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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한 리뷰는 그동안 내가 써왔던 글과는 방법을 조금 달리해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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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병은 핏속에 숨어 있었다.”
딩씨 마을에 열병이 번졌다. 십 년 전 피를 팔았던 사람들이 걸렸다. 중국 정부가 장려했던 사업. 사람들은 피를 판 돈으로 기와집을 올렸고 고기를 사 먹었다. 매혈을 중개한 사람은 더 큰 집을 지었다. 처음에는 피를 판 사람만 열병에 걸렸지만 나중에는 피를 팔지 않은 사람도 걸렸다. 열병에 걸리면 죽었다. 열병의 정확한 병명은 에이즈였다.
옌롄커의 『딩씨 마을의 꿈』은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중국 시골 마을에서 벌어졌던 추악한 일을 소재로 삼아 비극과 고통, 그리고 사랑과 권력을 이야기한다. 이야기의 목소리는 열두 살 아이의 것이다. 딩샤오창. 그런데 이 아이는 죽었다. 죽었기에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다(죽은 이가 화자라는 점은 할아버지의 꿈이 모두 현실이라는 점과 함께 이 소설을 조금은 환상적인 면을 띠게 한다). 아이는 매혈 운동에 앞장섰던, 이른바 ’피 우두머리‘ 딩후이의 아들이었다. 딩후이는 하나의 솜을 가지고 세 명의 주사 자국을 문질렀다(김유태의 『나쁜 책』에서는 “주사 약솜 하나로 아홉 명을 문질렀다”고 했지만, 약솜 하나로 한 사람에 세 번씩 세 사람을 문질렀다). 주사기도 돌려썼다. 피도 더 많이 뽑았다. 열병이 돌고 나서, 아이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마을 어귀에 놓여 있던 토마토를 하나 집어먹고 중독사로 죽었다. 누군가 일부러 한 일이었다. 복수였다. 누가 한 일인지는 밝혀지지 않는다. 밝힐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
죽은 화자의 눈길은 거의 그의 할아버지에게 가 있다. 할아버지의 꿈을 이야기하는 것도, 할아버지의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이다. 딩씨 마을 학교의 선생님이자 선생님이 아닌, 마을의 지도자이자, 지도자가 아닌 할아버지. 그는 마을을 위해 헌신하지만, 그는 대체로 무기력하다. 열병은 잡을 수 없으며, 큰아들 딩후이는 교묘한 악행으로 돈을 번다. 열병에 걸린 둘째 아들은 역시 열병에 걸린 사촌의 아내와 간통을 저지른다. 그리고 마을의 일을 관장하는 권리마저 기가 막히게 뺏기고 만다(뺏겼다 하기도 뭐한 게 그는 애초에 권력을 탐하지 않았다).
작은 마을에서 협박으로 쟁취한 권력은 무시무시하기도 했고, 좀스럽기 했고, 허망하기도 했다. 그 작은 권력으로 한 일은 결혼식에 쓸 탁자를 학교에서 빼오는 것, 학교의 온갖 나무로 된 것을 분배하는 것, 관으로 쓰기 위해 마을의 큰 나무를 베는 것, 그리고 약간의 음식을 더 얻는 것. 그들의 끝도 죽음이었다. 10년 전 마을의 주임이었다 매혈 사업에 동참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리를 빼앗긴 리싼런이 관인에 그토록 목매다는 이유도, 마을의 권력을 할아버지로부터 빼앗은 쟈건주와 딩유에진 역시 관인과 함께 묻히고 싶다는 이유도 그 작은 권력 때문이다. 그것이 그들을 버티게 했던 것이다. 비록 허무할 뿐이지만.
비극 속에서도 피를 가진 인간이기에 사랑이 피어난다. 그 사랑은 실상 불륜이다. 그러므로 환영받지 못할뿐더러 할아버지에게 커다란 약점이 되어 버린다. 그런데 금지되었기에, 열병에 걸린 그들에게는 그것밖에 남은 것이 없었기에 사랑은 더욱 불타오른다. 소설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당연히 그 사랑의 불길이 가장 활발히 타올랐다가 갑자기 꺼지는 장면일 수밖에 없다. 각각의 상대에게 이혼장을 받고, 결혼이 성립된 날, 남자는 몸에 열이 오르며 사경을 헤매고, 아내가 된 링링은 실오라기 걸치지 않은 맨몸에 차가운 물을 끼얹고 남자를 끌어안아 열을 식힌다. 그리고 자신은 대신 열이 올라 죽는다. 다음 날 아침 남자 역시 따라 죽는다. 신파인가? 이게 신파라면 왜 신파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를 말한다고 본다.
이 작품이 중국 당국에 의해 금서가 된 이유는 짐작이 간다. 매혈 운동을 주도한 게 정부였고, 에이즈가 퍼지는 가운데 돈벌이에 급급했던 이는 상부에 끈이 닿은, 그리고 결국은 상부가 된 이(큰아들 딩후이)였기에 이를 중국 정부에 대한 분명한 비판으로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옌롄커의 비판은 인간의 본성을 찌르고 있고, 감동의 지점은 비극 속에 피어오르는 뜨거운 사랑에 닿아 있다. 그 배경이 중국일 따름이다. 이 이야기는 어느 곳에서라도 벌어지는 이야기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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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까머리로 학교를 다니던 시절, 그러니까 중학생 때. 사춘기를 심하게 겪었고 죽음에 대한 충동도 수시로 느꼈다. 그 시절 유일한 낙은 세계문학전집 사 모으기. 지금이야 민음사, 열린책들의 세계문학 전집이 인기지만. 그 때는 하서, 소담, 일신서적, 범우 세계문학이 유명했다. 돈이 생길 때마다 샀으므로 이빨 빠진 것도 많았고 출판사도 제각각.
알베르 까뮈의 『페스트』는 소담 출판사에서 나온 걸로 샀다. 샀다는 말은 읽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때는 알베르 까뮈고 실존주의 작가라는 사실도 몰랐고, 그저 대개의 한국인이 그렇듯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라면 '그러시군요' 하며 읽었다. 한 도시 전체가 죽어가는 묵시론적 풍경이 아직도 뇌피질에 깊이 각인된 걸 보면 꽤 인상적인 작품이다.
그 경험이 10년이 지난 지금, 생생하게 살아났다. 옌렌커의 작품, 『딩씨 마을의 꿈』은 중국판 『페스트』다. 아니 연대기적 시간관에 사로잡히지 않는다면 『페스트』가 프랑스판 『딩씨 마을의 꿈』이라 할 만하다. 왜? 『딩씨 마을의 꿈』이 훨씬 뛰어나다. 그 원인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서술 방식의 교묘함이다. 이 작품에서 화자는 '나'다. 나는 서사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도 전에 죽어 버린다. 그렇다면 소설이 끝난 걸까. 아니다. 계속 된다. 소설은 죽어버린 나의 시선에서 조망된다. 화자를 죽임으로써 소설 전반에 죽음이라는 어두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전지적 작가 시점을 획득했다. 유령은 당연히 살아 있는 인간의 삶을 안다. 과연 이것이 데리다가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기술한 또 하나의 상징일까. 내 생각.
둘째, 풍자다. 까뮈의 『페스트』엔 풍자가 없다. 필사적으로 살아 남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 죽고 마는 처절함이 작품 전반에 묻어나는 반면 웃음과 풍자, 해학은 없다. 옌렌커의 소설은 다르다. 이것이 중국 소설의 힘일까. 심각한 상황에서도 작가는 등장 인물을 비틀어 버림으로써 웃음을 유발한다. 모옌의 소설 『홍까오량 가족』에서 느낀 분위기와 비슷하다. 죽음을 화폐화하는 딩 후이의 모습은 보는 이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유쾌함을 느꼈다.
셋째, 역사다. 소설을 읽으며 항상 언급하는 틀. 상징계=텍스트=소설=역사. 이게 바로 프레드릭 제임슨이 이해하는 문학의 의미다. 실재계인 역사가 상징계 질서에 편입되는 과정이 문학이다. 따라서 문학 비평은 역사 비평인 셈이다. 이 작품은 중국에서 판매금지 조치 당했다. 왜? 에이즈를 건드렸기 때문. 중국 정부는 사스를 비롯해 에이즈와 같은 전염병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서 세계적인 망신을 산 적이 있다. 이를 소설화하는 것은 중국 정부에게 부담스러웠을 터. 허나 소설으로나마 건드리지 못하면 어디서 꼬집으리.
이러한 이유로 『딩씨 마을의 꿈』, 최고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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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나니 써늘한 기운이 몸을 훝고 지나가는 느낌이다. 비록 소설이지만 매혈(賣血)로 인하여 일어난 딩씨마을(丁莊)의 불행과 고통이 인간의 내면에 흐르는 어두운 탐욕과 맞물려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한 때 우리 나라에도 매혈로 살아가던 사람들이 있었다. 경제적으로 어렵던 시절,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매혈하는 이가 많았다하고 과도한 매혈로 인해 목숨을 잃는 사례도 드물지 않았다한다.1980년대 들어 경제 사정이 호전되면서 매혈은 자취를 감췄고, 헌혈 문화 확산 등으로 1999년에 '혈액관리법'이 개정되어 법으로 금지됐다. 하지만 일부 개발도상국의 빈곤층에서는 여전히 매혈을 통해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 한다. 2004년 중국 제10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를 통과한 '전염병 예방통제법'은 에이즈 예방을 강화하고 에이즈 확산을 막기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중국에서 에이즈가 법안에 따로 명시된 것은 이 때가 처음으로 중국 정부는 에이즈 환자를 84만명으로 집계하고 있지만 구호활동 기구 등은 중국 중부 허난성에서만 지난 1990년대에 불결한 기구를 이용한 매혈로 최소한 백만명의 가난한 농민들이 에이즈에 감염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YTN 2004.08.24 기사 참조) 이 소설 '딩씨 마을의 꿈 丁莊夢'의 소재가 여기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소설의 화자(話者)는 매혈에 앞장선 아버지(딩후이)때문에 열병(에이즈)에 걸린 마을사람이 독약을 푼 토마토를 먹고죽은 딩후이의 어린 아들이다. 이 죽은소년이 담담하게 바라보는 딩씨마을의 고통과 어두움, 소년의 할아버지(딩수이양)가 꾸는 꿈, 오랜 역사를가진 농촌의 아름다운 평원이 그려내는 서정이 책이 끝날때까지 아픈 마음을 풀지 못한채 고통을 같이 공유한다.
온 하늘과 땅을 뒤덮은 꽃의 바다가 평원 위로 끝없이 펼쳐진 것을 보았다. 딩씨 마을과 딩씨 마을 어귀로, 논밭과 황허 고도 위로 끝없이 펼쳐진 것을 보았다. 온갖 색깔의 빛을 뿜어내면서 황금 벽돌과 황금 기와,황금 가지,금괴와 금구슬을 연결 시키고 있었다.(126쪽).
세월이 시신 같았다./ 평원 위의 풀들도 말라 버렸다./ 평원 위의 나무도 말라 버렸다./ 평원 위의 모래흙과 농작물도 피처럼 붉어지더니 이내 시들어 버렸다./ 딩씨 마을의 사람들도 집 안에 틀어박혀 다시는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17쪽)
욕망과 고통이 휩쓸고 간 죽음의 딩씨마을에서 할아버지의 꿈은 희망이다. 스포일러의 염려로 말할 수없는 일로 할아버지는 마을을 떠났다가 돌아와 꾸는 꿈이 저자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리라.
쏟아붓는 것 같은 소나기 속에서 할아버지는 드넓게 펼쳐진 평원 위에 한 여인이 손에 버드나무 가지를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버드나무 가지에 진흙을 묻혀 높이 흔들고 있었다. 한 번 흔들자 땅에 수많은 진흙 인간들이 생겨났다. 다시 한 번 진흙을 묻혀 흔들자 또다시 땅 위에 수천 수백의 진흙 인간이 생겨났다. 쉬지 않고 진흙을 묻혀 쉬지 않고 흔들어댔다. 땅 위에 온통 진흙 인간들이 펄쩍펄쩍 뛰고 있었다. 진흙 인간은 비오는 땅에 물방울만큼이나 많았다. 할아버지는 새롭게 펄쩍펄쩍 뛰기 시작하는 평원을 보았다. 새롭게 펄쩍펄쩍 뛰는 세상을 보았다.(455쪽)
또다른 인간성의 대립은 순수의 공간인 학교를 중심으로 나타난다. 열병에 걸린 마을 사람들이 학교에서 공동생활을 하게되는데 도난분실 사건에서 엿보는 인간의 정체성은 쓰디쓴 입맛을 다신다. 관을 짜기 위해 마을의 오래된 나무가 베어지고도 모자라자 학교의 기물을 반출하여 집에 쌓아놓는 죽음보다 더 큰 인간의 탐욕은 혐오와 함께 연민으로 다가온다. 할아버지가 애착을 가졌던 느릅나무 칠판을 죽기전에 학교로 돌려보낸 자오더취안의 행동은 죽어가는 딩씨마을에서 그나마 미흡하지만 구원받을 수 있는 인간의 여지를 남겨놓는다. 화자의 삼촌과 링링의 죽음을 초월하는 사랑은 몰인간성에서 모든 오염을 벗어버린 원초적 휴머니즘으로 회귀하는 인간본성의 울림이 아닐련지...
원하지 않는 불행에서 겪게되는 삶과 죽음의 그림자는 너무나 날카로워 평화로운 모든 것을 파괴하고 말았다. 아름드리 나무로 싸여있던 마을은 황폐되고 평원은 세월과 함께 말라버렸다. 가슴 한켠이 베어지고 시뻘건 피가 매혈처럼 흥근히 마음속으로 스며져 들어온다. 참으로 탐욕으로 인해 어떻게 변해가고 인간성 상실할 수 있는지, 절망 속에서 어떻게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는지 고민해보는 책읽기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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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판다'라는 행위는 단순하게 매혈을 통해서 그에 상응하는 댓가로 물질적인 반대급부를 취한다는 개념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특히 동양적인 사고방식의 체계에서 '피'는 인체내부에 흐르는 끈적끈적한 액체가 아닌 사람의 영혼이 깃들여져 있는 특별한 존재이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피를 나눈 가족 그리고 민족이라는 개념에 더 집착하게 되는 것이고 피가 몸밖으로 흘러나와 눈에 띄게 되면 극도의 흥분상태 즉 마치 나의 영혼이 나의 몸 밖으로 빠져 나온 듯한 느낌마져 받게 된다. 고래로 중국을 비롯한 동북아시아의 공통적인 문화관념에서 인간으로서 팔 수 있는 게 있고 절대 팔아서는 안되는게 있있고 그 중에 하나가 바로 '피'다. 서양 뱀파이어문화를 보더라도 피를 빨리게(일종의 판다라는 개념과 유사하다)되는 순간 피가 빨리는 것 보다 오히려 영혼이 빠져 나가버리는 경우를 보게 된다. 이렇듯 "피"라는 것은 바로 우리들의 영혼의 일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딩씨 마을의 꿈>에서 바로 영혼(피)을 팔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동양에서의 근대화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강요였고 이런 자본주의는 팔 수 있는 모든 것을 팔게 강요하는 구조이다. 우리나라도 한때 매혈이라는 왜곡된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듯이 중국의 현대화에도 매혈이라는 시장이 상당한 규모로 형성되어 있었다. 피를 팔아서 일신의 안녕을 바랬던 사람들은 영혼을 판 댓가로 열병(에이즈)이라는 죽음의 병을 얻게 되고 순수한 영혼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더이상의 꿈도 희망도 없는 삶 아니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다. 작가는 이렇게 꿈과 희망도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죽음이라는 마지막 선택마져도 앗아바거리는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꿈이 없는 현실을 마감하고 싶어도 그 죽음을 얻기 위해 또 다시 자본의 힘을 빌려야 하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그 끝이 없다.
작가는 현대중국의 이중성 즉 사회주의 정치 이념속에서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을 받아들여서 살아가는 중국인들의 가치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매혈의 통해 부를 축적하고 열병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관장사를 하는 딩후이를 자본의 화신으로 삶아 현 중국인들의 부에 대한 집착과 그로인해 서서히 자본의 노예가 되어가는 현실앞에서 혼돈된 삶을 살아가는 중국인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소설의 소재가 매혈과 그로인한 가족 더 나아가 공동체의 붕괴를 다루고 있지만 이는 한 구석진 시골 마을의 이야기가 아닌 중국대륙 전체의 현상으로 받아들여 진다. 하지만 작가는 화자의 할아버지인 딩씨 아저씨의 전통과 사회주의 이념의 승리로 매듭한다. 자본과 비뚤어진 가치관의 화신인 자신의 아들을 직접 처단하므로서 중국인이 꿈구는 사회를 지켜날갈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할아버지 같은 물들지 않는 전통과 사회주의 이념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 같다.
현재 중국땅을 휩쓸고 있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병폐를 여실 없이 보여주는 다소 무거운 소설로 여러가지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특히 소설 전반에 걸쳐 계속되는 반복의 기법은 내러티브의 강조성과 더불어 죽음이나 허망함을 은근히 상징하는 메타포적인 구실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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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문학에서 내게 가장 강렬한 피는 루쉰에서 시작했다. 루쉰의 단편 <약>에는 폐병에 걸린 아들을 살리기 위해 처형된 혁명가의 피를 만두에 묻혀와 자식에 먹이는 아버지가 나온다. 루쉰 스스로가 몸을 살리는 의사(醫師)가 아닌 마음을 살리는 의사(義士)가 되기 위한 길을 선택했지만 스스로는 일반인들이 얼마나 몽매한가는 보여주는 사례였을 것이다. 다음에 만난 피는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읽힌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 속의 피다. 인생의 고비마다 피를 팔아서 위기를 넘기는 아버지의 삶을 그린 이 소설은 지극히 중국인다운 심성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번에 읽은 옌롄커의 소설 ‘딩씨마을의 꿈’(도서출판 아시아 간)도 그에 못지 않은 강한 피의 내음이 있다. 사실 중간중간에 중복된 이야기로 인해 읽기에 피곤한 면도 있지만 이 소설은 작가의 치열함과 더불어 내가 알아야할 중국 저변의 문화가 깊게 느껴졌다. 사실 이 소설이 다루는 허난성의 에이즈로 인한 상황은 나 역시 중국에 있을 때 경험해야 했던 사건으로도 있다. 2002년이 시작되자 마자 내가 살던 톈진에는 에이즈 집단 감염지역인 허난 상차이셴 주민이 에이즈가 담긴 주사기로 무차별 가해를 한다고 해서 불안한 사건이 있었다. 사실 중국의 호남으로 불릴 만큼 지역적 선입견이 강한 허난(河南) 사람들은 이 사건으로 더 큰 상처를 받았다. 사실 이건 바깥 사람들 이야기고 내부에서 천형이라는 병을 가진 이들의 고통과 아픔이 얼마나 심각했을지는 사실 가늠하기 어렵다. 옌롄커의 소설은 그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한 마을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이 소설을 끌어가는 중심 인물은 시골 학교의 소사 같은 편한 노인 딩수이양이지만 사건이 중심 인물은 소설속 화자의 아버지인 딩후이다. 딩수이양 노인의 큰 아들 딩후이는 처음에 마을에서 매혈을 주도하는데 특히 비위생적 매혈로 인해 에이즈에 걸리게 하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이후 딩후이는 에이즈 사망자들에게 지급되는 관을 팔아서 부를 얻고, 나중에는 죽은 이들의 영혼결혼식까지 팔아먹는 사업수완을 가졌다. 물론 그에게는 현의 에이즈협회 부주임이라는 관리가 되는 수완도 있다. 마을 사람 태반이 에이즈에 걸려 죽음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이 벌리는 삶은 그냥 평범한 삶과 별반 차이가 없다. 딩수이양이 마을을 배려했던 책임감과 아들로 인한 부채의식으로 다양한 활동을 벌이지만 그 상황속에서 벌어지는 권력욕과 이런저런 갈등과 욕심은 극히 평범하다. 또한 욕망이라는 것도 별반 차이가 없어 에이즈에 걸린 둘째아들 딩량과 사촌 제수씨 링링간의 비윤리적일 수 있지만 지극히 인간적인 욕망도 그려진다. 사실 소설의 전체 어조처럼 결말도 비극적이다. 사실 역자도 밝히지만 중국문학에서는 어떠한 상화에서도 비극적 결말을 맺지 않은게 문학적 특징인데, 이 소설의 결말은 비극이다. 사실 작가는 후기에서 토로하듯 지금 중국이 가진 처절한 아노미 상황을 설명하는데 많은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실제로 이 소설은 중국에서 판금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들은 여전히 되풀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작가에 대한 억압은 미봉책에 지나지 않는다. 인구 9400만명을 가진 허난성은 사실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복잡한 곳이다. 비교적 좋은 환경을 가졌지만 가장 못 사는 동네로 낙인받은 도시지만 역으로 최근에는 가장 경제발전이 빠른 동네다. 하지만 에이즈 사건 같은 일이 그냥 벌어진 것은 아니다. 호화청사로 인한 문제 등 소설 속에 벌어지는 것 같이 비상식적 일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한 나라의 성장은 자신들의 치부라 할지라도 그것을 풀어내고 공론의 장으로 끌어내 모두에게 교훈이 되게 하는 용기가 동반해야 한다. 사실 에이즈 사건 이후에도 분유 파동이니 하는 오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는데 이런 작업을 하지 못한 영향이 크다. 그런 점에서 작가의 용기는 소중하다. 아울러 그가 베이징 칭허에 사는 것 같은데, 내가 살던 왕징과는 멀지 않다는 점에서 이웃을 만난 것 같은 반가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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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를 보고 있자니 숨이 막힌다. 그 어두운 마을에 무슨 일이 지나갔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책 서두에서 강한 심장을 준비하고 책을 읽으라고 말한 저자는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내 소설이 가져다 줄 고통에 대해 모든 독자들께 사죄의 말씀을 올리고 싶다.'로 글을 맺었다. 문학의 효용 중 하나가 '즐거움' 아니던가? 그런데 이 책은 저자의 말처럼 고통을 준다. 생각해 보니, '공자, 장자' 등의 책 말고 중국에 대한 글을 읽은 기억이 없다. 처음으로 접한 중국 소설은 나를 슬프게 했다.
딩씨 마을은 피를 팔기 시작했다. 딩씨 마을은 너도나도 미친 듯이 피를 팔기 시작했다. 하룻밤 사이에 주민 수가 몇 백까에 단 되는 딩씨 마을에 갑자기 열 개가 넘는 채혈소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마을의 어귀에서도, 사거리에서도, 어느 집의 비어 있는 방에서도 피를 사고팔기 시작했다. 심지어 버려진 외양간을 깨끗이 청소하고 문짝을 떼어다 구유 위에 깐 다음, 그 위에 바늘과 주사기, 알코올 병 등을 펼쳐 놓고 외양간 대들보에는 뽑은 피를 담을 유리병을 걸어 놓은 다음 피를 사고팔기 시작했다.(p.56)
무언가에 홀린 듯 피를 파는 그들의 모습이 안타까웠고, 알코올 솜 하나로 세 명 혹은 네 명의 팔을 문질러서 에이즈가 온 마을을 덮친 것이 안타까웠다. 열병을 앓는 사람들은 자신의 예고된 죽음 앞에 그저 한약을 다리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없었다. 매혈의 앞잡이였던 아버지의 모습이나 그런 아버지를 자식으로 두었으나 자신은 진심으로 딩씨 마을과 그 마을 사람들을 사랑하는 할아버지도 모두 우리들의 모습이려니 더 가슴이 아팠다. 소설 속에서 크게 대비되는 두 인물을 부자로 그려낸 설정과 반복되는 문장이 우리를 더 슬프게 만드는 것 같다. 가족에게 버림받거나 가족에게 병을 옮길까 걱정하던 열병 환자들이 학교에 모여 함께 사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이청준 선생님의 '당신들의 천국'이 생각났다. 죽음을 선고 받은 사람들 속에도 사랑과 갈등이 있고, 불쌍한 그들을 상대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사람이 있다는 점이 비슷하게 느껴졌다. 비록 지금은 '딩씨 마을의 꿈'이 중국에서 판금 조치 되었지만, 이청준 선생님의 글이 한국의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받는 것처럼 '딩씨 마을의 꿈'도 중국의 많은 독자들에게 읽힐 수 있길 바란다. 사람들은 원래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는다. 중국도 이 숨막히는 소설이 읽혀지는 것이 싫을 것이다. 그러나 문학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그 자리에서 비상할 수 있다면 치부를 난도질당하는 아픔을 견뎌야 할 것이다. 우리 또한 많은 작가들에 의해 현대를 살아 가는 우리 모습을, 우리 모순을 끊임없이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얼마 전 태국에 사는 소수 민족 hmong족에 관한 내용을 읽은 일이 있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은 이들을 가이드로 이용했고, 전쟁에서 미국이 지자 베트남군은 흐멍족을 추적 대살상했다고 한다. 흐멍족의 일부는 미국이 퇴각할 때 함께 이주해서 위스콘신에 살고 있는데, 어떤 소녀가 태국 국경을 넘다가 부모와 동생을 잃고 자신과 사촌 동생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너무도 평안히 이렇게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고, 저녁에 되면 식구들에게 무얼 먹일까 고민하던 나를 고개 숙이게 만드는 일이 이 세상에는 너무 많음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나 중요한가도 생각하게 되었다면 너무 거창할까? 너무도 큰 아픔은 우리가 같이 해결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딩씨 마을'과 'hmong족'이 서로 다른 고통을 겪지만 그들이 겪은 고통은 인간이 만든 것이라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인지 자꾸만 비슷하게 느껴지고 가슴이 아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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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박한 농촌마을이 주사바늘이란 탐욕의 얼굴에 무참하게 스러져 간다. 채혈(採血)을 위한 매개체인 주사바늘이란 물질에 인간 탐욕의 죄를 물을 수도 없으며, 그 목적인‘피’를 황폐해진 텅 빈 마을의 원인이라 할 수도 없다. 비록 주사바늘이 사람들의 살갗을 뚫어 피를 빼내기 시작했을 때, 이미 인간들의 패배는 예정된 것이었지만 보다 본질적인 것은 인간의 혈액이 한낱 상품, 사고파는 거래대상으로 변질된 것에 있을 것이다.
물질지상의 자본주의체제가 인간까지 사물화한 것은 사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폐쇄되어 있던 중국 사회에 거침없이 밀어닥치는 서구 물질문명의 화려함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농촌사회는 분출되는 욕구를 억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소득원이 부실한 빈곤한 농촌사회의 현대화를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지방정부는 매혈(買血)을 통한 소득을 부추긴다. 여기엔 오직 물질에 대한 욕망만이 있을 뿐, 인간 존엄성의 인식과 같은 도덕적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부정과 부패만 성화를 댈 뿐 공공성에 확보되어야 할 양심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약삭빠른 인물들은 채혈소를 차리고 어수룩한 농민들의 피를 사들이기 시작하고, 피를 팔아 받은 돈은 사람들을 물질숭배와 과시적 소비에 휘둘리게 한다. 마을의 초가집은 벽돌집으로 바뀌고, 황톳길은 시멘트 포장로로 변화한다. 채혈소를 운영하여 폭리를 취한 자들과 마치 밑천 없이 벌어들인 것 만 같은 재화에 현혹된 사람들은 매혈을 통해 모방소비와 소비의 한계를 늘려나간다.
부의 축재에 열을 올리는 인간들에게 위생이라는 보건 안전망과 같은 인간에 대한 배려는 존재치 않는다. 이러한 상황은 이유 없는 열병으로 마을 사람들을 몰아넣고, 감기와 같은 미열을 동반한 증세는 에이즈(AIDS;후천성면역결핍증)로 밝혀진다. 마을은 집단 패닉상태에 빠진다. 너나 할 것 없이 매혈을 통해 부를 확보했던 마을 사람들을 공포의 죽음으로 이끈 매혈사업은 더 이상 지속가능 사업이 되지 못한다. 소설은 딩씨마을(丁壯)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하는‘딩선생(할아버지)’과, 사람들을 꾀어 매혈로 부를 축재한 부도덕한 파렴치한인 그의 큰 아들‘딩후이’를 대립시켜 도덕적 책임을 묻고 있지만 엄청난 파괴의 힘으로 밀어닥친 물질주의에 대한 마을사람들인 일반대중의 탐욕이란 본성역시 책임을 회피하기는 어렵게 보인다.
한편 흥미롭다하여할지는 모르겠으나 열병 환자들이 학교로 모여들어 집단생활을 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는 자본주의의 무차별적 사물화와 부의 차별성이 지니고 있는 악덕에 반(反)하여 공동 갹출과 노동의 형평성 등 공동생활을 위한 평등주의의 묘사를 통해 공산주의에 대한 향수, 일종의 회귀를 그리고 있다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작가가 폭로하고자 하는 것은 물질이 파괴하는 인간성에 있다. 마을의 리더인 딩선생을 축출하고 촌의 주임으로 행세하는 사람들과 이에 부응하는 마을사람들의 의기투합은 학교의 기물을 개인의 소유로 분배하고, 나아가서는 죽어가는 자, 죽은 자들을 위한 관(棺)을 마련한다는 명분으로 고목들을 무차별적으로 베어내는 행태에서 물질에 숨겨진 소유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열병으로 죽은 자들에게 현(縣)정부가 무상으로 공급하는 관을 빼돌려 판매하는 딩선생의 아들 딩후이라는 인물, 즉 부패한 정부 관리, 권력에 대한 반발이자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이해가 있을 수 있으나, 작가는 이 들 양자에게 공히 부도덕에 대한 책임을 묻고 있다. 생태계의 무참한 훼손, 교육현장의 파손이라는 정신의 상실...
그러함에도‘피를 판다’라는 시작에서부터 이 소설은 인간의 생명, 즉 죽음을 담보로 하는 이 무서운 물질주의의 망령에 대해 맹공을 가한다. 무상 공급되는 관, 다시 말해 죽음에 대해 주어지는 보상까지 가로채는 파렴치함, 그리고는 에이즈로 죽은 미혼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음혼(陰婚:영혼결혼)을 부의 축재에 이용하는데 이르는 자본주의 물화의 대상은 대체 어디까지인가? 하는 물음과 같다. 결국 비속(卑屬)살인이라는 비극에까지 이르며, 정의의 심판을 내리기까지 하지만 이미 마을에 인적은 사라지고 폐허만 쓸쓸하게 남아 스스로들을 사라지게 한 탐욕의 자취만 황량하게 그림자를 드리운다. 자신의 생명으로 썼다고 하는 이 작품의 고통과 슬픔, 그리고 통한의 절망을 고스란히 읽을 수 있다. 국내에 소개된 그의 전작인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에 이어 이 역시 판금(販禁)된 소설이 되는 운명을 맞이하였다니 작가의 목숨을 건 집필의 처절함이 더욱 깊게 느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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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도 갈라놓지 못하는 욕심-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