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흔히 고려나 조선시대나 창업형 군주들은 어려움이 많았다. 이성계나 왕건이 나라를 세우는 데 분주해서 내치를 손보지못했다면 그다음 군주에게 과업이 많이 넘겨지게 마련이다. 왕건이 고려를 세우고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평생을 바쳣다면 그다음 군주들은 내치의 의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고려는 호족연합세력이 강한 왕조엿다.혜종도 정종도 고려건국 초기의 혼란기에 위의 두 형들이 요절하자 제위와는 거리가 먼 제 3자 광종이 황제가 되었다. 당연히 과중한 임무가 놓여있었다. 태조가 통일과 건국의 과정에서 정략결혼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호족과 공신세력이 비대해졋을 뿐 아니라 내치가 정비될 여지가 없었다. 조선조 태종도 광종과 비슷했던 것 같다. 당연히 왕권 강화를 위한 숙청이 없을 수가 없었다. 절대군주체제가 권력을 장악하지 않으면 언제 전복될 지 모르는 위험은 항상 안고 있다. 하지만 . 광종의 이런 숙정작업으로 고려의 왕권이 안정화되었음을 인정하고있다. 그 기반위에서 귀족문화 가 꽃 피웟지만 이는 무인들의 반발로 중기에 고려정치의 붕괴를 낳는다. 그리고 밀어닥치는 외세의 침략.. 고려는 너무 외침이 많아서 문화를 발전시킬 시간조차 없었던 것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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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시대를 걸치면 계림의 나라가 경순왕 김부로 주저앉고 옛고구려을 되돌리기 위한 고려와 공양왕을 마지막으로 이성계가 조선을 세워 옛조선을 되찾고자 했던게 무엇인지 매우 답답한 오백년이 된듯하다. 근현대사를 읽고, 다시 조선을 읽고 고구려를 읽고 고려를 읽어보니 민족기상을 되살리기 위해 과장된 교과서적 해석이 꼭 옳은가라는 생각도 들게된다. 스스로 문득 요상한 생각이 들어 다시 짚어봐도 고려를 기점으로 많은 문명의 기술적 발전을 해왔지만 중요한 심장을 잃어버린 역사가 시작된듯하여 그들이 내건 기치가 더욱 아쉽다. 드라마로 자주 만들어 지지 않는 이유도 극적반전의 묘미가 적기도 하겠지만 소극적이고 피폐한 당시의 현실에 더 아쉬움을 갖을것 같다. 고려의 시작이 이후 중화문화권이 송 요(거란) 금(여진) 원(몽골) 명(조폭 주원장)까지 이어지는 역동적일수도 있고 지지고 볶는 판에 고구려와 같은 기상을 볼수 없이 쪼그라져 한반도에서 지엽적인 대외 정보파악과 협소한 시각을 갖게된 역사가 아닐까한다. 폄하한다는 생각도 들지만 초기 혼란기의 부실한 왕권이후 요나라와 전쟁, 금나라와의 전쟁, 몽골과의 전쟁으로 피폐한 현실이 아닐까한다. 이런 부실한 왕권때문에 지금보면 개족보라고 할만큼 개국초기부터 정신없는 근친혼으로 혈족을 묶으려고 했던것은 아닌가한다. 그나마 광종시대에 쌍기등 해외 문명과 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과거제도 빈약하나마 시작하였다하더라도 꽃을 피우지 못한 꽃은 그저 시들뿐이라 생각한다. 동북9성을 쌓은 윤관의 과정이 한심한 반면 그나마 옛 요동을 지치던 기상은 서희나 최영을 제외하고는 볼수가 없다. 몽골항쟁의 삼별초의 봉기 이유도 맥락을 갖고 보면 교과서에 말하는 민족기상보단 결과적인 지엽적 판단에 불과한건 아닌가한다. 사견으로 고려시대전반이 의도하지 않은 지방자체제도하에 신분제하에서도 남여의 자유로운 권리가 보장된 반면 국가라는 측면에서는 참 개판오분전이란 생각이 든다. 쿠테타로 왕의 자리에만 안지 않았지 그것과 다름없는 무신정변은 요즘으로 보면 현대사의 쿠테타와 다름이 없다. 요동정벌하라고 파견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도 현대사에 있었던 쿠테타와 차이가 없다고 생각이 드는건 조선초기의 권력다툼으로도 반증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왕을 갈아치우는게 나쁘지 않다고도 볼수 있지만 명분과 실리가 없음이 한심하다. 왕이 있어 군주제이지 이건 도무지 몇몇왕을 빼고는 조선의 불쌍한 왕보다도 심한듯하다. 고려에서는 태종과 같은 청소부 역할을 있었지만, 조선과 같은 시스템적인 관리체제가 미비하여 더욱 심해졋던것 같고 성리학이 시대의 흐름에 유효했다고 생각은 들지만 적합했는가에 대해서는 아쉽다. 최치원도 유불선 삼교가 풍류에 있다고 할만큼 자주적인 종교, 철학의 이해가 이땅에 있었다고도 생각되는데 힘에 대한 사대가 아니라 정신의 사대는 조선이 아니라 고려부터 시작되었다는 생각이 많이든다. 게다가 요, 금, 원의 침탈속에 고조선, 고구려, 백제로 이어지던 상무정신은 간데없고, 특히 원의 시대는 다루가치를 통해 지배되었음으로 사실 일제 식민지치하와 다름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황후의 고려에 대한 폐해와 동생 기철등 인척의 행태를 보면 을사오적에 못지 않는다는 생각도 많이 든다. 사회적으로 고려시대에 지속적으로 시정전시과 개정선시과 조선 정도전, 세종으로 이어지는 토지개혁 특히 겸병의 폐해등을 보면서는 사회적 개혁의 시점에 경제는 과거에도 현재도 주요한 중요과제였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고려시대뿐이겠는가마는 음서제도, 매관매직이 현재의 특혜, 낙하산 인사와 같고, 고래대금의 금지도 예나 지금이나 같다. 그러면에서 왕이 백성을 진휼하는 것이 일이라고 하는 옛말은 예나 지금이나 유효한데 사람들의 행실도 예나 지금이 비슷한듯한다. 사람이란 그릇에 무엇을 담았는지에 따라 다를 뿐이지, 사기에서 솥에 물끓이고, 항아리에 젓담는짓은 행태만 다르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것이 지나친것인지 잘 모르겠다. 전반적으로 금속활자의 발명, 목화(사실 그 전에도 국내에서 목화는 있었음. 타박타박세계사의 방송이 좋은 정보일듯함), 최무선의 화포, 문헌공 최충(해동공자), 강감찬, 서희, 최영, 초기의 왕성한 대외무역등 지엽적인 성과가 많음에도 요,금,원,왜의 지속적인 침탈을 보면 근 오백년간 고구려의 기상을 펼치는 대신 동북아시아의 동네북같아 왜 우리민족의 마음속에 恨이 뿌리깊게 박혀있는지 돌아보게된다. 특히 조선과 같은 왕중심의 역사라기보단 잦은 봉기와 반란, 전쟁등의 혼란기를 통해서 고려는 정말 힘든 백성들이 지켜온 역사라는 생각이 많이든다. 역사라는 것이 공을 세워 일으킨자와 또 그 자리를 탐하는 자들의 역동적인 발전보단 보복의 연속이 많아 아쉽지만 부인할 수 없는 역사고, 동시대에 혼혈을 통한 우성인자의 배양을 좋아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책도 왕조중심보단 4개의 시간적 구간속에 사건중심으로 되어 보기 편한반면 고구려처럼 즐겁게 읽기는 벅찬감이 많은듯하다. |
| 역사는 하나의 객관적인 사실이지만 현재의 시각에서 재해석되면서 객관성을 넘어선 생명력을 획득하게 된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재에 의하여 역사 역시 끊임없이 변모하는 것이다. 같은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혁명도 되었다가 쿠데타가 되기도 한다. 어떤 사실은 미천하게 다루어지다가도 갑자기 그 중요성이 부각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단 한 권의 책을 통해 역사를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룻밤 사이에 읽기에는 다소 분량이 많은 이 책은 얼핏 보면 국정 교과서와 같은 느낌이 든다. 고려 왕조의 건국에서부터 시작하여 몰락에 이르기까지 있었던 사건들을 시간 순서대로 나열하고 있다. 다만, 특정한 인물이나 사건에 대해 보다 자세히 다루는 대신, 고려의 문화, 예술 따위에 대해서는 독자적으로 다루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교과서와는 차별화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최씨 무신정권에 대한 재해석은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부분 중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최충헌으로 이어지는 무신정권, 그들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권력의 최고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고 제거당하게 되었는지 이 책은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같은 무신이었지만 다소 온건하고, 문신 중심의 구체제로 회귀하고자 하는 성향을 지닌 정중부에 대한 시각은 여느 책에서 보기 힘든 것이었다. 거기에 항몽 주체세력으로 부각되고 있는 최씨 무신정권에 대한 해석 역시 조금은 색다르게 느껴졌다. 각종 기구들을 설치, 자신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여겼던 최충헌에게 있어서 국력 강화는 안중에도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서 그는 국력이 약화되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용맹한 군사들을 모아 자신의 사병으로 재편했으며 이로 인해 그의 사병은 관군보다도 강했다. 강력한 자신의 사병을 관군과 동일시했던 그에게 올바른 정세 파악 따위는 있을 수 없었다. 거란군이 개경까지 쳐들어왔을 때도 그는 병력 수만을 동원해 자신을 지키게 했을 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왕을 마음대로 교체하고, 심지어 자신의 친동생마저도 제거할 수 있었던 비정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국가가 국가일 수 없는 이와 같은 상황은 망이, 망소이의 난을 비롯하여, 고구려,백제,신라 부흥운동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그의 아들 최우(최이)는 그에 비하면 조금 더 세련되었다고도 볼 수 있을 듯 싶다. 자신의 정권을 위협할 수 있는 힘을 가진 무인들을 억압하는 반면 어느 정도 학식은 갖추었으되 철저히 최씨 정권을 찬양할 수 있는 문인들을 등용했다. 무신정권에 의해 등용된 문신들에게 비판정신은 존재할 수 없었다. 철저히 무신정권을 옹호함으로써 출세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이규보는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 당시 유행했던 패관문학 자체가 신변잡기를 비롯, 사회문제와는 동떨어진 것들을 다루는 일종의 수필이었음을 통해 우리는 이를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역시 정권 유지 측면에서는 최충헌과 그리 다를 바 없었다. 대책 없이 이루어진 강화 천도는 민중들의 삶을 도탄에 빠지게 만들었으나, 그 자신은 강화에서 집권자로서의 호화스러운 생활을 계속했다. 고려는 호족들의 난립 속에서 건설된 불안한 국가였고, 이와 같은 불안정성을 극복하기 위해 오히려 문인 중심의 정치를 펴면서 국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무신정권이 가져다 준 혼란과 수 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거란, 여진, 몽고족의 침략은 고려라는 나라가 얼마나 나약했는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는 문화적으로는 적지 않은 성과를 남겼다. 그리고 이와 같은 문화 발전에는 고려인들이 소유한 개방성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조선사회와는 달리 여성도 호주가 되고 상속을 받을 수 있었던 사회, 자신과 전혀 다른 외모를 한 아라비아 상인에 대해서도 아무 거리낌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사회. 고인 물이 썩듯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방향으로만 치우친 사회는 발전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고려 사회를 주목해야 된다. (이는 오늘날 강대국들에 의해 이야기되고 있는 세계화와는 또 다른 문제이다. 자유로운 교류는 상대방의 문화에 대한 존중이 전제가 되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자신이 가진 고유의 것이 파괴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 행해지고 있는 세계화는 그렇지 못하다. 소수의 부국들은 점점 더 강해지는 반면, 대다수의 약소국들은 최소한의 생존권조차도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은 개방이기 이전에 종속이니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