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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난 뒤 개츠비는 왜 위대한 개츠비인 것인가. 나 또한 처음 『위대한 개츠비』를 읽은 후 든 의문이 그거였었다. 내가 이 책을 읽고 있었더니, 곁에서 같은 질문을 건네 받고 한참 고민에 빠졌다. 정확한 해답을 찾기 위해 개봉 당시에 보았던 영화를 다시 찾아 보았다. 한 권의 책과 동명 원작의 영화를 보는데 하루를 할애했다.
새움 출판사에서 출간된 『위대한 개츠비』의 번역자는 책의 뒷면에 오역 지적 역자 노트를 별도로 담았다. 전체적인 스토리에 집중하는 나는 큰 영향을 받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자세히 읽어보면 그가 오역이라고 칭할 만한 부분이 보이기는 한다. 번역자는 김욱동 번역본과 김영하 번역본을 비교하며 오역에 대해 지적했다. 나는 김영하 번역본을 먼저 읽고 이정서의 번역본을 나중에 읽었는데, 약간은 건조한 김영하의 번역본에 비해 이정서의 번역본이 더 감성적으로 다가왔음을 말하고 싶다.
한 남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개츠비. 그는 소위 찢어지게 가난했다. 가난한 그가 신분상승을 위해 공부하고 또 공부했다. 한 부유한 사업가를 도우며 자신의 이름을 제임스 개츠에서 제이 개츠비로 새롭게 태어났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과거를 잊고 새로운 개츠비로 태어나고 싶었다.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이 부풀었다. 신분 상승을 꿈꾸는 이에게 명망있는 가문의 여성을 만나는 것이 하나의 방법인건 동서고금의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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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 개츠비가 데이지를 만난 건 어쩌면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신분 상승의 꿈, 아름다운 여자 그리고 사랑. 하지만 전쟁은 개츠비를 데려갔고, 사랑에 목말라했던 데이지는 개츠비를 기다리지 못했다. 조상 대대로 돈이 많은 톰 뷰캐넌과 결혼한 건 당연했다. 그런 데이지를 오랜 세월동안 사랑한 건 개츠비의 몫이었다.
책의 화자 닉 캐러웨이가 웨스트 에그로 이사와서 웨스트 에그보다 더 상류사회인 이스트 웨그에 사는 톰 뷰캐넌과 데이지를 방문하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자신의 옆 집의 커다란 저택에서는 매일 파티가 이루어진다. 초대받지 않아도 마음대로 들어와 술을 마시고 춤을 추며 놀 수 있는 곳이 개츠비의 저택이었다. 개츠비가 사람을 죽였다느니 하는 소문이 돌았지만, 그저 그의 부를 누리면 그만이라는 사람이 허다했다. 처음으로 개츠비로부터 초대장을 받은 닉 캐러웨이는 그곳에서 데이지의 저택에서 보았던 조던 베이커 양을 만났다. 그녀로부터 개츠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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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던 베이커 양의 이야기를 들은 닉 캐러웨이는 개츠비가 왜 그곳에 집을 샀는지 이해가 되었다. 파티가 끝난 후 이스트 에그가 바라보이는 곳의 무언가를 향해 손을 내밀었던 장면을 기억했다. 초록색 불빛을 향해 손을 내밀었던 몸짓의 의미를 말이다. 그 장소에서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주기를, 자신에게 찾아와 주기를 간절히 바랬던 한 남자의 염원을 말이다.
그의 사랑을 이해했던 탓인가. 아마도 뉴욕에서 함께했던 톰의 술 파티를 목격해서 일까. 닉 캐러웨이는 개츠비가 원했던 것을 거절할 수 없었다. 개츠비의 부탁으로 데이지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던 닉 캐러웨이는 그녀가 올때까지 잠시도 마음을 놓지 못했다. 한아름의 꽃을 가져오는가 하면 잔디를 깎는다 부산을 떨었다. 안절부절 못했다고 하는게 옳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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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에서나 영화속에서 가장 안타까웠던 장면이 하나 있다. 개츠비와 다시 만난 데이지가 개츠비의 부를 확인하고, 그의 방에 들어서서 셔츠를 집어 침대에 던지는 장면이었다. 그러면서 한 마디를 내뱉는다. '너무나 아름다운 셔츠들이에요. 이렇게, 이렇게 아름다운 셔츠들을 본 적이 없다는 게 슬프게 만들어요.' (153페이지) 이 얼마나 속물적인 발언인가. 이 한 마디에 데이지의 모든 것이 들어 있었다. 그녀의 부에 대한 욕망. 사랑도 한낱 부가 없으면 휴지조각처럼 흩어지고 말 것임을 보여주는 말이었던 것이다. 개츠비를 다시 만나 사랑해 겨워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가 가진 부가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었고, 그게 개츠비에 대한 사랑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얼마나 차갑게 돌아섰던가. 개츠비가 진정으로 필요로 할 때 아무도 그의 곁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가 가진 부를 마음껏 누렸던 사람들, 어느 누구하나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하물며 오로지 데이지 만을 바라보았던 개츠비에 대한 마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밟아버릴 수 있는 사람이 또한 데이지였다. 돈에 약한, 돈때문에 사랑한다고 믿은. 과연 그녀에게 개츠비에 대한 사랑이 남아있기나 했었을까.
그런 데이지임에도 끝까지 데이지를 향한 마음을 놓지 않았던 개츠비였다. 그녀와 함께라면 자신의 야망마저 버릴 수 있었던 그였다. 그의 죽음은 얼마나 허망한가. 그토록 사랑한다고 믿었던, 이제는 온통 자신과 함께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던 개츠비에게 데이지는 그저 한 줌의 공기처럼 흩어지고 말았다.
우리가 왜 고전을 읽는가. 작품이 쓰여진지 100년이 넘어도 여전히 사랑받는 이유는 그 작품들에서 우리의 본모습을 발견함이 아닐까. 이 작품을 읽어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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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일단 이 책을 읽기 전에 나는 [위대한 개츠비]라는 작품을 읽었나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분명 미니북으로 가지고 있지만 기억속에 남아 있지 않아 '읽어야겠다'라고 생각하기 전에 다른 작품보다 유달리 두꺼운 이 책. 번역자가 이정서 작가이다. 카뮈의 [이방인]의 번역을 하나하나 오류를 설명하던 책으로 기억에 남아 있는 작가이다. 그렇다면 이 책 또한 그러하다.
고전이기 때문에 어마어마하게 많은 번역본들이 존재한다. 그 모든 것 중에서도 가장 많이 팔린다는 번역과 가장 원본에 충실하다는 번역을 자신이 번역한 것과 비교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비난의 여지가 있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몰랐던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니 이제라도 바로 잡아주는 것이 좋다는 생각도 든다.
'책'을 읽을때는 아무래도 작가의 영향을 많이 받게된다. 한국인의 모국어인 한글로 적혀진 글을 읽을때는 상관없지만 자신이 알지 못하는 외국어로 쓰여진 작품을 읽으려면 반드시 번역자의 손을 거쳐야한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번역자는 원문을 그대로 번역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의역이 필요한 부분도 있고 여러가지 단어들 중에서 가장 이 이야기에 적합한 단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책을 볼 때면 번역자가 누구인지 보는 편이다. 내가 이미 읽어왔던 작가거나 인정하는 작가라면 믿고 보는 편이지만 처음 보는 작가인 경우 의심을 가지고 보기 마련이다. 어떻게 이야기를 번역을 했는지 두려움과 기대를 느끼면서 말이다. 원서를 몇권 거지고 있다. 원서로 본 책들도 있다. 해리포터는 전권을 원서로 읽었고 다빈치코드도 원서로 읽었다.
그 중 해리포터 1권과 다빈치코드는 호기심에 번역본과 비교해서 읽어본 적이 있다. 해리포터는 내가 이해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읽은 것이고 다빈치코드는 정말 하나하나 대조해가면서 보았다. 원서에는 분명 존재하는 문장이지만 번역본에는 빠져 있는 문장도 눈에 띄었다. 왜 빠뜨린 것인지 하는 의구심도 들었지만 직접적으로 물어볼 생각은 못했다. 만약 내가 번역을 한다면 어떤식으로 번역을 할까 하는 생각은 해본 적 있다. 상당히 어렵고 고된 작업임에는 틀림없다.
67군데의 오역을 지적한 '역자노트'는 다른 책과가 이 책의 차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다. 가령 paralyzed라는 단어는 '마비된'이라는 뜻으로 대부분의 단어책에서 나오고 나 또한 그렇게 알고 있다. 하지만 이 본문에서의 쓰임은 다르다.' 술에 취한 상태'를 뜻하는 용어라고 한다. 기본적으로 이 책의 이야기나 흐름을 파악해야지만 알수 있는 장면임에 틀림없다.(305p)
번역에는 크게 '직역'과 '의역'의 두가지 방법이 존재한다. 문장 그대로 쓰여진 그대로를 옮겨놓는 것이 직역이라면 의역은 그 문장을 읽은 번역자의 의도대로 약간은 돌려 말하는 기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너무 의역이 되면 그것도 곤란한다. 원작의이 의미를 훼손시킬 수 있으니 말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미니북의 번역은 어쩌면 조금은 심한 의역이 아닐까 할 정도로 많이 지적당하고 있다. 적어도 이 작가에 의하면 말이다. 그런데 그 증거가 명확하니 반발할 수 없는 부분일지도 모르겠다.
번역본만 읽는다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 원서와 비교했을 때 문제가 되기도 한다. 번역본은 작가가 만들어내는 작품이 아니다. 엄연히 원서가 존재하고 그 원서에 바탕을 둔 채로 옮겨야 하는 것인데 원서에서는 적혀져 있지 도 않은 문장을 쓴다거나 아예 다른 뜻으로 바뀌어 버리면 곤란하다. 읽는 사람들이 모를 것이라고 해서 그런 식으로 번역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그저 잘 읽히는 문장이 아닌 원작가가 의도가 그대로 남아있는 번역서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모든 부분이 작가의 말이 다 맞다는 것은 아니다. Mr. Mumble을 다른 번역자들은 '멈블씨'라는 단어를 쓰고 있으나 작가는 '아무개씨'라고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맞는 지적이다. 그러나 다른 번역들이 '머리를 염색하셨네요.' 라고 쓴 표현을 굳이 '머리를 물들였군요.' 라는 표현으로 바꿀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은 든다. 원서에서는 'dyed your hair'라고 쓰고 있고 우리가 흔히 말할때도 '나 머리 염색했어.'라는 말을 쓰지 '머리 둘들였어.'라는 표현을 잘 쓰지는 않는다. 여러가지 지적들 중에서 유일하게 공감하기 어려웠던 부분이었다.(331p)
번역에서 가장 신경을 써야 할 부분은 무엇일까. 아무래도 주인공들이 말하는 의도나 그들의 관계, 말하는 투, 반말인지 존대말인지 여부, 두가지 이상을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일 경우 의미의 선택, 전체적인 맥락. 아에 새로 쓰는것이 더 나을정도로 신경을 써야 할 것이 많을 것이다.
이 책을 읽다보니 [푸줏간 소년]이라는 책이 생각났다. 마침표 하나 없이 그저 단어와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던 책. 원서가 어떠했는지 정말 궁금했는데 원서도 그와 똑같이 마침표도 하나 없었다. 원사와 같은 맥락으로 같이 번역되어 온 책. 그 작가님의 책을 믿고 읽게 된다.
독자들은 번역자들은 믿고 책을 읽는다. 그만큼 번역자들의 역할은 막중하다. 한번이라도 더 생각하고 쓰고 있겠지만 더 좋은 작품을 내어주길 바라 마지 않는다. 쓰다보니 역자노트에 치중한 서평이 되고 말았다. [위대한 개츠비]에 대한 내용은 각자가 이해하는 것으로 하면 되겠다. 주인공 개츠비가 왜 위대한지 궁금하지 않은가. 제대로 된 번역으로 읽어볼 기회다. 원서에 충실한 번역 말이다. '번역이 반역'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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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먼저 만났던 개츠비를 원작으로 다시 만나게 되니, 이 남자가 그렇게 안쓰러울 수가 없다. 그저 세상을 향한 복수처럼, 가져본 적 없던 부를 거머쥐기 위해 애를 썼던 한 남자가 아니라, 사랑 하나에 목숨을 건 남자로 비친다. 데이지가 그럴만한, 그가 목숨까지 바쳐야 할 정도의 여인이었던가? 영화를 보면서 빠져들었던 그 순간의 이야기는 이렇게 다시 보인다. "너무나 아름다운 셔츠들이에요." 그녀는 흐느꼈다. 그녀의 목소리는 두터운 옷더미에 묻혀 작아졌다. "이렇게, 이렇게 아름다운 셔츠들을 본 적이 없다는 게 슬프게 만들어요." (153페이지) 이런 말을 하는 여자를 5년 동안 기다린, 기다린 것뿐만 아니라 그녀를 만나기 위해 가파른 오르막길을 걸어 올라온 그의 인생이 무너지는 순간, 모든 게 부질없어 보였다. 허망했다. 완벽하지 않은, 구멍 난 것들이 보였다, 그들 모두의 인생이. 데이지를 향한 개츠비의 시간과 노력도, 12년 동안 떠나지 못해 안달하면서 톰을 만났던 윌슨 부인도, 아내의 부정을 알고 미쳐버린 윌슨도, 버림받은 것처럼 마지막에 외쳤던 베이커 양도, 상대의 돈을 바라보는 게 사랑이라고 생각한 데이지도.
가난했던 개츠비. 그에게는 신분을 바꿀만한 어떤 배경도 없었다. 영원히, 가난한 개츠비로 살아야 할 운명이었던 거다. 공부해도 변할 수 없었던 그에게 인생을 바꿀 기회가 온다. 어떤 부유한 사업가의 선택을 받은 그는 본인의 이름 '제임스 개츠'를 '제이 개츠비'로 바꾸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그는 무엇으로 부를 거머쥐게 되었나? 톰 뷰캐넌이 의심하던 것처럼, 나도 그가 축적한 부를 의심하면서 읽게 된다. 아무리 찾으려 해도 투명하지 못한 그의 배경이 계속 의심을 낳는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소설의 흐름이 점점 개츠비의 잃어버린(?) 사랑에 초점을 맞추는 거로 보인다. 오래전 그가 놓친 데이지를 되찾기 위해, 여전히 데이지가 자기를 사랑한다고 믿었던 개츠비의 맹목적인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 그는 데이지의 집이 보이는 (그래 봤자 개미 똥구멍만한 불빛 하나겠지만) 건너편에 저택을 마련한다. 데이지는 올까? 그는 오로지 데이지가 그를 찾아주기를 바라는 마음 하나로 매일 파티를 연다.
원작을 읽지 않았어도 많은 사람이 아는 내용이다. 데이지를 찾아 헤매던 개츠비가 많은 돈을 쏟아부어 여는 파티가 무용지물이 되는 순간은,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드러나는 윌슨 부인의 사망한 사고에서다. 닉의 집에서 데이지와 조우할 개츠비의 행동은 순정남이었다. 데이지를 기다리는 동안 뭘 해야 할지 몰라 발을 동동거리고, 데이지와 만나는 순간의 설렘을 잔뜩 기대하는 모습이었다. 그래, 이 정도의 되어야 나 순정남이네, 하고 말할 수나 있지. 이 소설을 읽기 전에 부담부터 생겼던 것에 비하면 소설의 흐름은 오히려 편안했다. 보이는 그대로 읽으면서 온갖 역경을 딛고 일어선 개츠비를 보게 했으니, 이제 데이지를 만난 그의 순정이 얼마나 빛나느냐 하는 기대를 잔뜩 품게 된다. 그런데 데이지는 속물 중의 속물이었고, 개츠비의 마음이 아니라 그의 부에 더 정신이 팔렸다. 데이지는 정말 개츠비를 사랑하긴 했을까? 오래전 그때도 그를 사랑했을까? 단지 비슷한 신분의 누군가를 만나 자기가 누리던 부를 이어가려던 게 아니고? 믿을 수 없다. 데이지의 마음은 하나도 보이지가 않더라. 개츠비의 저택에서 아름다운 셔츠들에 열광하며, 그동안 자신이 누려온 부가 그 정도(개츠비의 셔츠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던 인생에 절망했다. 이런 몹쓸...
후반부로 갈수록 긴장은 고조되고 소설은 더 탄탄해진다. 닉 캐러웨이가 적어가는 개츠비의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여러 인물이 각자의 역할에 더 집중한다고 해야 할까. 베이커 양은 의외로 순정파였다. 닉에게 추파를 던지며 한순간을 즐기는 것으로 여겼던 그녀에 대한 나의 평판은 수그러들었다. 닉을 원망하며 그녀의 은근한 프러포즈를 거절한 투정을 말할 때는, 아 여기서도 타이밍이 문제였던가 싶었다. 가장 원망하고 싶은 남자 톰 뷰캐넌은 여전했다. 그는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고도 잘 살아갔다. 그가 가진 부는 그를 여유롭게 만들고,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을 살게 했다. 아마 이때부터였을 거다. 이 소설이 개츠비의 순정에서 잔인한 세상의 한 단면을 보는 것으로 탈바꿈한 것처럼 여겨진 것은...
아무리 오르고 싶어도 결국 오르지 못하고 그 생을 마감한 개츠비. 그는 가난에 빠져 지냈지만 어떤 희망을 품고 나아가고 싶지 않았을까? 노력하면 나아지는 삶. 우리는 그걸 바란다. 그렇게 하루를 산다. 하지만 세상이 그걸 허락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을 때 개츠비와 같은 선택을 할지도 모른다. (이미 그런 선택을 한 사람도 있겠지만...) 간절히 바라는 게 생기고 그걸 이루기 위해 불법적인 일에도 손을 뻗게 되는 자연스러움. 우리가 목말라 하는 갈증에 그 방법 말고 또 뭐가 있을까? 그가 바랐던 건 한 여자의 마음이었지만, 결국에 그가 바라던 것은 하나도 이뤄지지 않았다. 파멸 같은 결말을 선사했을 뿐... 한 남자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소설에서 마지막까지 그가 선택한 삶을 걸어갔던, 그녀를 위해 자기 자신 따위 기꺼이 버릴 수 있는, 모든 것이 흩어지고 사라진 상태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그는, 누구인가 묻고 싶었다.
개츠비는 해가 갈수록 우리 앞에서 멀어지는 그 풋풋한 불빛을, 그 절정의 미래를 믿었었다. 그때 그것은 우리를 피해갔지만,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내일 우리는 더 빨리 뛸 것이고, 우리의 팔을 더 멀리 뻗을 것이고…… 그리고 어느 날 좋은 아침……. 그렇게 우리는 나아갈 것이다. 흐름을 거스르는 보트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밀쳐지면서. (289~290페이지)
여러 번역으로 이미 출간된 이 작품이 이번에는 67군데의 오역을 지적하면서 새로 출간되었다. 사실 영화로 본 적은 있지만, 원작을 읽은 적이 없어서, 그 오역의 지적을 어떤 부분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서 난감했다. 원서가 아니라 번역본을 읽으면서 어떤 비교를 해야 할지 어려워서다. 다행히 이 책의 끝에 역자가 지적한 오역의 비교가 그대로 담겨있다. 세세하게 보면 문장이 달라지는 걸 알 수 있다. 소설의 흐름이 다른 번역과 전체적으로 어떻게 다르게 적용되는지 다른 번역본을 읽어보면서 비교하는 재미도 있을 터. 저자가 언급해준 부분 외에도 큰 흐름을 보면서 다 읽은 느낌을 비교하는 매력도 상당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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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대 후반(?)에 <위대한 개츠비>를 한 번 읽었다. 그 전에 어릴적 TV에서 본 영화가 기억에 남아있었다. 물론 어릴적 본 영화로 내용을 다 기억하는 것은 아니었다. 몇 장면이 기억날 뿐이고 줄거리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데 그 기억에 남는 몇 장면은 등장인물들이 차를 타고 가는 장면이다. 아니 등장인물들이 차에 타있는 장면이 기억이 나고 사고가 있었던 것이 기억이 난다. 이십대 후반 쯤에 읽었는데 역시 줄거리는 아련하고 이번에 두번째 읽으면서도 새롭게 느껴졌다. 개츠비는 과거의 여인 데이지를 만나기 위해 매일 밤 파티를 연다. 단지 만나기 위해는 연 파티는 아니다. 과거에는 가난한 군인이었고, 데이지를 가질 수 없을 것이라 이미 단정했고, 그래서 데이지를 가졌고, 하지만 영원히 가질 수 없어 헤어져야 했지만, 이제는 당당히(?) 데이지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여는 파티였다. 개츠비가 데이지를 만나게 되기까지 그 시간은 설렘의 시간이었을까? 다시 데이지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해서 가질 수 있는 설렘? 아니었을 것 같다. 두렵고 쓸쓸한 시간이었을 것 같다. 이렇게 매일 파티를 여는데도 데이지를 만나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 영원히 함께 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데서 오는 낙담과 쓸쓸함의 시간이었을 것 같다. 개츠비는 데이지를 만난다.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데이지도 자신을 한번도 잊지 않고 지속적으로 사랑해왔을 것이라는 착각으로. 그리고 개츠비는 쓸쓸히 죽는다. 개츠비가 데이지를 다시 얻기 위해 이룬 부는 정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개츠비가 어떻게 그 부를 이뤘는지는 명확하게 밝혀지지는 않는다. 소문만 무성하고 개츠비의 파티를 즐기면서 사람들은 개츠비가 사람을 죽였네, 밀주를 팔았네 하는 말들을 수근거린다. 마음 속에 데이지가 없었다면 얼마나 쓸쓸한 일인가? 내가 베푸는 파티를 즐기면서 하는 말들이라니! 데이지가 톰의 정부를 차로 치는 사고를 내지 않았다면 개츠비와 함께가 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둘은 행복했을까? 개츠비가 톰 앞에서 데이지를 자극하고 흥분하게 하지 않았다면, 톰을 사랑했던 때도 있었음을 인정했다면, 그래서 데이지가 흥분하지 않고 사고가 나지 않았다면 둘에게 행복한 미래가 펼쳐졌을까? 개츠비가 죽은 후 개츠비의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는 전화가 온다. 개츠비가 부를 잃는다면 데이지를 다시 잃을 것이다. 데이지는 부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부가 없는 삶은 살 수 없는 그런 여자로 보인다. 그러니 이 위대한 개츠비의 사랑은 참으로 쓸쓸하고 허망한 사랑이다. 책을 다 읽고 다시 읽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계속해서 계속해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야 이 위대한 개츠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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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위대한'
개츠비일까?
미국의 1920년대 물질 만능주의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새로운 번역으로 만나게 되었다. 작가의 원작을 어떤 사람이 번역을 했는가에 따라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오래전 위대한 개츠비라는 영화를 봤었다. 명작이란 역시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인가 보다라며, ‘위대한’이라는 수식어가 좀 맞지 않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작가는 개츠비의 어떠한 면을 보고 위대하다는 수식어를 붙였을까? 가난한 젊은이가 여인의 아름다움에 반해 사랑에 빠졌다는 거? 아니면 가난한 환경에서 겪었을 수많은 어려움에 좌절하지 않고 희망이라는 키워드를 움켜쥐고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부자가 되는 성공 과업을 이루었다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자신의 처지 때문에 실연당했지만 다시 사랑하는 여인을 찾아간 것? 짧은 순간에 수많은 생각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그러나 나이를 먹고 다시 만난 위대한 개츠비는 전과는 또 다른 느낌을 주는 책이었다. 개성 없다고 할지 모르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인생이란 과업을 생각할 때, 남들과 동일한 생각을 하고 남들과의 삶의 범주에서 다른 점이 없다면 그것은 위대하다는 표현을 하기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항상 희망을 바라보며 달려온 사람에게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다시 도전하는 진취적인 모습을 보여준 개츠비, 상한 감정에 굴복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고 다시 도전하는 그의 투지에 배울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 난 느낌으로 인생이란 상자의 단면이 아니라 전면이 있다는 새로운 시각을 일깨워줬다고 할 수 있다.
"네가 누군가를 비난하고 싶어질 때에는 언제든 ……" 그분은 내게 말했다.
"이 세상 사람들 전부가 네가 지녔던 이점을 누렸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을 꼭 기억하렴." -15쪽
여성이 아름다운 외모에 사랑에 빠진 개츠비, 첫눈에 반함 데이지의 마음을 얻는 방법은 뭘까? 개츠비는 돈이면 사랑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열심히 돈을 모아 거부가 되었고, 그가 사랑하는 여인 데이지 앞에 나타난다. 개츠비는 백만장자와 결혼해서 살고 있는 데이지의 앞집으로 이사를 했고, 자주 파티를 열곤 했다. 혹시 기다리는 대상이라도 있었던 걸까? 그리고 몇 년이 흐른 뒤 개츠비는 데이지를 만나게 되는데, 개츠비는 사랑하는 여인 데이지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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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아내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소." 개츠비가 말했다.
"그녀는 결코 당신을 사랑한 적이 없었소. 그녀는 나를
사랑하오."
"당신 틀림없이 미쳤군!" 톰이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개츠비가 강렬한 흥분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분명 미친 말인 것
같지만, 개츠비는 계속 말을 이어간다.
"그녀는 결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소. 알아들었소?" 그는
소리쳤다.
"그녀는 단지 내가 가난했고 나를 기다리기에
지쳤기에 당신과 결혼한 거요. 그건 끔찍한 실수였지만,
그녀는 나 외엔 어느 누구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소!"
-211쪽
이미 남의 아내가 되어버린 여인을 상대로 그것도 그 여인의 남편에게 이렇듯 당당하고
강력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개츠비 한 사람외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당당함은 어디서 나왔을까? 사랑만 하며 살아도 부족한 세상이라고 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에도 사람은 사랑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존재임을 절실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한 여인의 미모에 반해 사랑에 빠졌던
개츠비, 사랑하는 여인의 마음을 얻지도 못하고 결국 그가 사랑하는 여인이었던 데이지를 지켜주기 위해 그녀의 죄를 뒤집어 쓰고
결국 죽음을 맞는 개츠비다. 참 어렵고 난해한 작품이라 뭐라고 느낌을 단정 짓긴
어렵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일편단심, 그리고 사랑하는 여인을 지키기 위한 죄의 처벌까지 감수한 개츠비의 여인에 대한 헌신과 희생이 대단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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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고전에 대한 오역이 문제가 되어 다시 출간된 번역서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다시
시작되는 고전 번역의 논쟁과 관련하여 왜 빈번하게 발생하는지 이해를 도와주는 역자 노트가
있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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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e talked a lot about the past, '그는 과거에 떠들어댔고,'라는 번역,
그러나 다른 사람은 '그는 과거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고,'라고 번역했다.
'그는 과거에 떠들어댔고,'에 비하여 '그는 과거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고,'라는 표현이 주는 느낌은 정말 딴판이다.
번역자의 표현에 따라 등장인물의
인상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니 그동안 무심결에 읽었던 많은 번역서들은 괜찮을지 궁금하다.
세계 유명인들이 아끼고 사랑한 책 「위대한 개츠비」, 빌 게이츠의
경우 약혼식장에서 개츠비 복장을 했었다는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몇 해전 위대한 개츠비를 번역한 바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의 소설 「노르웨이 숲」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이상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친구가 될 수 있다"라고. ![]()
관계성 좋은 사람을 지향하는 한 사람으로 위대한 개츠비 이 책을 한 두번 더 읽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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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언어만 접하고 살아가는 환경은 제한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누군가가 짚어주지 않으면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기도 하고, 존재 자체를 모르기도 한다. 이번에 새움 출판사에서는《이방인》,《어린 왕자》다음으로《위대한 개츠비》의 새 번역본을 출간했다. '지금까지 당연한 듯 알고 있던 고전번역본이 사실은 왜곡되었다면?'이라는 무시무시한 화두를 던져준다. 외국 작가의 책을 지금껏 번역본으로만 접하고 있었으니, 오역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고통스럽기는 하다. 신랄하고 정밀한, 67군데의 오역을 지적한《위대한 개츠비》를 읽어보며, 진정으로 '위대한' 개츠비를 만나는 시간을 가져본다.
《위대한 개츠비》의 지은이 F. 스콧 피츠제럴드는 1896년 9월 24일 미국 미네소타 주 세인트폴에서 태어났다. 1913년 프린스턴대학교에 입학했지만 1917년 제1차세계대전의 발발로 대학을 중퇴한 후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전쟁에서 죽기 전에 작품을 남기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고, 1920년 첫 장편소설《낙원의 이쪽》을 발표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25년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위대한 개츠비》를 발표하였다.
옮긴이는 이정서. 2014년 기존 알베르 카뮈《이방인》의 오역을 지적하며 새로운 번역서를 내놓아 학계에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노이즈 마케팅'이 아니냐는 오해를 받기도 했지만, 출판계와 번역계에 격렬한 논쟁을 불러오며 자성을 이끌어냈다는 평을 받았다. 2015년 생텍쥐페리의《어린 왕자》의 정밀한 번역을 시도해 기존 번역에서 놓쳤던 문제들을 바로잡았다.
사실 고전소설을 읽겠다고 집어들었다가 중도포기한 적이 많다. 이 책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나오는 영화를 보고 난 후에 한 번 읽겠다고 결심만 하고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 한 번 읽다가 멈춘 후에는 자꾸 뒤로 미루곤 했다. 유명하고 익숙한 제목 때문에 궁금한 생각이 들면서도 피부에 와닿는 계기가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번역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떤 계기로 번역을 시작하였는지, 이 책에서는 '역자의 말'을 소설의 앞에 두어 번역에 돌입한 계기를 알려준다. 작가(혹은 출판사)는 왜 이 책의 제목을 <위대한 개츠비>라고 한 것일까? 아니 왜 '개츠비'를 '위대하다'고 한 것일까? 이 번역은 그러한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나로서는 기존 번역서를 읽고 도저히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호기심에 원본을 찾아본 나는 그간 읽은 번역서들과는 너무나 다른 느낌을 받았고, 결국 전체 번역을 해보자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역자의 말 中)
섬세한 표현과 문체로 인간 본성을 아주 솔직히 드러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언젠가 한 번은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알맞은 시기에 읽을 기회를 만든 듯하다. 연휴라는 점이 책에 집중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게다가 어떤 번역본을 접하느냐에 따라 끝까지 읽어나갈지 중도포기를 하게 될지 판가름이 나는 듯하다. 집중해서 읽어나갈 수 있었다는 점, 오역을 줄였다는 믿음 등이 이 책의 장점이다.
290페이지로 이어지는 번역이 끝나고 나니, '역자노트'가 기다린다. 책 전체의 1/3 정도 분량인 역자노트에는 번역을 하면서 있었던 과정, 고뇌, 최선의 결과를 이끌어낸 부분 등을 살펴보게 된다. 특히 마지막 문장에 대한 일화가 인상적이다.《위대한 개츠비》번역을 시작한 걸 알고 전문가 한 분이 '마지막 문장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 질문을 받을 당시에는 당황했다고. 그도 그럴 것이 번역이 한참 진행 중이라는데 마지막 문장을 물어보았으니 뜬금없다고 여길 만하다. 그런데 번역이 반쯤 진행되었을 무렵 또 다른 한 분이 똑같이 물어왔다고 한다. 왜 사람들이 마지막 문장에 집착하는 건지 그땐 몰랐지만, 번역을 끝내면서는 그때와 달리, 끝 문장에선 거의 주저함이 없었다고 한다. 정말이지 닉의 마지막 회고는 시처럼, 아포리즘처럼 직유와 은유가 적절히 배합된 난해하면서도 아름다운 아주 긴 문장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것을 뚫고 나오자마자 만난 저 까다로워 보이지만 단순한 문장은 오히려 너무나 당연해서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이 의미가 새겨져 왔던 것이다. 역시 직역 그대로가 답이었으며, 앞 문장에서 물 흐르듯 흘러 와야 했던 문장이었다. 떼어 놓고서는 결코 해석이 되지 않는……. (443쪽)
역자가 다음 번역 작품으로 어떤 것을 선택할지 궁금해진다. 특히 이 책에는 '역자노트'가 첨부되어 기존의 문제점과 함께 비교해볼 수 있어서 흥미롭다. 번역이라는 것이 의역의 문제도 있고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기존의 번역을 비난한다기보다는 기존과는 다른 의견도 제시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번역본은 특히 전체적으로 물흐르듯이 읽을 수 있도록 틀을 잡아주는 역할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면에서 이 책으로《위대한 개츠비》를 접한 것은 행운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 번역 작품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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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미권 소설을 원서로 읽을정도의 수준이 되면 <위대한 개츠비> 를 소개하는 섬세한 표현과 문체로 인간의 본성을 표현한 작품을 그대로 느낄 수 있겠지만 우리는 아쉽게도 그 정도의 실력이 아니기 때문에 번역 본에 의해 그 느낌을 간접적으로 체험 할 수 밖에 없다. 옮긴이 이정서는 <위대한 개츠비>를 번역 하며 아무리 긴 문장이라 해도 작가의 문체를 임의로 해체하지 않겠다는 것, 그러기 위해 원문의 쉼표 하나까지 살릴수 있도록 노력했다고 밝히고 있다. 영미권 소설을 읽으며 의심하지 않았었다. 당연히 전문 번역가에 의해 출판된 책이므로 완벽하리라 생각했었고 원작자의 의도를 최대한 전해 주기 위해 노력했으리라 믿었었기에. 옮긴이 이정서는 <위대한 개츠비> 번역서만도 60여 종이 넘으며 이런 현상이 가능한 이유를 '의역'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조금은 충격적이며 우리나라에서 번역되고 있는 책들에 대해 너무 관대한 것이 아닌가란 의문도 들었다. 옮긴이 이정서는 역자노트를 67곳을 통해 전문가들 사이에서 격찬을 받은 김욱동 번역, 독자들에게 많이 읽혀진 김영하 번역을 비교하며 설명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문에 있는 쉼표, 그리고 그 단어가 의미하는 것, 은유적표현, 미국 속어, 직역과 의역의 차이, 작가가 쓴 문장을 이해하고 등장인물에 대한 오해와 왜곡 되어 소설을 망치지 않도록 문장의 누락 없이, 문법적으로 and, 형용사, 명사형 구분, 우리나라의 문화 반영, 인사말 번역 중요성, 주어의 생략, 전치사, 단어의 중의적인 의미 (앞뒤 맥락으로 충분히 파악 가능), 은유적 표현등을 예로 들며 설명하고 있다. 또한 외국어 실력이 아니라, 중의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 하나의 오해가 엄청난 차이를 가져 올 수 있음을, 번역은 의미만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왜 쉼표를 찍었으며, 왜 문장을 늘렸는지 고민하면서 쉼표와 접속사, 수식어와 동사 하나하나를 살리려 노력한 번역이 좋은 번역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번역이 완벽할 수는 없겠지만 책을 읽는 독자들을 생각한다면 '의역'보다는 작가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점에 더 많은 중점을 둔다고 한다면 번역에 대한 논란은 없으리라는 생각과 함께 우리나라 국어 실력도 훌륭해야 함을 느낄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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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새움 F. 스콧 피츠제럴드 이정서 옮김
'위대한 개츠비', 책좀 읽었다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도전하게 되는책, 2013년 영화로도 나와 있다. 잘생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나왔고 여자주인공'캐리 멀리건'의 헤어스타일이 신선했던 기억도 난다. 책으로 읽으면서 책과 영화가 거의 같은 흐름과 같은 내용으로 나와서(당연한건데) 당황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책의 동영상판 같은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다시읽는 '위대한 개츠비', 책이라는 것이 읽을때의 상황에 따라서 기분이 좋은책, 별로인책으로 나뉜다. 나이에 따라서 같은 책을 읽었을때도 다르다. 대표적인 책으로는 '어린왕자'가 있다. 지금까지 대여섯번은 읽은것 같다. 그렇지만 읽을때마다 이랬었나? 저랬었나? 이런내용이 있었나? 쓸쓸하다. 행복하다. 여러가지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새롭게 읽는 '위대한 개츠비'가 더 기대가 된다. 개츠비는 호화로운 대저녁에 산다. 항상 시끌벅적한 파티가 벌어지고 있다. 그 옆집에 살던 닉의 주선으로 인하여 강건너에 살고 있는 데이지를 만난다. 결혼전에 알고 있던 둘은 불붙듯이 사랑을 하게 된다. 우연히 데이지는 남편 톰의 정부를 차로 치고 도망간다. 톰의 정부인 남편이 개츠비가 운전한줄 알고 죽이고 만다. 개츠비의 장례식은 초라하다. 데이지는 남편 톰과 여행을 떠나버리고, 파티가 넘쳐나는 그 곳에는 닉만이 남아자리를 지키고 있다. 위대한 개츠비는 그 시대의 미국인의 모습이라고 볼수 있다. 다른 나라는 몰라도 미국인들에게는 항상 인기가 있는 책이라고 한다. '프랜시스 스콧 피츠젤럴드'가 1925년 발표한 '위대한 개츠비'는 사랑의 목숨을 걸었지만 퇴색되어버린 사랑의 결과지라고 볼수 있다. 책을 보면서도 실제 이런 모습이겠구나 했지만 문화나 환경이 다르니 짐작하지 못한 부분을 영화로 해소가 되었다. 책도 읽은김에 영화로도 한번 볼까 하는 생각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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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어린왕자에 이어 이정서 씨의 세번째 번역서인 <위대한 개츠비>가 나왔다. 이번에도 꽤 많은 분량의 역자노트가 실려있고 67군데에서 오역을 지적해냈다. 독자 입장에서 원문에 충실한 번역서가 나온 것은 반가운 일이다. 무삭제 완역본 혹은 완전판이라는 이름으로 나온 책들도 많다. 서점가에는 하나의 고전 작품에 여러 출판사의 번역가를 거쳐 나온 책들이 넘쳐난다. 즉, 어느 번역가가 손을 댔느냐에 따라 작품을 읽는 느낌이 다르다. 같은 작품이지만 해석의 여지가 다를 수 있으며, 문체와 가독성에도 차이를 보인다. 그래서 독자들은 선호하는 출판사 혹은 번역가의 책을 고를 수밖에 없다. 애초에 원문이 가진 문장을 그 뜻대로 해석을 했다면 이런 혼선도 없을텐데라는 아쉬움도 있다. ![]() <위대한 개츠비>는 누구나 인정하는 고전 중의 고전으로 <타임> 선정 20세기 최고의 걸작으로 불리우는 작품이다. 몇 년전 영화로도 나온만큼 이미 대중들에게 한 번쯤 이름은 들어봤을만큼 유명한 작품인데 제대로 읽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여러 출판사에 나온 책을 읽어봤다면 그 차이점을 분명하게 알텐데 역자노트에서나마 김욱동 역자와 김영하 역자가 쓴 것을 대조하며 보니 분명 놓치고 있는 부분도 발견되고 문체부터 두드러지게 차이가 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중 나온 번역서만도 60여종에 이를만큼 선택의 폭이 넓지만 어느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 믿고 읽을만한 지 결정하기란 쉽지 않다. 이번에 읽은 <위대한 개츠비>는 원본과 대조하며 이정서 씨가 전체를 다시 번역하면서 훨씬 원문의 느낌을 잘 살리려고 노력한 듯 싶다. ![]() 항상 번역의 과정은 제2의 창작이라며 출판계에 뜨거운 논쟁거리를 낳고는 한다. 누가 옳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니라 오역을 되짚고 독자들에게 그 당시 사회상을 이해하고 번역을 할 때 어떤 뉘앙스로 썼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가까이 보기 위해 그녀가 사는 근처로 집을 옮긴 개츠비, 개츠비는 속물에 백치미를 갖고 있는 데이지를 사랑하지만 데이지는 다른 남자를 사랑하고 있다. 한 남자의 맹목적인 사랑, 사랑에 눈이 먼 로맨스 소설일까? 데이지가 스스로 찾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매일 밤 파티를 여는데 이 정도로 순정남이 있을까? 어떤 배경도 없이 가난했던 개츠비가 부유한 사업가의 선택을 받아 '제이 개츠비'로 개명하고 부를 등에 입고 새로운 인생을 출발하는데 그의 곁에 톰 뷰캐넌은 의심을 쭉 해온 인물이다. 조던, 닉, 윌슨 부인, 베이커, 머틀, 캐러웨이 등 등장인물들을 통해 서로 얽힌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인생을 생각하게 된다. ![]() 역자노트는 오역에 대해 지적하는 것 외에도 <위대한 개츠비>라는 책을 더욱 깊게 이해하는 데 또다른 재미를 주는 것 같다. 우리가 놓치고 읽은 것들은 무엇인지 또 다른 고전 작품들이 원본을 최대한 살려 번역되어 나온다면 독자들에게는 큰 즐거움이 될 듯 싶다. 역시 번역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고전 작품을 읽는 묘미가 다르다는 걸 재확인하게 된 책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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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인류를 한 종으로 본다면 공통적으로 가지는 보편적 특성이 있다. 동굴벽화를 살펴보면 다산과 풍요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 또 비슷한 유형의 신화 등 또 한편으로는 자신들이 정착한 환경의 영향으로 형성된 개별적 특성이 있다. 상이한 인사법, 같은 행동의 다른 뜻 등 이런 보편성과 개별성이 잘 녹아있는 것이 말과 글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한 사회의 정서가 잘 표현되어 있는 문학작품을 다른 사회공동체가 자신의 말과 글로 옮기는데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그래서 우리들이 번역을 제2의 창작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제2의 창작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주의를 해야 한다. 왜냐하면 글속에 담으려고 했던 작가의 의도가 왜곡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이정서작가가 새움 출판사에서 번역 출간한 [위대한 개츠비]를 통해 이런 문제의식을 우리 독자뿐만 아니라 번역 출판계에 던지고 있다. 일전에 [이방인]을 번역했을 때와 같은 이유로 또 한 번 번역문학계에 큰 논쟁이 일고 있다. 일각에서는 자기 번역출판물의 홍보를 위한 노이즈 마케팅이라는 말도 있고 또 다른 일각에서는 충분한 문제제기라는 말도 있다. 작가의 의도가 노이즈마케팅에 있든 진실한 문제제기에 있든 간에 충분히 귀담아 들을 이유는 있다. 흔히 고전이라고 말하는 유명한 외국 작품을 한 전문가가 번역, 출간하면 충분한 검증을 거치지 않고 인정을 받는 그런 행태들이 있어 왔음을 잘 알고 있다. [위대한 개츠비]는 스콧 피츠제럴드의 대표소설로 섬세한 표현과 문체는 세계의 많은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았지만 우리말로 잘못된 번역은 이런 재미를 반감시키고 독자를 오해에 빠뜨린다는 사실을 그의 역자노트를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사실 책을 읽는 동안 기존 김 욱동, 김영하의 번역 작품과 이정서 작가의 작품이 얼마만큼의 차이가 있는지 문외한의 입장에서는 파악하기가 쉽지는 않다. 좀 더 많은 시간을 통해 비교해서 읽는다면 색다른 재미가 있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