현재가 내 삶의 전체가 되는 것입니다. 내 삶의 전체는 다시 하루의 시작점에 서게 될 것입니다. 저에게 주어진 시간이란 삶이란 이러하니 윤회설을 믿는 저는 무의미하게 보낸 시간들이 많다는 생각에 남은 삶에 대해 가치있는 것으로 좀 더 보충하며 살아야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가끔 제가 누구인지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주위에서 그래도 너 답다, 라는 말을 들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나답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봅니다. 먼저 상황을 생각해서 너 답다는 말이 칭찬인지 비웃음인지 생각합니다. 제가 다행히도 잘하는 것은 내 삶과 타인의 삶을 비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나와 이웃의 처지를 비교하는 것은 기가 죽고 불쌍해 질 수도 있습니다. 자칫 자신감이 넘쳐 오만해지고 타인으로부터 시기심을 키울 수도 있습니다. 내 그릇은 이것뿐이데 남의 그릇에 눈을 돌리지 않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비교로 인해 스스로 상처받고 그것이 무의미함을 깨달은 후에 조금씩 알게 된 것이지요. 비교는 좌절감을 가져오고 시기심을 가져옵니다. 이것이 두려움을 키우고 이것대신 저것이라도 하는 차선책으로 소비를 키웁니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자기에게 주어진 그릇이 있습니다. 그 깜냥을 잘 알고 나게 주어진 몫을 지켜나갔으면 합니다. 내 몫을 남의 몫과 비교하여 불행해져서는 안 됩니다. ‘지난 밤에는 자다가 깨어 바깥바람을 쏘이고 싶어서 나왔다가, 밤하늘에 무수히 돋아난 별들을 바라보며 황홀한 시간을 가졌었다. 별들을 쳐다보고 있으며 무변광재한 우주와 그 신비 앞에서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밤하늘에 이런 별이 없다면 얼마나 막막하고 아득할까. 우리 마음속에도 저마다 은밀함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그 삶 또한 막막하고 황량할 것이다.‘ 스님, 요즘은 별이 그렇게 많지 않네요. 그래서 마음에 별 하나씩 그려 넣으라고 ✩남겨두셨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