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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설가 김훈씨는 밥벌이를 우습게 보지 말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먹고 사는 일의 어려움은 겪어보지 않으면 느낄 수가 없다. 집에 쌀이 떨어지고 아이들한테 줄 돈이 없을 때 사람은 살 맛을 못 느낀다.
제임스 폴리 감독이 1992년에 만든 <글렌게리 글렌 로스 Glengarry Glen Ross>는 밥벌이의 고단함과 그런 어려움을 이겨내려는 사람들의 끈질김을 영화로 엮었다.
이름난 배우들이 나왔으므로 돈이 많이 들어갔을 듯한데, 영화를 찍은 곳은 몇 곳이 되지 않아 찍는 데는 돈이 얼마 들지 않았을 영화다. 어찌보면 무대가 한 곳에 있는 연극같은 느낌도 든다.
2. "좋은 땅이 있습니다. 곧 개발될 곳이라 미리 사놓으면 큰 돈을 벌게 될 겁니다..." 우리나라에서 요즈음 이런 얘기를 듣지 않은 이가 그리 없을 것이다.
"그렇게 좋은 땅이 있으면 당신들이 사서 돈을 벌지 왜 나한테 알려주려고 야단이지요?" 하고 되물으면, "우리가 가진 돈이 많지 않고요, 또 같이 돈을 벌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말로 둘러댄다.
미국의 애리조나 통합 자산운용 회사는 부동산을 팔아 남기는 곳이다. 중개인들이 사람들에게 전화를 해서 좋은 땅이 있다고 한 뒤 사게 만드는 곳이다. 팔면 그 금액의 10%쯤을 수수료로 먹게 된다. 그러니 중개인들은 죽자고 전화하고 끈질기게 붙어서 계약서에 도장을 찍게 만든다.
시카고 지점에서 요즈음 땅을 팔지를 못하자 본사에서 땅을 잘 파는 사람을 보낸다. "몸으로 뛰란 말이야...나는 15년을 일했어...올해 97만 달러어치나 팔았고...게으름 피우지 말고 나가서 뛰어 다녀. 앉아 있으면 손님이 오나?" 거세게 몰아치는 사람은 본사에서 온 블레이크(알렉 볼드윈)다.
윗사람으로 이런 사람이 있으면 피가 마른다. 일터에 나가기가 싫어진다. 저는 솜씨가 있다고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을 바보로 보고 주눅들게 만들기 때문이다.
"무턱대고 나가서 뛴다고 되나? 좋은 손님을 줘야지. 이렇게 쓰레기같은 손님 이름을 주면 어떻게 팔아" 데이브 모스(에드 해리스)가 블레이크의 말에 빈정거리며 맞받는다.
3. 본사에서 잘 나가는 아저씨의 도움으로 지점장을 맡고 있는 존 윌리엄슨(케빈 스페이시)은 밖에서 뛰어다니며 장사를 하지 않으니 그냥 시키기만 한다. 두 장의 카드를 주면서 이틀 안에 거기에 적힌 사람한테 땅을 팔도록 시키고, 많이 판 사람한테 땅을 살 돈이 많은 손님의 이름이 적힌 '글렌게리 명단'을 주겠다는 것.
게다가 으뜸으로 많이 팔면 캐딜락 자동차를 한 대 주고, 2등은 부엌에서 쓰는 여러가지 칼을 주며, 3등은 일터에서 나가도록 했다. 잘 팔지 못하면 이젠 일터에서 쫓겨나야 할 판이다.
그래서 모두 눈이 벌겋다. 밥벌이는 해야 하므로, 어떻게든 팔아야 한다. 달콤한 거짓말로 손님을 꼬시든, 눈먼 손님한테 도장을 받든지, 그건 알아서 할 일이다.
4. 요즈음 1등을 달리고 있는 리키 로마(알 파치노)는 그래도 걱정을 적게 한다. 이제 막 계약서에 도장을 찍으려는 제임스 링크만 잘 다루면 되기 때문이다. "제임스, 바람을 피우고 싶으면 피워...네 마음대로 하고 사는 거야..." 6,000달러짜리 계약을 맺고자 온갖 아양을 다 떤다. 제임스의 아내가 알면 어쩌려고?
딸이 아파 병원에 누워 있는 셀리 르빈(잭 레먼)은 걱정이다. 옛날에는 1등을 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한테 장사를 가르치기도 했는데, 이젠 밀려 계약조차 어렵다. 발이 닳도록 손님 집을 찾아가 문턱을 넘었고, 입이 부르트도록 전화기에다 말을 해대지만 열매가 없다.
셀리는 지점장인 존을 꼬시기로 한다. "같이 잘 해보자. 그 명단을 나한테 넘기면 내 몫의 돈에서 10%를 주겠어" 존은 한 술을 더 뜬다. "20%를 줘. 그리고 이름을 주는 한 사람마다 50달러를 나한테 주면 하겠어..." 날강도가 따로 없다. 손도 안 대고 코를 풀려는 사람이다. '에이...나쁜 놈...벼룩의 간을 빼먹지'
데이브 모스는 큰 소리는 쳤지만 속으로는 걱정이 많다. 같이 일하는 조지 애로우드(앨런 아킨)한테 말한다. "까짓껏 글렌게리 명단을 훔치자. 한 사람에 10달러나 15달러에 팔면 500명이니 돈 좀 될거야..." 조지는 조금 어수룩하고 약삭빠르지 못하지만, 나쁜 짓은 하지 않으려 한다. "누가 훔칠 건데?" "그야 조지 너지, 누구겠어...나는 나중에 제리 그래프한테 팔아야 하니까...그러면 네가 팔거야?" (거저 날로 먹으려는 놈이 많다. 저는 손도 안 대고 얼뜨기 조지한테 시켜 훔치겠다고...)
5. 부동산 중개인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한테 지고 싶은 이가 없듯이, 나온 배우들도 마찬가지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배우들의 불꽃 튀는 연기가 좋아 보이는 영화다.
"너희들처럼 앉아서 장사를 하려는 놈들은 헐겁한 '현대차'를 몰고, 나같이 뛰어다니는 사람은 8만 달러짜리 베엠베를 몰고 다닌다"며 현대차를 덜떨어진 차로 까대며 윽박지르는 블레이크 노릇의 알렉 볼드윈은 깔보면서 거만스러운 얼굴을 잘 보여준다.
중개인들이 저마다 바른 소리를 해댈 때 속으로 삼키지만, 다음날 글렌게리 명단이 사라졌을 때 찬 바람이 쌩쌩 부는 얼굴로 닦달하는 지점장 존을 맡은 케빈 스페이시도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돋보이는 건, 셀리를 맡아 딸의 병원비를 마련해야 하고 일터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으려 온갖 일을 다 하는 셀리를 맡은 잭 레먼이다. 전화할 때의 무르익은 말솜씨나 남의 집에 쳐들어갈 때의 뻔뻔함은 아무나 할 수가 없다.
이에 견주면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지점장한테 대들며 따지는 미키를 맡은 알 파치노는 눈에 힘주고 입은 걸쭉하게 소리를 내뱉고 있으나 다른 데서 많이 보던 모습이라 조금은 무뎌진다.
<리틀 미스 선샤인> 같은 영화에선 선이 굵은 연기를 보여주던 앨런 아킨이 성도 내고 싸우면서 센 느낌을 주려 하지만, 다른 배우들이 워낙 굵게 움직여 오히려 크게 돋보이지 않는다.
6. 이렇게 일터에서 밥벌어 먹고 사는 게 어렵다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나, 하는 걱정이 되는 영화다. 그래서 아직 일터를 갖지 않은 젊은이한테는 안 보이고 싶은 작품이다. 미리 봐서 주눅들면 어쩌나 해서.
영화 디브이디는 소리나 화면이 아주 깔끔하다. 잘 만들었다. 그런데 보너스는 영 아니다. 예고편도 없고, 감독의 얘기도 없으며, 기껏 나오는 배우와 감독의 소개도 영어로 몇 줄 써놓아 14,000원이 비싸다는 느낌이 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