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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태가
아니었다 국민의 죽음으로 권력을 계엄군은
무자비했다. 시민들에게 진압봉을 휘두르고, 수
중에 몇천달러의 돈이 있음에도 꽁초를 주워다 피우고 무소유
정신과 무한한 헌신성에서는 누구도 비교할 수 없으며 "합수, 두 줄기 물이 합쳐진다. 호남 지방에서는 재래식 화장실의 똥과 오줌이
합쳐진 똥거름을 말한다. 역사와 민중을 위해 인생을 바쳤노라고 말하는
이들은 많지만, 명예또 직위도 돈도 모두 마다하고 스스로 퇴비가 된 이는 드물다. 윤한봉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어떤
사람이 민주화 운동을 하기 위해 화물선 배 의무실 한구석 민주화운동을
하다 죽은 동료를 잊지 않기 위해 그의 이름을 쓰고 죄인이
되어야 할 사람은 따로있는데 실제
윤한봉 속 묘사되는 5.18 당시의 모습은 잔인 그자체 였다. 이런
윤한봉 선생의 노력으로 미국 곳곳에서 한청련이 결성되었고 이런
윤한봉 선생님의 운동은 사실 5.18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다른사람의
돈을 빌리지도 못하면서 약자를 돕기 위해
고
윤한봉 선생은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산소호흡기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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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5.18민주화운동 기념일에 문재인대통령이 참석해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고 유가족을 따뜻하게 안아주며 감동을 주었다. 정치인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슬퍼하는 국민들을 위로해주는.
오늘 소개할 책은 5.18민주화운동의 마지막 수배자 <윤한봉> 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광주 민주화운동의 정신적 지주였던 ‘윤한봉’ 선생의 10주기를 맞아 제작된 윤한봉 평전이다. 나도 사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윤한봉 이라는 사람을 알지 못했다.
윤한봉은
전남대를 중퇴하고 광주와 미국에서 평생 민주화운동에 앞장선 민주화 열사이다. 박정희을 유신 독재에 반대하여
고문과 옥살이를 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에의 주도자로 찍혀 미국으로 망명을 하여 미국에서 광주사태를
알리고 재외동포의 인권운동에도 앞장선 행동가였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를 잘 몰랐을까?
한국에 갈 때 퇴비처럼 살겠다고 하셨는데, 정말 해외 동포사회에서 퇴비처럼 되셨죠. 왜냐면 지금 해외동포사회에는
윤한봉을 기억하는 일반 동포들 거의 없습니다. 옛날에 여기 계실 때도 그렇고 한국에서도 아마 그러셨을거
같은데 공식적인 직함 딱 하나 있었거든요. 민족학교 소사. 그거
이외에는 직함이 없었죠. 완전히 거름이 되신 거죠. 거름은
나무가 되고 나면 안 보이잖아요. 지금 딱 그렇게 되신 겁니다.
(P.360)
윤한봉은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사람이었다.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민주화운동에
나선 그였지만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것에는 뜻이 없었던 것이다. 마음만 먹었으면 유명한 정치인이 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정말 말 그대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철저히 민중을 위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나는 운동권이라고 하면 어두운 지하방에 수뇌부가 모여 선동전략을 짜서 각 지부에 지시를 내리고 하는 줄 알았는데
윤한봉의 활동을 보면 이런 모습과는 다르게 궁상맞은(?) 민주화 운동활동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활동비가 없어 멸치를 팔러 다니고, 농민들과 함께 시위를 하며 몇
천명의 밥을 짓고, 직접 많은 사람을 만나고 설득해서 함께 목소리를 내는 방식이었다. 민중속에서 민중과 함께 민중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었다.
그를 민주화운동가, 통일운동가로 많이 불리지만 일생 동안의 그의 활동을 살펴보면 결국 사람을 위해 투쟁을 해왔던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소수와 약자를 위해. 독재정권
때는 권력에 저항한 약자들과 함께 했고, 북한동포들을 위해 통일 운동을 했다. 윤한봉은 본인 역시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그는 항상 그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사람을 도왔다.
사람들이 착각을 하는데 합수 형님은 통일운동가가
아니라니까요. 그분은 소수와 약자를 위해서 일하시는 분이에요. 그분은 '우리는 어디를 가더라도 거기에 있는 소수와 약자를 위해서 일을 해야 한다, 그래서
만약에 그런 날은 안 오겠지만 만약에 한반도에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미국에서 코리안이 다수가 되고 백인이 소수가 되면 여기서 백인을 위해서 일을
해야 된다'고 했어요. 우리는 죽어서도 어딜 가든지 소수와
약자를 위해 일해야 한다는 거였거든요. (P.319)
앞서 이 책은 평전이라고 소개를 했는데, 긴박했던 상황들이 많아서인지
소설보다 더 몰입이 되었다. 그의 인생이 한 편의 소설 같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윤한봉 선생’ 이라는
명칭보다 ‘한봉이 형’, ‘합수 형’ 이라는 존칭이 더 익숙했던 것은 평생 그가 낮은 자세로 사람들과 함께 민중운동을 했기 때문이었으리라.
책을 통해서 느껴지는 그의 겸손함이 때로는 아쉽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알려 그를 존경하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민주사회의 거름을 자처한
그가 이번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을 보는 기분은 어땠을까? 우리가
이런 세상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가 5.18민주항쟁에 대해 한 말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민주적인 촛불시위가 가능했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비록 거름이 되었지만 우리가 다시 그를 꺼내 많은 이들의 영향을 다시 줄 수 있길 바란다.
차별보다는 화평을 추구하고 작은 다름보다는
큰 같음을 추구하는 정신, 사적인 것보다는 공적인 것, 개인보다는
공동체를 우선시하는 정신, 세상 사람을 다 한 가족처럼 생각하는 정신인 '대동정신'이 대동단결과 도덕적 항쟁을 가능하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P.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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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 운동 관련하여 세번째로 읽은 책이다. 이 책의 내용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5.18 민주화운동의 마지막 수배자 윤한봉 씨의 일대기를 다룬 책이라 할 수 있다. 한줄로 요약하자면 이렇게 쉽지만 책장을 한장 한장 넘기다보면 이 인물은 평범한 사람 100명 분의 삶을 살다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쉼 없이 매 순간을 '약자를 위한 사회'를 위해 헌신하였고, 이를 말뿐이 아니라 실천하기 위해 실현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삶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살아있는 예수야! 한국의 레닌이야! 그때 같이 만났던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야. 얼마나 사정없이 우리를 흔들어놓던지! 단번에 완전히 반해버린 거라. 그뒤로 1년도 안 걸려서 우리는 동부지역 세 개 도시에 한청련을 만들었어요. 이후로 거의 10년동안 그야말로 야생마, 천둥벌거숭이가 되어 한봉이 형님과 시간을 함께했지요. 내 생애 가장 뜻깊고 아름다웠던 시절이었노라고, 어느 누구에게나 당당히 자랑할 수 있어요. 항상 배고프고 졸리고 힘든 나날이었지만, 정말로 내 인생 최고로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흔히 운동권이라면 '친북좌파' '용공세력' 으로 보수집단의 공격을 받곤 하는데, 윤한봉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책을 읽으며 놀라웠던 점은 임수경을 평양축전에 참가시키는 데에 전대협은 선발해 보내는 역할을 했을 뿐, 모든 것이 처음부터 윤한봉의 철저한 계획과 세밀한 지도 아래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 때 세계 각국에서 온 300여명의 청년들이 백두산에서 판문점까지 '국제평화대행진'을 했는데, 임수경의 방북에 대한 보도에 가려져 윤한봉 재미 활동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국제평화대행진'은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 행사를 계획했다니 윤한봉을 친북이자 공산주의자로 오해하기가 쉬운데, 이 행사는 윤한봉이 어느 정부의 지시나 지원없이 민간 차원에서 자비로 치른 최초의 통일 행사였고 그는 행사 내내 북의 개입이 없이 민간단체인 국제준비위원회 단독으로 주최해야한다고 맞섰다고 한다. 이처럼 한청련은 남북 어느쪽의 이념에도 편중되지 않는 통일운동이라는 기조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윤한봉은 주범 32명 중 자기만 극심한 반공주의자라고 고백했다. 윤한봉은 전남대 유인물에 "북괴가 호시탐탐 남침의 기회를 노리고 있는데 정부가 독재로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북괴를 의식해서라도 민주정치를 해야한다"는 문장을 넣을 정도로 반공의식이 강했다. 석방을 앞두고 있을 때 엉뚱한 일이 터졌다. 교도소 보안과로 호출하더니 전향서를 쓰라고 했다.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싶었다. 민청학련 사건의 구속사유 중에 국가보안법이 들어 있는데 지난번 형집행정지로 석방될 때 전향서를 제출하지 않고 나왔으니 이제라도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윤한봉은 펄쩍 뛰었다. 윤한봉의 국내 활동이나 미주 활동을 들여다보면 그는 이념을 위해 투쟁한 것이 아니라 약자를 위한 사회, 모든 인간이 동등하게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투쟁한 박애주의자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광주 시민으로 하여금 도덕적 항쟁이 가능하게 한 것은 '대동정신'이라고 주장하며 개인보다는 전체를 생각하는 정신, 만민의 평등을 지향하는 정신, 궁극적으로는 이상적인 사회를 지향하는 진보적인 정신으로서 '대동정신'을 강조했다. 화평한 세상을 향한 그의 메시지를 읽다보니 정신이 깨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현재의 틀 안에서 어느 정도의 성공과 안정을 획득한 기성세대가 된 후로 일상의 목표가 일신의 평화에 맞춰져있었던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며 한 사람의 일생이 사회를 이만큼 바꿔놓을 수 있다는 것에, 이토록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데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지금 배부르고 등따시게 사는 나의 삶에 대해 치열한 반성을 하게 되었다. 그의 사상에 동의하고 말고의 문제를 떠나서 한 인물의 불타는 정의감과 열정, 행동하는 자세가 무력감에 빠져있는 나를 일깨워준 것만은 분명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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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한봉. 5.18 민주화 운동 마지막 수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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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37년전 광주에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많은 젊은이들이 죽어가야했는지... 그 날과 관련한 책을 볼 때마다 여전히 드는 의문들... 5·18 민주화 운동으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내가 기억하는 인물 중 한 명은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켰던 들불 야학의 선생님 '윤상원' 열사이다. 처음으로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한 관련 인물로 '윤상원'열사에 관한 평전을 읽었다. '윤한봉' 그저 '윤상원 평전'에 나온 몇 줄로 기억할 뿐이었다. 윤상원과 관련된 책을 읽을 때도 생각했던 것이지만 자신의 부와 명예를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민주화의 열망이 강했던 그들에게 오늘날의 모습은 어떻게 비쳐질지...
투병중 2007년 죽음을 맞은 윤한봉. 그의 죽음 10주기에 맞추어 창비에서 '『윤한봉』-5·18 민주화 운동 마지막 수배자'가 나왔다. 5월 18일 아침 전남대의 학생과 계엄군의 충돌이 있었다. 온종일 돌아다니며 시위를 했던 윤한봉. 형사들에게 얼굴이 알려져 광주를 떠나라는 주의 사람들의 말을 듣고 5월 19일 새벽 서울행 호남선 열차를 탄다. 서울로 향한 이유는 다른 지역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고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더. 그러나 기차가 지난 도시들 분위기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무작정 서울로 올라갈 게 아니라 일단 중부지역의 요충인 대전의 분위기를 살펴 보고 판단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다른 도시가 조용하다면 다시 광주로 돌아가 죽어도 그곳에서 죽기로 마음 먹었다. 대전역에서 내렸다. - 『윤한봉』, 23쪽 다시 광주로 와 기회를 노리던 윤한봉. 그러나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고,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볼 수 있었기에 결국 그는 망명을 권유받고 수락한다. 그렇게 시작된 그의 도피생활은 10년이 넘도록 지속된다. 밀항선을 타고 미국으로 가서 그곳에서 망명을 신청했으나 계속 보류가 되는 상황 속에서도 광주 수난자돕기를 결성하고 민족학교 세우는 등 멀리서도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서 노력했다. 1987년 미국에서 정치적 망명을 허락받고 한겨례운동재미동포 연합을 결성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절대 편하게 지내지 않았다. 침대에서 잠을 자지도 않았으며, 수배자임을 잊지 않기 위해 옷도 벗지 않고 허리띠도 풀지 않고 잤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윤한봉이 '통일운동가'라고 알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통일운동가가 아닌 사회적 약자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착각을 하는데 합수 형님은 통일운동가가 아니라니까요. 그분은 소수와 양자를위해서 일하시는 분이에요. 그분은 '우리는 어디를 가더라도 거기에 있는 소수와 약자를 위해서 일을 해야한다, 그래서 만약에 그런 날은 안 오겠지만 만약에 한반도에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미국에서 코리안이 다수가 되고 백인이 소수가 되면 여기서 백인을 위해서 일을 해야 된다'고 했어요. 우리는 죽어서도 얻딜 가든지 소수와 약자를 위해 일해야 한다는 거였거든요. - 『윤한봉』, 319쪽
정말 그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나 보다. 다른 사람을 위해 기꺼이 밀항선도 타고, 밀항선을 타고 도착한 곳에에서 조금이라도 편하게 지낼 수 있었으나 그리 지내지 않았으며, 그곳의 어려운 사람들과 조국의 민주화 운동을 돕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었다. 망명에서 돌아온 뒤에도 그는 책도 썼으며, 박정희 기념관 건립 반대 투쟁, 들불 열사 기념 사업회 등의 많은 일을 한다. 투병 생활을 하면서도 반핵 활동 등을 했다. 윤한봉은 자신보다는 타인을 위해 평생 살아간 인물이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누구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또한 소수와 약자를 위해 아니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살았던 윤한봉. 지금 그가 이루려한 이 땅의 민주화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 그의 희생이 어느 때보다 빛나고 있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윤한봉의 삶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할 시점인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