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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은 진보의 기관차가 아니라 파국을 정지시키는 것이며, 바로 여기서 측면의 가능성들이 돌발한다.
개인적으로 상당히 매력적인 화두라 생각하는 "저항" 이라는 단어. 프랑스 트로츠키주의자인 다니엘 벤사이드의 글... 그리고 상당히 재미있는 표지.
짧지 않은 출퇴근 길이지만 출퇴근 길에 읽는 것만은로는 너무 아까운 책이군요.
저자 다니엘 벤사이드는 현대를 희망이 없는 시대, 패배감이 만연한 시대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저자에게 "저항"의 목적이자 대상은 바로 현대 자본의 체제지요. 저자는 저항을 출구를 개척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하지만 진보라거나 변혁이라거나 혁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에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견지하고 있습니다. 즉, 저자에게 저항은 앞으로 돌진하는 진보의 기관차가 아니라 파국을 정지 시키는 것이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파국을 정지 시키는 수단으로써의 저항의 모습이 어떤 형태가 되어야 하는지는.. ^^;;;;
저자는 저항의 본질을 보여주는 은유적 수단으로 두더지라는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좀 유머스럽기는 하지만 정말 탁월한 비유라는 생각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4명의 철학 두더지 알튀세, 바디우, 데리다, 네그리의 평가도 제법 읽을만 하답니다. |
| 책을 읽어나가는 동안 약간의 짜증과 경탄이 교차했다. 아무래도 번역의 문제가 아닌, 원문 자체가 가지는 풍부한 은유와 상징, 그것도 해박한 지식에서 비롯한 다양한 인용과 더불어 나타나는 그 화려한 문체, 이런게 소설이라면 그냥 좋겠지만, 철학과 이념분석의 글을 이런식으로 써 놓았으니, 아무래도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가슴 찌릿해지는 문구들도 많았으니깐... (저자는 트로츠키주의자라고 함) 아무래도 이 책의 부제에 대해 설명을 먼저 해야겠다. 옮긴이의 말을 인용하자면, "이 책에서 일관되게 마주치게 되는 '두더지'(두더쥐가 아니라는걸 이제야 알았다 !!!)의 은유는 바로 이런 저항의 주체를 의미한다. 이 은유는 '기관차'의 은유를 대체한다. 선형적이고 동질적인 근대적 시간관에서 혁명이 미래를 향해 의기양양하게 질주하는 진보의 기관차였다면, 채워진 현재시간에서의 혁명은 이제 당대의 흐름을 거슬러 가다가 돌연히 출현하는 두더지의 형상으로 뒤바뀐다. ... 사건의 우발성이란 일체의 인과성을 상실한 기적과 같은 것이 전혀 아니다. 우발성이란 은폐되어 있던 상이한 시간의 질서가 현전하는 시간을 뚫고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아무래도 역자의 문장 역시 좀 현란하다. 책 표지부터 귀여운 두더지의 모습이 그려져있고, 내용 중간중간에, 새로운 장이 시작하는데 짧은 인용구와 함께 두더지는 꾸준히 그려져있다. 맑스와 셰익스피어의 인용구도 있고.... 위의 인용에서 짐작할 수 있겠지만, 책의 내용은 소위 말하는 탈근대 혹은 현대의 시각에서 저항과 혁명을 기획하는 자세에 대한 저자의 에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처음 이 책을 접했을때, 저자가 68시기의 트로츠키주의자의 지도격이었다고 해서, 뭔가 개인경험을 중심으로 서술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채 읽기도 전에, 유럽의 근대 운동에 대해서 이 책을 참고할 수 있겠다고도 추천하기도 했고. 하지만, 전반적으로 철학적 사색과 분석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럼 무엇에 대한 사색이냐? 물론 저항에 대한 것... 저자는 리좀과 노마드(유목민)로 대표되는 은유의 틀에 대항할만한 자신의 메타포로 두더지를 찾아내려는 듯하다. 그 과정으로 알튀세르와 바디우, 네그리와 데리다를 거론하고 있다. 이중에서 알튀세르에 대한 언급의 내용이 나머지 셋에 맞먹을 정도로 많다. "루이 알튀세르와 마주침의 신비"라고 제목이 붙어 있는 장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여전히 언급될 수 있는 주체란 더 이상 역사의주체가 아니라, 역사 안에서의[역사 안에서 구성되는] 주체이다. 따라서 그 단어를 포기하고, 심리학적 함축을 덜 갖는 행위자 혹은 담지자라는 개념을 택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1968년('맑스와 헤겔의 관계에 대하여')과 1973년('헤겔 앞에서의 레닌')의 글에서 벼려져 나온 "주체도 목적도 없는 과정(proces)"이라는 개념은 기원도 최후의 심판도 없는 세속적 역사 개념과 긴밀히 결합된 반면 과정processus이라는 개념에는 '동력'이나 동학, 그러나 지향성은 없는 동학이 있는데, 그것을 바로 계급투쟁의 동학이다." 음... 매우 난해하다. 하지만 한마디로 전성기때 알튀세르의 성향이라고 할 수 있을, 부정적으로 말해서 '혁명에 대한 과학의 교의'를 서술하는 내용이라 하겠다. 하지만, 이런 입장은 지금에 와서, 역사를 경험한 다양한 주체들, 그러니까 혁명을 꿈꾸는 두더지들에게 적용될 수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알튀세르 자신의 개종/해명을 언급하면서, 저자는 다음과 같은 분석을 제시한다. "'마주침의 유물론'에 대한 글들은 그의 작업 내내 거의 억압되어온 어떤 흐릿한 문제설정을 체계화하는 동시에, 한 끈질긴 모순을 매듭짓는 것처럼 보인다. 알튀세르는 더 이상 역사와 사건 간의 모순적 긴장을 잘 감당해내지 못한 듯이 보인다. ... 알튀세르의 펜 아래에서 즉각적으로 떠오르게 되는 공식에 따르자면, '클리나멘의 기적'과 같은 순수한 우발성에서 분출할 위험을 안게 되기 때문이다. ..." 왜 이렇게 됬을까? 여러 학자들을 논하기 전에 저자는 유토피아주의를 부정하고, 새로운 정치적 메시아주의의 가능성을 논한다. 마라노라는 유태인의 한 분파를 언급하면서, 왜 두더지적 성향이 지금에 있어서 혁명을 가능하도록 기획하고 대비할 수 있는지를 언급하면서... "벤야민이 부여한 바 파국을 중지시키고 과거와의 새로운 관계를 창조하는 일을 목표로 하는 그런 '정치적 메시아주의', 이제 "정치적 방식으로, 정치적 범주들을 가지고" 접근하기를 중시하는 그런 '정치적 메시아주의' 말이다. 이처럼 메시아주의가 메시아적인 것으로 변신함으로써 특별한 정치적 시간성이 출현한다. 즉, 현재가 더 이상 과거에 의해 규정되지도, 미리 설정된 목표를 향한 방향성을 갖지도 않는 정치적 시간성이 출현하는 것이다. 가능성의 생성과 소멸은 바로 이 정치적 시간성이 전략적으로 분기되는 과정에서 매 순간마다 결정된다." 이야기를 갑자기 바꾸어보면, 저자는 하트와 네그리의 '제국'을 평하기도 한다. 일면 긍정, 그리고 일면 부정적인 입장으로. 그냥 개개인의 집합, 거기에 뭔가 무형의 유령이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대중에 의한 전복를 기대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유령은 데리다가 말을 많이 하더군) 아주 고전적으로 표현하자면, 유연하고도 성실한 집단과 운동을 상정하는 것이라고도 하겠다. (어째, IS의 끈질김이 연상되기도 한다) 메시아주의를 '메시아'의 존재를 중심으로 생각하면 안될 것 같다. 메시아를 준비하는 종족의 자세라고 봐야 옳을 것 같다. 약간 다른 맥락에서, 그러면 왜 이리 복잡해졌나? 선형적인 기관차가 아니게 되었나? 뭐, 그건 '이미 그렇게 되어 버린 현실'이라고 인정해야 할 지 모르겠다. 당과 이념이 투명해지기 어려운 시점... 바디우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봉합이란 사유 전체를 그 중 하나의 산출 공정에 맡겨버림으로써, 이런 진리 공정들 간의 지적 이행과 순환의 체계에 필요한 자유로운 작동이 제한되거나 봉쇄되는 상황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서, 과학이 그 자체로 당대의 진리들의 와성된 체계를 구성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실증주의의 과학주의적 봉합이다. 이렇게 되면 다른 것들의 지위 역시 바뀌게 된다. 즉, 정치는 사건적 지위가 박탈되면서 자유-의회주의적 체제의 실용적 방어로 전락한다." 그래, 사건... 사건적 지위라고 하는게 중요하다. 바디우에게도, 그리고 다른 이론가들에게도. 사건이 아닌 (이렇게 말하면 객관적일지 모르겠지만) 한 사태를 정치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그냥 화석화된 저널의 기사식으로 바라보는 것, 그게 보편적일 것이라고 상정하는 것, 그런 경향의 고착화... 결국은 강제봉합. 따져서 생각해보면 현대에는 그런게 너무 많다. 그런게 너무 많다고 진단하고 있는 소위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논리 자체도 이미 봉합되어 버렸다고까지 말할 수 있겠다. 바디우에 대해서 몇번 읽어본적이 있다. '철학을 위한 선언'이라는 책 제목이 기억에 남는데...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항하는 투사적인 이미지가 어렴풋이 남아있다. 그의 말을 다시 인용하자면 "유일한 정치적 물음이란 이런 것이다. 즉, 우리는 이 선언에 대한 전투적 충실성속에서 이 원리[평등의 원리]의 이름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런 의미에서 정치적 동의어는 계획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명령들로 예시되는 '규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각 개체는 하나로 간주된다', '병자들은 어떤 조건에도 불문하고 최상의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 '아동은 성인과 동등하다', '여기 있는 자가 여기 출신이다' 같은 명령들처럼. 이 준칙들은 현실 정치의 무원칙한 타협에 맞서, 그리고 순전히 적절한 상황만을 고려하는 참작에 맞서 방향을 정하도록 교의 형식의 종교적 명령으로 원칙을 제공한다. ..." 충실성... 사건에 대한 정치적 충실성. 다른 부분은 미약하지만, 너무 관념적인 알튀세르나 네그리, 데리다보다 우직한 매력이 있다. 그러다 보니... 문제는 국가에 대한 입장정리였지만 말이다... 쩝~ 전반적으로 꽤 난해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폐부를 찌르는듯한 인상들을 남겼다. 과연 우리사회, 이 사회를 어떻게 분석할 것이고 어디로 변화시키도록 할 것인가? 그럴 의지를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그런 복잡한 생각에서 주로 생각보다는 인용을 많이하게된다. 서문에 나왔던 인상깊었던 문구를 마지막으로 인용해본다. "어둠의 심장부에서 벵자맹 퐁단은 묻는다. "진리는 어느 순간 부활할 수 있는가? 왜 부활해야 하는가?" 언제인가? 이는 아무도 모른다. 단 하나 확실한 건 진리가 "현실적인 것과 법적인 것 사이"의 틈새에 거주한다는 사실이다. 누구를 위해서인가? 결코 지정된 상속인이나 타고난 후계자는 없다. 있는 것이라곤 오직 유산뿐이다. 자신을 창조해줄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유산, 자신의 요구를 실천해줄 수 있는 자들의 기다림 속에 존재하는 유산. 에드워드 톰슨에 따르면, 패배자들을 "후손의 무한한 오만"에서 구해낼 수 있는 자들에게 약속된 유산만이 있다. 왜냐하면 "유산은 물려받는 것, 그리하여 은행에 예치해두는 재산이나 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