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말 잘들 보내셨나요? 갑자기 추워진 날씨도 오늘을 기점으로 풀린다 하니 이번 한 주 기분 좋게 출발해 볼까요? 명실상부 봄이 왔으니 미뤄뒀던 책도 좀 읽구요^^ 주말에 《한비자韓非子》를 읽었습니다. 지난 번에 《물고기의 즐거움》을 읽고 꼭 한 번 한비자를 읽고 싶었는데, 이제서야 읽었습니다. 밀린 숙제를 한 듯 후련합니다. 이 책은 적잖은 고전을 번역하여 그 역량을 인정을 받고 있는 김원중 교수가 번역하였습니다. 읽기에 막힘이 없고 매끄러우면서 고서古書의 맛도 느낄 수 있습니다. 적지 않은 분량이지만 고전을 번역한 것이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을만큼 읽기에 부담이 없습니다. 전체 32편 각 편 첫 부분에 간략한 해설이 미리 있어 본문을 읽는 데 더욱 수월했습니다. 한비韓非는 전국시대 韓나라 명문 귀족의 후예입니다. 원래 말더듬이였으나 논리적인 문장을 갈고 닦는 데 힘써 매우 탁월한 문장력의 소유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사李斯와 함께 순자荀子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습니다. 이사李斯는 진나라의 최대 공신이었지만 늘 자신의 능력이 한비만 못하다는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후에 진시황이 한비자에 깊이 감동하여 그를 진나라로 데려오려 했으나 동문수학한 이사의 모함으로 감옥에서 사약을 받고 죽게 됩니다. 한비는 이 책 〈말하기의 어려움 - 난언(難言)〉과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어려움 - 세난(設難)〉등 여러 편에서 신하가 군주에게 유세하기 어렵다고 말하며 진언하는 방법을 자세하게 말하고 있지만, 정작 자신은 죽음의 화를 면하지 못했습니다. 역자는 서문에서 이를 두고 한비를 '비운의 주인공'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사는 어떻게 됐을까요? 신영복 선생의 《강의》 〈한비자〉편에 보면, 이사 역시 기원전 208년 7월 함양의 거리에서 자신이 제정한 법령에 의해 허리를 잘리는 형벌을 받고 죽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표방한 법가의 공명함과 공평함을 스스로 지키지 못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동양의 마키아벨리라고까지 불리는 한비는 스스로 권모술수의 희생자가 되었고, 이사 역시 간신 조고의 사악한 말에 부화뇌동하여 정도를 배반한 까닭에 자신이 만든 법의 심판으로 죽음을 당했으니, 전국시대의 그 혼탁한 모습이 가히 상상이 되고도 남습니다. 이 책 전반에 걸쳐 한비는 '강력한' 중앙집권 전제군주로서의 통치자를 염원합니다. 제가 '강력한'을 강조한 것은, 책 전체를 통해 흐트러짐 없이 일관되게 강력한 군주제를 옹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비가 말하는 법치의 핵심은 다름 아닌 통치자로서의 군주만을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의 법가사상 비판의 핵심입니다. 한비는 〈내부를 방비하라 - 비내(備內)〉편에서 '군주의 재난은 사람을 믿는 데서 비롯된다'고 말합니다. 부부도 골육의 정은 없으며, 아내처럼 가까운 사람과 혈육의 친분이 있는 자식도 신뢰할 수 없는데 그밖의 사람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한비의 글을 읽자면 이처럼 한마디로 정이 뚝! 떨어지는 부분이 한두 곳이 아닙니다. 한비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수레를 만드는 사람은 사람들이 부귀해지기를 바라고 관을 짜는 사람은 사람이 요절하기를 바라는데, 이는 수레를 만드는 이들이 어질고 관을 짜는 이들이 악해서가 아니라, 수레를 만드는 사람은 사람이 부유해지지 않으면 수레가 팔리지 않고, 관을 짜는 사람은 사람이 죽어야 이득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외에도 한비자 전반에 걸쳐 사람들은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사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재앙은 사랑하는 자에게 있다'고까지 말합니다. 막말로 하자면,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다는 것이고, 군주는 오로지 공명정대하고 신상필벌이 분명한 '법'만으로 세상을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던가요. '오로지 군주만'을 위한 한비의 사상은 결국에는 가장 민본적인 통치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약육강식의 전국시대를 감안한다면 다음과 같은 한비의 말이야말로 가장 개혁적이며 이상적인 방법이 아니었을까요. "요역이 많으면 백성들이 고통스럽고, 백성들이 고통스러우면 벼슬아치의 권세가 일어나며, 권세가 일어나면 백성의 부역을 면제해 주고 받는 대가가 커진다. 그 대가가 커지면 벼슬아치들은 부유해진다. 백성들을 괴롭혀 벼슬아치들을 부유하게 하고, 권세를 일어나게 해서 신하들에게 빌려주는 것, 이것은 천하의 이익을 위한 장기적인 방안이 아니다. 그래서 요역이 적으면 백성이 편안하고 백성이 편안하면 벼슬아치들이 권한을 강화하지 못하며, 벼슬아치들이 권한을 강화하지 못하면 권세는 사라지고, 권세가 사라지면 덕은 군주에게 돌아간다" (p.141) 책을 덮고 신영복 선생의 《강의》에서 〈한비자〉편을 다시 읽어봤습니다. 아는만큼 보인다고, 예전에 처음 《강의》를 읽을 때와는 그 느낌이 사뭇 달랐습니다. 이미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현대의 법가사상 비판의 핵심은 법가사상이 오로지 '군주를 위한' 사상이며, 여기에 하나를 더하자면 법가가 추구한 부국강병의 방책에 민부民富의 기초가 없고 부강富强의 물적 토대가 허약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영복 선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법가 비판에 대하여 우리는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 왜냐하면 어떠한 사상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전체 역사의 도도한 흐름을 구성하는 일부분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진한秦漢을 하나의 역사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진秦과 법가는 전국시대의 혼란을 통일하는 과정으로서, 그리고 한漢과 유가는 중앙집권적 전제군주국의 통치 과정으로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였지요. 진과 한은 각각 창업創業과 수성守城이라는 그 역사적 임무가 다르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어떠한 사상체계라 하더라도 그것을 전체 과정의 일환으로 이해하고 그 과정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묻고, 결코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우리가 법가 사상에서 적극적 의미로 읽어야 하는 것은 개혁성과 법치주의입니다. (...) 미래사관과 변화사관이 그것입니다. (...) 이것은 그 자체로 대단한 발전입니다. 군주의 자의적 폭력에 대한 제도적 규제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것은 사회적 예측 가능성이기도 합니다." 한비자의 의의에 대해 이보다 더 잘 설명할 길이 없어 신영복 선생의 말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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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비자
김원중 옮김
현암사
오랜만에 고전을 읽었다. 그동안 다른 일들도 많았고, 한번 읽기 시작하면 좀 긴 호흡을 가지고 읽어야 하는 책이라 조금씩 조금씩 읽다보니 시간이 길어졌다.
그동안 법가에 대해서는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역사를 배울
때 법가 사상에 기반했던 진시황과 이사의 경우, 분서갱유 같은 무서운 일을 벌이기도 했고, 엄격한 법을 적용하는 과정에서 잔혹한 부분이 있었다는 식의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그동안 ‘법가사상’이라는 것에 대해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한비는 다른 어떤 것이
아닌 명확한 법과 원칙에 근거해 운영되는 사회를 꿈꿨다는 것이다.
한비는 “뛰어난 목수는 눈대중으로도 먹줄을 사용한 것처럼 맞출 수
있지만 먼저 자와 컴퍼스로 기준을 삼는다.”고 주장한다. 나무가
굽었다고 해서 같이 휘어지는 것이 아닌, 언제나 직선을 유지하는 먹줄처럼 신분의 고하나 출신의 귀천에
연연하지 않고 공정하게 판단할 수 있는 법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명확한 법과 원칙에 근거한다면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도 논쟁할 수 없으며 용맹스런 사람도 감히 다투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잘 다스려지는 세상이 오면 공적이 많은 자가 높은 지위에 오르고,
끝까지 힘쓴 자가 후한 상을 받으며, 정성을 다한 자가 명예를 날리게 된다. 이런 사상은 현대 사회에 와서야 적용된 생각이니, 진보적인 주장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이런 생각을 귀족들이 득세하던 전국시대라는 시대 상황을 생각할 때 얼마나 용감한
주장이었는지를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이렇게 미래 지향적이고 진보적인
사상을 펼친 한비가 왜 잔혹하게 느껴졌던 것일까
그것은 한비가 사람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이 매우 냉정하고 비관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게 사람은 믿지 못할 존재이며,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이다. 뱀장어가 징그럽고 누에가 이상해도 사람들은 이익이 걸려 있으면 그런 것들을 다 잊어버리고 뱀장어와 누에를 잡는다. 아무리 강도라 할지라도 깊은 계곡까지 달려가서 생명을 내놓고 금을 주우려 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사람은 조금만 편하게 지내게 되면 더 편한고 좋은 것을 찾게 되고, 이는 결국 나라를 망하게 하는 길로 가게 된다. 왕과 신하의 관계도
신뢰와 의로써 맺어진 관계가 아닌, 그저 서로의 이익을 위해 공생하고 있는 관계일 뿐이다. 그래서 신하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왕에게 충성하는 것일 뿐이므로 왕의 입장에서는 그들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해서는
안되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쉽게 드러내어 신하들이 이를 이용해 왕을 흔드는 것을 막아야 한다. 이런 생각이 밑바닥에 깔린 세상이니 그의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사회는 깨끗하고 올바르게 보일지라도 사회가 냉정하고, 정이 없고, 계약과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이성적인 인간들만 존재하는
사회로 느껴질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법가 사상이 잔혹하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나 법이라는 것이 원래 그런 것이 아닐까? 예를 들어 ‘도둑질 하면 사형’이라는 원칙 앞에서 이 사람이 왜 도둑질을 하게
되었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런 것까지 생각하면서 예외를 두면 원칙은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 법은 모르고 법을 어긴 자,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법을 어길 수 밖에 없는 자들에게 매우 잔혹한 결과를 내리기도 한다. 그래서 이런 사회는 무엇보다
법과 원칙이 공정하고 명확해야 한다는 전제를 갖는다. 그렇지 않으면 법과 원칙은 모든 사람이 동의, 인정하는 권위를 찾지 못하는, 그저 권력을 유지하는데 효과적으로
이용되는 수단으로 전락해버릴 지도 모른다. 그래서 법가의 세계에서는 무엇보다 법 자체의 공정성과 법을
이용하는 이들의 양심적 운영이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법은 그 어던 사상이 지배하는 사회보다
훨씬더 무섭고 잔인한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렇게 냉정한 사상을 설파하는 한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을 읽다보면 그에 대한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한비가 이런 생각을 품에 안고 세상에 한 획을 그어보려
했지만 제대로 인정받지도 못했고 (그는 말더듬는 장애가 있었다) 동문인
이사에게 죽임을 맞이하는 지경에 이르는 불행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마치 《군주론》을 써서 세상의
권세있는 자들에게 인정받아보려 했던 마키아 밸리처럼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해서 자신을 알아봐주는 사람을 원했던 한비, 그런 그의 마음이 느껴지는 부분을 책을 읽으면서 종종 만나게 된다. 그
중 인상깊었던 부분은 이 부분이다.
“무릇
재능이 있어도 권세와 지위가 없다면 현명하더라도 어리석은 자를 제어할 수 없다. 그래서 한 자밖에 안되는
나무라도 높은 산 위에 서 있으면 천 길의 계곡을 내려다볼 수 있는데, 그것은 나무가 길기 때문이 아니라
서 있는 위치가 높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일까? 그는 공자마저도 결국 권세에 복종한
것이 아니냐는 도발적인 주장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권세는
진실로 사람을 쉽게 복종시킨다. 그래서 공자는 오히려 신하가 되고, 애공은
도리어 군주가 된 것이다. 공자는 애공의 의에 감화된 것이 아니라 그의 권세에 복종한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라 중간 중간에도 그는 지혜있는 자가 권세가 없어 인정받지 못한다는 언급을 하는데, 그런 내용을 접할 때마다 그가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을 울분이 느껴진다. 결국, 이렇게 감탄스러울정도로 미래지향적이고 혁신적인 사상을 이끌어낸 그도 당시 존재했던 수많은 유세가들 중의 하나로, 그들과 경쟁해서 자신을 알아봐주는 리더를 만나야 했던 ‘을’의 존재였다. 그리고 그런 그의 삶의 모습은 우리 역시도 비슷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과 함께 인정받지 못했던, 너무 늦게 인정받았던 그의 모습에 우리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게 되고, 그것은 그에 대한 연민의 감정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한비의 사상은 아직도
완성되지 못했다.
그는 인간의 본성을 날카롭게 바라보고 있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법과 원칙’이라는 매우 혁신적인 방법론을 제시했던 뛰어난
사상가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의 그런 웅대한 사상을 품어주고 그것을 펼쳐보지못하고 죽음을 맞이한
비운의 사상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후 사회는 발전했고, 요즘같이
법을 기반으로 움직이는 사회 시스템만을 보게 되면, 마치 그가 생각했던 사회가 이루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 수도 있다.
만약 그가 지금 세상에 살아서 자신의 뜻이 나름 기반이 되어 만들어져 있는 사회를 본다면 만족스러울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렇지는 않을듯싶다. 아무리 법과 원칙이 있어도
그것은 명쾌하게 딱부러진 결론을 내릴 수 없는 한계가 있고, 그 경계에서 다른 요소들이 개입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 일들이 벌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민초들은 열심히 촛불을 켜고 밥을 굶지만 그런 모든 행동이
권력의 남용을 막지는 못한다. 국가의 잘못이 일반 개인에게 뒤집어 씌워지고, 공정하고 투명하지 않은 상벌체계와 인사체계로 인해 국민의 신뢰가 바닥을 치고 있는 요즘과 같은 상황이면, 더더욱 그렇다. 한비가 화두를 던져 놓은지 수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아직 그의 사상은 완성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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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자의 문첸믄 한문도 이렇게 논리적이고 명료하게 쓸 수 있다는 것을 과시하는 듯하게 애매모호하지 않게 쓰여져 있다. 논어나 장자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내용도 법치의 확립이란 분명한 정치적 목적이 있고 독자(왕)가 분명하기 때문에 애매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번역도 그렇게 까다롭지 않으며 원문과 대조하며 읽을 필요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상당수의 한비자 번역이 실제 원문과 대조하면서 번역문을 달아 놓는 식으로 되어 있지 않고 번역문만 제시한다.
이책 역시 원문을 제시하지 않고 번역문으로만 엮어져 있다. 번역도 무난하다. 몇군데 오자가 있고 문맥이 이상한 곳이 있기는 하지만 한문번역에선 나름 이름이 있는 역자가 번역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잘된 번역이다. 그리고 요즘 감각에 맞게 상당한 의역을 하고 있는 점도 번역문만으로 통독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번역만 제시하고 있고 원문자체에서 문맥이 이상한 부분은 몇몇 경우를 빼면 그냥 번역만 하고 애매한 부분을 해설하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한비자는 착간과 문헌의 손상으로 뜻이 통하지 않는 부분이 있고 애매한 부분들이 있다. 그러나 역자는 한비자는 오랫동안 읽힌 책이기에 주석서들이 많은데 그런 문헌을 전혀 이용하지 않고 있다. 독자 스스로 알아서 하라는 것이다. 이래선 그냥 번역서일 뿐이다.
그리고 완역이 아니다. 물론 한비자에서 중요한 부분들은 번역이 되어 있지만 55편중 2/3만 번역이 되어 있다. 왜 일부만 번역했는지 이유도 밝히고 잇지 않다.
전체적으로 통독하기는 괜찮게 되어 있다. 그러나 두고 두고 반복해 읽을 가치는 없다. 한길사의 한비자를 권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