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롤스, 드워킨의 미국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거두들과 독일 비판이론의 거장 하버마스를 관심 있게 읽다 보니 계속 눈에 치이던 이름이 있었다. 그 이름은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 직업이 '철학자'인데 재직하는 학과는 '비교문학과'였던 아이러니한 사람이다. 하지만 아는 사람들은 이 아이러니한 로티가 실은 미국을 대표하는 지식인임과 동시에 영미철학과 대륙철학으로 갈라진 철학 문화를 폭넓게 아우른 이 시대 최고의 지성임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 이렇게 두 철학 문화를 아우르는 데 있어서 로티와 필적할 만한 사람은 독일의 위르겐 하버마스 외에는 없을 것이다.
이 책은 국내 최고의 로티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이유선 교수가 쓴 책이다. 로티에게 수학한 적 있으며 그와 사적으로 연락을 주고받기도 하는 이유선 교수는 확실히 '로티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이 책이 로티 특유의 비교적 이해하기 쉬운 간결한 문체로 쓰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이 책은 프래그머티즘, 해석학, 문학적인 문화, 사회철학 및 정치철학, 자문화중심주의 등 로티의 핵심 테제들을 빠짐없이 전달하고 있다. 특히 제3장 <로티와 하버마스> 챕터가 흥미로웠다. 나는 원래 하버마스의 이론적 입장을 강하게 지지하면서, 그의 최대 맞수인 로티를 이해하고자 이 책을 읽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강한 저항감과 도전정신을 느꼈다. 내가 적대하는 로티의 입장을 마음 속으로 비판하면서 읽게 하는 이 책은 그래서 비판적 독서를 불러일으키는 책의 전형이다.
그래서일까. 로티의 한계라고 할 만한 부분들도 저자인 이유선 교수가 최대한 방어해내려고 하는 모습이 쉽게 눈에 띈다. 자신이 추종하는 철학자를 옹호하는 태도는 매우 자연스러운 태도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다만 사실 로티는 결코 학계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닌데(로티 스스로도 그걸 바라지 않는다) 그렇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한 이유를 밝혀주면서 로티가 한계를 가질 수 있는 영역이나 사안을 소개해 주는 건 어땠을까 하는 개인적인 아쉬움도 남는다. 그러나 이는 아마 '하버마스주의자'인 내가 읽었기에 그런 것이고, 철학을 잘 모르는 일반 독자들도 충분히 읽을 수 있게끔 구성된 이 책이 그런 한계까지 다루면서 균형잡기를 해야 할 의무는 없다고 본다.
즉 이 책은 가장 대중적인 글쓰기를 지향했던 리처드 로티의 유지를 이어받아 쉽게 쓰여진 국내 최고의 로티 입문서적이라 할 만하다. 특히나 국내는 『철학과 자연의 거울』이나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과 같은 로티의 주저들이 절판된 상황이기 때문에 이 책은 가뭄에 단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로티에 대해 알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철학도든 일반인이든 이 책부터 집어들기를 권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