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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요제프 괴벨스의 유일한 소설 <미하엘> 나치 역사에 관심이 있었던 사람이라면 낯설지 않게 다가올 이름 파울 요제프 괴벨스.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어릴 때부터 잦은 질병에 시달려야했던 그는 골수염 휴유증으로 오른쪽 다리를 절게 되었고 자라남에 있어 콤플렉스로 남게 되었다. 그런 콤플렉스를 극복하고자 학업에 매진했던 그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낭만주의 극장가 빌헬름 쉬츠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게 되었고 후에 나치스의 선정장관으로 독일 국민을 나치즘으로 이끌었던 인물로 히틀러에 의해 선정장관에 임명되었었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의 약력을 살펴보면 독일 국민들을 나치즘이라는 광기로 몰아넣었던 인물이라 확실히 반감이 먼저 드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이력 때문에 그가 남겼다는 유일한 소설 <미하엘> 이 어떤 작품인지 더욱 궁금증이 일었던 것 같다. <미하엘>은 괴벨스의 대학 시절 의지했었던 친구 리하르트 플리스게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그를 기리는 마음으로 써내려간 작품이라 한다. 그래서 그런지 책을 읽다보면 괴벨스 본인의 이야기를 써내려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돌아와 강의실에서 만난 '헤르타 홀크' 와의 가슴 설레는 사랑의 감정을 덤덤하게 써내려가는 것이 그 시대를 보여주는 듯해서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다. 요즘같이 직설적이고 저돌적인 사랑이 아닌 순수하고 가슴 설레임을 가득 담고 있는 감정이 옛스러움을 그대로 담고 있었는데 그와 더불어 전쟁과 미래와 끝없이 어이지는 청춘의 고민들이 시대상과 함께 깊이 있게 다가와졌던 것 같다. 5월부터 이어지는 1년 반정도의 기간이 일기 형식으로 담겨 있는데 서로의 감정을 확인한 미하엘과 헤르타 홀크와의 깊이있는 대화도 인상깊었지만 미하엘이 생각했었던 것과 너무나 달랐던 대학 생활을 뒤로 하고 노동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것도 색다르게 다가왔다. 그런 결심을 하기까지 정치적인 견해와 철학적인 깊이있는 미하엘의 고뇌가 담긴 글을 보면서 시대적 배경은 다르지만 20대들이 겪는 깊이있는 고민이 느껴지기도 했다. 현실과 이상적인 이론이라고 여겨졌던 것으로의 선택, 처절하기까지한 그의 고뇌는 시대적 배경이 다르다고는 하나 고민하는 그 근본이 어딘지 낯설지 않음을 느낄 수 있는데 전체적으로 굉장히 어둡게 다가왔던 글이지만 전혀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멀게 느껴지지 않았기에 괴벨스란 인물의 약력을 보고 느꼈던 감정과 책을 덮으며 들었던 감정의 괴리감에 약간의 혼란스러움마저 느껴졌고 무엇보다 뭔가 여운이 오랫동안 남는 작품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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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제프 괴벨스 저의 『미하엘(일기에 나타난 어느 독일인의 운명)』 을 읽고 우선 시간은 꽤 흘렀지만 2차 세계대전 특히 독일 히틀러의 나치스 정권에 의해서 희생당한 많은 유대인을 포함한 희생자들에 대해서 위로의 말을 전한다. 아울러 다시는 이런 희생의 피해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는 생각의 시간도 되었다. 나치 독일에 대해 오래 만에 떠올리면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글이 일기 형태로 이루어져 있어서 관심도 더욱 더 가지게 할 뿐 아니라 더욱 더 알고 싶은 욕심까지 갖게 되어서 더 좋은 독서 시간이었다. 저자가 나치 독일의 선전장관이었던 요제프 괴벨스의 반자전적 소설이기에 더욱 더 실감과 함께 더욱 더 마치 현장에서 느끼는 듯한 감정이어서 최고였다. 저자가 도스토옙스키와 니체, 괴테에 문학적 영향을 받으면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면서 문학작품 공부를 하면서 작품도 집필한다. 그리고 당시 당인 나치당에 입당하게 되면서 히틀러와 운명적으로 만나면서 히틀러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된다. 이로서 저자는 독일 나치스 정권의 선전장관, 국회의원, 당 선전부장으로서 아돌프 히틀러 정권하에서 중요한 위치에서의 역할을 하였다 할 수 있다. 특히 저자는 자신이 전공하고 공부하고 있는 말과 글의 힘을 신봉하였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문헌학을 전공하면서 관심이 많았던 언어에 대한 것을 바탕으로 히틀러가 구상했던 꿈을 실현할 수 있도록 옆에서 보조했고, 히틀러도 이를 철저하게 신봉함으로써 오른 팔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바로 이런 내용을 포함한 그 과정들에 대한 감회들을 남은 이 책이 1923년 26세에 이 작품을 집필했다. 정치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전까지 여러 출판사에서 출간을 거절당하다가 1929년 독일에서 출간된다. 1945년까지 17쇄를 찍었다. 정립되지 않은 상태의 나치즘이 몽환적으로 나타난다. 괴벨스의 정치적 행로에 대한 심리적 배경으로 읽힌다. 소설 속 미하엘의 모습을 통해서 많은 것을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다. 당시의 독일의 상황은 물론이고 독일 국민들의 개개인들의 모습도 생각해볼 수 있다. 내 자신도 만약 이런 상황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처신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지만 결코 쉽지 않는 판단이다. 어쨌든 역사속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독일 나치즘 시대의 모습을 나름대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는 점이다. 역시 이런 작품 기록은 소중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껴본다. 이 작품에 대한 나름대로 평가는 전문가들의 몫이기도 하지만 우리 독자들의 나름대로의 몫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젊은 저자만이 갖는 뜨거운 감성이 드러나는 문장들과 배치는 역시 이 작품이 주는 매력이라 볼 수 있다. 일독을 강력 권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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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요제프 괴벨스의 반자전적 소설이다. 1923년 친구 리하르트 플리스게스가 사고로 죽자 쓴 소설이며, 처음엔 자전적 소설에서
반자전적 소설로 고쳐 나갔다. 괴벨스가 나치당에 들어가기 전 괴벨스의 생각과 가치관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으며, 히틀러의 선전
부장이면서 나팔수가 되었는지,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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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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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요제프 괴벨스
괴벨스. 이름만 들어도 움찔한다. 나치 정권의 선전대장. 그가 문학 박사였다는 것을 소설을 쓴 적이 있다는 것을 얼핏 들어봤던 것 같다. 마케팅, PR, 언론 등 전공자들에게 괴벨스는 무섭지만 훌륭한 학습대상이었다. 독일어를 모르지만 그의 선전 영상을 유투브로 많이 봤다. 단 한번도 끝까지 본 적이 없었다. 자막이 없어 알아듣지 못해도 빠져들 게 하는 마력. 그가 젊은 시절 남긴 반자전적 소설 <미하엘>. 지금까지 한국에 괴벨스의 소설이 단 한번도 번역된 적이 없기에 무척 궁금하였다. “1923년 7월 19일 쉴리어제 인근의 어느 광산에서 용감한 노동자로 일하다 죽음을 맞이한 내 친구 리하르트 플리스게스한테 이 책을 바친다.” <미하엘>의 헌사. 24살에 박사학위를 받은 괴벨스는 26살에 이 책을 썼다.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는 나치당을 인정하지 않았던 괴벨스는 이 책을 쓴 2년 후 나치당에 입당한다. 이 책의 주인공인 미하엘은 이 책의 모델인 리하르트와 괴벨스 본인의 중간 정도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전도유망한 대학생에서 광산노동자로 투신하는 미하일의 몇 년간의 일기의 형태로 구성되어 있는 소설이다. 답을 알고 푸는 수학문제 같은 느낌, 다 푼 수학문제의 풀이과정을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 소설은 계속 출판사들에서 거절을 당하다가 제국회의 의원이 된 이듬해인 1929년 처음 출간된다. 그리고 1945년까지 17쇄까지 찍었으나, 그가 죽고 세월이 흘러 잊혀진 소설이다. 왜 출간을 거절당했는지 느낄 수 있을만큼 완성도가 별로다. 괴벨스가 얼마나 학문적으로 똑똑했을지는 몰라도, 전형적인 20대 문학도의 풋풋하고 거칠고 날선 습작물을 보는 듯한 기분이다. 그럼에도 괴벨스의 삶을 알고 보는 <미하엘>은 읽으면서 섬뜩한 구석도 많고, 마음 편히 읽어지지 않는다. 괴벨스는 미하엘을 통해 당대 자신이 가진 생각들을 마구마구 늘어놓는다. 문화와 예술에 대해, 정치에 대해, 여성에 대해, 노동에 대해 일기인만큼 너무나 시끄럽고 산만하게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미하엘, 미하엘의 연인, 일기 모두 결국 괴벨스의 대변수단이고 괴벨스가 절친한 친구에게 바치는 수단이다. 그런데 이 사상이 매우 극단적이고 편협하다. 청년만이 옳고 노인은 가치 없다거나 미하엘이 연인과 주고 받는 이야기를 통해 느껴지는 여성관들. 노동에 대한 무한신성시. 그래서 결국 이 책이 남기는 단 하나의 메시지는 ‘혁명하라’ 그리고 그는 히틀러를 통해 이 책을 쓰며 했던 생각들의 상당수를 실행하였다. 괴벨스가 아니었으면 출간되기 힘들었을, 치기 어린 청춘의 흑역사 같은 소설이다. 하지만 쉽게 읽었으나 편하게 읽을 수 없었던 책이었다. 만감이 교차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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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이 작품은 작품을 이야기 하기 전, 작가 이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듯 하다. 역자 후기만 보더라도 20대 청년의 방황, 사랑 그리고 투쟁으로 보기 보다는 저자의 나치 선정성을 염두하고 읽으라고 할 정도니 말이다. 출발은 그랬다. 저자의 말처럼 도대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성장하고 공부하고 사회생활을 하면 그렇게 잔인한 학살에 가담 정도가 아니라 앞장설 수 있을까, 과연 그들도 '사람'이라 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막상 <미하엘>을 읽다보니 과연 그런 선입견을 두고 이 책을 읽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반드시 또 그렇게만 볼 수도 없다는 생각이 책을 읽는 내내 나를 괴롭혔다. 가장 쉬운 예로 내용이 정말 멋지고, 공감가는 내용도 많은데 하필이면 그 작가가 독립운동가들을 핍박하다 못해 잔인하게 살해한 일본인이었다면? 심지어 수장이었다면 어떨까? 내가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에 이 소설을 두고 그냥 소설로 보자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위의 문장만 보더라도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순수한 청년의 모습이다. 그리스도를 언급하는 부분에서는 나약한 인간의 면모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친구들과 언쟁을 벌이기도 하고 자신의 길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연인에게 실망하기도 하는 모습은 보통의 청년가 다를바 없다. 어쩌면 그래서 더 이 소설이 위험한지도 모른다. 사실 이 소설은 저자 '파울 요제프 괴벨스'의 자전소설을 탄광에서 사고사한 친구를 위해 장편소설로 개작한 것이다. 다시 말해 자전소설이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친구의 죽음을 마치 대의를 위한 희생이었다고 강조하며 자신의 정책을 관철시키려고 하는 감정적 호소였음을 부정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마치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를 탄압하고 살해했기 때문인것처럼 몰고가지만 사실상 자신(혹은 국가)의 나약함을 유대인들의 탓으로 돌리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심지어 사랑하는 연인을 찬미하고, 자신의 어머니를 지극히 존경하는 와중에도 유대인을 경멸하고 모욕하는 '미하엘'을 보고 있으면 역자의 말처럼 결코 친구를 '추모'하기 위한 소설로만 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로랑비네'의 <HHhH>를 읽으면서도 느꼈고, 멀리서 찾지 않고 히틀러의 생애만 보더라도 나치당 중 유대인 학살에 앞장 섰던 인물들은 겉으로는 외향적이고 학업적 능력이 뛰어나며 심지어 '로맨티스트'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그들과 대화를 일단 시작하면 결코 헤어나올 수 없는 매력적인 인물이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마지막 문단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한 마디. 불우한 가정 때문에 혹은 불구였던 신체 때문에, 이도 아니면 꺾인 꿈으로 인해 한 평생 열등감 속에 빠져 있었다고 결론짓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열등감을 이겨내기 위해 정말 '잘'사는 사람들의 흉내를 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흉내는 진실을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았던 만큼 신의 탓이 아닌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아닌가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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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문호 도스토예프스키와 니체, 괴테에게 문학적 영향을 받은 문학도로서의 어려서부터 온갖 질병에 시달리고 골수염 휴유증으로 오른 다리를 절게 된 괴벨스는 미하엘은 나치스에 입당 후 선전장관이 되기 직전에 출간된 괴벨스의 유일한 1차 세계대전의 종료로 귀향 시점의 미하엘과 광산 광부로서의 길지 않은 1년 전쟁은 전투하는 사람들에게 변화를 요구하지 않는다. 사회에 염증을 느끼는 존재가 어떤 기회로든 정치를 접하게 되면 불에 기름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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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한명의 '사람'으로 태어나 살고 있다보니 어떠한 방면이든 대단한(?)사람들을 직간접적으로 접할때면 '어떻게 이런 사람으로 되어버렸을까?'하며 궁금할때가 많다. 괴벨스도 대단히 궁금한 사람들 축에 끼어 있었는데 이 미하엘이라는 책을 통해 조금이나마 궁금증이 해결되는 기회가 되어 만족스러웠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기형식이다. '일기'라는 테두리 때문인지 지나치게 솔직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누구나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주저리 주저리 일기에 담을 수 있는 자유는 있다. 하지만 같은 일기의 형식을 지녔더라도 '안네의 일기'가 훨씬 진실하고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는 것은 나만 느끼는 감정은 아닐것임을 확신하기에 역사가 어느 쪽 편인지와 그에 따른 평온함을 참 다행으로 생각하며 읽었다. 어쩌면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경계하며 이 책을 읽게 되었다는 것이 더 솔직한 표현일지도 모르겠으나 끄트머리의 '뜨거운 가슴보다는 차가운 머리로 읽어 보라'는 옮긴이의 권유를 보며 내심 안심했었다! 차가운 가슴으로 읽었음에도 초반부의 대부분은 맞는 말 같기도 했다. 자연은 삶의 영원한 스승이라는 주장이라든지, 자본과 자본주의의 혼동을 지적한 것 등이 그것이다. 그러다 자신을 파괴하기로 하고 본인의 신은 힘의 신이라 주장하며 슬슬 이상해지기 시작하는 듯 한데...... 헤르타 홀크와 사랑하는 시기와 맞물려 있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스케일만 클 뿐 내용은 우스꽝스럽고 소소하며 무의미하다라고 평가절하한 부분에서는 '과연 몇 번이나 읽고 내린 평가였을까?' 궁금해졌다. 괴테의 파우스트처럼 수도 없이 읽었을 리 만무하겠지? 여자에 대해 생명을 주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일을 한다고 치켜세우다가도 결국에는 남편이 없으면 기초적인 삶조차 영위해 갈 수 없는 현실은 외면하는 위선자적 태도...... 전쟁이 있어야 평화가 있다는 전쟁 예찬론에 가까운 사고방식 등은 목적적인 소설의 냄새를 물씬 풍겼다. 천재들이 사람들을 소모한다는 사고도 같은 맥락에서 소름끼쳤다. 이런 남자와 사랑에 빠져버려 끝없는 말다툼에 지쳐가는 헤르타 홀크라는 여인이 같은 여자로서 너무나 딱했다. 절대 말이 안 통하는 사람과 대화한 후 느껴 본 그 끝없는 답답함을 겪어보지 않은 이는 모를것이다! 더군다나 거기에 사랑이라는 감정까지 섞여있다면?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처절한 상황이 아닐 수 없겠다! 헤어지는 결말은 당연하다고 본다. 그녀는 똑똑했으므로......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유대인을 대놓고 폄하하는 곳이었는데 유대인만 봐도 구역질이 난다거나, 병든 독일인의 몸에 들러붙어 있는 고름덩어리 같은 존재라거나 하는 표현에 나도 모르게 눈살이 찌풀어졌다. 유대인은 경멸할 뿐 결코 증오하지 않는다는 부분에서는 내가 구역질이났다.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얼마나 어긋나면 이렇게 되는 것일까? 그래서 그리도 많은 그들을 죽였단 말인가? 이러다 갑자기 그는 노동에 빠져든다.(조금 난데없었다!) 노동하다 지친 육체탓인지 일기도 뜸하게 쓴다. 아마도 본인이 아닌 친구 미하엘의 이야기를 쓰려다보니 쉽지 않았겠지...... 과연 실제로 그가 이런 벅찬 노동을 할 기회나 있었을까? 그럼에도 배울점도 있었다.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자본가들도 탄갱속에 1년간 들여보낸다면 노동자 문제의 해결속도가 빨라질거라든가 (우리도 살아가면서 역지사지의 마음이 와닿지 않으면 직접 해보는게 좋을텐데......) 신성한 노동을 통해 자의식과 자부심, 자유를 얻을 수 있겠다는 점? 투쟁은 필연적으로 피를 부르겠지만 그 핏방울은 하나하나 전부 씨앗이 된다는 점? 그리고 마지막으로 '알맞은 때에 죽도록 하라'는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 등이 그것이었다. 직접 경험해 본 사람만이 뭔가를 완전히 사랑하거나 증오할 수 있다고 믿었던 괴벨스! 과연 그는 무엇을 경험했던 것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