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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엉거주춤 그녀를 얼싸안고 있었다. 내 오른손은 그녀의 허리춤을 잡고 벌벌 떨고 있었고 그보다 약간 위로 치켜든 왼손은 그녀의 작은 손을 꽉 쥔 채 내 가슴에 철썩 달라붙어 있었다. 그러니까 그녀의 윗도리 안에서 두근거리는 내 심장의 움직임을 느꼈을 것이다. 일단 내게 안기고 나서부터 이 아가씨는 무슨 칡덩굴 아니면 탱고를 위해 태어난 초원의 여기사 같았다. (11쪽)
얼마나 황홀한 순간인가. 아름다운 아가씨와 탱고를 추는 순간이라니! 깊게 패인 드레스, 아름다운 어깨, 집시처럼 검은 머리채, 그리고 라인강에 막 몸을 던지려는 로렐라이 같은 얼굴의 아가씨. 기껏해야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하는 처녀가 같이 춤을 추자고 하여 함께 춤을 추게 되었으니 인생에서 가장 찬란한 시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주인공 ‘나’는 파리의 정치 학교를 졸업하고 독일 남부 지방에서 공식 연수를 시작했다. 독일에서 보내는 첫 저녁을 늦은 맥주 한 잔으로 자축하겠다고 들어선 파티 룸에서 맥주를 시킨 뒤였다. 천장에 매달려 빙빙 돌아가는 둥근 조명 아래로 다른 사람들 취한 모습이나 구경하자고 있는데 밤에 핀 백합 같은 얼굴의 아가씨가 독일어와 프랑스로 함께 춤을 추자고 손을 내밀어 함께 춤을 추는 순간이다.
그날 저녁 만난 여자는 내게 한평생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 유일한 여자였다. 운명 또는 역사가 내게 지정해준 단 한 사람. 다시 찾은 근원의 여자. 함께 선과 악을 뛰어넘을 여자, 우주의 조화를 보여주는 여자. 나는 그 여자에게 점지된 그림자였다. 새로운 밀레니엄의 벽두이자 그 일이 일어난 삼십 년이나 흐른 지금 이 글을 쓰고 있건만, 여태껏 아무도 그녀의 자리를 대신하지 못하고 있다. (15쪽)
잉에. 그녀의 이름은 잉에였다. 그리고 그녀와의 사랑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녀를 만만 이후로 단 한 번도 그녀를 다른 여자와 같이 놓은 적이 없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곰치 떼에게라도 덤벼들 수 있다. 하지만 그녀와 맺어지지 못했으니 소설은 그 비극의 사연을 풀어내고 있다. 이들의 사랑을 막은 것은 아버지 대에 벌어진 과오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프랑스 레지스탕스였는데 잉에의 아버지는 피정복 국가에 대한 냉혹한 정복자들의 증오심을 부추기던 옛 나치 친위대 장교였다. 주인공의 아버지를 볼모로 붙잡아 두라고 명령했던 그 사람, 아버지를 총살하려다 추방해버린 사내였다. 잉에의 아버지가 여전히 너무나 많은 돈을 지니고 있고, 너무나 많이 존경받았으며, 지나치게 용서받았고, 죄의 책임으로부터 지나치게 자유로웠으며, 현세의 천국에 썩을 대서 썩어 있는 게 잉에를 더 못 견디게 했다. 그리하여 잉에는 주인공을 사랑하면서도 멀어지려고 거짓말을 하고, 주인공을 볼 때마다 자기 아버지와 주인공의 아버지가 얽혀 있는 관계를 느꼈다. 그러고는 끝내 자기 아버지의 죄를 대신 씻으려고 했고, 마침내 사죄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내놓기까지 했다. 나치즘은 결코 대물림되는 게 아니고 그녀 자신이 아무것도 속죄할 필요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꽃다운 나이에 영영 자기 아버지의 죄를 대신하여 떠난 것이다. 전쟁의 참극이 부모 세대로부터 자식 세대로까지 고스란히 이어졌으니 어이하랴, 이 안타까운 청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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