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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분노사회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저절로 분노하게 되니 말이다. 하지만 분노에 대해서 그동안 억눌러야 할 감정으로만 생각했고 더 이상의 사색을 하지는 않았다. 또한 분노는 현대인만의 감정이 아니다. 이 책은 분노를 통한 역사의 재해석을 다룬 책이다. 유럽 철학 에세이 베스트셀러라는 점도 이 책에 대한 궁금증을 더했다. 이 책에서는 '역사는 분노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표지에 있는 글인 '기억하라, 분노하라, 행동하라'라는 말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것일테다. 이 책《분노는 세상을 어떻게 지배했는가》를 읽으며 역사 속 분노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보낸다.
이 책의 저자는 페터 슬로터다이크. 1947년 출생, 칼스루에 조형대학에서 미학 및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비엔나에서도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페터 슬로터다이크의 베스트셀러 철학 에세이《분노는 세상을 어떻게 지배했는가》는 분노의 기나긴 역사를 통해 오늘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 책을 읽고 나면 현재를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될 것이다. _에릭 슈미터, <더 슈피겔>
이 책은 서문 '분노의 시작'으로 시작된다. 1부 '분노의 경제학', 2부 '분노의 신: 형이상학적 분노 은행의 발견', 3부 '티모스적 혁명: 공산주의적 분노의 세계은행', 4부 '중심에서 분리된 분노'로 구성된다. 이 책에서는 분노를 통해 역사를 새롭게 고찰하고 있다. 분노가 어떻게 역사를 이끌어왔으며, 시대의 전환기에 어떤 힘을 발휘했는지에 대해 살펴볼 수 있다. 또한 나의 분노를 권력자들은 어떻게 이용해왔는지에 대해서도 알게 될 것이다.
《일리아드》의 첫머리는 '분노'로 시작한다. 마치 어떤 반대도 허용하지 않는 엄숙한 운명처럼 말이다. '분노'라는 명사는 목적격으로 문장에 잘 들어맞게 사용되었다. "분노를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루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이렇게 분노라는 단어로 시작하면서 최고조에 달한 비극을 분명하고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함이다. 영웅 서사시의 마술적인 전주 부분을 분노로 장식한 것은 청중들에게 무엇을 암시하기 위함일까? 시인은 분노라는 언어를 어떻게 쓰고 있는가? 고대 서구 세계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게 한 동력인 분노를 시인은 어떤 방식으로 전달하려 하는가? 혹시 평화로운 백성들을 소름끼치는 사건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폭력적인 형태로 묘사하는 것일까? 우리는 가장 끔찍하고 인간적인 이 분노라는 감정을 누그러뜨리거나 억제해야 할까? 분노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거나 다른 사람을 통해 나타날 때면 얼른 피해버리는 것이 상책일까? 아니면 분노라는 감정을 보다 중화되고 성숙한 성찰로 바꾸어야만 하는 것일까? 이것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질문이다. (10쪽) 최초에 분노가 있었다. 호머의 일리아드의 첫 문장은 분노로 시작한다. 책날개에 나오는 이 두 문장에 흥미를 가지고 본문으로 들어간다. 이미 서문에서부터 분노에 대한 질문이 쏟아지며, 독자 또한 함께 고민하게 된다.
'분노'라는 키워드로 역사의 변화를 고찰한다는 것 자체가 흥미롭게 다가왔다.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영웅들의 분노, 대중을 선동하는 집단적 맹신의 분노, 유일신교의 지속적인 지배를 위한 신의 분노, 근대 전체주의의 조직적으로 활용한 분노, 현대 자본주의의 경제적 이익으로서의 분노, 그리고 이슬람의 복수를 위한 분노의 표출까지 역사의 중심에는 분노가 있었다는 사실. 이 책을 통해 하나씩 차근차근 살펴보며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킨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분노가 치민다. 분노라는 감정, 어찌보면 자연스레 흘러가는 감정의 조각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나니 분노에 대해 보다 폭넓게 바라보게 된다. 과거부터 현재로 이어지는 역사 속에서 분노라는 키워드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색다른 시도였다. 개인의 감정을 넘어 인류의 다양한 색깔을 볼 수 있는 것이 분노라는 점에서 이 책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의 생각을 뛰어넘는 새로운 시각을 선사해주었다는 점에서 이 책의 시도는 특별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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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인간의 분노 … 지옥과 혁명으로 나타나 <분노는 세상을 어떻게 지배했는가>(이야기가있는집, 2017.5) 국내에 꽤 알려진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가 쓴 철학 에세이 『분노는 어떻게 세상을 지배하는가』가 번역돼 나왔다. 슬로터다이크는 2004년 방한해 의사소통행위이론의 하버마스를 맹렬히 비판했다. 철학자 슬로터다이크는 이번 에세이에서 ‘분노’라는 키워드를 통해 역사를 관통하는 힘이 무엇인지 파헤치고자 했다.
슬로터다이크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분노는 단지 분노만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다. 분노는 영원과 지복을 위한 종교적 의미와 부르주아에 대한 복수의 사회철학적 의미를 담고 있다. 지옥은 하나님의 분노와 혁명은 분노의 실천과 연결된다. 인간 사회는 제한된 자원으로 인해 누군가는 상처를 입고 누군가는 복을 누릴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약육강식의 인간세계에서 분노는 정신적 허탈감을 채울 수 있는 단 하나의 묘약이다. 하지만 슬로터다이크가 보기에 현대의 분노는 응집되지 못 하고 분산돼 있다. 그래서 분노가 분노답게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 분노가 분노답게 작동하기 위해서 인간은 ‘죄’를 범하는 존재다. 죄가 있기 때문에 인간은 결함을 갖고 있는 존재이다. 이 때문에 슬로터다이크의 표현을 따르자면, ‘치욕의 윤리학’이 번성한다. 책의 제2부 제목은 ‘분노의 신’이다. 죄를 범하는 인간을 하나님은 벌하는 것이다. 신의 분노는 영복 아니면 지옥을 가리킨다. 악마가 있는 곳은 죄의 기록 보관소 역할을 한다. 신의 반대말이라고 할 수 있는 악마는 분노와 복수의 충동을 지속적으로 반복하기 위해 지옥으로 인간을 데려간다. 슬로터다이크는 “기독교인들은 마지막 분노의 날을 완벽하게 구경하며 즐기기 위해 스스로의 분노를 억제하도록 학습되었다”며 “그러므로 그들이 상상할 수 있는 하느님의 분노는 언제나 상상 그 이상이었다”고 적었다. 종교만 분노를 활용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철학자인 마르크스와 수많은 혁명가들 역시 분노를 적절히 활용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모든 역사가 분노에 의한 투쟁의 역사라고 간주했다. 이미 1848년에 말이다. 지성은 분노를 필요로 하고, 분노는 지성을 요구한다. 분노라는 재료는 혁명이라는 열차가 움직이도록 한다. ‘공산’주의자들은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공산주의자들은 사유재산을 몰수하려는 복수심의 분노를 표출하고자 했다. 공산주의의 이념을 실천하는 것보다 분노의 표출이 더 중요했다고 슬로터다이크는 분석한다. 혁명가들뿐만이 아니다. 현대사회에서 역시 분노는 좋은 치료제이다. 합리적이고 완벽한 것처럼 보이는 정치적·법적 문명이라는 것은 모순투성이다. 이때 개인의 복수가 등장한다. 신의 입장에선 ‘복수는 나의 것’이다. 하지만 현대인의 입장에선 복수 낭만주의가 필요하다. 애써 구축한 규칙과 법이 소용없다면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은 개인 차원의 분노일 수밖에 없다. 특히 현대사회는 경쟁과 패배의 쳇바퀴가 계속해서 돌아간다. 이때 패배자들의 분노는 극에 달한다. 따라서 분노라는 묘약은 질병에 대한 치료제이다. 슬로터다이크는 “분노에는 기본적인 감정을 받아들이는 즐거움이라는 요소도 포함되어 있다”고 적었다. 분노가 베푸는 것이다. 분노에게 고마워해야 할까. 혁명과 지옥과 묘약으로서의 분노 우리는 분노의 속성에 대해 좀 더 깊이 고민할 필요가 있다. 『역사의 종언』으로 유명한 후쿠야마의 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후쿠야마는 자유주의의 승리 후 세계의 시민들은 항상 자유롭게 흘러 다니는 불만족의 물결에 젖을 수밖에 없다고 이해했다. 그 이유는 인간이 티모스적인 불안의 에너지에 시달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티모스라는 것은 무엇일까. 플라톤은 티모스를 해석하기를, 자기 자신에게 분노할 줄 아는 인간의 능력(자신에 대한 무례)이라고 보았다. 티모스의 발현 방법은 첫째, 주체를 완전히 에워싸고 짓누르는 감정인 수치심이라는 형태로 표현된다. 둘째, 자신에 대한 내면적 성찰이라는 형태를 띤 분노에 찬 자기 비난이다. 티모스는 욕망도 아니고, 이성도 아니다. 열정이자 인간이 인간으로서 인정받고 반성하며 살아가게끔 하는 기개이자 용기이다. 책에선 “자신을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만이 자신을 제어할 수 있다”고 나온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분노란 필요한 것으로써 영혼을 충족시키고 용기를 북돋운다고 생각했다. 분노는 지도자가 되어선 안 되고 동지로 작용해야 한다. 분노의 경제학을 찾아가다보면 세상의 모든 것은 ‘주고받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짜란 없다. 죽음마저도 생명을 부여해준 이에게 되돌려주는 채무 갖은 것이다. 슬로터다이크는 이를 ‘분노의 사슬과 변제의 경제학’이라고 표현했다. 슬로터다이크는 분노란 “대인적, 정치적, 문화적 관계에 있어서 상호작용하는 생태계의 기본동력”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서구문명에서 분노가 발현되는 방식은 제4부에서 보듯이 중심으로부터 벗어나 제대로 작동하지 못 하고 있다. 세력은 분산화 하면서 흩어지고 있다. 『분노는 어떻게 세상을 지배하는가』는 전체적으로 글이 매우 격정적이다. 즉, 선언적이다. 또한 2006년에 나온 이 책이 현재 어떤 의미를 가질지 고민해봐야 한다. 아울러, 번역은 조금 매끄럽지 못하고 오탈자가 있다. 그럼에도 ‘분노’에 대한 심리적, 사회철학적, 종교적 분석은 에세이라는 차원을 넘어 심오한 사색을 담고 있다. 이제까지 분노를 이렇게 심도 있게 다루진 못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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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이란 대작을 남겼고,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분노와 시간'이란 작품을 썼다. 출판사 '이야기가 있는 집'에서 펴낸『분노는 세상을 어떻게 지배했는가』 의 원제가 슬로터다이크의 역작인 '분노와 시간'이다. 원서 제목에서 저자의 학술적 야욕이 잘 드러난다. 여기서 분노는 존재론적 차원과 결부된 심리정치적 역량으로 간주된다. 우리는 흔히 분노를 어둠에서 나오는 강렬한 감정, 즉 증오, 공격성, 복수심, 시기와 질투 등 숱한 부정적인 감정들 가운데 가장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마땅히 억제해야 할 감정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저자는 이에 대해 다른 견해를 피력한다. 서구 문명사에서 분노가 한때 신성과 결부된 고귀한 감정이었다는 얘기다. 호머가 살았던 고대 그리스가 그러했다. 전쟁의 미덕과 영웅의 거룩한 죽음은 신성한 분노를 자양분으로 삼았다. 분노는 용기와 더불어 투쟁하는 인간, 즉 전사의 대표적인 감정이다. 무협 영화나 서부극, 스파이 영화를 보면 한결같이 분노가 정의를 집행하는 에너지로 강조되곤 한다. 물론 분노는 침략적인 에너지다. 영웅군사주의를 찬양하는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런 분노를 신성한 세계에서 부여받은 선물로 간주했고, 영웅을 분노의 수호자이자 집행자로 바라보았다. 고대 그리스에서 전쟁과 분노, 그리고 행복이 서로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했었다. 저자는 신, 영웅, 시인의 조합이 분노의 신성한 힘을 널리 방송하는 미디어 네트워크 역할을 했다고 설명한다. "확실한 것은 일리아드의 우주는 모든 것이 메니스(분노)에서 비롯된 괴로움과 행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보다 젊은 축에 드는 오디세이는 메티스(교활함)에서 비롯된 괴로움과 행동에 대한 기록이라는 것이다. 고대의 존재론에 의하면 세계는 그동안 벌어진 전투의 총합이라고 볼 수 있다."(20쪽) 철학자 플라톤은 사람의 영혼이 로고스(이성), 티모스(정열), 에피티모스(욕망)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는데, 분노가 바로 티모스의 영역에 해당한다. 그리스어 티모스(Thymos)는 자아분출의 에너지, 자존심, 패기, 명예욕의 바탕이 되는 힘과 인정받고 싶은 욕구다. 티모스를 국내에서는 흔히 '정열'이나 '열정' 혹은 '기개'나 '용기'로 번역하곤 하는데, 실은 하나의 우리말로 표현하기가 곤란한 복합적인 감정 에너지라 할 수 있다. 분노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인본주의 윤리학과 금욕적 자기 절제와 궤를 같이 한다. 로마 철학자 세네카의 저술인 '화에 대하여'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런 윤리학적 틀을 버리고 역사적 발전과 변화의 틀에서 본다면 분노가 역사적 문화적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거나 변모시키는 추진력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가령 유대교와 기독교 그리고 20세기 전체주의가 바로 분노 에너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케이스였다. 저자는 기독종교의 유일신 문화와 마르크시즘에서 재현된 분노의 형태가 복수 스타일과 금융경제가 접목된 '형이상학적 분노 은행'을 낳았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분노가 가해자에 대한 복수의 형태로 출현하는데, 중요한 것은 분노를 마치 돈처럼 저장해 이를 가장 효과적으로 투자하기 위한 일련의 기획을 교묘하게 집행한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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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보다 더 끓어오를때 분노란 말을 쓰게 되는데요. 그래서인지 "분노"란 말은 우리에게 좋은 어감은 아닙니다. "화"가 가볍고 넓게 퍼져 쉽게 사라질수 있다는 느낌이라면, "분노"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 느낌으로 다가오게 되기에 더 그런데요. 화를 넘어선, 분노라는 감정이 끓기 시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때 어떻게 하려고 했었나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 분노를 가감없이 보였는지, 혹은 조금 더 누르고 다듬어 중화된 느낌으로 표현했었는지 말이죠.
한 개인의 작은 감정인줄 알았던 분노가 역사의 매순간마다 들어있었다고 저자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말하는데요. 일리아드의 첫머리부터 분노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러고보니 영웅들도, 신들도 꽤나 제멋대로의 승질들을 부렸던 걸로 기억되는데요. 그런 이야기에서부터 중세로, 혁명과 전쟁으로 이루어진 국가와 지금으로까지의 많은 사건과 인물들이 등장하는 동안 분노가 어떻게, 어떤 영향을 사람들에게 주고 시대를 만들어갔는지를 보여줍니다. 예전의 분노는 각각의 독자적인 길을 걸었고 신이라는 신성한 힘에 의지하려했다면 지금의 분노는 단체로, 그리고 인간들 스스로 해결하려고 한다는 게 조금씩 달라져가는 건 아닐까 하는데요.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의 종말론이나 단테의 연옥에 관한 이야기, 생각지도 못했던 공산주의와 지금의 이슬람 세력이 가진 적대주의로까지 이야기는 다양한 방향으로 우리의 시선을 돌리며 어떻게 분노란 감정을 조절해야하는지, 그리고 '당하고 있다'는 누군가의 선동에 쉽게 휘둘리지 말아야하는지를 알려줍니다. 역사속에서 수많은 혁명이라는 이름이 분명히 뜨거운 분노로 이글거리는 가슴을 가진 많은 이들에 의해 생겼지만 생각대로 결코 세상을 바꾸지는 못했던 걸, 그리고 이제껏과는 다른 세상을 만들겠다는 수많은 지도자들의 정책에 어이없게 당한 이들의 사건을 보면서 말이죠.
그들의 과거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해주는데요. 어쩌면 지금의 우리들도 뜨거운 분노로 뜨거운 행동만 했었더라면 아무것도 못했을까란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그렇게 많은 일들이 있었구나 싶은 이야기들이 공동체안에서 감정들을 공유하고 비슷하게 따라가야만 하는 지금의 우리들이 앞으로 분노를 어떻게 표현하고, 어떻게 행동하면 안 되는지를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 되지않을까 합니다.
"모든 뱀파이어는 언젠가는 자기보다 더 힘센 뱀파이어를 마주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332(몽테크리스토백작에게 당한 당글라르를 보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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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는 세상을 어떻게 지배하는가
![]() 유럽의 지적 풍토, 독서열기는
한국과 어떻게 다르길래? <분노는 세상을 어떻게 지배했는가 (원제: Rage and Time: A Psychopolitical
Investigation) > (2017[2006])가
"유럽 철학 에세이 분야 베스트셀러"라 한다. 80여쪽의 서문만 거듭 읽으며 활자의 늪에서 헤매는 우매한 독자로서는 '베스트셀러'가 시사하는
높은 가독률이 부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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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 철학자이자 문화 이론가인 페터 슬로터다이크
(Peter Sloterdijk 1947~ )는 '분노'를 키워드로 서구의 역사를 새롭게 조망한다. 2017년 한국 사회에서 분노는
'분노조절장애'니 하는 개인 차원의 '욱' 수준으로 평가절하되지만, 저자에 따르면 분노야말로 인류 역사에서 발전의 원동력이자 변화를 이끄는 중추
동력이었다. <일리아드 Iliad>의 인용으로 시작하는 <분노는 세상을 어떻게 지배했는가>의 첫 장에서는 영웅 서사시에서
분노를 칭송하는 것이 곧 당대 사람들이 분노를 가치 있게 여겼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하지만 분노가 가진 순수한 힘은 길들여지고, 현대에 이르면서
사람들에게 역으로 '망설임'이 권위이자 미덕으로 내면화되었다고 한다. 페터 슬로터다이크 교수는 이처럼 분노가 개발되고 관리되는 단계는 거의
2000여년 전에 시작, 지속되었다고 한다. 이 과정을 본문에서는 "사육화된 분노(32)"라고 표현하는데 '사육'에 해당하는 원어가
궁금해진다.
'분노의 사육화' 관점에서 보면, 20세기의 폭력은 '분출된 것'이
아니라, 폭력의 대리인들이 자신들의 사업적 기준에 맞추어 장기적 관점을 가지고 대상을 통제하고 관리한 결과 (56), 즉 기획된 폭력이다. 분노는 증오의 문화를 통해 기획된 형태로
구현되는데 (117), 예를 들면 복수가
그러하다. 분노가 은행 형태로 축적되면 하나의
프로젝트로서 역사적 행태로 변모한다 (123). 성숙되지 못한 분노가 지엽적으로 표출되면 도리어 비난을 받는다. 따라서, 분노 자산을 낭비하지
않고 낡은 것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세계 혁명'의 동력이 될 수준으로 축적하려면 기다릴 필요가 있다. 냉정함을 유지하면서 끊임없이 증오와
분노를 불러일으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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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 존재의 티모스적 역동성에 대한 이해, 즉 사회 심리 체계에서
분노에 대한 연구는 현실적으로 차단되었다고 본다. (45) 그러나 21세기 전반부도 대규모의 갈등으로 뒤덮이리라 예측하기에, 우리는 우리 시대의
분노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근본적 반성이라는 어젠다를 붙들고 있어야 한다.(60) 이 작업을 바로 페터 슬로터다이크 교수가 하는 셈이데, 그
스스로는 이 작업을 "전 세계적으로 작동되는 분노은행 건설과 관련된 연구관찰(266)"이라고도 칭한다. 이 작업을 위해 저자는 유럽지성사는
물론, 경제학, 정신분석학, 역사, 인류학, 정치학 등을 넘나들며 자료를 제시하기에, 나같은 무지한 독자는 뇌에 당분이 많이 필요해진다. 하지만
그의 논의가 난해한만큼, 독창적이어서 흥미롭니다. 특히 축적된 분노를 운용할 귀중한 자본으로 해석하는 점이 흥미로운데,
그에 따르면 분노은행은 정당이나 정치 운동, 특히 좌파적 정치 스펙트럼으로 표현된다고 한다. (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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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현대 사회에서는 "전 세계적 관점을 지닌 분노의 수집
장소가 없다(336)"는 점이다. 분노가 고립되고 분산되어 이전 시대처럼 극단적인 형태로
표출되는 단계에는 도달하지 못하리라는 전망이다. 미래 세계에서도 분노는 공산주의의 보편적 집단적 형태로 결집되지
못할 것이다. (418) 안타깝게도, 교활하고 은밀하게 작동하는 신자본주의의 삶의
방식에서는 "분노와 반체제적 에너지"가 결집되기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운동성도, 이론적 구심점도 상실된 상태에서 언론과 TV가 '행복'이라는 환타지로 사람들을 눈 멀게 했으니 분노가
결집될 수가 없다. 급진적 행동주의라는 면에서 공산주의와 유사한 면이 있는 이슬람주의 역시, 세계화된 자본주의 국가
안에서 보편적 반체제 집단의 역할을 할 가능성도 거의 없다. (415) 미래 사회에서 분노가 공산주의의 보편적
집
그렇다고 <분노는 세상을 어떻게 지배했는가>가 분노의
전복력을 부정하는 책은 아니다. 마치는 글에서 페터 슬로터다이크 교수는 그가 희망하는 '세계 문화'를 제시한다. 그것은 "보복의 형이상학과 그 정치적 반향을 적절한 수준의 성찰로서 깨부수는 포스트 일신교적 문화 (421),"
"문화 상호주의와 트랜스 문화적 균형을 갖추고 반권위적인 부드러운 도덕성에 바탕을 둔 실력주의이자, 뚜렷한 규범적 양심과 양도불가능한 개인의
권리에 대한 존중의 문화," "스스로를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인칭 시점에서 건설된 합리성의 문화
(422)"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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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이야기가 있는 집" 측에서 이 책을 주인공이 "분노"인
소설에 비유하며 강력히 권한다. 어려워도 포기말고 공들여 한장 한장 읽다보면 독자가 세상을 보는 시선에 변화를 맞을 것이라고. 절대 동감한다.
꽤 어려운 독해였지만, 희열이 대단하다. 특히 4부 '중심에서 분리된 분노'와 마치는 글인 '적대감을 넘어서'는 읽고 다시 또 읽으며 속뜻을
음미하고 싶어진다. 마지막으로 이렇게나 어려운 철학에세이의 번역을 해준 이덕임 번역자에게 고마움의 인사와 동시에 아쉬움의 말을 남기고 싶다.
'문화 상호주의,'니 '분노의 사육화' 등 용어 중 일부 해설이 필요한 단어는 독자를 위해 언어를 병행 기재해주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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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에 대한 철학적 담론! 유대교와 기독교, 그리고 전체주의는 분노를 어떻게 다루어 왔는지, 오늘날 과격한 테러를 일삼는 극단주의 이슬람의 분노의 본질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겠다 싶어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이 책을 통해 분노가 어떻게 역사 발전과 변화의 중심 동력이 되었는지 배우고 싶었다. 그러나 처음 80페이지에 달하는 긴 서문을 읽으며 좌절했다. 지금까지 어려운 책을 읽을 때, 한번 읽어서 이해가 안 되면 내가 지식이 부족해서 그러려니 하고 마음을 다잡고 다시 한 번 읽으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이 책은 아니다. 읽고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아 다시 읽어도 감도 잡히지 않는다. 난해한 번역에 대해 분노가 생긴다. 어쨌든 오기가 생겨 다시 읽어볼 요량으로 저자의 프로필을 살핀다. 저자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칼스루에 조형대학에서 미학 및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란다. 거기에 적혀있는 문구를 오래 생각해 보았다.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분노를 발전과 변화의 중심 동력이라고 말한다. … 유대교와 기독교 그리고 20세기 전체주의는 분노를 모으고 조직함으로써 경제적으로 활용하고 거대한 이데올로기로 변모시킨 주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심호흡을 하고 다시 책을 펼친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종교, 철학, 정치 집단들이 분노를 사용해 무엇인가 역사의 흐름을 주도했다. <일리아드>의 첫머리도 이렇게 시작한다. “분노를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이 문장에서 어떤 비극적인 엄숙함이 느껴진다. 고대의 영웅들은 자신들을 분노하는 신의 팔다리로 느낀 것이다. 이런 점에서 분노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데 긍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저자는 분노를 ‘티모스’라는 그리스어와 연결시킨다. 티모스(Thymos)는 자아 분출 에너지, 자존심,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 등이다. 그렇다면 이런 문구가 성립할 것이다. ‘나는 불만을 느끼며 분노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기독교 성서에 따르면, 하나님은 동생 아벨을 죽인 형 카인에게 말씀했다. “어찌하여 너는 격노하느냐, 어찌하여 네 안색이 그리 변하느냐” 결국 카인은 동생을 죽인 죄의식으로 고통스럽게 살아간다. ‘카인의 표’란 피로 원수를 갚던 사람들에게 경고의 신호일 수도 있다. 분노하며 복수하려면 일곱 배에 달하는 복수를 당할 수도 있다는 각오를 가져야 한다. 기독교는 분노에 관해 이런 메시지를 전함으로, 좀 더 합리적이고 정의로는 사회를 만들어 낼 수 있었는가? 기독교는 분노하는 신이라는 개념 아래 자연스럽게 지옥도 가르친다. 그러나 과연 분노(심판)하시는 신과 지옥이라는 개념은 사람들을 정의롭게 살도록 할 수 있을까? 한편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는 분노를 어떻게 이용했는가?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분노를 에너지로 이루어졌다. 자본주의도 나름대로 분노를 이용하며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확실히 저자의 주장처럼 인류 역사는 ‘분노’라는 에너지에 의해 움직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 표지에도 있는 구호 같은 문구가 강렬하게 다가온다. “기억하라. 분노하라 그리고 행동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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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슬로터다이크 저의 『분노는 세상을 어떻게 지배했는가』 를 읽고 내 자신에게 '분노'라는 말은 익숙하지가 않는 단어이다. 내 자신이 A형이면서 내성적이다 보니 남들이 보았을 때 너무 얌전하며 숫기가 없다고 한다. 그리고 사적 자리에서도 자리만 지키며 먼저 나서지 않는 모습에 내 자신이 보기에도 조금은 너무 한 듯한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이 사람들의 분노가 이 세상을 어떻게 지배해왔는지에 대한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어 너무 좋은 시간이었다. 책은 세계적인 역사 속에서의 공부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바로 올해 2017년 우리의 광장은 촛불의 분노로 가득 찬 모습으로 결국 대통령을 탄핵으로 끌어내려고, 새로운 정권으로 교체하는 쾌거를 이루게 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점이다. 이것도 분노의 힘이라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분노'를 통해서 역사를 재해석하면서 이 분노가 대중들을 어떻게 이끌었으며, 어떻게 이용했는지 등에 대한 신의 대리인이나 영웅들, 권력자들이나 혁명가들의 모습을 통해서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철학자인 페터 슬로터다이크가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 등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유럽 독일 칼스루에 조형대학에서 철학과 미학을 가르치면서 이 의미 있는 글을 써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한다. 책에 소개하고 있는 각 시대 단계별 내용들에서 많은 것들을 새롭게 느낄 수가 있어 좋았다.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영웅들의 분노, 대중을 선동하는 집단적 맹신의 분노, 유일신교의 지속적인 지배를 위한 신의 분노, 근대 전체주의의 조직적으로 활용한 분노, 현대 자본주의의 경제적 이익으로서의 분노, 그리고 이슬람의 복수를 위한 분노의 표출까지 역사의 중심에는 바로 나름대로 '분노'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역사의 발전과 변화의 중심에는 바로 '분노'가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 할 수 있다. 책 제목처럼 "분노는 세상을 어떻게 지배했는가" 기억하라, 분노하라 그리고 행동하라. 너무 가슴으로 파고든다. 역사는 분노와 함께 시작되었고, 역사의 발전과 변화의 중심에 반드시 분노가 있다. 내 자신도 지금까지 너무 생소했던 단어인 '분노'가 이 책을 읽음으로 해서 아주 중요하게 부각되었다는 자체만으로도 아주 중요한 독서시간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갖고 있었던 일반적인 역사 상식도 많이 새로운 역사 흐름의 모습으로 바뀔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래서 독서는 좋은 것이다. 특히 나라는 개인과 한국이라는 단편적인 좁은 지역을 탈피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바로 적절한 독서시간을 확보한다는 교훈을 얻었다는 점도 이 책을 통해서이다. 오래 만에 유럽 철학 에세이를 통해서 안목이 넓어진 흐뭇한 내 자신을 바라보면서 더욱 더 성장해 가리라 다짐해본다. 좋은 책의 일독을 강력 권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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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분노는 세상을 어떻게 지배했는가]라는 책을 통해서 '분노'의 감정과 상태의 정도에 대해서 고민해보는 시간,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인정하고 대처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이것저것 알아가는 시간을 가져볼 수 있어서 더욱 특별한 독서시간을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이 책 [분노는 세상을 어떻게 지배했는가]는 '기억하라, 분노하라 그리고 행동하라'의 메시지들을 마주하고 음미하게 해주는 터라 더욱 특별한 느낌을 준다고 할 수 있어요~
이 책으로 인해서 '분노'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을 마주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또한 '역사에 관해서도 살펴보고 색다른 해석을 찾아볼 수 있었다는 점이 더욱 특별한 독서시간으로 마주할 수 있게 해주었네요~
이 책을 통해서 나를 지배하고 힘겹게 하고 있던 '분노'라는 키워드에 대해서 이모저모로 곱씹어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는 점도 개인적으로 가장 눈여겨보게 되고 마음에 오래오래 남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분노'와 관련된 역사적인 변화들을 마주하는 시간은 그 자체로 특별한 것 같아요! '분노'가 개인 뿐만 아니라 대중들을 어떻게 선동할 수 있고 더불어 이러한 힘으로 어떻게 역사 또한 변화되고 전개되는가를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을 선물 받은 기분이랍니다.
역사를 통해서 '분노'란 진정 필요한 것이며, 이 '분노'야말로 진정한 용기를 가져다주는 힘이 됨은 물론이고, 성취의 윤활유가 되어줄 수 있음에 대해서 제가 존경하는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일찍이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말한 바 있기에 더욱 이 '분노'에 대해서 관심을 지니고 있었는데, 상반기에 걸친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우리 사회의 대중적 '분노'가 그대로 노출되고 또한 냉랭한 상태로 오래 지속되었기에 더욱 이 책에 몰입하여 보게 되었습니다.
나의 '분노', 여러 사람들이 또한 공통적으로 느끼고 분출하는 '분노'에 대해서 제대로 바라보고 인정하는 것, 그것 자체를 음미하는 것이 우선적을 필요함에 대해서 이 책을 통해서 들여다볼 수 있어서 그 동안 막연하게 '분노'라는 것을 숨기거나 혹은 회피해야 내가 힘겹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에 대해서 생각의 전환을 이루어볼 수 있어서 더욱 좋았습니다. '분노'에 대한 생각들과 정리의 시간이 정말 필요하다는 것까지 모두 이 책을 통해서 마주할 수 있어서 나의 감정 인정하고 들여다보기의 귀한 시간을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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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전쟁이 없시 평화로웠던 기간은 극히 짧다고 합니다. 글로 기록되기 시작된 이후부터 보더라도 가까운 나라들끼리는 수시로 전쟁을 벌였으며 먼 원정의 길을 떠나기도 했네요. 현대에 들어서도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충돌, 발칸 반도의 인종 청소, 그리고 중동의 IS 로 인한 내전 등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렇게 계속 전쟁이 일어나는 원인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이러한 과정이 역사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요. '분노는 세상을 어떻게 지배했는가' 는 이러한 충돌의 원인을 분노로 보고 있습니다. 인간을 성선설에 근거해서 설명하기도, 성악설에 근거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본성이 어떠하든 사회라는 틀 안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으므로 자연히 충돌도 발생합니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일들이 인간의 분노에서 촉발된 것이며, 이 분노가 세상을 지배해 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과거 로마 제국 시절에는 노예를 데려다 검투사로 양성해 인간끼리 또는 인간과 동물이 서로 죽고 죽이는 것을 오락처럼 보면서 즐겼습니다. 전쟁에서 패해 잡혔거나 노예였던 사람들은 잘못 끌려와서 말 그대로 개죽음을 당할 수 밖에 없었네요. 이러한 현실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분노라는 감정을 나누면서 결국은 폭발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 과정에서 죄없는 수많은 시민, 검투사들이 죽었네요.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들의 생각을 주장하면서 세상의 인식을 바꾸는데 영향을 미쳤습니다. 사회에 대한 분노 뿐만 아니라 종교에 대한 분노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만이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선민 사상이 있었지만 바빌론의 노예로 끌려가게 되자 신이 왜 선택받은 자신들에게 고난을 주는지 이해할 수 없으며 신을 부정하기도 합니다. 또 세상의 종말인 분노의 날에는 모든 것이 파괴되지만 자신들만이 신에게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 다른 민족 사람들은 모두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종교의 차이가 수천년동안 수많은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네요. 이밖에도 오랜 기간동안 지배층에 억눌려 있다가 공산당이 집권한 이후 구 지배층을 배척하면서 많은 지식인들이 죽고 문화재가 파괴된 중국의 문화혁명, 루마니아, 알바니아 등 가난한 나라에서 나타난 폰지 유형의 금융 사기에 대한 약탈, 과거 프랑스의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건너온 사람들의 2세들이 주축이 되어 벌인 파리의 폭동 등 사회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사회에 불만을 표출하는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경제나 정치가 후퇴하기도 하고 인명 사고도 있었지만 분노가 쌓이고 쌓이면서 폭발한 것에 사회의 이목을 끌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들도 생겨났네요.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가 확산되고 IT 기술 또한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부의 양극화는 점점 심해지고 계층간 이동이 거의 불가능해지면서 많은 사회 불안의 요소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책에서 읽은 것처럼 이러한 일들이 계속 쌓인다면 사회의 부조리를 해결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역사 속의 사례들도 많아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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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라, 분노하라 그리고 행동하라 분노를 넘어 그것을 행동으로 옮겨 새롭게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는 대한민국의 행보가 이 책의 제목을 접하면서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분노라는 단어가 좋은 어감은 아니지만 분노가 모여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갔던 세계사를 돌아보았을 때 <분노는 세상을 어떻게 지배했는가>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다가설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솔직히 '분노의 시작' 인 100 페이지에 이르는 서문은 깊이 빠져들 수 없어 읽는 내내 힘이 들었는데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의 첫머리가 '분노'로 시작하는 것으로 시작하며 그리스 역사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분노는 영웅과 직결되는 예를 읽으면서 전하려고하는 '분노'의 의미가 무엇을 이야기하려함인지 의구심과 혼란스러움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티모스'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데 단어를 접할 때마다 낯설게 다가오는 용어로 인해 내용의 흐름에 몰입하기가 힘들었었다. 그런 이유로 책을 덮을 때쯤엔 오히려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건지 잊지 않을정도로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중반을 넘어갈 때까지 '티모스'라는 단어가 주는 겉도는 듯한 흐름때문에 몰입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렵게 다가왔던 긴 서문을 통과하면 '분노'와 연관 된 경제학을 만날 수 있다. 은행과 경제와 정치와 종교적인 이야기가 분노와 연관되어져 있는 이야기를 만나면서 그동안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읽으며 느꼈던 분노의 정체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다. 소모적인 감정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되어졌던 분노란 것은 그것을 이성적으로 잘 다스려야하는 것이 인간의 특권이라는 인식으로 알지 못했던 분노에 대한 인식을 접할 때마다 이성적이지 못한 방식이라는 다소 죄책스럽고 유난스럽다는 생각으로 눌러놨었는데 이 책을 통해 그런 분노감에 대한 시원한 역설을 마주할 수 있었다. 뭔가 생각해보지 않았던 분노감에 대한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글들은 다른 의미에서는 강하게 다가오는 불편한 감정을 만날 수밖에 없었는데 뭔가 시원하긴하지만 그럼에도 불편하고 그렇다고 내용을 온전히 다 이해했다고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난해한 상황에 빠져들게 되는 상황을 되풀이하며 만났기에 근래에 읽었던 책 중에서는 단연 어렵고 난해하게 다가왔던 책임은 맞았던 것 같다. 격한 감정에 빠지지 않을까 내심 걱정했던 우려와는 달리 그동안 몰입할 수 있었던 감정에 호소한 분노와는 다른 냉철한 분노를 마주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지만 책을 읽는 내내 힘겨웠던지라 이 책을 한번에 읽고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분명 분노에 대한 다른 시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책이지만 조만간 다시 읽어봐야 할 것 같다. |