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소설이 한결같다. 어둡고 무겁고 칙칙하고 흐릿하고 아련하고 우울하고 몽롱하고 둔탁하다. 사라진 기억에 대한 것, 아픈 현실에 대한 것, 접힌 현실과 도래하지 않을 것 같은 미래와 불분명한 과거가 무작위로 맞추어져 있다. 잔뜩 헝클어진 큐브와 같아서 길을 찾기가 무척 힘들다. 무어가 그리 소설 속 주인공들을 힘겹게 만든 것인지 알 수 없어서 더욱 힘들다. 작가의 소설은 철저하게 여성형이다. 「미완의 도형」. 작가의 등단작이며 자신의 글쓰기의 출사표 같은 소설이다. 똥과 같은 세상으로의 틈입을 위해 작중 주인공을 공중 화장실 청소부로 만드는 나. 소설의 안과 밖이 잘 접합되어 있다. 「에어컨」. 아내의 실종과 아내가 남긴 일기. 한쪽 다리가 불구인 흔들의자 같다고 스스로를 여기는 아내. 감각 기관이 실종된 듯한 아내의 실종과 죽음을 남편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하지만 결국 남편은 에어컨이 된 아내의 내부에 있는 듯 느낀다. 결혼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기계적이다.(?) 「32일」. 어떠한 기억의 연결고리도 없이 내가 머물고 있는 집. 집의 여기저기를 배회하며 기억으로의 여행을 하는 나. 그렇게 퀼트를 하듯 기억을 짜깁기 하고 복원 내지는 재창조 하는 과정이 소설의 과정이다. ‘시간의 둑에서 발을 헛디뎌 실종된 인간’을 주인공으로 한 존재하지 않는 시간(그러니까 달력 속의 32일처럼)에 대한 기록일까... 「숨은 길」. 소통되지 않는 사람들. 그들을 연결시킬 수 없다. 이야기 속의 여인은 누구인가... 「물 속의 정원사」. “이곳은 현실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곳입니다. 더억이 이 연꽃을 갖게 되면…… 기억을 잃어요. 이 연꽃 말입니다. 향내만 맡아도 기억의 어떤 부분들은 손상을 입게 됩니다. 그것은 어쩌면 소실된다고 봐야 하겠죠. 고통의 기억을 자신도 모르게 망각하게 됩니다. 제 말을 믿지 않으시리라 생각합니다만 사실입니다.” 연꽃. 망각. 잊고 싶은 기억을간직한 자들에게 망각을 선물하는 것... 「안개/맑음」. 마을버스기사였던 나는 굴착기를 훔쳐 강원도를 향한다. 매맞는 딸에게 이혼을 종용하며 나는 내 고향인 강원도를 여행중이다. 굴삭기와 흰색 승용차, 그리고 그 움직이는 것에 몸을 싣고 다니는 사람들, 또는 그들의 사연. 안개와 맒음 사이의 논리적이고 유기적인 통로의 부재로 말미암아 소설은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영각 27km」. 실려 있는 작품들 중 그나마 스토리라인이 분명한 소설이다. 나와 아내의 여행. 덕유산 계곡을 찾아가는 길, 공회전처럼 돌고 도는 그들, 27km라는 거리와 십여분이라는 시간... 과거 자신의 애인이었던 여자와 영각헌이라는 사당에서 만난 여자. 죽은 여인을 본 것인지 모르겠으나, 그 여인은 남자에게 그만한 크기로 각인되어 있었던 것인지는 의미심장하지 않아 어색하다. 「지금은 부재중」. “...지리산의 어디쯤 허름한 집을 얻어 혼자 산다는 시인. 그는 세상을 등진 은자처럼 살고 있지만 누구보다도 강렬한 몸짓으로 세상을향한 그리움의 몸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을 향하여 말한다. 나는 여기 없어요. 그러나 언제나 있다. 그러나 거기에 있다...” 우체부였지만 빚을 지고 사라져버린 남편. 주방일을 하고 있는 나와 아이들. 전화를 받지 않는 남자, 자신을 협박하는 남자, 실종된 남자... 이들은 모두 다른 남자인가, 아니면 같은 남자인가? 여자의 궁색하고 누추한 삶은 경제적, 육체적으로 그녀를 옥죈다, 심장이 아플 정도로... 「붉은 꽃대궁」. 문효와 수연. 결혼한 두 여자. 문효의 옛사랑인 그. 그가 찾는 문효와 그를 찾는 수연. 두 유부녀와 한 유부남의 이야기라니. 불륜 소설의 버전은 계속 업그레이드 되고 있다. 「그물 던지는 남자」. 나이든 이들의 야유회. 어딘지 쓸쓸하다. 그 안에 있는 자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자신의 쓸쓸함을 키우기도 하고 달래기도 한다. 「배꽃 동산」. 성공한 예술가인 남편과 언론에 소개되는 그들의 전원주택. 무시로 집을 방문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나는 내가 아니라 그저 유명인의 아내일 뿐이다. 방문객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고 상냥한 낯을 준비하는 나는 그래서 항상 허전하다. 갖가지 휘황한 꽃과 나무의 잔치 같은 이미지 속, 나는 그래서 더욱 돋보인다, 부정적으로... 「잃어버린 정원」. 신희. 정원. 두 여자. 아들인 영준. 아들을 잃고 황폐해진 나와 정원과의 유대. 이러한 황폐는 내부로부터 그리고 외부로부터 동시에 진행된다. 성폭행으로 인한 결혼과 임신, 그리고 기형을 타고난 아이까지. 병원 25시(24시인가?)와 아침마당의 짬뽕 같다. 「겨울 한계령」. “이제는 말할 수 있겠습니다. 내가 넘어온 고개는 한계령(限界嶺)이 아닌 한계령(寒溪嶺)이었다는 사실을. 내 삶의 온도는 그동안 얼어붙을 듯 차가운 것은 아니었는지. 얼음 폭포처럼 침묵하며 버티어온 세상은 아니었는지. 이빨을 앙다물고 버티려고 했어요. 나는 어디까지 갈 것인가, 어디까지인가. 이런 생각으로. 그런데 알고 보았더니 내가 한계(限界)로 알고 넘은 고개는 한계(寒溪)라는 것입니다. 첩첩사중의 겨울 고개, 그것은 내 삶과 다를 바 없었지요. 그 위인과 사는 일, 그래요. 그 불구의 몸으로 겨울산 같은 세상을 헤쳐가고 있는 그 위인. 혼자서 이 차갑고 시린 고개, 내리막길을 넘어가게 해야 할까요?” 카운슬러와 카운슬러에게 가정 상담을 받는 나 사이의 유대는 여행으로 이어지고, 그 여행을 통해 나는 카운슬링을 받는 형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